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1989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공부를 하여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배로부터 야학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86년에 개교하여 장소가 없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다가 88년 3월에 학교 개관식을 하던 날에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근로 청소년과 만학도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야학과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학생모집 광고를 위해 협조하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봉사를 하게 된 배경에는 부모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서도 배우지 못하셨기 때문에 배우지 못한 분들을 위해 가르쳐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주향토 시민학교 설립 취지문을 보면서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음은 설립 취지문의 내용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많은 교육기관이 있지만 여러 가지 개인적 경제적 상황으로 인하여 교육 기회를 잃은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배움을 향한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으나 이를 충분히 수용하여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제도적 교육이 마련되지 못하였으며 지역사회 단체들의 교육참여 또한 미진한 실정입니다. 민족 분단 40년을 보내고 한민족의 기상이 세계에 나타나는 이때 기존의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더는 침묵할 수 없음을 통감하고 지금까지 축적해 온 지식과 문화 역량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배움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에게 환원시켜서 개인의 지적인 가능성과 삶의 가치를 구현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한민족 모두는 공동운명체라는 자각에서 지성인들이 출신 지역의 발전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사회적 계층적 차원의 대립과 갈등을 화해와 단결로 전환시키고 민족통일과 번영을 지향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자 향토학교를 설립하고자 합니다.” 2년 동안 관심을 가지고 야학에 봉사하다가 군에 입대하면서 야학과는 멀어졌습니다. 그때는 야학에 몸담아야겠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1995년~1997년
군대를 제대하고 2년 남은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공부를 하던 중 진주향토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88년 3월 진주향토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설립 취지문을 떠올리며 폐교를 막기 위해 학생 모집과 자원봉사 교사 모집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에 놓여 있는 문제만이라도 해결해 보자.’고 생각했던 야학과의 인연은 다시 시작되었고 이제는 저의 꿈이 되었습니다.
95년의 야학의 상황은 88년과는 달랐습니다. 진주향토학교 는 야간 수업이 없어지고 근로청소년도 사라진 만학도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주간 위주의 수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 가지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지역사회에 배우지 못한 분들을 위해 배움터를 제공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17명의 제자들을 모시고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을 생각하며 새로운 출발로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그러던 96년 12월에 건물을 비어달라는 건물주의 통보를 받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고민 끝에 언론을 통해 폐교를 막기 위해 취재 요청을 했습니다. 그 덕분으로 학교는 무사히 이사를 했습니다. 새로운 배움터에서 수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과 가중된 수업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1998년-2007년
98년 3월에는 봉곡동(진주대로 1195번길 3)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30명이 넘는 학생들과 12명의 자원봉사 교사와 함께 새로운 배움터에서 수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업도 서부 경남에 배우지 못한 분들의 요청으로 주간과 야간으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23평의 작은 배움터에서 야간 수업을 할 때면 한 공간에 블라인드를 설치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 수업을 하다 보니 뒤쪽에 있는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1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오직 배움을 위해 오시는 분들께 최선을 다해 학교를 운영했습 니다.
진주향토학교의 교무로서 전체적인 수업 운영과 관리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배움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검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음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2000년이 되면서 자원봉사 교사도 모집이 되지 않았고 기존의 교사들도 하나둘씩 떠났습니다. 누군가는 학교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배우지 못한 분들께 배움의 한을 풀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홀로 학교를 지켜야 했으므로 수업은 오직 저의 몫이었습니다. 혼자서 모든 과목을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하루 12시간이 넘는 수업에 몸은 지쳐갔고 목이 쉬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교육 봉사로 가득 찼습니다. 1년에 40명이 넘는 검정고시 합격자를 배출하고 5명 이상의 대학 입학자를 배출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야로 노력을 하였습니다. 드디어 그 목표는 이루어졌습니다. 많은 학생들은 배움의 기회를 통해 밝은 미소를 가진 얼굴로 변해 갔습니다.
2004년 4월에 입학한 허♡향 제자는 한문을 잘하였기에 서예학원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대학을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기에 검정고시에 합격하기 위해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제가 수업한 내용을 녹음하여 차를 타고 다니면서 들었습니다. 2005년 1회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2005년 2회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하였습니다.
