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와 겨자씨와 누룩 비유
마 13:24-35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알곡과 가라지, 겨자씨, 누룩 비유가 복음공동체 내의 부패 가능성을 예고합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24-30) 두 번째 천국 비유입니다. 농부는 큰 수확을 기대하며 씨를 뿌렸지만 원수가 몰래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종들이 흔히 가짜 밀이라고도 하는 가라지를 발견하고 뽑으려 하였으나 주인은 알곡도 뽑아버릴 위험 때문에 가만 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추수 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분류하겠지만, 그때까지는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합니다. 이는 복음 공동체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며, 교회 안에 부패의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까지 교회와 성도는 안팎의 죄를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31-32) 주님은 천국을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크게 성장합니다. 대다수는 겨자씨의 성장이 천국 공동체의 확장을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성장한 겨자나무가 새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듯이 복음이 확장하여 사람들에게 은혜를 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가지에 깃들인 새들을 사탄의 사자들로 보고 부정적으로 해석합니다(마 13:4; 13:19). 우리는 이 두 가지 해석을 모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곧, 역사적으로 복음이 확장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지만 동시에 성장과 함께 교회가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누룩 비유(33) 유대 문화에서 누룩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누룩 없는 무교병을 먹어야 하는 유월절의 관점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분명히 누룩은 부정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천국을 누룩에 비유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가루 서 말은 100인분의 빵을 만들만큼 많은 양입니다. 약간의 누룩만으로 이 큰 덩어리가 부푼다는 것은 개개인의 죄성이 신앙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경고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심(34-35) 이 구절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전체 사역에서 오직 비유로만 말씀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박해가 심해지던 상황과 맞물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한 교회의 탄생은 창세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비밀입니다(11). 비유는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하시는 예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적용: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신앙이 참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많은 성도들이 자기 잘못을 눈물로 고백하는 것으로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회개의 일부가 될 수가 있어도 완전한 회개는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삶속에서 지은 죄에서 과감히 돌이키는 것으로 죄범한 자아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신중하고 진지하게 죄에서 돌아서는 중요한 결단의 행위입니다. 회개할 일이 있다면 먼저 지은 죄를 입술로 고백하고 과감히 죄된 행위를 끊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밀과 가라지
마 13:24-30, 36-43 / 이윤재 목사
8월 첫 주일입니다. 일년중에 가장 무더운 이 때 하나님이 계획하신 신비한 일은 “모든 열매는 여름에 익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름”이란 말은 “열음” 곧 열매가 연다는 말의 명사형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이스라엘의 밀과 보리, 무화과등 곡식이 익는 것은 여름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여름에 익는 곡식, “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어느 농촌에 농부가 있는데 이 사람은 밀을 재배하는 농부였습니다. 넓은 밀밭에서 밀이 무럭 무럭 자라가는 데 어느 날 일꾼이 보니까 밀밭에 가라지가 하나씩 둘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몇 개 없더니 점점 많아집니다. 그래서 걱정이 돼서 주인에게 묻습니다. “주인님, 올해 농사는 풍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걱정도 많습니다”. ”뭔데?“ ”농사도 잘됐지만 가라지도 많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뽑을까요? 그냥 둘까요?”. 주인이 한참 생각하더니 “가만둬” 합니다. 그래서 일꾼이 말합니다. “아니, 주인님, 그렇게 되면 밀수확이 적을텐데요. 가라지는 지금 뽑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때 주인이 말합니다. “가만둬봐. 추수때 하지 뭐. 지금 잘못하면 밀까지도 상할지 몰라. 추수때 함께 거둬 태우지” 합니다. 일꾼은 더 이상 한 말이 없었습니다. 주인이 그렇게 말하는 데 일꾼이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이 이야기가 오늘 비유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신약성경에서 모두 50개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는 생활주변에서 우리가 가깝게 만나는 소재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선포하시는 독특한 예수님의 화법이었습니다. 우리의 주식이 쌀인 것처럼 이스라엘도 밀을 주식으로 하기 때문에 늘 가깝게 대하는 것이 밀입니다. 그 밀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말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8:8에 보면 가나안의 7대 소산이 나옵니다.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그리고 꿀”. 이 일곱가지가 가나안의 7대 소산입니다. 그중에 첫 번째가 밀입니다. 이스라엘 밭에서 밀을 한번 볼까요? (1. 사진). 누렇게 익은 벌판은 우리나라 가을철 들판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10월이나 11월 달에 이런 모습을 봅니다만, 이스라엘은 대략 5월 이후에 이런 모습을 봅니다. 4월경에 먼저 보리가 수확되고, 5월 이후에 밀이 수확됩니다. 자세히 보면 잘익은 밀은 토실토실하고 열매도 굵습니다(2. 사진). 줄기도 크고 견실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밀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기드온이 집안 뒤켠에서 밀타작을 했다든지 예수님 제자들이 안식일에 들에서 밀을 비벼 먹었다든지 하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가라지입니다. 가라지를 일명 “독보리”라고 하는데 밀과 너무 비슷합니다. 색깔도 같고 모양도 비슷합니다. 멀리서 보면 똑같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다릅니다(3. 사진). 우선 키가 큽니다. 가라지는 밀보다 큽니다. 쫙쫙 올라가고 조금 가늡니다. 특징적인 것은 가라지는 튑니다. 날씬하고 쫙 올라가고 가늡니다. 보통 밀은 튀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라지는 튑니다. 자세히 보면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이파리만 있고 그 속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매의 모양은 있는 데 알맹이가 없습니다. 가라지가 있음으로 인해 밀이 받는 손해는 영양분을 빼긴다는 것입니다. 밭에서 올라오는 에너지는 한계가 있는 데 가라지로 인해 밀은 에너지를 뺏깁니다. 그래서 잘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해는 나중에 이 가라지를 먹었을 때 그 속에 있는 “테므렌”이라는 유독 알카로이드로 인해 생긴 곰팡이균으로 구토나 설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가라지는 농부들에게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뽑을 수도 없습니다. 밀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섣불리 가라지를 뽑지 않고 조금 더 두었다가 가라지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날 때 뽑곤 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있다.
문제는 같은 밭에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밀은 밀대로 있고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있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적당한 때 가라지 밭을 쟁기로 밀어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함께 있는 모습을 보시겠습니까?(4. 사진). 이것이 이스라엘 밭의 현실일 뿐 아니라 교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안에는 좋은 사람만 있습니까? 의인만 있습니까? 착한 사람만 있습니까? 그렇지 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압니다. 탈무드에 보면 노아 홍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배를 만들고 모든 생물들이 짝을 이루어 들어오도록 했답니다. 그래서 호랑이, 나비, 기린, 닭등 모든 생물이 짝을 이뤄 들어오는 데 어떤 생물이 달당 혼자 들어오더랍니다. 그래서 이름을 보니 “선”이었답니다. 그래서 “왜 너만 혼자 오니?” 했더니 “하나님, 저는 짝이 없어요” 하더랍니다. 그래서 “안된다. 반드시 짝으로 와야 한다” 했답니다. 얼마 후에 선이 짝을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보니 “악”이 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 세상에 선과 악이 같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교회든 가정이든 사회든 선과 악이 같이 있지 않습니까? 만일 착한 사람만 있어야 하고 악인은 없어야 한다면 문제는 “나”입니다. 내가 바로 죄인이요 악인인데 의인만 있어야 한다면 나는 어디로 갑니까? 2천년 교회역사는 이것을 “교회의 거룩성”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토론해왔습니다. 교회는 보통 거룩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거룩하냐? 여기에는 많은 이론과 주장이 있습니다.
보통 교회의 3대 표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교회든지 세 가지 교회적 특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째 사도성, 둘째 단일성, 그리고 셋째가 거룩성입니다. 사도성이란 교회는 어쩌다 생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든 역으로 올라가면 예수님과 그 사도들과 만난다는 것입니다. 단일성, 교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주교, 장로교, 감리교등 많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는 단 하나라는 것입니다. 감리교, 천주교, 침례교등 다양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의 교회만 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가 거룩성은 사도적 전승을 받아서 생겨난 하나인 그리스도의 교회는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거룩하다”. 이 말은 우리가 많이 듣는 말인데 그러면 어떤 점에서 교회가 거룩하냐? 거기 모인 사람들이 하나도 죄를 안 짓기 때문에 거룩하냐? 교회의 결정이나 신학 제도나 조직이 하나도 틀리지 않아서 거룩하다는 것이냐?
교회가 거룩하다는 이유를 설명할 때 보통 세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먼저 교회는 거룩하나 거긴 모인 신자가 죄인이라는 입장입니다. “교회 자체는 하나님의 뜻가운데 이루어졌고 예수님이 친히 세웠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거기 모인 신자들이다”. 이것은 주로 천주교의 입장입니다. 천주교는 교황무오설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이 결정하는 어떤 결정, 선언은 오류가 없다고 합니다. 다만 문제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안에는 거룩한 사람도 있고 죄인도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것이 밀과 가라지 비유를 직설적으로 해석한 입장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이 인정하는 교회의 거룩성은 세 번째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거룩한 것은 거기 모인 사람, 제도, 신학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세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낳고 양육하기 때문에 “성령의 피조물”입니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사람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삼위 하나님 때문에 교회는 거룩합니다. 언제나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언제나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내린 어떤 판단과 결정도 언제나 옳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지구가 둥글다고 한 갈릴레이를 화형시켰습니다. 교회는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중동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교회는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을 죽일 때 아니라고 크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아닙니까? 엡1:4-5절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에 부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불렀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분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교인을 평가할 때 그가 거룩하지 않고 흠이 많이 때문에 교인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은 그가 교인된 증거가 아니라 그가 교인된 목적입니다. 오로지 하나님 한분만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 때문에 거룩한 성도라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고전 1:1-2에서 바울이 말한 교회에 대한 좋은 정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교인은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성도입니까? 거룩한 백성입니까? 감히 그 이름을 쓰기 죄송하지만 바울은 우리를 거룩한 성도라고 부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다시 보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성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없으면 우리는 절대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 거룩한 성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을 때 드디어 성도입니다. 더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냥 “거룩한 성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거룩하여지고“ 했습니다. ”거룩“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거룩하지 않습니다. ”거룩하여 지고“, 영어 성경으로 보면 become a saint of Jesus Christ. become입니다. 거룩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가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표가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도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2절 뒷 부분,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우리가 교회안에서 할 일은 딱 한 가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본래 죄인인 우리가 행위로 거룩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 은혜로 거룩한 성도가 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저 엎드려 그 분의 긍휼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부르는 입례송처럼 “누구도 주앞에 다가설 수 없네. 오직 주의 보혈, 주의 긍휼의지하여 나아가리”. 교회안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있습니다.
가라지는 밖에서 왔다
문제는 교회안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하지만 그것은 가라지가 있어도 좋다. 가라지는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없을 수 없지만 없을수록 좋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함께 있지만 가라지는 없을수록 좋고 우리는 가라지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라지는 어디서 왔을까? 일꾼들이 질문합니다. 마13: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절에서 주인이 대답합니다. 마13: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같은 내용의 말씀이 25절에도 나옵니다. 마13:25, “사람들이 잘 때 그 원수가 와서 곡식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가라지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원수가 뿌린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와 함께 있지만 정상적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원수가 한 일입니다.
여기서 심각한 신학적 주제가 하나 나오는데 그것은 악이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죄인된 존재로 성도가 되기 위해 부름받았는 데 성도는 가만히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과 싸워야 합니다. 악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쿠쉬너라는 신학자(Harold S.Kushner)가 쓴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왜 선한 사람들에게 불행이 찾아오는가)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악의 원인에 대한 세 가지 모델을 말합니다. 먼저 힌두교와 불교의 모델입니다. 여기서는 악을 운명적으로 봅니다. “악은 마치 동전의 한 면과 같다. 한면이 있으면 다른 면이 있듯이 생명이 있으면 죽음도 있고 선이 있으면 악도 있다”. 소위 운명론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지. 악이 어디서 왔는지 묻지 말라.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우리의 전통종교가 다 운명론입니다. 두 번째 유대교는 악은 선과 다르지만 악도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위한 사용하신다고 믿습니다. 욥기가 그 예입니다. 하나님이 마귀의 시험을 허용하여 욥을 시험했듯이 악이 하나님의 창조물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악을 사용하실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성경적인 모델은 악은 마귀에서서 온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타락한 천사로 이 땅에 실체로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인간을 괴롭히고 침투한다. 악의 출처가 곧 마귀다”. 그래서 마귀는 두 가지를 합니다. 유혹과 미혹입니다. 둘은 비슷합니다만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유혹 육체 도덕적 범죄(잘못된 행위) 악행
마귀
미혹 영혼 교리적 범죄(잘못된 믿음) 이단
유혹은 마귀가 우리에게 도덕적 범죄를 가져오고 미혹은 마귀가 우리에게 교리적인 범죄를 가져옵니다. 도덕적 범죄와 교리적 범죄는 다릅니다. 도적적인 범죄는 행위를 잘못해서 생긴 죄이고 미혹은 잘못된 믿음 때문에 생긴 죄입니다. 둘 다 범죄인데 조금 다릅니다. 유혹은 우리 육체를 통해 범죄하게 하고 미혹은 우리 영을 타락하게 해서 범죄하게 합니다. 영은 우리 존재의 중심에 있는 데 영이 병들면 다 병듭니다. 유혹은 우리 육체를 병들게 해 도덕적인 범죄를 하고, 미혹은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해서 이단에 빠지게 합니다. 유혹을 받아 도적적인 범죄를 하고 나면 양심을 가책을 받습니다. “아, 내가 와 살인했나? 아, 내가 왜 성적 범죄를 저질렀나? 조금만 참을 걸”. 그래서 회개합니다. 그런데 미혹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혹은 행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회개가 어렵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영의 침체”, “영의 침륜”이라고 말합니다. 영이 무너진 것입니다. 영이 깨어진 것입니다. 영이 깨어졌기 때문에 정상적인 삶이 어렵습니다.
제가 아는 한 가정은 아내가 구원파에 빠졌습니다. 평생 남편이 울고 불고 매달렸지만 아직도 안 돌아옵니다. 벌써 25년째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빠졌습니다. 안상홍을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찬송가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찬송가 79장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가 아닙니까? 이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찬송가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안상홍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에 그리어 볼 때”. 안상홍이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까? 미혹을 받으니까 그렇게 됩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미혹을 받습니까? 마13:25입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잘 때 미혹합니다. 유혹은 한낮에 마귀가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혹은 한밤에 마귀가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잘못된 믿음이 우리 속에 쏙 들어와서 우리 영혼을 타락시킵니다. “영의 침체”, 우리 영을 깨뜨립니다. “영의 침륜”. 한번 미혹당하면 회복되기 어렵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를 어지럽히는 최고의 미혹이 신천지입니다. 신천지가 가장 위험한 것은 그 미혹성이 크고 깊기 때문입니다. 신천지가 위험한 것은 다른 이단들은 교회 밖에서 활동합니다. 통일교든, 구원파든, 여호아증인이든 그들을 안만나면 됩니다. 그들 이 모이는 교회를 안 가거나 그들의 전도를 받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신천지는 아예 교회안으로 들어옵니다. 교회를 밭으로 보고 믿는 신자를 자기들 교회로 데려갑니다. 이것을 “추수”라고 하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추수꾼”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신천지 추수꾼이 10만이 훨씬 넘습니다. 그러니까 전국에 있는 모든 교회는 신천지가 들어갔다고 보면 됩니다. 2-300명만 모인 교회도 신천지 한 두명은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이들은 기존교회에서 무엇을 하나? 교인들을 미혹합니다. 성경을 풀어 준다면서 미혹하고 교회와 담임목사를 비방하거나 문제를 삼아 이간질하고 잘못된 성경해석과 믿음을 심어줘서 미혹합니다. 그래서 이들 믿음의 최종적인 목적은 교주 이만희가 재림주요 알파와 오메가요 인치는 자요, 이긴자요 보혜사 성령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만희가 쓴 책에도 자신을 “보혜사 이만희”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에서 보혜사는 성령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만희는 자신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이름이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만희를 부르는 이름은 모두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대언자, 두 증인, 두 감람나무, 사도 요한격, 참 목자, 사명자, 백마, 재림 예수의 영을 받은 육체, 동방의 의인, 만유의 주재, 빛 성육신으로 오신 분,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삼위일체의 세 보좌가 있는 몸, 생명나무, 새 예루살렘, 새 이름”, 이런 이만희를 믿는 사람이 14만 4천이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고 그때 자기들은 신천지의 제사장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믿다가 그만 둔 사람도 있습니다. 개종자와 이탈자가 있습니다. 개종자는 자신이 잘못 믿었음을 인정하고 참회한 후 한국교회가 운영하는 상담소에서 1년 가까이 개종교육을 받고 지역교회로 갑니다. 그때 상담소에서 증명서를 써주면 일반교회에 가서 등록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그러나 이탈자는 다릅니다. 이탈자나 개종자나 나온 것은 같은 데 이탈자는 자기가 잘못된 것을 알고 빠져 나오긴 했지만 명확한 컴밍 아웃이 없습니다. 개종교육도 받지 않았고 분명한 자기회개와 고백도 없습니다. 과거에 믿었던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미 오랫동안 믿었던 교리가 머리에 남아 있기 때문에 영혼은 아직도 신천지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신천지를 의심해야 합니다.
1.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부끄럽거나 감추는 것이 아닌데 목사님과 부모님께 비밀로 하라고 하는 경우
2. 성경을 가르치는 데 성경을 비유로 풀어야 한다며 신.구약 성경이 짝이 있다며 이리 저리 짝을 맞추는 것
3.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구원자인데 그것이 아니라 시대별로 구원자가 따로 있다며 구약시대는 노아. 모세. 아브라함등이 구원자고 신약 때는 예수님이 구원자지만 지금은 다른 구원자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
4. 교회의 아픔과 상처가 있을 때 그것을 싸매며 기도하고 함께 아파해야 하는 데 그것보다 교회의 잘못된 모습만 부각하고 비판하면서 교회를 위선적인 종교집단으로 매도할 때
5. 예수님이 오시는 날과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성경이 말씀했는 데 종말과 재림의 날짜를 강조하면서 그때 14만 4천명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
6. 성경에 나오는 동방은 한국이라고 억지로 해석하고
7. 어떤 특정한 사람이 하나님이 직접 계시를 내려주셨다며 예수님 이후 2천년만에 처음 내려진 계시라고 하고
8. 잘 모르는 사람이 접근해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묻고 친절하게 대하면서 큐티하자 성경공부하자. 어디 다가서 뭘 배우자는 식으로 유인할 때
9. 배도, 멸망, 구원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면서 성경을 억지로 푸는 경우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영을 미혹하는 신천지의 전략입니다. 한국교회를 어지럽히는 최고의 가라지입니다.
하나님은 승리한다
이렇게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종이 주인에게 가서 물었을 때 주인이 말합니다. 마13: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주인이 가라지가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가 좋아서 가만두는 것이 아니라 곡식이 뽑힐까 봐 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한없이 참지 않습니다. 마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주인은 반드시 심판합니다. 혹시 좋은 곡식들이 다칠까 봐 참고 있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심판합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엄중하고 확실합니다.
재작년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으로 구원파 교주 유병언에 대한 죽음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경찰은 2014년 6월 12일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발견된 남성 변사체가 유병언의 시신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국과수의 검사결과 이 시신의 DNA가 유병언의 DNA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시체는 겨울용 잠바에 벙거지 모자를 쓰고 하늘을 바라보고 반드시 누워 있었습니다. 시신은 벌써 부패해 80%가 백골이 되었습니다. 신문에난 시신의 모습은 끔찍하고 처참했습니다. 그 시신이 유병언의 시신인지 아닌지는 아직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악은 언젠가 패배합니다. 진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마귀는 언젠가 패배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마귀의 유혹과 미혹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반드시 이깁니다. 어떤 믿음이고 사람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은 반드시 사라질 것입니다. 문선명도, 박태선도, 유병언도 죽고 안상홍도, 이만희도 곧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영원히 살아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한 세상은 악과 선이 공존하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선의 편에 설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하면서 교회안밖에 다른 복음과 바른 복음이 공존하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바른 복음만 좇아 갈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쩔 수 없이 가라지와 함께 살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때가 되면 가라지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승리할 것입니다. 진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도 승리할 것입니다.
가라지의 비유
마 13:24-30, 36-43 / 김영규 목사
가라지의 비유
본문은 마태복음 13장 천국 비유의 두 번째로, 가라지 비유입니다. 가라지 비유는 이 세상에서 시작된 천국의 불완전성과 그 해결책을 보여줍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주님께서 다 해석해 주셨기 때문에(36절-43절)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36-40절)
우선 이 비유가 말하는 천국이 무엇인지부터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이 비유가 말하는 천국은 교회입니다. 앞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천국은 심령 천국이었습니다. 천국 복음이 각 사람의 마음에 뿌려져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게 되면 심령 천국이 시작됩니다. 가라지 비유는 각 사람의 심령 천국이 모여서 만들어진 교회 공동체, 즉 교회 천국을 말씀합니다. 주님의 해석을 보세요. 밭은 이 세상이요, 세상에 뿌려진 씨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뿌려진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일까요? 바로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 세상 사람들 속에서 시작 된 천국 공동체입니다. 성도들은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지상에서 천국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기쁨, 천국의 사랑, 천국을 풍요로움, 천국의 위로, 천국의 나눔, 천국의 능력 등등. 교회 생활을 통하여 천국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가라지 비유는 전체적으로 지상에서 시작된 교회 공동체의 불완전성을 설명합니다. 이 비유 속에 담긴 교훈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불완전성입니다. 둘째는 가라지의 속성입니다. 셋째는 가라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해결책입니다.
불완전한 천국
첫째로, 세상 속에 있는 교회 천국의 불완전성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시작된 천국이지만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 불완전성의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가라지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가라지, 즉 가짜가 섞여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24-26절)
물론 가라지도 외형적으로는 자녀의 형식을 갖췄습니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짜입니다. 교회에 전혀 유익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시기에 교회를 해롭게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가짜들의 존재가 숨어 있습니다.
물론 교회 안의 모든 문제를 100% 가라지 때문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다 가라지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서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직 덜 성숙되었기 때문에 온갖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하는 것이 바로 마귀가 심은 가라지들입니다. 고린도 교회교인들을 보세요. 그들은 분명히 구원 받은 성도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분파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음란한 죄를 짓고 지탄을 받았습니다. 교인끼리 싸우고 세상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고 서로 더 좋은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하고, 교만에 빠졌습니다. 먹는 음식 때문에 시험에 들기도 했습니다.
