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 산행기
기우현
지난 지리산 산행 이야기
내가 지리산을 산행한 것은 이번까지 포함해서 7차례였다. 맨 처음 지리산에 온 것은 1987년 30대에 성동고에서 근무했을 때였다. 그 때는 지금처럼 등산을 하지 않았던 때여서 등산 경험이 없었다. 다만 젊음이라는 패기로 갔다. 떠나기 전에 등산화도 빌리고, 준비하라는 물건을 준비해서 나선 산행 길이었다. 코스는 칠선계곡에서 화엄사까지 이르는 험난한 노정. 칠선계곡 아랫마을에서 숙박하고 일찍 떠난 우리는 50분 걷고 10분 쉬는 강행군 속에 천왕봉을 등정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곡 물줄기도 시원했지만, 난생 처음 보는 고사목에, 구름 아래 펼쳐지는 비경은 그야말로 낯선 세계에 온 듯 신비감에 싸였었다. 그리고 세석평전까지 가서 야영했다. 뜨거운 여름날이었는데도, 그곳은 추워서 잠 못 이루었던 생각이 난다. 하산 길도 무척 길어 지루했다. 그래서 지리산의 첫 산행은 나에게 진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어찌나 고생을 했던지 지금도 나의 산행 중 최고로 어려운 코스를 걸은 산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산행은 동작고에서 근무할 때였다. 지리산에 왔으나 종주를 하지 못했다. 그때 임경유 선생님을 비롯한 영등포 여고 선생님들과 함께 산행했다. 그런데 산행 중 비가 줄곧 내렸다. 어떤 선생님은 아이를 데리고 왔다. 이렇듯 비를 맞고 산행하는 것이 아이에게 무리라고 판단이 되어서 중도 포기하고 뱀사골로 내려 왔다. 비 맞고 내려오는 길도 멀고 힘들었다. 뱀사골 민박집에서 그날 숙박하고 다음날 귀경했다. 그때 그 집 앞 풍광이 너무 좋아서 선생님 중 하루 더 쉬고 가겠다는 분도 있었다.
세 번째 지리산 산행은 그간 임경유 대장과 산행을 해서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때였다. 동작고 대장 이정숙 선생님과 의기투합하여 동작고 선생님들과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 학교 선생님들과 조교, 그리고 장로이셨던 송이빈 부장과 같은 교회를 다니는 아주머니들과 함께 한 대부대였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와서 노고단 대피소에서 일박을 했다. 새벽에 출발해서 점심시간에 벽소령에 도착했다. 그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이 있어서 송이빈 부장과 아주머니는 벽소령에서 하산했다. 그래서 인원이 단출해졌다. 우리는 세석 산장에서 하루 더 잤고, 그 다음날 일찍 출발해서 천왕봉을 등정한 뒤 백무동으로 하산했다. 그때는 천왕봉 주변이 온통 안개로 가득차서 풍광을 전혀 보지 못했다. 다만 일행 중 먼저 당도해서 우리를 기다리던 이정숙 선생님의 긴 머릿결이 세찬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네 번째 2005년 산행은 임경유 등산 팀과 김석 선생님이 함께 했다. 그 때는 밤늦게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백무동 여인숙에서 잠시 눈을 붙인 뒤, 새벽에 일어나서 등산하기 시작했다. 장터목산장에서 아침 식사하고, 천왕봉을 등정한 뒤 대원사로 하산했다. 천왕봉에서 대원사까지의 하산길이 너무 길어서 지루했던 기억이 난다.
다섯 번째 2006년 산행은 임경유, 구본황, 이규영, 한영수 선생님과 함께 했다. 일명 공비산악회로 불렸다. 밤기차를 타고와 성삼재에서 출발해서 세석산장에서 일박하고 천왕봉을 등정한 뒤 법계사를 지나 중산리로 내려 왔다.
여섯 번째 2008년 산행은 당곡고 김영철, 김대성, 권용태 선생님과 함께 했다. 원지터미널에서 내려 중산리까지 버스를 타고 왔다. 거기서 로터리 대피소까지 걸어와 1박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출발하여 5시 50분에 천왕봉 정상에 올랐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일출을 보았다. 그리고 세석산장까지 와서 한신계곡으로 하산해서 백무동으로 내려왔다. 하산 길은 가파르고 돌투성이어서 힘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위 내용은 2008년도 산행 시에 그간 산행을 정리하면서 쓴 글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사진을 찍지도 않고 글로 썼다. 정년퇴임 후 일기를 쓰게 되면서부터는 일기로 대체되어 산행기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특별하다고 생각하여 산행기를 쓰기로 했다. 사진도 찍었으니 참고자료로 사진도 넣어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을 내 속에만 간직한 것이 아니라 공언을 했다.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 글을 썼다.
