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벚꽃축제를 준비하고 있던 충남 홍성 양곡리 도로에는 벚꽃과 개나리가 흐드러져 있었다.
- 노랗고 하얀 꽃 뒤로 새카맣게 타버린 산의 모습이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 대한노인회 홍성군지회 정홍모 회장은 "함수일 이장과 마을회관에서 벚꽃축제 회의를 끝낸 지 30분 만에 인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 지난 4월 2일 홍성에서 발생한 산불의 영향면적은 축구장 2300개에 달하는 1454㏊로 추정된다.
- 피해 규모도, 진화에 걸린 시간도 올해 들어 발생한 산불 가운데 최악으로 꼽힌다.
- 처음 산불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금방 진화될 것만 같았던 산불은 건조한 날씨와 바람을 타고 3일째 이어졌다.
- 산불 발생 3일 차인 4월 4일, 홍성에서는 소방차, 구급차, 산악용 진화차, 물차와 같은 재난 차량들이 흙길을 드나들고 있었고 하늘에는 물을 퍼다나르는 헬기가 오갔다.
- 같은 날 홍성 갈산중고등학교 대피소의 저녁 시간. 재난구호 셸터마다 도시락이 전달되고 음식 냄새가 체육관에 퍼졌다.
- 막 셸터에 입주한 주민은 도시락에 손도 안 댄 채 지인들에게 상황을 알리는 통화에 한창이었다.
- 혈압이 올라 인터뷰를 하지 못하겠다고 토로하는 주민도 있었다.
- "집이 보이는 곳으로 내려와서 8시간 동안 앉아 있었어." 25년 동안 홍성군 묵동에서 살아온 고모(84)씨 부부는 소주와 도시락을 바닥에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 산 경계로부터 3m 떨어진 곳에서 살던 이 노부부는 진화작업이 끝나자 다 타버린 집의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 "집이 폭삭 주저앉았어. 다 잿더미고. 그렇게 탄 건 처음 보네. 속상하니까 소주나 한잔씩 먹어야지."
- 담담한 어투였지만 허망한 표정은 감출 수 없었다. 이들은 화재가 나자 키우던 고양이와 닭, 개를 모두 놓아주는 생이별도 경험했다.
-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밥을 줬는데 이젠 볼 수가 없네. 잘 살아 있어야 할 텐데…"
- 기자에게 반려동물 사진을 보여주는 목소리는 먹먹했다. 이들은 4월 2일 아침 집 인근에서 발생한 화재로 대피소에서 묵었다.
- 1차 진화가 끝나고 집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바람은 참으로 야속했다. 3일 아침에 다시 불씨가 붙어 집이 순식간에 타버린 것. 이 같은 상황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꿈같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 실제로 홍성 산불은 변덕스러운 바람과 제멋대로인 불씨 탓에 2박3일간 꺼지지 않았다.
- 작은 불씨가 어떤 집에 떨어져 커다란 화마로 변했고, 붙어 있는 다른 집은 불씨가 비껴갔다.
- 화마를 피한 집은 길 건너 이웃들을 보며 한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피해가 비교적 적은 주민들이 이웃을 살피러 대피소를 찾는 경우도 있었다.
- "우리 집 20m 앞에서도 불이 났었어. 집 근처 불을 겨우 끄고 나니 후배 축사에 불이 붙더라고. 집은 멀쩡했지만 후배 축사는 다 탔어. 미안한 마음이야.
- "사과 박스를 들고 대피소를 찾은 양곡리 주민 정모씨는 셸터를 돌며 주민들과 안부를 나눴다.
♧ 산불 3일째인 4월 4일
- 산불이 잡히기 시작했다. 오후 2시 30분경 산불현장지휘본부에서는 상황판단회의가 열렸다.
- 산림청, 기상청, 소방청, 군부대 등 관계 부처의 지휘관들이 저마다 제복을 입고 파란색 간이 의자에 둘러앉았다.
- 새로 인쇄된 20번째 산불 상황도는 진화율 91%를 가리키고 있었다.
