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file233.uf.daum.net/image/190E4C0D4B3F6290576AA0)
살고 죽는 것은 하늘의 뜻 (生來死往憑天意)
- Ⅱ -
송년 산행이 송구영신의 의미를 담았듯이 정말 못 다한 아쉬움과 미련마저 온 산에다 여한 없이 털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며칠 있으면 맞을 새해의 일 년 고생과 액땜까지도 한꺼번에 몽땅 치룬 것 같았다. 길매봉에서 청계산 정상까지 오는데 자그마치 4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아무리 적설기 산행이라지만, 그리 어렵지 않은 코스임에도 평소에 비한다면 세 시간이나 더 걸렸다. 그러니 온갖 장애물에 맞서 눈물의 사투를 벌였음에도 무사히 정상까지 온 게 여간 다행스러운 게 아니다. "힘들었지? 좋게 보자고. 이 모두가 한 해 동안에 오염된 세상의 진애(塵埃)를 말끔히 떨어내려 그런 셈이라고 치세." "물론이죠. 그러니 송년 산행이죠. …이렇게 지친 것을 보면 힘들긴 했네요. 하기야 이게 보통 날씹니까. …그런데 형님. 아까는 정말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데요. 사면 탈 때요. 허둥대기만 했지 과연 갈 수나 있을까. 겁이 덜컥 나더라고요." "아이고. 자네만 그랬는줄 아는가. 눈 속에 두발이 무릎까지 몽땅 빠졌는데 하필이면 오금이 저려져서 옴짝달싹 못했었네. 자네를 보니 멀찌감치 앞에서 눈과 사생결단을 하고 있으니 어쩌겠나. 그땐 가슴이 콩알만 했었네. 아무리 용을 써도 빠지질 않으니 얼마나 애가 탔겠나. 그래도 다 이기고 용하게 여기까지 왔다는 게…아무리 생각해봐도 믿기질 않네. 참으로 대단했네. 처음엔 오판을 했지만, 그 후론 실수를 바로 잡기위해 냉정하게 대처했기에 이만큼이나 된 것일세. 경험이 최고의 자신감이라고 자네의 그 판단도 정말 옳았네." 그나저나 빨리 내려가야 했다. 함박눈은 펑펑 소리라도 내려는 듯 뭉텅이 째로 퍼붓기를 그칠 줄 모른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줄기차다. 점점 더 강해지는 바람과 눈보라가 휘돌아 치며 시시각각으로 조여들기만 할 뿐이지 인정이란 눈곱만큼도 없다. 앉아서 노닥거릴 여유조차 주질 않았다. 최악으로 치닫는 날씨에 날머리는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처럼 보였다. 그래도 기필코 가야만 하는 형제는 손을 굳게 잡은 채로 희망이 가득한 눈망울로 서로를 바라보며 무한한 신뢰의 눈길을 건넸다. 신뢰보다 소중한 선물이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험한 산중에 서로가 지탱하는 기둥이고 의지하며 가야하는 유일한 원군이었다. 하산길이라 힘이 덜 소모될 것이다. 아무래도 오름보단 내림이 조금 더 수월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지금 같은 날씨엔 땀이 덜 나는 것이 무작정 좋다고만 할 수도 없다. 내려가며 보는 세상은 하늘에다 겹겹이 쳐놓은 순백의 무명 포(布)를 결대로 하나씩 내려놓듯 온 누리를 하얗게 덮었다. 하얀 눈은 순백의 순결로 세상의 오염과 파괴를 덮어주려 내렸다. 하얀 눈엔 순수와 포용이 있고 평화가 있다. 그러나 위대한 자연의 섭리조차 실재하는 행동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무한한 순수도 지금의 그들에겐 오히려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장애물에 불과한 헤쳐가야 하는 난관일 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잡아두는 가장 큰 것은 마음 깊숙이 그걸 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인데, 빼어난 경관을 보며 기쁨을 얻어야 하는 것들이 지금은 혐오와 기피의 대상으로 바뀌어져 버렸다. 그래서 세상은 유위(有爲)인 것이다. 그러니 이를 조금이라도 깨우칠 수가 있다면 내남의 간격이 그만큼은 줄어들 것이고, 당연히 다툼도 그러지 않을까 한다. 그리 어렵지가 않은데도 현실에선 잘 돼지가 않는 것을 보면, 말미에서 얘기하겠지만 성정이 올바르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한다. 다행히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쪽이라 그런지 해코지가 능선보단 줄었다. 눈보라도 약해지니 외려 포근한 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바람에 실려 넘어온 눈이 너무 많이 쌓였다. 강설량도 몇 십 센티는 되는지 전에 온 눈까지 합쳐져 길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덮여있다. 거기에다 웬만한 곳은 정강이 이상이나 빠졌지만 어느 곳은 발목 정도로 얕다보니 걸으면서도 길이 요철(凹凸)처럼 가늠이 안 되어 발 떼기가 도리어 부담이었다. 군데군데 산 중턱에 잡목이나 관목에 걸려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다시피 쌓여있는 눈 더미가 가끔씩 무너져 내려 위협이 되기도 했다. 강한 바람에 부러진 큰 가지가 길마다 널린 올가미처럼 여기저기 마구 나뒹굴었다. 한둘이 아니니 피해가며 걷기가 여의치가 않았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터덜터덜 발걸음 가는대로 산죽과 잡목가지를 헤치며 푹푹 빠지는 눈 속을 러셀을 하며 내려왔다. 아무리 조심했어도 넘어지거나 미끄러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엉덩이가 수난이고 손목이 시큰거렸다. 이리저리 채이고 걸리는 것이 다반사이다 보니 여간 더디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내려온 것으로 봐선 송지골의 중간쯤은 온 것 같았다.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크게 문제될 것도 없었다. 두형제의 마음에는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조금씩 배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긴장의 끈을 놓았는지, 다와 간다는 조급한 마음에 조심성이 없어졌는지, 형이 한순간 기우뚱하더니 순식간에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눈구덩이에 빠졌다. 완전히 얼굴까지 쑥 들어간 것을 보면 일부러 파놓은 구덩이 같았다. 배낭을 맨 채로 통째로 들어갔으니 큰 함정이다. 꿈틀거릴 때마다 자꾸만 빠져 위험하게 되었다. 신중하고도 신속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팔을 움직여야하니 어깨가 보이는 데까지 눈을 퍼냈다. 두 팔을 위로 올리니 구덩이에 손목이 잠길 만큼 꽤 깊이 빠졌다. 우선 배낭을 끄집어냈다. "다친 데 없어요?" "엉덩이가 뭔가에 부딪쳤는지 약간 아프긴 하지만 별게 아냐. 걱정 마." "자꾸 들어가는데요. 움직이지 말아요." "아냐 괜찮아. 발끝에 딱딱한 게 밟히는 게 바닥인 것 같아." "다행이네. 가만있자…. 이렇게 하죠. 내가 건너편 소나무에다 로프를 동여매고 한쪽 끝을 줄 테니, 위에서 끌어당길 때 그걸 잡고 올라와요. 힘 쓸 수 있죠?" "그럼…. 그런데…이게 실제 흙구덩이가 아닌 것 같아. 아무리 봐도 그래. 이걸 봐. 이건 눈이 얼은 거잖아. 그런데 이쪽 벽은 흙이거든…어쩌지? 이러다 혹여 바닥이 내려앉는 게 아닐까? 꿈쩍도 않는 것으로 봐선 단단 할 것도 같긴 한데…" 그곳은 정확히 말하면 일부로 파놓은 함정이나 흙구덩이가 아니었다. 경사면의 한 쪽 흙벽이 오목하게 들어간 곳인데 그리 크지 않은 펑퍼짐한 바닥에 그동안 눈이 반대쪽으로 넓게 쌓이면서 얼어 자연스럽게 발코니처럼 만들어졌다가 얼었던 쪽 바닥일부가 터지면서 안에 눈만 쏙 빠져 구덩이처럼 된 것이었다. 그런데다 이번에 많은 눈이 오다보니 함정처럼 살짝 위가 덮인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평편하게 보이니깐 그 위로 지나가다 폭 빠진 것이다. 그러니 가뜩이나 불안정한 바닥이 체중 때문에라도 언제 내려앉을 줄 모르고, 그렇게 되면 밑으로 쑥 가라앉게 되어 인적 없는 산중에서 너무 큰 위험을 맞게 된다. 빨리빨리 서둘러야 했다. "바닥이 언제 꺼질지 모르니, 먼저 로프를 가슴께에다 동여 메요. 찬찬히 해요." 그리곤 로프 한 끝을 건너편 소나무에다 팽팽하게 비끄러맸다. 다시 그 끝을 형에게 잡게 하고 있는 힘을 다해 끌어당겼으나 쉽게 빠져나오지 않았다. 형은 매달린 상태이지만 힘을 쓰려고 해도 구덩이가 미끌미끌하여 발로 짚고 버틸 마땅한 곳이 없었다. 거기에다 수직으로 올리는 것도 아니고 옆으로 끌어당겨야하니 동생 혼자서 100kg 가까이 되는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힘이 보챘다. "아이고. 조금 쉬죠. 이를 어떻게 하지…. 형. 이렇게는 안 되겠어. 다른 수를 써야지. 잠깐 기다려요." 잠시 후에 동생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주위를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았다. 알맞은 굵기의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었다. 굵기가 주먹크기보다 약간 작았다. "형, 이 나무 동가리를 구덩이 위에다 걸쳐놓을 테니까. 철봉 하듯이 잡고 힘을 쓰다가 가슴팍쯤 올라오면 겨드랑이로 나무를 감아요. 그러면 뒤에서 바로 잡아 끌어올릴 테니까요. 알았죠?" 형과 동생은 끌고 당기기를 한참을 끙끙대며 겨우 가슴께까지 올려 나무 동가리를 겨드랑이로 감을 수 있었다. 동생은 뒤로 돌아가 잡아 끌어올리려고 했으나 발을 디딜 곳이 힘을 주면 무너질 것 같아 포기하고 다시 앞에서 끌어당기기로 했다. 또다시 승강이를 벌인 끝에 나무 동가리가 큰 역할을 하여 겨우 구덩이를 박차고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몸이 많이 지쳐 있어 서로 힘쓰기가 쉽지 않았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냈다. 두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자로 눈 바닥에 누었다.
