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사무엘하 19:1-8a
"1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2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3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4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5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6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7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8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내용분해 : A.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비탄과 백성들의 소요(1-4절)
1.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한다는 소식이 요압에게 전해짐(1절)
2.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슬퍼한다는 소식이 백성들에게 전해지자
그날의 승리가 오히려 백성들에게 슬픔과 회의를 안겨줌(2절)
3. 그리하여 그 날에 백성들이 마치 패전하여 도망이라도 하듯 슬며시 성으로 들어감(3절)
4. 다윗 왕이 얼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압살롬아, 내 아들아'를 연호하며 부르짖음(4절)
B. 다윗 왕을 향한 요압의 충언(5-7절)
1. 요압이 왕의 거처로 찾아가 간하기 시작함(5a절)
2. 왕께서 왕과 왕의 자녀와 왕비와 후궁들의 생명을 구한
신하들의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항변함(5b절)
3. 이는 왕께서 왕을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고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며
신하들을 멸시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함(6a절)
4. 오늘 압살롬이 살고 자신들이 죽었으면 오히려 왕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비통해함(6b절)
5. 이러지 말고 이제 나가서 신하들에게 위로의 말을 하라고 간함(7a절)
6.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오늘밤 왕의 곁에는 아무도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왕은 지금까지 당한 화보다 더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직언함(7b절)
C. 다윗의 성문 좌정과 승리 자축을 위한 백성들의 알현(8a절)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이렇게 새날을 허락해 주시고 우리에게 예배를 드릴수 있게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길 원하셨고, 그렇기에 오늘 이시간, 우리는 감사함으로 예배의 자리에 설수 있게 되어진줄 믿습니다. 우리 다 함께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십시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아침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사무엘하 19:1-8a절 말씀으로 압살롬의 죽음으로 비탄에 잠겨 있는 다윗을 향한 요압의 충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무엘하 제2부 11-20장은 제1부 1-10장에서 다룬 다윗의 성공 및 번영과 대조되는 다윗의 범죄와 그로 말미암아 다윗과 왕국에 밀어닥친 연속된 시련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19,20장에서는 다윗의 환궁과 세바의 반란 사건을 다룹니다. 이러한 제19,20장의 내용을 좀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19:1-8a은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 비탄에 잠겨 있는 다윗을 향해 요압이 국정에 소홀함이 없도록 충고하여 다시 안정을 찾게 한 사실을 보도합니다. 압살롬의 사망 소식을 들은 다윗은 그 슬픔을 가누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슬피 울부짖기만 하였던 것입니다(1-4절). 그러나 다윗의 상황을 십분 감안한다고 해도, 그가 슬픔에만 잠겨 있는 것은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왕으로서 옳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반역을 하였다가 죽임을 당한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그의 지나친 슬픔은 그를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운 병사들을 죄인처럼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다윗을 향한 요압의 충고(5-7절)는 시의 적절하였으며, 다윗은 요압의 충고를 받아들여, 다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문제는 해결되게 되었습니다(8a절).
19:8b-15은 다윗이 유다 지파 사람들의 요청 형식을 빌어 환궁길에 올랐음을 보도합니다. 여기에 보면 다윗은 자신의 환궁 문제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논의되고 있음을 알게 되자,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을 유다 지파에 파견하여 자신의 혈족인 유다 지파가 자신의 환궁에 적극 나서줄 것을 당부하고, 아마사에게는 군장을 삼을 것임을 밝히는 등, 유다 지파 사람들에 대하여 유화 정책을 폅니다(8a-13절). 그리하여 유다 지파가 다윗에게 환궁토록 기별을 보냄으로써, 다윗은 마침내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환궁길에 오르게 되어집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환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자신의 혈족인 유다 지파에만 의존하고, 나아가 자신을 반대하던 세력의 마음을 얻고, 요압을 견제하기 위하여 요압대신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기로 함으로써, 이후 세바의 반란 사건과 요압의 아마사 살해라는 큰 불상사를 불러오게 됩니다.