이번 지리산 산행 준비 이야기
이번에 동기와 지리산 산행을 종주하게 된 계기는 작년의 설악산 공룡능선 산행에 두어야 할 것 같다. 그간 정기 산행으로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상태에서 공룡능선 산행 이야기가 나왔다. 이대욱 회장도 이미 같은 방식으로 공룡능선을 탄 바 있었고 나도 비록 일행을 따라다녔지만 10번을 탄 경험이 있었다. 자신도 있었고 기대도 있었다. 설악산 공룡능선을 탄다는 것은 고생으로 치면 힘든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슴 뛰는 일이다. 그때도 이대욱, 정학섭, 진유복, 이현상, 장광섭이 간다고 했다. 하지만 장광섭이 가정 사정으로 불참했다. 사전에 희운각 대피소에 예약을 한 뒤 다섯 명이 6월 1일과 2일에 공룡능선을 탔다. 6월 1일은 설악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천불동 계곡을 지나 희운각 대피소까지 올라갔다. 그날 대피소에서 숙박한 뒤 출발해서 마등령까지 간 뒤 오세암, 백담사 쪽으로 하산했다. 그간 나의 산행은 일행을 좇아가기 바빴는데 이번에는 여유를 가지고 풍광을 즐기며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나로서는 그간 해왔던 산행 방향과 반대로 갔다는 의미도 있었고 나의 공룡능선 산행 기록에 하나를 더 추가하는 경사도 있어 좋았다.
동기들 간의 공룡능선을 무사히 완주했다는 자신감이 이번 지리산 산행에서도 작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리산 산행 이야기는 봄부터 꾸준히 거론되어 왔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거론된 것은 9월 26일(수) 도봉산 산행 시였다. 그때는 모든 회원이 다 산행에 참석했었다. 지리산 산행 이야기가 시작되어 산행 날짜까지 이야기가 되었다. 10월 셋째 주 토요일은 어머님 기일이었고 넷째 주는 정 교수의 총장 선거 준비 때문에 어려웠다. 그래서 10월 17일(수)부터 19일(금)으로 정했다. 정 교수는 18일에 합류하겠다고 했다. 16일에 야간열차를 타고 가자는 이야기는 거론되다가 말았다. 하산을 한 뒤 식사하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대피소 예약 관계 때문이었다. 예약은 10월 1일에 해야 한다. 나는 해외 가족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 산장 예약은 회장과 총무가 공단에 신청하기로 했다.
28일(금)에 해외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간 지리산 경험을 바탕으로 계획안을 작성하기로 했다. 숙소와 거리 정보를 검색했다. 정 교수가 합류하는 것을 전제로 했고 이틀 간 산행 거리를 맞추는 작업을 했다. 벽소령 대피소는 보수 중이라 아예 계산에서 뺐다.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장터목 대피소에서 1박해야 하고 이틀 간 거리에 균형을 맞추려면 연하천 대피소에서 1박해야 했다. 자연스레 16일 밤기차를 타야 했다. 하산은 쉬운 백무동으로 정했다. 그 계획서를 회장인 대욱에게 메일로 보냈다.
30일(일)에 장광섭이 산장예약과 관련하여 구체적 출발 일시에 대한 의견을 물어왔다. 회장은 16일 밤기차를 탈 것을 원했으나 진유복, 이현상은 밤기차를 타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정 교수는 사정상 이번 산행에 합류할 수 없다며 양해를 구했다. 장광섭이 차선책으로 17일 당일 6시 반 차를 타고 가는 안을 냈다. 나는 그간 지리산 산행을 1박 2일로 다녔던 터라 무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좋다고 했다.
10월 1일(월)에 장광섭과 이대욱이 장터목과 연하천 숙소 예약에 성공했다는 연락이 왔다. 좋았다. 그런데 대욱의 장터목 숙소 예약에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다. 연하천 숙소를 예약하고 장터목 숙소를 예약하려는데 순식간에 마감이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 예약을 취소한 사람이 있어서 신청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소식을 접한 뒤 천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피소 예약을 마친 뒤라면 우리가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산행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 장광섭이 노고단 탐방 예약 신청을 하겠다고 했다. 노고단은 나도 처음 가는 곳이고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고마웠다. 시작이 반이라고 우리 산행은 이미 지리산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2일(화)에 장광섭이 하산 코스를 물어 왔다. 나는 중산리가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간 정리된 내용을 바탕으로 수정한 계획안을 카톡에 올렸다.
