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픔의 성모님(Stabat Mater)
자녀들로 인해 큰 슬픔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세상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식을 자신보다 앞세운 부모님들의 비통함은 평생 씻지 못할 정도로 하늘을 찌릅니다. 뿐만 아닙니다. 평생 큰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 현대 의학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불치병 자녀들을 매일 바라보는 부모님들...
어찌 보면 오늘은 그런 부모님들을 성모님께서 위로하시는 날입니다. 성모님도 아드님으로 인해 크나큰 슬픔을 겪으셨던 고통의 성모님이셨습니다.
만일 자녀와 관련해서 만사형통했던 성모님, 자녀로 인해 아무런 괴로움도 겪지 않으셨던 성모님이라면 오늘 힘겨워하는 우리 부모들을 조금도 위로해주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인류 역사상 자녀로 인해 가장 큰 괴로움과 슬픔을 겪으셨던 분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깊은 슬픔과 끝도 없는 고통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기에 공감과 동병상린의 마음을 나눌 수 있고 그분 위로의 말씀이 설득력을 지니며 존재 자체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에게 있어 예수님은 정말이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통해 이 세상의 빛을 본 예수님이셨습니다. 서른 해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며 애지중지 정성껏 양육한 아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모님은 아들 안에서 무죄한 어린 양,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사람들은 무죄한 아들을 참혹한 십자가형에 처합니다. 자신의 분신, 아니 자신의 전부인 그 아들이 지금 눈앞에서 끔찍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해 높이 매달린 처참한 몰골의 아들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비명을 내지르는데, 그 비명 소리가 하늘을 찌릅니다.
그 십자가 밑에 성모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며 그저 무력하게 서셨습니다. 혹시라도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내가 대신 형벌을 받았으면...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다만 성모님께서 끝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까지 혼절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는 일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남아있으면서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마지막 순간에는 아들과 함께 죽는 일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어쩌면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아들과 함께 영적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비록 성모님께서 계속해서 육적으로 숨 쉬며 살아계셨지만 아들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세상에서 죽으셨습니다.
13~14세기 한 교부(어떤 학자는 인노센트 3세 교황, 또 다른 사람은 보나벤투라 사제)가 이토록 깊은 성모님의 슬픔을 20절로 된 성시(聖詩)로 구성했는데 이를 우리는 슬픔의 성모님(Stabat Mater)라고 부릅니다.
이 성시는 십자가 밑에 묵묵히 서 계시는 성모님의 고통을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성시는 1727년경 가톨릭 교회 전례에 도입되면서 오늘 날도 매년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때 마다 부속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녀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부모님들에게 매일 이 성시 ‘슬픔의 성모님’을 권합니다. 매일 자녀를 위한 기도 끝에 이 성시를 덧붙여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계속 바치다보면 어느새 성모님의 한없는 위로가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올 것입니다.
1. 아들예수 높이달린 십자곁에 성모서서 비통하게 우시네.
2. 섧고설운 슬픔고통 성모성심 칼에찔려 참혹하게 뚫렸네.
3. 독생성자 수난하니 여인중에 복된성모 애간장이 다녹네.
4. 아들수난 보는성모 맘저미는 아픔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5. 예수모친 이런고통 지켜보는 우리죄인 누가울지 않으리?
6. 십자가의 아들보며 함께받는 성모고통 누가슬퍼 않으리?
7. 우리죄로 채찍모욕 당하시는 아들예수 성모슬피 보시네.
8. 기진하여 버려진채 죽어가는 아들보고 애처로이 우시네.
9. 사랑의샘 동정성모 저희들도 슬퍼하며 함께울게 하소서.
10. 그리스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제마음에 불이타게 하소서.
11.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맘속에 주님상처 깊이새겨 주소서.
12. 저를위해 상처입고 수난하신 주님고통 제게나눠 주소서.
13. 사는동안 십자고통 성모님과 아파하며 같이울게 하소서.
14. 십자곁에 저도서서 성모님과 한맘으로 슬피울게 하소서.
15. 동정중의 동정이신 성모님의 크신슬픔 저도울게 하소서.
16. 주님상처 깊이새겨 그리스도 수난죽음 지고가게 하소서.
