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순, 배인숙 자매는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언니 배인순은 상명여중 3학년 때 올림픽 수영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했던 수영 선수 출신이며,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도여사대 주최 영어 웅변대회에서 동메달을 받았을 만큼 성량이 좋았다. 동생 배인숙은 어릴 적부터 발레로 다져진 춤 솜씨와 빼어난 미모로 남학생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동생은 음악 활동을 위해 명지대 영문과에서 언니가 다니던 중앙대 도서관학과로 편입했다. 음악학원에 다니며 노래 공부를 한 자매는 1967년 미8군 가수 오디션을 통과했고 화양프로모션에 전속되어 미8군 베거스 버라이어티쇼에 발탁되었다.
데뷔 무렵에는 팀명도 없이 무대에 올라 외국 팝송을 주로 노래했다. 1968년 1월, 자매는 TBC TV 황정태 PD의 눈에 들어 오락 프로그램 「쇼쇼쇼」에 출연했다. 이때 팀명을 펄시스터즈로 정했다. 이후 ‘카지노의 대부’ 전락원의 눈에 들어 워커힐 쇼단 멤버가 되었다. 쇼 단과 함께 일본 공연을 다녀오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결심한 자매는 최선희 무용연구소에서 안무 연습에 몰두했다.
펄시스터즈는 미8군 시절에 신중현을 만났다. 당시 한국적 록 음악을 펼칠 희망으로 결성한 밴드의 연이은 실패로 의기소침했던 신중현은 쇼단을 결성해 베트남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펄 자매는 신중현을 찾아가 데뷔 음반 제작을 간청했다. 펄시스터즈의 재능을 이미 간파했던 신중현은 월남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 기념 음반을 남기려는 마음으로 이에 응했다. 신중현은 1964년 발표했지만 반응이 없던 <비속의 여인>, <내속을 태우는 구료>에서 제목을 바꾼 <커피한잔>, 펄시스터즈를 위해 작곡한 <님아!>, <떠나야할 그 사람> 등 6곡에 대한 창법 지도를 했다. 말랑말랑한 기존 팝송 창법에 익숙했던 펄시스터즈는 신중현식 소울 창법을 새롭게 익혔다.
‘킹박’ 박성배 사장은 신중현의 부탁으로 펄시스터즈의 앨범 녹음에 들어갔지만 “절대 인기를 끌지 못할 괴상한 노래”라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녹음 때도 소파에 누워 잠만 청할 만큼 무관심했다. 주변에서도 신중현의 새로운 음악에 대한 비관적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1968년 12월 신향음반제작소에서 펄시스터즈의 데뷔 음반을 발매했다. 이 음반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상큼한 의상을 입은 펄시스터즈의 사진에 회색 배경으로 제작된 음반이 초반이고, 노란색 배경이 재반이다. 타이틀곡 <님아!>와 <커피한잔>은 펄시스터즈를 걸 그룹 사상 최초의 가수왕으로 만든 대형 히트곡이었다. 총 12곡을 수록한 이 앨범은 펄시스터즈의 독집은 아니다. 1면에는 펄시스터즈의 노래 6곡을 수록했고, 부족한 곡수를 메우기 위해 2면은 기성 히트가요를 재해석한 밴드 덩키스의 연주곡으로 채웠다.