"괜찮죠?" "응. 엉치가 조금 뻐근하지만 괜찮아." "하여간 그만하길 다행예요. 만약에 혼자 산행하다 이렇게 됐으면 어쩔 뻔 했겠어요. 생각만 해도 오싹하네." "지금은 안 그래. 마찬가지지. 미끄러지면서 발부터 들어갔으니 망정이지 거꾸로 처박혔으면 어쩔 뻔 했겠나. 하여튼 행운의 여신이 한 번 더 미소를 지었기에 다행이지. 어휴-" 형은 등짝이 으스스 해지자 일어나 앉으며 길게 한숨을 쉬다가 쪼그라드는 아랫배가 허전하다는 생각에 아차 했다. 배가 너무 고팠다. "배 안고파?" "왜 안 고파요. 아참! 정신없다보니 여태껏 까맣게 잊었었네." 그러고 보니 너무나 긴장하여 몇 시간째 눈보라 속에서 헤매면서도 아직껏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도중에 간간이 간식거리 몇 개로 때웠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태부족이었다. 갑자기 허기가 찾아오자 오히려 추위가 더해진 것 같고, 그 탓인지 몸이 갈수록 굳어져가는 느낌까지 들었다. 안 되겠다 싶었다. 여기서 어떻게든 시장기라도 때우고 나서 가도 가야지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가가 어느 정도 가시권에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험지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정상에서의 예상은 많이 어긋났다. 능선보단 바람이 잦아들고 눈보라도 약해졌다곤 하지만 작은 차이일 뿐이고 길목마다 장애물이 널려있고 구덩이는 조금이라도 비끗하면 집어삼킬 듯 숨어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가다간 앞으로도 두 시간이상을 더 가야한다. 빨리 뜨끈한 국물로 배를 채워 에너지를 보충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개울 위를 살짝 덮고 있는 살얼음을 깼다. 그 속엔 생명을 보듬어 주는 생명수가 한줄기로 질금질금 흐르고 있었다. 손도끼로 조그맣게 구덩이를 파고 물이 고이기를 기다렸다. 버너 둘에 불을 붙였다. 하나에는 라면 물을 끓이고 다른 하나는 보온병에 담을 먹을 물을 끓였다. 콜맨 버너의 화력에 물은 금방 끓었다. 눈밭에 웅크리고 앉아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모양을 보니 그 옛날 생각이 절로 솟아났다. 젊은 시절에, 소대 졸병으로 복무하던 부대에서 외진 곳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느라 2개 분대 규모로 파견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몇 달간을 시멘트와 모래 먼지 속에 묻혀 살았다. 복무했던 사람들은 열외의 맛을 알 것이다. 점호 없고 보초근무 없는 생활은 여간 호사가 아니다. 하지만 식량 확보와 급식이 수월치 않아 졸병들은 여전히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본대와는 산봉우리 하나를 넘나드는 것에 불과했지만, 반대쪽으로 돌아오는 차도가 위수구역을 넘어야할 만큼이나 멀어 할 수없이 보급품을 3일마다 산을 넘어 직접 가져와야하고 밥도 해먹어야했다. 한번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속에서 밥을 짓는데 나무가 젖어 불을 피울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반 파운드짜리 다이너마이트를 몇 개 가져다가 조금씩 떼어 꺼질 만하면 던져 넣으면서 밥을 한 적이 있었다. 위험천만 했지만, 그래도 그 비에 2개 분대의 밥을 다했다. 물론 그날 이후로는 1km쯤 떨어진 민가에다 - 정확히 한 가구가 살았으며, 그들이 아랫동네라고 부르는 곳은 그곳에서 십리이상이나 멀리 떨어져있었다. - 부식과 쌀을 조금 더 얹혀주고 해다 먹었다. 이 와중에 몇 십 년이 지난 옛날 것까지 생각나다니 오늘이 별난 날은 날이다. 아- 따끈한 것이 속에 들어가니 이렇게 좋구나. 피로가 어느 정도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기분이 그렇다는 것일 뿐, 워낙 추운 날씨이다 보니 그때뿐이었다. 다시 걷기 시작하며 반시간쯤 지나자 몸이 굳어지며 피로가 금방 몰려왔다. 한발 한발 뗄 때마다 겹쳐서 몰려오듯, 시간이 지날수록 한발에 걸리는 무게가 배가 되어 발걸음은 갈수록 느려졌다. 이제는 여유 많던 시간에 오히려 쫓기는 신세까지 되었다. 상황에 대비하는 적응력과 회피성이 뛰어나다고 해도 체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렇게 지쳐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이를 무사히 넘기려면 어둠이 완전히 내리기전에 빨리 민가를 찾아야 한다. 벌써 오후 4시가 넘었다. 산속은 날이 금방 기울었다. 늦지 않은 시간임에도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음은 또다시 다급해졌다. 그나마 새벽 일찍 나섰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다시 마음 바쁜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따라오는 형의 걸음걸이가 아무래도 석연찮다. 구덩이에 빠지면서 많이 다친 게 확실했다. 피로해서 그런 지 절룩거림이 더 심했다. 눈을 파헤치며 오는 모습이 영 불안한 게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다. "형, 많이 아파요? 좀 쉬었다 가죠." "아냐 됐어. 그 정도까지는 아냐. 견딜만하니 걱정 말고 빨리 가자고." "그래도 너무 불편한 것 같은데요. 부축해드려요?"