3일(수) 나는 이대욱에게 10월 5일에 산행할 장소를 상의하고자 전화를 걸었다. 장소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다. 나는 강화도 안을 냈지만 대욱은 청계산 안을 냈다. 다들 강화도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내 생각을 접었다. 대욱은 지리산 산행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산행 당일에 출발하면 우리 실력으로 연하천에 가기가 무리라는 의견이었다. 이로써 나의 수정 계획안이 제대로 수행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4일(목) 회장이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로 5일 산행을 취소했다. 그리고 다음 주 어느 날에 산행할지 의견을 구했다. 이견이 있었지만 10일(수)에 여자 동기와 같이 산행하는 것으로 했다. 사전 의견 교환이 필요하고 산행 연습도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그날 외에 또 날짜를 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7일(일) 나는 다른 산행 팀과 관악산을 산행하면서 내 계획안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경험이 많은 그들도 당일 산행은 무리라고 했다. 하산한 뒤 집에 와서 다시 검색해 보고 16일에 밤기차를 타고 가는 수정안을 카톡에 다시 올렸다.
10일(수) 동기들과 오봉산 산행을 했다. 이번 지리산 산행에 참여할 다섯 명이 다 모였다. 산행 출발 날짜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의견은 밤기차를 타는 것으로 정해졌다. 우이동으로 하산한 뒤 여자 동기들과 만나 식사했다. 지리산 종주 산행을 한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다. 오늘 내가 가져온 계획서를 회원에게 배부하는 것으로 끝났다. 앞으로는 카톡으로 더 상의해야 했다.
11일(목) 장광섭이 기차표를 예약했다고 알려 왔다. 그에 따라서 수정된 계획안을 다시 카톡에 올렸다. 계획안에 개인이 준비해야 할 목록도 실었다.
15일(월) 회장이 지리산 종주 안내를 카톡에 실었다. 구례구역에서 택시를 탑승하지 말고 버스로 터미널로 이동한 뒤 김밥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타고 성삼재로 이동하자는 안이었다. 그리고 공동 준비물에 마련하기 위해 모임 시간을 좀 일찍 갖자고 했다.
16일(화) 출발 당일이었다. 회장이 공동 구매 물건에 대한 의견을 냈다. 그리고 만나는 시간도 앞당겼다. 10시에 용산역 터미널 앞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로써 우리 지리산 산행 팀 사전 준비는 끝을 맺을 수 있었다.
10월 16일(화) 지리산으로 출발!
나는 지리산 대장정 산행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머리도 감고 면도도 했다. 그리고 배낭을 최종적으로 챙겼다. 햇반을 데워 놓고 등산복도 가을 복장으로 챙겨 입었다. 안사람이 미숫가루와 반찬 7끼를 비닐봉지에 챙겨 주었다. 쌀밥도 세 덩이 넣어 주었다. 나는 너무 무겁다고 다 안 가지고 간다고 했다. 결국 반찬 두 봉지만 뺀 뒤 9시 지나 집을 나섰다. 배낭이 묵직했다. 신림역에서 전철을 타고 용산역에서 내렸다. 10시에 장광섭, 진유복, 이현상, 이대욱을 순서대로 만났다. 먼저 이마트로 같이 가서 라면, 햇반, 귤, 쥐치포 등을 공동 구입했다. 그리고 산 물품을 배분했다. 라면 봉지(5개입)과 햇반 1개는 내 배낭에 넣었다. 배낭이 더 묵직해졌다. 기차에 탑승했다. 기차는 예정시각 10시 45분에 출발했다. 출발 기념으로 차내에서 사진을 찍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지만 크게 피곤하지는 않았다. 산행에 대한 기대가 있는 상태였고 집에서 준비 차원으로 미리 푹 쉰 덕분이었다.
10월 17일(수) 산행 첫째 날
예정 시각인 3시 04분에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왜 구례구역인가 했는데 ‘구(口)’ 자였다. 구례 입구역이란 뜻인 것 같았다. 역사 앞으로 나와 역사 사진부터 찍었다.
택시기사의 합승 호객 행위가 있었으나 나는 부지런히 일행을 좇아 버스를 탔다. 요금이 천 원이라고 했다. 카드로 찍었다. 싸다고 생각했는데 터미널 행까지의 요금이었다. 기사는 30분 뒤에 이 버스가 성삼재로 출발한다고 하고 비용은 4,500원이라고 했다. 식사할 시간도 없는 것 같아 김밥을 샀다.
3시 40분에 버스를 탑승해 4시 10분에 성삼재(1,090미터)에서 하차했다. 이 또한 카드로 찍었다.
식당에서 어묵우동을 시켜 아침을 먹었다. 성삼재 유래도 알아본 뒤 식사한 후 5시에 노고단 대피소로 출발했다. 밖은 아직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길은 평탄해 플래시 몇 개로 되었다. 지상의 풍경은 감상할 수 없지만 그 대신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을 감상할 수 있었다.