- 오전 10시 69%였던 진화율이 급격히 안정된 데에는 풍속이 줄고 습도가 높아지는 등 날씨가 도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 현장에는 잔불만 남았고, 약 2시간 뒤인 5시부터는 비가 예고된 상황. 주불 종료 선언을 할 것인지, 진화작업이 기로에 선 상태였다. 주불 종료 선언은 큰 불이 정리됐다고 공표하는 것이다.
- 주불 종료가 선언되면 헬기를 이용한 진화 작업은 중단되고, 지상 진화 인력만 움직이게 된다.
- 실무자들과 이용록 홍성군수 등은 각 산불 현장의 상황을 보고하고 의견을 개진했다.
- 범위가 워낙 넓은 산불이기에 계속 진화 작업을 하며 상황을 지켜보자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 전형식 충남도 정무부지사는 이들의 목소리를 받아들여 종료선언 결정을 오후 4시로 유보했다.
- 4시까지는 산불이 진행 중인 지역을 재점검하고 다시 회의하자고 의견을 정리했다.
- 불길이 다 잡혔다고 생각했던 지난 밤, 홍성 궁리 일대에서 새롭게 불이 번진 바 있다. 지휘본부는 바로 어제의 상황을 근거로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 이러한 상황판단회의는 진화 상황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진화대책을 논의하는 자리다.
- 산불진화작업이 진행되는 2박3일간 약 2시간 간격으로 총 21번 이뤄졌다.
- 각지의 산불 현장에서 진화인력들이 정보를 보내주면 각계 지휘관들이 이를 취합하고 상황판단회의에서 보고하는 방식이다.
- 이 회의 결과를 가지고 야간 작전대책회의 등 실무자들 사이의 회의가 수시로 진행됐다. - 불길이 잦아든 구역에서는 인원을 빼고 불길이 커진 구역에는 인원을 더 투입하는 등 진화인력을 재배치하고 작전을 점검하게 된다.
- 회의 결과 4시까지 특수 소방활동을 수행하는 진단차, 화재조사차 등 여러 종류의 차량이 잔불이 남아있는 지역을 점검하게 됐다.
- 기자는 충남소방본부 관계자들과 함께 진단차에 탑승해 1시간 반가량 어젯밤 새로 불이 번진 지역인 궁리 지역을 돌아보는 업무에 동행했다.
- 충남소방본부 관계자는 산불 대응의 특징에 대해 "불과 싸운다기보다는 확산을 최소화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 산불은 일반 화재와 다르다. 바람, 임도·하천, 민가의 위치 등을 고려하여 움직여야 한다.
- 일반 화재는 신속 진화가 우선이라면, 산불은 민간지역으로 내려오는 불을 막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 산불 진화에 사용되는 소방호스는 비교적 가볍고 얇아 이동이 쉽다.
- 이 호스로 물을 뿌리고 낙엽을 치워 방어선을 구축하면 산불은 더 이상 경계 너머로 내려오지 못하게 된다.
- 소방대원들은 민가 등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나서 산 위쪽으로 이동하며 진화작업을 해나간다고 한다.
- 바람과 상승 열기 등으로 불씨가 50~100m씩 날아가는 경우도 잦다.
- 순식간에 날아간 불씨가 마른 낙엽이나 빽빽하게 우거진 풀, 나무 따위에 옮겨 붙으면 여러 곳에서 동시에 불이 번지는 상황도 산불만의 특징이다.
- 이처럼 곳곳에 튀어 박혀있는 불똥들 때문에 재발화도 많다.
- 헬기가 저수지 등에서 물을 퍼와 산 정상 등의 큰불을 끈다면 소방대원 등 진화 인력은 민가·축사 등으로 출동해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최소화하고, 헬기가 진화하지 못하는 작은 불씨를 찾아내 진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 홍성의 고산사는 보물 399호로 지정돼 있다.
-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팔작지붕에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 유명하다.
- 고산사 내부에는 유형문화재 제188호인 아미타불좌상이 안치돼 문화재적 가치도 높다.
- 지난 4월 2일 오후 산불은 고산사에서 동남쪽으로 불과 1㎞ 남짓 떨어진 곳까지 확산됐고 이에 따라 소방대원들은 사찰에 대기하며 방어선을 구축했다.
- 이들은 교회, 아가새 농장, 마을회관 등 수많은 건조물들을 화재로부터 보호했다.
