가입 전부터 계속되었던 선전과 달리,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애초의 약속과 정반대로, 국가는 전쟁 발발 직후부터 아무런 재판 절차 없이 이들에 대한 학살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학살은, 전선에서 황급히 후퇴하느라 군과 경찰이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었던 서울과 경기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자행되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보도연맹원들이 적에게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이승만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의 안보를 위해 불가피한 ‘예방 학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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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처형을 위해 동원된 군인과 경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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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형 명령 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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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준비중인 보도연맹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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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을 기다리는 보도연맹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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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장으로 끌려오는 보도연맹원들
예방 학살이 꼭 필요한 정당한 일이었을까? 보도연맹 가입자의 일부가 전쟁 초기에 북한군 점령 지역에서 우익 인사를 처형하는데 협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전쟁 발발 당일에 개성에서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에게 협력해 우익 인사들을 살해하는데 가담한 일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기존의 의구심을 강화하는데 큰 자극제가 되었다. 그러나 좌익 가운데 핵심 세력은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남한을 점령한 북한군도 보도연맹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보도연맹 간부직에 있던 사람들은 처단의 대상이 되었고, 보도연맹에 가입한 옛 남로당원들은 정(正) 당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남한 정부와 북한 정부 모두에게서 의심받는 존재였던 것이다. 또한 전쟁과 후퇴라는 상황의 긴박함을 감안하더라도, 국가가 국가와 사회의 이름으로 보호를 약속했던 국민을 아무런 재판도 없이 처형한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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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기 형무소 수감자들이 트럭에 실려 학살현장으로 끌려가는 모습.
전쟁 초기의 보도연맹원들의 행동을 보더라도, 공권력에 의한 예방 학살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전쟁이 발발하자, 자신들에 대해 남한 정부가 갖고 있던 의구심을 잘 알고 있던 보도연맹원들은 지역별로 비상대책기구를 구성하고서, 성금과 위문품을 군에 보내거나 자진해서 군에 입대하거나 신문 지면에 충성의 맹세를 발표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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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군에서 발굴된 110여명의 처형자 유해들. 이 가운데 10대 청소년으로 추정되는 유해들도 발굴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자구 행위도 다가오는 엄청난 비극을 막지는 못했다. 전선이 붕괴되자, 경찰이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하고 후퇴하던 군이 이들을 처형하는 군경 합동 작전이 도처에서 이루어졌다. 군과 경찰에게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많았던 영남 일대에서는, 보도연맹원 소집 통보가 비극의 시작이었다. 매주 한 차례씩의 정례 소집과 수시 소집이 이미 여러 차례 있어왔기 때문에, 막상 예비 검속을 위한 소집이 이루어졌을 때도 보도연맹원 가운데 다수는 학살을 예견하지 못한 채 순순히 소집에 응했다. 소집이 여의치 않은 지역에서는 경찰이나 군이 직접 보도연맹원 검거에 나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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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골령골 학살 사건 당시 미군에 의해 촬영된 군인과 경찰의 총살 직전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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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들. 위 왼쪽 차량 적재함에 '논산읍' 글자가 보인다. 대전형무소 정치범들이 끌어내려지고 있다. 위 오른쪽 길게 파놓은 구덩이 둔덕 위 재소자들을 엎드리게 하고 등 뒤에서 헌병들이 총을 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래 사진 민간 청년단원들이 구덩이의 시신들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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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이 학살당하는 장면
대대적인 작전에 따라 검속된 사람은 몇 명이었고, 그 가운데 얼마가 희생되었을까? 불충분한 자료 때문에, 33만 명에 이르렀던 보도연맹원 가운데 학살의 희생자가 된 사람이 실제로 몇 명이었는지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 일부 학자들과 유가족들은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수를 20만 명 이상으로 보고있지만, 다른 학자들은 3만 명을 넘는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 많게 잡아도 10만 명을 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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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들은 각 군 단위에서 적게는 100여 명, 많게는 1000여 명 정도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살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지역은 부산을 포함한 경남 지역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살은 평택 이남의 전 지역에서 널리 이루어졌지만, 전쟁 발발 2주 만에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가는 바람에 다른 지역에서는 학살을 위한 시간이 충분하게 확보되지 않았던 반면, 부산 경남 지역은 시간적 여유가 많았던 것이 그 이유였다. 게다가 중부 지방에서 보도연맹원 일부가 북한군에 동조해 우익 인사 처형에 앞장섰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부산 경남 지역 보도연맹원의 피해를 증폭시키는 화근이 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보도연맹에 대한 군과 경찰의 경계심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수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학살 과정도 매우 잔혹했다. 마산, 통영, 거제, 부산 등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에서는 수장 방법이 널리 행해졌다. 손발이 묶인 채 수장된 시신 중 일부는 대한해협을 건너 쓰시마 섬까지 흘러가 그곳 주민들에 의해 건져졌다. 경북 경산의 폐(廢) 코발트 광산에서 이루어진 학살도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끔찍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로 여겨진다. 유가족들은 이 광산 지역 일대에 3,500여 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다고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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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시 평산동 폐코발트 광산에서 발굴된 보도연맹원들의 유골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그들만의 희생으로 끝나지 않았다. 희생자 유족 일부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북한군이 들어온 뒤에 공무원과 경찰, 우익 인사에 대한 보복 학살에 나섰다. 이것은 다시 국군의 수복 이후 우익과 경찰에 의해 유가족들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불러왔다. 보도연맹 학살은 전쟁 동안에 일어난 끔찍한 연쇄 학살의 출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