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꿈꾸웠던 나라
수감 중에 가족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들
박열(朴烈)의 일황(日皇) 저격
1925년 9월 일본 정부는 조선인 박열의 대역사건(大逆事件) 음모를 적발한 후 저간예심(豫審) 중에 있던 바, 이제 그 예심을 종결하고 대심원(大審院) 공판에 회부하였다고 발표함으로써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소위 대역 사건이란 일본 황실(皇室)에 관한 범죄로써 그들의 구 형법(舊刑法) 제73조에 의하여 극형에 처하게 마련돼 있었다. 즉 천황·황후·태황(太皇)·황태후·황태자·황태자비(皇太子妃) 등 천황의 직계 존속과 비속(卑屬) 누구에 대하여서든지 위해를 가했거나 위해를 가하려한 자는 사형에 처하되, 재판도 대심원(대법원 격)에서 단 한번만 하게끔 그 형법은 규정하고 있었다. 박열사건 이전에 이 조항을 적용하여 처벌한 예로써는 일본 사회주의 개척자이고 언론 저술가이던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 행덕추수(幸德秋水)와 그의 동지들 20여 명이 대역 음모를 꾸몄다고 1910년에 일망 타진을 당하고, 이듬해인 1911년에 처형된 사건이 있었고, 동경(東京) 대진재(大震災) 직후에 사상 계통과 행동 목적을 알 수 없는 그러나 유력한 집안 출신이라는 설이 있던 일본인 20대 청년 난파대조(難波大助)가 지금의 일본 천황 유인(裕仁)이 섭정(攝政)을 하고 있을 적에 밖에 나들이 할 일이 있어서 궁문(宮門)을 나와 차를 달리고 있는 것을 권총으로 저격 했던 소위 호지문 사건(虎之門事件)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형법 제73조의 적용을 받아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역 사건이란 신문 용어도 행덕 추수 사건 이래로 쓰여 졌었다.
당시 일본 신문도 검열이 심하여 박열의 음모 내용의 구체적인 것은 보도할 수가 없고, 소위 공판도 줄곧 방청 금지 비공개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길이 없었으나, 변호사 등의 입을 통하여 쉬쉬하며 전해진 바로는 1923년 9월에 지낼 예정이던 일본 황태자 결혼식을 기하여 일본 천황과 황태자를 한꺼번에 폭살하려는 목적으로 폭탄 입수를 계획하고 첫번엔 일본인 선원(船員) 송본정일(松本貞一)과 다음에는 의열단원(義烈團員) 김한(金翰)과 모의하였으나 모두 여의치 못하여 실패했고, 같은 해 5월 불령사(不逞社) 동지 김중한(金重漢)을 상해에 밀파하여 폭탄을 반입할 계획을 추진 중에, 그해 9월 동경 대진재가 나고 불령사 동지가 일체 검거를 당하여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 경과를 거슬러 올라가며 검토해 보면 처음에 동경(東京) 경시청(警視廳)은 박열과 그 동지들인 불령사가 무엇인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어떤 낌새를 눈치채고, 당시 언론·출판·결사·집회 등을 규제하는 소위 치안경찰법(治安警察法)에 걸어서 박열 등 불령사원 16명을 일제 검거하여 경찰 조사를 끝내고 검찰에 송치, 예심에 회부했다. 이것이 사건 발전의 제1단계였다. 그리고, 경시청의 이 검거는 이른바 관동(關東) 대진재(大震災)가 일어나기 직전인 1923년 8월 하순에 시작하여 진재 직후인 이듬해 9월 상순까지에 걸친 일이었다. 예심에서 사건을 진행하다 보니, 불령사가 비밀 결사라는 증거가 불충분하므로 이를 치안 경찰법을 적용해서 입건할 수는 없다 하는 판정이 나려져서, 이 부분은 일괄 면소(免訴)하는 동시에 박열·금자문자·김중한 등 세 사람을 제외한 일행은 이를 전원 석방했다. 그리고, 제외된 박열 등 세 사람은 이들이 폭탄 등 무기 입수를 획책하고 있었으니 만큼 그 사실을 따져봐야겠다고 별도 폭팔물(爆發物) 취체규칙(取締規則)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예심을 속행했다. 이것이 사건 발전의 제2단계 였다. 그리하여 예심을 또 진행하다 보니, 김중한은 박열로부터 폭탄 입수에 관하여 의뢰를 받았고 또 그것을 응락하기는 했으나 그 용도에 관하여서는 전연 아는 바 없고, 들은 바도 없다고 강경히 부인하니, 그는 폭발물 취체 규칙 위반죄로만 다스리게 하고, 박열과 금자문자는 그 폭탄의 용도가 황실에 대하여 위해(危害)를 가할 목적이었다고 추궁하면서 그들의 소위 형법 73조를 적용하겠다고 사건을 다시 분리하여 별도 예심을 진행하게 됐다. 이것이 사건 발전의 제3단계였다.
박열이나 금자문자도 처음에는 이 사실을 강경히 부인했다. 그리하여 예심은 지지부진했다. 그런데, 이때는 소위 관동 대진재를 당하여 동경 재주 우리 교포 대량 학살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나서 일제의 조선 통치 상에는 물론, 국제 여론 상에서도 일본은 대단히 궁지(窮地)에 함입하게 됐다. 그래서 조선 사람 중에 박열과 같은 불궤(不軌)의 무리가 있기 때문에 큰 재해로 말미암은 사회적 혼란을 틈타서 애국적인 일본인 대중을 자극하여 조선인 집단 살해와 같은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라고 구실 아닌 구실을 만들기 위해 박열·금자문자를 희생 제물(犧牲祭物)로 삼았던 것이라고 박열사건의 진상을 설명하게 되었다. 한편 불령사 사건에 연좌하였던 육홍균(陸洪均)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불령사 사건 관계의 예심 조사를 받을 적에 예심 판사는 박열의 행동 계획에 관하여 엇비슷하게 물어 보곤 했다 한다. 이로써 추측하건데 일행을 검거한 경시청은 처음부터 모종 힌트를 포착하고 있었던 모양 같다. 그렇더라도 예심에서는 물적 증거가 없으니 결국 박열의 자공(自供)을 얻어내야 할 터인데, 예심 판사 입송회청(立訟懷淸)은 고심 끝에 진재 때 조선인 학살 사건과 관련시켜 박열을 설득하기에 힘쓰고, 또 국법을 어겨 가면서까지 박열을 우대(優待)하였다가 나중에 소위 괴사진(怪寫眞) 사건과 내각 도괴에 이르는 사태로 발전했었다고 풀이하게끔 되었다. 단 이것이 예심 판사 일개인의 공명심(功名心)에서 나온 자의(恣意)였던지 아니면 상사의 지시에 따랐었던지는 그때도 지금도 밝혀낼 수가 없다.
이상과 같은 사건 발전의 세세한 경위에 관하여서는 이하에서 점차 구체적으로 기술 하려니와 실상 박열이 일본에 건너가서 민족 독립운동과 사회사상 운동 선상에서 활약 하다가 마침내 일황 폭살을 기도하게 되기까지의 그의 행적은 3.1 이후 우리나라 역사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즉, 3.1 대한민국정부를 거족적으로 치르고 나서 우리 국내에서는 문화 운동(文化運動)이라는 이름 밑에 일종의 대중 계몽(啓蒙)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국외 중심이었지마는 독립운동전선에서는 무력 항쟁(武力抗爭)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문화 운동의 급진적(急進的) 부면이 사회주의(社會主義) 사상 운동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단계를 반영한 것이 박열의 저간의 행적이었다. 이른바 박열사건의 진상을 말하기에 앞서 그 이전의 박열의 행적에 관해서 먼저 서술하는 소이다.