형은 걱정 말라며 오히려 앞장을 섰다. 스틱을 어깨위쪽에서 빙빙 돌리며 괜찮다고 동생을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한동안 형이 앞장을 서서 내려갔다. 동생은 형을 누구보다 잘 안다. 어릴 적부터 여태껏 동생들에게 부담을 준적이 없었던 형이다. 아니 얼굴 한번 찡그린 적이 없었다. 뒷모습을 바라보다 안쓰러운 생각이 피어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둠이 드리기 시작하자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지 스쳐 지나는 바람에 얼굴이 싸할 만큼이나 예사롭지가 않았다. 한겨울의 냉기가 거친 걸음으로 다가왔다. 옷이 홍건이 젖어 잠시 걸음을 멈추면 금방 냉기가 살 속까지 배었다. 칼끝에 여러 갈래 베어진 한(恨)서린 바람처럼 송곳 같은 예리함으로 몸속 여기저기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더구나 몸이 더워지는 것보다 추위가 더 빨리 몸을 식히는 건지 아무리 걸어도 땀이 별로 나질 않았다. 갑자기 기온이 이렇게 떨어지다니,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자꾸만 식어갔다. 빨리 민가를 찾아야지 이러단 정말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다 어둑어둑 땅거미까지 내려앉아 마음만 조급하게 만들었다. 정상까지 가며 쏟아버린 에너지가 끝내는 두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되었다. 쇠잔해진 기력에 체온마저 한계까지 내려갔는지 갈수록 정신이 몽롱해졌다. 한 걸음을 떼기도 힘이 벅찰 만큼이나 두 사람 다 완전히 지쳤다. 걸어가면서도 눈이 감기고 어리어리해지는 것이 비몽사몽간이다. 머릿속은 속이 텅 빈 소라처럼 아무 생각도 들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어디쯤 내려왔는지, 도대체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발걸음이 디뎌지는 대로 걷고 있을 뿐이었다. 앞서가는 형이나 뒤쫓는 동생이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내려가는 쪽이라면 무조건 그쪽으로 갔다. 수북이 눈만 쌓였지 애초부터 길이란 보이지 조차 않아 종잡을 수가 없는데도 터덜터덜 길을 따라가듯 아래쪽을 향해서만 내려갔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신경조차 써지지 않았다. 옳고 그르다는 판단도 물론 할 수 없었다. 물리적으로는 희미한 헤드랜턴 불빛에 기대고, 본능적으로는 사람냄새를 찾아 오직 감에 의지하여 나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아직은 일몰시간이 아닌데도 밤과 같이 어둡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바람과 눈보라도 여전히 펑펑 쏟아졌다. 덩달아 기온은 높은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듯 급강하했다. 생사를 걸고 최후의 일전을 앞둔 병사처럼 삶에 대한 희망이 북극의 빙산조각이 하나씩 녹아 사라져가듯 맥없이 떨어져 나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니다. 그보다도 훨씬 더했다. 예정되어진 모래시계처럼 정해진 시간을 눈앞에서 까먹고 있는 듯 했다. 형제의 마음은 이해의 창을 열면 열수록 더욱 감당할 수 없는 삶의 고뇌에서 허덕였던 햄릿처럼 되어갔다. 그들의 앞날은 어찌되어갈까? 끝내는 햄릿이 가야했던 자폭의 길로 가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난해질대로 난해해진 삶의 고리를 지혜롭게 풀어낼 묘책으로 소생의 길을 찾아낼 수 있을까? 눈앞에 보이는 각가지 현상들이 카운트다운을 하듯 춤을 추며, 여지없는 운명이 시키는 대로 시간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욥 38:19)' 그 순간! 삶의 소리가 천둥처럼 공중에서 울렸다. '다 왔어!' 눈이 시도록 부신 섬광처럼 번쩍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너무나 우연찮게 서로를 향해 똑같은 말을 내질렀다. 그 소리는 자유를 향한 절규였다. 암혼(暗魂)의 바다에 패대기쳐진 좌절을 이기려는 아우성이었다. 생존을 향한 끝없는 열망이 울부짖듯 벼락처럼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하루 내내 악착스럽게 행짜(심술을 부려 남을 해치는 행위)놓는 눈보라를 뚫고 쩌렁쩌렁 숲속으로 울려 퍼졌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지금까지 들어봤던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 가장 큰 소리로 들렸다. 어떤 말보다 달콤하게 들렸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내질렀던 소리보다 더 기쁜 소리처럼 들렸다. 그 소리는 한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이승이 전해주는 수억의 메시지와 같았다. 그 소리는 또 하나의 햄릿이 되기를 거부한 진정한 삶의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 용기가 그들을 운명과 맞서 싸우는 영웅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명예와 승리를 동시에 얻는 길이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얼싸안고 끝없이 다독거렸다. 서로에게 한, 진심이 가득 찬 격려는 어떤 힘보다 강했다. 발끝에 상상도 못할 힘이 생겼다. 사람의 생존본능은 무엇보다 강하고 질기지 않던가. 그리 간단히 고꾸라지지 않음을 두 형제가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바람대로 끝난 것은 아직 아니다. 다만 쓰러져가는 의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확실했다. 그 후로도 몇 번인가 험한 고비를 넘겨야 했다. 정확한 길을 못 찾다보니 눈에 파묻힌 갓길에서 미끄러져 나가떨어지기도 하고 간혹은 턱에 된통 걸려 심하게 넘어지기도 했지만, 죽을힘까지 빌려가며 한 시간여를 또 다시 비틀비틀 계곡을 따라 내려왔다. 이윽고 펑퍼짐한 들판으로 나왔다. 야트막한 잡목 숲이 바람막이처럼 둘러쳐진 길 앞쪽에 작은 공터가 나왔다. 들머리에서 보았던 그곳과 비슷한 지형이었다. 되돌아온 줄로 착각할 만큼 비슷했다.
"형. 봤죠? 얼마 안 남았어요. 험한 곳은 다 벗어났어요. 조금만 더 견딥시다. 다 온 것 같아." 잠시 앉아 쉬었다. 이제는 눈을 터는 것도 지겨워 그대로 앉았다. 동생은 형의 부상이 걱정 되었다. 앉으려고 다리를 구부리면서 몹시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다. 마지막 남은 미지근한 물을 한 모금씩 나눠 마시며 힘을 내자고 북돋았다. 땀도 나지 않은 몸의 열기가 금방 식자, 이가 서로 부딪치며 내는 덜그럭 소리에 맞춘 듯이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너무 추웠다. 오래 쉬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다시 일어났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형을 부축하며 같이 걸었다. 디디는 발걸음에 힘이 없다. 체력이나 인내나 이젠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이게 제발 고빗사위의 끝이기를 바랐다. 논두렁인지 밭두둑인지를 지나자 길이 조금 더 넓어졌다. 그 순간 아주 잠깐 동안 단 한 번. 저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회오리치는 눈보라가 헤살질하는 속에서 아스라이 들렸다. 그 소리는 천상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여겨졌다. 어떤 구도자도 들어보지 못했던 구원의 소리였다. "형. 들었지…응?" "그래. …개 소리지? 인가에 다 왔을까? 꽤 먼데서 나는 소리 같은데…" "아냐. 그리 멀지 않아. 그러니 조금 더 힘내자고. …형. 힘들면 배낭을 여기 두고 가자. 좀 가벼워질 거야. 내일 아침에 와서 찾으면 되잖아. 어때? 그렇게 할까?" 형은 축 늘어진 상태에서도 손사래를 쳤다. 평소의 형답다. 그러나 체력은 예전의 형이 아니었다. 동생보다 더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활동력도 훨씬 강했다. 그런데 오히려 정반대가 되었다. 아니다. 동생은 그대로인데 반해 형은 완전히 기진하여 녹초가 되었다. 근래에 들어와 일 때문에 지나치게 몸을 혹사하다보니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뿐이다. 30년 동안 운동을 했다는 사람이 파김치가 되다시피 한 지금의 상태가 잘 말해주고 있다. 하여튼 지금은 빨리 민가를 찾아야 했다. 동생은 주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람 사는 곳까지 가까이 왔다는 확신에 우람한 형을 메다시피 하며 걸었다. 그래도 무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몸보다 앞서는 바쁜 마음은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끌다시피 이끌며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여운의 파동을 필사적으로 추적해갔다. 수북이 쌓인 눈밭을 어기적거리며 걷는 뒤쪽으론 발자국이 아니라 길게 그려진 두선이 나란히 그들을 따라왔다. 마음속에선 오직 하나, 짖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귀를 쫑긋 세워 다시 한 번 희망의 메시지가 심마니의 외침처럼 큰 소리로 울려 환청을 쫓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주길 학수고대하며 가길, 넘어지면 일어나고 또 넘어지면 또 일어나서 걷길, 다시 큰길가로 나와 물길 따라 정처 없이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제다이의 포스와 같은 감으로 사람냄새 찾아 헤매길, 반시간 가량 지났을 즈음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앞에 희뿌옇게 휘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사람 하나가 눈을 헤치며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먼발치까지 다가온 이는 어눌한 솜씨로 그린 스케치그림을 보듯 거물가물해진 눈으로 보기엔 흐릿한 모습이었지만, 30대 중반 가량 보이는 건장한 젊은 사람이었다. 가까이와 우리를 보더니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꼼짝 않고 서있기만 했다. 한참이나 아래위를 훑어보며 생존 듣도 보도 못한 것을 본 듯, 아니면 못 볼 것을 본 듯 멍할 뿐이었다. 온몸이 다 얼어붙은 우리의 모습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시무시한 날에, 온 땅이 눈 바다인 이곳에서 그나 우리나 서로 놀랄 뿐이었다. 행운의 여신 티케(Tyche)가 드디어 미소를 지었다.