1시간 걸어 6시에 노고단 대피소에 이르렀다. 이제 주변이 환해지기 시작하면서 별빛은 사라졌다. 취사장 앞에서 짐을 풀고 화장실도 다녀왔다. 바로 노고단 탐방 길로 들어서야 했는데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지 몰라 잠시 지체했다. 그리고 노고단 탐방 길로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르게 오르는 길이었다.
노고단 고개(1,440미터)로 막 올라서자 일출을 보았다. 감동이었다. 바로 일출사진을 찍었다. 6시 44분이었다. 그리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욕심이지만 우리가 대피소에서 지체하지 않고 좀 더 일찍 올라왔더라면 노고단 정상에서 일출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도 장광섭이 노고단 탐방 신청을 했기에 탐방할 수 있다. 그 기쁨이 컸다. 노고단으로 가는 길은 나무침목을 촘촘히 박은 길이었다. 걷기 쉬웠다.
노고단 정상(1,507미터) 가까이 있는 전망대에서 운해를 보았다. 이것도 지리산 10경에 들어간다. 여기서도 단체사진을 찍었다.
표지석과 돌탑으로 올라갔다. 여기서도 탐방 기념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먼저 표지석을 찍은 뒤 돌탑을 찍었다.
표지석 앞에서 동기들의 인증사진을 찍어 주었다. 등산객인 여자 분이 나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해서 찍어 주었다. 찍고 있는데 동기들이 하산하기 시작했다. 아직 인증 샷을 찍지 않은 채 하산하는 진유복을 불렀다. 다시 표지석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인증 샷을 찍어 주려고 했다. 그런데 내 휴대폰이 주머니에 없었다. 당황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휴대폰이 표지석 앞바닥에 놓여 있었다. 아까 그 여자의 사진을 찍어 줄 때 내 휴대폰을 바닥에 둔 채 일행을 서둘러 좇아간 것이었다.
남미 여행에서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전화번호를 베껴 적다가 휴대폰을 바닥에 놓아 둔 채 일행을 성급히 좇아갔었다. 그때 휴대폰을 분실했던 기억이 순간 되살아났다. 아무튼 진유복을 그때 불러 오지 않았더라면 찾으러 다시 여기에 올라와 했으리라.
우리는 40분간 노고단 탐방을 마치고 다시 노고단 고개에 섰다. 여기는 해발 1,440미터다. 고개 옆에 있는 돌탑 사진을 찍은 뒤 출발했다. 시각은 7시 25분. 이제부터 천왕봉으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숲길이었다. 우리는 전체적인 방향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돼지령(1,370미터)까지는 완만한 산행 길이었다. 뒤돌아 본 노고단 정상이 햇살과 단풍으로 붉게 물들었다. 아래서 보니 노고단 정상이 꽤 높아 보였다. 피아골 삼거리를 지나 임걸령(1,320미터)에 도착했다. 샘터까지는 가까운 길이었다. 잠시 내려가 샘터의 물맛을 보았다. 샘물의 수량이 많고 맑고 시원했다.
노고단 고개에서 임걸령까지 전체적으로 하산하는 방향으로 걸어왔다. 또한 완만해서 걷기 좋았다. 여기서부터 노루목까지는 오르는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지리산 가을 단풍이 아름다웠다. 계단으로 오르는 길도 단풍 숲 터널을 지나는 듯했다. 그 길도 아름다워서 계단에 서서 개인 사진을 찍은 뒤 올라갔다. 노루목(1,480미터)에 올라섰다. 앞으로 삼도봉까지 1.0킬로미터를 더 걸어야 한다. 40분 걸려 삼도봉(1,499미터)에 도착하니 11시 22분이 되었다. 노고단 고개에서 여기까지 근 두 시간 걸렸다. 왜 전에 나는 삼도봉을 노고단 고개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삼도봉 표지석부터 찍었다. 삼도봉 표지석은 전라북도 남원시와 전라남도 구례군 그리고 경상남도 하동군의 경계에 서있는 이정표다. 삼도를 구분하는 기점이어서 의의가 깊은 곳이다. 가까이는 반야봉을, 멀리는 천왕봉의 선경과 천왕봉에서 연하봉, 촛대봉을 잇는 파노라마를 조망할 수 있었다.
사진을 찍은 뒤 점심 식사를 했다. 아침에 산 김밥으로 때우는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가져온 햇반과 안사람이 싸 준 김치로 식사했다. 식사를 마친 후 삼도봉 표지석을 앞에 두고 단체 사진 및 인증 사진을 찍었다.