박열의 초명은 준식(準植)이며 일명 혁(爀)이라고도 했다. 그가 열(烈)을 이름하기는 그가 도동(渡東)하여 사회사상 운동을 전개하면서 행동 제일을 표방하며 일본말의 폭발을 뜻하는 폭렬(爆裂=바꾸레츠)을 상징하여 스스로 찬자(撰字)했던 것이라 한다. 그는 1902년 2월 3일 경북 문경군(聞慶郡) 문경면(聞慶面) 오천리(梧泉里)에서 박영수(朴英洙)의 제3자로 태어났었다. 그러나, 사정에 의하여 상주군(尙州郡) 화북면(化北面) 장암리(壯岩里)에 옮겨 살며 자랐기 때문에 그의 호적상 원적지는 상주로 되고, 전기 오천리에는 일족과 선영(先塋)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14세 때에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官立京城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여 18세 되던 3월에 3.1 독립운동의 일어나니, 거기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퇴학 처분을 받고 그해 10월에 동경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신문 배달을 하면서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 등에서 수학했다. 이 당시 일본 사회 운동의 선각자인 대삼 영(大杉榮) 등이 크게 활약하고 있던 때이므로 박열은 곧 그들과 교유하며 자기의 인생관(人生觀)·사회관(社會觀)을 형성했다. 당시 일본의 사회사상계는 범 사회주의(汎社會主義) 시대이고, 그러한 시대에 있어서 각국의 통례가 그러했던 바와 같이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이 지도적 위치에서 이끌고 나가더니만큼, 박열의 사회사상 형성도 아나키스트 대삼영의 영향을 많이 받았었다 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겠다. 그러나, 박열의 아나키즘과 대삼 영 내지 일본인 일반의 아나키즘 사이에는 그 내용상 큰 차이가 있었음을 면 할 수 없었다. 즉 당시 일본인들의 아나키즘은 일본 국가주의(國家主義)에 대한 정면 반대와 일본 천황제(天皇制)에 대한 정면 폐지론자(廢止論者)이었음에 반하여 박열의 아나키즘은 철저한 혁명적 민족주의(革命的 民族主義)가 그 바탕이었던 것이다. 박열은 민족이 민족을 지배하고 압박하며 착취함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그는 조선 민족의 완전 자주 독립을 주장하는 반제국주의자(反帝國主義者)였고 독립된 민족 사회 내부에서 압제와 착취를 부정하고 빈부 격차가 완전 타파되며 모든 사회 성원의 균등한 경제 생활을 실현하겠다는 의미에서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사회주의라 할지라도 소련(蘇聯)과 같은 독재체제(獨裁體制)는 이를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여 그는 처음부터 반공(反共)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일본인 행덕 추수가 최초의 대역 사건으로 당하고 대삼 영 부처가 동경 대진재 혼란 통에 반동 군벌(反動軍閥)의 마수에 의하여 피살되는 등 각각 생명을 잃은 것은 그들의 신념 때문에 바쳐진 자기 희생이었다면 박열의 일황 폭살을 기도하였다는 소위 박열 대역 사건은 한 민족 해방을 위해 바쳐진 그의 희생이었다.
박열은 1921년 5월 동경에서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했다. 이것은 3.1 이후에 있어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적 사상 단체였다. 여기에는 박열 외에 백무(白武)·김약수(金若水)·김종범(金鍾範)·조봉암(曺奉岩) 등 후일 공산주의적 분파(分派)로 갈라져 나아간 인물들을 망라하고 있었던 사실로 보아 이른바 범사회주의 클럽 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흑도회에서도 기관지 ≪흑도≫ (일본문)를 월간으로 발간했다. 그러나 흑도회는 곧 분파 작용을 일으켜서 김종범 등은 동경에 북성회(北星會)를 설립하고 그 기관 ≪척후대(斥候隊)≫를 발간하였으며, 조봉암은 서울에 화요회(火曜會)를 만들었다. 한편 박열은 흑도회를 개편하여 반공적(反共的)인 아나키스트만을 규합해서 흑우회(黑友會)를 동경에 설립하였으며, 얼마 있다가 김중한·이강하(李康厦) 등 10여 명은 서울에 흑노회(黑勞會)를 조직했다. 박열은 흑도회 개편과 동시에 그 기관지이던 ≪흑도≫도 폐간하고, 별도 잡지형의 월간지 ‘불령 선인(不逞鮮人)’을 발간해 냈다. 이 불령 선인이란 말은 당시 일제가 조선 사람 독립운동자를 모욕하기 위하여 경찰이 쓰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못된 조선 놈이란 뜻이 있었다. 박열은 그러한 욕칭(辱稱)을 잡지 제호에 역용(逆用)해 썼던 것이다. 검열 당국이 그 제호 사용을 금지하니 ‘후도이 센징’으로 바꿨다. ≪후도이≫라는 일본말 속어(俗語)는 역시 ≪못된 놈≫이란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이 제호도 금지하니 ≪현사회(現社會)≫로 고쳤다. 이것은 박과 그 동지들이 동경 대진재를 만나 일제 검거를 당할 때까지 지속했다. 현사회 지(誌)의 내용은 현사회 제도에 대한 신랄한 공격과 일제의 조선 식민 통치에 대한 격렬한 반대 논설로 가득 찼었고, 또 독립운동과 사회사상 운동전선(戰線) 동향에 관한 보도 기사를 곁들인 것이었다.
당시 이러한 출판물을 검열 당국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출판물이 인쇄소에서 떨어져 나오자 마자 곧 발매 금지(發賣禁止)·몰수(沒收) 처분을 받았다. 그러므로 박열 측에서는 언제나 잡지 인쇄 공장을 절대 비밀에 붙여둬야 했었고 몰수를 당하드라도 될 수 있는대로 경찰의 장악에서 벗어나는 부수가 많게하여 비밀 반포를 하게끔 버티고 경찰에서는 될 수 있는대로 그런 탈출구를 막아보려고 힘쓰는 등, 잡지 출간기가 되면 언제나 양자 간에는 전쟁 상태가 벌어지곤 했다. 또 소위 내검열(內檢閱)이라 하여 인쇄에 붙이기 전에 교정쇄(校正刷)를 검열 당국에 미리 제출하여 저촉되는 개소를 지적받아 지형(紙型) 동판에서 깎아내고 인쇄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것은 발매 금지 몰수를 면하는 편익은 있으나 박열의 ‘현사회’지로 말하면 전문 삭제를 하여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이런 것을 인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다만 깎으라는 개소를 제대로 깎지 않고 비밀 발행을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위험성이 동반하는 고된 전쟁이었다. 이러한 악조건 밑에서 박열은 잡지 발행을 계속했다. 그는 출판 비용 조달과 잡지 보급에 관한 용무 등 주로 대외 활동을 담당했었고, 금자문자는 잡지 편집과 원고 쓰기 등 내부 일을 맡아서 했다. 그녀는 뛰어나는 문필가였다. 박열의 이름으로 발표된 논설 기사는 대부분이 그녀가 대필(代筆)하였던 것이라 한다. 박열은 이 당시 그 뒤의 사건 발생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일, 또 한 가지 일을 했다. 그것은 곧 비밀 결사=불령사(不逞社)의 조직이었다. 당시는 아직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의 제정이 없었고, 결사·집회 관계의 규제(規制)에는 명치(明治) 시대부터 있어 오는 치안경찰법(治安警察法)이 있을 뿐이었다. 이것을 후일의 ‘치안유지법’에 비하면 거의 경법(輕犯) 처벌 규칙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박열은 잡지 발행 사업도 그렇게 힘이 들고 기타 집회와 단체 운동에도 제한이 하도 많으니, 애여 ‘치안 경찰법’의 존재 같은 것은 무시하고 반일(反日) 행동 단체로서의 ‘불령사’를 세웠던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사원을 일제히 검거하게 된 일제의 구실이었거니와 잡지 제호로 쓰기에 두 번씩이나 금지된 ‘불령사’을 굳하여 단체 칭호에 썼었다는 점에 역시 비밀은 깃들어 있었다 하겠다.
당시 박열과 금자문자는 벌써 동서(同棲)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적의 ≪현사회≫ 지상에서 그녀는 자주 박문자(朴文子)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박의 아내임을 스스로 공언하였다 하려니와 당시 동지 사회에서도 그들의 내연 관계를 공인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극히 간고했다. 잡지 발간회를 조달하고, 또 생활비도 마련하여야 하니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박순천(朴順天)의 회고담에 의하면 박열은 순천보다 네 살 아래였으므로 순천을 누이라고 부르며 자주 찾아 다니고 늘 ‘군자금(軍資金)’이라면서 돈을 꾸어갔다. 당시 경응 대학(慶應大學) 이재과(理財科)에 재학하던 변희용(卞熙瑢)은 박열의 흑도회원이었고 아직 순천과는 미혼중(未婚中)이었다. 회용이 순천에게 구애(求愛)하는 의미도 있었겠지마는 순천의 생일 선물로 당시 12원(圓)이나 하는 값비싼 책이던 국민경제강화(國民經濟講話)를 사준 일이 있었다. 박열은 군자금을 청구하러 왔다가 현금이 없다고 하면 그 책을 빌어다가 전당포에 맡기고 5원을 변통해서 쓰고 뒤에 다시 찾아다 돌려 주곤 하기가 일쑤였다 한다.