월남 파병으로 우울했던 젊은이들은 신인 걸 그룹 펄시스터즈의 파격적인 노래에 열광했다. 밴드 덩키스의 연주는 호소력 짙은 펄시스터즈의 폭발적인 소울 보컬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거기 더해 당시 서울대 문리대 출신 괴짜 시인 주성윤이 펄시스터즈의 인기에 일조했는데, TV 화면으로 펄시스터즈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반했다는 사연을 언론에 발표해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이다. 반면 기성세대는 “이게 무슨 우리 노래냐. 말세다 말세”라며 상반되는 반응을 보였다.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이 음반은 오디오 보급이 미미했던 당시로서는 믿기 힘든, 당시 집계로 100만 장에 육박하는 히트를 기록했다. 아직 전속계약조차 맺지 않았던 펄시스터즈를 스카우트하려는 음반사 관계자들 사이에서 주먹다짐이 오가는 쟁탈전이 벌어졌다. 침체된 음반 시장에 등장한 펄시스터즈의 데뷔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하며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1962년부터 창작 록을 시도했지만 주목받지 못하고 월남으로 떠나려던 신중현은 이 앨범의 예상치 못한 성공으로 신중현 사단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당시 KBS TV 음악 프로그램 「패티킴 쇼」가 세 차례나 펄시스터즈 특별 방송을 편성해 방영한 것은 당시 이들의 엄청난 인기를 말해준다. 펄시스터즈가 데뷔 1년 만에 MBC 10대가수상 시상식에서 가수왕에 등극하자 CF와 영화 출연 제의가 빗발쳤다. 데뷔 무렵 교통비 조로 5,000원 정도를 받았던 자매의 출연료는 무려 100배나 폭등한 50만 원으로 급상승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여대생 걸 그룹 펄시스터즈는 166cm가 넘는 키에 균형 잡힌 몸매, 예쁜 얼굴에 탁월한 가창력까지 뽐내며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배인순, 배인숙 자매의 등장은 단순히 노래로만 승부하던 오디오 중심의 가요계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스타 가수의 기본 조건으로 가창력에 화려한 외모까지 요구하는 ‘비디오 가수’ 시대의 서막을 연 것이다. 이 음반의 타이틀곡 <님아!>는 정인엽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커피한잔>은 이후 김추자, 신중현과 뮤직파워, YB밴드, 백미현, 신해철, 바다, 자두 등이 수없이 리메이크하며 펄시스터즈의 대표곡으로 자리 잡았다.
'남아' '커피한잔'을 부르며 흥겹게 춤을 추었던 배인순(裵仁順) 인숙(人淑)자매. '펄 시스터즈'는 해체되었지만 여전히 가요계 최고의 듀엣으로 역사에 길이 남는다. 얼굴도 예쁘고 , 몸매도 좋고 또 둘간의 시샘도 치열했던 두 자매의 공연시절의 회고담을 MC 최성일씨를 통해 듣는다
친자매 배인순과 인숙의 듀엣 '펄 시스터스'. '진주자매'를 뜻하는 이들은 이 지면을 통해서 지금까지 소개한 여러 스타들과는 '출신'이 근본적으로 다른 가수였다. 일반적인 가수들처럼 미8군이나 일반 쇼 무대 또는 밤업소 출신이 아니었다. 당시 막 꽃피기 시작했던 TV방송이 발굴해서 길러낸, 소위 '방송가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자매를 진주로 견인한 프로그램은 바로 60년대와 70년대에 막강했던 인기의 TBC TV 쇼프로그램 '쇼쇼쇼'였다.
“그들은 정말 한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보기 드문 재목이다!”
그가 인순 인숙 자매를 이렇게 극구 칭찬한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사실 그들만큼 가수로서 필수조건인 '노래'와 충분조건인 '얼굴' '몸매' '율동'을 어디 한 군데 빠짐없이 완벽하게 구비한 가수는 없었다. 즉 요새 말로 '오디오 비디오 겸용가수'인 셈이었다.
나는 '쇼쇼쇼'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펄 시스터스 같은 탁월한 가수들이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들의 1969년 데뷔 곡이자 출세작인 '님아'와 '커피한잔'을 써낸 작.편곡자 신중현(申重鉉)씨도 그룹사운드의 창조자로도 평판이 자자했지만 바로 펄 시스터스를 길러낸 주역으로 더욱 이름을 날렸지 않은가 생각한다.
