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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묵상글 들 ( 연중 29주 화요일-주님께서 상을 차려주시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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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9주 화요일-주님께서 상을 차려주시면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시중을 들 것이다."
얘기를 들은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이번 인사이동 때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그래서 허락이 된다면 저는 협동조합의 <여기 밥상>이라는 사업 중에서
<One Table>이라는 밥상머리 봉사를 할 계획입니다.
이것은 제가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사목이었습니다.
제가 육신의 식탁 봉사도 하고, 영혼의 식탁 봉사도 하는 것이고,
그래서 육신의 양식도 제공하고, 영혼의 양식도 제공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뜻깊은 만남을 신앙적으로 갖고 싶은 분들,
예를 들어 생일이나 서약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뜻깊은 날을 맞아
그것을 축하하는 식사를 하고자 할 때 일반식당에서 축하하기보다
저의 <One Table>에 오시면 저는 다른 손님은 받지 않고, 오직
그분들만을 받아 하나의 밥상을 마련하고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양식을 취하기 전에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영혼의 양식도 드시게 하겠다는 것이고, 특히 서약 피정이나
단체 피정 또는 교육을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선 피정 강의도 해드릴 겁니다.
제가 이런 꿈을 갖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께서 하신 것을 따라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데,
최후 만찬 때 주님께서 만찬을 마련하시고 식사를 같이 나누신 것이나,
밤새도록 고기를 잡은 제자들을 위해 생선을 구워 상을 차려 주신 것이나,
당신을 충실하게 기다린 종을 위해 밥상을 차려 주시고 시중을 드시겠다는
오늘 복음의 주님을 본받아 식탁 봉사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의 육적, 영적 식탁 봉사를 통해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처럼
주님의 시중을 받고 있다는 행복을 여러분도 느끼게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오늘 비유의 뜻은 자명합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종이란 이 세상 삶을 열심히 살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천국에 든 종이고, 거기서 주인님이신
우리 주님은 풍성한 천상 식탁을 제공하고 시중까지 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때 즉시 떠오르는 것이 시편 23편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아란 풀밭에 이몸 뉘여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내 원수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향기름 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외다. 한평생
은총과 복이 이 몸을 따르리니 오래오래 주님 궁에서 사오리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 잔치와 밥상은 너무 황공하고 부담스럽다고 초대에 거절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오늘 비유에 나오는 행복한 종이 아닙니다.
그런 밥상과 잔치는 관심도 없다고,
또 다른 비유에서 잔치에 초대받고서 아랑곳하지 않고 밭 갈러 가고
장사하러 간 사람들처럼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행복한 종이 아닌 것 정도가 아니라 불행한 종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행복한 종이고자 한다면 좀 이기주의적이고,
염치가 없을지라도 이런 잔치와 밥상을 차려 주심에
주님께 감사드리고 초대에 기꺼이 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도 이 초대에 같이 가자고 초대하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주님 대신 주님 밥상을 차리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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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연중 29주간 화요일 (루카12,35-38)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베드로의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9).
‘깨어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감지하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는데 그 몫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여 하느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 자체가 ‘깨어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인을 충실히 기다리는 종에게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을 받으며 주인이 그의 종처럼 처신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요즘은 가정방문을 하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본당신부를 할 때에 가끔 예고 없는 방문을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24,44).는 예수님의 말씀을 핑계로 말입니다. 그러면 행복해하는 분도 있지만 당황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집안 정리를 잘해 놓으신 분은 더없이 기뻐했고, 그렇지 못한 분은 신부에게 자기 속을 다 보인 것 같아서 무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열심하다’는 분의 가정에서 그 모습을 보면 제가 오히려 미안하고 죄송스러웠습니다.
물론, 집안 정리가 잘 되었다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것도, 마음이 맑은 것도 아닙니다만 열심히 활동하는 만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도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 준비된 모습이 가정 안에 화목함과 평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집안 정리를 하지 못해 부끄러운 건 그래도 다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잠시라도 악에게 틈을 주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깨어 있어 행복한 오늘입니다. 항상 깨어서 안밖으로 정리 정돈을 하며 주인을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종은 그 신분상 겸손할 수밖에 없고 순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참으로 겸손하고 순종적이면서 바로 이웃에겐 그토록 교만하고 억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우리는 위선자입니다." 깨어 있는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깨어, 기다리던 주인을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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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35-38: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35절) 이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파스카 음식을 먹을 때 하신 말씀과 비슷하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 이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베드로 사도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8)라 하였다. 주님의 뜻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이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하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의와 연관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일러 주신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절) 주님께서 오시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등불을 꺼뜨리지 말고 허리에 띠를 동이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마태 24,42)이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들의 영에 좋은 것을 함께 찾아야 한다. 가야 할 길을 끝까지 다 가지 않으면 “한평생 믿음으로 산 것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기”(바르나바의 편지 4,9) 때문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38절) 주님께서 어느 때 오시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분께서 오셔서 그렇게 사는 우리를 보신다면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 그분은 우리가 수고한 만큼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곁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 있어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사랑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깨어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예기치 않을 때 오실 줄 알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깨어 있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언제나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랑해드릴 수 있는 삶이 바로 종말론적 삶이며, 이 삶을 통하여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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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한상우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 37)
주님과의
관계가
행복을
결정 짓는다.