그런데, 금자문자는 일본 국적을 가졌으나 실상 조선서 자라난 아주 불우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박열과 동갑인 1902년 어머니 금자성녀(金子姓女)의 사생자(私生子)로 이 세상에 태어났었다 이사실은 그 어머니가 일본 광도현(廣島縣) 안예군(安藝郡) 음호정(音戶町)에서 전 순사 좌백문일(佐伯文一)과 술집 영업을 하면서 문자를 포태했었는데 문자가 아직 출산되기 이전에 두 사람은 헤어졌기 때문에 사생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외가집에서 나서 어머니 성을 따라 ‘금자문자’라 이름하고 자랐으나, 네 살에 이르기까지 호적에 들지 못하고 있다가 여섯 살 적에야 어머니 친정인 일본 산리현(山梨縣) 동산리군(東山梨郡) 취방촌(諏訪村) 산구(杣口)의 금자 가(家)에 이모(姨母)가 난 자식이라고 가탁(假託)하고 입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달리 개가하였기 때문에 문자는 이붓 아비 밑에서 천더기로 무척 고생하며 자라다가, 그녀가 아홉살 적에 그 외숙이 조선 이민을 오게 되니 그를 따라 처음에 김천(金泉)에 와 살다가 나중에 경부선(京釜線) 부강역(芙江驛)전에 옳겨 살았다. 열한 살에 비로소 일본인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에 입학하여 글자 쓰기와 글 읽기를 배웠다. 천성이 총명한 그녀에게는 이제 별천지가 열리었다. 즉 그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 외에 신문·잡지 등을 탐독하여 사회 물정과 세상 환경에 관한 지식을 흡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 그녀의 외숙은 약포(藥舖)라는 간판 밑에서 아편 잠매(阿片潛賣)를 전업하고 있으니 문자로써는 참을 수 없다 하는 터에, 외숙과 외숙모는 무슨 기집애가 가사일 돕기에는 정신 없이 책만 들고 앉아 있다고 욕설을 퍼부으며 볶아대니, 문자는 이 악마의 소굴 같은 데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다 결심하고, 1920년 4월 12일 그 집을 도망쳐 나와 부산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문자 당년 19세요, 3.1운동 이듬해이니 그녀는 조선이 일제의 폭정에 항거하여 거족적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그 열렬한 모습을 현지에서 실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자가 대판(大阪)까지 왔을 때에 여비가 딱 떨어져서 그녀의 새로운 고난이 시작됐다. 신문 팔이를 하고, 남의 집 처마 끝에서 노숙하며, 때로는 끼니를 걸르면서 겨우 동경까지 도착했다. 동경서도 얼마 동안 그 식으로 지내다가 어떤 요식점(料食店)에 고용되어 오전 중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정칙 영어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여기서 신산초대(新山初代)를 만났다. 후일 불령사원이 된 이 신산초대는 문자보다 조금 언니였다 한다. 두 여성은 의기 상통하여 서로 토론하고 연구하던 끝에 당시 일본 사상계에 세력을 펴고 있던 사회주의에 공명하게 되었고, 문자는 박열을 알게 되었다. 문자는 총명하고 정의감(正義感)에 강하며 또 문재가 있었다. 그녀는 일제가 조선에서 범하고 있는 죄악적 정책과 그 행동에 관해 현지에서 실지 목도하며 증오를 금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박열이 일제에 항거하여 제일선에서 투쟁한다 할 때에 곧 공감이 갔던 것이다. 그녀가 박열에게 대하여 얼마나 기대하며 존경했었던가는 ‘만일 조선에 박열과 같이 열렬한 투사가 30명만 있다면 조선 독립의 당장 전취(戰取)는 물론, 조선 민족은 참말 전세계를 제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에피소우드를 갖고 짐작이 간다 하겠다.
박열이 흑도회를 조직하고 ≪헌사회≫ 등 기관 잡지를 발행하며 한창 활동 중이던 1922년 7월 일본 신석현(新潟縣) 탄광에서 조선인 노동자 근 백여 명을 살상했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노동시장(勞動市場)이 아직 완전 자유화되지 못하고 전근대적(前近代的) 잔재가 남아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신석현 그 탄광에는 소위 감옥방제도(監獄房制度)라는 것이 남아 있어서 외부에서 노동자들을 감언이설로 유인하여 광산 노동 판에 끌어들인 후, 그 광산이 사설한 감옥방에 그 노동자들을 강제 수용하고, 저임금(低賃金)·장시간 기타 극한적인 악조건 하에서 혹사하다가 만일 탈출 도망하려는 자가 있으면 용서 없이 체포하여 구타하며 혹 사살(射殺)까지 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에 당시 일본으로 거의 무작정 도항(渡航)해 갔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걸려들어서 사실상의 노예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가, 집단 탈출하려는 것을 감시대(監視臺)가 발견하고 사격을 가하여 백여 명의 사상자가 나고, 아직도 적지 않은 수가 억류당해 있다는 내용의 사건이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기는 구사 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 당사자가 이 어마어마한 ‘노동 지옥’의 실상을 폭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박열은 곧 당시 동경 있는 조선인유학생회 간부들과 연락하여 신석현(新潟縣) 조선인노동자학대사건(朝鮮勞動者虐待事件) 진상조사단(眞相調査團)을 구성한 후 조사단을 이끌고 현지에 급행하는 한편, 동경과 대판(大阪) 등 일본 국내 중요 도시에서 규탄 연설회(糾彈演說會)를 열었다. 우리 국내에서도 민간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전 민족을 격분시켰다. 진상조사단에서는 서울서도 연설회를 열고저 하였으나 경찰의 금지로 부득이했다.
이와 같이 국내외의 여론이 환기되니 일본 정부에서도 방치할 수 만은 없어서 결국 이 사건이 계기로 일본의 전 근대적 노동 감옥방 제도가 폐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만 신석현 뿐만 아니라 북해도(北海道)와 화태(樺太-지금의 사할린)에도 마찬가지의 감옥방 제도가 있다는 사실이 그 뒤 일본 언론 기관에 의하여 떠들썩하게 보도되니, 여기서의 전근대적 유제(遺制)들도 일소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신석현 사건은 일본 노동시장의 근대화를 위하여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조선 통치 정책의 맹점(盲點)과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즉,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통치 10년이 지나지 못해서 우리 민족 대중의 생활은 점점 궁핍화하여 농민의 다수가 남·북 만주 각지에 이주유랑(移住流浪)하고, 국내에서는 화전민(火田民)이 부쩍 늘어나고, 일본에 도항하는 노동자가 격증하였다. 이 도항 노동자는 거리 관계상 삼남(三南) 출신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은 거의 전원이 일본말에 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조선 옷차림으로 어떤 사람은 상투를 틀고 갓쓴대로 무작정 건너 갔었다. 따라서 거기서 직업을 변변히 얻어 잡을 수 없고 옥외(屋外) 토목 공사(土木工事) 판에서 날품팔이를 하다가 신석현 탄광과 같은 감옥방 노예 노동에 휩쓸려 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석현 사건을 문제삼아 박열 등이 맹열한 활동을 하였음은, 또한 일제의 조선 통치가 우리 민족사회의 맨 밑바닥에 가져온 궁핍화 현상에 대하여 공세(功勢)를 취한 것이 된다. 이때 이래로 박열의 성가가 일본과 우리 국내에서 크게 선전되었음은 결코 이유 없지 않았다 하겠다.