가라지의 목표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를 보세요. 고린도 교회보다 훨씬 더 많은 문제들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분쟁 없는 교회가 별로 없습니다. 정윤교회 빼놓고 거의 전부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세상 언론에 오르내립니다. 좋을 일 때문은 거의 없고, 주로 안 좋은 일 때문입니다. 교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목회자의 윤리 문제가 종종 거론되기도 합니다. 그보다 더 많은 분쟁은 주로 취사선택의 문제들 때문에 발생합니다. 예배당 건축의 문제, 교회 재정의 집행 문제, 일꾼 선출의 문제 등등. 진리 문제도 아니고 성경에 어긋난 범죄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냥 좋은 일을 하면서 방법을 놓고 서로 다툽니다. 가라지가 미성숙한 교인들 속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악평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교회를 바라보는 관점부터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니까 무조건 완벽해야 한다는 사고방식부터 포기해야 합니다. 교인이 완전해야 한다는 생각, 교회는 완전한 시스템이나 완전한 조직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100% 모델 삼을 만 한 교회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칭찬 받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칭찬도 받고 책망도 받았습니다. 모두 다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교회들이 칭찬을 받았다고 결점이 없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장점이 돋보였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를 잘 경영하고 부흥시켜야 한다는 성장 논리도 문제입니다. 참 교회는 성장합니다. 그러나 그 성장의 동력은 천국 자체가 갖고 있는 속성이지, 인간적인 경영이나 조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교회의 성장은 주님이 하시고 성령님이 하시는 역사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성과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언제 교회를 성장시키라고 하셨습니까? 단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교인들을 훈련시키라고 하셨습니까? 단지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만큼 행하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만큼 말하면 됩니다. 모든 성도를 신앙적인 대학 졸업자로 만드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성자가 되라고 하셨습니까? 부족함을 서로 감당하면서 자라갈 뿐입니다. 교회 안에는 죽을 때까지 돌봐주기만 해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 신앙으로 평생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신앙의 성숙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 교회 생활을 하면서 완벽함을 구하려고 하나요? 우리는 본래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내가 예수 믿은 이후로 죄를 안 짖는다는 생각을 마세요. 우리는 여전히 죄를 덧붙여 갈 뿐입니다. 다만 주님께서 내 죄를 날마다 덮어주실 뿐입니다. 내 자신이 완벽하지 못한 것을 알면서 왜 남에게 완벽을 요구합니까? 교회가 부족한 면이 있다면 내가 그 부족한 면을 채우려고 노력하세요. 도와주세요. 그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내가 속한 교회를 사랑하고, 내가 속한 교회를 자랑하고, 내가 속한 교회를 위해 더 많이 헌신하세요. 그것이 곧 이 세상에서 교회 천국을 세우는 길입니다.
교회를 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불완전합니다. 미성숙 된 면도 있고, 거기에 가라지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하여 관대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끼리 싸우고 헐뜯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이나 실수를 침소봉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만 의인인양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짜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였다 해도 교회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세요.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불완전 합니다.
원수 마귀가 가라지를 뿌렸다
둘째로, 가라지의 속성입니다. 교회 속의 가라지는 전적으로 마귀의 작용입니다. 하나님 자녀들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교회가, 어떤 교인이 가라지를 원하겠습니까? 하나님 자녀들이 잠든 사이에 몰래 마귀가 가라지 씨를 뿌립니다.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27-28절)
인간적으로는 불가항력입니다. 마귀가 교회 속에 가라지를 뿌리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어떤 교회가 가짜에게 세례를 주고, 가짜에게 직분을 맡기겠습니까? 다 알곡으로 알고 영접합니다. 가짜들이 뿌려지는 것을 일반 교인들은 전혀 모릅니다. 잠든 사이에! 아무도 모르게! 교인들도 모르고, 목회자도 모릅니다. 전혀 원하지 않아도 가짜는 생겨납니다. 분쟁하고 싶지 않아도 분쟁이 생깁니다. 가시 노릇 하고 싶지 않아도 가시가 됩니다. 실족하지 않으려고 해도 실족합니다.
가라지를 심은 마귀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마귀의 목표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저는 가라지의 본색을 솔로몬 재판에 나오는 가짜 어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가짜 어미는 아이에 대한 애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두 쪽이 나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진짜 어미는 아이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다친다면 차라리 가짜에게 넘겨주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가라지도 마찬가집니다. 가라지들은 교회가 두 쪽 나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싸웁니다. 그러나 참 성도라면 교회가 손상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교인들이 상처받는 것이 걱정 됩니다. 그래서 싸우다가도 문득 바른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가짜들은 본래부터 교회를 위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갈 데까지 가자는 식으로 싸웁니다. 저는 요즘 교회들의 분쟁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다투는 교인들 속에는 분명히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습니다. 진짜들은 싸우는 중에도 말씀을 듣습니다. 회개 합니다. 교회를 걱정합니다. 주님의 명예가 훼손될까 노심초사 합니다. 가짜들은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조언도 권면도 듣지 않습니다. 회개도 없고 눈물도 없습니다. 자신들만 옳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 합니다. 교회가 깨지는지 말든지 열심히 끝까지 싸웁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라지의 속성을 알고 대처해야 합니다. 가라지는 자비가 없습니다. 긍휼이 없습니다. 용서가 없습니다. 관용이 없습니다. 주님의 명예가 손상되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가 깨져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가졌다면 가짜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가라지의 해법은 주님께 맡기는 것
셋째로, 가라지에 대한 해법입니다. 가라지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인간적으로 심판을 하지도 말고, 교회에서 쫓아내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냥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적인 해법입니다.
가라지에 대한 해법을 말씀드릴 때에 먼저 알아야 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권징입니다. 가라지를 쫓아내는 일과 교회의 권징은 전혀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가라지를 쫓아내는 일은 교회 안에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작업입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권징은 참 신자 속에서 드러난 잘못을 징계하는 일입니다. 교회에서 쫓아내자는 차원이 아닙니다. 참 신자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교회의 질서를 세우자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도 형제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바로잡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마18:15-18)
이제 다시 가라지를 놔두라는 말씀으로 돌아와 생각해 봅시다. 주님의 종들은 가라지를 뽑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추수 때에 주님이 다 처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28-30절)
교회가 가라지를 그냥 놔둬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사람의 눈으로 가라지를 골라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의 본색은 결실할 때, 추수 때에 나타납니다. 상당 기간 경과될 때까지 참 신자와 가짜는 구별하기 힘듭니다. 저는 어려서 벼농사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논에는 피라는 잡초가 납니다. 피는 벼와 모양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웬만큼 자랄 때까지는 벼인이 피인지 구별이 안 됩니다. 그런데 한참 자라서 이삭이 나올 무렵이 되면 확실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서 가짜들이 그렇습니다. 상당 기간 참 신자들과 같은 신앙 생활을 합니다. 예배 잘 드리고, 기도도 잘 하고, 성경도 보고, 봉사활동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가라지 본색을 드러냅니다. 교회 공동체를 해롭게 하는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해롭게 한다고 다 가라지로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진짜 같은 가짜가 있고, 가짜 같은 진짜도 있습니다. 진짜와 가짜는 오직 주님 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섣불리 가짜라고 단정하지 말고, 가부간 주님께 맡겨야만 합니다.
가라지를 놔두는 두 번째 이유는 알곡이 다치기 때문입니다. 가짜를 쫓아내려고 하다가 알곡이 손상을 입습니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9절)
교회 분쟁 때문에 상처 받는 사람들은 싸우는 당사자가 아닙니다. 곁에서 바라보는 많은 신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모릅니다. 때로는 진짜를 욕하고, 가짜들을 동정합니다. 어느 편을 들다가 함께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덮어두고 주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가라지를 놔두는 세 번째 이유는 분명한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가짜를 모르고 천국에 들여보내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교회를 해롭게 한 가라지를 심판하지 않고 지나치는 일도 결코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굳이 심판하지 않아도 가라지는 필요하고 충분한 만큼 심판을 받습니다. 償善罰惡이 분명히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가 가라지 선별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41-43절)
교회는 지상에서 시작된 천국입니다. 그런데 가라지 때문에 골치 아프십니까? 누가 정말 가라지처럼 보입니까? 뽑아버리고 싶으십니까? 처단하고 싶으십니까? 참으세요. 교회는 불완전합니다. 가라지 배후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가라지는 사람의 산물이 아니라 마귀의 산물입니다. 가라지는 인위적으로 제거하기 힘듭니다. 가라지를 제거하려다가 멀쩡한 사람이 다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맡기세요.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 주님의 판단은 정확하십니다. 진짜와 가짜를 분명히 가려내십니다. 주님의 심판은 정확하십니다. 혹시 가짜를 놔주는 법은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만큼 충분한 벌을 내리십니다. 안심하세요. 마음 놓으세요. 가라지를 주님께 맡기세요. 그리고 행복한 교회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가르침을 지켜 행합시다
마 13:24 / 강성찬 목사
중세기의 유명한 철학자 루소는 예수 믿는 사람을 향해서 빈정거리면서 "도대체 교회라는 것을 보면 이상해. 교회 가서 보면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충성 딜레마에 빠져 있어. 모두가 충성 딜레마에 빠져 있어. 하나님 나라만 찾고 있어. 하나님 나라만 저렇게 찾고 충성하다가 어떻게 그들이 세상 나라의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겠는가? 세상 국가에 훌륭한 시민이 되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만 날마다 찾아서 되겠는가?'하고 빈정거렸다합니다. 그럴 때 캠브리지 대학의 C.S. 루이스 교수가 거기에 대해서 "하늘을 겨냥하라. 그러면 땅은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땅을 겨냥하라. 그러면 어느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을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묻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마 13:10)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의 비유 중 가장 중요하고 독특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이며, 이 비유들은 예수의 가르치심 중에서 핵심적인 것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행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들은 단순한 예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천국 비유를 통해서는 사람이 천국에 가려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과 천국의 특성을 설명해 줍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하십니다. 이를 통해 말씀을 받아들이는 상태를 유형별로 나누어 교훈 하셨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길이 너무 단단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가능성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이 길의 땅처럼 너무 단단하고 완악하여 전혀 받아들일 여지를 가지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악한 마음을 말합니다. 길가를 특징 지워 주는 단어는 '단단함'입니다. 단단하다는 것은 굳은 상태를 말합니다. 굳어진 마음은 폐쇄적인 마음입니다. 마음의 문을 꼭 걸어 잠근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 잡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용납도, 포용도 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강퍅한 마음은 복음의 씨를 키울 수 없습니다. 많은 불신자들이 이와 같은 마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길가와 같이 단단하게 각질화 된 마음은 진리를 듣긴 들어도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므로 진리를 믿지 못합니다. 아무리 세상적 지식과 지혜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마음이 길가와도 같은 사람은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은 얕은 마음입니다. 돌밭은 흙이 얇은 곳으로 씨앗이 뿌리를 내리되 깊이 내리지를 못합니다. 돌밭 마음은 일단 말씀을 듣고 깨닫기는 하나 뿌리를 내리지 못하므로 그 말씀에 확신이 없습니다. 정말 그럴까 의심하며 확실하게 믿지를 못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의 신앙은 넘어지기 쉽습니다. 시험이 닥치면 쉽게 포기합니다. 한때의 열정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듯하다가 곧 식어 버립니다.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믿음을 저버린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은 부드럽고 좋은 땅이지만 씨가 자랄 때 가시와 함께 자라게 되어 열매에 상처를 입어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염려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염려는 '분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아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지만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믿음을 해치는 성도들의 상태를 말합니다. 유혹에 쉽사리 빠지는 마음입니다.
좋은 땅은 영양소를 풍부히 담고 있어 한번 떨어진 씨가 싹을 내면 열매를 맺기까지 자라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되 끝가지 받아들여 의와 생명의 열매를 맺는 신실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은 좋은 열매를 맺는 마음입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 마음입니다.
프랭클린 박사는 그의 생전에 신앙의 열매에 대해 크게 강조했었다고 합니다. 그 한 예로 그는 자신의 반지에 시편 1편 3절을 묘사한 열매 맺는 나무를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임종이 가까울 무렵 유언을 부탁하는 그의 아들과 후임 목사에게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으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새겨 생활에 적용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전도사가 시골의 노인들에게 영생하는 약이 있는데 이것을 먹으면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했다합니다. “그게 사실이오?”라고 한 노인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 전도사는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합니다. “그럼 빨리 그것을 내게 주시오. 나도 영생 좀 하게.”라고 그 노인이 말했다합니다. 그 때 그 전도사는 성경 한권을 가방에서 꺼내어 그 노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이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있는데 구약과 신약을 잡수시면 반드시 영생할 것입니다. 만약 할아버지께서 구약과 신약을 다 읽고도 영생하지 못하시면 제가 반드시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약을 먹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보약처럼 푹 끓여서 먹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읽어서 먹는 약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노인은 그 전도사의 지혜에 감동을 받고 열심히 그 성경을 읽었습니다. 훗날 그 노인은 전도사님이 세운 교회에 장로님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들어도 생활의 열매가 없다면 그 영혼은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밭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말씀을 잘 들을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씨를 뿌리신 주님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이 잘 때에 그 원수가 가라지를 덧 뿌리고 같다고 갔더니 결실 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자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니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 둘 다 추수때 까지 함께 자라가 두라고 합니다.
빛과 어둠이 함께 거하듯이 알곡과 가라지는 함께 거합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다른 곳에 따로 거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지경 안에서, 그리고 같은 세상에 거하듯이 선과 악은 모두 함께 공존합니다. 알곡과 가라지 둘 다 모두 주인의 보호를 받습니다. 주인의 관심은 오로지 알곡에게만 있으나 그의 은총은 가라지에게도 내려집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라지에 대한 주인의 관심이나 사랑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선인을 보호하고 돕기 위함입니다. 가라지의 때가 추수할 때까지인 것처럼 그들의 때는 최후의 심판 때까지이기 때문입니다. 추수 때가 되면 주인이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는 것과 같이 의인에게는 상급으로 악인에게는 영벌로 구별하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하십니다.
겨자씨 비유는 천국의 전 세계적 성장과 영향력을 가르쳐 줍니다. 비록 그 시작은 미미해서 '모든 씨보다 작은 것'으로 비유되는 '겨자 씨 한 알' 같은 출발점을 시사하지만 그 결국은 위대한 성장을 기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작은 것으로, 미미한 것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마 25:21; 욥 8:7). 그러므로 작은 것이라도 심어야 합니다. 작은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겨자씨는 정말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라면 말을 탄 사람의 머리 위보다 높이 자라서 새들이 깃들 정도로 크게 자랍니다. 작은 것이라고 결코 소홀히 여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 자에게 큰일도 맡기십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라고 합니다.
한국 교회의 초기 선교사들은 네비우스(Nevius) 원리를 가장 기본적인 선교 정책으로 강조했다합니다. 이는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으면 그를 끝까지 떠나지 말고 가르쳐서 그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일꾼이 되도록 하여 자기 직업에 종사하면서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었다 합니다.
누룩은 '부패와 타락'의 상징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으나(마 16:6; 고전 5:6-8), 여기에서는 누룩의 발효가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을 누룩으로 비유하신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누룩의 효과처럼 천국의 임재는 삶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삶을 변화시키는 종교요 변화의 능력을 가진 종교입니다. 무엇보다 개인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한낱 어부에 불과했던 베드로 하루에 삼천 명이 제자를 얻는 유능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행 2:37-41).
과격하고 관용이 부족한 사람 요한은 한 때는 사마리아 지경의 통과를 거부한 자들에게 불로 멸하기를 기대할 정도의 위인이었으나 후에는 '사랑'을 가장 많이 외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훼방자요, 포행자요, 죄인 중의 괴수라고 스스로 고백했던 바울은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할 만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딤전 1:13-15; 고전 4:6).
세리장 삭개오의 변화도 잊을 수 없습니다(눅 19:8, 9).
방탕과 이교의 길로 방황하던 어거스틴의 변화나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의 변화는 교회사에서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마치 누룩의 발효처럼 한 인간의 삶을 놀랍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종교입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합니다. 때마침 친구는 집에 없고 집안일을 책임지는 하인이 대신해서 그를 맞아주었다 합니다. 하인은 조금만 기다리면 주인이 돌아올 거라며 그를 거실로 안내했다합니다. 그가 소파에 앉자 하인은 따뜻한 홍차 한 잔을 내왔다합니다. 하인이 건넨 쟁반에는 기다리는 동안 간단히 읽을 만한 책 한 권까지 곁들여 있었다합니다. 작은 배려에 감동한 그는 가벼운 고갯짓과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합니다. 그 후 하인은 하던 일을 끝마치려는지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합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합니다. 남의 집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머쓱해진 셰익스피어는 차라도 한 잔 더 얻어 마실 생각에 부엌으로 갔다합니다. 그런데 부엌문을 연 순간 그가 발견한 것은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혼자 양탄자 밑을 청소하고 있는 하인의 모습이었다 합니다. 그곳은 누가 일부러 들춰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더러운지 깨끗한지를 알 수 없는 그런 곳 이었다 합니다. 그런데도 하인은 누가 뒤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주인이 억지로 시킨 것 같지도 않은데 혼자 콧노래를 불러가며 양탄자 밑을 닦고 있었다합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순간 셰익스피어는 젊은 사람들로부터 인생의 성공 비결이 무어냐는 질문과 누구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혼자 있을 때에도 누가 지켜볼 때와 다름없이 행동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무슨 일에서나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곤 했다합니다.
주님 안에서 변화 받은 성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비유를 합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이며, 이 보화를 얻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그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삽니다. 또한 천국은 극히 값진 진주이며, 이 진주를 얻기 위해 어떤 상인은 모든 것을 다 팔아 그것은 삽니다. 보화가 감추인 밭을 발견하고는 자기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다는 것과, 값진 진주를 발견한 후 자기 소유를 다 지불하고 그 진주를 산다는 말씀은 곧 천국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획득하는 것임을 교훈해 주는 것입니다. 실로 천국은 너무나도 값진 것이고, 이 세상 것과 대립하는 것이어서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는 획득할 수 없습니다(마16:24). 예수의 사역에 의해 계시된 천국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므로 누구라도 천국을 얻을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어떻든 무방합니다.
기차 안에 그리스도인 노동자가 군인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있었다합니다. 한 군인은 사병이었고 다른 군인은 30대 중반의 상사였다 합니다. 그들 둘 다 전투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젊은 사병은 매우 행복하고 쾌활해 보였다합니다. 노동자는 그 젊은이에게 "무엇이 그렇게 행복하고 기쁩니까?"라고 물었다합니다. 젊은이는 "아, 그거요, 저는 상당한 유익을 보았거든요"라고 대답했다합니다. "상당한 유익이라고요? 그게 대체 무엇인가요?" "저는 거기서 그리스도를 발견했다합니다. 저는 한창 전투중일 때 과거에 배운 대로 그리스도를 의지했다합니다. 그래서 저는 구출을 받았고 그 이후 그분 때문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투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병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던 것 이었다 합니다.
로마 감옥의 바울도 역시 그러했다합니다. '천국 보화'를 발견한 자로서 큰 고통도 빼앗지 못할, 오히려 큰 고통 때문에 더 힘차게 솟구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흩어진 선택된 나그네들에게 편지하면서 여러 가지 시련들 중에서도 큰 기쁨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벧전1:6).
천국 보화를 발견한 자는 '이기지 못하는', '힘에 겨운'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물 비유를 합니다.
그물을 끌어올려 놓고 보면 쓸모없는 것들도 함께 걸려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물에 걸렸다고 해서 이런 것들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좋은 것들은 건져내어 준비해 둔 그릇에 담고 조금도 쓸모없는 것은 가차 없이 내어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나쁜 것도 있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합니다. 좋은 것은 취하되 나쁜 것은 버려야 합니다. 세상 끝 날에도 이와 같은 선별 작업이 있게 됩니다. 어부의 선별 작업은 세상 심판 날 바로 인류를 향한 주님의 심판 원리입니다. 물고기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별하듯 성도를 알곡과 가라지로 구별합니다. 즉 심판 날에는 천국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과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구별됩니다. 용서받은 죄인과 그렇지 못한 죄인이 갈라서게 됩니다. 의인과 악인을 반드시 구별됩니다. 예수님의 좌우에 갈라선 양과 염소와 같이, 소돔과 고모라 때의 롯과 죄악의 도성과 같이, 그리고 심판 때의 의인과 악인과 같이 선과 악은 반드시 구분되고 의인과 악인은 반드시 구별됩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는 어부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선택의 복을 받은 고기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상급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 간악한 스코틀랜드인 변호사가 있었다 합니다. 한번은 말을 빌렸는데 사고였는지 거칠게 다루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이 죽고 말았다 합니다. 자연히 주인은 자기가 입게 된 손해보상과 함께 말 값을 지불하라고 주장했다합니다. 변호사는 손해배상은 기꺼이 지불하겠지만, 당장 현금이 없으니 현금대신 약속 어음을 받겠냐고 말 주인에게 묻자, 그 말 주인은 기꺼이 승낙했다합니다. 그러자 변호사는 지불할 기한이 필요하다고 했다합니다. "시간은 마음대로 하시죠."라고 말 주인이 말했다합니다. 그러자 간악한 그는 심판의 날에 지불하도록 어음을 발행했다합니다. 결국 말 주인은 그 문제를 법정에 가져갔고, 거기에서 변호사는 자신의 변호에서 판사에게 어음을 보라고 말했다합니다. 그러자 판사는 어음을 보고 나서 "약속어음은 완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심판의 날이므로 내일 지불할 것을 판결합니다." 라고 했다합니다.
천국에 대한 예수의 일반적인 비유들 속에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것이고, 진행 중이고 '앞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심령에 이미 임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라고 합니다.
이런 풍자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상을 지냈던 매나헴 베긴 수상이 재임시에 어떤 때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다합니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께서 그를 후하게 환대해서 맞이했다합니다. 그 환대를 받으며 백악관 집무실에 들어가게 됐다합니다. 방에 들어서면서 첫눈에 뜨인 것은 그 커다란 테이블 한가운데에 있는 세 개의 전화였다 합니다. 세 대의 전화를 보니까 하나는 백금으로 만든 것 같은 하얀 전화기이고, 또 하나는 빨간 전화기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금으로 만든 것 같이 누런 황금빛의 전화가 있더랍니다. 베긴 수상이 속이 좀 뒤틀려서 빈정대는 말로 물어보았다합니다. "이 전화기 세 대는 무엇에 쓰는 거요?" 하고 물었다합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아주 어깨에 힘을 주고 대답을 했다합니다. "흰색은 행정부로 통하는 것이고 주로 공무에 대해서 쓰는 전화이고, 이 빨간색을 구소련과 직결되어있는 비상전화이고, 황금색으로 된 것은 하나님과 통화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합니다. 베긴 수상이 "그러면 하나 물어봅시다. 하나님과 통화할 때 통화료가 얼마요?" 레이건 이 빙그레 웃으면서 "만 달러요. 그거 만 달러 가치가 있는 겁니다" 라고 했다합니다. 얼마 후에 레이건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하게 되고 베긴 수상의 집무실에 들어가게 되었다합니다. 거기 역시 전화가 세 대가 있어서 한번 물어보았다합니다. "이 전화기는 어디에 쓰는 거요?" "이 백색 전화는 국회의사당하고 연결된 걸로 공무로 사용하고, 가운데 있는 빨간 거는 이집트하고 연결된 비상전화요. 노란 것은 하나님과 통화하는 것이요" 하고 얘기했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또 한마디 물어보았다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통화할 때 통화료가 얼마요?" 했더니 베긴 수상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여기는 십오센트입니다." "거 왜 그렇게 싸요?" 이제 베긴 수상이 중요한 대답을 했다합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과 통화할 때 이곳은 하나님의 나라의 지방도시이기 때문에 국내 전화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하나님의 선민이요. 선민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건 하나님의 도시이니까 국내 통화로 된다고 했다합니다.
미국은 만달러 이스라엘은 십오센트로 통화하나 우리는 공짜로 통화합니다. 왜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주님과 함께 하시는 신비적인 연합 속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이니 성령안에서 직접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천국은 교회의 완성된 상태라 하기도 합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고 합니다.
천국의 완성은 주님 오심으로 되어 집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합니다.
그러므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재림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비밀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의 개념은 우리의 개념과 다르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합니다.