17. 저희들도 아들상처 십자가위 흘린피로 흠뻑젖게 하소서.
18. 동정성모 심판날에 영원형벌 불속에서 저를지켜 주소서.
19. 그리스도 수난공로 십자가의 은총으로 보호하여 주소서.
20. 이몸죽어 제영혼이 천국영광 주예수님 만나뵙게 하소서.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14.9.15 월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순례27일차), 히브5,7-9 요한19,25-27
십자가의 길(2)
저에게 안식년은 거룩한 보속기간입니다.
하여 순례를 택했고, 국내 순교성지 순례에 이은 산티야고 순례길입니다.
어제 순례26일차는 레온에서 산 마르틴까지 24.5km를 6시부터 12시까지 걸었습니다.
나무 그늘 없는 도로가의 평범한 길을 끝없이 걸었지만 덥지 않은 날씨라 기분은 상쾌했습니다.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로 어제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연장선 상에 있어
강론 제목 역시 어제에 이어 '십자가의 길(2)'로 정했습니다.
어제 한국 교포와의 만남이 참 반가워 소개합니다.
제겐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에서 만난 시몬의 경우와 흡사합니다.
레온 도시를 떠날 때는 정말 해방감을 정말 느꼈습니다.
사람이 만든 도시보다 하느님 친히 만드신 대자연 안에서 심신이 더욱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레온을 벗어나 약 2시간 지나 8시, 빠(bar)가 나타났고 한 젊은이가
"커피나 한 잔 하고 가십시오." 불렀습니다.
놀랍게도 31년 동안 레온에서 태권도장 사범을 하는 분(조성준)으로,
운동을 한 분이라 59세의 나이와는 달리 청년처럼 보였습니다.
레온에 6명 정도의 교민이 사는 데 운좋게 한 분을 만난 것입니다.
마침 주일이라 교외로 골프를 치러 가는 중 빠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스페인 도착 후 현지에 대한 풍부한 정보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친절하고 유쾌한, 용감한 한국인 이었습니다.
28세에 홀홀단신으로 이역만리 스페인 레온에 와
59세 될 때까지 태권도장을 하며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그 생활력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소심하고 심각했던 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았던 삶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아무런 신앙도 없이 이렇게 선하게 살 수도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습니다.
우리보다 세배 정도는 큰 스페인이요,
인구는 4600만으로 1년에 이 인구만큼 관광객이 다녀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관광 수입이 참 대단한데
정치인이 정치를 못해 경제가 어려운 편이지만 국민은 순박하고 친절하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땅은 넓어 농산물은 풍부한데 돈은 되지 않으며
거기에다 한국처럼 아프리카 노동자들이 대거 와서 일하고
스페인 젊은이들 역시 한국처럼 힘든 일은 하지 않고 도시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밤에 양계장에서 닭잡는 일은 월 2600유로의 막대한 수입이지만 닭이 부리로 손을 막 쪼기에
스페인이 아닌 모로코 노동자들이 한다는 재미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도시화와 더불어 농촌의 폐허화는 세계적 추세 같습니다만 스페인은 그 속도가 완만한듯 했습니다.
오랫만에 가진 유쾌하고 즐거웠던 커피 한 잔의 여유로운 만남의 시간이었고
마침 대전에서 왔다는 여대생과 넷이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곳곳에서 자주 만나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모두가 용감해 보였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닌 것도 가벼운, 욕심 없는 젊은이들이라 그리 두려움 없이 용감한 것 같습니다.
고통의 십자가의 길만은 아닙니다.
도처에서 새로운 만남을 통해 위안과 힘을, 깨달음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중 동병상련의 순례자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삶은 순종입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 순종을 배우셨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각자의 십자가의 여정에 충실함이
바로 주님께 순종함이며 구원의 근원인 주님과 일치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이냐시오 도반과 저는 미사와 기도의 힘으로, 또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걸으니
피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소통의 불편이 큰 애로 사항이나 이제는 그런대로 잘 적응합니다.
주님 역시 십자가의 길, 곳곳에서 마음 착한 이들을 만나 큰 힘과 위로를 받습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의 길, 마지막 지점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는 도반들입니다.
