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대입구역 1번 출입구~봉천고개(살피재)] 구간
탐방로 도중의
국사봉길 안내문
봉천고개(살피재)에 있는
이정표
[봉천고개~국사봉 중학교] 구간 탐방로 도중의
구암정
[봉천고개~국사봉 중학교] 구간 탐방로 도중의
역도 체육관
[국사봉 터널~국사봉 정상] 구간 탐방로 도중의
이정표
[국사봉 터널~국사봉 정상] 구간 탐방로 도중의
능고개와 아차고개에 얽힌 설화에 관한
안내문
[국사봉 터널~국사봉 정상] 구간 탐방로
[국사봉 터널~국사봉 정상] 구간 탐방로 도중의
세종대왕의 큰 형인 양녕대군에 관한
이야기
국사봉 북쪽 기슭에 있는
양녕대군 이제 묘역(讓寧大君 李禔 墓域)
시대 | 조선 |
문화재 지정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 |
성격 | 사당, 묘 |
유형 | 유적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양녕로 167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221-8 |
분야 | 역사/조선시대사 |
요약 :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조선전기 제3대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사당과 묘소. 시도유형문화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 관악산의 지맥인 국사봉 북쪽 기슭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해 있다.
묘역은 11,888평에 건평 9평인 사당을 비롯한 3동의 건물과 묘 1기로 구성되어 있다. 1972년 8월 3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고, 재단법인 지덕사(至德祠)에서 관리하고 있다.
지덕사는 앞툇마루가 놓인 3칸의 사당을 중심으로 전면 마당 좌우측에 제사당 서고 및 제기고를 두었다. 마당 전면에는 삼문을 두고 담장을 둘러 외부와 구분하고 있다.
사당의 뒤편에 양녕대군과 정경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를 합장한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장명등과 묘비 및 문인석이 좌우에 2기씩 서 있다. 양녕대군은 유언으로 호화로운 예장을 받지 말고 묘비와 상석을 만들지 말라 했는데 7대손 김만(金曼)과 8대손 김성항(金性恒)이 묘소 앞에 석물을 세웠다 한다.
하지만 그 때 세운 묘비가 1910년 경술국치 전날인 8월 28일 밤 난데없이 벼락소리와 함께 갈라졌다고 한다. 현재의 묘비는 191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사당 안에는 세조 어제(御製)의 금자현액(金字懸額), 허목(許穆)의 지덕사기(至德祠記), 정조 어제 지덕사기, 양녕대군이 친필로 쓴 소동파(蘇東坡)의 후적벽부(後赤壁賦)·팔곡병풍 목각판 및 대군의 필적인 숭례문(崇禮門) 탑본 등이 보관되어 있다.
지덕사는 1675년(숙종 1) 양녕대군의 외손인 우의정 허목의 건의로 남대문 밖 서부 도저동에 세웠다. 이 때 건축된 지덕사는 남관왕묘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현재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일대다. 다음해 건물이 완성되어 지덕사라 이름하고 사적을 지어 현판을 써서 걸었다.
지덕이란 이름은『논어』권8 태백편(太白篇)의 “태백은 지덕이다.”고 칭한 공자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이 고사는 주나라 대왕 때에 상(商)이 약해지고 주가 날로 강해질 때의 일이다.
대왕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다. 대왕은 셋째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계승시켜 천하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장자 태백과 차자 우중(虞中)이 형만(荊蠻)의 땅으로 몸을 숨겨 계력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동생 충녕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자 방탕과 탁불(托佛)한 것을 고사와 비교해서 양녕의 행동을 태백의 지덕으로 명명한 것이다.
1757년(영조 33) 영조는 양녕의 후손인 이지광(李趾光)을 불러 초임직을 주고 퇴락한 사당을 보수하게 했으며, 직접 제문을 짓고 치제하였다. 1789년(정조 13) 정조는 사액했고, 직접 지덕사기를 지어 현판에 써서 걸도록 하였다. 191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 및 이건하였다.
국사봉(179m) 정상에서
이성수
[국사봉은
관악구 봉천동과 동작구 상도동의 경계선에 위치한
봉우리다.]
국사봉(179m) 정상에 있는
삼각점
[국사봉 정상~당곡 초교] 구간 탐방로 도중의
사찰인 사자암에 관한
안내문
무학대사가 창건한 절로 전해지는
사자암
무학대사가 창건한 절로 전해지는
사자암의
일주문
사자암 안내문
사자암 극락보전
[사자암~당곡 초교] 구간 탐방로 도중의
동작충효길 종합 안내도
당곡 초교
보라매 병원
보라매 공원 동문
보라매 공원
안내도
[보라매공원 부지는 공군사관학교로 쓰여오다가
1985년12월 서울시에서 인수,
1986년 5월에 복지시설 위주의 시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보라매공원 내에 있는
김마리아 여사 동상
김마리아(金瑪利亞)
시대 | 근대 |
출생 | 1891년(고종 28) |
사망 | 1944년 |
경력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
유형 | 인물 |
직업 | 독립운동가, 교육자 |
성별 | 여 |
분야 | 역사/근대사 |
본관 | 광산 |
요약 :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회장, 상해애국부인회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교육자.