서울 총각과 강원도 처녀가 서로 결혼을 약속했다합니다. 식을 치를 날이 됐다합니다.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강원도로 내려갔다합니다. 신랑은 부유해서 뒤따르는 행렬도 대단했다합니다. 동네사람들은 서로 누구네 집 잔치냐고 물으면서 모두가 어리둥절한 채 쳐다보고 있었다합니다. 놀라운 것은 당사자인 신부조차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합니다. 그러니 신랑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가? “아니, 오늘이 결혼식인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어떻게 오늘이 결혼할 날인가요?” “무슨 말이오? 우리가 떠날 때 오늘을 결혼날로 약속하지 않았소?” 알고 보니 서울 총각은 양력으로, 강원도 처녀는 음력으로 날을 받아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 한달 차이가 난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음력으로 날을 받아놓고 예수님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그날을 늘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속히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 행하며 한 영혼을 전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되 천국의 가르침을 지켜 행하며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재림의 신앙으로 무장하고 잘했다 칭반 받는 자리에 함께하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곡식과 가라지(천국 비유 2)
마 13:24-30 / 이강웅 목사
서론: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가장 힘든 문제 중의 하나는 ‘악인의 번영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문제입니다. 시편 1편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삶이 명확하게 구분 됩니다. 악인은 멸망할 것이고, 의인은 형통하며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며 말씀에서 떠나지 않기를 결단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많은 어려움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불편해지고, 실망하며 낙심하게 됩니다.
시편 73편에서 시편 기자의 고민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절) 시편 기자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서 자신의 신앙에 위기를 맞이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시라(1절)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세상을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악인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시험이 들었습니다. 즉,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평안과 그 부요함이 부러웠고, 질투가 났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사람들이 흔히 당하는 그런 고통도 없고, 재앙도 그들을 피해 가는 것 같습니다.’ 오만과 폭력을 마치 액세서리처럼 목에 걸고 살아가는 악인들이 형통하게 살아가는 듯이 보일 때, 주님을 정직하게 그리고 묵묵하게 따라가던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도 초라하게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악인인데도 언제나 신세가 훤하고 재산도 척척 늘어만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고난 중에 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 하에 살아가는 우리는 빈익빈 부익부의 극단적 양극화 현상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회 구조 아래에서는 한 번 가난이라는 수렁에 빠지면 좀처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자식 세대까지 되물림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세상을 보면 속이 상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거친 비판으로 입에 가득 차게 됩니다.
시편 기자의 고뇌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죄 짓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바둥거린 것이 다 의미 없는 일이었는가? 그렇다면 나도 저들처럼 살아야하는가? 저들처럼 좀 속이면서, 좀 타협하면서 살 걸 그랬나? 그러면 나도 좀 쉽게 살고, 돈도 더 가질 수 있었을 텐데.’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다가 그렇게 사는 것은 주님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괴로워하며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 반전이 이루어지지요.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래서 악인의 종말이 확실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심판의 날이 갑자기 홀연히 닥칠 것이며, 그 심판이 임하면 그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영화와 평안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목을 매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양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좌절과 체념 속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지금 눈 앞에 보고 있는 것은 분명히 현실인 것 같은데 신앙의 길은 그렇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어떤 기대를 걸고 있지만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성급한 판단을 내리며 실망하기 쉽습니다. 특히 코로나팬데믹 상황이라서 더욱 그렇습니다. 겉으로 볼 때 하나님 나라의 일이 위축되고 후퇴하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천국 비유를 듣기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실 때 제자들은 흥분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칼과 창에 의해 억압되고, 종교적으로는 타락한 제사장들이 거짓으로 이끌어 가고, 경제적으로는 부한 자가 악랄한 방법으로 가난한 자들을 수탈하고 빼앗아고 있는 불의한 사회에 메시아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흥분이 되고 기대가 크겠습니까? 의인이 고통을 당하고 악인이 득세하고, 신앙으로 바르게 살고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세상이 마침내 올바르게 뒤집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침내 공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세상이 왔다고 믿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일거에 죄와 불의가 제거하시고, 의롭고 거룩한 나라가 세우시리라는 기대감에 크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렇게 기대감에 한껏 흥분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이란 좋은 씨를 밭에 뿌린 것과 같은데 사람들이 잠든 밤에 원수가 몰래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곡식만 자라야할 밭에 가라지 또한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발견한 종들이 주인에게 고하여 뽑자고 하니 주인이 이를 만류합니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함께 뽑힐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는 불사르도록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곡간에 들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해석하시면서(36-43절)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 즉 주님이시고, 밭은 세상을, 그리고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복음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 즉 마귀의 세력에 속한 사람들, 하나님을 거절하고 반역하는 무리들을 말하고, 원수는 사단 마귀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추수 때란 세상 끝이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의미하고, 추숫군은 천사들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자들에게 천국이란 ‘이미(already) 그러나 아직(yet)’이란 사이에 있음을 일깨워 주시고자 주신 것입니다. 천국은 메시아로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악의 세력들이 쫓겨 나가고 있지만 아직 완성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의 잘못된 기대감과 흥분은 절제되어야 하고, 믿음으로 인내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비유의 해석
가라지라는 단어는 마태복음 13장 전체에서 여덟 번이나 반복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라지는 밀과 아주 흡사하게 생겼지만 밀의 종류가 아니고, 독보리의 일종입니다. 일종의 독초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가라지를 잘못 먹게 되면 흔히 구토증이 생기고, 심하면 생명의 위험까지 처할 만큼 아주 독한 잡초입니다. 크기가 밀보다 좀 작다는 것이 차이점이지만 자라나는 모습은 거의 비슷합니다. 그래서 가라지가 자라날 초기 단계에는 사람들이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열매를 맺게 될 때 비로소 잘 구별할 수 있습니다.
가라지를 뿌리는 자는 바로 사단 마귀라고 했습니다. 밭은 이 세상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은 좋은 씨들을 세상에 많이 뿌렸습니다. 그런데 마귀도 가라지를 함께 뿌려 곡식과 함께 자라도록 했습니다. 왜 마귀가 곡식밭에 가라지를 뿌릴까요? 그것은 두 가지 경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마귀도 자신의 열매를 거둬 드리기 위해 씨를 뿌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추종할 더 많은 군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가진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오늘 비유에도 밤중 모두들 잘 때에 원수가 숨어 들어와 가라지를 뿌리고 가는 교활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구원 받는 천국의 열매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밭에 있는 가라지는 곡식이 필요로 하는 거름을 다 빼았고, 또 성장을 방해하여 잘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즉, 사단 마귀는 하나님 백성들이 올바르게 성장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천국 곡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곡식과 가라지는 자랄 때 거의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합니다. 오히려 가라지가 싱싱하게 더 잘 자랍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된 복음, 거짓된 이단, 거짓된 종교 운동이 교회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더 빠르게,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갑니다. 사람들이 볼 때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저렇게 믿어야 되지 않겠느냐할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성경 공부하자는 꾀임에 빠져 이단으로 넘어가는 자 중에 70-80 프로가 기존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단들은 기존 교회들의 부조리와 부패를 지적하고, 자신들만 참교회이고, 참진리는 자신들만 가지고 있다고 설득합니다. 교회에서 체계적으로 성경공부를 하지 못하고 왔다갔다했던 사람들에게 몇가지 교리를 손에 꽉 쥐어주고 이것이 참진리라고 가르칩니다. 일단 이단교리의 논리에 넘어가면 나중에는 교주가 재림한 예수라고 가르쳐도 그대로 믿고 따라갑니다. 이것이 사단이 쓰는 가장 무서운 속임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말합니다.(고후 11:14) 빛나는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밭의 주인은 곡식을 방해하는 가라지들을 왜 일찌감치 뽑아 버리라고 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가라지를 뽑다가 자칫 진짜 곡식도 함께 뽑힐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종들이 가라지를 뽑는다고 곡식을 가라지로 잘못 알고 뽑거나, 제대로 뽑는다고 하더라도 곡식까지 함께 뽑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라지의 뿌리는 곡식보다 더 깊게, 그리고 더 넓게 퍼져 있어 곡식의 뿌리와 엉켜 있기 때문에 가라지만 뽑으려 해도 그만 곡식까지 함께 뽑히게 됩니다. 밭에 가라지가 있다고 곡식까지 뽑아 버릴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속담에도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워버리는 어리석음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까? 주인의 관심은 알곡을 거두어 드리는 것입니다. 밭에 가라지가 있지만 알곡을 거두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곡식이 여물어 잘 익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사릅니다. 알곡은 모아서 곳간에 넣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하늘 곡간에 들일 우리 성도들을 얼마나 아끼고,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생생하게 그 마음이 전달되지 않습니까?
2. 비유의 교훈
1) 인내하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우리가 이 비유에서 배울 점은 고통스럽더라도 추수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들은 밭에 가라지가 나온 것을 보고 가서 ‘지금 당장 뽑아버릴까요?’라고 주인에게 묻습니다. 그들 마음에 지금 당장 가라지를 뽑아버리면 시원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종들에게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둘 다 추수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말합니다.
죄가 관영하는 세상에서 사는 우리 모두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속히 죄와 악을 끝내고, 의와 거룩, 자유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루 속히 악인들이 멸망을 당하고, 공의와 은혜로 충만된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주님은 추수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성급한 심판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그릇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여기에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으니 의심하지 말고 추수 때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코로나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불의로 인하여 불평하지 말고, 참고 견디며 하나님 믿는 신앙에서 굳게 서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에 더욱 열심을 내며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벧후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어 하나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서기까지 자라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추수 때가 오기 전에 많은 열매를 맺는 우리 신앙생활이 되기 바랍니다.
2) 가라지보다 곡식을 보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종들은 가라지를 보고 놀라 주인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가라지가 유독 크게 보였습니다. 가라지 때문에 모든 밭이 못쓰게 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곧 모든 밭은 가라지로 꽉 차버리고 말 것이라고 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인의 대답에는 너무나도 여유가 있습니다. 가만 두라는 것입니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합니다. 주인은 결코 초조하지 않습니다. 여유 만만합니다. 그는 결코 가라지가 그 밭 전체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곡식에 비교하여 볼 때 가라지는 별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렇듯 주인과 종들의 안목은 서로 상반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주인이 가졌던 안목입니다. 우리가 세상이나 사회를 돌아 볼 때에 거기서 보이는 것은 온통 가라지 뿐입니다. 신문과 방송을 들어보십시오. 전부 어둡고 악한 소식이 매일 톱뉴스로 보도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불의와 부조리와 부도덕과 착취와 억압만이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직장과 사회, 가정,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개인의 생활에서도 항상 짜증스러운 일들과 고통스러운 일들이 먼저 눈에 띕니다. 신앙생활에도 죄로 얼룩져 있고, 실패와 좌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절망하고, 늘 낙심하며, 늘 한숨 짓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 눈을 들어 다시 보라고 하십니다. 가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밭에는 알곡이 충실하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악의 역사는 언제나 사람들 눈에 두드러지게 보입니다. 가라지가 쑥쑥 잘 자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상으로 과장되어 보이기에 우리는 이에 압도되고 절망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 주님이 뿌린 곡식들이 조용히 자라고 있습니다.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눈에 확 드러나지 않습니다. 금방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놀라운 세력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힘있게 진군해 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3)복된 자리를 놓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에 불의가 득세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곡식과 가라지는 자라는 동안에는 별차이 없어 보입니다. 똑같이 햇빛과 비를 누리고, 거름을 나눠갖습니다. 한 번 우리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믿지 않은 사람과 믿는 사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어 보입니까? 별 차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 끼 밥 먹으면 저들도 세 끼 먹고, 직장에서 일하고, 좋은 집에 잠을 잡니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이 일하거나 놀 때에 우리는 부지런을 피우며 교회로 나오는 것뿐입니다. 이외 겉으로 볼 때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그 결말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마 13: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런데 알곡은 (마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복됩니다.
결론: 2차 대전 연합군이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착륙하는 작전 날짜를 암호명으로 D-day로 불렀습니다. 독일군이 전 유럽을 점령하고 있었지만 D-day를 깃점으로 전세는 결정적으로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었습니다. 이제 독일의 패망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승리가 눈앞에 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쟁이 그친 것이 아닙니다. 독일이 완전 항복하는 V-day, Victory-day 까지 연합군은 계속 싸워야합니다.
지금 우리는 D-day와 V-day 사이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사단은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어둠의 세력은 계속 패퇴하고, 복음 전파로 점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영적 싸움은 계속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결정적 패배를 당했지만 완전히 항복하는 그 날까지 계속 저항할 것입니다. 자기의 때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계획을 좌절시키고자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우리 주님이 결론을 내리실 것입니다. 정리하실 것입니다. 곡식은 곳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불 태울 것입니다. 마귀와 그를 추종하는 모든 악한 자들은 불못에 던지우게 될 것이고, 주님을 신실하게 믿던 이들은 영광과 존귀함으로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실족하지 않도록 영적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더디 이루어져 간다고 쉽게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만을 의뢰하며 살겠다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리십시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 암아 살리라”고 하십니다.
나는 진짜 신자인가?
마 13:24-30, 36-43 / 스데반 황 목사
자신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참된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 오시는 주님을 통하여 자신의 죄성과 자아와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능력을 체험치 못한다면 그는 아직 신자가 아닙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깨닫지 못했으면 이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신자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이단들, 가짜들, 가라지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땅에 많아질 것을 미리 알려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대한 해석은 36-43절입니다. 먼저 37절을 보니,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라고 합니다. ‘인자’는 예수께서 자신을 소개하실 때 쓰는 용어였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리셨다고 말씀합니다. 38절을 보니, 밭은 세상이요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주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라는 밭에 주님께서 좋은 씨를 뿌리십니다.
그 좋은 씨는 누구입니까? 그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입니다. 천국의 아들들은 천국 백성으로써 진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참 자녀들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주께서 친히 이 세상 이곳저곳에 참신자를 심고 계심을 말합니다. 복음을 통하여 천국의 아들들을 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참신자를 심고 계시는 반면, 28절을 보니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심고 있습니다. 39절을 보니 이 원수는 마귀라고 말하고 있고, 이 세상에 심긴 가라지들은 마귀의 아들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라지는 사탄의 자녀입니다. 거짓 신자들에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주님은 요한복음 6장 70절에서 가룟 유다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즉, 가룟 유다는 마귀에게 속한 자요, 마귀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보면, 죄악이 들어온 이후 이 세상의 역사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에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이 구절은 사탄과 여인은 영원한 원수이며,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또한 서로 원수가 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이 세상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즉 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간에는 계속 원수 상태로 있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더 중요한 것은 요한일서 3장 11-12절입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이 말씀에 의하면, 사탄은 이 세상에 가라지를 계속 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들과 원수이며 따라서 가라지들와 알곡들은 서로 하나로 연합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는 형제이다. 인류는 한 가족이다.”라는 슬로건에 속지 말기 바랍니다. 이러한 슬로건은 인본주의의 헛된 망상일 뿐입니다. 성경은 사탄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가 각각 존재하며 이들은 영원히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두 존재는 출생의 기원이 다릅니다. 또한 그들이 도착할 목적지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둘이 화합하지 못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 이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믿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러한 증거로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래 사탄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멸절 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구약의 모세 법은 사탄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화합하지 못하도록 정하셨습니다. 즉, 불신자와 결혼하거나 이방 나라 사람과의 결혼을 불허한 것입니다.
최근에 종교 다원화 주의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장하길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종교는 인류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교 간의 전쟁과 미움을 싫어하시며 우리 모두가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며 사랑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마귀의 주장입니다. 성경을 내다 버리지 않고는 이러한 주장이 맞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39절을 보니 이 세상에는 추수의 때가 있습니다. 그때 추수꾼이 등장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 때는 세상 끝이며 추수꾼은 천사들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이때 이 추수는 가라지를 향한 심판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40절에 보니 추수꾼들이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릅니다.” 가라지들은 결국 풀무 불에 던져져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합니다(42절). 이 내용을 계시록 21장 8절을 통해 보니 풀무불은 다름 아닌 둘째 사망으로써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의 역사와 종교사는 가라지와 좋은 씨 사이의 갈등의 역사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전쟁 역사인 것입니다. 이 갈등은 사람의 힘으로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선과 악이,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가라지와 좋은 씨의 갈등은 주님의 추수 때까지 계속 될 수 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오직 속고 속이는 자들만이 가라지들과 좋은 씨앗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탄이 가라지를 언제 어디에다 심는지 말합니다. 본문은 사탄이 ‘세상’에 가라지를 심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한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25절) 심는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바울 서신과 함께 보면 사탄은 쉬지 않고 “곡식 가운데” 즉, 교회 내에 가라지를 침투시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조, 갈 2:4; 딤후 3:6; 벧후 2:1; 유 1:4). 본문은 이 내용을 확실하게 말합니다. 주님은 교회 내에 사탄이 심은 가라지들이 있으며 이들은 사탄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 사탄은 세상이나 교회 안이나 가라지를 계속 뿌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라지도 함께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가라지를 구별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사탄은 가라지를 뿌리기 위해 진리를 왜곡하고 가짜와 유사품을 많이 만들어 냅니다. 사탄은 종교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교를 권장하고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합니다. 즉, 사탄의 역사는 세상 종교를 통하여 역사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본문 38절은 사탄을 악한 자(포네이로스)라고 부르는데, 이 원어의 뜻에는 ‘질투하는 존재’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즉, 사탄은 질투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가 무엇을 질투합니까? 하나님을 질투합니다. 하나님의 무엇을 질투합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즉, 사탄이 가장 원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받으시는 예배를 자기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거짓 종교자들과 가라지들을 통해 예배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 종교를 통해 예배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 사탄의 교회를 향한 가라지 작전은 교회 내에 위조 복음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짜 종교 상품들을 집어 넣는 것입니다. 즉, 가짜 복음, 가짜 예수, 가짜 성령을 교회 내에 뿌리는 것입니다.
곡식과 가라지는 처음에 볼 때 매우 비슷합니다. 구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흉계와 모방을 아시고 그의 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곡식과 가라지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역사는 모방이며 가짜라고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위조합니까? 고린도후서 11장 3-4절을 보면 정확하게 이 내용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첫째, 사탄은 다른 예수를 교회에 심습니다. 즉, 거짓 예수를 심습니다. 몰몬교, 즉 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교를 보십시오. 이슬람이 믿는 예수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자유주의자들도 신이 아닌 인간 예수를 가르칩니다. 뉴에이지도 우주적 예수를 말합니다. 그들은 참 성도들에게 외칩니다. “여보시오, 우리도 예수를 믿는다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예수냐 하는 것입니다. 가라지들도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이 믿는 예수는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가짜 예수입니다. 자신들이 만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성령과 사도들이 전파하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예수를 전하고 다른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이 심는 거짓 예수는 예수의 이름을 도용한 사탄의 예수로서 적그리스도입니다.
또한 사탄은 다른 영을 심습니다. “오, 저는 이 영이 진짜인줄 믿지요. 왜냐하면 영적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 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다른 영이 있습니다. 그 다른 영은 다름아닌 악령입니다. 거짓 영입니다. 성령을 모방하는 가짜 영입니다. 거짓 예수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거짓 영이 있습니다. 이 영은 언제나 성령을 모방합니다. 사도 요한이 주의 백성들에게 당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또한 사탄은 다른 복음을 심습니다. 다른 복음은 거짓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6-8절은 다른 복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다른 복음은 참 복음이 아닙니다. 위조된 복음입니다. 변질된 복음입니다. 추가 복음이거나 또는 이것 저것을 뺀 상쇄 복음입니다. 왜곡된 복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변질된 복음이며 위조 복음이기 때문에 참 복음과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분별하기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짜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단입니다. 바울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선포이기도 합니다. “천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다른 복음, 유사 복음, 거짓 복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 복음이 있으면 반드시 누가 있습니까? 거짓 복음을 전하는 거짓 사도, 거짓 선지자, 거짓 목사, 짓 선생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13-15).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 거짓 선생, 거짓 목사, 거짓 선교사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짜 사도들이 나타나 스스로를 예수의 사도로 주장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복음처럼 들리지만 복음이 아닙니다. 사람을 속이는 거짓 복음입니다. 바울은 거짓 복음이 어떻게 들리며 누가 듣는지 말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딤후 4:3-4). 거짓 복음은 귀를 긁어 주는 복음입니다. 인간의 탐욕을 만족시켜주는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대 교회 가운데 현란하고 입심 좋은 많은 목사들이 가짜들입니다. 물질 축복으로 사람들의 귀를 속이며 건강의 축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속이고 있습니다. 생수를 팔고 생명의 헝겊을 팝니다. 나아가 마귀가 주는 신비 체험을 주면서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의 영혼을 속입니다. 또는 사회 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민중을 해방시켜 준다고 하면서, 온 인류에 희망을 준다고 하면서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들은 선행과 착한 일을 통해 자신을 의롭게 비추면서 많은 사람들을 거짓 복음으로 인도하여 속입니다. 과부와 고아도 돌아봅니다. 낙태 반대 운동을 합니다. 그런데 결국 모슬림과 불교와 손을 잡으며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버젓이 외치며 거짓 복음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이 가장 점령하기를 탐하는 자리가 어디이겠습니까? 바로 교회의 설교 단입니다. 설교 단에 거짓 선지자만 올라갈 수 있으면 귀가 가려운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올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은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얼마든지 교회를 장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사탄이 제일 원하는 곳은 성전, 즉 교회의 설교 단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을 봅시다.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사탄의 가장 큰 소망은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는 예배당에 자기 우상을 들여 놓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설교 단을 차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현대 말로 쉽게 말하면 교회에 가짜 목사를 세워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자신의 수하에 가짜 예수를, 가짜 영을, 가짜 복음을, 가짜 목사를, 심지어 가짜 사도를 세워 사용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가짜들을 통해 어떤 사람들이 모이며 어떤 사람들이 만들어집니까? 성경은 거짓 형제들이 만들어진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확하게 가라지들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6절을 봅시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여기서 거짓 형제란 다름 아닌 가짜 성도들이며 가라지 신자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잠깐 위조 지폐를 생각해 봅시다. 위조 지폐는 얼마든지 그 지폐를 소유한 자들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위조 지폐로 음식도 사먹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라지들은 얼마든지 참된 그리스도인의 흉내를 낼 수 있습니다. 가라지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아주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남들이 체험하지 못하는 신비 체험도 합니다. 하지만 위조 지폐는 은행의 위조 지폐 검사관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라지들은 아무리 사람들을 속인다 할지라도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통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심판 후에 불못으로 떨어집니다.