이 당시 박열은 또한 본장 제2절에서 이미 언급하여 둔 바와 같이 총독부에서 세운 아부충가(阿部充家)가 뻗혀 오는 회유의 손길에 걸려들어 그로부터 학자금(學資金)을 얻어 쓰려는 우리 유학생 중 타락 분자의 발생을 극력 경계하고, 또 발견 되는대로 이를 실력 제지(實力制止) 했다. 그러다가 국내에서 소위 사기 공산당(詐欺共産黨) 사건이란 것이 생겨서 그 관련자의 한 사람인 장모(長某)가 국내에서 좌익계 청년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미국에 공부 간다고 동경에 들린 것을 박열은 그의 뒤를 밟아 횡빈(橫濱)까지 따라가서 실력 행사를 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이던 유광렬(柳光烈)의 회고담에 의하면 실상 장 모는 이 사건에서 억울하게 당하였다 한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면 사건의 발단은 이동휘(李東輝)가 혁명 러시아에 교섭하여 조선 독립운동자금 원조를 한다고 당시 노화(露貨) 40만 루불에 해당하는 금괴(金塊)를 받아다가 그 중 5만원을 국내 공작비로 장에게 보낸 것을 장은 전액을 최 모(崔某)에게 넘겨 주었더니, 그 뒤 이 자금의 거처(去處)에 관하여 말썽이 난 다음에야 최는 돈을, 대여 민족 대표 중 한사람이던 박희도(朴熙道)를 사장으로 하고 동아일보 논설 위원이던 김명식(金明植)이 주관하는 사상 잡지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설립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 박열이 입수한 정보는 국내에 들어온 자금액은 20만 원, 그것을 장이 총독부와 짜고 전액 착복 하였으며 장이 미국가서 쓸 학자금도 실상은 그 돈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부정행위를 그냥 묵과할 수 없다 함이 당시 박열의 입장이었다. 그는 사회사상상의 계열(系列) 관계를 따지기 이전에 민족을 대신하여 부정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응징에 나섰던 것이다. 1922년 4월 중의 일이었다.
1923년 9월 1일 상오 11시 58분 일본 동경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일본의 관동(關東) 지방을 휩쓴 이 대지진은 삽시간에 동경 횡빈(橫濱), 삼포반도(三浦半島) 전역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지진 자체가 입힌 파괴도 컸으나 그 직후에 도처에서 일기 시작한 화재로 동양 제일을 뽐내던 동경은 가옥의 3분의 2가 도괴, 또는 불타버리고 불과 18시간만에 초토화하고 말았다. 동경에서만도 17만 4천여 명이 사망했으며, 당시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데다가 지진으로 수도물이 끊어져 불길을 잡을 수가 없었다. 특히, 본소구(本所區) 육군(陸軍) 피복창(被服廠)에서 일어난 참상은 이루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다. 불길을 피해 피복창의 넓은 마당에 몰려든 피난민들은 사방에서 포위해 들어오는 불꽃과 연기속에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을 이루었고, 여기서 만도 3만 2천여 명이 죽었다.
이렇게 엄청난 천재를 당한 당시 일본인들을 처음에는 그저 놀라고 비탄할 따름이었으나 어디서인지 모르게 ‘사회주의자와 조선인들이 방화(放火)했다’ ‘불령 선인(不逞鮮人)들이 혼란을 틈타서 습격해 온다.’ ‘조선놈들이 부녀자를 능욕하고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등의 유언 비어(流言蜚語)가 퍼지기 시작하자 ‘군중 심리적인 자극을 받은 일본인들의 분노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일본인들은 군·경·민할 것 없이 일본도(刀)·대창(竹槍)·몽둥이 등 온갖 흉기를 동원 초토화한 거리를 수천 명씩 몰려 다니면서 조선 사람과 사회주의자를 색출해 가지고는 무차별 학살을 감행했다. 이것이 관동 대진재 조선인 학살 사건이요, 심천구(深川區) 구호(龜戶)에서의 사회주의자 집단 살해 사건이었다.
완전히 이성(理性)을 잃고 미친듯이 날뛰는 이때 일본인들은 나중엔 머리뒤가 납작한 사람만 보면 ‘센징’(조선놈)이라고 규정, 손을 댔었기 때문에 일본인 중에서도 조선 사람으로 오인되어 피살되는 사례까지 생겼다. 전기 사회주의자들이 집단 살해되었다는 구호경찰서 관내에서 만도 3백 80명의 조선 사람들이 학살됐다. 9월 2일에는 기병(騎兵) 1개 중대(中隊)가 연병장(練兵場)에 수용되어 있는 조선 사람을 처음엔 총으로 쏘아 죽이다가 총성 때문에 인근 사람들이 놀란다고 해서 나중엔 칼로 베어 죽였는데 그 중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라 태아가 울음을 터뜨리자 그 태아마저 찔러 죽이더라고 한 목격자가 후에 전했다. 또 선교정(船橋町)에서는 군인이 호송해 가는 38명의 조선 노동자를 소위 자경단원(自警團員) 수백 명이 대창·몽둥이·일본도·갈고리 등을 들고 습격, 마구 찔러 죽이고 땅에 꿇어앉아 살려달라고 비는 것도 겨우 어린이 1명만 빼놓고는 한사람 남김없이 학살해서 길바닥에 버렸다. 그들은 시체를 물속에 던지기도 했는데, 우전천(隅田川) 영대교(永代橋) 밑으로는 1천 2백∼3백 구의 손발이 꽁꽁 묶인 조선 사람 시체가 떠내려 왔다고 한다. 그 우전천에서 끌어 올린 조선 부인 시체 하나는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었다. 등에 한 어린이를 업고 가슴과 양 팔에는 두 어린이씩 모두 다섯 아이와 엉켜 죽어 있더라고 일본인 목격자 누군가가 말했다고 전한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일본 정부는 계엄령(戒嚴令)을 펴고 조선 사람들을 여러 군데에 집결시켜 보호하는 척 했으나, 미쳐난 일본인 군중들은 그 집결소를 찾아다니며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당시 일본 군부의 악질 분자와 우익 반동 단체는 우리 교포 학살 외에 저들 용어로써 ‘사회주의자 사냥’이라는 것을 감행했다. 그것이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소위 ‘구호사건’이요, 또 대삼영 부처(大杉榮夫妻) 학살 사건이었다. 구호는 동경의 공장 지대요, 빈민촌(貧民村) 지구인 심천구(深川區)의 일부분 이었다. 이러한 지대였으니 만큼 사회주의자 노동조합 운동자들이 많이 살았고, 또 우리 교포들도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반동들이 발동하여 사회주의자라고 지목 받던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잡아 죽였다. 혹 조선인 학살에 동조하기를 꺼려하는 보통 일본 사람에겐 ‘너도 사회주의자로구나’ 하며, 죽이고 조선 사람은 모두 사회주의자라 인정하며 죽이는 등 그야말로 옥석구분(玉石俱焚) 격의 참변이었다.
조선인 대학살의 풍문이 우리 국내에 퍼져 들어 올 것을 두려워한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유언비어(流言蜚語) 취체령(取締令)을 재빨리 우리 국내에서도 실시했다. 그리고 당시 총독 재등실(齋藤實)은 9월 21일 께인데도 지금까지로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조선인 피해자는 겨우 2명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잠꼬대 같은 수작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가 바로 ‘문화 정치’를 표방하고 내임했던 일본 총독이었다. 저들이 얼마나 비양심적이며, 기만적이었던가 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관동 대진재, 조선인 대학살, 사회주의자 사냥, 이러한 북새통에 박열과 그의 불령사 동지들 일행 16명이 동경 경시청에 검거되었다. 사건 관련자 중 한 사람이던 육흥균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그 이전에 고향인 경북 선산군(善山郡)에 돌아와 휴가 중 추석(秋夕)을 맞이하고 있을 적에 경찰이 덮쳐 들어 조선옷을 입은채 잡혔다 한다. 그것이 바로 8월 28일이었다. 경찰관의 호송을 받으며 부산서 배를 타고 문사(門司)에 내리니 거기에는 벌써 경시청 형사들이 와서 기다리다가 호송을 인계했는데, 그때 보니 김 중한도 꼭 자기와 같은 꼴(조선옷 차림)로 잡혀 오고 있었다. 김 중한도 그 이전에 고향인 평남 용강군(龍岡郡)에 돌아가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보면 불령사의 검거는 관동 대진재 직전에 시작되었었음이 확실하다. 이 사실은 일행에게 오히려 다행하였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일행 중 전원은 ‘조선인 학살’ 또는 ‘사회주외자 사냥’ 어느 한 쪽이다, 혹은 양쪽에 모두 걸리는 대상자들이었는데, 경찰에 미리 검거됐었기 때문에 그 어느쪽의 재난(災難)에서도 피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때의 검거 사건이 박열의 ‘대역 음모’라는 큰 사건을 배태(胚胎)하고 있을 줄은 아무도 박열이나 금자문자 자신들까지도 그 당장에는 몰랐었다. 그 때 검거된 불령사 16명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상과 같이 이들 중에는 일본인 동지 남녀 5명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들이 전원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에 관하여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당시 일본의 사회주의 사상 운동자들은 특히 3.1 이후의 우리 민족 독립운동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장래 일본의 사회 개조 내지 사회 혁명의 실현은 조선 민족 독립 투쟁과 제휴한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 민족 운동을 대하는 듯 하였다. 그래서 1919년 년말 상해 임시정부 대표 여운형(呂運亨)이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아 도일(渡日)하였을 적에는 특히 동경제국대학(東京帝大) 신인회(新人會=당시 범사회주의 사상 단체)에서는 그를 위한 환영회를 열었으며, 그 석상에서 대삼영(大杉榮)은 ‘조선 독립 만세’를 선창했다. 이 대삼영은 그 뒤 일본을 탈출하여 상해에 밀행하였을 때에도 여 운형과 비밀 회담을 했었고, 일본에 유학하는 우리 대학생 간에서 적지 않은 지면(知面) 관계를 갖고 있었다. 하여간 전기 다섯 명 일본인 동지들 중에서 신산초대는 면소 출옥한 직후 결핵성(結核性) 질환으로 죽었고, 율원 일남은 박열·금자문자 재옥 중, 열심히 옥바라지를 하다가 1925년 대구진우연맹(眞友聯盟) 사건에 중요 관련자의 일원으로 연좌하여 징역5년 판결을 언도 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리고 전기 명단을 보면 남북한 각도 출신 거의 전부가 망라돼 있고, 특히 충북 출신으로 승적(僧籍)에 몸을 담고 있던 하세명이 들어 있음이 눈에 뜨인다. 이는 당시 불령사가 이데올로기적 순수성보다는 반일(反日) 민족 투쟁이라는 공약수(公約數)선에 의하여 구성되었던 운동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겠다. 요컨대 박열의 불령사는 당시 우리나라 역사적 한 단면(斷面)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의 불령사 검거 사건이 3단계적 발전을 거쳐서 박열·금자문자의 대역 사건으로까지 확대되었음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박열·금자문자·김중한 등 3명을 제외한 불령사 동지 13명이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 출감하기는 1924년 8월 달의 일이었다.