목차
접기
1. 개설
2. 생애 및 활동사항
3. 상훈과 추모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 아버지는 김윤방(金允邦), 어머니는 김몽은(金蒙恩)이다. 아버지는 한학자로, 서상륜(徐相崙)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5년 아버지가 세운 소래초등학교에 입학하여 4년 만에 졸업하고, 집에서 여공(女功: 길쌈 등 여자들의 일)을 수업하며 한문공부에 열중하였다. 1895년에 아버지를, 1904년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대학공부까지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1905년 서울로 올라와 노백린(盧伯麟)·김규식(金奎植)·유동열(柳東悅)·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 등 애국지사들의 출입이 잦은 삼촌 김필순(金弼淳)의 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906년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했다가 교파 관계(敎派關係)로 곧 연동여학교(延東女學校: 지금의 정신여자중학교)로 전학, 1910년에 졸업하였다. 그 뒤 3년 동안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를 지냈고, 1913년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전근한 뒤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긴조여학교[錦城女學校]와 히로시마여학교에서 1년간 일어와 영어를 수학한 뒤, 1915년 동경여자학원 대학예비과에 입학하였다. 1918년 말경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 황에스터[黃愛施德] 등과 구국동지가 되었다. 1919년 2·8독립운동에 가담, 활약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바치겠다는 굳은 의지를 세운 뒤 스스로 졸업을 포기하고,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베껴 변장한 일본 옷띠인 오비 속에 숨기고 차경신(車敬信) 등과 2월 15일 부산으로 들어왔다.
귀국 후 대구·광주·서울·황해도 일대에서 독립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여성계에서도 조직적 궐기를 서둘러야 한다며 3·1운동 사전준비운동에 진력하였다. 황해도 봉산에서의 활약을 마치고 3월 5일 서울 모교를 찾아갔다가 일본 형사에게 붙잡혔다. 이 때 모진 고문으로 상악골축농증에 걸려 평생을 고생하였다.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그 해 8월 5일 석방되었다. 석방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여성항일운동을 북돋우고자 기존의 애국부인회를 바탕으로 하여, 그 해 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다시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절대 독립을 위한 독립투쟁에 있어 중요한 임무를 맡기 위한 준비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일에 힘을 쏟던 중 그 해 11월 말 애국부인회 관계자들과 다시 붙잡혔다. 김마리아는 심문을 받으면서 “한국인이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연호는 모른다.”는 등 확고한 자주독립정신을 보였다.
3년형의 판결을 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서울 성북동 보문암(普門庵)에서 요양하다 변장으로 인천을 탈출,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도 상해애국부인회(上海愛國婦人會)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수학을 계속하기 위해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6월 미국으로 가 1924년 9월 파크대학 문학부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28년에는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 석사학위를 받고, 1930년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한편, 이곳에서 황에스터·박인덕(朴仁德) 등 8명의 옛 동지들을 만나 근화회(槿花會: 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 회장으로 추대된 뒤 재미 한국인의 애국정신을 북돋우고 일제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서방 국가에 널리 알렸다.
그 뒤 원산에 있는 마르타 윌슨신학교에서 신학강의만을 한다는 조건으로 1935년 귀국, 이후 여생을 기독교전도사업과 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순국하였는데, 김마리아의 유언에 따라 시체는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렸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보라매공원 내에 있는
공군 전투기 전시장
보라매공원 내에 있는
호수
보라매공원 내에 있는
공군에서 지은 사찰
보라매공원 옆 와우산 정상에 있는
배드민턴장
2022년 01월 23일(일요일) [관악구 국사봉(179m) & 동작구 보라매 공원] 탐방기
산행코스 : [ 지하철 7호선 숭실대입구역 1번 출입구 - 봉천고개(살피재) - 국사봉 중학교 - 국사봉 터널 윗길 - 국사봉 정상 -
사자암 - 당곡초등학교 - 보라매병원 - 보라매공원 동문 - 보라매 공원 - 공원 옆 와우산 정상에 있는 배드민턴장 -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 4번 출입구 ] (약 7km)
일시 : 2022년 01월 23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2시간6분 소요)
12:31~13:32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원흥역을 출발해서
고속터미널역에서 7호선으로 환승하여 서울 동작구 상도동 514 번지에 있는 7호선 숭실대입구역으로 이동
[1시간1분 소요]
13:32~13:43 서울 동작구 상도동 514 번지에 있는 7호선 숭실대입구역에서 산행 출발하여
숭실대입구역 1번 출구로 나와서 봉천고개(살피재)로 이동
13:43~14:08 국사봉 동쪽 가지능선길을 따라서 국사봉 중학교로 이동
14:08~14:22 국사봉 터널 윗길을 거쳐서 국사봉(179m) 정상으로 이동
14:22~14:29 물을 마시면서 휴식
14:29~14:37 무학대사가 창건한 절로 전해지는 사자암으로 이동
14:37~14:44 예불
14:44~14:57 당곡 초등학교로 이동
14:57~15:05 보라매 병원으로 이동
15:05~15:07 보라매 공원 동문으로 이동
15:07~15:27 보라매 공원 탐방 후 공원 옆 와우산 정상에 있는 배드민턴장으로 이동
15:27~15:38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643-1 번지에 있는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 4번 출구로 이동하여 산행 완료
15:38~15:41 2호선 신대방역에서 을지로3가역으로 가는 지하철 승차 대기
15:41~16:51 2호선 신대방역에서 출발하여 을지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하여 원흥역으로 이동 [1시간10분 소요]
서울 [관악구 국사봉(179m) & 동작구 보라매 공원] 지도
(숭실대입구역~신대방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