사실 가라지들은 마귀의 자녀들로서 위선과 거짓 선행을 통하여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일을 합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들은 원래부터 가짜 신자이기 때문에 가짜 예수를 믿으며 가짜 영을 받고 가짜 복음을 외침으로써 사탄의 종 노릇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가짜들이 하나님 앞에서 착한 선행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이들은 가라지 신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임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들어갑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가라지 신자들은 분명히 교회 내에 있습니다. 신앙 생활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라지이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이 우주에서 가장 소중하며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우주와 역사 속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는 가장 귀한 분입니다. 가짜들이 많다는 것은 진짜가 귀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쓰레기를 위조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가짜 쓰레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위조 또는 변조가 많은 이유는 그 진짜가 너무나 소중하고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꿀이 귀할 때, 가짜 꿀이 생깁니다. 명품이 귀하기에 짝퉁이 있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가 귀하기에 가짜 다이아몬드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사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하여 가짜 복음, 가짜 영, 가짜 예수, 가짜 신자를 계속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홍수같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좋은 씨앗들로 하여금 참된 복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영으로써 사랑과 거룩의 영이시며 또한 영원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며 좋은 씨앗들의 마음속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좋은 씨앗이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며 성령의 내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면 교회에 위선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가짜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논리는, “시중에 가짜 꿀이 다닌다더라. 그러므로 나는 절대로 꿀을 먹지 않겠다.”라는 이치와 똑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바로 사탄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짜를 보며 상심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사실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짜 예수, 가짜 영, 가짜 선지자, 가짜 형제들이 지금 교회에 얼마나 우글우글 많은 지 모릅니다. 골치가 아플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할 때 거꾸로 생각하면, 진짜가 얼마나 소중하며 아름다운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가짜들이 있기 때문에 참된 복음을 믿는 진짜 성도들이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가짜들이 날뜁니까? 본문 25절을 보니 사람들이 잠자는 사이에 날뛴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가짜들이 날뜁니다. 우리가 잠들 때, 교회가 잠들 때, 가짜들이 날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잠들지 않길 바랍니다. 잠들면 여러분의 영혼은 가짜에게 잡힙니다. 그러면 인생을 낭비하게 됩니다. 쓸모없는 고생을 하게 됩니다. 또한 교회가 무너집니다. 이에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 26:41). 기도 외에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역사 외에는, 마귀의 위조 복음, 위조 예수, 위조 영을 분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가라지를 그냥 두고 계십니다. 왜 그냥 두십니까? 가라지들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이 오면 심판의 천사를 보내서 다 태워 버릴 것이기 때문에 역사의 중간에 오셔서 가라지와 싸울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 자신들의 구원에 대하여 확실히 하시길 바랍니다. 가짜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짜들에 의하여 속으면, 본인들은 구원 받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으나, 가짜 형제들이 되어 구원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짜입니까, 진짜입니까? 우리는 “누가 가짜고 누가 진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각자가 성경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당부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 13:5).“난 내가 구원 받았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가 목사님이거든요.” “나는 적어도 30년 이상 교회 다녔으니 주님께서 봐 주시겠지요.” “목사님이 저를 보더니 저는 구원 받은 것 같다고 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확인해야 합니다. 성경을 스스로 읽고 스스로 확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 받으셨습니까?
예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까?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예수는 진짜 예수입니까? 여러분이 받은 영은 진짜 성령이십니까? 여러분이 믿는 복음은 진짜 복음입니까? 여러분이 만나는 종은 거짓 종입니까? 하나님의 참 종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아니면 사탄의 자녀입니까?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영접하기 바랍니다.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증거된 분을 믿기 바랍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이라도 주님을 영접하면 여러분은 죄 사함을 받으며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마다 좋은 씨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여러분들이 참 신자가 되길 바라십니다. 형식적 신자가 아니라, 가라지 신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어린 양 예수님을 믿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주님을 왕으로 메시야로 모시는 신자가 되길 원합니다. 좋은 씨앗으로 주께서 심으신 우리들은 더욱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께 연결되어 있음으로 계속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가리지가 창궐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좋은 씨앗으로 살며 많은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혼의 정원 가꾸기
마 13:24-30 / 이정익 목사
이 세상은 공존의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습니다. 밝음과 어두움이 있습니다. 높음과 낮음이, 진리와 비진리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며 공존합니다. 그래서 어두움과 밝음이 서로 마주하며 경쟁관계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정원을 잘 가꾸었습니다. 잔디와 꽃들을 예쁘게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잡초가 돋아났습니다. 뿌리지도 않았고 가꾸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뽑아도 자꾸만 나옵니다. 고민입니다. 밭을 갈아엎으면 흙냄새가 풍기고 풀 하나가 없습니다. 그곳에 곡식만 심었습니다. 그리고 잘 가꾸었습니다. 그건데 얼마 후 그곳에 잡초가 돋아났습니다. 심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논에 모만 심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피가 자라고 있습니다. 뽑아도 더 완강하게 더 크게 더 왕성하게 자랍니다.
이것은 자연계에도 그렇지만 신앙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잡초는 정신의 세계에도 영혼의 세계에도 돋아납니다. 본문을 보면 잡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잠잘 때 원수들이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밭에 잡초의 씨를 뿌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에 이 악의 씨인 잡초 씨를 뿌렸다는 말입니다. 잡초는 뽑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제자들이 “잡초를 뽑을까요”하고 묻습니다. 그때 주님은 “가만두어라, 곡식까지 뽑힐까 염려된다” 고 말씀하십니다. 가끔 잡초를 뽑다 보면 곡식도 뽑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만두라,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하면 추수 때까지 입니다. 추수 때는 심판의 때를 말합니다. 그 때는 모든 곡식을 다 거두어 알곡들은 곡간에 넣고 쭉정이 들은 불사르게 됩니다.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이 잡초는 불의를 말하고 어두움을 말하고 쭉정이를 말합니다. 이 잡초는 이 세상 어디에나 다 있습니다.
세상의 잡초 인생들
이 세상은 선한 사람들이 살아야 할 세상입니다. 그런데 악인들도 끼어 삽니다. 그들은 잡초 같은 인생들입니다. 선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고 갈등을 유발하고 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가만 놔두라고 하십니다. 잡초를 뽑듯 당장 뽑아버리시지 않고 그냥 보고 계십니다. 그 모습을 볼 때 속이 상합니다. 악이 더 번성하는 것처럼 그들은 더 왕성하고 건강하고 돈도 잘 벌고 장수하고 죽을 때도 편안히 죽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약이 오릅니다. 하나님도 고민이십니다. 왜 그냥 놔두라고 하시는가 하면 잡초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힐까 걱정되어서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악인들을 당장 없애지 않고 보고만 계십니다. 언제까지 기다리는가 하면 추수 때 즉 심판 때까지 입니다. 그때 한꺼번에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까지 불가불 싫어도 그 잡초들과 공존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공존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싫어도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내 옆집 사람이 아무리 싫어도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제도가 잘못되고 싫어도 따라야 합니다. 그 제도가 모두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면 우리는 그 제도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도리입니다. 암이 싫어도 그 암조차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암이 싫다고 억지로 떼어버리려고 하면 암 근원은 더 왕성해집니다. 온 몸에 퍼져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큰 육신을 넘어트립니다. 함께 품고 살아야 합니다.
때로 성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개조하기 위해서 혁명을 하기도 합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한결같이 사정을 합니다. 죄인들을 마구 잡아들입니다. 무섭게 벌을 줍니다. 세상을 그리고 재도를 개혁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 삐뚤어진 인간성은 그런 혁명으로 개조가 안 됩니다. 혁명으로 개조된다면 이미 공산주의는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승리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매일같이 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다 착각입니다. 월남전 때 베트콩이 분명 숲속 정글에서 나오는데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또 발견하고 쫒아 가면 정글 속으로 도망하여 숨는데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분명 이 근처에서 사라졌는데 찾아도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고엽제라는 무서운 제초제를 그 일대에 뿌려버렸습니다. 그 결과 베트콩들이 출현하고 순간 숨어버리는 지하 동굴을 발견하기는 했는데 그 대신 정글의 우거진 숲들을 완전히 태워 폐허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연과 삼림이 다 말라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선한 사람들이 고엽제 영향으로 암이 발생하고 피부병에 시달리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 세상은 혁명으로, 전쟁으로, 사정으로 개혁으로 이미 삐뚤어진 인간성을 바로잡을 수가 없습니다.
밭에 잡초가 있고 논에 피가 있어서 뽑아도 또 나오고 뽑아도 또 나옵니다. 귀찮아도 나올 때마다 뽑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이 정도입니다. 그 일이 어렵다고 고엽제를 뿌려버리면 다 죽습니다. 자연도 죽지만 사람도 죽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악인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인들은 더 잘 살고 더 건강하고 부자로 성공하며 왕성하게 살고 죽을 때에도 곤히 죽습니다. 그래서 때로 선한 사람들이 낙심하고 때로 의기소침하기도 하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악들을 또 죄인들을 그냥 놓아두십니다. 그것이 가라지 비유에서 밝히신 내용입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들을 뽑을까 염려되어 추수 때까지 놓아두시는 것입니다. 논이나 밭에만 잡초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도 잡초 같은 인생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시끄러운 것입니다.
교회안의 잡초
교회 안에는 선한 사람들만 모인 곳이 아닙니다. 가방을 두고 가 보십시오. 금방 없어집니다. 주차 시 안내 도우미들이 이리 오라 가라 해 보십시오. 눈을 부릅뜨고 당신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고 대듭니다. 설교를 조금만 이상하게 해 보십시오. 금방 전화가 옵니다. 참으로 무섭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라고 다 천사가 아닙니다. 복음서를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님은 집중적으로 공격하셨습니다. “화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이여, 천국의 문을 가로막고 자기도 들어가지 못하고 남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이여(마 23:13).” 얼마나 무서운 질책입니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천국의 문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이 다 천사는 아닙니다. 그리고 권사 장로라고 해서 다 천사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잡초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 잡초가 바로 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 속에 잡초들이 함께 자라고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도 잡초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교회 안에 잡초 같은 신자가 없겠습니까.
요즘에는 이단들이 기성교회에 들어와 잡초처럼 동아리를 틀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는 이단의 간부급들만 집중적으로 몰려 들어가서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충성을 다해서 마침내 신임을 얻어 구역장들이 되었습니다. 총 전도주일날에는 자기들 편을 다 끌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 잡초 동아리를 크게 틀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어 동아리를 점점 확대해 나갔습니다. 나중에 비로소 알고 뽑아내려고 하니까 동아리가 너무 커져서 곡식들이 다칠까 봐 애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도 잡초가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그를 속아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와 함께 하였고 함께 십자가의 길까지 갔습니다. 왜냐하면 유다를 솎아 냈더라면 12명의 조직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그냥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유다는 본색을 드러내고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교회 안에도 잡초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잡초 같은 신자들이 있어서 교회 공동체를 불화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분열하게 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신자들이 모두 잡초 신자들입니다.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모두 천사로 봅니다. 그래서 천사 수준을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교회들이 감당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고민입니다.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우리 영혼의 잡초
이 잡초는 교회 안 뿐 아니고 우리의 영혼에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구원을 받고 세례 받고 모두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쯤 되면 100% 옥토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알곡만 나와야 하고 우리는 모두 성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내 속에서 자꾸만 음탕한 생각이 떠오르고 탐욕과 욕망과 시기와 거짓이 솟아나오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려는 본성이 나오는 것입니까. 왜 권사가 고부간의 문제 하나를 풀지 못하고 시누이간에, 형제간에, 이웃 간에 발생하는 문제 하나를 풀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그럴까요. 그것은 내 영혼에 잡초가 우거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권사가 되고 장로와 목사가 되었는데도 왜 내 속에서 조화의 힘이 나오지 않고 자꾸만 내가 원치 않는 시기와 탐욕과 욕망과 분노가 나타나는 것입니까. 내 영혼에 잡초가 우거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분명 내가 거듭나고 성결하고 영적 체험을 하고 주님의 사도까지 되었는데 왜 내 마음속에서 내가 원치 않는 이 죄의 뿌리들이 남아있어서 나를 괴롭히느냐고 고민하고 갈등하다가 마침내 탄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죄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각오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잡초는 죽을 때까지 다 뽑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밭에 잡초가 뽑아도 자꾸만 일어나듯이 내 영혼 안에도 이 잡초가 계속 나를 괴롭힐 것입니다. 잡초가 더 우거지게 되면 더 괴롭힐 것이고 덜 우거져 있으면 덜 괴롭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영혼을 가꾸어야 합니다. 잡초가 더 이상 왕성하게 돋아나지 않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잡초들은 단결하는 힘이 있습니다. 잡초는 서로 엉겨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왕성하게 자랍니다. 논바닥의 피를 보면 벼보다 더 왕성합니다. 서로 엉겨서 뽑으면 곡식들이 다치게 됩니다. 악인들 특히 이 세상의 어깨들을 보십시오. 단결력이 얼마나 좋습니까. 의리로 뭉쳐 있습니다. 내 영혼 안에도 이 잡초가 있습니다.
관리 방안
기도와 말씀과 묵상으로 이 잡초를 다스려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그래서 중요한 말씀입니다. 기도는 나로 하여금 내안의 죄의 뿌리를 다스리고 억제하게 하는 힘이 있고 조화를 이루게 하는 힘도 공급해 줍니다. 오늘을 3무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무관심과 무책임과 무감동의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런 시대에 설교해서 감동을 주려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래서 묵상은 중요한 신앙수단 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수단이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수단입니다. 묵상기도는 눈을 감는 기도입니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눈을 감는 다는 것은 다른 눈으로 보기 위함 입니다. 그 다른 눈이 영안입니다. 즉 믿음의 눈입니다. 육체의 시각이 아닌 영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오늘 내게 처한 현실은 잡아먹을 듯이 달려드는 삭막한 현실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이 현실을 보면 소망적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 눈을 감고 보면 그 현실 넘어 고난 중에 현존하시고 그리고 고난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묵상할 때에는 눈을 감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현실 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기 위함입니다.
묵상은 사막 교부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수도원에 들어와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수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묵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때부터 입니다. 그때 묵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귀고 2세(Guigo II)입니다. 그는 수도원장으로 수도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어떻게 가르칠까 궁리를 하다가 야곱의 꿈에 나타난 사다리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거기 보면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사다리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는 그 과정을 보고 4단계로 발전시켰습니다. 하나는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 즉 “성경 읽기”입니다. 이것을 “거룩한 독서”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소리 내어 읽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메디타치오”(meditatio) 즉 “묵상하기”입니다. 본문 내용의 단어들을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일입니다. 왜 이 단어가 나왔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오라치오”(oratio) 즉 “기도하기”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를 기도합니다. 그것은 본문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나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 같은 사례의 가장 좋은 샘플은 복음서에 나타난 주기도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필요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의기도 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하나님의 필요가 나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인간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입니다. 네 번째는 “콘템플라치오”(contemplatio) 즉 “관조”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바라봅니다. 그때 세밀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때 유념할 것은 처음 묵상할 때에는 온갖 생각들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 속 썩이는 아들, 미운 이웃들, 보기 싫은 구역식구들이 생각납니다. 그런 생각들이 내 마음에 남아있는 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상상들과 잡생각들을 정화시키고 몰아내고 내려놓아야 가능합니다. 그때 내 마음에 비로소 고요가 찾아오고 정화와 평정이 찾아오는데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내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내 안에 떨어지면 그냥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폭발시키는 힘으로 역사를 합니다. 그 힘으로 내 영혼에 잡초가 자라지 않도록 억눌러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내 영혼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꿀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야 내안에서 잡초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교회에 가득하면 잡초가 없는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채우게 되면 이 세상에 잡초들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잡초 같은 인생들이 발붙일 자리가 적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고 이 세상을 소리 없이 개혁하고 복음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속물근성이 들어있습니다. 밭을 갈고 그냥 방치해 두면 온갖 잡초들로 산을 이루듯이 내 안의 잡초를 그냥 방치해 두면 나는 머지않아 속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주님은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시고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
마 13:24-29 / 손상률 목사
어떤 공동체든지 세상에서는 완전한 곳은 없습니다. 국가나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의 보금자리인 가정이나 그리스도인의 집단인 교회도 불완전한 요소를 지니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 하실 때까지 세상에는 죄악이 관영하고 마귀가 활동하기 때문에 천당과 같이 완전한 곳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 말씀에 소개된 예수님의 천국 비유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으나 밤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의 씨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어느새 그 밭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게 된 것입니다. 이 밭을 국가나 교회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같은 밭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세상에는 어디에나 선과 악이 공존하는 법입니다.
1. 공통점이 있습니다.
땅속에 있는 씨앗에 눈이 트고 싹이 나게 되면 일정기간 자랄 때까지 서로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분명히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씨앗이지만 그들 간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 생명이 있습니다.
씨앗의 특징은 그 속에 있는 생명력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발아(發芽)하여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며 생명력을 약동 시키게 됩니다. 종류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살아있는 것이면 언제든지 땅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존재를 과시하게 됩니다. 가라지 종류인 경우 처음에는 전략적으로 죽은 듯이 숨어 있지만 반드시 그 본 모습을 드러내고 마는 것입니다. 다만 자기의 존재를 정확하게 노출시키지 않는 가라지의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라지 특유의 위장술 일뿐 그 속에 생명력은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2) 성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실 때 “이는 모든 씨 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작은 씨앗이라도 그것이 막상 싹을 터뜨리고 거죽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습도와 온도를 받아가며 성장을 재촉합니다. 사람도 좋은 환경에서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라는 경우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저항을 하며 성장하는 경우일 때는 오히려 야성이 강해지고 어떤 환경에서든지 더 잘 적응하게 됩니다. 좋은 씨앗 속에 묻혀 자라는 가라지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내성을 길러가며 소리 없이 뿌리와 가지를 뻗어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3) 열매가 있습니다.
앞서(3-8절)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에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종류의 씨앗이든지 정상적으로 자라게 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것은 생명체의 번식력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의 존재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든 열매는 그 맺히는 시기가 있습니다. 일정한 기간을 기다리며 인내하는 자에게 열매의 기쁨을 안겨주는 것입니다(약 5:7-8). 이런 것은 자연의 법칙이자 순리입니다. 다만 좋은 씨의 경우 모든 사람의 기대 속에 당당하게 나타나지만 가라지는 자기를 숨긴 채 없는 것처럼 움츠려 있다가 완전히 무르익었을 때 엄청난 열매로 번식력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2.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같은 밭에서 함께 자라는 동안 일꾼들은 거기 다른 종류가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냥 겉으로 볼 때 좋은 씨와 가라지가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모양이 같았지만 사실상 전혀 다른 실체들입니다.
1) 종자가 다릅니다.
좋은 씨와 가라지는 일정기간 같은 밭에서 같은 농부의 손에 의하여 가꾸어 지고 있지만 그 근본은 다릅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한쪽이 정리가 되어야할 적대적 관계일 뿐 결코 공존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세상을 사는 성도들에게도 의와 불법,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과 같이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상극관계의 개념이 있습니다(고후 6:14-16). 예수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겉보기에 율법을 준수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상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마귀에게서 난 마귀의 종자라고 하였습니다(요 8:44).
2) 목적이 다릅니다.
옛날 모세와 함께 출애굽한 사람들 중에는 이스라엘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자가 달랐습니다(출 12:38). 그냥 이스라엘과 같은 민족인 것처럼 행세를 하였으나 내심으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조상들에게 약속된 가나안의 환상이 있었지만 그들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민수기 11:4에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탐욕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이용하였던 것이며 그때마다 가나안 행진에 적신호가 켜졌고 또한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하였습니다(출 32:1-8, 민 14:26-35).
3) 결과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자연법칙의 원리를 근거로 하여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갈 6:8). 썩어지는 열매와 영생의 열매는 사실상 그 종자 때부터 결과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여기 본문말씀 30절에는 추수 때 알곡은 곡간에 들이지만 가라지는 단으로 묶어 불에 태운다고 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길을 가거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붙어서 행세를 했던 사람들의 종말은 파멸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시편 1:5-6에는 악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어오지 못하며 또한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유구한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며 또한 역사의 경영자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알고도 묵인 하십니다.
농장의 일꾼들은 오랫동안 그 밭에 가라지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몰랐습니다. 얼마 후에 알기는 했으나 그것이 어떤 경로로 그 밭에서 나고 자라는지 원인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처음부터 가라지의 정체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하고 물었을 때 주인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하고 말했습니다. 다시 종들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하고 물었을 때 주인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시지만 그것을 일정한 기간까지 묵인하십니다. 그러나 가라지의 족속들은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줄로 착각하고 갖은 횡포를 부립니다(시 2:1-4).
2) 그것을 선용(善用)하십니다.
필요악(必要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에는 때때로 악한 세력들이 있어서 선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악역을 떠맡아 주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경우를 두고 지혜자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 16:4). 밭에서 가라지가 자라고 무성하게 우거지면 알곡이 피해를 보는 것처럼 세상에서 악인이 득세하면 의인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훈련시키고 연단 받게 하여 정금 같은 믿음을 길러내게 하십니다(욥 23:10). 옛날 선지자 하박국은 교만한 자와 거짓된 자의 횡포가 극심하더라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였습니다(합 2:4).
3) 자기의 뜻을 이루고 맙니다.
아담의 범죄로 아름다운 에덴 동산이 마귀의 활동 무대가 된 후에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신론적 불신앙의 세력이 역사를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가인 계통의 사람들이 거기에 해당됩니다. 그의 후손들이 세상 문화의 주류가 되었고(창 4:16-24), 결국 무력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전쟁과 죽음의 악순환이 이어지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굴복하여 사람들이 진리에서 이탈하거나 배도의 길을 걷게 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세상은 마귀의 독무대이거나 불신앙의 천지가 되어 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앞에 선과악은 구분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 때에 가라지는 불사르고 알곡은 곡간에 넣는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악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불 못에 던져지는 날 의인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마 13:43).
인생의 가라지들을 언제 뽑으시겠습니까?
마 13:24-30 / 김영헌 목사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36-43)
1960년대 말부터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한국이민들은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절정에 이르기 시작했습니다. 타고난 근면성을 바탕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한국이민들은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제법 경제적 위상도 높아지고 인구수에서도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제2의 유대인이라는 칭송을 들으며 다른 나라 이민들보다 훨씬 빨리 미국사회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한국 이민사회에 문제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약과 도박, 그리고 알콜 중독과 우울증 증세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마약과 도박은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켜 가정이 파괴되고 이혼율이 급증하기 시작하더니 가정주부들과 청소년들의 탈선이 도시마다 한인들의 신뢰를 깨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체면에 묶여 사는 한국인들이 미국 땅에서 남의 눈치 안보고 모처럼 자유롭게 살게 되니 탈선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부에서는 애틀랜틱 시티에서, 서부에서는 라스베가스에서 한국인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각 지역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경고등을 켰습니다. 강단마다 마약과 도박, 그리고 알콜 중독의 위험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도박장으로부터 수 천리 떨어진 우리 교인들은 그럴 리 없으리라 믿었으나 예방주사를 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주일설교의 제목을 “우리를 파괴하는 중독의 허상들”이라고 잡고 강력하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한두 번은 괜찮다는 안일한 생각이 가정을 파괴하고 가족을 망치니 절대로 가까이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 날 밤, 한통의 전화를 늦게 받았습니다. “목사님, 어느 놈이 일러바쳤습니까? 예수쟁이들은 못 믿을 놈들입니다. 장난삼아 한두 번 한 것을 곧장 고해바치는 놈은 누구입니까?" 다짜고짜 들이대는 그 사람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뜻밖의 항변에 놀란 사람은 나였습니다. 한두 번이라도 그가 도박장에 갔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누가 고해바친 사람도 없었고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친절했고 얌전하며 예의를 잘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설명을 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작금의 한국이민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기 시작해서 교회마다 경각심을 주기위해 하고 있는 설교라고 설명했습니다. “당신이 한 두 번이라도 도박장에 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장난삼아 그곳에 갔었다면 설교를 듣고 그렇게 흥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여기서 한번쯤 당신을 되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설교는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한두 번 갔어도 이제는 끊어야 합니다. 도박을 이길 사람 없습니다. 당신의 아내와 자식들은 당신만을 바라보며 삽니다.” 간절히 설득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이미 도박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누구의 얘기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그만둔 그는 음식점에서 한두 번 마주쳤지만 눈길도 주지 않았으며 인사를 하려고 다가가면 외면한 채 가버렸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서둘러 어디론가 이사를 했고 교회 다니는 것들은 믿지 못할 놈들이라는 욕만 남겨 놓았습니다. 훗날 그는 이혼을 했고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사람은 본래 착하게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 만큼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동양철학에서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이야기 하지만 나는 성선설을 믿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감탄 할 만큼 걸작품입니다.