박열 대역 사건이란 것이 한번 발표되자, 일본 전국의 각 신문들과 우리 국내 신문들은 연일 대서 특필로 이를 보도하고 박열의 동지들은 물론, 동경의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가 총궐기 태세로 재옥 중의 박열을 원호했다. 당시 박열은 25세 작지도 크지도 아니한 키에 명주 흰 두루마기와 흰 바지 저고리에 조끼를 바쳐 입고, 한쪽 가리마로 단정하게 깎은 머리에 곱게 빗질하고, 언제나 온유한 미소를 지으며 찾아 오는 면회객들을 맞았다. 또 형무소(당시 동경시곡[牛込區市谷] 형무소)측에서도 대우를 극진히 하여 면회 장소로써는 전옥(典獄)의 응접실을 개방했고, 면회실로 박열을 안내하고 입회(立會) 하는데는 반드시 간수장(看守長)이 했다. 금자문자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으나, 면회객과 재감인 사이에 응접 테이블을 놓고 서로 대담을 할 수 있게 했다. 그것도 보통 옥규(獄規)에는 없는 대우였다. 그리고, 당시 금자문자는 어엿한 일본 부인복에 두루막(일본어의 하오리)을 곁들어 입고 있었다. 그녀는 근시(近視)여서 옥중에서도 안경 쓰는 것이 허용됐었다. 그녀는 옥중에서 매일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녀도 기분이 지극히 명랑하여 사건의 귀취가 어찌될 것인가 하는 데 관해서는 아무 걱정 근심도 없는 모양 같았다. 이 무렵부터 변호사 포시진치(布施辰治)의 활동이 전면에 크게 나타났다. 그는 당시 우파(右派) 사회주의 계통에 속하는 일본 전국 법조계의 실력자로 박열사건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농민들의 소작 쟁의(小作爭議)가 성행하니 그는 자진하여 무료 변호차 내한했었고, 또 우리 민간 단체의 초청을 받아 서울서 ‘조선 소작 쟁의 진상 보고 강연회’를 열기도 하였었다. 그는 박열 대역 사건이란 것이 공표되자 곧 자진 변호계(辯護屆)를 제출하고 방대한 사건 심문기록을 등본(謄本)하며 박열을 누차 단독 면회하여 사건 진상을 규명하면서 공판에 임할 준비를 진행했다. 그는 사금(謝金)을 요구하지 않았음은 물론 기록 등본 등에 요하는 적지 않은 비용 일체를 자비 부담했다. 다만, 그와 긴밀히 연락하는 임무만을 박열 동지인 장 상중과 당시 유학생 학우회 회장이며 간부이던 조헌영(趙憲泳)·윤길현(尹吉鉉) 등이 맡고 있었다. 위에서 박열의 일본 황실에 대한 소위 ‘대역 음모’ 사건이란 관동 대진재 조선인 학살 사건과 유관하다 함을 지적하였거니와, 그 학살 사건의 진상은 그 뒤 어떻게 판명 되었던가. 당시의 동경(東京)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의 진상조사단(眞相調査團)이 한 달여에 걸쳐 밝혀낸 피학살자의 수는 4천 9백 명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 숫자는 확실한 근거에 의해 확인된 것일 뿐이고 실지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진상 조사단이 얻은 더욱 중요한 부분은 대학살의 원인이 된 유언비어의 출처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10월 22일자 ≪보지신문[報知新聞≫은 유언의 근원은 9월 1일 밤 횡빈(橫濱) 형무소에서 풀려나온 죄수들이 각처에서 능욕·강탈·방화 등 여러 가지 악행을 범하면서 돌아 다녔는데, 그것을 조선인의 소행이라 잘못 알고, 소문이 전광적(電光的)으로 전파되었었다고 보도했었으며, 내무성(內務省) 경보국(警報局)측에서는 이 소문은 횡빈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입헌노동당(立憲勞動黨=당시의 우익 반동 단체)의 산구정헌(山口正憲) 일파가 퍼뜨리며 돌아다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조사단이 밝혀낸 바로는 ‘유언 비어의 출처는 내무성과 경시청, 그리고 군부의 최고 간부 몇 사람이 모였던 비밀 회담이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같은 사실은 내무성 경보국장이 각 지방 장관에게 보낸 전보문 등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도대체 진재 당시의 일본 내무 대신은 수의연태랑(水野鍊太郞)이었다. 그는 우리 3.1운동 당년 9월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政務總監)이 되어 총독 재등과 함께 부임하다가 남대문 역두에서 강우규로부터 폭탄 세례를 받았으니 우선 조선 사람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 적어도 조선이 일제에 대한 반항적 민심이 지극히 험악함을 그는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일본은 우리 3.1운동 전년인 1918년에 쌀소동(米騷動)이란 이름의 민중 폭동이 동경·대판을 비롯한 전국 중요 도시에서 일어나 군대까지 출동해서야 겨우 진압(鎭壓)했던 쓰라린 경험을 치렀던 터이라, 관동 대진재와 같은 비상 사태하에서도 그러한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 않고, 이번에는 조선인과 사회주의자가 합세하여 그러한 사단(事端)을 벌릴 것이라는 일종 강박 관념(强迫觀念)에 저들은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하여 저들은 사전 예방 조처로써 조선인 학살과 사회주의 사냥을 계획적으로 저질렀다 함이 우리 유학생 학우회 조사단이 내린 결론이었다.