|
그가 누구보다 반가웠지만 너무 지쳐 말이 나오지 않았다. 허공에 대고 팔을 흔들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도움을 청했다. "제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의 행동이 조그만 지체됐어도 그대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는 날랜 솜씨로 다가오더니 형을 부축하여 우리를 집안으로 안내하곤 바쁘게 움직였다. 난로 통풍구를 활짝 열어놓고, 의자를 앞으로 당겨놓더니, 재빠르게 따끈한 커피까지 빼왔다. 하는 행동이 일사천리다. 난로에 바싹 다가가니 연탄 냄새가 진하게 배는데도 따뜻한 게 너무 좋았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손을 비볐다. 감각조차 없다. 커피 잔을 쥐려다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 했다. 주인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대야 2개를 가져다 찬물과 주전자 물을 부어 따끈하게 만들더니 손발을 담그라고 권했다. "손발이 많이 얼었네요. 동상이 온지도 모르니 조심하구요. 이렇게 해야 그나마 빨리 풀어질 거예요." 주인은 구호조치에도 능했지만, 아주 친절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동생과 형은 몇 번이나 주인에게 고맙다는 사례를 했다. "별 말씀을요. 정말 많이 지치셨네요.…어쩔까요? 따끈한 국물이 좋을 텐데요. 라면이라도 끓여드릴까요?" "조금 있다가요. 지금은 움직일 수가 없어서…" 시간이 조금 지나자 손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지 둔함이 많이 완화 되었다. 동생이 뜨거운 커피 잔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호호 불다 형을 쳐다보니 말없이 대야에 발을 담근 상태로 불만 쬐고 있다.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형광등 불빛에 더욱 창백해진 얼굴이 기진맥진한 모양이 여실하다. 하기야 오늘 산행이 보통 일인가. 형언할 수 없는 공포의 연속인 끔찍한 산행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오싹해지며 휴-소리가 나왔다. 발을 담근 상태로 십여 분을 앉아있었다. 아무래도 형이 꿈틀꿈틀 대는 게 좋지 않은 모양이다. 동생은 주인을 불렀다. "커피한잔씩을 더 드릴까요?" "아뇨. 커피는 됐고요. 그거보단…혹시 파스가 있을까요? 형이 넘어졌거든요." "아…예. 그런데 새 것은 없고요. 쓰다 남은 것도 괜찮으시다면…남은 게 몇 개 있을 거예요. 잠깐만요." 주인은 금방 파스를 가져왔다. 더운 것 찬 것 가릴 처지가 아니지만, 그래도 핫 파스라 더 나았다. 엉덩이가 약간 부었지만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파스 두개를 이어 붙였다. 형의 엉덩이에 손을 댔더니 얼음장이다. 하기야 동생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생은 으스스 떨면서 지금은 젓가락질하기가 어려우니 스프로 끓여달라고 주문했다. 주인은 가스렌지에 냄비를 올려놓고는 다시 돌아와 난로 뚜껑을 열고 불을 살펴본다. 바싹 달아오른 난로는 오다가다 연이 되었을 산사람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아쉬움처럼 남아있었다. 새 연통을 빼고는 시커멓게 그을려 변색된 색깔이나 군데군데 찌그러진 것이 제법 연륜이 배어있다. 뚜껑을 열자 용광로의 시뻘건 불꽃처럼 화기를 확하고 토해낸다. 그는 뚜껑을 닫고는 주전자를 다시 올려놓고 통풍구를 약간만 열어놓았다. 형제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못 참겠다는 투로 동생에게 물었다. "그런데…이 눈 속에 어딜 갔다 오시는 겁니까? 설마 청계산에서 오시는 것은 아닐 테고…" "아네요. 청계산에서 내려 왔어요. 정상까지 갔다 왔어요. 아예 길매봉부터 한 바퀴 돌았습니다." 이게 뭔 말이냐? 자랑을 하려고 떠벌리는 것이 아니다. 혹한의 날씨를 무시한 산행을 뽐내려고 한 말도 물론 아니다. 그들이 생각해도 기가 막히고 황당하여 부르짖는 자조 섞인 실토이다. 그렇게 냅다 말하곤 동생은 형을 쳐다보며 허탈한지 허허하고 웃었다. 형은 커피 잔을 들다말고 동의하듯 쓴웃음을 짓더니 창밖을 쳐다보며 길게 숨을 한번 내쉬었다. 동생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한마디로 치기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진실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하늘인 자연을 경시하는 마음자세가 부른 화(禍)입니다. 교만이 지혜를 좀 먹는다고, 자연을 무시하는 생각들이 하나둘 깊게 배다보니, 자연이 돌아가는 현상을 가볍게 해석하여 엉뚱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벌을 받은 꼴이죠. 하늘이 봐줘서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났겠지요." 주인은 뭔가 납득이 안 가는지 아니면 미심쩍어서 그런지 한참을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북계폭포에서 일출을 본다고 서성일 때까진 이처럼 무서운 줄 몰랐습니다. 시간도 여유가 많았고요. 눈보라가 어지간해야지. 세상천지에 이런 날씨는 처음 봤습니다. 정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저체온증으로 끝날 뻔 했습니다. 솔직히 30분만 늦었어도 정말 그랬을 겁니다." "정말…이 눈보라 속에서 완주했다고요. 어떻게 이런 날씨에, 청계산 산신령도 아니고." 우린 그의 농담어린 말에 가벼이 웃기만 했다.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지 온몸이 노곤해졌다. 주인은 주방으로 가더니 끓인 스프와 김치 한 접시를 쟁반에 담아 내왔다. 그리곤 옆쪽에 앉아 우리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다. 먹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궁금해서 못 견디겠는지 또다시 말을 건넸다. "오늘은 눈이 온다고 해서 아무도 산에 올라가지 않았거든요." "설마요? …어쩐지 정상에 아무 흔적도 없더라니. 그래서 긴가민가했거든요. 그래도 우리 팀뿐이라니." "정말입니다. 물론 다른 곳은 알 수가 없지만요. 큰골 쪽에서 올라간 사람들은 없었어요. 어제부터 와있던 한 팀은 아침에 잠깐 나섰다가 눈발이 날리고 바람도 강하게 불자 포기하고요, 아침나절에 왔던 등산객들도 그대로 차를 돌려 돌아갔어요. 그 후론 아무도 온 사람이 없어요. 아마…다른 쪽도 마찬가지일 걸요. 이쪽은 높은 산들이 연봉으로 이루어진 깊은 곳이라 한번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죠. 능선이나 정상의 칼바람은 여간 매서운 게 아닙니다. 오늘 직접 경험하셨으니 얼마나 대단한지 아셨을 겁니다. 물론 오늘처럼 강한 눈발에다 지독한 강풍까지 동반하는 날이 그래봐야 한 겨울에 한두 번 정도이지만요. 거기에다 오늘은 강설량도 어마어마했죠. 눈 한번에 30센티나 쌓인 적이 여태껏 없었거든요. 산속 날씨는 더하죠. 정말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렇게 무사하셨으니 참으로 천만다행이네요."