윤장로님 둘째아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L. A. 딸네 집에 며칠 머물렀습니다. 돌이 지난 외손녀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릅니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자만의 방언을 하며 인형에 귀저기를 채우는 모습은 환상적이고 신비스러웠습니다. 창조의 신비를 보는 듯 했습니다. 생명의 신비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고 맑은 저 생명 안에 세상의 악한 것들이 악의 씨를 뿌리기 시작합니다. 시기, 질투, 거짓, 분노, 미움, 증오, 욕심, 불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악한 가라지를 심어 놓습니다. 그리고 나면 저와 여러분처럼 오염되고 추한 모습으로 변질됩니다. 인간과 사탄은 이렇게 가까워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분은 “난 아닌데?”라고 불평하는 분 있네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때 묻지 않은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우리는 오늘 매우 중요한 성경말씀을 봉독했습니다. “가라지 비유”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천국에 대한 비유입니다.
농부가 좋은 밭에 좋은 씨를 심었습니다. 싹이 나서 자라는데 심지도 않은 가라지들이 많이
나는 것을 종들이 발견했습니다. 곡식 속에 섞여 자라는 가라지들을 뽑을까를 종이 주인에게 물었더니 추수 때까지 가만 놔두라 했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알곡은 거두어 곡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모두 불에 던져 태워 없앨 것이라 했습니다. 제자들은 비유의 뜻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집에 들어와 뜻을 여쭈니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 즉 예수님이고,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라 했습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들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을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가 추수 때는 불에 던져 태워버리는 것처럼 마귀와 마귀가 뿌린 죄의 가라지들은 아무리 세력이 왕성하다 해도 마지막 종말에는 하나님께서 모두 지옥불에 던져 태워버릴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비유입니다. 물론 천국의 아들들과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마의 자식들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종말 사상을 우리 개인의 신앙생활과 접목시켜서 내면에 있는 뜻을 재해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말하는 원수, 즉 마귀는 누구며 악의 아들들은 누구입니까? 추수 때까지 가라지들을 그냥 놔두면 곡식을 병들게 하고 기운을 막아 자라지 못하는데 어떻게 추수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습니까? 천국의 아들들은 누구며 누가 천국의 아들들이 될 수 있습니까? 여기서 좋은 씨를 심는 인자이신 예수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다시 한 번 해석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악의 아들들은 누구며 마귀는 어떤 일을 합니까? 마귀는 어떤 악의 가라지를 우리 안에 뿌리고 있습니까? 우선 살인, 강도, 강간, 사기, 거짓증언, 질투, 증오, 미움, 교만, 등 해서는 안 되는 범죄(commission)에 해당되는 것들이 보편적인 악의 씨요, 가라지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저지르는 범죄(commission)만이 악의 씨는 아닙니다.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는 죄(ommission)도 큰 악의 씨입니다.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돌보지 않는 죄, 병들어 고통 받는 자들을 돌보지 않는 죄, 고아나 과부, 갇힌 자나 소외된 자들을 돌보지 않는 죄도 악의 씨입니다. 더 큰 악의 씨가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면서 나태함, 게으름, 무기력함, 열등감, 방탕함, 부정적인 생각의 씨를 뿌려 인생을 망가트립니다.
마귀는 늘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를 현혹시킨 다음 수많은 악의 씨들을 우리 안에 심어 놓고 유황불이 훨훨 타는 지옥으로 몰아넣는 임무를 수행하는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사탄이 심어 놓는 악의 씨, 즉 가라지들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악의 씨를 일찍 구별하여 뽑아내는 것이 무엇 보다 중요합니다. (pulling weeds is an important part of a successful life).
얼마 전에 재미있는 뉴스보고가 있었습니다. 희귀한 세계 대회를 열었습니다. 어떤 학자가 이 대회를 “가라지들의 세계대회”(The world series of weeds)요 “제초제의 훌라볼”(The Jula Bowl of herbicides)이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대회내용은 미국과 캐나다의 농과대학생들에게 잡초를 가려내어 그것들을 죽일 수 있는 올바른 농약을 처방하는 대회였습니다. 이 대회를 주관한 중북부지역 가라지 과학협회 회장인 서부 켄터키대학의 제임스 워링톤(James Worthington of Western Kentucky University, president of the North Central weed science society)박사는 매우 중요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가라지들이 아주 어렸을 때 가려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누구나 가라지들을 알아볼 만큼 다 자라고 나면, 그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무엇을 하기엔 너무 늦는다”(They need to be able to recognize weeds when they are ting when weeds get big enough that anybody can recognize them, it's too late to do anything about them)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어린 자녀들 안에 자라고 있는 악의 가라지들을 너무 늦게 발견하고 후회하고 있습니까? 너무 늦게 알고 나니 할 수 있는 일들이 부모에게 별로 없어 가슴을 치며 슬퍼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자식에게 희망을 걸었던 부모들이 얼마나 실망합니까? 마약에 빠진 이들, 잘못된 군중들에 휩싸여 엉뚱한 일에 분노하며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 원인도 모른 채 깊은 우울증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자녀들을 보는 부모들의 가슴은 찢어지고 세상을 다 잃은 삶을 삽니다.
성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두 번쯤 괜찮겠지 하는 안이한 마음으로 악한 일들에 손을 댔다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를 비참하게 만드는 어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약중독, 담배중독, 도박중독, 향락중독, 사기중독, 거짓중독, 등이 다 그렇습니다.
심지어 남을 비판하고 분노, 편협증, 등 인간존재를 파괴하는 각종부정적인 자세들이 어려서 뽑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악의 권세에게 일생을 지배당한 채 사는 이들이 엄마나 많습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인생이 점점 파괴되어지는 것은 마귀가 심어 놓은 가라지들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라지들은 육체만 망가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파괴하고, 인간관계도 찢어 놓고, 영혼까지 파괴하고 맙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을 악한 가라지들에 의해 질식당한 채 죽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본래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입니다. 단지 악의 가라지들을 뽑는 일을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설마하고 방심했다가 가라지에 치여 생명을 빼앗기고 맙니다.
미국 메사츄세츠(Massachusetts)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61세난 여인이 학교 버스 운전기사로 취직을 했습니다. 첫날 버스를 몰고 10명의 어린 학생들을 싣고 등교를 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리에 익숙치 않아 고속도로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갔습니다. 고속도로 상에서 우회전을 해야 하는데 좌회전을 했습니다. 그는 캐나다 방향으로 달리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났는데 버스가 학교에 도착하지 않자 경찰에 연락을 했습니다. 경찰이 추적하니 이 버스는 캐나다 국경 쪽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10명의 아이들을 납치하여 캐나다로 탈출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미연방수사국(FBI)이 동원되어 캐나다 국경에서 이 여인을 체포했습니다.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FBI는 오랜 수사 끝에 단지 방향을 잘못 틀고도 그것을 모른 채 버스를 몰고 간 것으로 판명이 나서 석방되기는 했으니 얼마나 큰 고초를 당했겠습니까?
잘못된 인생길로 들어섰을 때 속히 되돌아 와야 합니다. 결혼생활, 건강, 자녀들, 영적생활까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면 돌아봐야 합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늦으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셋째로 이 비유에서 천국의 아들들은 누구며, 인자이신 예수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여기 천국의 아들들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 크리스챤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잘못 읽으면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죄짓기만을 기다리다가 지옥불에 던지는 인정머리 없는 분으로 보여 집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이 비유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저 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셔서 보호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천국 가는 데만 필요한 것으로 압니다. 십자가의 은총은 지옥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서 천국에 들어가는 데만 주시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천국으로만 인도하는 은총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는 것은 그 죄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파괴합니다. 가족을 파괴합니다.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파괴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들을 뽑아내어 불에 던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갖고 있는 의미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십자가가 들어가면 죄악들이 벌벌 떱니다. 사탄마귀가 쫓겨납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권세를 이길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가슴 아프게 여기는 것은 아름답게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걸작품인 인간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도시에 있는 창녀들과 함께 탕진하고 끝내는 병들어 폐인이 되어 돌아옵니다. 돌아온 아들을 바라보는 탕자의 아버지 가슴이 하나님의 가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탕자를 버리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끌어안고 잔치를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바울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죄를 짓고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마음 밭에 악의 가라지들을 심어 놓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들을 일찍 분별하여 뽑아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연약해서 뽑아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너무 죄에 대해 약하기 때문에 말로는 열두 번도 더 결심을 합니다. 몇 번씩 뽑아내지만 끝없이 심어 놓는 마귀의 유혹을 끝내는 뿌리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십자가 붙들고 나아가면 끝내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마침내 마귀는 우리를 파괴하지 못합니다. 마귀는 지옥불에 던져지고 맙니다.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머리에 면류관 쓰고서 주앞에 찬양할 때까지
예수는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희게 하셨네(찬214장4절)
우리는 깨어진 세상, 부서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We live in a broken world).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내 안에 심기워지는 가라지들을 뽑아내 달라고 간구하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끝없이 심겨지는 악의 가라지들을 뽑아달라고 간구합니다. 우리의 몸과 우리의 영을 말라죽게 하는 가라지들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가라지들을 얕보아서도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되고, 무서워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지시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God is our Savior). 하나님은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God is our Redeemer).
하나님은 악한 원수 사탄마귀가 우리 안에 악의 가라지를 심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 교회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여러분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말씀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찬송을 통하여, 섬김을 통하여 가라지가 뿌려지는 것을 막기도 하고 일찍 분별하여 뽑아내게도 합니다. 여호와의 집에 머물면서 가라지가 자라지 못하게 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모든 가라지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음성을 들읍시다. “오냐, 내가 맡으마. 내가 지켜주리라”(I will take the weeds in your life. I will protect you the power of the sin) 아멘.
혼합주의를 몰아내자
마 13:24-30 / 이정선 목사
천국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께서 비유로 계속 설명을 하시는 중에, 이번에는 가라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자기 밭에 씨를 뿌린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 자신이고, 밭은 세상이라고 나중에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자기 밭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관계의 근본적인 성격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제 2위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천지창조의 당사자셨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요 1:3)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피조세계의 모든 것 중에 그가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으니까, 성자 하나님께서는 창조사역의 모든 부분에 참여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천지창조가 성자 하나님의 독자적 행위는 아닙니다. 천지창조는 성부, 성자, 성령, 세 분 하나님이 모두 참여하신 공동의 사역입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기사에 바로 그 사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각종 피조물로 채우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세 분 하나님 사이의 합의에 의해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라는 복수형이 두 분 이상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할 때는 단수형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복수형이 사용되었을까요? 이것은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하나의 관용적 표현일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말에서도 나를 표현할 때 우리라는 복수형을 많이 쓰잖아요? 우리 집, 우리 마누라… 구약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에도 그런 용법이 있을까요? 우리 마누라 같은 표현은 없지만, 히브리어 어법에는 장엄복수(pluralis majestaticus)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대한 것, 위대한 것 등을 표현할 때 복수형을 사용해서 그 장엄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왕도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을 복수로 표현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던 빅토리아 여왕이 도둑에 관한 농담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We are not amused.”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로힘이라는 단어도 복수형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우리라는 복수형도 장엄복수의 용례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은 또 회의를 하십니다. 거기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The man has now become like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창 3:22). 그렇게 되면 여기서 우리라는 표현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이 확실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천지창조의 당사자로서 이 세상에 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1).
그러니까 예수께서 천국을 가져오셔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은 마치 밭 주인이 자기 밭에다 자기가 원하는 좋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이, 지극히 정당하고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방해할 권리가 없고, 반대할 명분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세요.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몰래 숨어들어왔습니다. 밤에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남들 몰래 나쁜 일을 하려는 것이지요. 옳지 않은 일, 떳떳하지 않은 일은 어둠 속에서 일어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름 하나는 빛의 자녀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빛의 자녀는 남 몰래 숨어 다니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이 정당하고 깨끗하다면 어둠 속으로 숨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는 일은 악한 일을 의미합니다. 물론 선행을 하고도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일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좋은 일을 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그런 은밀한 선행을 우리가 지금 어둠 속에서 행하는 악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이 어둠을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악행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들키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나오는 원수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잘 때, 밤에 아무도 몰래 슬그머니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곡식을 뿌려놓은 자리에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낮에 그랬다가는 잡혀서 안 죽을 만치 두들겨 맞을 일이지요. 그러니까 밤에 하는 것입니다. 이 원수가 그런 나쁜 짓을 하는 이유는 그 밭을 망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천국으로 불러모으시는데, 그것을 방해하고 망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단어가 눈에 띕니다.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렸다고 했는데, 덧뿌렸다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곡식을 뿌려 놓은 곳에 나쁜 가짜 씨앗을 덧뿌렸습니다. 가라지는 독보리입니다. 생긴 것은 밀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는데, 독이 들어 있어서 먹으면 설사와 구토가 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게 되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좋은 곡식과 악한 가라지가 한 곳에 섞여 있는 것입니다.
이 밭을 세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원수 마귀는 교회를 붕괴시키기 위해 교회 안에 가짜 복음을 뿌리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덧뿌려서 진짜와 가짜가 뒤섞이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혼합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천국 복음과 가짜 복음이 혼합되어 있어서, 어떻게 보면 복음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진짜의 탈을 쓰고 가짜가 주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조엘 오스틴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의 책은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는데, 그분의 설교는 매우 유익한 심리학 강의처럼 보입니다. 그리고는 설교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자기가 말한 것과 연결을 시켜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니까 이게 설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헷갈립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대통령 후보 경선이 한창이지요? 그런데 이 조엘 오스틴 목사가 공화당의 롬니 후보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을 해서 큰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롬니 후보는 몰몬교도거든요. 몰몬교는 미국에서 생겨난 이단인데, 조셉 스미스라는 사람이 천사의 계시를 받고 황금 서판을 발견했고, 그것이 몰몬경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과 몰몬경을 동등한 권위의 두 경전으로 믿습니다. 곡식과 가라지를 5대5로 섞은 전형적인 혼합주의입니다.
그런데 조엘 오스틴 목사의 다음 말이 또 가관입니다. 몰몬교에서는 성경 이외의 몰몬경도 믿고 하나님도 사람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이단성이 많은데 어떻게 진정한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 신학적인 문제는 깊이 공부한 적도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기 때문에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롬니 전 주지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그를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시인한다고 다 기독교인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보세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요 4:24)고 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을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로는 in truth예요. ‘우리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고 하더군요. 뭐가 맞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대답하신 말씀이 예배하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예배하는지, 즉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예배를 드려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엉뚱하게 믿으면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고, 그러므로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혼합주의는 새로운 문화에 복음이 전해질 때 발생하기 쉽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도 기존의 문화 속에 뿌리를 깊게 내린 비기독교적 또는 반기독교적 요소들이 제거되지 않고 기독교 신앙과 병행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천주교에서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허용한 것이 그런 경우입니다. 조상 제사는 세상을 떠난 조상의 영혼을 신적 존재로 믿고 제사를 드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만 참 신이시고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기독교 신앙에 어긋나는 관습입니다. 조선 말에 들어온 천주교가 그토록 심하게 박해를 당한 것은 제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조상도 모르는 배역무도한 집단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제사는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조상을 기리는 아름다운 풍속이라고 하면서 기독교 신앙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결정한 것은 정말 납득이 안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혼합주의를 몹시 싫어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반복되는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노엽게 했었는데, 그들이 우상을 섬기느라고 하나님을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동시에 다른 민족들의 신을 섬긴 것입니다. 이러한 혼합주의의 위험을 바울 사도도 경고했습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
오늘도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붕괴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끊임없이 가라지를 뿌려댑니다. 복음 아닌 것을 복음처럼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단이나 문화적 혼합주의처럼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일어나기도 하고, 각자의 삶에서 나만의 혼합주의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생기기는 밀이나 보리처럼 생겼는데 사실은 독이 들어 있는 가라지처럼, 얼핏 보면 복음처럼 보이는데 우리의 예배가 진리 안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 밖의 가짜로 드리는 것이 되게 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위험들을 우리는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거나 아직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개인적인 혼합주의도 우리가 단호히 배격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에는 가라지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그리스도와 벨리알을 함께 담아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나 생활 속에 그런 가라지들이 섞여 있다면 과감하게 뽑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것들이 좋은 곡식을 병들게 하고 예수님의 소유인 밭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말입니다. 뽑아내는 것은 물론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들, 우리 믿음에 독소처럼 작용하는 가라지들을 뽑아냈을 때, 우리에게 천국이 더 가까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순전하고 깨끗한 믿음으로 날마다 천국을 살아가는 기쁨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라지 비유
마 13:24-30 / 박세갑 목사
이 비유는 두 번째 비유이면서 주님께서 제자들의 요구에 따라 친히 설명해 주신 마지막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설명은 제자들만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집으로 들어오시자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하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본문에서 강조하시는 문제가 가라지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주안점을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고 주님이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한 사람이 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 밭을 중심으로 일하며 살아갑니다. 어느 날 주인은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며 좋은 씨앗을 구하여 밭에 뿌렸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잡초인 가라지가 많이 보입니다. 본문의 가라지는 헬라어 원어 성경에서는 “지자니온”으로 나오는데 이 식물은 “독보리”의 일종으로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열매를 맺습니다. 영어성경들은 잡초를 의미하는 weed와 tar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잡초나 가라지는 같은 말이라고 하겠고 그것들은 새 싹일 때부터 보리나 밀과는 구별되지만 독보리(darnel)는 밀과 아주 비슷해서 처음에는 구별이 안 됩니다.
어쨌든 독보리가 밭에 난 것은 누구인가 그 씨앗을 밭에 뿌렸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린 사람은 그것을 통하여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좋은 씨를 뿌린 주인이 수확을 제대로 못하도록 방해가 될 뿐입니다. 이렇게 이익을 기대하지 않고 상대에게 해를 끼치기 위하여 하는 행동은 순전한 악의 외에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라지의 씨를 뿌린 사람은 원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행동은 철저하게 비열하고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그들을 재판한다면 벌을 주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인이 취한 행동은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고 동시에 추수 때가 되기 전에는 실제로 가라지와 곡식이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분별이 명확해 지고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와 곡식은 분명히 나뉘게 됩니다. 곡식은 곡간에 들이게 되지만 가라지는 단으로 묶여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우리는 본문을 읽으며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정경을 머리에 그릴 수 있습니다.
이제 주님의 설명하시는 말씀을 봅시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는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두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우리는 초대교회에서부터 밭을 교회로, 가라지를 무가치한 사람들이나 그릇된 사조들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온 자들로 주장하는 설교를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비유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본문에서 아주 분명하게 “밭은 세상이요.”하심으로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주님 자신의 신분과 권능을 설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온갖 형태의 생명, 모든 조건의 존재, 그리고 온 우주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주님의 소유임을 선포하신 선언입니다. 피조물은 주님의 밭입니다. 세상이라는 이 밭은 주님의 밭이지만 그 속에는 어디에나 슬픔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이 밭의 추수를 위하여 주님은 좋은 씨앗을 뿌리며 천국의 수확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피조물이 신음하며 고통하는 곳에 어디든지 천국의 아들을 뿌려서 상처를 치료하고, 눈물을 씻어주고, 탄식을 찬송으로 바뀌게 하려 하십니다.
이것을 어떻게 호소하고 설명하여야 제가 가진 이 감격, 이 감동을 여러분에게 전부 전달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나와 여러분을 세상이라는 밭에 뿌리심으로 풍성한 수확을 거두기를 원하시는 주님, 그 주님께서 지금 나를 내 자리에 뿌리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삶의 근간이요,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그리스도의 인도하심 아래, 왜곡되고 거짓된 세상에 보냄을 받았고 저와 제 삶의 모습을 통하여 주님께서 거짓된 주인인 세상이 주인 노릇하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께 돌림으로, 추수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 내 삶의 근간이 되고, 말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수고와 투쟁은 소유물을 정당한 주인에게로 돌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위하여 본문에서 “제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라고 하셨습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여호와의 것이로다.” 이런 사실이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주님의 나라에 모두 함께 나아가는 어려운 임무를 감당하게 하십니다. 인내하고, 참여하여,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씨 뿌리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봅시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군은 천사이니.”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며,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바라시는 추수는 천국 그 자체입니다. 반면에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인데 그 악한 가라지를 심은 원수가 마귀입니다. 마귀는 대적자, 원수, 처음부터 하나님을 중상모략하고 모독하는 비방자입니다. 그들은 앞서 밭에 가라지를 뿌린 자가 그 밭에 아무런 권리가 없는 것처럼 세상에 대하여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다만 침입자일 뿐입니다. 밭에서 곡식이 나거나 가라지가 날지라도 그는 그것 중 아무 것도 그를 유익하게 하거나 그의 소유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는 다만 밭의 소출이 적어지고 그로 인하여 밭주인이 손해 입는 것을 즐거워할 뿐입니다. 마귀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넓어지는 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기쁨이고 자랑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마귀는 “가라지” 즉 “악한 자의 아들들”을 그 “곡식 가운데”에 뿌렸습니다. 그것으로 마귀는 진짜의 가운데 가짜를 뒤섞었습니다. 얼른 보아서는 차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좋게 보이는 가짜를 주인의 소유에 섞어 넣습니다. 두 종류의 씨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본문은 두 씨의 유효기간이 “세상 끝”까지이며 주님은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다 자랄 때까지 가만 두었다가 그때에 분리하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자식들은 처음에 아무리 비슷하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 둘이 서로 다른 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천국의 마음은 천국의 생활로 나타납니다. 악한 본성은 악한 성격을 만들고 맙니다. “가만 두어라.”는 말씀은 천국의 아들들이 천국을 위하여 자기 세대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주님이 천국의 아들들이 세상에 존재한 결과로써의 수확을 거두실 것이라는 말씀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의 아들들이 추수하는 자의 손에 그 열매와 함께 단으로 묶이어 불에 던져지고 말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 합시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마귀의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들의 방법은 이 세상에 임해 있는 천국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들은 주님이 계셨던 그 시절부터 모방을 그들의 방법으로 사용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와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가 그 예입니다. 더구나 사도들의 편지에는 여러 곳에서 “가만히 들어온,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교리를 가르치거나 심지어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 날에 까지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국의 아들들의 순결성이 형식을 강조하는 것이 되기도 하고, 마음의 성결을 전혀 무지한 거짓 성결로 기만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교리 문제에 있어서 신약의 중요한 구절들을 말하면서 그 의미를 오해하고 영적인 성결운동을 빙자해 사람들을 짐승처럼 날뛰게 만듭니다. 문제를 감추기 위하여 신령한 것을 위장하고 모방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교묘한 위장 방법입니다.
이에 대하는 주님의 방법은 언제나 내적 진리의 발전을 기다리는 방법입니다. 좋은 씨와 나뿐 씨가 끝 날까지 함께 자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악은 더욱 더 악해질 것이고, 더욱 간교해지고, 음란해지고, 악랄하고 교묘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선도 늘 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국의 수확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어디서나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지만 그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자리를 지키고, 우리의 책임을 다하면 가라지인 악한 자의 아들들이 곡식인 천국의 아들들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세상에 뿌려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놀라운 기적입니다.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하나님께는 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 뿌려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그런 일들이 일어남으로 천국이 넓혀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주님은 당신의 아들들을 세상에 뿌려 심고 세상의 완성을 위하여 영향력을 발휘하라고 명령하시고 계십니다.