유학생학우회에서는 이 사실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려 했으나 일본 관헌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일본 정부가 이 문제에 관하여 얼마나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있었던가는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상협(李相協)이 사내에서 자원하여 진상 조사 취재차 동경을 갔었는데, 중도 교통이 두절되는 등 사고로 천신 만고하며 겨우 동경에 도착, 사건 진상도 그 윤곽을 파악하였을 적에 예의 아부충가(阿部充家)(전 경성 일보 부사장으로 동경 조선인 유학생 회유를 담당하고 있던 자)가 헐레벌떡 찾아와서 ‘그대까지도 계엄 사령부에서 처치하겠다는 것을 그대가 취재한 사실을 신문 기사화하지 않을 것은 물론, 그대만 알고 있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 함을 조건으로 겨우 무마(撫摩)해 놨으니 속히 퇴거하라’고 등을 떠밀어 내다시피 했다는 한가닥 곡절(曲切)을 갖고도 짐작이 간다 하겠다. 또 일본 정부는 소위 ‘유언 비어 취재령’이라는 긴급 법령을 발포 실시했지마는 이는 조선 사람을 악선전하는 유언 비어를 단속하기 위해서이기 보다도 조선인 학살 사건에 관한 정보가 전파됨을 막기 위한 목적에 전용됐었다. 할 수 없이 유학생 학우회에서는 진상 조사를 마치자, YMCA 회관에서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피학살동포추도회(被虐殺同胞追悼會)’를 열었다. 여기에 일본 경찰이 또 개입하여 우선 ‘피학살’ 중, 학(虐)’자를 못 쓰게 하고, 각 단체에서 보내온 만잠(輓章)에도 학자는 일일히 먹을 지우거나 흰 종이를 오려 붙이게 했다. 또 조사(弔辭)를 읽는 사람이나 구연자(口演者)가 입밖에 ‘학’자가 튀여 나오기만 하면 임석 경찰이 예외 없이 검속해 갔다. 그러나 이래 매년 9월 1일 진재 기념일이면 유학생회 주최로 이 행사가 되풀이 되었다. 그때마다 경찰대와 참석 대중과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서 30∼50명의 피검속자가 나곤했다. 이날만은 사상적 계열(系列)의 구분 같은 것은 완전히 초월하고 오직 조선 민족이 일제 학정에 대해 쌓이고 쌓였던 울분을 터치기 위하여 ‘민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기회를 삼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인 대학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본 정부가 곤경에 빠진 기회를 이용해서 예심 판사 입종 회청은 박열을 설득하여 그 소위 대역 음모 사건이란 것의 자인(自認)을 얻어 내려 했다. 박열은 검사정(檢事廷)에서부터 태도가 아주 강경하여 검사가 작성한 조서(調書)를 읽어보고 자서(自書)하라는 것을 몇 번이고 찢어 버렸으며, 옥내 대우가 나쁘니 너희가 정 이럴진대 절식 자진(絶食自盡)하고 말겠다고 며칠씩이나 밥 먹기를 거부하며 단식으로 항쟁하기도 했다. 예심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열이 자인하지 않는 이상 조서를 제대로 꾸밀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박열 설득 공작이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공작이 입송 위에 있던 상부 지시에 의한 것인지 공명심에 탐이 난 입송 개인의 일방적 계교였던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후자의 가능성이 더 많았을지 모른다. 그는 우선 형무소 당국과 연락하여 옥중에서의 기거·음식 절차·보건 의료 등 박열에 대한 특별 대우를 하게 하고, 또 박과 문자를 예심정으로 불러 내서 조사하는 척 하다가는 특별실에 두 사람만 남아 있게 하고 재판소 직원들은 물론, 호송에 따라온 형무소 간수들까지도 일체 접근을 금지하면서 3~4시간씩이나 자유 방임하기도 여러 번 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달래며 관동 대진재 조선인 학살 사건을 들어서 설명하고 일본은 지금 조선 통치상, 또는 국제 체면상, 이 불상사에 대한 변명 거리가 될 수 있는 희생 제물을 찾고 있던 차에, 그대의 대역 음모가 적발되었다. 그러므로 그대가 아무리 사건을 부인하려 해도 면할 길이 없이 된 국면(局面)이라면서, 노상 일본의 무슨 국가 기밀(國家機密)이라도 털어 놓는 듯이 또 헤어 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진 박열을 동정이나 하는 듯이, 입송은 박열 설득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번은 박열이 고향에 있는 어머니 정 씨(鄭氏)가 아들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심히 걱정하여 친히 면회 오겠다는 것을 아직 말리고 있는 데, 우선 사진이라도 찍어 보내고 싶다 하니 입송은 이를 쾌락하고 1924녈 5월 2일이었거나 7월 9일, 또는 10월 7일 중 어느날 재판소 본관 예심실에서 서기(書記) 오산모(奧山某)도 간여하게 해서 박열과 금자문자가 함께 사진을 촬영하게 했다. 그 중 한벌이 후일 외부에 유출되어 저 유명한 소위 괴사진(怪寫眞) 사건으로 터져나서 입송 자신이 신세를 망치고, 나중에 내각경질(內閣更迭) 사태에까지 번지게 되었음은 운명의 작희(作戱)도 기이하다 않겠다. 그러나, 아무리 입송의 설득이 은근하고 그의 박열 대우가 아무리 융숭하다 할지라도 그런 것에 꼬임을 당하거나 그런 것으로 말미암아 꺾어질 박열이나 금자문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 어찌하다 보니 박열의 대역 사건은 입송 예심 조서에서 성립이 되어 1925년 5월 이 사건을 대심원 공판에 회부하기로 예심 종결을 보았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경위를 거쳐서 박열의 대역 사건은 성립되었으며, 대심원(大審阮)에서 단 한번의 재판만을 할 수 있도록 한 당시 일본 법제상 규정에 의하여 대심원 공판이 열리게 되었는데, 재판장은 당시 대심원장이던 목야국지조(牧野菊之助)였다. 박열은 재판 개정에 관련하여 재판장에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을 통고한다.
첫째 자기는 피고인(被告人)이 아니라 조선 민족 대표자로써, 조선의 주권(主權)을 강탈한 일본 대표자와 담판하는 위치에 있다.
둘째 좌석은 재판장과 대등좌석(大等坐席)으로 할 것.
셋째 자기는 조선의 예복으로 정장(正裝)하고 용어(用語)는 조선 국어(朝鮮國語)를 사용한다.
넷째 재판하기 전에 조선 민족 대표로써 선언문(宣言文)을 낭독한다.
이에 대하여 대심원 심판부에서는 여러 날 동안 숙의한 결과, 박열은 조선 시대의 구관복(舊官服)이며, 또 당시까지만 하여도 신혼 신랑이 혼례식 예복으로 입던 사모 관대(紗帽冠帶)의 예복을 입게 하고, 피고라는 용어 대신 재관장은 박열을 ‘그편’(일본말의 소찌라)이라 부르고 박열은 재판장을 ‘그대’라 호칭하게 했다. 공판은 언제나 방청 금지 리(裡)에 진행되었다. 재판정 밖에는 경찰대가 동원돼서 철통 같은 경계진을 펴고 있었으며, 구름 같이 모여든 방청객들은 재판정 안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밖에서 기다리다가 박열과 금자문자가 출정(出廷)하였다 퇴정하는 것을 먼 발치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신문 기자들도 방청이 허락되지 않았고, 오직 포시진치 등 변호사들만이 재판장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민간인이었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되기 이전에 아마도 변호사 포시의 주선이었다고 기억되는데, 박열과 금자문자는 재판부의 양해 하에 재감 중이던 시곡 형무소 소재 지번(地番)을 주소로, 정식 결혼계(結婚屆)를 동경시 우입구 구청에 제출하였다. 이로써 박열과 문자는 정식 부부가 된 것이었다.
1926년 3월 25일 일본 대심인 공판정은 박열과 금자문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박열은 의연한 태도로 미소를 지으며 ‘재판장 자네 수고하였네’ 했고, 금자문자는 만세 3창을 불렀다. 이 판결 언도는 기정 사실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아무도 놀라거나 의외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또 한번 잔재간을 부렸다. 천황의 특별 은사(恩赦)라 하면서 그 해 4월 5일에 박열과 금자문자에게 사형에서 감일등(減一等)하여 무기 징역으로 형을 낮추어 주고, 교수대에가 아니라 박열은 천엽(千葉) 형무소에 금자문자는 우도궁(宇都宮) 형무소 회목여감(檜木女監)에 각각 무기 징역수(囚)로 수용했다. 그리고 조선 총독은 조선 사람 들으라고, 황은(皇恩)에 감읍(感泣)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노라고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때에 우익 반동 단체의 박열 우대와 특사에 대한 반발(反撥)이 일어났다. 그것이 저 유명한 괴사진(怪寫眞)·괴문서(怪文書) 사건이었다. 그 사진인 즉, 장발(長髮)한 박열이 일본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의자에 앉아서 역시 일본 옷으로 허술하게 차린 금자문자가 좀 수줍어하며 박의 무릎 위에 뒤로 기댄채 박에게 안긴 것이었다. 이 사진이 허가 없는 비밀 출판으로 다량 복사(複寫) 제작되고 여기에 역시 비밀 출판으로 제작된 문서를 붙여서 정계 요로와 중요 언론 기관 등에 뿌려졌다. 그 문서에서는 ‘박열·금자문자는 황실에 대하여 위해를 가하고져 한 극악 무도한 국적(國賊)임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국사(國士) 이상으로 대우해서 옥중 특별실에 기거(起居)하게 하며 동서 생활까지 시키고 또 감형의 은전마저 베풀었음은 무엇이냐, 이는 정부 자체가 국적이 된 것이 아니냐’고 정부의 처사를 맹렬히 비난·공격했다. 이른바 ‘괴문서’였다.