행복은
선택이다.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행복의 기쁜
시작이다.
우리에게
주시는
참행복이다.
행복은 주님을
향해 있는
마음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의
모든 행복이
되어주시는
주님이시다.
그 주님을
향해
깨어있는
것이다.
행복을
일상안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를
보아주시는
주님이 계신다.
믿을수록 기쁘고
사랑할수록 행복한
주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행복은
공간의 의미가
아닌 깨어있는
마음의 자세이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행복은
주님께서 주시는
주님의 것이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신다.
행복은 최선을
다하는 사랑이다.
사랑하기에
깨어 있고
사랑하기에
기다리고
사랑하기에
기쁜 것이다.
서로 행복한
주님과 종의
관계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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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연중 제29주간 화요일.<깨어 있어라.>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라는 말씀은,
“항상 깨어서 준비하고 있어라.” 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종말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깨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은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평소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사람은,
종말과 재림이 오늘 이루어져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주님을 잘 맞이합니다.
또 종말과 재림이 늦어져도 방심하지 않고,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행복’이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과 ‘구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이라는 말씀은,
평소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가 종말과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이라는 말씀에서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문을 두드리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고, 그 문을 여는 일은 우리가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은 손님으로서 오시는 일이 아니라, 주인으로서 오시는
일이고, 문을 두드리는 일은 당신 집의 문을 두드리는 일입니다.
(묵시록의 말씀에는 ‘그의 집’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그래도 집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문을 두드리는 것은 주인의 권한으로 하는 일이고, 만일에 우리가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제 때에 문을 열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주인의 권한으로 우리를 처벌하게 될 것입니다(루카 12,46).
<우리 인생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을 잠시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관리자이고,
관리를 얼마나 잘했는지를 종말과 재림 때에 심사받게 될 것입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충실하게 깨어 있었던 종들은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인과 종의 위치가 역전되는 것이 아니라,
종이 주인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시중을 들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바로 그것을 미리 보여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영광을 함께 누리는 것, 그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구원’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시중을 드는 것과 같은 행복을 누리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뒤의 17장에 있는 다음 말씀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7-10).”
밤늦게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서 종이 깨어 기다렸다고 해서
주인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권한은 종에게는 없습니다.
성실한 종을 주인이 칭찬하고 상을 주는 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자비입니다.
우리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서
주님께 그것에 대한 상을 달라고 요구할 권한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종말과 재림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평소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구원받기를 바라는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은총이고 자비입니다.
고마워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쪽의 일입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이라는 말씀에는,
종말과 재림의 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이루어진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예상보다 빠르다고 주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각 개인의 ‘인생의 마지막’에 적용하면 좀 더 실감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살았어도,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이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았을 때 특히 더 그렇습니다.)
아직 젊고 건강한 경우에는 죽음을 의식하지도 않고,
죽음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례식 준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충실한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계획에 따라, 당신의 권한으로,
언제든지 우리를 부르실 수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과 회개를 해야 하는 때는 언제나 항상 ‘지금’입니다.
<그런데 사심판 때 각 개인이 받게 될 선고와
인류 전체의 공심판 때 각 개인이 받게 될 선고가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심판 때 구원을 받은 사람은 공심판 때에도 구원을 받을 것이고,
반대로 사심판 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공심판 때에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종말과 재림 때의 공심판을 준비하는 일과
개인의 사심판을 준비하는 일이 다를 이유가 없습니다.
평소에 늘 회개하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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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새벽을 열며.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빠다킹신부님.
어느 부부로부터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10년 전에 본당신부로 사목을 할 때의 본당 신자였는데, 저를 잊지 않고 연락을 주신 것입니다. 이 부부에게는 아이가 둘이 있는데, 정말로 많이 컸더군요.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어있었고, 너무나 어린 꼬마였던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어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큰아이의 사춘기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얼마 전에 자녀의 사춘기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어느 어머니와의 대화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감사했어요. 정말로 혹독하게 사춘기를 보냈거든요.”라고 아이의 엄마가 말하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 아이는 사춘기라는 것을 모르고 컸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축하할 일이 아니라고 많은 심리학자는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성장은 위기를 헤쳐나갈 때만 주어지기에, 사춘기가 없었다는 것은 그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또 한 가지는 ‘더 큰 위기’가 언젠가 찾아올 것이기에 그때 더 큰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 아이들의 부모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독한 사춘기가 온 것을 오히려 감사해했습니다.