함께 자라게 하시는 섭리
마 13:24-30 / 성흥모 목사
교육학자들이 예수님의 교육방법을 연구하고 평가하는 말을 들어보면 예수님은 교육학적으로 우수하고, 다양한 교육방법을 가지고 있었고, 환경에 따라 그것을 자유자재로 변형하여 사용하신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상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가장 위대한 교사, 선생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교사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진리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셨는데, 그것을 가지고 더 자세히 해석해주셨고,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친히 본을 보여주셨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교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교육학을 소개한 분으로, 연세대학 신과대학에 반피득교수님이 있었습니다. 본명은 Peter van Lierop(리에롶)이라고 하는데, 반피득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분이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시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우리나라의 연세대 신과대학에 기독교교육학과를 개설하셨고, 신과대학장을 역임하신 교육자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교육학을 학문적으로 소개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피득박사는 그의 명저 '기독교교육'이란 책에서 예수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특별한 교육방법이라고 하면서 8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교육방법을 간단하게 제목만 말씀드려 봅니다. ① 대화 ② 반문법(역질문) ③ 격언 ④ 비유 ⑤ 강의 ⑥ 토의 ⑦ 질의 ⑧ 구안교수법(실물교수)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더 설명할 수는 있지만, 생략하고 비유만 설명드립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잘 사용하셨습니다. 예를 잘 들어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방법이었습니다. 반교수는 ‘예수님의 비유는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으로서 남을 것이며, 인류 역사상에 훌륭한 교수방법으로 오래 남을 것’이라고 좋은 교육이론이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비유는 이해하기에 쉽고, 간단하면서도 보다 높은 사상의 세계로 유도하며, 보다 깊은 영적 진리를 던져주는 방법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많은 비유 중에서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드리면서 예수님은 비유의 천재라는 말씀을 실감하여 봅니다. 비유란 말은 헬라어로 "파라볼레"라고 하는데, "옆에 갖다놓는다"는 말인데, "비교하므로 원 뜻을 밝혀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의 신학적이고 영적이며 도덕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세상의 아주 보편적이고 평이한 사물이나 사건을 빌어서 예를 드는 교육방법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화를 잘 사용하셨는데, 예수님의 생애와 사건을 기록하는 중에 비유는 약 3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비유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농부가 뿌리는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 모든 나라에 뿌려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뿌렸지만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싹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새가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가 나가서 씨를 뿌리다보니 흙이 얇은 돌밭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지만, 흙의 두께가 얇고, 돌이 많아서 뿌리를 내릴 수 없었고, 곧 햇볕이 나므로 싹이 말라죽었습니다. 씨 뿌리는 농부가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를 뿌리는 중에 가시덤불에 떨어졌는데,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으므로 열매를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옥토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씨뿌리는 비유는 한 마디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귀를 주셨지만 듣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책임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주는 교훈은 '우리는 어떻게 들을 것인가, 이제 어떻게 결단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씨 뿌리는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옥토에 떨어진 씨앗인데도 어떤 사람은 30배의 열매를 맺고, 어떤 사람은 60배를 맺고, 어떤 사람은 100배를 거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은 한 사람, 한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지만, 듣고 반응하는 것은 500명이 모두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크게 대별하여 4가지 밭이나 6가지 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이어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신 것처럼 가라지의 비유도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먼저 가라지의 비유에 대하여 간단하게 개요를 알아야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연이어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하늘나라, 천국을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마치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좋은 땅, 옥토를 준비하고 거기에 좋은 씨앗을 뿌렸습니다. 사람들이 씨를 뿌린 후에 그날의 일손을 놓고 집에 들어가 밤을 잤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좋은 씨를 뿌리고 많은 수확을 거두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원수가 있었는데, 주인과 종들이 잠자는 동안에 몰래 이 사람의 밀밭에다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밀이 나서 열매를 맺으려고 할 때 가서 보니 가라지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였습니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일꾼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라고 했습니다. 이 집의 종들이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이를 터인데,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비유의 말씀으로 선포하시고 집에 계실 때에 "가라지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잘 풀어 말씀해주셨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다. 좋은 씨는 그 나라의 자녀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추수 때는 세상 끝 날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가라지를 모아다가 불에 태워 버리는 것과 같이, 세상 끝 날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인자가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죄짓게 하는 모든 일들과 불법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 나라에서 모조리 끌어 모아다가, 불 아궁이에 쳐 넣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논농사를 지으시는 것을 보면 돌피를 뽑으려고 다니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피'라고 하는 볏과의 한해살이풀이 있습니다. 높이는 1m정도이며, 잎은 가늘고 벼와 비슷하여 자랄 때에는 벼인지 피인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이 피는 환경 적응성이 매우 커서 산지에도, 척박한 땅에도 냉수답에도, 냉수가 나는 저습지에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피의 열매는 단단하기 때문에 가볍게 쪄서 절구질을 해야 껍질이 벗겨집니다. 돌피는 단백질과 지방이 많고, 영양분은 쌀이나 보리에 떨어지지 않지만 석회분이 많아서 소화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재배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가라지라는 것을 '독보리'로 번역해야 합니다. 헬라어로 "지자니온"이라고 하는데, 밀 이삭과 같이 보이는 독보리라는 잡초입니다. 이 독보리는 소화도 안 되고, 장기간 먹으면 몸에 해를 주었습니다. 독보리와 밀은 구별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전문가들만이 구별할 수 있기에 때문에 자랄 때에는 그대로 놔두어야지, 이것이 참 밀인지, 독보리인지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드러나게 되는데, 독보리는 빨리 자라기에 먼저 열매를 맺히는데, 열매를 보아서 가라지인 것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농부라고 하여도 가라지와 참 밀이 같이 자랄 때에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으려 하다가 참 밀을 다칠 수 있고, 가라지가 아닌 참 밀을 뽑아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이 가라지의 비유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다르게 씨를 뿌리는 자가 한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이었고, 그들이 가진 씨앗도 달랐습니다. 한 분은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는 씨앗을 뿌렸고, 다른 하나는 악한 자의 자식이 되게 하는 씨앗을 뿌리고 있습니다. 좋은 씨앗을 뿌리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인자이며, 악한 씨를 뿌리는 자는 악마였습니다. 마귀요 사탄입니다. 이 세상 끝 날이 와서 추수할 때가 되면 하나님은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구원받을 자를 모아 하나님의 나라로 모아들이실 때에 가라지를 모아서 불에 태워버리는 것처럼 죄를 짓게 한 자들, 불법을 행하는 자들 영원히 심판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십시오. 나는 옥토려니, 좋은 밭이라고 안심하지 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본래 좋은 밭이고, 좋은 씨앗을 뿌리고 심었다고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분명히 좋은 씨앗을 뿌렸고, 우리들이 좋은 밭이라고 하여도 생각하지 않은 장애물과 부정적인 세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선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 있고, 이 세상이라는 밭이 있고, 천국의 아들들, 구원받은 성도들이 있어 천국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수용하여 자라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우리의 생을 다 살고,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자라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수용성이 좋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자리에서 나에게 말씀하신다고 잘 받아들이고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그런 말씀은 목사님과 같이 목회자로 부름 받은 사람이나 감당할 수 있고, 우리 같은 평신도들을 아니라고 하시면 그것은 가시덤불이요 돌밭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 세상이란 밭에 심겨진 하나님의 자녀들로 책임적인 존재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 생애의 마침표는 우리 주님에게 달려 있고, 주 앞에 설 때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도 나의 일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할머니들이 땀을 내면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살기 좋은데..., 먹을 것도 많고 입을 것도 많은데... 이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리고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산다고 해도 지금처럼 살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대로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감사함으로 맞이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하여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존재하고, 빛과 어두움이 존재하고,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선포하실 때에 그 말씀을 들을 청중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변화를 받으며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고 전혀 변화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잘 믿는 사람과 지금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교회를 잘 유지하기 위하여 부정적이고, 나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을 정화하고 솎아낼 필요가 있지만, 가만 두라고 하십니다.
밀과 독보리는 모양이 비슷하여 아주 전문가가 아니면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라지와 참 밀의 뿌리가 서로 뒤엉켜 있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아내려고 하다가는 잘못하여 참밀도 함께 뽑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이 사람은 독보리, 이 사람은 참밀이라고 미리 결론을 내리고, 독보리는 일찌감치 뽑아버려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런 권한을 우리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인생들아, 너희는 형제를 심판하고 판단할 권리가 없노라"고 하십니다.
가라지가 참밀과 함께 자라게 내버려두는 것은 가라지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밀에 대한 애착이 크기 때문에 유보하시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아끼거나, 가라지가 참 밀이 되라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와 함께 혹시 밀까지 뽑히지 않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가라지가 분명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것조차도 우리가 판단할 몫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면 저런 사람을 심판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나 그것도 우리의 영역이 분명히 아닙니다. 우리는 저런 못된 사람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가라지를 두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악한 영의 자녀들이 공존하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밀을 보호하고 밀이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곳간에 들일 수 없는 수많은 가라지들 보다 곳간에 들이는 한 영혼을 더욱 귀하게 여기시고 보호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밀과 가라지를 함께 두시면서 밀을 연단하시고 마침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악한 자녀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은 고된 일이요, 때로는 괴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여 곱게 자라고 순수한 환경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환란을 통해 고난의 유익함을 깨닫게 되고, 평안치 못한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잠 16:4에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엄청난 죄를 짓는 사람들이 있고, 살인마도 두십니다. 우리 사회에 깡패도 있습니다. 없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두시는 것은 그래야 깡패가 되지 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깡패에게 걸리지 않기 위하여 조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언의 교훈을 주고,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 열심을 내고, 선한 사업을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운 노아의 여덟 식구를 구원하시면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였지만, 지금도 이 세상에는 여전히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 심판을 하셨지만 이 세상에 악을 제거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좁은 생각으로는 선하신 하나님이신데, 악을 없애지 않고, 선을 대항하게 하시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두시는 것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섭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짜를 두시는 것은 진짜를 보호하시려는 것이며, 선인을 선인으로 끝까지 보호하시려고 악인을 두시고 심판 날까지 가려고 하십니다.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다가 밀까지 뽑을 수 있기에 참밀을 보호하는데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보호하시고 있습니다.
요6:39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증하시고 영생을 주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우리를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심판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다른 이의 못된 열매에 대하여 내가 열을 내고, 분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작도 비슷하고 진행 과정도 동일하지만 좋은 나무라면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요, 나쁜 나무라고 하면 그는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라지와 같은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좋은 나무요,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라고 생각하지만, 독보리 같은 생각과 못된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것으로 갈등하고 고민하고, 괴로운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깨닫고, 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탐욕을 이기려고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나 자신과 싸우면서 우리의 신앙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우리 사람에게 정직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일생 정직하게 살지 못하였기에 하나님 앞에 부족함을 고백하고, 은혜를 사모합니다. 죄를 지었기에 그것이 죄인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기에 용서의 감격도 있었습니다. 죄 지은 것을 자랑하거나 합리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롬6:1-2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원하시는 것은 알곡이요 밀알이지, 결코 화려한 독보리가 아니며 돌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가라지를 두시면서 참 밀알을 보호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알곡만 있고, 선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당신의 자녀들을 두시지 않으며, 가라지와 함께 참밀을 두시고 좋은 열매 맺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고 기다리시면서 참밀로 알찬 열매를 맺을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인내로 참아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영적인 잠을 자게 되면 악한 원수가 와서 우리 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갑니다.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알곡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주변에 있는 많은 가라지에 신경을 쓰지 말고, 그런 가라지를 바라보며 나는 참밀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을 알아주시고, 좋은 열매를 맺히려고 힘쓴 것을 알아주시고 상급으로 바꾸어주시는 날이 분명히 오고 있습니다. 조금 초라하지만 밀을 원하시고 화려하고 거창한 모양을 갖춘 가라지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는 가라지가 아닙니다" "죄 짓는 나는 죽었습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 믿음의 사람답게 변화된 생활, 성령의 진실한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밭에 뿌려진 가라지
마 13:24-30 / 김영규 목사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13:24-30, 36-43)
하나님 밭에 뿌려진 가라지
앞선 첫 번째 비유는 제자들이 묻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먼저 해석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제자들이 먼저 주님께 해석을 요청했습니다. 제자들은 그만큼 천국의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의가 생겼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해석해 주셨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주님이십니다. 밭은 세상입니다. 좋은 씨는 천국의 자녀들입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입니다. 가라지를 뿌린 악한 자는 마귀입니다. 추수 때는 세상 끝 날입니다. 추수군은 천사들입니다. 주님의 해석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밭에 대한 해석입니다. 밭은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속에 하나님의 밭을 만드셨습니다. 본래 세상은 다 하나님의 소유지만 악한 자들이 일시적으로나마 차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의 밭을 구별하습니다. 하나님의 밭은 바로 세상 속에 있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밭의 토양은 바로 성도들의 마음입니다. 교회가 보이는 밭이라면 성도들의 마음 밭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밭입니다.
둘째는 씨앗에 대한 해석입니다. 씨앗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씨앗은 하나님이 심으신 좋은 씨앗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성도들입니다. 두 번째 씨앗은 나쁜 씨앗, 가라지의 씨앗입니다. 가라지란 zizavnion(지자니온)인데, 자랄 때의 모습은 밀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밀밭에 지자니온이 나오면 얼마동안은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시골에서 논농사를 지었습니다. 논에 모심기를 하면 벼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벼 가운데 “피”라고 하는 잡초가 섞여 있습니다. 피는 벼와 모양이 너무나 비슷해서 처음에는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상당히 자라난 후에야 잎줄기 가운데에 약간 흰 줄이 나타나서 겨우 구별할 수 있습니다. 지자니온을 영어 성경에는 “tares” 혹은 “weeds"라고 번역했습니다. “곡식 가운데 잡초”, 혹은 “그 장소에서 원하지 않는 야생초”란 뜻입니다. 즉, 하나님 자녀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 혹은 교회 속에 숨어 있는 불신자들입니다. 이들은 본래 하나님이 뿌리시지 않은 씨앗이요, 하나님의 밭에 원치 않으신 품종입니다.
셋째는 원수에 대한 해석입니다. 하나님 밭에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입니다. 마귀란 말은 diavbolo"(디아볼로스)입니다. 그 뜻은 “비방자”, “참소자”, “고소자”란 뜻입니다. 히브리말로는 “사탄”인데 의미는 “대적자”란 뜻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정죄하고, 비방하고, 고발합니다. 신앙을 버리도록 온갖 수단을 부립니다. 마귀가 씨를 뿌린 것을 보면 그 자체가 범죄적입니다. 우선 마귀는 남의 밭에 씨를 뿌렸습니다. 하나님의 밭인 줄 알면서 자기 씨를 뿌렸습니다. 남이 씨를 뿌린 곳에 덧뿌렸습니다. 더구나 그 씨앗을 밭주인이 잠든 사이에 몰래 뿌리고 달아났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이렇게 번역합니다. “사람들이 다 잠들었을 때 원수가 와서 밀밭에 독보리를 덧뿌리고 갔다.”(현대인의성경) 씨를 뿌린 의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알곡을 수확하기 위해서 씨를 뿌리셨지만, 마귀는 알곡을 망치려고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어찌되었든지 하나님의 교회에 가라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목적이 불순합니다. 교회를 파괴하고, 성도들의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그러면 그 가라지를 어떻게 제거해야 할까요? 가라지의 처리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가라지의 弊害를 생각한다면 당장 없애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가라지의 폐해는 너무 심각합니다. 가라지는 곡식에 필요한 자양분을 빼앗아갑니다. 가라지가 많으면 알곡이 자라지 못합니다.
먼저 세상 속의 가라지들입니다. 악한 사람들 때문에 사회가 혼란합니다. 재산을 빼앗깁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힙니다. 가정을 파괴시킵니다. 국가와 사회가 불행해집니다. 저는 대학에 다닐 때에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서 관심이 참 많았습니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을 보면 옛 러시아 사회의 부패상이 잘 나타납니다. 농민들은 뼈가 부러지게 일을 해도 밤낮 짐승 같은 생활을 하고, 상류 사회는 일하지 않으면서도 밤낮 화려한 옷을 입고 파티만 벌입니다.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이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입니다. 우리 사회도 그렇습니다. 부정부패, 강도, 사기꾼, 도적놈, 폭력배, 도덕 불감증에 걸린 사람들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이 불행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회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조금이라도 意識이 있는 젊은이라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이 사회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악한 사람들을 제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중과不적입니다. 나 홀로 상대하기에는 악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욥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 암소는 새끼를 낳고 낙태하지 않는구나. 그들은 아이들을 내어 보냄이 양 떼 같고 그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그들이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하는구나.”(욥21:7-15) 악한 자들이 세상에서 너무 잘 살아요. 돈도 많고, 자식도 잘 되고, 웰빙 합니다. 하나님을 욕하면서도 잘 살아요.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힘들게 살고 그나마 잘못하면 하나님께 징계를 받습니다(시 73:14). 어쩌면 좋습니까? 낙심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악한 자들을 한꺼번에 제거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일찍이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바로 칼 마르크스입니다. 그는 사회에 불필요한 인간들을 제거하더라도 평등 사회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도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다 망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도 공산주의 국가에서 고급 차를 굴리며 호의호식 하는 사람들은 다 공산당 간부들입니다.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어떤 혁명이나, 제도 개혁으로도 악한 인간들을 세상에서 제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 속의 가라지도 문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 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벧후2:1-3,12-14,18-19)
그러면 가라지들에 대한 하나님의 방침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방침은 당분간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8-29절) 가라지를 그냥 놔두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유는 가라지와 곡식이 쉽게 구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참 신자와 거짓 신자는 겉으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한 자가 더 착해 보이기도 합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3-15) 짝퉁이 더 진짜 같아요! 그러니 어떻게 가짜만을 골라낼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둘째 이유는 가라지를 제거하다가는 참 곡식이 오히려 손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쟁들이 그렇습니다. 분명히 가짜들이 있으니까 교회가 깨지는 것 아닙니까? 평신도 문제는 그래도 덜 심각합니다. 만일 지도자가 가짜라면 어쩌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가짜를 진짜인 줄 알고 추종합니다. 오늘날 교회안의 모든 분쟁과 다툼이 그렇습니다. 교인끼리 분쟁하다가 안 되면 세상 법정으로 갑니다. 그것은 분명히 그들 중에 가짜들이 섞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절대로 그런 지경까지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를 가짜로 지목한다면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시험에 듭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 손실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단 가라지들을 놔두라고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아시고 내 생각대로 사람을 심판하는 일은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가라지를 놔두라는 것은 잘못을 방치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분명히 잘못된 행실을 한다면 당연히 교회는 그를 바로잡아야 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교훈을 합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고전5:11-13) 드러난 잘못까지 방치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잘못이 드러나면 교회는 신실하게 勸懲을 해야 합니다. 다만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을 조급하게 예단하여 심판하지는 말라는 말씀입니다.
추수 때를 바라보자
그러면 악한 자들을 언제까지 방치해야 됩니까? 얼마나 참으면 됩니까? 추수 때까지입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30절) 추수 때가 되면 모든 식물은 열매를 드러냅니다. 자신이 어떤 종자인지 말 안 해도 다 알게 됩니다. 악한 자들이 언제까지나 착한 사람으로 위장할 수는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 때에 처리하면 됩니다.
가라지의 특성은 잘 자란다는 점입니다. 놔두면 알아서 자랍니다. 저는 가끔 동산의 잡초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 잡초들을 보약으로 다려 먹으면 얼마나 건강에 좋을까? 그렇잖아요? 뽑아내고 발로 밟고 깎아내고, 약을 뿌려도 여전히 잘 자라는 게 잡초입니다. 그만한 생명력이라면 굳이 인삼이나 약초를 다려 먹지 말고 잡초를 다려 먹는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채소나 곡식은 열심히 거름을 주고 가꾸어야만 수확이 됩니다. 그러나 잡초는 내버려 두어도 잘만 자랍니다. 채소나 곡식은 꼭 씨를 비싼 돈을 주고 사다가 심어야만 됩니다. 작년에 심었다고 올해에 저절로 나오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잡초는 씨를 뿌리지 않아도 됩니다. 어디에 보관 되었는지? 언제 뿌려졌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무지막지 하게 떼거지로 나옵니다. 저는 우리 동산에서 봄에 잡초 뽑기를 열심히 하다가 초여름만 되면 두 손 들고 항복합니다. 도저히 못 당합니다. 그러나 때가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그 무성하던 잡초들이 누렇게 색깔이 변합니다. 그 때쯤 뽑든지 깎아 내면 맥을 못 춥니다.
이제 사람 얘기를 해 봅시다. 불신자는 굳이 만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불신자들입니다. 잡초처럼 저절로 잘 자랍니다. 신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됩니다. 믿기로 결심했다고 신앙이 저절로 자라는 게 아닙니다. 매일 붙잡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때로는 칭찬하고, 때로는 찾아가야 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입장이 달라집니다. 인생의 황혼이 다가올 때면, 불신자는 가을의 풀처럼 힘을 잃고 쇠약해집니다. 죽음이 두려워집니다. 갈 곳이 막연합니다. 놔두고 가는 세상이 너무 아까워서 잠이 안 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담대하고 소망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품, 천국이 기다려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8-9)
세상 종말도 그렇습니다. 인간 사회의 모든 부조리와 모순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합니다. 악한 자들은 각자 자기 분량대로 판결을 받습니다. 가을이 오면 모든 산천초목이 자연의 섭리에 굴복하듯이, 세상 추수 때에 모든 인간들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 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말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천사들이 그 심판을 수종듭니다. 이런 위세 앞에 아무도 거역하거나 불평하지 못합니다. 미국에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지나가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911 테러 당시에 입은 피해의 열 배나 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디다 대고 원망 불평 한 마디 못합니다. 세상 종말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는 자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종말 심판은 가라지들에게는 공포와 절망의 대상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소망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가라지는 심판의 영순위입니다. 굳이 줄을 서지 않아도 가장 먼저 심판을 받습니다.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30절)
분명히 역사의 추수가 있습니다. 추수를 바라보면서 인생 추수를 준비하세요. 뿐만 아니라, 세상의 죄악과 부조리에 대해서 더 이상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 일에 충실합시다. 세상 죄악은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십니다.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힘쓰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41-43절)
밭의 가라지 비유
마 13:24-30 / 박상훈 목사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은 특별히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는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왕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배척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있어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그 까닭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마음 밭이 옥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길가와 같이 단단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돌밭처럼 흙이 얇던지, 그들의 마음 밭 속에 가시떨기가 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밭이라면 아무리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도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이 또 생기는 줄 압니다.
"도대체 왜 세상에는 그러한 마음 밭이 생겼는가? 왜 예수님은 자기를 영접치 아니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가? 또 언제까지 내버려 두실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비유의 제목은 36절에서 제자들이 밝힌 것처럼 "밭의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나아가서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곡식만 뿌렸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원수가 몰래 와서는 밭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 같으면 앙심을 품고 집에 불을 지를텐데, 유대 나라에는 돌로 집을 만들었으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타나는 대로 몰래 밤중에 가서 가라지를 덧뿌리는 일로 복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법을 보면 이런 일을 금지하는 조항을 만들어 놓을 만큼 이런 일은 이따금씩 있었습니다.
원수가 뿌린 가라지는 일명 다른 말로 "독보리"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그 이삭에는 독이 있습니다. 먹으면 배탈이 납니다. 위로는 구토를 하게 되고, 아래로는 설사를 하게 됩니다. 심하면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그 이삭을 먹으면 안됩니다.
또 이 독보리는 말 그대로 보리와 너무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싹이 트고 자라는 동안에는 분간이 잘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이삭이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 종들이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결실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밭에 가라지들이 많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종들은 깜짝 놀라 주인에게 달려왔습니다. 밭에 가라지가 어쩌다 한 두 개 있었으면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밭에는 여기저기에 수많은 가라지들이 자라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주인에서 고해 바쳤습니다. 종들은 가라지의 출처가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원수의 소행인 것을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종들은 주인을 위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밭에 나아가서 가라지를 다 뽑아 버리기를 원하시나이까?"
그 때 주인은 종들에게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29∼30절 말씀입니다.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그 뒤에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다른 비유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비유를 말씀하셨던 바닷가를 떠나서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밭의 가라지의 비유의 뜻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37∼43절에서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시면서 제가 붇는 질문에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누구입니까? "인자."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 리키는 말입니다.