그 이후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경상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허♡향 제자와 함께 저는 동문회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진주향토학교 동문회를 2005년 9월 3일에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결성 이후 동문회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2개월에 한 번씩 정기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검정고시를 통해 졸업한 학생들은 정규학교를 졸업한 학생들과는 다릅니다. 힘들게 배웠던 것만큼 보람도 컸을 것입니다. 서로 지난날을 돌아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2005년 연말에 경상남도교육청에 학교형태의 평생교육시설 에 등록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비정규학교라는 이름보다 제자들에게 졸업의 더 큰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 생각했습 니다. 한 달 동안 준비한 끝에 평생교육시설 등록서류를 제출하였습니다. 2006년 2월에 평생교육 등록증이 나와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제자들은 기뻐했습니다. 졸업식을 성대하게는 못해도 경상남도교육청의 이름이 들어간 졸업장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검정고시 합격도 많이 되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습니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는 40명 이상의 검정고시 합격자를 배출하였습니다.
*2008년~2020년
열악한 재정상태였기 때문에 진주향토 시민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하루에 12시간 수업을 하다 보니 목이 쉬기도 하고 다리에 통증이 심해서 서 있기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눈을 보면서 힘든 시간을 이겨냈습니다.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진행된 수업으로 나날을 보내던 중 2008년 1월 28일에 딸아이의 사고로 딸은 산소공급이 되지 않아 심폐소생술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딸은 4주 동안 병원에 있다가 퇴원했지만 걷지도 못하고 말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누워 있기만 했습니다. 잠도 하루에 두 시간밖에 자지 않아 아내와 제가 번갈아 가면서 병간호를 하였습니다. 도저히 학교를 운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학교를 폐교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때 주변의 지인들이 힘들어도 학교는 폐교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결국 20여 명의 제자들을 두고 폐교할 수 없어 힘들어도 학교를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12년 동안 딸을 데리고 오후에는 물리치료실에 갔습니다. 지금도 혼자서 전 과목을 가르치고 하루에 10시간을 넘게 강의하지만 힘들지는 않습니다. 저를 보고 먼 곳에서 달려오는 제자들이 있기에 이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딸아이의 아픔과 고통을 보면서 제자들의 아픔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오전부터 늦은 밤까지 제자들을 보며 쉬지 않고 달려갑니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길을 혼자서 걸어가도 희망은 잠들지 않고 저의 마음에 큰 파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간절함이 기적이 아닌 기적으로 용솟음치고 있음을 느끼면서 환희의 순간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는 학생 수도 줄어들다 보니 검정고시 합격자가 20여 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위한 열정만큼은 식지 않았습니다. 오전 수업, 오후 특강, 야간 수업으로 이어졌던 수업은 오전 수업과 야간 수업으로 변경하였습니다.
1986년 문을 연 진주향토 시민학교는 34년 동안 주·야간 시설로 운영되었습니다. 상평공단이나 인근 하동, 산청, 사천 등에서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근로 청소년과 50~60대 장년층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랫동안 공부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배움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학력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생각 속에 효과적인 교수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011년에 2008년 1회부터 2011년 2회까지 4년간 출제되었던 검정고시 기출문제를 뽑았습니다. 기출문제를 다시 부분별로 정리하고 문제를 풀 수 있는 자료를 첨부하는 작업을 4개월 동안 하였습니다. 새벽까지 작업한 적이 많았습니다. 우선 중졸 검정고시 과목인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을 정리하였습니다. 곧바로 고졸 검정고시 과목인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한국사, 도덕, 가정과학, 미술을 정리하였습니다. 2012년부터 몇 년간 정리한 문제를 프린트해서 학생들에게 배부하였습니다. 그 교재를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2012년부터 3년간의 검정고시 합격자 수가 증가한 것도 저의 이런 노력의 결과가 아닌가 감히 생각해 봅니다. 고인 물은 썩게 되어 있듯이 흐르는 물이 되어 제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2012년에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있는 내용을 이야기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한 달 동안 수학 이야기, 과학 이야기, 한국사 이야기, 지리 이야기, 도덕 이야기를 만들어 보급하였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로 풀어서 설명하니 암기하는 것이 더 쉽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진주향토 시민학교는 진주시와 경상남도교육청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교재나 학습 기자재 등을 구입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진주시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아 오다 2006년 경상남도교육청에 학교형태의 평생교육시설로 등록하여 연간 500만원의 보조금을 교부받았습니다. 이에 진주시에서 이중지원을 불가하다 하여 2007년부터 보조금 지원을 중단했습니다. 경상남도교육청의 보조금으로만 학교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2016년 도교육청의 보조금 지원이 중단되면서 폐교를 걱정할 수밖에 상황이 되었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준다.”는 속담처럼 한국남동발전의 허엽 사장으로부터 연간 500만원의 후원금을 받게 되어 폐교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년에 두 번의 검정고시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2월과 6월에 원서를 접수하였습니다. 원서를 직접 교육청에서 가져와 새벽 3시까지 작성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첫머리에 놓을 때 참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마음으로 제자들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 참된 기쁨이 찾아옴을 알았습니다. 2020년 1회까지 48번이나 검정고시 시험장에 제자들을 모시고 갔습니다.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차량 대여와 식사 준비를 혼자서 해야 했습니다. 전 과목 수업도 하면서 여러 가지 준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늘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을 들이며 제자들의 합격을 기원하며 준비했습니다.
