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여행을 시작하기 전 고창의 대표적인 표정을 한번 살펴보자. 만물이 생동하는 봄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겠다. 3월에서 4월 사이 만개하는 선운사의 붉은 동백부터 출발한다. 동백꽃이 거의 사라질 무렵, 5월 즈음이면 애처로운 상사화와 싱그러운 청보리 물결이 그 뒤를 잇는다. 가을이 깊어지면 선운산은 또 한번 울긋불긋 꽃단장을 시작한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까지, 고창은 쉴 틈 없이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고창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계절과는 별 상관없이 살필 수 있는 것도 있다. 먼저 고인돌. 고창은 대표적인 고인돌 밀집지역으로 손꼽힌다. 지난 2000년, 고창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400여 기의 고인돌은 한반도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오롯이 품고 있다. 여기에 고창의 대표 먹을거리 풍천장어와 복분자를 더해보자.
고창의 봄을 알리는 선운사 동백
장어라. 여름철 원기 회복용으로 많이 찾는다지만 사실 반(半)양식으로 자라기 때문에 계절과는 별 상관없이 즐길 수 있다. 약간의 가격 차이가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좀 더 마음 편히 장어를 즐길 수 있다. 바늘 가는데 실이 어이 빠질까. 장어의 환상의 짝꿍 복분자도 빼놓을 수 없다. 역시 사시사철 접하기에 문제없다. 21세기 아니던가.
여름의 시작을 전하는 청보리밭
고창 별미 장어에 대해 알고 싶다면 고창의 지형을 살피는 것이 먼저다. 고창을 가운데 두고 위로는 곰소만이 오른쪽으로는 호남정맥이 흘러간다. 바다와 갯벌, 산을 품은 고장이니 응당 먹을 것은 풍족했을 터다.
선운산을 가득 채운 울긋불긋한 단풍
다시 고창 지도로 돌아가자. 곰소만, 고창의 북쪽과 닿는 서해바다는 인천강 하류와 몸을 섞는다. (곰소만을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는 변산반도가 버티고 있다) 인천강 하류는 바람이 불 때 바닷물이 들어온다고 ‘풍천(風川)’이라 불리던 물줄기다. 풍천에서 나는 장어는 바람 탓인지 뻘 탓인지 유난히 힘이 좋았다. 그 유명한 풍천장어가 이곳 태생이다.
고창의 또 다른 역사를 보여주는 고인돌
풍천은 고유명사 즉 지명이 아니라 바다와 닿는 강의 하구를 뜻한다. 그럼에도 하도 풍천이라 불린 기억 때문인지 아예 풍천(강)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여하튼 풍천, 바닷바람 스미는 물가에는 장어가 살았고 근처 뭍에는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 시인이 살았다.
시인의 집이 풍천장어가 오르내리던 풍천 하구 근처에 있던 것. 인천강 하류 부근의 나지막한 질마재를 넘으면 시인이 살던 마을이다. 미당의 고향이자 그의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신화>의 무대이기도 하다. 지금은 미당시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등판에 얹는 안장 같은 제구를 뜻한다. 미당이 살던 마을 선운리는 질마와 닮은 고개 모양. ‘질마재’라 이름 붙은 이유다. 걷기 열풍을 타고 ‘고인돌 질마재 따라 100리길’로 새롭게 태어나기도 했다. 고인돌길(8.89km), 복분자풍천장어길(8.18km), 질마재길(11.64km), 보은길(19.83km)로 총 48km가 넘는다. 고창을 대표하는 고인돌과 질마재(즉 미당)를 전면에 세운 아름다운 우리길이다.
서정주 시인을 만날 수 있는 미당시문학관
이쯤 되면 궁금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째서? 이 겨울 고창을 찾았는지. 겨울 선운산이 좋다는 얘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답은 거기에 있다. 겨울 선운산이 의외로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팔랑. ‘고인돌 질마재 따라 100리 길’ 중 보은길 겨울 풍경이 끝내준다는 여행자의 귀띔이 있었다. 또 사철 즐길 수 있는 고창 별미 풍천장어와 복분자 둘만으로도 힘이 넘치는 여행이 될 터. 겨울풍경까지 더해진다니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풍천 ‘고인돌 질마재 따라 100리길’ 중 질마재길에 있다
겨울에 더 색다른 선운산의 맛
평일 선운산(336m)은 인적이 드물다. 한파 때문인지 이른 시간 때문인지 개미 한 마리 보이질 않는다. 눈이 제법 많이 쌓인 데다 날이 추워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귀찮다고 아이젠과 스패츠를 외면하기에는 미끄럽다.