19:16-30은 다윗의 환궁길에 있었던 사건으로서 전날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도피중에 있을 때, 그를 저주했던 시므이에게 관용을 베푼 사실과 므비보셋을 만나, 그와 시바 사이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둘 다 포용한 사실에 대하여 보도합니다. 19:31-39은 마하나임에서부터 다른 두 사람과 더불어 다윗을 공궤하였던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다윗 환송과 바르실래에 대한 다윗의 보답에 대하여 보도합니다.
19:40-20:3은 다윗 환궁 절차 진행의 주도권을 둘러싼 유다 지파와 나머지 지파 사이의 분쟁 및 그로 말미암은 세바의 반란 발발과 환궁한 다윗의 압살롬과 동침한 후궁들에 대한 조치에 대하여 보도합니다. 19:9,10을 보면 다윗의 환궁에 대하여는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먼저 논의하였는데, 그러나 다윗의 환궁은 정작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다윗의 당부를 받은 유다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됩니다(1911-15). 이것은 당시 지파간에 알력이 그대로 상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매우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지파는 다윗의 환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앞으로 다윗 왕국에서도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다윗의 환궁에서 소외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왕국에서 주도권을 유다 지파에 빼앗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배제된 채, 유다 지파 단독으로 다윗 왕의 환궁이 추진되었음을 뒤늦게 알고 나아와 감정을 가지고 유다 지파를 향하여 항의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유다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는 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19:40-42). 그리고 그러한 분쟁은 급기야 세바의 반란으로까지 이어지게 됨으로써(20:1-3), 다윗 왕국은 다시 한번 큰 위기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20:4-13은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유다군의 출병과 요압의 아마사 살해에 대하여 보도합니다. 예루살렘으로 환궁한 다윗은 아마사를 불러, 그에게 유다군을 소집하여 출전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4절). 이는 다윗이 아마사를 군장으로 임명하였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런데 아마사는 군사들을 소집하러 가서 다윗이 정한 기간에 도착하지 못하는데(5절), 이에 다윗은 요압의 동생 아비새로 하여금 상비군을 이끌고 가서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는데, 요압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길거리에서 만난 아마사를 살해하고 다시 군권을 차지하게 됩니다(6-13절).
20:14-26은 세바의 반란 진압과 다윗의 행적 조직 정비에 대하여 보도하는데, 여기에 보면 세바의 난은 세바가 최후로 도피하여 있던 아벨성의 한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과의 면담을 통해 아벨성을 초토화하고 난을 진압하려고 하였던 요압의 작전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성읍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성이 보호된 채, 세바만 죽이는 것으로 평정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운다'는 교훈(잠14:1)을 실증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다윗은 세바의 반란이 진압되자, 국정의 쇄신을 위하여 행정 조직을 새롭게 정비하였는데, 본문 23-26절에 나오는 다윗의 행정 조직은 8:15-18에서 언급하고 있는 행정 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전쟁 포로 및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역을 관장할 감역관직을 신설하고, 그 자리에 아도니람을 임명하였다는 것과 대신에 다윗의 아들들이 아닌, 야일 사람 이라를 임명하였다는 점이 다릅니다.
