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랬지
김정옥
난생처음이야. 약국 앞에 사람들 줄이 꼬랑지가 보이지도 않았어. 나도 잰걸음으로 다가가 바싹 달라붙었지. 그런데 삼십 분이 지나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야. 2월이 시샘달이라더니 잎샘추위가 한창이었어. 내 앞에 엄마 손을 잡고 서 있는 아이의 볼이 발갛더라. 한 시간여를 기다려 귀하신 몸 두 장을 샀어. 세상에, 마스크 사는데 이렇게 힘이 들 줄 누가 알았겠냐고. 마스크를 품에 넣고 오는데 ‘허, 참’ 탄식밖에 안 나오더라.
마스크를 여투어 둬야 할 것 같았어. 탁구 동호회원인 약사에게 슬며시 마스크 구매를 부탁했지. 다른 사람 다 제치고 주는 것 같아 고마워서 파운드케이크를 내밀었어. 1+1처럼 남편 것까지 살 수 없냐고 했다가 거절당했지 뭐야. 좀 섭섭하더라. 뇌물 주고 뒷거래하듯이 마스크를 사는 코로나 시국이 서글펐지.
듣도 보도 못한 일이 자꾸 일어났어. 마스크 5부제 말이야. 공적 마스크를 주민등록번호 앞자리에 해당하는 요일만 살 수 있었잖아. 지금은 텔레비전에서 잘생긴 연예인이 마스크를 쓰고 갖은 포즈를 취하며 광고까지 하는데 그것도 참 낯설더라.
그때 그랬지. 실내에 들어갈 때는 두 가지 관문을 거쳤잖아. 열이 나는지 확인하고 출입한다는 기록을 남겼어. 수기로 하다가 전자출입 카드 앱에 QR 코드를 찍었지. 확진자가 움직이는 자취를 파악하려고 그랬던 거야. 코로나 시국의 신풍속도 아니겠어. 그 후 예방접종 증명이 없으면 실내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 아무튼 ‘구새 먹은 고목에 새순이 돋는’ 희귀한 시절이었지.
이제는 예방접종 증명을 들이밀 필요가 없게 됐어. 사적 모임을 제한하던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었거든. 사람들도 마음이 늘큰해져서 그렇게 민감하지도 않아. 코로나에 걸리면 “인제, 내 차례구나.” 한다는 거야. 순리처럼 받아들이는 거지.
우리 집에선 이런 적도 있었어. 한차례 손돌이추위가 오려나, 공기가 냉랭하더라고. 이중창에 튼튼한 창틀임에도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거야. 문풍지로 틈새를 막았지만 역부족이었어. 결국 우리 부부 사이에 살얼음이 끼지 않았겠어. 어썩어썩하는 소리라도 내면 작은 희망이라도 보일 텐데 그런 낌새가 안 보였어. 거실로 들어오던 볕살의 힘으로도 얼음에 실금을 낼 수 없었나 봐.
늘 가던 대로 수필 교실에 갔다 온 것이 불씨였어. 집 밖은 온통 코로나바이러스 지뢰밭인데 밖에 나갔다 왔다고 못마땅한 표를 내는 거야. 남편이 시위하듯 거실에서 마스크를 쓰더니 나에게도 쓰라고 하더라. 한술 더 떠 마스크가 말문까지 막았는지 말을 안 하는 거야. 어이가 없었어. 한 식탁에서 밥도 안 먹는 걸 보니 내가 코로나 확진자라도 된 양 ‘자가 격리’에 돌입하라는 건가 봐. 남편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
다음 날, 흘깃흘깃 쳐다보니 여전히 마스크를 끼고 있더군. 헛웃음이 나왔어. 아내 도리는 해야지 싶어 궁싯거리다 얼음에 나비물을 끼얹기로 했지. 떡국에 소고기 꾸미와 황백지단에 김 가루를 얹어 멋을 냈어. 고소한 들깨칼국수도 준비하고, 마트에서 남편이 좋아하는 군것질거리도 두어 봉지 챙겼지.
나비물 효과를 톡톡히 본 것 같았어. 살얼음이 가장자리부터 슬슬 얇아지는 것 같더니 덧물이 보일 듯 말 듯 하더라. 속옷을 덧껴입은 것처럼 집안에 훈기가 도는 거야. 돌덩이 같던 얼음이 흔들리더니 기류가 바뀌었어. 휴, 한숨 돌렸지 뭐야. 우리 집 거리 두기는 사흘 만에 완전히 해제되었어. 남편 눈빛이 유순해지고 말도 한결 부드러워지더니 동짓날엔 전문 죽집에서 팥죽까지 사다 놓고 기다리더라고. 코로나로 인해 잊지 못할 해프닝이야.
‘한 달이면 끝나겠지, 설마 오래가겠어?’ 하던 코로나 상황이 길기도 해. 벌써 2년이 훌쩍 넘었잖아. 이젠 실외에선 마스크 의무가 해제되었어. 하지만 실내에선 여전히 써야 해. 할아버지 나뭇짐이 점점 서부렁해지듯 죄였던 마음이 조금은 느슨해졌어.
살아가는 길은 불투명한 안개 속을 지나는 것이 아닐까. 희뿌옇게 가로막고 있어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잖아. 코로나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물체가 삶을 턱 가로막기도 하고 말이지.
코로나는 ‘잠시 멈춤’일지도 몰라. 대청호오백리길을 걸으며 청량한 숨을 마음껏 들이마시고, 어쩌다 한번 해외여행으로 플리트비체 호수의 황홀한 물빛과 블레드 성의 정취에 마음이 설레고, 좋은 날 벗들과 만나 시시콜콜 수다도 떨었잖아. 그런 일상에서 잠시 멈추고 되돌아보라고. 그렇게 살던 삶이 얼마나 고마운지 한 번쯤 깨달으라고 말이야.
코로나 이전과 이후가 삶의 방향이 많이 달라졌어. 모임 횟수도 줄고, 온라인 장보기 문화도 익숙하게 되었지. 장례식과 결혼식도 가까운 지인들만 참석하고, 축 조의금을 계좌로 송금해도 실례가 되지 않는 시대야.
코로나 종식은 없다고 해. 바이러스는 자꾸 변종이 나온다잖아. 우리 스스로 예방 수칙을 잘 지키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어. 몽니 부리는 아이 구슬리듯 살살 어르고 달래며 사부작사부작 함께 가는 거야.
안개가 스르르 걷히는 것처럼 결국 모든 것이 지나가기 마련이야. 생전 처음 닥쳤던 일과 살얼음 끼었던 우리 집 기류가 시나브로 사위듯이 코로나도 서서히 세력이 약해지고 있어. 이럴 줄 알면서도 그 순간에는 몸이 닳아 우왕좌왕하고 애면글면했지. 인생의 그넷줄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려도 매 순간 마음을 다하며 살아내야지 않겠어.
먼 훗날 ‘그때 그랬지, 그때 그랬어.’ 하며 삶을 옥죄었던 코로나 시절 이야기하는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