11시 53분에 화개재를 향하여 출발했다. 여기서 화개재까지는 내려가는 길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내리막 계단 길이었다. 나로서는 힘이 덜 들어 좋긴 하지만 어차피 다시 올라가야 하는 길이다. 그래서 마냥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내려가다가 반대편으로 올라오는 등산객을 만났다. 반대편에서는 이 길이 끝도 없이 올라오는 계단 길이 되겠다. 질린 듯 서있는 등산객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쉬엄쉬엄 계단을 내려갔다.
화개재에 12시 24분에 도착했다. 화개재(1,316미터)는 반선(뱀사골), 노고단고개, 연하천 대피소의 분기점이다. 여기서 연하천 대피소까지는 4.2 킬로 거리다. 이제부터는 오르는 길이었다. 산행 지도에도 매우 어려운 길로 표시된 길이다. 우리는 힘들게 토끼봉(1,510미터)에 올랐다. 1시 33분이었다. 1.2킬로미터 오르는데 70분이나 걸렸다.
앞으로 연하천 대피소까지는 3.8킬로 남았다. 그 뒤로도 조금 내려갔다가 이내 다시 오르는 길의 연속이었다. 연하천 대피소까지 가는 방향표지만 보였다. 전에 화개재에서 연하천 대피소까지 걸어 갈 때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때 가도 가도 연하천 대피소가 안 나왔다. 답답하여 반대 방향으로 오는 등산객에게 연하천 대피소까지 얼마 남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바로 돌아가면 있다기에 고개를 도니 정말 대피소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때 기억을 살려 가다 보면 대피소가 보일 것이라고 믿고 걸었다. 정말 400미터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이제 다 왔다.
대피소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는데 한 그루 침엽수가 아름답게 보여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대피소에 도착했다. 3시 50분이었다. 노고단 고개에서 7시 25분에 출발했으니 근 8시간 반 걸렸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취사 준비에 들어갔다. 햇반과 생수를 산 뒤 햇반을 데웠다. 김치찌개로 식사를 한 뒤 라면을 끓여 먹었다. 아직 해 떨어지기는 멀었지만 바람이 불고 쌀쌀해서 한기를 느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다 같이 일찌감치 숙소에 들어가서 자리에 누웠다. 어제 야간열차를 타서 전체적으로 잠이 부족한 상태였고 하루 종일 걸었기에 다들 피곤해 했다. 우리는 1번에서 5번까지 배정받았다. 나도 제 자리에 누워서 오늘 찍은 사진을 정리했다. 한동안 지인들에게 카톡 작업을 한 뒤 잠에 들었다. 뒤척이긴 했지만 장시간 푹 잘 잤다.
10월 18일(목) 산행 둘째 날
6시에 기상했다. 원래 내가 세운 계획은 그냥 출발해서 벽소령대피소에서 아침을 먹는 것이었다. 여기서 아침을 먹은 뒤 출발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라면은 세석산장에서 끓여 먹기로 하고 아침은 햇반과 반찬으로 식사했다. 나는 안사람이 싸준 밥과 반찬으로 식사했다. 그리고 7시 50분에 출발했다. 출발 기념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어제 쌓였던 피로는 충분한 휴식과 아침 식사로 경쾌하게 시작했다. 삼각고지까지 가뿐하게 올라섰다. 경관이 너무 멋있다.
이어 형제봉까지 올라갔다. 절벽과 굴 사이로 보이는 경관이 그렇게 멋있었다. 경관이 훌륭한 만큼 길도 험했다. 이렇게 험한 길은 나는 왜 전에는 쉽다고 생각했을까. 시간이 오래 지나면 그간 어려웠던 기억은 싹 사라지고 아름다운 추억만 남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만 이전에 땅만 바라보며 일행을 따라가기 바빴던 옛날 그대로여서는 안 된다. 풍경을 즐기며 가야 한다. 그리 생각했다.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는 길이 이곳이었다. 양쪽 절벽 사이를 앞에 두고 지나가거나 사이로 내려갈 때 풍경은 절경이었다. 정말 사진 찍기에 좋은 곳이었다. 누구나 사진기로 찍으면 그림이 나오는 승경이었다.
형제봉(1,453미터)에 오르니 9시 19분이었다. 사진도 찍는 시간이 길었긴 했지만 1시간 반이나 걸렸다. 벽소령 대피소까지는 아직도 1.5킬로나 남아 있었다. 시간이 예상외로 많이 걸렸다. 10시 13분에야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했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여기까지 3.6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데 두 시간 반이나 걸렸다. 벽소령대피소는 우리가 사전에 알고 있던 대로 보수 중이었다. 이 다음에 보수할 장소는 연하천이라고 들었다. 벽소령 대피소에서 세석산장을 향해 가는 길은 평탄했다. 대피소 길에서 돌아온 길을 돌아보니 저 높은 데서 우리가 내려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대편에서 대피소로 온 등산객은 저 높은 곳을 향해 힘들게 걸어 올라가야 하리라.