이상 제19,20장의 본문을 전체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간의 수직적 관계에서는 물론, 인간과 인간끼리의 수직적 관계에서도, 완전한 일치와 화해는 오직 완전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한 후에 현안의 혼란을 수습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내면적인 일치와 화해에 최대의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에 적극 가담한 유다 지파를 설득하였고, 반란군의 군장이었던 아마사를 자신의 군장으로 삼는가 하면, 자신을 저주하였던 시므이와 자신을 속이고 므비보셋을 모함하여, 그 재산을 가로챈 시바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환궁 진행의 과정을 둘러싸고 유다 지파와 다른 이스라엘 지파간에 반목하고 분쟁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다시 반란이 발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인간간에도 완전한 일치와 화해가 불가능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간의 화해와 일치도 오직 완전한 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 할례당과 무할례당이 하나가 되게 하셨고, 가난한 자와 부자가 하나되게 하셨습니다(엡2:11-22). 오늘 우리가 속한 교회는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화해를 이룬 자들의 모임입니다. 오늘 이 세계, 이 사회는 다양한 이유로 찢기도 나뉘어 반목하고 질시하며 분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의 해소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진정한 일치와 화해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이 세계, 이 사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어 갈 때, 진정한 일치와 화해는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화평의 복음을 맡은 우리 성도들의 막중한 사명이 있기도 합니다(고후5:19).
다음으로 참된 지혜를 소유한 성도의 헌신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바의 반란과 그 반란을 진압하려는 요압의 계획 속에서 아벨성은 파멸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성은 그 성이 하나님의 기업임을 안 한 지혜로운 여인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인하여 참화를 면하였고 세바의 반란도 종식되었습니다. 이렇게 지혜러운 성도의 헌신은 생명과 평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또 평화를 가져 왔는지를! 오늘 이 세상은 멸망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고, 평화와 안식이 없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성도들의 헌신이 절실히 요구되어 집니다. 자, 이제 성도들은 지혜자를 부르는 이 시대적 소명에 응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의 자식이 반역을 하여 자기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는 사실처럼 슬픈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건 그것이 자신의 범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는 다윗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들은 다윗은 그 슬픔을 가누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슬피 울부짖기만 하였습니다(1-4절). 그러나 요압의 충고를 받아들여 다윗은 다시 왕으로서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요압이 다윗에게 충고하는 과정에서 다윗의 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압력을 행사하듯이 한 것은 아쉬운 점으로 남습니다. 따라서 훗날 다윗은 솔로몬에게 요압을 제거할 것을 당부하게 되는데, 요압이 안하무인격인 태도로 인해, 다윗이 크게 상심하였음은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한 대목에서도 나타납니다(3:39).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징계는 잠시 고통을 주나, 우리를 영원한 의로 인도해 준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받게 되어집니다.
오늘 본문 4절은 다윗이 얼굴을 가리우고 압살롬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장면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얼굴을 가리운다'는 것은 극한 슬픔과 수치를 감추어 보려는 행동으로(삼하15:30 ; 렘14:3), 이렇게 다윗이 얼굴을 가리고 소리내어 울었던 데에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먼저는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부모로서의 당연한 슬픔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12:10)으로 말미암아 결국 압살롬은 물론, 무고한 많은 사람들까지 피를 흘려야 했던데에 대한 심한 자책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다윗은 그토록 비탄과 고통을 느끼며 통곡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이러한 고통과 슬픔을 보며, 단지 하나님의 징계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후의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징계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시려는 데 그 근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더 나은 축복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깨끗게 하시는 손길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하늘의 춥곡으로까지 인도하는 이끄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의 작시자인 존 뉴턴(John Newton)은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와 시련을 가리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은혜로우시고 지혜 많으신 의사가 처방하신 약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 약이 필요하기에 처방하신 것이다. 그분은 그 약 사용의 빈도의 비율과 함량의 무게를 필요한 경우에 알맞게 조절하신다. 그러니 우리는 그의 기술을 전적으로 믿고 그의 처방에 대하여 감사하자."
그렇습니다.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를 받는 자에게 잠시 고통과 아픔을 안겨주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결국에는 풍성한 축복의 열매를 거두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잠시 곁길로 갈 때, 징계의 채찍을 드시나 반드시 이를 싸매어 주시고, 또한 이전의 모든 아픔을 모두 치유하고도 남을 만큼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이를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후에는 동일한 실수와 범죄에 빠지지 않고, 보다 성숙한 성도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시편 기자가 고백했던 것처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두란노아카데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