그래도 뱃속에 뭔가 따뜻한 게 들어가고, 훈훈한 난롯가에 앉아있으니 피로가 상당히 풀렸다. 따끈한 물에 담그니 손발의 아림도 금세 풀렸다. 형은 아직도 구덩이에 빠지면서 다친 곳에 통증을 느끼는지 이리저리 몸을 비틀면서 거북스러워했다. 심하지 않으니 괜찮다곤 하는데 여전히 불편하게 보이는 게 그 말이 영 미덥지가 않다. 그나저나 우리가 무슨 영웅호걸도 아니고, 우리만이 그랬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도 그렇다고 말하니 믿을 도리 밖에…. 이 무슨 해괴한 짓을 한 것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대야를 걷어다 주인에게 돌려주고 다시 난롯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친절하게도 손발을 보자며 세심히 살펴보더니 다행히 괜찮다고 안심을 시켜주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가시는 대로 병원에 들러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귀띔까지 해주었다. 하여튼 백점짜리 민박집 주인이다. "덕분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일했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그러고 보면 우리만 바보였네요. 사실 전날 들었던 일기예보만 믿고 그치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었거든요. 어젯밤에 묵었던 들머리 민박집에서도 눈이 온다는 예보를 들었냐고 만 물었지 별다른 말이 없었거든요. 하기야 출발할 때도 별들이 보였죠. …그러고 보니 그게 여우별(궂은날에 잠깐 떴다가 숨는 별)이었나. …내참. 그 집 큰 개가 제 집에 누워서 멀뚱멀뚱 쳐다보던 기억이 나네요. …사실 돌아설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요. 그런데 북계폭포를 오르기 전까지도 포슬눈이나 가랑눈 정도가 왔어요. 그래서 이러다가 그치겠지 하고 굴뚝같이 믿었죠. 폭설은 우리가 길매봉 정상에 오르기 전에 내리기 시작했어요. 그때라도 돌아왔어야 했는데 때를 놓쳤네요. 고생을 하려고 아예 오판했던 거죠. …말씀을 듣고 보니 참으로 한심한 짓을 한 것 같네요." "이곳은 산악지형이라 바람이 들쭉날쭉에다 국부적으로 강설량에도 많은 차이가 납니다. 대설주의보가 없어도 눈발이 날리는 것을 보면 웬만큼은 알 수가 있는데, 이른 새벽이라 그 집에선 모를 수밖에요. 다만 길매고개 코스가 눈 때문에 막힌 것을 얘기하지 않은 건 이상하네요. 그곳에선 바로 올라가는 길목인데요. 고개 바로 아래쪽에 눈이 많이 쌓여 당분간 안내자 없이 산행은 안 되거든요. 전날에 꼭 안내를 했어야 했는데…. 아마…길매봉으로 올라 능선을 종주한다고 하니깐 괜찮겠다고 여겼겠죠. 새벽에 기분 좋게 출발하려는데 얘기하기가 어려워 머뭇거렸던 것도 같고요. 그래도 얘기를 했어야죠. 아주 중요한 정보인데. 산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 줄 모르거든요." "아…. 그래서 우리가 그쪽으로 내려올 수가 없었군요. 하여간에 계곡에 눈이 엄청 쌓였더라고요. 다급한 마음에 무리해서 그쪽으로 내려왔으면 낭패를 볼 뻔했네요." "솔직히 처음에 마주칠 때는 설마하니 그럴까하고 긴가민가했어요. 듣고 보니 정말 대단합니다. 이 날씨에 완주를 하셨다니, 어떻게 표현해야하나…. 하여튼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저도 산을 좋아하고 젊지만 이런 날씨라면 엄두조차 낼 수가 없거든요. 간판이 떨어지고 나뭇가지가 마구 불어졌을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여기서 5년 넘게 이 장사를 하고 있지만 오늘처럼 강풍하고 눈보라가 이처럼 심하게 몰아친 날은 못 봤어요. 이런 정도의 날씨에 청계산을 완주했다던 사람도 여태껏 듣도 보도 못했고요. 아마 제가 알기론 처음 기록일 겁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선생님들 말씀처럼 어쩌다가 그렇게 됐다고 말씀하지만 그렇더라도 대단한 일이죠." 민박집 주인이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니 너무 멋쩍다. 그런데 오히려 한 술 더 뜬다. "죄송하지만, 가실 때에 여기 이 판에다 사인 한 번씩만 해 주시면 고맙겠는데요.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좋은 문구를 받아 서각(書刻)해서 걸어두려고 준비해 뒀었는데요. 선생님들 오늘 일을 들으니 새롭게 구상해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어서요. 부탁해도 되겠지요." 이런, 칭찬인지 욕인지 빈말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민박집 주인의 말처럼 오늘은 정말 대단했다. 그렇다고 해도 기념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눈구덩이에 빠진 것은 에피소드 정도에 불과했다. 길매봉을 내려올 때의 아슬아슬한 곡예 짓도 그랬지만, 그곳부터 청계산 정상까지 칼바람을 맞으며 저체온증으로 탈나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정상 길로 오기도 힘든 상황에서 발목이라도 삐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5시간이면 충분한 산행을 12시간이 더 걸렸다. 더구나 하산시간을 예정하며 사태를 정확히 모른 채 두시간정도로 가볍게 잡았다가 너무 늦는 바람에 오히려 마지막 두 시간은 피를 말리는 사투를 벌여야 했다. 아마도 조금만 더 지체되었더라면 피로동사라도 당했을 것이다. 다행히 형의 부상도 가벼워 며칠 정도 지나면 괜찮아질 것 같다. 정말 운이 좋았다. 지긋지긋하게 여기던 사람냄새가 이렇게 좋다니…. 어두컴컴한 밤이 되었는데도 눈은 그칠 줄 몰랐다. 아예 대설경보까지 내리고 몇 십 년만의 폭설이란 뉴스까지 귀를 자극했다. 그날은 너무 지쳐서 도저히 운전하며 서울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그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더 묶어야 했다. 물론 걸쭉한 막걸리 한잔에 산채 별미를 곁들이며 넉살좋은 젊은 주인의 산 이야기를 신물 나도록 들었다. 참으로 기묘한 점은, 일찍 갔다 오려고 했다지만, 그래도 애초에 계획을 세울 때부터 5시간 코스를 새벽 6시에 산행을 시작하려고 하였는지 지금까지도 궁금하다. 모두가 하늘이 도와 무사할 수 있었다. 사람이 죽을 고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위기를 겪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하여간에 삶의 희열을 그렇게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삶의 절벽이 어디 눈보라 속에서 갈 길 잃고 헤매던 산속뿐이겠는가. 생각해보면 편하다는 도회지 생활에서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이 살면서 맞닥뜨리는 벼랑 끝은 어느 곳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더 위험한 것이 아니던가. 대문 밖이 저승이다.
맞는다. 이는 인간의 창조가 어떤 형식을 빌렸던59) 이승의 인간에겐 똑같게 주어진 고뇌의 전부일 것이다. 그러니 명(命)에 무슨 특별한 길이 있겠는가. 인생의 험조(險阻=험하고 막혀 있음)를 바르게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오직 문제일 뿐이다. 인생은 벽돌을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차근차근 한발씩 앞길을 헤쳐 가듯 조심스럽게 사는 것이다. 저 울울창창한 숙명의 숲을 건너뛰는 지름길은 없을까하고 찾으려고 하는 짓이야말로 가장 용렬하고 미련한 짓이다. 그러니 유혹의 덧에 걸리고 허방다리에 빠져 나중에는 후회의 피눈물까지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이나 명(命)에 대해서는 이것이다, 하고 명확히 말할 수가 없기에 비슷한 것이라면 죽자 사자 매달리려는 나약함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예나 지금이나, 듣고 쫓는 사람들이야 단순하니 차지하더라도, 단상에 서서 인간에게, 그들 의식으로는 보통처럼 보이는 인간들에게, 삶에 대해 자신 있게 앞일을 말한다는 조금은 우월하게 보이려는 사람들조차도 제일의 궁금증이 명(命)인 것도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아는 것이라야 오십보백보임은 물론이고, 보통의 인간들과 다름없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높은 곳에 있다고 해서 천국에 더 빨리 도착하는 급행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배운 게 조금은 넉넉하다거나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밝다거나 해서, 소위 미립(경험을 통하여 얻은 묘한 이치나 요령)이 났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승에 살면서 죽음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필요로 하는 것이 불합리하게 보여도, 그것이 인생을 멋들어지게 사는 길을 가르쳐준다. 죽어라고 언덕을 극터듬어(간신히 붙잡고 기어오르다) 구덩이를 빠져나와서는 그예 풀썩 쓰러지고 말았듯이 온 힘을 다써야하는 인생살이에서 명(命)이 천만근이나 됨직한 무게로 우리를 짓누르려 하지만, 의외로 우리를 깃털보다 가볍게 하고, 마음을 편히 갖게 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삶의 묘미란 그런 것이다.
'감히 묻기를, 죽음이란 무엇인가? 가로되,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는가?(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논어》「선진편」'
선문답 같은 이 말씀이 명(命)에 대한 가장 명료한 답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승을 같이 사는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해주는 진정이 담겨 있고, 사상에 얽매여 있지 않고 이념에 빠지지 않은 진실에 아주 가까운 이승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소위 '버려라(바쳐라)'고 하니까, - '버려라'와 '바쳐라'는 같다. - 가진 것을 몽땅 '버렸다(바쳤다)'며 할 것을 다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애써도 모른다. 그런 삶은 일방적으로 이념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정신이 얽매인 것이니 관념의 노예가 된 것이나 같다. 구덩이에 빠지고 또 그 안의 구덩이에 다시 빠진 꼴이다.60) 버리라(바치라)는 의미는 그런 게 아니다. 부자와 낙타바늘의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니다. 이승을 살면서 이승보다 하늘의 일을 더 복잡하게 생각하는 게 어리석음이다. 그걸 깨우쳐야 이 말씀의 일말이라도 이해가 된다. 사실 선문답 같은 이런 식의 글귀는 마음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득이 없으니까 흘러버린다. 반면에 빈 말이라도 '복 받는다. 기도하는 대로, 마음먹는 대로 모두 이루리라'고 하면 귀가 솔깃해진다. 그리고 참 많이 듣는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너무 기가 차 말문이 막힌다. 땅에서 묻고, 하늘에서 대답한 꼴이다. 오히려 하늘이 묻고 땅이 응해야 마땅한 게 아니냐. 땅이 하늘을 가늠한다. 땅 사람들이 하늘을 가지고 논다. 웃어야 될 노릇이다. 하늘의 신비스러운 작용을 누가 알랴. 천공(天功)은 알 길이 없는 것이며, 올바른 이는 이승의 존재이유를 다할 뿐 하늘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탐욕에 절은 범부들이나 하늘이 어쩌고 하면서 하늘을 알려고 무리하게 지혜를 짜내고, 알지도 알 수도 없는 하늘을 본 것처럼 아는 것처럼 가소롭게도 하늘을 빙자하여 뭇사람들을 현혹한다. 그러니 자신이 만든 그 하늘의 권능조차 믿지 못하고, 혹여나 잘못될까 하나인 하늘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공자에게 제자인 자로(子路)가 죽음에 관해 물어오자, 쓸데없이 죽음 따위로 골치나 썩이지 말고 지금 주어진 삶이나 바르게 살 궁리나 해라. 그것이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옳은 길이며, 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 중요하다. 그렇게 꿀밤을 먹인 것이다. 왜 그러냐? 모두가 땅에서 사는 주제에, 형이하(形而下)의 차원에 있음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던진 훈계다. 누가 뭐라던 고락(苦樂)이 함께하는 이승이란 존재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깨달음으로 더 높이 나는 세계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것이 형이상(形而上)으론 비우고(바치고) 내려놨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승에 살고 있는 한은 달관했다 해도 이승을 바르게 살기위한 좋은 방편이지 이승의 삶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승이 헛것이라면, 미시적인 생∙화학학적 메커니즘에 의한 것부터 거대한 우주의 거시적 변화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은 설명되지 않는다. 어디 하늘이 하는 일을 함부로 입에 담는가. 그건 인간이 알 수도 알지도 못할 일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까 하는 데에 더 힘쓰라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우리는 어떤가? '목숨은 어디에서 왔을까?'하고 혼자 묻고는 혼란스러워 궁해진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엉뚱한 곳에다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래서 한 말씀을 더했다.