2014년부터 수업시간에 판서한 내용을 수업이 끝나면 사진으로 찍어 매일 매일 SNS를 통하여 전달하였습니다. 이제 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갑니다. 수업에 출석하지 못한 학생들에게도 수업을 듣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질문을 통하여 해결했습니다.
2016년에는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해 고등학교 검정고시반을 화요일, 목요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운영하였습니다. 20여 명의 서부 경남에 있는 청소년들이 수업을 듣고 검정고시에 합격하였습니다.
서부 경남 지역에 교육의 참여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1시 15분까지 고등학교 수업을 진행하였고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오전 8시 40분부터 오후 1시 20분까지 한글 수업과 중학교 수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야간에는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저녁 7시부터 10시 20분까지 중학교 수업과 고등학교 수업을 격년으로 운영하였습니다. 검정고시가 있는 4월과 8월 이전에는 오후 2시부터 4시 30분까지 오후 검정고시 특강을 진행하고 야간 화요일과 목요일에도 검정고시 특강을 진행하였습니다. 하루 많이 수업할 때는 12시간 이상을 수업하였는데 특히 최근 몇 년간은 쉬는 시간 없이 계속 강의를 하면 4시간 뒤에 수업이 끝납니다. 제자들의 눈을 보며 기뻐하시는 모습에 보람을 느끼면서 하나라도 더 가르쳐드리고 싶었습니다.
*교육성과
1996년부터 매년 4월과 8월에 있는 검정고시에 제자들이 응시하여 96년에 16명, 97년에 15명, 98년에 18명, 99년에 37명, 2000년에 35명, 2001년에 43명, 2002년에 33명, 2003년에 34명, 2004년에 47명, 2005년 48명, 2006년에 47명, 2007년에 46명, 2008년에 22명, 2009년에 21명, 2010년에 17명, 2011년에 19명, 2012년에 30명, 2013년에 36명, 2014년에 29명, 2015년에 20명, 2016년에 24명, 2017년에 20명, 2018년에 18명. 2019년에 20명, 2020년에 24명이 합격하였습니다. 1986년 3월 2일 개교 이래 813명의 검정고시 합격자를 배출하였습니다.
2011년 1회에는 70세 제자(이♡미)가 경남 최고령으로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2011년 2회에는 70세 제자(조♡림)가 경남 최고령으로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나이가 배움에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저는 학교를 운영하면서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3년 2회에는 69세의 최점순 제자가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2016년 2회에는 고졸 최고령합격(이♡미. 75세), 2017년 1회에는 고졸 최고령(이♡수. 67세), 2018년 1회에는 고졸 최고령 합격(김♡태. 71세), 2018년 2회에는 중졸 최고령 합격(강♡분. 71세)을 하였습니다. 특히 조♡림 제자는 2011년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2012년 경남과학 기술대학교 원예학과에 최고령으로 입학하였습니다. 2016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2018년에 77세의 연세에 당당히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한 제자들은 졸업식을 통해 기쁨을 나누고 사회에 진출하여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131명의 대학 졸업자를 배출하여 더 큰 세상으로 꿈을 키워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회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시민학교를 거쳐 간 학생들은 1200여 명이나 됩니다. 한글을 모르는 지역주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영어를 몰라 간판을 읽을 수 없는 지역주민들에게는 기초영어를 교육하고 학력이 부족한 지역주민들에게는 학력을 취득할 수 있도록 수업을 진행하여 지역사회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배움은 치료하는 생각으로 25년을 진주향토 시민학교에서 보냈습니다. 상처를 받고 힘들게 사는 지역주민들의 상담을 하면서 많은 사연을 접했습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누군가가 해야 한다는 것,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정규학교가 아닌 야학은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놓여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있고 교육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10대부터 70대까지 배움터에서 꿈을 펼쳐 나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그 꿈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배움터가 필요한지 모를 것입니다.