이 괴사진·괴문서가 비밀 유포되고 있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 세상은 또 한번 발칵 뒤집혔다. 당시의 일본 정부는 민정당(民政黨)의 약규예차랑(若規禮次郞) 내각이었는데, 그는 곧 이 사건에 관한 신문 게재 금지 조처를 하고, 정계 원로(政界元老)들의 빈번한 질의(質疑)와 국회안에서의 시끄러운 야당측 질문에 대하여서는 그런 사진을 찍게 한 사실도 없거니와, 박열·금자문자에게 특별 대우한 적도 없었다고 일관 부인해 오다가 ‘제2 괴문서’가 나타나서 그 사진의 출처가 예심 판사 입송 회청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물의(物議)는 더욱 확대됐다. 입송과 그 서기 등을 환문 조사했으나 그 이상 감출 수가 없는 궁지에 몰려들어 입송 회청을 면파[의원면(依願免) 형식으로]하고 난국을 뛰어넘어 보려 했었지만 기강해이(紀綱解弛)·국가위신(國家威信) 실추(失墜)라는 이유를 들어 정계내에서의 공세는 그냥 계속되고, 마침 송도유곽(松島遊廓)·대만은행(臺灣銀行) 등을 둘러싼 의옥(疑獄) 사건이 겹쳐 일어나니 결국 약규 내각 자체가 명맥을 유지할 수 없어서 무너지고 말았다.
이 괴사진이 위에서 이미 언급했던 입송의 응락과 그의 서기 오 산모의 간여하에 찍어졌던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사실은 그 때에 박과 금자문자가 각각 따로 한 장씩을 찍고, 또 부본(副本)으로 박과 문자가 한 의자에 앉아서 찍게 한 후, 서기 오산의 책상 서랍에 넣어서 보관하고 있던 것을, 당시 재판소 출입하던 신문 기자 석흑모(石黑某)가 알고 괴사진 다운 부본 사진 한벌을 훔쳐내서(혹은 서기 오산과 짜고) 외부에 반출, 처음에 변호사 고정모(高井某)(박열사건과 무관)에게로 가고 다시 우익계 인물 진천용지조(辰川龍之助)를 거쳐 우익계 모 단체에게 넘겨져서, 괴사진·괴문서로 제작 출판되었던 것이라 한다. 하여간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심 판사 입송회청이 박열 설득을 위하여 어떠한 수단까지 동원했었던가, 그리고 박열·금자문자에 대한 옥중 대우가 왜 그렇게 파격적이었던가 하는 그 까닭도 이때에 비로소 백일 하에 그 진상이 드러났다. 또한 이 사건으로 내각이 도괴되기도 했지마는 입송 자신도 사법관 파면을 당한 것은 말하자면 제 도끼를 갖고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
금자문자가 무기 징역수로 당시 우도궁 형무소 분감(分監)이던 회목 여감에 수용된 지 석달 밖에 되지 않는 1926년 7월 23일 그녀가 자일(自縊)해 죽었으니 시체를 인수해 가라고 1주일이나 지나서야 동경의 변호사 포시진치에게 기별이 왔다. 마침 소위 괴사진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석하던 터이니, 이는 문자의 자살이 아니라 옥중에서 박열과 동서하면서 임신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처치에 곤란하여 교살(絞殺)하였다는 풍문이 어디서인지 모르게 퍼져 돌아갔다. 이 때 동경 있던 불령사 사건 동지들인 육홍균과 장상중은 당시 흑우연맹(黑友聯盟)의 젊은 동지들을 이끌고 휘목으로 달려갔다. 현지에 도착하여 분감장(分監長) 이하 감옥의 관계 직원들과 만나 사인(死因)을 밝히라고 엄중 담판(談判)하니 저들은 당황스러워 쩔쩔 매면서도 교살했다는 풍설을 부인하고 시체는 가매장(假埋葬)해 두었으니 실지 검증하라면서 일행을 묘지로 안내했다. 가매장한 것을 파내서 관(棺)을 들어 올리니 그것은 일본인들의 매장 풍습을 따른 입관(立棺)이었다. 관의 키는 1미터 남짓하고 그 안에 시체를 앉혀서 넣었는데, 관의 윗 뚜껑을 뜯으니 시체의 머리가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므로 육홍균이 먼저 손을 대서 머리카락을 집어 들어 숙인 고개를 젖히고져 하니, 당 절 여름 더운 날씨에 벌써 입관한지 6∼7일이 지난 터이라 부취(腐臭)가 코를 찌르고 잡힌 머리카락이 는질 는질 손에 묻어날 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관의 앞면을 뜯으니 시체의 얼굴은 퉁퉁 부어서 문자임을 알아볼 수도 없이 되었고 손은 양쪽 모두 바짝 말라서 피골이 상접, 마치 빈 장갑(掌甲) 켜레와도 같이 희고 납작해졌었다. 할 수 없이 화장터로 옮겨서 다비(茶毘)에 붙였다가 그 날 저녁에 유골을 수습하여 상자에 담아가지고 당시 동경 고전잡사개곡(高田雜司介谷)(조시가야)에 있던 변호사 포시진치 집으로 회정해 왔다.
여기서 또 한번 풍파가 일어났다. 그것은 대삼영 부처의 유골을 인수하였을 적에 우익 반동들이 그 유골마저 탈취하고저 하여 그의 동지들과 그 반동들과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던 전례가 있으므로 이쪽에서도 미리 경비하였지마는 관할서인 고전 경찰서가 정복 경관대를 파견하여 포시 변호사 집을 포위하고 외인 출입을 금지하며 흑우 연맹 간부급 인물들을 속속 검속해 갔다. 이래선 안되겠다고 대책을 강구한 결과 하루 저녁 날이 이미 어두어진 시각을 이용, 날씨가 하도 더우니 어름 사러 간다 핑게하고 바케츠(양동이)에 유골 상자를 밑에 두고 그 위에 보재기를 덮어 밖으로 반출, 처음엔 지대(池袋)에 있던 율원 일남 집에 두었다가 그 뒤 몇 군데로 전전하며 경찰대를 따돌리고 당시 경북 상주에 살던 박열의 맏형 박정식(朴廷植)을 가만히 불러 들였다. 그가 왔으므로 그에게 유골을 넘겨주어 조선 땅에 묻게 했는데, 그 때 이 일을 꾸민 사람들은 아마도 박정식이 연락선을 탈 때 쯤은 발각이 되리라고 예상하였었더니, 경찰이 포시 집에서 유골이 반출된 수일 후에야 눈치를 채고 저희들 상부에 보고했기 때문에 각 신문이 ‘금자문자 유골 분실’됐다고 대서 특필하여 보도했다. 동시에 전국 경찰이 긴장하여 잃어진 유골을 찾다가 산양선(山陽線) 광도(廣島) 근처 차중에서 이동 경찰(지금의 철도 경찰)이 박정식을 만났다. 이로부터 저들의 호위를 받아가며 문자의 유골은 무사히 상주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서 다시 문경 선영으로 옮겨 매장했는데, 당시 형사자(刑死者)는 장례를 지내지 못하며 뚜렷한 묘표(비석)까지도 못세운다는 당시 일본 법규에 의하여 초라한 봉분(封墳)만을 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금자문자의 교살설(絞殺說)은 마침내 확인이 되지 못하였다. 당시 어떤 신문 기사가 그녀는 다만 사회 제도나 현실에 반항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운명에까지 반항한 철저한 레지스탕스를 살았다고 평한 일이 있었는데, 꼭 적중한 것은 아니더라도 멀지 않다 하겠다. 그리고 여기서 밝혀두어야 할 것은, 문자가 죽었을 때에 그 시체를 인수하라고 산리현에 있는 금자가와 문자 어머니에게 먼저 교섭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호사 포시에게 교섭했었다고 일본측 문헌이 몇 군데서 기록하고 있지마는 이것은 와전(訛傳)이라는 사실이다. 육홍균이 확언하는 바에 의하면 금자문자는 일찌기 자기 친정이나 어머니에 관하여 언급함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한다. 그녀는 생모의 애정조차 알지 못하고 혹은 잊어버리고 살아 온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박열의 사랑과 주의상 동지애(同志愛)에 완전 포섭 동화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하던 금자문자의 무덤이 경북 문경 박씨 집안 선영에서 춘풍추우 38년 돌을 맞이하는 1963년에 이르러 일본의 어떤 여류 작가(세도우찌라든가)가 문자를 주제로 소설을 쓰겠다고 자료 수집 차 내한하여 이 분묘를 찾아보고 돌아가서 일본신문에 널리 보도한 것이 계기가 돼서, 현재 우리 국내에 있는 박열 계통 동지들과 사회 유지들이 성금을 거두어 그 해 7월 23일, 바로 그녀의 제38주 기일(忌日)을 기하여 그 무덤을 크게 수보(修補)하고 비명(碑銘)도 크게 해서 세웠다. 이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소망이던 ‘조선의 딸’이 되었던 것이다. 이 일을 주관한 이는 이 계통 동지들 중 원로인 정화암(鄭華岩)이었고 그 건비(建碑) 제막식(除幕式)에는 박열·금자문자와는 불변의 동지인 율원일남이 멀리 동경서 참석했었다. 그는 금자문자가 옥중에서 써서 남긴 유고(遺稿)를 모아 그녀의 옥중기(獄中記)를 그 전에 출판하기도 했었다.