네 여인 중 특히 성모님의 고통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하여 복음 환호송은 '죽음 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신 분'이라 고백합니다.
피에타의 성모님이 생각납니다.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오늘날의 무수한 또 하나의 성모인 어머니들을 위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고통의 성모 마리아뿐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순례여정 중에 있는 애제자 요한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당부이십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듯이 우리 역시 늘 주님과 함께 성몬님을 모시고 삽니다.
새삼 아드님과 어머님의 사랑이 깊이 하나로 결속시키는 묵주기도가 얼마나 은혜로운지 깨닫습니다.
어제 역시 5시간 순례길을 걸으며 끊임없이 바친 묵주기도입니다.
주님은 성모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
제1독서 히브 5,7-9
복음 요한 19,25-27
언젠가 눈이 아파서 병원에 갔습니다. 따끔따끔 아파서 도저히 생활하는데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가 마침 새벽마다 수영장을 다닐 때라 혹시 눈병이 아닌가 싶었지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제 눈을 이리저리 살피시더니 어이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속눈썹이 박혔네요.”
그리고 속눈썹 한 개를 빼주셨습니다.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
우리 부모들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지요. 눈에 속눈썹 하나만 들어가도 아프고 불편한데, 자식이 눈에 들어간다면 어떨까요? 그런데 그 사랑이 너무나도 크기에 눈에 넣어야 한다면 넣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위해 자기희생을 늘 감수하십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는 이 세상의 부모님들이십니다.
성모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하느님의 아드님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낳은 자식이기에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더욱 더 특별한 아들이고, 원죄 없으시며 사랑 가득하신 분이기에 더 큰 사랑을 간직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앞둡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땅속에 묻히게 되는데,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게 되면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하죠. 성모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목격하셨고,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괴로웠고 고통스러웠을까요?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이 고통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순간이지만, 성모님께서는 이를 부정하지도 않고 또 하느님 아버지께 불평불만을 던지지도 않습니다. 그냥 묵묵히 당신의 자그마한 몸으로 다 받아들이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셨듯이 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셨던 것입니다.
너무나 큰 고통을 힘들게 이겨내신 성모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고통과 시련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조건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또한 불평불만으로 한풀이 하듯 살아서도 안 됩니다. 항상 최고의 것을 그리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굳은 믿음으로 주님께 철저히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가 될 때, 십자가의 죽음 이후 부활을 목격했던 성모님처럼 우리도 큰 영광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생에 걸쳐 몰두할 수 있는 일을 당신은 갖고 있는가. 당신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그 대답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이나모리 가즈오).
---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2014. 9. 15. 월)(요한 19,25-27)
<어머니의 고통>
우리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날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고 있고,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성모님의 마음은 하나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모님의 십자가는 하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성모님의 고통이 더 컸을 것 같습니다.
아들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심정이 얼마나 참혹한 고통인지는
직접 겪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온 인류를 위해서 겪으신 일입니다.
그러면 성모님의 고통은?
단순히 아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고통이기만 할까?
만일에 성모님이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분이었다면,
또 예수님께서 겪으시는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이었다면,
또 '자기 아들만' 걱정하는 평범한 어머니였다면,
그랬다면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말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축일을 지낼 이유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어머니와 제자를 향해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고 말씀하시고,
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요한 19,26-27)
성모님은 모든 사람의 어머니이신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확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선언하셔서
성모님이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아들의 고통을 함께 겪으신 일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의 어머니로서
인류를 위해서 수난을 당하신 메시아의 고통을
함께 겪으신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고통도 예수님처럼 온 인류를 위해서 겪으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모님의 십자가를
함께 묵상하면서 기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성모님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일이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1)'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성모님께서 혼인 잔치의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걱정하신 것은
오지랖이 넓어서가 아닙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 그것은 신랑에게는 몹시 난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걱정하신 것은 바로 신랑의 딱한 처지였습니다.
중요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간에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갖고,
당신의 일처럼 걱정하시는 것, 그것이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모두 수행하셨고, 그래서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어졌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9,30).