'신을 존경하면서도 멀리하면, 지혜롭다 할 수 있을 것이다.(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논어》「옹야편」'
그러니 믿되 분별이 있어야 한다. 물론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관습과 개인의 기호가 종교선택에 있어 절대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天何言哉)/《논어 》「양화편」'는 반문처럼, 하늘의 주재성(主宰性)은 믿지만, 신계(神啓=神言=天啓)는 부인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전편에서도 '정신이 어느 것에 얽매이면 겪어야 되는 것이다'고 말했듯이 정신은 자유스러운데 바름이 있다. 명(命)이 누르는 힘에 삶 전체가 버거워지거나 가벼워지는 것도, 정신을 어떤 위치에 놓느냐에 따라 그 만한 크기로 뒤따름을 명심해야한다. 여기서 정신이 자유롭다함은 당연히 어떤 사상이나 이념에도 얽매여 있지 않음을 말한다. 정신이 자유롭게 타당한 관념을 갖는 한 그것은 필연적으로 행동하게 되지만, 반하여 구속적이거나 타당하지 않은 관념을 갖는 한 정신은 필연적으로 겪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정신을 어느 것에다 얽매여 놓으면 겪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 현실이 그대로다. 인간의 의식화는 대단한 힘을 발휘하여 인간의 정신문명을 특별하게 만들어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의 통일체로 작용하는 사회계와 문화계가 지니고 있는 (생태학적)요동들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가 없다. 객체마다 자발적 자기갱신적구조화의 자기강화메커니즘까지 갖추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은61)', 이에 의해 환경변화의 완급과 강약에 따른 조건에 부합하는 적응력을 높였으며,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질서체계를 갖춤으로서 - 군집(群集)생활을 하는 여타 생물군(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 인간의 생존력을 크게 높이는 좋은 조건을 만들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창 3:18)'가 뒤엉킨 험난한 길에서 무한의 생존경쟁 - 이 말은 하나의 생물이 다른 생물과의 경쟁 외에 다른 생물에 의존하는 것과 개체가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후손을 남기는 것(이것이 한층 더 중요하다)까지를 말한다. - 을 통해서 스스로의 삶을 이끌어 가야하는 인간에게는 소중한 흐름이다. 이는 긍정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성(性)이란 선악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선하게도 될 수가 있고 악하게도 될 수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개인은 물론이고, 집단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으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본보기이다. 인간 세상에서는 타고난 성질이 어떠하던 주위환경의 영향으로부터 형성된 인성(人性,personality)이 개인의 가치관은 물론이고 집단이 가지는 의식구조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성격까지 결정하게 된다. 더구나 집단은 구성원 전체가 상호작용하여 선택인자(選擇因子)가 유전형질을 바꾸듯이 일방적인 영향아래에 놓아두고 더 깊게 유도된다. 그 결과로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엉뚱하게도 하늘을 무시하려드는 부류들도 생겨났다. 집단의 의식화가 미풍양속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뿌리마저 부정하더라도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으며 오히려 당연하게 여기기까지 되었다. 사람이 악해서가 아니다. 군중심리에 얽혀 사리판단이 흐려지다 보니 반만년의 정수인 얼까지 무시하려드는 것이다. 집단의식이 그렇게 만들었다. 따라서 집단 전체가 인정으로 넘치고 정의가 바로 서면 사람들은 감화되어 스스로 올바르게 되지만, 반대로 모순으로 넘치고 강퍅하게 변하면 그 영향으로 포악하게 되거나 벽견(僻見)을 갖게 된다. 그런 것 가지고는 바라는 것이 뭐든 수박 겉핥기도 못한다.
기도하나에 온갖 것 매달아 논 목말라하는 군상들 매달린 사다리 허리춤엔 피 묻은 손들이 허공을 찢는다.
* (59) 인간이 지구에서만 창조되었다는 교조적 관념과 생명이 비 생명에서 창발(創發)되었다는 탐구적 사고는 서로 인정할 수 없는 이론을 믿는 것이며, 당연히 상충되는 면이 많다. 전자는 신화적인 요소가 다분한 신학적 사고이며 주지(主旨)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후자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학적인 사고이지만 아직껏 가설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적 세계관'인 전자는 하나의 정서원리(整序原理,ordering principle)에 갇힌 닫힌 사고이며, 시간이 흐르고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결국엔 좁은 의미에서의 국한 된 세계관으로 존재하게 될 개연성이 많다. 그러니 어떤 방식의 접근이 필요한가를 깊이 생각해야할 것이다.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AD 1934∼1996)은 은하계의 외부행성(Exoplanets) 가운데에서만도 일백만 개의 지적생명체를 가진 지구형 행성(地球型行星,terrestrial planet)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를 창설하고 드레이크 방정식을 창안한 프랭크 드레이크(Frank Drake, AD 1930∼ )의 계산에 의하면 우주 전체에는 최대 수십억 개에 달하는 지구형외계행성이 존재한다. 근래의 일부 학자들은 드레이크 방정식을 좀 더 엄격히 하여, '지각 판(맨틀), 금속물질, 지구형 행성 바깥쪽에 목성형 행성과 같은 거대행성의 존재, 은하계 판 골디락스(Goldilocks)영역이라 할 수 있는 은하계 내에서의 위치, 치명적인 중성자별과의 충분한 이격거리 등이 추가되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피터 와드(Peter Ward), 도널드 브라우니(Don Brownlee) 共著, 《희귀한 지구(Rare Earth)》' 그렇더라도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 우주론'에선 외계에서의 생명탄생설이 과학상식이 되었지만, 인간이 무지했던 시절엔, 통념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관(천동설)과 더욱 정제된 신학이론에 힘입은 '창세기적 세계관'은 인간의 사고마저 통제하는 무기였다. 하지만 19세기 중엽 이후에 자연과학 탐구의 열풍에 밀려 이제는 영적 구조의 방향마저 바꾸도록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강제되어야 하는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과학계가 - NASA(미 항공우주국)를 비롯한 전 세계 천체탐사그룹 - 지구형 행성을 탐사하여 새로운 사실을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실체를 확인하려는 순수한 과학적인 탐구이며, 신학적인 근거를 찾으려면 이미 수천 년 전에 벌써 그런 식의 얘기로 한 시대의 신화로 존재하며 후대에 전해진 것에 불과하다. '천지창조와 인간창조'에 관한 엄숙한 이야기는 〈히브리 성서〉보다 수천 년 전에 벌써 인간들의 손에서 읽혀지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그것을 논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 과거의 땅에 묻혀 있는 〈전승〉에다 거짓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인간을 존중하고, 진실한 삶의 의미를 찾고, 사람다워야 하는 것은 일개 서생이라도 할 수 있는 하찮은 것이지, 꼭 신의 이름으로만 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단순한 분자구조의 물질에서 생명으로 정의할 수 있는 유기체로의 창발은 - 창발은 분자수준에 불과한 하나하나의 단백질이 모여서 집단화되면서 이머전스(Emergence,emergent property)에 의해 생명체가 탄생하는 현상이다. 하위수준(구성요소)에 없는 특성이 상위수준(전체구조)에서 창발하는 것은 우주의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능력 때문이지 지구적인 현상만이 아니다. 물론 지구적인 특질은 유전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는 미시적진화현상이기 때문이다. - 수없이 많은 창조신화에서 다뤘듯이 없음에서 있음이란 같은 창조이며, 이는 다른 방식의 과학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신학적인 생명창조라 해도 그보다 상위의 특별한 문명의 영향으로 인한 신화소(神話素)는 비슷하더라도 방법은 조금씩 다르다. 거기에는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민족이나 종교적인 필요성에 의한, 요소가 개재되어있다. 수메릭(sumeric)신화처럼 생기를 가진 신의 피를 섞는 방법도 있고, 유대신화처럼 신의 생기를 불어넣는 형식도 있다. 그 외에도 민족마다 독특한 형식을 취했다. 또한 애초에 인간을 지으면서 성격도 조금씩 달랐다. 수메르신화에서는 '인간적인 성격을 가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창조하였다. 반면에 유대민족의 신화에서는 '신의 모양(Similitudo Dei)'을 중시하고, - 이의 상실에 대해서는 교파마다 의견 차가 크다. - 특정한 신분을 만든 후에 그들이 죄를 지음으로서 인간화라는 본래의 절차를 밟았다. 이 모두는 무엇 때문일까? 신학이든 철학이든 '존재자의 시원(ens a se)'이란 의미를 두어야, 피조물을 지칭하며 '타자로부터의 존재자(ens ab alio)'로 설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60) 《周易》「習坎卦」 '初六 習坎 入于坎窞 凶.(초육은 습감에 감담으로 들어감이니, 흉하다.) 자고이래로 인간의 교활함은 짐승을 잡기 위해서만 덫을 놓지는 않는다.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아도 모두가 타인을 속이기 위해 사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잘난 사람은 잘나서 시기에 잡히고, 못난 사람은 어설퍼서 속임을 당한다. 그러니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한 적은 다름 아닌 인간일 것이다. 이 감괘(坎卦)는 그와 같은 인간의 속악한 심성을 꿰뚫어 본 말씀으로, 그렇게 어려운 처지에 닥쳤을 때에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되는지를 일깨워 준다. 초육효(初六爻)의 입우감담(入于坎窞)은 감도 구덩이이고, 담도 구덩이란 뜻이다. 종종 잘못된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육체가 구덩이에 빠지고, 나중에는 그 구덩이에 마음까지 몽땅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마음까지 함정에 빠지지 마라.'고 경계하는 것이다. 인간이 똑똑한 척 하지만, 제 꾀에 제가 넘어가기가 십상이다. 그런데도 백이면 백 다 물어보면 자신은 믿음이나 신념으로 살기에 전혀 아니라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친다. 옛말에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지혜롭다고 과신하지만, 몰아다가 그물과 덫이나 함정 속에 넣어져도 이를 피할 줄 모른다.(人皆曰予知, 驅而納諸罟擭陷阱之中, 而莫之知辟也.)/《중용 7章》'고 하였다. 고(罟)는 그물(網)이고, 확(擭)은 우리(檻)이며, 함정(陷阱)은 구덩이(坑,坎)이다. 모두 짐승을 속여서 잡으려는 도구다. 인간의 마음에 덮여진 데가 있음을 통렬하게 지적하였음을 어찌 모를까?