한편 박열은 ‘천엽’감옥에서 한때 북해도 망주(網走) 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다시 추전(秋田) 형무소로 옮겨서 1945년 10월 23일 미(美) 점령군(占領軍) 사령부(司令部) 지시에 의하여 석방될 적에는 ‘추전’서 출감했다. 저간 장장 23년이라는 세계에서도 기록적인 장기옥고(長期獄苦)를 겪었다. 북해도 ‘망주’에는 얼마 동안이나 있었는지 모르지마는 만일 사실이라면 이곳은 기후도 불순할 뿐만 아니라 일본 전국에서의 장기 흉악범들만 수용하는 특별 감옥이었다. 이런 데다가 박열을 잠시나마 수용했었다면 그것은 반드시 일본 정부의 악의(惡意)에 찬 조처였음이 틀림없다. 박열과는 불변의 동지이고동경에 영주(永住)하던 장상중은 천엽과 추전을 자주 찾아 박열을 위로하곤 했다.
박열에게 폭탄을 입수하여 제공하기로 했던 김중한은 박열 공판이 끝난 다음에 얼마 안 있다가 동경지방재판소에서 공판이 열리었다. 검사가 적용법인 폭발물 취체 규칙의 최고형인 10년을 구형한 데 대한 재판부 판결은 6년이 언도되니, 검사와 변호사·포시진치 쌍방에서 공소한 결과 2심 판결에서는 징역4년에 예심 미결구류기간(未決拘留其間)을 통산한다는 언도가 내려져서 그 미결 구류 기간이란 것이 형기를 채우고도 남는 계산이 되어 즉일 출감했다. 그는 투사형(鬪士型) 인물이었다.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이다가 3.1 만세 시위운동에서 앞장서고 퇴학 처분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서 배재(培材)고등보통학교에서 졸업하고, 우리 국내에서 최초의 아나키스트 사상 단체인 흑노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동경으로 건너가 박열과 손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공판은 거쳐 석방되자, 곧 귀국하여 고향일 용강군의 항시(港市)인 진남포(鎭南浦)에서 마침 한창이던 신간회(新幹會) 운동에 참가하여 활약하고 있다가 일제의 박해를 피해 만주 방면에 망명하였으나 그 뒤 실종되고 말았다. 또 김중한과 연락하여 폭탄 입수 공작을 하였다는 의열단원 김한은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에서 동경의 시곡 형무소로 이감되어 증인 심문만 받고는 거기에 눌러서 복역하다가 만기 출옥했다.
박열은 미결 재옥 중 동지들에게 자주 한시(漢詩)를 써서 내보냈는데 운(韻)도 안달고 시작(時作) 규칙을 전연 무시한 것들이었다. 그 몇 수(首)를 받은 당시 어떤 동지는 이를 ‘주먹글’이라고 하였거니와 박열은 그 주먹글 가운데에 정의를 추구하는 불멸의 정렬을 담고 있었다. 그가 재판장에게 제시한 재판에 임하는 전제 조건 4개 항목을 보면 거기에는 그의 사회사상면보다도 항일 민족 투쟁면이 강하게 나타나 있음을 곧 간취할 수 있다. 위에서 박의 사회사상은 항일 민족 투쟁을 바탕으로 하였다고 말 할 수 있은 소이었다. 그리고, 그가 대삼영계의 사회사상에 동조하게 되었음은 당시 일본 사상계에서는 소위 아나볼 논쟁(論爭)이라 하여 아나키스트와 볼쉐비스트 간에 러시아 혁명의 현실을 둘러싸고 크게 논란이 일어났었다. 박열에게 있어서는 볼쉐비스트 측이 러시아를 세계 무산 대중의 조국이라 하는 등 논란에 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 우리나라 마르크스주의 클럽이 점점 대소의존주의(對蘇依存主義)에 기우는 경향이 짙어지자. 아나키스트 측의 반공(反共) 태도는 더욱 더 뚜렷해지고 굳어졌다. 그러한 유풍(流風)은 국내·외 아나계 사상 운동자들의 공인된 노선이 되고 말았다. 우선 국내 아나계에서는 신간회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것은 민족단일전선의 의의를 부정함이 아니었고 공산주의자와 함께 일할 수 없다는 그들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들은 국외에서 도리어 혁명적 민족주의 노선과 제휴했다. 이을규(李乙奎)·김종진(金宗鎭) 등이 백야(百冶) 김좌진(金佐鎭)의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가담하였던 사실, 상해서 정화암(鄭華岩)·백정기(白貞基)·김지강(金芝江) 등 행동파 아나계들이 김구(金九)계 행동파와 제휴 활동하였던 사실. 그리고 중경(重慶)으로 옮겨갔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유 임(柳林)이 ‘조선 무정부주의 총연맹’이라는 간판을 지고 김구 주석(主席) 하에 입각(入閣)하였던 사실 등은 모두 그 실례로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 ‘항일 민족 투쟁사상’ 또는 ‘사회사상 운동사’의 한 특징이라 하겠다. 이러한 특징을 인정치 아니하고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등이 아나키즘을 포회하고 공공연히 표방하며 그 실지 운동에 참가하였던 동기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박열과 그의 투쟁은 이러한 우리나라 역사적 단계를 반영(反影)하는 최초의 신호(信號)였다.
박열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점령군 사령부의 지시에 의하여 1945년 일본 추전 형무소에서 석방·출감했다. 당년 44세였다. 그는 그해 12월경 재일 교포들의 열광적 환영을 받으며 동경에 도착했다. 그는 이듬해 2월 8일에 동경에서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 建設同盟)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委員長)이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3일에는 조선 거류민 단장(朝鮮居留民團)(대한민국거류민단의 전신)에 추대되었다. 저간 박열은 양연(良緣)이 있어 결혼하였으니, 그는 박을 인터뷰하러 왔던 일본 국제 신문(國際新聞)의 여류 기자 장의숙(張義淑) 양이었다. 1948년 광복절(光復節)을 기하여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될 적에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환국하여 그 축전(祝典)에 참석했다. 그는 계속해 본국에 체류하면서 일본서부터 구상해 오던 장학사업(獎學事業)에 헌신하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 6.25사변을 만나 북쪽 공산군에게 납북(拉北)되었다. 당년 49세였다. 그 뒤 25년 만인 1974년 1월 17일 북쪽 방송을 청취한 일본 동경의 통신 보도에 의하여 박열이 향년 73세로 별세하였음이 알려졌다.
조야(朝野)가 합동으로 박열의사추도식(朴烈義士追悼式) 준비위원회(準備委員會)를 구성하고 그 해 2월 8일 상오 11시부터 서울 중구(中區) 명동(明洞)기독교여자청년회관에서 장엄한 추도회를 엄숙히 올렸다. 당시 유족으로는 미망인 장의숙과 장남 육군 중위(陸軍中尉) 박영일( 朴榮一), 그리고 딸 박경희(朴慶姬) 등이 서울에 살고 있었다.
(독립운동사 제7권 의열투쟁사 박열의 일황저격에 게제된 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