어렸을 때의 사춘기가 성인이 되었을 때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 삶의 고통과 시련의 문제에 대한 시각을 다시 갖게 합니다. 피할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정면에서 부딪히고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삶은 또다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면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육과 영과 정신이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언제 오시는지 알 수 없는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라고 하시지요. 이는 인간의 세 시기인 소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의미합니다. 이 세 시기 내내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새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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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벗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통된 그 많은 추억, 함께 겪은 그 많은 괴로운 시간, 그 많은 어긋남, 마음의 격동, 우정은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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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시련에 대해....
고통과 시련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참 많습니다. 암과 같은 중병,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 오해나 순간의 실수로 생기는 불명예의 순간, 그리고 무엇보다 큰 것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일 것입니다. 분명히 큰 고통이여 지금을 충실하게 살지 못하게 하는 시련입니다. 이를 마주했을 때 보이는 반응이 보통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고통과 시련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사람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높은 자살률은 이런 유형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 고통과 시련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며 견디어 내는 사람입니다.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 내기가 힘들어 술이나 약의 힘을 빌리기도 합니다. 아무튼, 위축된 삶을 살아가는 유형입니다.
마지막은, 고통과 시련을 겪으며 오히려 한 걸음 나아가며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이 안에서 긍정적인 모습을 찾으며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삶의 기회가 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역사 안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도, 소위 금수저로 태어나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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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이기우 신부님.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자 - 혐오의 현실에서 감동의 목표로!
우리의 발은 땅에 딛고 있어야 하지만 머리는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우리는 온 땅을 감싸고 있는 하늘을 향해 쳐다보며
하느님께 기도하면서도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이웃 인간과의 관계에서 행한 행위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의 예물로 삼습니다.
마음으로 기도하고 손과 발로 선행을 바칩니다.
이 기도와 선행은 마치 십자가의 가로 세로 나무처럼
서로 방향을 달리 하면서도 서로 교차되어 뗄 수 없이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지향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종교의 선교활동이 상인이 물건을 파는 상행위나
정치인이 표를 얻으려는 정치행위와는 물론 다르다 하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예술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바 역시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무릇 모든 예술 작품은 그 작품을 창작하는 데 들어간 예술가의
혼으로부터 감상하는 사람들이 그 선한 기운을 느끼기 때문에 감동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화를 하기 위한 선교 활동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종교 현실에서는 광신적이거나
이기적인 행위 탓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사이비 종교집단의 행태나, 목사의 직함을 내건
사람이 벌이는 정치소동과 그에 동조하는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행태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특히 그리스도교가
도매금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사태가 생겨났습니다.
사실 이러한 사태는 그 동안 예수님을 믿는 목회자들의 탐욕스런
모금 행태와 이를 추종하는 신자들의 광신적 기도 행태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게 쌓여 있었을 뿐이었던 사람들의 생각에 불을 지른 불쏘시개였습니다.
특히 대형교회에서 버젓이 자행하는 목사세습행태라든지,
불교를 우상숭배 종교라 비난하거나 천주교를 이단시하는 독단적 행태가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행태는 사회 일반에 대하여 감동은 커녕 혐오를 조장해 왔습니다.
그래서 자기정화의 차원에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이미 오래 전부터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암흑의 시대였던 1970~80년대 사이에 진보 진영의 치열한 저항과 보수 진영의
철저한 방관 사이에서 신앙적 혼란과 양심적 방황을 경험한 양심적 복음주의자들이 주역입니다.
이들은 진보 진영의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에 지지를 보내면서도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과 같은 노선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끼고는, 진보적 복음주의로 자처하기로 했습니다.