* (61) 에리히 얀치(Erich Jantsch) 著/홍동선 譯, 1995,《자기 조직하는 우주(The Self-Organizing Universe)》「진화-혁명/양자 도약에서 '미끄럼' 진화로?」
|
"형님! 지금까지 얘기한 과거의 산행에 대해서 기억이 창창히 나죠?" "암- 나다 뿐인가. 그때에 얻은 교훈이 참 크거든. 간단히 말한다면 삶의 진실을 보고 깨달았으니 인생의 지혜를 터득한 셈이지. 고통을 말하지만, '크나큰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후의 해방자이다. 이 고통만이 어김없이 우리들을 최후의 깊이의 심연까지 이르게 한다./니체 著, 김대경 譯, 1998, 《비극의 탄생》'는 니체의 말처럼, 최후의 깊이의 심연은 깨달음이니 고통을 통해서만이 삶의 진실을 깨닫는 것이 아니겠나. 그러니 책에서 보거나 누구를 통해서 전달받은 지식을 노트에 써놓듯이 마음에 적어놓기만 한다면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휴지조각이나 같은 것일세. 그 자체로는 깨우침이 없으니 삶의 진실에는 무용할 뿐이지. 심오한 진리추구에 대한, 이 경우에는 죽음의 모습에 대한, 고통이 없이 그런 식으로는 백날이 소용없는 짓일세. 오전 내내 맹렬한 기세로 눈밭 위를 휩쓸고 다니던 눈보라가 오후에 들어서서도 수그러들 기미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큰 소리로 윙윙- 거리며 날카로운 톱날이 거칠 게 없이 다가오듯, 예리한 발톱을 곧게 세운 맹수가 살점을 도려내려 달려들 듯, 꺼칠한 모래 알갱이처럼 매섭게 눈발을 날리며 위기의 목전까지 닦아세우지 않았었는가. 하지만 그곳은 죽음만이 드리우던 깊이 모를 침침한 골짜기가 아니었네. 처음의 창조시대 때부터 소리 없이 덮치는 회색빛 그림자와 함께 언제나 녹색 빛 생명도 공존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곳인 자연인 것을 알았지. 그래서 생과 사가 얽혀있는 한 판의 혼돈에서 원시적 생태환경으로 되돌리려는 자연의 도전에 대하여 넘쳐나는 활기와 생기가 가득한 생명을 지켜내야 하는 응전의 자세는 어느 때나 인간에게만 주어진 몫임을 알았지.62) 이제야 말이지만 동생보고 이곳에 오자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일세. 내가 '생명의 삼각형'에 갇혀 생사를 저울질 당했을 때에 어둠의 그늘 속에서 앞길이 보이지 않았을 때에 문득 떠오르던 것이 그때의 산행이었네. 이는 현실적인 생각이네만, 고수락(아주 위태롭고 급한 때)에 닥칠 때에는 절대로 죽음을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때에 배웠거든. 인간이 아무리 똑똑해도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알아야 불리한 상황에 빠지지 않는다네. 반면에 삶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서로 비교가 되지 않으니, 삶의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길도 그 만큼 넓다는 뜻이기도 하지. 어떻게 죽을지는 몰라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는 너무나 잘 알지 않겠나. 그러니 고빗사위에서는 죽으면 어떻게 해달라고 비는 것은 바보짓일세. 오직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가를 궁리해야함을 깨달았네. 그러고 보면 나를 살리려고 그렇게 애써주었던 무의식이 본능이라곤 하지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르네. 몇 번을 생각해도 그때마다 웃음이 나오네. 자네와 내가 그때 잘못 되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를 수없이 생각했었네. 세상이 순탄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겠지만, 죽을 고비를 넘길 만큼이나 험난한 경우도 흔치 않는 법일세. 그런데도 그런 일이 연이어 닥치니 여간 마음을 정리하기가 어렵지 않았네. 위급에 처한 그런 상황에서 일분일초가 지날 때마다 내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지는 걸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움을 주는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네. 사형수가 날짜를 받아놓고 죽음을 기다릴 때는 체념이란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뭉그러지는 그를 지탱시켜주는 지주역할을 하지만, 나의 경우는 삶에 대한 의욕이 좌절보단 컸기에 희망은 거꾸로 성난 파도에 농락당하는 배를 타고 있듯 걷잡을 수 없는 공포를 불러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했다네.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내성이라고, 청계산에서 한번 겪었던 죽을 고비가 자꾸만 떠오르며 엉뚱하게도 나를 붙들어주었다네. 우습지 않은가? 그게 그렇게 힘이 되어줄지 누가 알았겠는가? 과연 뭐가 그랬을까? 도대체 알 수가 없어 다시 한 번 와보고 싶었던 것일세. 살 궁리 하나만으로도 그게 가능했었기에 말이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네. 진정한 용기가 압도할 때에 운명도 옆길을 벌려놓고 헤살질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운명의 길은 스스로 하기 나름이란 것을 두 번의 경우를 통해서 나름대로 확신할 수 있었다네. 그러니 운명이 부를 때는 아주 강해야 한다는 것이지. 운명의 부름이 선택받은 것이니, '선택받은 자는 운명에 따른다.(When destiny calls, the chosen have no choice.)'고 할 때에 강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노아를 보고 알았다네. 한번 생각해보게. 우리는 노아가 선택 받았다는 점만을 부각시키고 부러워했지 그 외는 별로 생각지 않았네. 그러니 노아가 얼마나 강해야 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네. 100년이 넘도록 모진 손가락질과 온갖 시련을 참고 이겨냈으니…. 강철 같은 심지가 있어야만 가능했을 것이네. 그래서 더더욱 처음의 옛날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네. 이를 우리의 삶에 비춰보면 더욱 확실히 볼 수가 있네. 누구나 삶의 끝은 같지만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것은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가 아닐까, 라고 본다면, 불행이란 언제나 인생에 대한 그릇된 해석의 표적이므로 언제나 긍정적이어야 하고, 우리가 원하는 꽉 찬 결실의 양질의 삶은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얻어질 수 있으므로 스스로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한다는 점은 누구라도 알 것일세. 그러데 열의 없이 성취된 위업이란 존재하지 않음에도 세상에는 어리석은 삶을 사는 자가 의외로 많다네. 이승의 의미를 착각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나. 내가 이루려고 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능력일 뿐이지 어디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바라기만 한다네. 운명과 맞서 이기려는 용기가 없기 때문이지. 감사하는 마음과 노력을 혼동하기 때문에도 그렇다네. 기막히지 않은가. 한번 생각해 보시게. 이 세상이 간단하게 읽기 쉽도록 한 권의 아름다운 책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읽으려고 하지 않거나 진리에 대한 통찰과 이해가 없는 우둔한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는 한낱 굴러다니는 휴지조각보다 못한 것이 아니겠나. 경(經)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운다고 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로만 산다고 해서, 이승에 대한 바른 깨달음의 고통을 피해가는 자에게 무슨 진리의 길이 보이겠는가? 한 예를 보세. '자기 십자가를 져라(taking up your cross)'는 말씀에는 고통보다 더한 것이 담겨있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단지 고통과 아픔과 고난을 참고 견딘다는 뜻이 아닐세. 그 속에는 추방당하고 조롱을 받으며 죽음까지도 불사함을 말하네. 그건 분명 고통이상이 아니겠나. 그런데도 복만 받겠다고 기도로 하얗게 날밤을 새야 뭐가 있겠는가. 고난을 당함을 두려워하는 자. 세속의 비판에 발끈 하는 자. 모두가 십자가를 지는 것과는 먼 자들이네. 그러니 예수가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준비시킨 조롱받고, 침 뱉음과 매질을 당하며, 공개적으로 수치를 받고, 죽임까지 당하게 했던 그때처럼, - 'The bearing of a cross is not just the patient coping with affliction, pain, suffering. It involves ostracism, ridicule and death./Nick Page, 《The Wrong Messiah (The Real Story of Jesus of Nazareth)》' - 그럴 이들이 있느냐? 그런 말일세.