벽소령 대피소에서 선비 샘까지는 쉽고 평탄한 길이었다. 선비 샘에 11시 49분에 도착했다. 선비샘의 유래를 읽고 물맛을 보았다. 시원하고 달콤했다. 앞으로 세석대피소까지 가려면 3.9킬로 남았다. 계속 걸었다. 이제 세석대피소까지는 2.7킬로, 천왕봉까지는 7.8킬로 남았다. 고개를 넘어서니 천왕봉이 완연히 눈에 보였다. 일단 눈에 보이니 반가웠다. 그 절벽에 서서 다 같이 멀리 천왕봉을 배경으로 단체 및 개인 인증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세석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은 뒤 다시 장터목 대피소로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듯 했다. 이대욱 회장이 이현상, 장광섭에게 먼저 가서 취사 준비해 주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우리는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뒤를 따라갔다. 1시 26분에 칠선봉(1,558미터)에 도착했다. 우리는 계속 풍광 사진을 찍으며 대피소로 걸어갔다. 영신봉(1,652미터)에 오르니 세석대피소가 아래쪽으로 보였다. 앞으로 600미터 남았다. 장광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세석 대피소에 도착해서 하는 전화였다. 세석 대피소에 도착하니 라면 취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라면 식사를 잘했다. 장광섭이 조사한 내용으로는 여기서 장터목 대피소까지 거리는 3.4킬로, 세 시간 걸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걸음으로 6시까지 대피소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대욱이 신분증을 장광섭에게 건넸다. 먼저 대피소에 가서 예약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출발하기 시작했다. 계속 가파르게 오르는 길이었다. 3시 49분에 촛대봉(1,703미터)에 도착했다. 대피소에 가기에도 바쁘긴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 풍광을 놓칠 수는 없었다. 우리보다 앞서간 이현상, 장광섭이 혹 이곳을 올라와 이 승경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지 않았을까? 한편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우리는 잠시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촛대봉 정상에 올라갔다 내려오기로 했다.
정상에 올라서니 천왕봉이 확 가까이 다가왔다. 촛대봉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절경이었지만 내려 와서 본 촛대봉 풍경도 멋있었다. 앞으로 장터목 대피소까지 2.7킬로 남았다. 계속 걷다가 건너편 연하봉 봉우리를 보니 갈색 지붕의 건물이 보였다. 나는 그 건물이 장터목 대피소 건물이 아닌가 착각했다. 그쪽에서 올라오는 등산객에게 확인하니 그도 맞다고 했다. 미심쩍은 것은 시간상 아직 거리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착각이었다. 이제 800미터 남았다. 5시 28분이었다. 장광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피소에 도착했고 숙소 방배정은 5시 반부터라고 했다. 안심이 되었다. 여유가 생겨 월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풍경을 찍으며 내려갔다. 저 아래편 장터목 대피소가 일몰의 햇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일몰이 막 시작하고 있었다. 한 동안 일몰 사진을 찍었다. 해는 마지막 힘을 내뿜으며 용트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제 노고단 일출과 오늘 장터목 일몰 사진. 우리는 정말 좋은 사진을 찍는 행운을 누렸다. 그리고 취사장으로 갔다. 거기서 가져간 햇반으로 저녁을 먹었다. 장터목 대피소의 숙소 사정은 연하천 숙소보다 훨씬 열악했다. 연하천 숙소에서는 매트리스가 있었고 담요만 빌리면 되었다. 여기는 매트리스가 없어 담요 두 개를 빌렸다. 나는 식사한 후 자리에 누워 어제와 마찬가지로 정리 작업을 한 뒤 지인에게 카톡을 올렸다. 내일 천왕봉 일출은 6시 37분이었다. 우리는 4시 반에 기상해서 5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배낭은 그대로 놓아둔 채 정상에 갔다 온 뒤 식사를 하고 백무동으로 하산하자고 했다. 중산리로 하산하자는 계획이 바뀌었다. 그것이 우리 사정으로 더 맞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으나 너무 더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앉아 있기도 했다. 잠을 못 이루던 이현상이 밖에 나갔다 왔다면서 지금 밖은 싸락눈이 내리고 있다고 했다. 그럼 내일 길이 미끄러울 것이니 내심 걱정이 되었다. 옷을 티셔츠로 갈아입고 덮고 있던 담요도 도로 발밑에 두고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눈만 감고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한 말이리라.