60년대 말 방송으로 데뷔해서 가요계를 휘몰아치며 스타덤에 오른 그들은 곧바로 쇼 무대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지방 리사이틀은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고 주로 서울 시민회관 무대에만 섰다. 1970년과 1971년에 '시민회관'에 1년 간 20차례 공연이 열렸다하면 그들은 18회 정도는 출연했을 만큼 당시 펄 시스터스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인순과 인숙 자매가 쇼 무대에 나왔을 때는 20세가 채 안된 미성년들로 나이가 어리기도 했지만 워낙에 순진했다. 일반 무대의 돌아가는 실정에 까막눈이었고 어른들의 농담을 모조리 진담으로 받아들이기가 일쑤였다. 처음에 둘은 누가 뭘 물어봐도 이구동성이었고, 화장실을 갈 때에도 함께 가야했을 정도의 일심동체(?)로 한시도 떨어져 있지를 않았다.
이렇게 다정한 사이의 자매를 우리 사회자들은 짓궂게 이간질(?) 시키는 장난을 걸곤 했었다. 내가 언니 인순양이 없고 인숙양만 있을 때 “야, 인숙아. 너 언니가 그러는데 무대에서 제스처 하면서 노래할 때 너무 장난이 심하다고 남들 있는데서 흉보더라. 왜 그랬니? 좀 잘하지, 언니한테!”
그랬더니 인숙양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어머머, 언니가 진짜 그랬어요?”하고는 뭐가 그토록 서러운지 손에 얼굴을 파묻고 슬피 우는 것이었다. 정말 뭘 몰라도 한참을 몰랐던 철부지였다.
다정한 사이를 그만 '라이벌'로 만들어 버린 장난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여자마음의 속성'을 들여다보게 해준 것이기도 했다. 아무리 핏줄이 같은 친자매라 할지라도 '샘솟는 여자의 시샘'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남들이 만약 언니의 율동이 더 좋다고 하면 동생은 토라져버렸고, 동생의 몸매가 더 낫다고 하면 언니는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연의 횟수가 더해갈수록 '더 잘 보이려는'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쟁심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자매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우리의 방해공작(?)은 어디까지나 효력이 잠시였고 나중 우리가 시비를 걸어도 그들은 아예 코방귀도 뀌지 않았다. 아무튼 당시 공연관계자들간에는 (가요팬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자매를 상대적으로 비교해보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번져 있었다.
즉 '언니와 동생 중에서 누가 더 예쁜가?' '누가 더 착한가?' '누가 시집을 더 잘 갈까?' 하는 따위가 흥미로운 화제 거리였다. 일반적인 견해는 “동생이 마스크는 더 낫고, 성격은 언니 인순양이 더욱 원만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언니는 동양적이요, 동생은 서양적이라는 결론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인순양은 조금 깍정이였던 동생보다 성격에 모난 점이 없어서 간혹 인숙양이 삐치게 되면 달래주기도 하는 등 윗사람(?)다운 면모를 과시하곤 했다.
1972년3월 부산(釜山) 공연 때였다. 꽤 점잖은 30대 남자가 대기실로 나를 찾아와서는 “제발 둘 중 한 명이라도 좋으니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며 매달리면서 사정했다. 이럴 경우에 상대가 차라리 '건달'이라면 무력행사를 하든가 해서 오히려 물리치기가 쉬운데 신사일 때는 설득해야 했기 때문에 나의 입장은 더욱 피곤했다.(펄 시스터스의 팬들은 비교적 수준이 높았다). 그들의 공연에서는 이렇든 '접선'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팬들을 돌려보내는 것도 매일 되풀이되는 일과중의 하나였다.
펄 시스터스는 당시 어느 가수들보다도 무대의상이 화려했고 가지 수도 엄청나게 많았다. 노래 한 곡 한 곡 끝날 때마다 옷이 달라지곤 했는데 한번은 “도대체 의상이 몇 벌쯤 되냐?”고 물었더니 인순양은 “둘이 합쳐서 약3백 벌쯤 될걸요”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이대성과 나는 언젠가 둘만 있는 자리에서 “쟤들은 돈 벌어서 옷만 해 입는 거 아냐?”하고 비아냥거렸던 적도 있었다.