평생 배움의 길에 몸을 담고 있어도 다 배울 수 없기에 진정한 학문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서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살기를 바랐습니다. 야학을 하면서 25년 동안 제가 배운 것은 배우지 못한 분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겸손과 배려를 통해 무지에서 벗어나 행복한 세상을 꿈꾸게 하는 것이 평생교육이 가야 할 길이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서부 경남에 있는 이 진주향토 시민학교를 지키기 위해 걸어갑니다. 많은 아픔을 간직하고 오시는 분들께 언제나 희망을 노래합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살다 보면 꿈을 잃게 되고 절망에 빠집니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은 꿈을 꾸고 사십니다. 그래서 언제나 밝고 건강하게 수업을 듣고 계십니다. 4시간을 쉬지 않고 강의를 해도 눈을 크게 뜨고 듣는 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그분들을 위해 어두운 터널을 빨리 나오실 수 있도록 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목소리를 높여 강의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힘들다고 쉬었다가 합니다. 전 쉴 수가 없습니다. 눈물을 닦아주는 스승이 되기 위해 25년 외길을 걸어왔습니다.
진주향토 시민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한 명 한 명 소중한 인연이라 생각하고 배움의 한을 풀고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우울증에 걸려 힘겨운 나날을 살던 학생들도 배움을 통해 우울증을 고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암에 걸렸던 많은 제자들도 암을 극복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를 통해 졸업할 수가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훌륭한 스승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통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줌으로써 늦깎이 학생들의 배움터는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25년간 학교를 운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곽♡자 제자는 초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하고 중학교 공부를 하던 중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하늘나라로 갔음에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고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진주보건대 사회복지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졸업을 하였습니다. 곽♡자 제자는 야식집을 운영하여 잠을 제대로 자지도 않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심♡연 제자는 경남과학 기술대학교 원예학과를 졸업하였고 박♡리 제자 또한 진주 보건대학교 사회복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정♡현 제자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어린 나이에 진주향토 시민학교를 찾아 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신부전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고 가사일을 도우면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초졸 검정고시와 중졸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진주여고에 입학하였습니다. 졸업 후 진주보건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졸업 후 사회복지시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바르게 성장하였고 어머니와 남동생을 돌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고성에 사는 임♡란(1979년생)과 전♡란(1980년생) 제자는 조선족으로 중학교까지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학력 인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고성에는 검정고시 교육하는 장소가 없어서 2013년 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검정고시 공부를 병행하여 합격하였습니다. 고성에서 진주까지 버스를 타고 학교에 오는 과정은 힘들었고 자녀들이 어렸음에도 열심히 공부하여 고등학교 검정고시까지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김♡린 제자(1992년생)는 북한에서 탈북한 후 제3국에서 한국으로 왔습니다. 2015년 9월에 학교를 방문하여 상담을 진행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공부하던 중 경남교육청에 중학교 학력을 인정받기 위해 방문하여 심사위원회를 거쳐 위연 고등중학교 졸업을 인정받았습니다. 2016년 4월에 고졸 검정고시에 응시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사와 영어가 부족하여 8월에 재응시하였습니다. 8월에 합격하고 2017년 창원대학교 중국어 학과에 들어갔습니다.
주♡섭 제자(1959년생)과 장♡순 제자(1967년생)는 부부로 2012년 4월 진주향토 시민학교를 입학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주계섭 제자는 주거지역과 시장을 돌며 양말을 팔았고 장말순 제자는 학교에서 조리사를 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2013년 4월에 있는 검정고시에서 합격을 하였습니다. 곧바로 고졸 검정고시 과정 수업을 듣고 8월에 두 학생 다 고졸검정고시에 합격을 했습니다. 장말순 제자는 2014년 방송통신대학 가정학과에 입학하여 2018년 대학을 졸업한 후 영양사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습니다. 주계섭 제자는 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하여 2020년 2월에 졸업하였습니다.
윤♡숙 제자(1961년생)는 2014년 4월에 중학교반에 입학하였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중학교를 나오지 못해 늘 마음에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방송 광고를 보고 진주향토시민학교에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1년 교육과정을 통해 2015년 4월 중졸 검정고시에 합격을 하였습니다. 다시 고등학교반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던 중 위암 판정을 받고 서울에서 수술을 하였습니다. ‘다시 공부할 수 없겠구나!’하고 저는 마음속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윤정숙 제자는 수술 후 고등학교반에 다시 진학하였고 몇 개월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2006년 4월 검정고시에 합격을 했습니다.
권♡복 제자(1954년생)는 2012년에 한글반에 입학하였습니다. 배움에 한이 맺혀 있었기에 집현면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에 나왔습니다. 한글을 어느 정도 익히고 난 후에 초졸 검정고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유방암에 걸려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수술 후 안정을 찾으시고 다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2014년 4월에 검정고시에 응시하였지만 두 과목을 합격했습니다. 3개월 정도 부족한 부분을 더 공부해서 드디어 8월에 검정고시 합격증을 받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