그러나 우리 쪽에서 보면 십자가의 은총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는 일은
각 개인의 숙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동시에 성모님의 십자가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성모님께서 여기저기 발현하실 때마다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것은
아직도 인간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 때문에 겪어야 하는
당신의 고통이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또는 남의 집 자식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자식만 안전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현실에서 자주 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때가 있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흔히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는 말을 하는데,
신앙인의 관점에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무관심과 이기심은 예수님의 적(사탄)입니다.
사랑의 반대쪽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반대쪽에 있는 것과 같고,
따라서 예수님의 적(사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곳저곳에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오지랖이 넓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이고,
성모님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을 정치적인 행동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오해해서 반대하거나 막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 실천을 정치적인 행동으로 오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그것을 막는 것은 예수님의 적이 되는 일입니다.
지금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서 혼자 울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 남이야 울든 말든 혼자서만 행복을 누리면서
자신이 천국에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만 행복한 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그리고 남의 고통을 외면한 혼자만의 행복은 사실은 행복이 아닙니다.
사탄의 쾌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 십자가의 순종을 배우다 >
임금이 한 신하를 불러 이상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우물물을 길어 저기 밑 빠진 독에 가득히 채우시오.”
밑 빠진 독에 물이 채워질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는 오직 임금의 명령만 생각하면서 밤을 낮 삼아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결국 우물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물 바닥에 무엇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덩어리였습니다. 신하는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임금님, 용서하소서. 독에 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서 이 금덩이를 건졌나이다.”
임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겠다고 우물이 바닥나도록 수고했구려. 그대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요. 그 금덩이는 그렇게 순종하는 신하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오.”
하느님이 사울의 왕권을 빼앗아 다윗에게 넘기신 이유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입니다. 사울이 전리품을 남겨놓은 것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라고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개미가 인간을 위해 무엇을 열심히 준비해봐야 인간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귀한 보석을 개미집에다 맡겨 놓았다면 그 귀한 보석을 지니고 있는 개미집은 인간에게 매우 특별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안에 들어온 보속과 같은 ‘말씀을 잘 간직하고 따르는 것(순종)’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풍습에 먼저 남자는 자신의 집에서 일가친척과 일주일간 잔치를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내의 집으로 신부를 만나러 갑니다. 이것을 장가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다시 남편의 집으로 오는데 이것을 시집간다고 합니다. 아무튼 신부는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깨어 기다리고 있어야합니다. 신부는 신랑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처녀들과 함께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그런데 신랑은 신부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신부는 신랑이 미리 보낸 혼수품으로 몸을 장식하고 있어야합니다. 자신이 준 옷과 장신구를 하고 있는 처녀가 자신의 신부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옷과 다른 장신구를 하고 있다면 신랑의 신뢰는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말씀을 잘 간직해야합니다. 말씀을 잘 듣고 간직한다는 말이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예수님 또한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아드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었습니다. 아드님은 죽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며 당신 뜻을 십자가에 못 박아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당신 말씀을 잘 간직한 아드님의 청을 아버지는 무엇이든 다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아드님은 당신 순종으로 인간의 구원을 청하여 세상에 가져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이란 바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순명함으로써 하와의 불순종을 기워 갚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만 순종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성모님도 순종을 위해 당신 영혼이 칼에 찔리는 아픔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 순종은 없습니다.
하루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지휘관이 그날의 전투 상황에 대해 장교들과 함께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이 물었습니다. 어느 군인이 그 날 가장 탁월한 군인이었는지 생각들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어느 장교는 가장 탁월한 군인은 그 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군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장교들은 이 군인,저 군인 자기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지휘관은 말했습니다.