6월 19일(금) 산행 셋째 날
장광섭이 나를 깨웠다. 시간을 물어보니 4시 45분이 되었다고 했다. 일어나서 복장을 갖추었다. 플래시를 준비한 뒤 숙소에서 나섰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친구를 기다려 출발했다. 다섯 시 십 분이었다. 천왕봉까지는 1.7 킬로미터다. 천왕봉 일출 시간은 6시 37분이니 1시간 반 이내에 도착해야 한다. 경험상 그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플래시를 켜고 거친 숨소리를 내며 돌계단을 올라갔다. 끝도 없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면서도 플래시 불빛에 의지하며 주변 풍광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앞만 보고 간다는 생각으로 올라갔다. 현상이 나이가 들면 뒤만 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공감이 되었다. 현재 우리는 앞만 보고 달리는 나이도 아니고 뒤를 돌아보며 살아야하는 나이도 아니다. 그래도 어두움을 틈타 앞으로 달려야 빨리 오를 수 있다는 그간의 경험만 믿었다. 거친 숨을 고른 뒤 다시 오르니 제석봉(1,806미터)에 우리가 올라왔음을 표지판이 알리고 있었다. 5시 33분이었다. 600미터 오르는 데 23분 걸렸다. 앞의 불빛만 보고 달려온 결과였다. 이제 1.1킬로미터 남았다. 걷기도 한참 수월해졌다. 천왕봉을 앞둔 언덕을 오르고 다시 힘을 내 통천문의 계단에 올라섰다. 정상까지 500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는 거의 다 왔다. 10분 이내 도착할 수 있다. 이정표 사진도 찍었지만 멋진 나무 사진도 찍었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의 표지석부터 찍었다. 6시 23분이었다. 아직 어두워서 개인 사진 찍기는 어려웠다. 그 대신 비석 앞 편의 바위에 서서 일출을 기다렸다. 해가 뜨기 직전이라 동편가가 온통 불그스레했다. 그리고 35분이 되자 해가 뜨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사진을 찍었다. 37분이 되자 구름을 뚫고 완연히 떠올랐고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이다. 감격스러웠다.
그간 천왕봉은 다섯 차례 올랐다. 그중 새벽에 천왕봉에 오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 올랐을 때도 일출을 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구름이 상당히 끼었고 어느 정도 해가 오른 상태에서 보았다. 이처럼 맑은 상태에서 일출 과정을 지켜본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영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비 앞에서 개인 사진 및 단체 사진을 찍는다고 야단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추웠다. 다른 사람들이 기념사진 찍는 동안 사방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물러간 7시 1분부터 10분까지 우리 단체 및 개인사진을 찍었다. 정상에서 40여 분간 머물렀던 셈이었다.
이제 하산길만 남았다. 정상에서 지리산의 정기를 충분히 마셨으니 이제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하산할 수 있다. 사방이 밝아져 풍광을 제대로 찍을 수 있었다. 통천문의 좁은 굴 사진도 찍고 아까 찍지 못한 통천문 글씨도 이정표도 찍을 수 있었다. 전망대에서 다시 풍광을 제대로 감상하고 사진을 찍었다. 안내판에 그간 지리산에 올랐던 최치원, 김종직, 조식 선생이 안내되어 있었다. 아까 힘들게 올라왔던 계단을 이제는 편안히 내려 왔다.
숙소에 도착했다. 마음과 육체에 여유가 생겼을까. 식수를 떠오기로 마음먹었다. 그간 장터목에 와서도 우선 쉬는 것이 급해서 한 번도 식수를 뜨러 갔다 오지 않았었다. 식수대가 꽤 먼 곳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50미터도 안 되는 곳에 있었다. 물이 두 개의 꼭지에서 콸콸 쏟아졌다. 나는 두 개의 물병에 담았다. 한 개는 하산하면서 마시고 한 병은 안사람에게 지리산 약수라며 선물하리라. 천왕봉 일출 사진을 가족과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올렸다. 국어과 카톡에는 장광섭이 단체사진을 이대욱이 일출사진을 올렸다. 나도 나무 사진 하나를 올렸다. 지인과 동기들의 정상 정복과 일출 사진에 대한 칭찬과 격려가 답지되었다. 우리는 라면과 어제 데운 한 개의 햇반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데우지 않은 두 개의 햇반은 이현상이 나에게 주어 받아 넣었다. 우리는 잔반을 처리한 뒤 쓰레기를 한 곳에 모았다. 쓰레기봉투는 그간 이현상, 이대욱이 메었었다. 먼저 진유복이 메었다. 다음은 내 차례라고 했다.