- 실제로 마을 곳곳에서는 건조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까지 화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경우가 발견됐다.
- 시커멓게 탄 야산 바로 앞에 위치한 한 주택에서는 부부가 정원에 나와 진단차를 향해 "감사합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 화재가 난 마을 어귀에는 경찰관들이 서 있었다. 이들은 소방차 등 진화 차량이 빠르게 화재 현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교통 통제를 담당한다고 했다.
- 진단차가 지나가자 병력 지원을 하고 있던 군 관계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중턱을 가리켰다. "저곳만 몇 번째 반복작업 중"이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 헬기가 불과 20분 전에 진화작업을 한 지역이지만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고 계속 다시 피어오른다는 것. 낙엽 등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 겉불을 끄더라도 속불을 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 "이 근처가 다 소나무인데, 소나무는 송진 때문에 워낙 잘 탄다"며 꺼질 듯 꺼지지 않는 잔불에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 마침 30여명의 장병들이 교대를 위해 군부대 트럭에 실려 오고 있었다. 이들은 하얀색 군모를 쓰고 있었다. 화재 현장에서 식별이 잘되기 위해 검은색 방탄헬멧 위로 하얀색 위장포를 뒤집어씌운 것.
- 잔불제거작업에 투입될 때는 등짐펌프를 메고 갈퀴, 소화기를 든 차림이다. 주로 갈퀴로 흙을 긁어 불씨를 덮는 방식이라 전문 소방인력이 아닌 일반 인력도 참여가 가능한 작업이다.
- 이날 육군 32사단 장병 약 500여명이 홍성 우심산 일대와 청룡산 일대의 잔불제거 작업에 동원됐다.
- 하루 단위로 인력이 교대되기 때문에 작업 도중 식사도 어렵다. 군 관계자는 "산 위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주변 대피소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한다"고 설명했다.
♧ 4월 4일 진화작업에는 소방인력, 군부대, 공무원, 경찰, 특수진화인력, 공중진화인력, 전문예방인력 등 2866명이 동원됐다.
- 53시간, 2박3일의 기간 동안 동원된 총 인력은 3,019명이다. 진화헬기는 총 20대, 진화차 등은 193대 투입됐다.
- 초대형 산불에도 인명 사고가 없었던 이유는 이들 진화인력과 홍성군민들이 경계를 늦추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 주민이 직접 산불 확산을 막은 경우도 있었다. 철장이 무너져 내린 닭장 안에서 닭벼슬이 새카맣게 타버린 닭이 몸을 떨고 있었다.
- 홍성 서부면에 거주하는 김용산(75)씨의 닭이다. 화재 이후 닭이 꼼짝없이 같은 자리에 앉아 운다고 했다.
- 이 한 마리만 남고 다른 닭들은 산으로 도망가거나 불에 타 죽었다.
- 인근에서 농사일과 축사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김씨는 지난 4월 2일 오후 막내아들, 막내며느리와 함께 직접 집을 화마로부터 지켰다.
- 축사 곳곳에 비치했던 소화기와 물통을 이용해 불길을 잡았다.
- 하지만 창고와 창고 내부에 쌓아뒀던 모판, 재배 후 말리고 있었던 버섯 등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 그는 "그래도 집은 무사해서 다행이야"라고 말했다.
- 창고 앞에 놓인 빈 소화기통 4개는 그날의 상황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듯했다.
- 오후 4시. 빗방울 몇 개가 차창을 때리더니 이내 멈췄다.
- 소방대원들 사이에 퍼지던 반가운 감탄사는 순식간에 아쉬운 탄식으로 변했다.
- 오후 5시11분. 기상청이 공표한 시간이 되어서야 굵은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 "드디어!" 모두가 애타게 기다렸던 봄비였다.
비가 내리고 진화작업이 한층 더 마무리되면서 대피소에 있던 이재민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주택이 전소해버린 이재민들이다.
- 한 이재민의 통화 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냄비 같은 거 가져와. 어차피 여기 아무것도 없어. 다라이도…. 빨래를 손으로 비벼서 해야 하니까."
- 주간조선 -
첫댓글 재난상황을 자세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