2) 밭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세상."
3)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4)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
5)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
6)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7) 추숫군은? "천사들."
8) 가라지의 운명은? "불에 사르는 것같이."
9) 천사들을 보내시는 분은? "인자."
10) 천사들이 이 땅에서 거두어 낼 가라지들은 무엇입니까? "모든 넘어지게 하 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
11) 가라지들이 던져질 곳은? "풀무불."
12) 그곳에서 가라지들이 보일 반응은?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의인들이 갈 곳은? "아버지 나라."
14) 의인들이 받을 영광은? "해와 같이 빛나리라."
15)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마감하시면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무엇 입니까? "귀있는 자는 들으라."
오늘 우리는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편의상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밭에는 곡식도 자라지만 가라지도 함께 자랍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는 언제나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아들들도 살아갑니다. 그러나 악한 자의 아들들도 버젓이 활기를 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학교에 다닙니다. 같은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습니다. 또 같은 직장에서 일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41절 말씀대로 가라지는 곡식들을 넘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불법을 행하면서 곡식들을 괴롭힙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부르짖습니다.
"주여, 저 몹쓸 가라지들을 왜 그대로 내버려 두십니까? 왜 당장에 처치하지 아니하십니까? 언제까지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그 때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너희를 위해서니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다치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추수 때까지 그대로 자라게 두어라."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주인이 가라지를 즉시 뽑지 않습니까? 곡식을 위해서입니다. 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설령 가라지 열 개를 못뽑더라도 곡식 하나를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 주인의 마음입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가라지를 뽑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이 말씀은 악을 조장하고 방치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선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잠16:4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에게 능력이 없거나, 하나님에게 실수가 있으셔서 우리 곁에 가라지를 있게 한 것이 아닙니다. 다 우리에게 쓸데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목자가 양들을 칩니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서 실컷 배불리 먹게 했습니다. 양들이 배가 불렀습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목자를 따라서 우리로 들어왔습니다. 양들은 어리석습니다. 배가 부르면 그냥 드러누워 잡니다. 배탈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자다보면 서로 깔려서 죽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목자는 양들 사이에 염소 몇 마리를 집어넣습니다. 염소는 양들이 자기 옆에 다가오면 뿔로 받아버립니다. 그러면 양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피해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저절로 운동을 하게 되고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날이 되면 또 목자를 따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나가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그 사이에 염소를 넣는 것입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 바다로 나가서 고기를 잡습니다. 잡힌 고기를 좁은 공간에 놓고 운반하다보면, 항구까지 오는 동안 물고기는 힘이 다 빠져 버립니다. 물 위에 둥둥 뜨게 됩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부는 바다에 나가기 전 상어 새끼 몇 마리를 준비해 갑니다. 그러면 좁은 공간 속에서 잡힌 물고기들은 상어 새끼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이리 도망 다니고 저리 도망 다닙니다. 그러다 보면 물고기들은 싱싱해 지고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 항구까지 이를지라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팔팔하게 살아서 오는 것입니다. 어부는 물고기들을 위해서 일부러 상어 새끼 몇 마리를 넣는 것입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곁에 가라지가 있기 때문에 곡식은 오히려 더 강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힘을 얻고 모진 비바람도 참을 수 있는 인내력이 배양되는 것입니다. 또 곁에 가라지가 있기 때문에 비가 오더라도 귀한 흙이 쓸리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가라지와 같은 사람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괴로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다 우리를 위해서 그것을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가라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구나!"라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가라지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결코 추숫군이 아닙니다.
3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세상 마지막 때에 가라지를 다 거두어서 불사르게 단으로 묶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추숫군이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결코 가라지를 뽑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번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도중에 어떤 사마리아인들의 촌에 잠시 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 저녁 그곳에서 유숙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인인 것을 보고서 자기 마을에 못들어오게 거부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의 두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성급하게 예수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서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제자들을 데리고 다른 마을로 물러가셨습니다.
여러분, 야고보와 요한의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추숫군이 아닌데도 추숫군처럼 행세를 하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 눈에 가라지처럼 보인다고 그들을 자기들 손으로 즉시 뽑아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추숫군이 아닙니다. 또 지금은 추수 때가 아닙니다. 심판의 때가 아닙니다. 은혜의 때입니다. 긍휼의 때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밖에 있었을 때는 다 가라지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 믿고 의롭게 하시고 가라지와 같았던 과거의 모든 삶을 청산케 하시고, 곡식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곁에 가라지와 같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뽑을 권리가 없습니다. 그들을 쉽게 정죄하고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라지와 같은 삶을 속히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곡식의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리와 창기들은 명백하게 가라지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친구처럼 대하셨습니다.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결국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사랑의 감화를 받고, 가라지의 삶을 청산하고 곡식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가운데 분명한 가라지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라지와 같은 그의 발도 씻겨 주셨습니다. 아마도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더 깨끗하게 씻겨 주셨을 것입니다. 또한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시면서 예수님이 열 두 제자 가운데 누구에게 대표로 떡을 떼어 주셨습니까?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높여주는 표시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명백한 가라지와 같은 가룟 유다지만, 사랑의 감화를 통해서 그가 돌아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거듭거듭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피땀 흘리시며 간절히 기도하고 나셨을 때입니다. 가룟 유다가 군병들을 이끌고서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그는 군병들에게 보내는 신호로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런 가룟 유다를 향해서 예수님은 친구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드디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우셨을 것입니다.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가라지들을 위해서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의 이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추숫군이 아닙니다. 가라지를 뽑을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남을 쉽게 정죄하고 심판하려고 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권면하며 그들을 위해서 축복으로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추수 때가 있습니다.
심판 때입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결정적으로 분리되는 순간입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자기 갈 길로 가는 때입니다. 가라지는 다 모아서 풀무불에 던진다고 했습니다. 풀무불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풀무불의 온도는 대략 섭씨 1000도씨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불은 결코 꺼지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영영한 불입니다. 계21:8에 보면 지옥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고 했습니다. 뜨거운 불 때문에 고통스럽고, 유황이 탈 때마다 유독가스가 심하게 풍겨져 나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무엇입니까? 그곳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세세토록 밤낮없이 고통 가운데서 울며 이를 가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반면 곡식들은 아버지 나라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실수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결코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다 모아서 아버지의 나라로 들려 보내십니다. 그곳은 빛과 사랑이 충분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의인들은 위로를 받으면서 해와 같이 빛나고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왜 이 땅에 가라지들이 있는지, 왜 왕되신 예수님이 가라지들을 내버려 두시는지, 언제까지 내버려 두실 것인지 살펴 보았습니다. 왕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상 속에 심으셨습니다. 아무도 없는 외딴 산 속에 심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밭, 곧 가라지들이 많은 이 세상에 우리를 심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자기 밭에 가서 열심히 땀흘리며 일을 했습니다. 잠시 쉬기 위해 밭 곁에 있는 큰 느티나무 그늘에 가서 팔베개를 하고 누웠습니다. 누워서 푸른 하늘을 쳐다봅니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었습니다. 무심코 하늘을 쳐다본 농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구름들이 뭉쳐서 두 개의 글자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한 글자는 "그"자였습니다. 또 한 글자는 "전"자였습니다.
"그와 전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틀림없이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인가 계시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불현듯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 맞아! 바로 이것이구나! '그'자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고, '전'자는 전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전하라!'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임에 틀림없어!"
그는 그렇게 믿고서 농사짓던 일을 다 팽개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도회지에 있는 성경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사명을 주셨으니까, 교회만 개척하면 하나님이 뒤에서 팍팍 밀어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해 보니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한 번 와서 보고 그 다음주부터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목회가 되겠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사람은 농부답게 우악스럽게 생겼습니다. 거기다 말까지 더듬었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목회가 될 리 없습니다.
결국 깊은 회의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평소에 자기가 존경하던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조심스럽게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형제여, 형제가 그 날 보았다는 '그'자와 '전'자를 형제처럼 해석하지 말고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어떻겠습니까? '그'자는 그리스도를 열심히 믿고, '전'자는 자기의 생업에 전념하라고 말입니다."
그제야 농부는 자기의 성급했던 판단과 경솔함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가 평소에 하던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고서 그 일을 감사함으로 다시금 열심히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삶 속에서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썼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 세상 가운데 우리를 심으셨습니다. 그저 깊은 산 속의 기도원에 가서 수도 생활이나 전념하라고 우리를 심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 가운데서 빛이 되고 세상 가운데서 소금이 되라."
물론 우리 주변에 가라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가라지들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힘들어하지 마십시다. 가라지들이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그만큼 더 순수해 지고 빛나는 것입니다. 가라지들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더욱더 연단받는 것입니다. 아울러 내 곁에 가라지들이 있기 때문에 내 사명이 더욱더 귀하고 빛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 가운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매일 매순간 충실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때깔이 좋지 않은 교회
마 13:24-30 / 박은호 목사
2,000년 동안 자기 땅과 나라 없이 유랑생활하다 1948년 5월 14일에 독립한 이스라엘은, 가까운 주변 아랍 국가들(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과 끊임없는 전쟁과 분쟁을 겪으면서 하루도 평안할 날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45년만에 1993년 12월 30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의장 아라파트와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이스라엘 총리가 역사적인 평화협정을 조인하면서, 그 동안 끊이지 않았던 두 민족 간의 뜨거운 전쟁을 멈추고 첫 걸음마에 불과했지만 차가운 평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 후 중동평화회담은 계속되었고 평화의 행진이 가속화되었는데 1995년 11월 4일, 수도 텔아비브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한 평화단체(Peace Now)가 주최한 집회에 참석하여 평화의 노래를 부르고 내려오던 이스라엘 라빈 총리가 극우파 이스라엘 청년 이갈 아미르(Yigal Amir)에 의해 암살되면서, 안타깝게도 아랍과 이스라엘의 평화공존을 향한 행진은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라빈 총리가 그렇게 죽자 어렵게 형성되었던 평화의 무드가 산산 조각나고 이스라엘에서는 對 팔레스타인 강경파가 다시 집권하게 되었고, 평화와 공존 대신 테러와 폭력의 악순환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중동의 상호 평화와 공존을 이끌어 오던 라빈 수상의 죽음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라빈 총리를 암살했던 극우파 청년 이갈 아미르(Yigal Amir)가 왜, 무슨 이유로 평화주의자인 라빈 총리를 죽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가 라빈 총리를 죽인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닌 그의 잘못된 유대주의(Judaism)적인 신앙관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유의해야만 합니다. 라빈 총리를 암살하였던 범인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는데, 그는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라빈을 암살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일까요?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정말, 하나님이 그에게 라빈 총리를 암살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빈을 암살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라빈을 암살한 한 가지가 이유가 있다면, 이삭의 후예인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후예인 아랍이 함께 共存할 수 없다는 이분법적인 유대주의(Judaism)의 그릇된 신앙관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릇된 선민의식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유대주의의 이원론(二分法)적인 신앙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인도의 국부였던 마하트마 간디가 국가사회를 병들게 하는 일곱 가지 대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대죄가 원칙 없는 정치라고 했습니다. 그와 같은 원칙 없는 정치의 원인이 무엇일가요? 그대부분의 이유는 눈먼 돈과 끝없는 권력욕심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사회가 앓고 있는 병리현상도 그 예외는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사회 현실을 보면서 심각하게 우려되는 것 한 가지는, 우리 사회 속에 깊이 뿌리 내린 二分法的이고 二元論的인 가치관입니다. 얼마 전 한 주간 동안 선교지를 방문하는 동안 국내 뉴스를 전혀 듣지 못하다가 귀국하던 날 베트남에서 늦은 밤 시간에 비행기를 타기 전에 탄핵정국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 야 3당의 공조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그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 마음이 아팠고 기분이 착잡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극단적인 방식 외에는 문제를 풀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하는 답답함 때문이었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수준이 이것밖에 되지 못하는구나 하는 탄식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습니다.
귀국해서, 며 칠 지나면서 더 실망한 것은 野 3당의 주도로 의결된 탄핵안보다, 탄핵정국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을 보면서였습니다. 탄핵의결 이후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서, 그 실망스런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여당인 열린 우리당의 지지도가 탄핵이 발의된 9일(화) 26.7%이던 것이, 탄핵이 의결된 12일(금)에는 32.4%, 17일(수)에는 46.8%로 수직상승했다는 점입니다. 반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탄핵정국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각각 3%가량 지지도가 더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열린 우리당은 표정 관리하는 데 신경 쓰는가 하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애써 태연해하면서 ‘열린 우리당’의 일시적인 지지거품이 곧 빠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반된 여야의 표정과 입장을 보면서 발전적인 민주주의를 꿈꿀 수 있는 국회상을 기대해대 좋을지 …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국민들의 가치판단 기준들이 어떤 사건 하나를 보면서 너무 쉽게 요동친다는 점입니다. 야당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통령의 잘못이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여당이 무조건 잘 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좀더 깊이 생각하고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 신중함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에 너무 쉽게 좌우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고 위험스럽게 보아야 할 것은 이 역사의 현실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적인 구조로 이해하는 극단적인 가치기준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언제나 善이 되고, 자신이 기준이 되어서 자신과 같지 않는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정죄하고 심판하는 태도입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원론적인 가치기준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특히, 기독교인(종교인)들 중에 자신의 신앙 기준에 따라서 이와 같은 이원론적인 삶의 방식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탄핵의결 사건 하나 때문에, 갑작스럽게 열린 우리당이 그렇게 높은 지지를 받아야만 하는가? 만일, 열린 우리당이 야 3당과 유사한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때는 하루아침에 열린 우리당 대신 野 3당을 적극 지지해야만 하는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고민하고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탄핵사건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정말 그럴 수 있느냐는 생각으로 野 3당보다 與黨인 열린 우리당을 상대적으로 더 적극 지지해야 한다는 이분적인 대립논리를 버리는 일입니다. 이분법적인,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논리보다는 탄핵정국이라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이면(裏面)에 감추어진 우리나라 정치사회의 뿌리 깊은 병폐와 문제의 요인이 무엇인가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 고민하고, 직시할 줄 아는 지혜와 신중함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같은 대립구도 속에서 어느 한 편이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한대해도 반대세력과의 화해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역사 현실과 삶의 현실 속에서,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하는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나아가서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곧 ‘現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복음적인 삶의 方式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남보다 스스로 믿음이 더 좋다는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때깔이 좋아야 한다’는 의식意識입니다(거룩의식, 순수의식, 성결의식).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교회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야 하고, 깨끗해야 하고, 순수해야 한다는 의식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가 뭐가 이래?”라는 정죄하는 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도 그럴 수 있지라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런 티나 흠이나 주름잡힌 것이 없는 미끈하고 때깔 좋은 위대한 한 사람의 위인偉人, 초인超人, 완벽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고 찾습니다. 그런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국회의원을 뽑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목회자를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이 결코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소돔과 고모라를 살리기 위해서 의인 열 사람을 찾으셨던 하나님의 그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예루살렘 거리를 두루 다니면서,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단 한 사람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城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시며 탄식하시던 하나님의 그 애절한 마음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와 생각이나 삶이 같지 않는 사람을 우리의 밭에서 제거해버리고 뽑아버리겠다는 의도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비유 말씀은, 목회하는 목사인 저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목사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제 자신이 이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하는 사람이고, 이 말씀에 순종해야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제 마음은 이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도, 저는 제 자신이 이 말씀을 먼저 들어야만 하는 목사라는 것을 알기에 이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간절한 소망은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눅 19:1-10)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삭개오를 부러워했던 이유는, 그는 예수님을 정말로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 根據를 예수를 만난 직후에, 자기 평생 모았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한 그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정말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오늘 예배드리는 2천명이 넘는 교우들 중에 과연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고 가는 분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예수를 따라 다니던 수많은 무리들 중에, 삭개오처럼 예수를 만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극히 소수의 사람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 복음을 듣는 자라면 내 삶이 변화되는 변화라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고통이 없는 만남은 만남이 아니라 스침이고 마주침에 불과합니다. 만남의 증거는, 고통이 수반된 변화가 있습니다. 동시에 그 변화로 주어지는 성숙함과 행복함이 있습니다. 변화된 복음적인 삶 곧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본문을 통해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만남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본문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로 알려진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유를 복음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 많은 분들은 우리 중에 누가 곡식인가? 누가 가라지인가? 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구별의식(區別意識)을 가지고 자신과 남을 판단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본문에 나오는 종들처럼, 곡식 가운데 덧뿌려진 가라지를 빨리 뽑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가라지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마지막 秋收 때에 審判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품고 대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그 진의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 비유를 가르치셔야만 했던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배경에서 이 비유를 복음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종교사회는 철저하게 정결과 부정, 성과 속이라는 이원론적이고 이분법적인 가치구조를 가진 사회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분리주의적인 율법주의자들이었는데(분리된 사람들이란 뜻, 참 나쁜 이름입니다, 고약한 이름입니다) 祭儀的인 淨潔과 宗敎的인 分離를 삶의 원리로 삼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稅吏와 罪人들은 곡식인 자기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가라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마리아 사람들 역시 가라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나병환자, 중풍환자, 혈루환자, 고칠 수 없는 중병을 앓는 자들 역시 자신들과 함께 共存할 수 없는 가라지들이었고, 그들을 뽑아내버려야만 자신들의 聖潔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보다 더 철저하게 분리된 집단생활을 하면서 흰옷을 입고 수도생활을 하던 에세네파 사람들도 자신들만 곡식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새 언약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이미 더렵혀졌다고 생각되는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성(城)을 떠나서 광야에서 그들만의 도시를 건설하고 집단생활을 했습니다. 또 젤롯당(열심당)이라고 불리는 자들 역시 철저한 분리주의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와 같은 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들과 같지 않는 사람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신분의 사람들은 다 뽑아버려야만 하는 가라지 같은 대상들로 여겼다는 점입니다.
이와 같이 善과 惡, 淨潔과 不淨, 곡식과 가라지라는 이원론적이고 이분법적인 종교사회적인 유대교의 신앙과 가치관이 팽배한 그 시대를 향하여, 예수님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선포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곡식과 가리지의 비유를 선포하신 목적은 그들의 그와 같은 이분법적이고 분리주의적인 종교관 가치관을 긍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의 나라,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신 겁니다. 즉, 이 땅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곡식들만 모여서 자라는 밭과 같지 않다는 겁니다. 현존하는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는 곡식과 가라지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를 이루며 같이 뒤섞어서 공존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공존 속에서 가라지를 뽑아내지 않고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기다림의 나라라는 겁니다. 당장 심판하고, 정죄하고, 분리하고, 뽑아내버리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이 땅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요, 특징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라지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과 종들의 생각의 다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종들은, 가라지를 뽑아버리겠다는 급한 마음으로 밭에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라지를 뽑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밭에 나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秋收 때까지 가만 두어라 하십니다. 가라지의 뿌리와 곡식의 뿌리와 뒤엉켜 자라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이 비유의 진짜 의도 곧 복음이 무엇인가를 발견해 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복음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분리와 정죄와 심판으로 되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라지와 같은 존재에 대해서도 끝까지 공존하면서 기다림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겁니다. 기다림의 복음은 인내와 용서와 이해와 공존과 화해의 복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毒性이 강한 제초제(除草劑)를 뿌린 논밭에 잡초가 전혀 자라지 못하는 농약으로 중독 된 논밭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 화학비료도 주지 않는 농사하는 유기농법으로 농사짓는 논밭과도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벌레도 많고, 식물이 그리 크지도 않고, 볼품도 없고, 때깔도 곱지 않습니다.
우리가 식당에 가서 밥 먹을 때, 먹는 고추 하나도 매끈하고, 굵고, 때깔이 좋은 고추는 우리 몸에 그리 좋지 못한 것입니다. 구부러지고, 매끈하지 못하고, 때깔이 좋지 못한 고추가 농약이 덜 묻은 고추입니다.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뿌리는 제초제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땅 속에 계속 축적됩니다. 또 우리가 먹는 먹거리에도 잔류하게 됩니다. 생태계의 심각한 변화도 가져옵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전혀 다른 특정해충을 증가시키는 심각한 부작용도 초래합니다. 이 땅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유기농법으로 농사짓는 논밭과도 같습니다. 거기에는 가라지도 있고, 벌레도 있고, 때깔이 곱지 못한 먹거리들이 함께 자라는 곳입니다. 유기농업은 제초제나 화학비료 사용하는 농사보다 비록 생산성은 좀 떨어지지만, 안전하고 맛좋은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파괴되지 않는 생명력과 회복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였던 존 칼빈이 범한 역사적인 오점은, 수많은 가라지를 뽑아내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자기와 다른 신앙체계와 신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복음보다는 자신의 신학적인 주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개혁자라는 생사여탈의 대권을 가지고 유아세례 반대와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세르베투스를 화형시키는 일로부터 칼빈의 이름으로 무려 58명이나 죽이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칼빈의 이 과오는 분명히 비복음적인 행위였습니다. 오늘 역사가들은 칼빈의 그와 같은 행위를 그의 일생의 과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라지를 뽑지 말라는 예수님의 복음보다 자기 신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이분법적인 가치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500여년 전에는 선이라고 생각되었던 사건이 500여년 후에는 잘못된 비복음적인 과오로 재인식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선이 반드시 내일의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의 텃밭을 하나님의 나라로 가꾸기 위해서 가라지를 뽑기 위한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기다림의 복음으로 세리와 죄인까지도 품고, 그들에게도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함께 나누는 복음적인 삶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대합니다. 아멘.
가만 두어라
마 13:24-30 / 박지은 목사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목을 "가만 두어라!" 받아합시다. "가만 두어라!" 뭐 이 말씀에서 아마 여러분, 별로 오늘 메시지를 많이 안 해도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좀 있을 겁니다. 자꾸 건드리지 마세요. 가만 두세요. 왜, 자식들 건드리고, 문제 건드리고, 사건 건드리고, 다시 한번 옆에 사람 얼굴 쳐다보면서 "가만 두어라!" 이상합니까! 그러니까 워낙 그렇게 못 해 놓으니까! 사람은 아무리 잘해도 사단의 유혹을 받도록 체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우리들이, 나는 절대로 사단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나는 잘못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스스로 속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타고나면서 사단 유혹 받는데는 아주 재주가 뛰어나도록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아이들을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보면 쌍 시옷자가 막 터져 나오고, 어디서 배웠는지, 제가 이 손자 희락이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어디 갔다오더니만 한날은, 뭐 자주 만나지도 않잖아요. 어디 가서 한번도 안 들어봤던 '씨' 소리가 나오고 뭐 그러더라 구요. '야, 어디서 배웠냐!' 이러니까 아마도 저희끼리 교회 안에서, 모여서 저희들끼리 형아들 하고 놀면서 배우는 것 같다고...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좋은 것, 참 복되고 은혜로운 것은 잘 안 배우고, 뭐 이상한 것은 나갔다 금방 배우고 들어옵니다. 인간의 체질이 원래 그렇게 타고났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실들을 잘, 먼저 긍정을 하고 수긍을 하셔야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13장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 13:26) 싹이 나고 결실 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그랬습니다. 좋은 씨만 뿌렸는데, 자라는데 보니까 가라지도 자라고 있어요. 결국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하면, 여기에 잘 때에 가라지를 뿌렸다! 원수가 뿌렸다! 그럴 때에 이걸 가지고 많은 설교 중에 뭐 이야기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했습니다. 해석들을 했습니다. 뭐 게으름을 피웠다든지, 뭘 했다든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들이 게으름을 피우던지, 뭘 피우든지 여기에 보면, '잘 때' 라 그랬습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안 자는 사람들이 세상이 어디 있습니까! 뭐 어떤 모양으로든지, 사단은 역사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뭐 사단이 이상하다! 내가 뭔가 이 잠깐 동안 게으름을 피웠던지, 역시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게으름을 피우든지, 뭘 피우든지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삶인데요. 언젠가는 눈떠보니까, 벌써 들어와 있어요. 언젠가는 눈 떠보니까, 내 생활과 삶이 사단의 유혹 속에 빠져들어 있어요. 이게 인간에 삶에 사실인 것을 여러분이 오늘 좀 보셔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일 때문에, 우리가 항상 복음이 확인 안 되면 확인 안 되는 만큼, 흑암에 끌려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 말은 날마다 복음으로 확인하고, 자신이 사단에 끌려가는 사실을 알고, 내 자신을 통해서 사단이 들어오는 통로니까, 날마다 내가 죽는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복음의 인도를 받는 일에 늘 안심을 갖고, 또 거기에 집중해서 중점을 두고, 인도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기는커녕, 날마다 살아오는 사람들이 그게 지금 우리들의 삶이거든요. 날마다가 아니고, 분초마다 살아서 내가 시퍼렇게 나오는 것이,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언제든지, 어느 때든지 사단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런 어떤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이 복음을 날마다 확인 할 수밖에 없고, 확인해야 되고, 날마다 복음 속에, 우리가 힘써 서야될 이유가 뭐냐? '복음은 비밀이라!' 그랬습니다. 오늘 여기 본문에 말씀 보면 예수께서 계속 복음설명 하면서,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복음은 구약 전부터, 벌써 창조 전부터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깨닫고 안다는 것은, 이것은 너무 귀중한 가치요,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밀을 알 수 있고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은혜라 그럽니다.