준비를 마친 뒤 하산하기 시작했다. 9시 반이었다. 백무동까지는 5.8킬로미터, 경험상 세 시간 반이면 되고 1시면 도착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나에게 하산 길은 쉬웠다. 우선 무릎이 아프지 않았다. 사실 어제부터 무릎보호대를 차지 않았었다. 아팠다면 그리하지 못했으리라. 일행과 보조를 맞추며 천천히 내려갔다. 도중에 쓰레기봉투는 내가 메었다.
참샘에 이르렀다. 백무동에서 3.2킬로 내려왔다. 11시 32분이었다. 샘물로 며칠 만에 세수를 했다. 장터목에서 약수를 챙기지 못한 사람은 여기서 약수를 챙겼다. 앞으로 2.6킬로미터 남았다. 앞으로도 꽤 많이 내려가야 한다. 무릎이 아픈 동료를 위해 가져온 호랑이 기름 연고를 꺼냈다.
하산 길의 풍광은 그리 없었다. 단풍나무 찍고 다 내려와서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찍었다. 다 내려오니 1시 12분이었다. 3시간 42분 걸렸다. 그래도 양호하게 내려온 것이었다.
백무동탐방센터에서 장광섭이 그린포인트를 신청한 뒤 쓰레기봉투를 사서 쓰레기를 처리했다. 탐방센터 앞에서 그간 지리산 무사 종주한 기념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터미널까지 5분 거리. 승차 시각은 2시 40분. 앞으로 한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식당에 가서 막걸리, 묵, 산채비빔밥을 시켜 점심식사를 했다. 모처럼 제대로 된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게 되었다. 이제 여유 있게 화장실도 다녀왔다. 이제 남부터미널까지 푹 쉬면서 가면 되었다.
수도권에서 도로가 정체되면서 도착 예정 시간인 7시 40분을 훌쩍 지나 8시 20분에야 남부터미널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를 한 뒤 귀가하기로 했다. 인근의 식당에 들어가 낙지곱창새우가 든 비빔밥으로 포식한 뒤 헤어졌다. 이제 지리산 대장정 종주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것이다.
지리산 산행을 다녀와서
2박 3일의 지리산 산행 일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무사히 귀환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가져간 비상약을 꺼내지도 않았다. 우리가 종주를 하자고 마음먹은 것 자체가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만 결과도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이 상태에서 더 무엇을 바랄까. 이 산행은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축복이요 행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번 종주에서 느끼는 의미는 다를 수 있다. 나에게 이번 지리산 종주 산행이 갖는 의미는 컸다. 종주 산행이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동기들이 보조를 맞춰 주고 기다려 주어 여유 있게 산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풍광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고 이를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둘째는 그간 한 번도 올라가보지 못했던 노고단을 이번에 탐방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이번 산행에 차별화된 새로운 의미 부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십 년 만에 지리산을 재방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내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것도 너무 늦지 않게 동기들과 추억 쌓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이 모두를 가질 수 있었던 그 자체가 나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번의 동기와 함께 한 지리산 종주 산행은 행복이었노라고. (2018. 10.22)
지리산 종주 산행 기록 <참고 자료>
일시: 10월 16일(화) - 19일(금)
참가자: 이대욱, 장광섭, 이현상, 진유복, 기우현
10월 16일(화) 출발
만남(10:00 - , 용산역 광장), 탑승(10:45 -)
산행 코스
첫날(17일) 산행 코스
구례구 도착(03:04 -) –버스 탑승- 터미널(김밥 구입) - 버스 탑승 – 성삼재(아침 식사) - (2.7km) - 노고단 대피소 – 노고단 탐방 - (10.5km) (삼도봉, 점심) – 연하천 대피소(16:00 - , 저녁, 숙박)
둘째 날(18일) 산행 코스
연하천 대피소(6:00– , 아침 식사, 7:50 - ) - (3.6km) – 벽소령 대피소 – (6.3km) – 세석대피소(점심, 15:00 -) – 3.4km – 장터목 대피소(17:30 - , 저녁, 숙박)
셋째 날(19일) 산행 코스
장터목 대피소(4:30 - , 5:10 - 출발) - 1.7km – 천왕봉 정상(일출, 6:37) - 1.7km - 장터목 대피소(아침, 9:30 출발) - 5.8km – 백무동 탐방지원센터(13:12 도착) - 점심(식당) - 버스정류소 – 남부터미널 <끝>
첫댓글 노고 많으셨습니다!
세밀한 산행과정 기록이 좋았고,
동기들이 서로 협조하면서 어려운 산행을 성공시킨 이야기가
감동을 줍니다^^*
감사합니다. 도움이 될까 하여 실제 산행한 날짜 및 코스를 추가 기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