참의 길은 어디기에 깨달음이 머무는 곳 이다지도 먼가? 이 길 저길 한길일 뿐 한세월의 성화마저 허깨비 춤이 되었나? 소망은 천년을 한 결 같이 마음속 내안에서 그대로 고요한데 비끄러맨 집착에 세월만 갈지자로 헤맸다.
그걸로 끝이지. 이 또한 마찬가지로 존재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하기 때문일세. 막 사는 것이나 허투루 여기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고문임에도 이승의 존재자가 그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지. 영혼이 맑아지는 게 이승의 삶을 충실히 하는 것과 크게 차이나 난다면 그건 누굴 위한 것일까? 지나간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듯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지. 얽매이지 않은 생각(정신)이 바른 행동을 낳고. 물론 여기서 말하는 얽매이지 않은 생각은 물질을 말함이 아닐세. 우리를 동여매고 있는 사상이나 이념일세. 그 행동이 옳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천성을 낳고, 천성이 운명을 결정한다면, 인생은 생각하는 그대로 되어가기 마련이 아니겠는가. 그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었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가 우리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절실히 느꼈다네. 그러니 생각하고 느낀 그대로 충실하게 행동하면 뜻대로 되는 것일세. 스스로가 자신을 굳게 믿는다는 것이, 어둠과 다툴 때엔 더욱 그렇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는 절대의 요소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는 말이지. 인생은 본능과 감정이라는 잣대에 의존하는 삶이 대부분이고, 감성에 충실한 삶이지만, 인간사회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과실로 이어질 때가 많지 않은가. 하지만 마음속에는 삐뚤어지는 마음을 바로잡아 삶을 바르게 하려는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자기정화의 본성63)이 기능하고 있으며, '진실을 알아 진실이라 생각하고 거짓을 보아 거짓이라 알아 바른 소견을 가지게 하는 것/《法句經, 雙要品》'이 잠재되어있어,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맨다거나 제 멋대로 살거나 체념에 빠지는 것조차 막아준다네. 이나마 심성이 바르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일세. 인간은 스스로가 자신의 내면에 가지고 있는 고유한 악덕에 의해서 썩는 것을 방지한다면, 타고난 인격을 바탕으로 주어진 환경에 스스로 적응할 수 있는 자생력을 가진 자아적(自我的)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세. 지위의 높음이나 물질의 풍요나 지식의 많음은 결코 중요한 요소가 될 수가 없다네. 오직 하나, 자신의 순수성을 담보하고 있느냐, 그것일세. 옛말에 '먼지를 뒤집어쓰면서도 눈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고, 물을 건너면서도 젓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蒙塵而欲毋眯 涉水而欲毋濡 不可得也.)/《회남자(淮南子)》「第10 무칭편(繆稱訓)」'고 했네. 그러므로 이루는 것도 파멸하는 것도 열쇠는 당연히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뜻이 되네. 하지만 세상 것이 다 그렇듯, 아무리 좋은 장치가 있다한들 앞에서 애기한 것처럼 책을 읽으려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기는 마찬가지일세. 불의(不宜)한 욕행(辱行)으로 몹쓸 짓이나 하는 인간들에겐 별무신통이란 얘기지.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옳게 닦는 것이 아니라 못 되게 볶는 것일세. 물론 그러면서도 모르니 큰 탈이지. 그러니 텅 빈 마음은 어둠의 주관자가 활동하기에 더 없이 좋은 무대로 안성마침이니 쉬지 말고 마음속에다, 아름다움, 희망, 격려, 용기, 열의를 불러일으키는 생기(生氣)를 계속적으로 불어넣어야한다네. 그래야 회의, 절망, 낙심, 의심이 들어찰 공간이 없어질 것일세. 물론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만이 아니고, 이왕이면 평소의 우리 삶 자체가 그래야 한다는 의미이지. 죽음을 눈앞에 두고 터득한 깨달음일세. 자신의 인생을 숭엄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거지."
엄청난 삶의 희열을 담고 있는 과거를 안고 청계산을 향하여, 우리는 이른 새벽에 추억 속의 한겨울에 했던 그대로 아침을 일찍 먹고 늦봄의 꽃향기를 가득 마시며 장도에 올랐다. 과연 이번 산행은 형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전번과 같이 의지와 용기와 지혜를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목숨을 지킨 것에 대해, 인간이 스스로 운명 지워진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불리어 태어난 것이라 생각하는 한, 최선을 다했음을 옳다고 할 것이다. 청계산이 다시 오라는 손짓을 보낸 것도 그 때문일 것이고, 형에게 이심전심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몇 년간 집에서 칩거했던 체력으로는 긴 산행이 어려워 길매봉까지만 갔다 되돌아왔다는 점이다. 막상 그곳까지 가서보니 사인을 받아갔던 젊은이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그는 사인을 받아간 판에다 무엇을 새겨놓았을까? 그가 운영하던 민박집이 사라졌으니 그것도 그의 근황도 모두 다 알 수가 없다. 형제가 큰골 쪽을 일부로 돌아오면서 진정으로 느낀 것은 그들 자신 역시 눈앞의 이익에만 시뻘겋게 부릅뜨고 살줄 알았지 세상의 고마움을 잊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어려울 때에 큰 도움을 받았음에도 와볼 기회가 없었다는 핑계로 10년이 넘도록 외면한 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지금에 와서 안타까워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그 젊은이 품성으로 봐선 섭섭하다 않겠지만, 되레 낯이 뜨겁다. 비록 뒤늦은 후회나마 깨달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 (62) 창조시대에 에덴에서 쫓겨난 인류의 조상이 처했던 '그 밖의 세상'은 인간 종(種)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하늘이 주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인 땅(창 3:18)'이 되는 원시상태로의 복구일 뿐이지,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쾌적하게 살 수 있는 온전한 환경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살기 위해서는 적합한 상태로 자연을 변형시켜야 한다. 아마도 「창세기(2:28)」에서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라는 의미에도 그런 뜻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다만 탐욕에 절은 인간의 심성이 개발을 빙자한 파괴를 일삼기에 일이 생긴다.
* (63)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性善)'고 했다. 인간의 깊은 본성에는 네 가지의 아름다운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을 사단(四端)이라고 하며,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남의 곤궁함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고 측은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仁)이요, 수오지심(羞惡之心)은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증오하는 정의로운 마음(義)이고,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스스로 겸양하여 남을 공경하고 존중하는 공경의 마음(禮)이요, 시비지심은(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지혜의 마음(智)이 그것이다. 맹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밖에서부터 나를 녹여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것일 따름이다.(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弗思耳矣. -《孟子, 告子 上, 乃若其情章》)'고 하였다. 우리를 정화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다. 다만 그것을 밝혀내지 않았을 뿐이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