여러분 은혜 받았다는 것은, 이 깊이 감추어진,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비밀을 깨닫고 알았다 볼 수 있다는 사실자체가 은혜 중에 은혜요. 축복 중에 축복이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3장 9절에 보면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옛날부터 하나님의 계획안에 감추어 두었다. 이 감추었다는 것은 언젠가는 드러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언젠가는 드러낼 그 일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더라 그 계획 속에 여러분과 제가, 이때에 이 비밀을 드러내시고 이 비밀의 역사를 알게 하셨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옛날부터 하나님이 계획안에 감추었던 비밀! 유혹과 사단의 흑암에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비밀! 언젠가는 이 축복과 은혜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 일을 이루실, 그리고 이 비밀을 깨닫게 하실, 그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승리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그러니까 그냥 무심히 말하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알았다! 그리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가지고 교회 앉았다! 보통으로 여기는데, 이게 보통 자리가 아닙니다. 늘 제가 이 말해도 잘 이해가 안 되는가 봐! 제가 이 말하는 동안에도 별로 감동 된 얼굴이 없어요. 여전히 멍청해!
로마서 16장 25절 보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게 벌써 영세 전부터 감추었다가, 26절에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이 비밀을 깨닫고, 이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견고한 터로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늘 사단의 손에 속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이, 이 비밀을 깨닫게 되는 순간에 승리하실 축복된 역사가 약속이 된 겁니다.
27절에 보면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그 비밀이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 그 여러분들이 뭐 예수 그리스도 무심히 어쩌다가 알았느냐! 이것과 상관없이 깨달았다! 들었다! 알았다! 어쨌든 그 이름으로 이 자리에 앉았다! 별스럽지 않게 생각되는데, 여러분 한번 둘러보세요. 올 사람이 왔고, 안 올 사람이 안 왔다! 그게 아닙니다. 전혀 올 사람이 안 오고, 안 올 사람이 다 와있어요. 비밀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비밀입니까!
고린도전서 2장 7절에 보면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계속해서 감추었다, 감추었다! 그랬습니다. '이제는 그의 성도에게 나타났고' 그랬습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비밀이 창세 전부터 감추었던 이 놀라운 축복의 비밀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 비밀이 드러났지만 아무나 받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심을 받은, 은혜를 입은 여러분과 제가 받았고,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교회 앉아있다고 다 깨닫는 게 아니더라구요. 하나님께서 어쩌다가 이 축복과 역사를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축복을 받고도 또 이것을 잘 깨닫고 알지 못하는 가치를 알았다는 이 사실 자체가 또 비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앉아서 이 비밀을 깨닫고 알았다! 너무 감격스럽고 너무 감사해야 되죠. 이 구원의 은혜를 받고 깨닫고 감사한 것, 여기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이걸 아는 만큼 뭐냐? 흑암에 세력이 유혹할 수 없어요. 덤벼들 수 없습니다. 있던 흑암의 세력도 완전히 깨어지고 물러가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이 오늘 본문에 놀라운 축복에 약속된 것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는 것은 너무도 위대하다! 위대하다! 그래도 몰라요. 뭐가 위대한지! 단어가 위대하다고 들어가는가 보다! 자꾸 제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오늘 좀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라 그렇게 말씀했죠. 인간의 어떤 것으로도 이것을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깨닫는 게 아닙니다. 되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는 것은 성령으로만이 안 다! 그랬습니다. 은혜로만이 이것을 안다! 그랬습니다. 이 가치를 알게 되는 그때부터 뭘 아느냐? 온 세상을 다 바꾸어도 이것과 바꿀 수 없습니다! 이게 와 지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6절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생명의 가치와 같이, 이것보다도 더 위대한 가치, 복음을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알았다! 어떤 것도 교환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비밀이다! 그랬어요. 이 비밀이다! 그래서 깨닫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 라는 것을 이 비밀이라는 말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비밀이라 그럴 때에 그냥 비밀이 아니거든요. 이 비밀! 그냥 노출되어 있으면, 뭐 아무나 볼 수 있고, 찾을 수 있다 그러면 그 비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
저는 그 어릴 때부터 보물찾기에 한번도 되어본 일이 없어요. 저는 그래서 이번 산업선교도 그렇고, 뭐 추첨에, 산업선교 대회에서 추첨에 또 지난번도 걸리고, 이번에도 걸렸어요. 예수 믿고 나니까, 아마 팔자가 바꾸어져서 그런가 봐요. 보물찾기에서 뭐 찾아와도 한번도 걸려 본적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뭔가 이 비밀이다! 그 말속에는, 깨닫고 안다는 것조차도 이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뭐라 그랬느냐? 인간으로 안 된다! 그랬습니다. 여러분의 수단과 방법, 지혜와 가문을 통해서 어떤 것으로도 안 된다! 이겁니다. 박사도 안되고, 지식도 안됩니다. 그런데도 이것은 노인도 될 수 있고, 어린아이도 될 수 있고, 멍청해도 될 수 있고, 똑똑해도 될 수 있습니다. 뭡니까? 은혜로다! 하나님의 은혜!
그래서 이것을 깨달았을 때에 너무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 마태복음 3장 16절에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랬습니다. 선지자와 의인들이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닫기를 그렇게 원했지만 못 봤습니다. 못 들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을 향해서 이 비밀을 깨달은 세례요한이 이 비밀 앞서 길을 연, 길을 평탄케 하고 길을 연 세례 요한을 향해서, '지금까지 어떤 사람보다도 큰 자다!' 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저는 말할 것도 없죠. 너무 위대한 자리, 비밀을 알았다는 이 사실 자체가 성경에는 위대하다! 위대한 자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날 핵심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사님이, 마가 요한 다락방 거기에 모인다! 모든 재산 다 몰수당한다! 그뿐 아니다, 거기에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전한다! 그럴 때에, 법으로 사형에 처한다!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 모였습니다. 왜, 모였습니까? 이 가치를 깨달았을 때에 오는 결론입니다. 이것을 한번 바꾸어 생각 해 보라! 그랬어요. 오늘 송현교회 이 자리에 온다, 재산 몰수당한다! 모르겠습니다 만은, 몇 명이나 여기에 올지? 몇 사람이 올지? 재산 몰수는 놔두고 사형선고다! 얼마나 오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축복과 비밀이 깨달아지지 않으면 도저히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없고, 그 자리에 올 수도 없습니다.
다행히 여러분과 제가 어떤 면에서 지금 이해가 안 되는 것이죠. 제가 처음 이렇게 교단문제 때문에, 그런 문제 있을 때에, '면직을 당한다!' 이럴 때에, 여러 가지 많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심지어 어떤 이야기까지 있었느냐하면, '여기서 말만 안 한다고 하면 안 되냐!' 공공연히 와서 권하도록 옆에서...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나가서 말만하고, 안하고 말로해서 되는 게 아니다! 사실이면 사실이고, 아니면 아닌 게 아니냐!' 그래서 분명하게 제가 선언을 하고 면직이 되기까지 왔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면에서 그때에 제 마음에 이 사실에서 확신과 확인이 없었으면, 도저히 그렇게 행동 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이 자리에 오셨을 때에 뭐 여러 가지로 지금 결혼한다! 혹은 사업한다! 뭐 한다! 그럴 때에 범사에 뭐가 나옵니까? 범사에 여러 가지 그런 어려움들이 올 수도 있었거든요. 또 오게 되는 것도 보게 되거든요. 그것 때문에 된다, 안 된다 그것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았다, 못 앉았다! 복음을 붙들고 복음을 전파한다, 못한다!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왜? 가치가 발견이 안되면 백 번, 천 번 소용없어요. 가치가 발견되었다! 죽었다! 상관없어요. 무슨 문제 생겼다! 흔들릴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그런 극한 상황 속에도 복음이 된다, 안 된다! 상관이 없었거든요. 역사 속에 엄청난 위대한 능력으로 복음이 지금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유혹 당할 수 있고, 유혹 당할 수 있는 이 배경이 뭐냐하면 이 비밀에 가치가 안 왔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이게 와졌다! 생명보다 귀한 겁니다. 온 천하를 주어도 이걸 이룰 수 없는 것인데, 이것이 안되기 때문에, 이 사실을 깨달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축복이 다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이 사실을 붙잡고 생애를 건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삶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을 압니다.
이번에 우리 교역자들이 가서, 특별히 동경에 우리 신 목사님이 와서 이야기도 듣고 그랬습니다 만은, 갔다가 주일날 저녁밥을 먹기까지 죽을 지경이라 그래요. 왜? 10시, 11시까지 밥을 안 주는 겁니다. 예배드리고 나서는 계속 전 교인들이 붙잡고 어디 가느냐? '그냥 다락방하고, 팀 사역하러 다녀야 된다고...' 그래서 제가 일본 들어가고 그러니까, 우리 부 목사님이 먼저, '먹는걸 미리 미리 챙겨 잡수셔야 됩니다...' 그러더라 구요. '안 그러면 못 얻어먹습니다!' 그러더라구요. 그러면서 미친 듯이 같이 돌아다니는 겁니다. 하루종일...
이걸 가지고 어떤 분들이, 어떤 사람들이 좀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무슨 여자들이 그렇게 몰려다니면서 남편 밥도 안 해주고 그러냐고...' 나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왜, 이해를 하느냐? 여러분 거기에 복음을 듣고 와 있는 사람들의 많은 경우가 밑바닥 인생을 보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역사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죄의 구렁텅이에서, 도저히 해방 받을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 받고 나니까, 너무 이 축복된 역사로 해방 받고 나니까, 이 축복된 역사를 감사, 감격정도가 아닙니다. 전하고싶은 마음이 한정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친 듯이 이 복음을 위해서... 하여튼 그런 기회가 왔다. 하루종일이 아니라 계속해서 투자하고 돌아다닙니다. 어느 날 맨 정신이 올 때가 있지만...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구원의 감격 속에 한번씩 미쳐보지 않는다 그러면 그건 복음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정말 복음에 대해서, 여러분 복음의 가치를 조금만 이해하게 되면 미친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전 인생을 걸고 생애를 전부 투자했느냐? 복음을 조금 이해하고, 우리가 복음에 대한 이 축복과 가치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오늘 쉽게 말해서 여러분들이 천국에 5분만 같다가 왔다! 미칩니다. 다, 돌아다닐 겁니다. 지옥에 5분까지 너무 길고, 1분만 갔다 왔다! 여러분 정말 불신자들 볼 때에, 정말 믿지 않는 내 형제와 자매들을 볼 때에 눈물 흘릴 정도가 아닙니다. 미칩니다. 참 복음이 깨달아 지게 되면, 그 가치를 알게 되면, 전 인생을 그 가치 속에서 모든 가치를 찾아내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면에서 한번씩은 미쳐 봐야 되겠다! '하나님이여,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몽땅 구원 때문에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옵소서!' 할렐루야! 진짜 믿습니까! 이 가치가 이해가 안되니까, 예수 믿는 게 기쁨이 없어요. 주일날도 즐거움이 없어요. 시간 되면 하면 된다! 그러고, 그리고 성경책에 묻은 먼지 털고 온다고... 이게 웃을 일이 아니라 웃는 사람 다 똑같은 그런 사람들이죠... 왜? 가치가 이해가 안되니까! 이렇게 되는 이 가치 속에 모든 것이 있으니까!
그 다음 문제는, 그 다음에 사단의 유혹이다! 사단의 역사다! 그건 두려워 할 것이 없잖아요. 왜? 예수 그리스도 회복하면 다 되니까! 그러면 그 다음 문제는 뭐가 나옵니까? 자연적으로 문제 생겼다! 사실이 생겼다! 가만두어라! 그래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가만 두어라!' 걱정하고 문제삼을 이유가 없고,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1장 19절에 보면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스데반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에 순교의 바람이, 피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때에 모든 복음의 가치를 깨닫고 있는 자들이 재산 다 두고, 어떤 경우에는 가족들도 같이 나올 수 있는 그런 길이 없어, 오직 복음 때문에, 이 가치 때문에 흩어졌습니다. 도망쳤습니다. 이들이 안디옥 교인들입니다. 여기에서 복음의 역사가 나올 수밖에 없죠. 전 세계를 바꾸는 사실적인 역사가 여기서부터 나왔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뭐 전도한다, 안 한다! 복음의 가치가 이해되면 전도라는 것이 상관이 없어요. 따라오는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이 다른 어떤 것 이전에, 이 축복과 역사가 사실적으로 먼저 이해가 되어야 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받아합시다. "가만 두어라!" 옆의 사람 얼굴 쳐다보고, 진짜 "가만 두어라!" 왜, 안 봐요? 낮이 부시죠. 워낙 쏘다녀서, 가만 두어라! 진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이때부터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 이외에는 다른 것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니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기 때문에, 그때부터 다른 문제에 우리 마음과 생각이 빼앗길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도 복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다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가는 곳에 나도 가고, 복음이 서는 곳에 나도 서고, 복음이 말하면 나도 말하고, 복음이 입다물어라 그러면 나도 입다물고, 복음에 유익이라면 전체를 복음 위해서, 복음에 영광 위해서 이해하게 되는 눈이 이때부터 열려지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방 받은 자들, 참 기쁨과 감사에 놀라운 역사가 여기서 나옵니다.
누가복음 7장 41절에 보면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2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절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 7: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 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할렐루야!
그래서 로마서에는 '죄 많은 곳에 은혜도 많도다!'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 많이 지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깨달아야 되는 겁니다. 죄 많이 지을 것이 없어요. 지금까지 지은 죄만 해도 지구보다도 더 큰데, 더 지을게 뭐 있어요. 못 깨달으니까, 나오는 겁니다. 이 모든 흑암에 세력들이 해방 받았다! 해방 받은 것을 깨닫는 만큼, 흑암의 세력을 꺾을 뿐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다 있구나! 여기에 다 있구나!' 비로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한마디로 뭐냐? '복음을 누린다!' 그러잖아요. 복음을 누린다! 누린다니까, 복음과 함께 있다!
복음과 함께 있다! 그러니까, 함께 있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를 하더라구요. 뭐냐하면, '우리 함께 있자! 두루두루 같이 있자!' 이래가지고 이상한 단체를 만들어서 함께 있는다고, 뭐 산에 가서 함께 있고, 들어가서 함께 있고, 이상한 단체를 만들어 가지고 함께 있다! 그러는데, 그런 함께 가 아니고 이 함께는 뭡니까?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이 함께 있다는 말이거든요.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누가 우리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함께 있다! 남편과 함께 있다! 그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있다!
오늘 아침을 먹으면서 둘이 눈을 마주치고 앉아서 먹으니 좀 이상하데요. 가을비는 추적추적 오고 괜히 뭔가 이상한 감상에 빠질 것 같아요. '맞다! 아무리 인간은 함께 살아야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이게 확인 안되고 여기에 은혜가 안 된다 그러면 이 은혜의 가치를, 이 사실의 가치를 모르면, 사람은 아무리 많이 모여져도 군중 속에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이게 인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다! 이걸 가지고 누림이라! 그러는 겁니다. 누림을 잘못 이해해 가지고, '밥 안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누림이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 그래서 하나님 곧 그 은혜와 축복 속에 내가 서 있습니다. 이 사실이 바로 복중에 복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자꾸 아니라, 계속해서 다가오는 것이 그때부터 뭐냐? 너무 이 가치가 이해가 되면,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내 인생을 복음 위해서 살겠습니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업도 복음 위해서, 교회 일도 복음 위해서, 뭐 가정에 모든 상황도 복음 위해서, 자식도 복음 위해서 거의 이렇게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일을 하겠습니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안 되는데 뭐 지 방법이 나오죠. 이게 원천적으로 되어져야, 이 가치가 이루어져야, 그때부터 복음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내 인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이게 복음의 방법으로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할 수 없으니까! 이런 것이 저절로 따라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부터 비로소 뭐가 나오느냐? 기도응답이라는 사실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가만 두어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인도가 이해가 됩니다. '가만 두어라!'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왜? 우리를 인도하실 분은 성령이요, 우리를 인도하시는 역사는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오늘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다 계획해 놓고, 미래를 이미 여러분과 제게 알게 하셨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0절에 오늘 보면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내가 굳이 뭔가 결단하고, 내가 하고 아니라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이 속에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만은 다 밝힐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그래서 교회 안에는, 그래서 여러분과 저도 범죄하고 때로는 이상한 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다리가 부러지고, 팔 다 부러지고 여기와 앉아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아니면 만약에 여러분 이상한 짓을 했다! 즉각 하나님이 치신다! 팔다리 다 부러져야 됩니다! 주일날 때만 되면 전부 삐딱거리면서 와야 됩니다. 하나님이 뭐라 그랬습니까? 가만 두어라!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언제까지? 추수 때까지 두어라! 이 땅에는 이런 사람들이 섞여 사는 곳이다!
그래서 교회 나와 가지고, '아, 이상하다 저런 인간도 모여있다! 나는 저런 인간들 교회 오는 것, 나는 오기 싫다!' 그러면 지도 똑같아요.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셔야 됩니다. 복음의 가치를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그때부터 이런 사단의 미혹과 유혹들에서부터 다 떠나게 됩니다. 흑암의 세력을 완전히 꺾고 승리하게 되는 축복된 역사가 이해가 되면,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도할 때마다, 기도응답들이 사실적으로 응답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이렇게 시간이 가면서 기도응답이라는 그 사건에 대해서 내가 뭘 막 구했으니까, 구해 놓으니까, 응답되었다! 그것보다도 '아, 하나님이 하시는 구나! 내 욕심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당신이 나를 향한 필요가 이해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구나!' 이런 사실들이 순간순간 부닥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손에 쓰여질 필요가 있다 그러면, 여러분 구하는 것, 그 일에 장애 되는 것을 제거도, 혹은 획득도, 구하는 것마다 하나님은 응답하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워낙 계획과 상관없이 지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불철주야 이를 갈고 살아가니까! 이게 안 되는 것이지, 하나님은 전능하시잖아요.
귀가 없습니까! 손이 없습니까! 손과 귀가 있는 것보다도 훨씬 확실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게 뭐라 그러느냐? 내가 뭘 하려고, 결단해서 하려고 하지 마라! 가만히 두어라! 또 한번 얼굴 쳐다봅시다. 하도 여러분 한 주간 동안 계속해서 뭔가 화가 나거든 남편얼굴 쳐다보고, '가만 두어라!' 아내 얼굴 쳐다보고, '가만 두어라!' 옆에 사람 얼굴 진짜 쳐다보세요. 좀 고개 돌려보세요. 앞으로 보고하지 말고, '가만 두어라, 가만 두어라!' 확신합니까! 왜? 복음이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만 두어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없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난 우리 3선교회 그 세미나에, 그 의성 옥천 그쪽 지역에 기도원에 가서 부부치유라 그래서 중심해서 갔습니다. 막상 보니까 부부만 앉아있는 것이 아니고, 꼬맹이들하고 다 앉아 있어요. 가족들이 다 앉아 있어요. 부부치유 뭐 그럴 때는 좀 뭐 관계, 그 다음에 성관계까지 뭔가 좀 생각하고 갔는데, 아이들 앞에는 하나도 말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어요. 그래서 다 던져 버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면서 내가 오늘까지, 이 자리에 서기까지 내 중심 속에, 하나님의 인도로 살았던 중심 속에, 중요한 가정으로부터 물려받았던 것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제가 저의 어머니에 대해서 별로 많이 칭찬하고 그런 이야기를 제가 안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신비주의에 깊이 들어가셨기 때문에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내가 하나 받았던 것이 있다 그러면, 나한테 준 것이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면 다 된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면 다 되기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기고, 어떤 사건이 생기던지, 기도를 깊이 하는 그런 어머니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뭐 신비가 들어간 겁니다. 기도깊이 하니까, 몰입하고, 완전 거기에 매달리고, 금식 맨 날 하니까! 그 신비 될 수밖에 없죠.
그러나 내게 있어서 신비를 '잘했다, 못했다!' 이전에 한가지 내 사상 속에 심어진, 어릴 때부터 내 몸에 베이게 만든 것이 있습니다. 문제나 사건과 일만 생기면, '하나님이면 다구나!' 그래서 지금까지 살았어요. 그래서 그 중간에 저도 신비 속에 들어가 봤던 기억도 납니다 만은, 그 배경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된다! 여러분 오늘에 나를 이 자리에 세웠던 가정 중요한, 나를 지탱했던 믿음이 있다면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우리 3선교회에 뭐라 그랬느냐 하면, '다른 게 아니다! 이건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다! 부모만 이 믿음만 되면 자식은 보고되는 것이다! 저절로 다른 수단 뭐 찾고 돌아다니지 말고, 이 믿음 하나만 해도 된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만 바라봐라 다다!' 알아들었을지 모르지 만은 아마 알아들었겠죠. 뭘 교육 잘한다, 못한다! 아닙니다. 이것 하나만 딱 심어 줬어요.
그래서 제가 집에서 그걸 가지고 가출이라 그러죠. 나도 가출을 했거든요. 어머니하고 합작해서 가출을 했습니다. 아버지 몰래, 그때에 가출하기 직전에, 이래봬도 가출하기 직전에 교회에서 밤잠을 안자면서 철야하고 가출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이면 된다!' 는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집 떠나기 전에 다른 거 기도할게 없잖아요. '하나님 내일 내가 집을 떠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게 내가 집을 떠났던 배경이었습니다. 오늘도 어디 가든지, 뭘 하든지, 일단은 많이 기도를 안 합니다. 할 여가가 없잖아요. 어디 간다 그러면 잠깐이라도 고개 숙이고, '하나님 우리의 길을 인도하옵소서. 우리 가정 어디 가려고 그럽니다. 하나님 인도해 주옵소서!' 이 믿음이 그저 간단하게 와 진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 때부터 내 마음속에 깊이 심겨진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면 됩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속에 살아가자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올 때마다 우리는 사단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체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의 가치가 확인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면 다구나! 여기에서 우리 인생은 다 해결됩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뭡니까? 순간, 순간 사건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지하게 거짓말하지 않고, 진지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잘 아십니다. 응답할 믿음인가, 아니면 거짓말하는 것인가, 잘 압니다. 진실하십시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성령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