선운산이라 이름 붙은 이 산의 본명은 도솔산으로 알려진다. <대동여지도>는 선운사의 이름을 딴 선운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가 유명해지면서 선운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단다. 이번 여행에서는 선운산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선운산 산행은 주로 선운사 매표소에서 출발한다. 인천강이 서해로 빠지기 전 합류하는 도솔계곡은 선운산 줄기를 타고 이어진다. 물줄기는 왼쪽에서 오른쪽, 즉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의 한반도에서는 아무래도 특이한 모양새다. 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선운산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어 남녀노소 걷기 무리 없다. 높지는 않지만 주변에 경수산(444m)․개이빨산(345m)․청룡산(314m) 등의 산들이 솟은 덕분에 걷는 재미에 보는 재미를 더한다. 산줄기와 함께 물줄기가 더해지니 ‘호남의 내금강’이란 별명이 과하지 않다.
선운산 트레킹은 선운사~도솔암~용문굴~낙조대~천마봉까지 돌아본 후 선운사로 원점회귀 하는 코스가 가장 무난하다. 넉넉하게 세 시간이면 충분해 선운산을 걷고 내려와 하산주로 복분자와 풍천장어를 맛보면 최고다. 먼저 천오백년 시간을 품은 선운사와 동백부터 살펴보자.
낙조대에서 바라본 산줄기
선운사 동백은 선운사가 창건된 577년(백제 위덕왕24)쯤 처음 심어졌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다. 산불로 도량 전체가 화마에 시달린 적이 많은 탓에 불이 잘 붙지 않는 동백나무를 방화나무로 심지 않았을까 추정할 뿐이다. 아무리 선운사 동백이 유명하다기로 선운사 보다 동백을 먼저 살피다니 과했다. 선운사로 돌아가 보자.
도솔산이라고도 불리는 선운산 일대는 원래 해적과 산적들이 득실거리던 도둑 소굴이었다. 577년 (백제 위덕왕24) 검단선사가 이들에게 소금과 숯 굽는 법을 가르치고 선운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인돌 질마재 100리길’의 4코스, 보은길이 바로 그들이 걷던 길이다. 선운사는 창건 당시 89개 절집과 3000여 명(300명이 아니라!)의 승려가 수도하던 대사찰. 정유재란(1597년) 당시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대웅전과 도솔암․참당암․동운암 등만이 남아있다. 템플스테이에는 이 겨울에도 사람이 가득이다.
천오백여 년의 시간을 품은 선운사 풍경
아쉽지만 선운사 동백은 아직 활짝 피지 않았다. 겨울에 핀다고 동백(冬栢)이라 부르는 것과 달리 동백은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추백(秋栢) 그리고 동백(冬栢)으로 나뉜다. 4월 초에 피기 시작해 5월초까지 볼 수 있는 선운사 동백은 춘백에 속한다. 전남 광양 매화, 구례 산수유 등으로 남도가 한바탕 꽃몸살을 앓고 난 뒤 여유있게 기지개를 켜는 것. 전국의 상춘객들은 봄의 끝자락 만개하는 선운사 동백을 기다리면 설렌다.
대웅보전 뒤에 자리한 동백림(천연기념물 제184호). 아직 동백 꽃망울이 알알이 터지기 전이다. 4월이 지나면 이곳 선운사는 동백의 붉은 물결로 일렁일 것이다
선운산은 길이 단순하고 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적다. 하지만 바위산인 만큼 주의하는 편이 좋다. 장사송과 진흥굴을 지나 도솔암에 닿는다. 도솔암 마애불상을 만날 시간이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보물 제1200호). 고려시대에 조각한 것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불상 중 하나로 알려졌다.
15m가 넘는 높이와 8m가 넘는 보물 마애불
지상 3.3m 높이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불상의 높이 15.6m, 폭이 8.48m다. 머리부터 찬찬히 살피려 하니 머리 위 구멍이 눈에 띈다. 동불암이라는 누각의 기둥을 세웠던 곳이란다. 명치끝에는 검단선사가 쓴 비기(秘記.비밀스러운 기록)를 넣었다는 감실이 있다. 조선 말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이서구가 감실을 열자 갑자기 풍우와 뇌성이 일어 그대로 닫았는데, 책 첫머리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본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고. 비기는 19세기 말 동학의 접주(接主.동학에서 포교소의 책임자) 손화중이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도솔암
낙조대와 천마봉을 지나며 ‘호남의 내금강’을 즐기는 재미를 빼놓지 말자. 무사히 하산 한 후에는 선운산 초입 즐비하게 자리한 장어 전문점 중 마음에 드는 곳에 들어가 맛볼 순서다.
장어 양념구이
고창 군청 근처에도 장어전문점이 많다. 참, 고창의 장어집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셀프장어집과 그냥 장어집. 말 그대로 직접 구워먹는 셀프장어집은 좀더 저렴하게 장어를 맛볼 수 있다. 1인당 2만6000원은 잡아야 한다. 단체로 갈 경우에는 셀프장어집이 유리하다는 장어 매니아들의 귀띔이 있었으니 참고하시라.
최고로 친다는 소금구이
노릇하게 구워진 장어 한 점에 복분자 한잔 더해지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으리라.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맛이다. 긴긴 겨울 나느라 부실해진 몸보신 하러 동백이 피기 전 고창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