“아니오. 여러분 모두가 다 틀렸어요. 오늘 전장에서 최선의 군인은 적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퇴각 나팔 소리를 듣고 적을 치지 않고 팔을 내리고 나팔 소리대로 후퇴한 군인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오늘의 가장 고귀한 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자신을 버리는 행위이고 이 행위가 위에 계신 분을 가장 기쁘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존경심을 표현한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구해낼 수 있기 때문에 은총의 중재자가 됩니다. 성모님께서 바로 하느님께 순종하여 얼마나 큰 사랑을 받는 분이신가를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성모님이 청하면 하느님은 안 들어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당신을 죽여 ‘말씀’을 간직하여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매일 십자가에 못 박는 순종을 배워야만 합니다. 순종이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
성모님의 고통을 거울삼아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 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이제 모든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모든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이제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의 잉태를 예고 받지만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시대상황으로 볼 때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루가1,38). 저는 감히 이 순명을 감히 아름다운 기도요, 순교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한동안, 약혼한 요셉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이라고 오해를 받으셨습니다(마태1,19).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 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누우실 한 평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구유에서 해산을 해야 했고(루가2,7), 또한 어린 아기를 안고 이집트로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율법에 따라 출산 후 40일만에 정결례를 거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하면서 시므온의 예언을 접하게 되었는데 “품에 안긴 아기가 많은 사람들의 반대 받는 표징이 되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가2,34-35).이라는 고통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실현을 30년 이상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축제 때에는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건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여 “이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루가2,41-52) 그 구원의 때를 기다리셔야 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사실을 알렸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2,4) 라고 외면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시며 평정을 잃지 않으셨고 오히려 주님께 순종하며 일꾼들에게 순종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일찍 남편 요셉을 잃고 홀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했거늘 아들도 집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 버려졌습니다. 어느 날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았으나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3,33-35).라는 말을 흘려들어야 했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새로운 자녀관계를 맺어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끝내는 피에 엉긴 아들을 무릎에 눕혀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부활의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 뒤늦게 알아야 했던 어머니는 인간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통에 묻혀버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셨습니다. 성모님에게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께 온전히 희생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루카1,45.) 당신 앞에 펼쳐지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흔들림이 없이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나의 믿음의 현주소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교부 푀멘은 말합니다.“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 시련과 역경 앞에서 성모님의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성모통고 신심은 14세기 초에 나타났으며 복음서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신심은 처음에 예수께서 올리브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는 장면에서부터 수난 전체로 묵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성모 칠고로 발전되었다. 또한 '성모 칠고' 신심이 보편화되면서 점차 수많은 묵상과 기도문 그리고 시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심을 더욱 고취시켰다.
복음서에 근거를 둔 '성모 칠고'는 다음과 같다.
1.시메온의 예언 (루가 2,34-35)
2.이집트로 피난가심 (마태 2,13-21)
3.삼일 동안 예수를 잃으심 (루가 2,41-50)
4.‘해골 터’라는 골고타로 오르심 (요한 19, 17)
5.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 (요한 19,18-30)
6.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심 (요한 19,38)
7.예수, 무덤에 묻히심 (요한 19, 40-42)
@@@ 예수님의 수난이 곧 성모님의 고통이라 할 수 있다.
-----
오늘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리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지냅니다. 이날 미사에는 ‘복음 환호송’ 전에 ‘부속가’를 자유로이 바칠 수 있습니다. 이 부속가는 성모님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묵상과 그분의 슬픔에 함께하려는 간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부속가를 통하여 성모님께서 몸소 겪으신 고통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는 한편 그 고통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절절한 슬픔과 신앙을 담은, 중세의 어느 수도자의 기도였던 이 부속가는 많은 음악가에게 영감을 주어 뛰어난 곡을 여럿 낳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으로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요절한 이탈리아의 작곡가 페르골레지(1710-1736년)의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 슬픔의 성모)를 꼽을 수 있습니다.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로 20대 초반의 나이에 일약 당대 음악계의 주목을 끈 그는 이내 자신의 병마로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이 곡의 완성에 전념한 그에게 ‘스타바트 마테르’는 간절하고 진실한 마지막 기도 자체였습니다. 조촐한 현악 협주에 소프라노와 알토 두 사람의 목소리로 엮어진 이 곡에는 비애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절절한 간구가 배어 있습니다.
음악가이신 선배 신부님이 다른 음악가들과 사순 시기에 어떤 본당에서 이 곡을 연주하였을 때 나이 지긋한 분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을 보고 더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음악의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우리 가슴속 깊이 계시는, 세상 모든 자녀들의 고통을 아시고 함께하시는 성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이 그 눈물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고통에 함께하시며 위로해 주시고, 우리가 주님의 고통에 깊이 참여하도록 이끄십니다. 성모님에 대한 사랑의 의탁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주님께 온전히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