모전여전(母傳女傳)이라고 이렇듯 '모범' 어머니를 닮아서 펄 시스터스도 늘 타의 모범이었다. 직접 빗자루를 들고 지저분한 분장실을 청소했고 꽃병과 화분을 갖다놓기도 했다. 또 누가 조금이라도 풀이 죽어있는 모습이면 마치 자기 일처럼 “어디 아파요?”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세요?”하면서 걱정을 함께 해주었다.
나는 펄 시스터스의 부친이 공무원이라고 알고 있는데 비교적 안정된 집안의 따님들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스타가 되어 돈을 벌겠다해서, 또는 연예인으로서의 '끼'가 있어서 가요계에 뛰어든 그런 유형의 가수들이 아니었다. 배인순과 인숙은 줄곧 내게 “우리는 단지 노래부르는 게 좋아서 가수가 됐다”고 밝히곤 했었다.
이제 언니 인순은 재벌그룹회장과 결혼해서 어엿한 주부가 됐고, 동생 인숙은 솔로로 남아서 계속 가수활동을 하다가 몇
해전 재미교포출신의 의사에게 시집가서 살고 있다. 나는 워낙 듀엣활동 당시에 그들이 모범적이었기에 결혼생활도 모범일 것이라고 믿는다.
솔로로 데뷰한 펄시스터즈의 동생 배인숙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소녀, 숙녀가 되고 전설로 남다
배인숙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소울 선풍을 일으킨 걸 그룹 펄 시스터스의 절반이었다. 그리고 이 음반은 그녀의 솔로 데뷔앨범이자 재기작이다. 더불어, 1969년 데뷔 이래 국내에서 정상의 인기를 누리다가 1972년에 도쿄, 1974년에는 뉴욕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 가던 펄 시스터스가 언니 배인순의 결혼으로 활동을 중단함에 따라 배인숙의 국내 복귀작이 된 앨범이기도 하다.
음반을 제작한 안타 프로덕션은 록(고고) 리듬과 트로트(뽕짝) 멜로디를 결합한 스타일로 1970년대 후반을 풍미한 것으로 저명하다(혹은 악명이 높다). 그렇지만 이 앨범의 타이틀곡은 알랭 바리에(Alain Barriere)의 “Un poete”의 멜로디에 자기성찰적 가사를 담은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다. 이 곡은 당시의 히트곡이었을 뿐 아니라 이후 많은 가수들에 의해 커버되는 곡이 되었다.
후에 윤형주가 불러 히트한 감미로운 연가 “사랑스런 그대”, 당시 일본 현대 가요의 영향이 살짝 묻어 있는 “깊은 밤”, 그 무렵 성행했던 ‘국제가요제’에 어울릴 법한 그랜드 스케일의 “그대 내 곁에 있어줘요” 등은 1980년대 전반기 가요를 몇 해 앞서 듣는 느낌을 자아낸다. 한편 “오동잎”, “빗방울”, “내 님아” 등은 안타 프로덕션의 수장 안치행이 작곡한 이른바 ‘트로트 고고’인데, 배인숙의 감각적이고 고혹적인 보컬을 만나 새로운 분위기로 재탄생한다.
앨범이 발표된 시점과 아티스트의 물리적 나이를 고려한다면, 이 앨범은 트로트가 아닌 성인가요(adult pop)를 제작하려는 아티스트와 제작자의 고심이 담겨 있다. 1960년대 말 겁 없이 소울을 육감적으로 부르던 소녀는, 이렇게 숙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즉,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의 음악적 실험이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어떠한 모습으로 변모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편 이런 곡들은 ‘Korean Traditional Popular Music'(그렇다고 국악이나 민요는 아니다)을 틀어주는 홍대앞의 모 술집에 들르는 젊은 사람들 일부에 의해 새로이 재해석되고 있다. 물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 역시 젊은 사람들의 몫이다. 20110301 |
신호미 homey81@gmail.com
[네이버 지식백과] 님아! / 커피한잔 - 펄시스터즈 (가요앨범 리뷰, 한국대중가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