교세확장과 물질적 축복만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적 부도덕과 물질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한국 개신교회의 지난날을 반성하면서 거듭난 신자의 경건한
삶과 행함이 있는 믿음을 통해 도덕성과 사회적 공의를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생태환경을 위한 자발적 불편 운동, 신뢰받는 교회를 위한 깨끗한 총회 만들기 운동,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위한 사회정치윤리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이들은
아마 고학력 중산층 개신교 신자들이 주축이리라고 짐작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복음화와 관련해서 유의해야 할 바는 이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회 여론이 개신교 일부의 광신적이고 탐욕스런 일탈 행위나 행태에 대해서
혐오한다고 해서 그것이 개신교 전체의 모습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어부지리로 가톨릭교회가 상대적으로 후한 점수를 얻는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우리의 실력에 대한 평가가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앞서 언급한 ‘기윤실’ 운동 등과 복음적 실천으로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하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하셨고,
또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우들에게 권고하기를,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 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우리의 소임과 사도직 활동 그리고 작은 선행들에서 정성을 다하면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집이 튼튼하게 될 것이고,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혐오를 안겨주는 대신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선교활동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하는 것은 선행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미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말들이 흘러넘치고 있으니, 교회가 선포하는 말씀,
즉 메시지와 강론은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여 알려주는 희망의 등불이어야 하고,
그러자면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서도 정통해야 하지만 시대의 흐름도
꿰뚫고 있어야 설득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가볍고 천박한 말들의
홍수에 지쳐 있어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깊이 있고 알찬 말씀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미사의 봉헌에 있어서도 경건함을 잃지 않는 것이 기본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예배이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 복음화의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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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주인을 사랑하는 종’의 이야기입니다. ‘종’이 ‘주인’을 존경하고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종업원이나 사원이 고용주를 마음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열에 하나, 고용주가 자신을 가족처럼 대하고 자식처럼 아껴 준다면 고용된 이들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은 주인을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 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음 구절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어떤 주인이 허리에 띠를 두르고 종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시중을 들겠습니까?
오히려 종이 주인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혼인 잔치에 다녀와 피곤할 터인데 종을 위하여 시중을 듭니다.
그렇습니다. 종은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 주는 주인을 사랑합니다.
종은 늘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깨어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들으며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깨어 있을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우리를 귀하게 대하시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 한재호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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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연중 제29주간 화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양의 사상과 종교는 ‘도(道)’를 이야기합니다. 도는 율법과 계명이 됩니다. 도는 기준과 원칙이 됩니다. 도는 진리와 생명이 됩니다. 그러기에 도와 도가 아닌 것을 구별하였습니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진실과 거짓, 본질과 현상, 죄와 벌, 전쟁과 평화, 천국과 지옥, 남과 여, 삶과 죽음’이 있습니다. 이런 도는 나와 너를 구별하게 합니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게 합니다. 행복과 불행을 구별하게 합니다. 공존을 위해서 대화와 타협을 하기도 하지만 도가 아닌 것들을 없애기 위해서 폭력과 전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의 차이로 폭력이 벌어집니다. 국가의 이익을 기준으로 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이 생깁니다. ‘G7, G20, OECD'와 같이 경제적인 규모와 힘에 의해서 국가를 구별하기도 합니다. 서양의 사상과 종교가 가지는 장점이 분명 있습니다. 현대문명의 토대가 되었고, 산업화와 자본주의로 인류를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과학과 기술로 인류의 수명은 길어졌습니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도(道)라고 항상 말하는 도(道)는 없다.” 현상과 본질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선과 악이 하나라고 합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부분을 보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를 보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남한과 북한이 둘로 나뉘었지만 원래는 하나였습니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으로 분단의 벽을 높이 쌓고 있지만 언젠가는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한민족입니다. 과학자들은 ‘미토콘트리아’를 분석하면서 인류는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피부색은 달라도, 사는 곳은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결국 우리는 하나에서 시작되었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양자역학은 노자의 도덕경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빛은 파동과 입자의 성격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에는 파동과 입자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미시세계에서는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서 물질이 존재하기도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물질이 있어서 관찰자가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서 물질이 생기는 겁니다. 우주는 에너지와 기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차별과 구별이 아니라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 20 -23) 우리가 신앙의 신비로 고백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위격으로는 구별되지만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는 항상 같은 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우리가 하나였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도라고 항상 말하는 도는 없다.’는 말을 자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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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 있음' 예찬 -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사람들! -
오늘 복음은 짧지만 강렬하고 아름답습니다. 복음의 주제도 선명합니다. ‘깨어 있어라’, 바로 우리 수도원의 문도미니코 수사의 종신서원 상본의 성구요 성전 뒷벽 양쪽 커다란 올빼미 눈이 상징하는 바 역시 이와 일치합니다. 제의방에 있는 핀란드 흰올빼미 도자기 작품의 초롱초롱 빛나는 까만 눈도 깨어 있음을 상징합니다. 마침 얼마전 읽기를 끝낸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님의 ‘종말론 책에서 언뜻 본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마르13,37). 부활하신 분과 세상 시간의 특별한 관계에 인간이 부합하는 방법은 역사철학이나 역사신학이 아니라 ‘깨어 있음’이다.-
-교회는 전례에서 마치 그분과 함께 가는 것처럼 세상에 그분의 거처를 마련해 놓아야 한다. ‘깨어 있음’이라는
주제는 전례를 실제로 거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임무 속으로 들어가면서 심화된다.-
전례에 참여하는 필수 전제 조건이 바로 ‘깨어 있음’임을 깨닫습니다. 마침 제1독서 에페소서의 소 제목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인데 공동체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깨어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일치임을 깨닫게 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장면이 참 선명하고 아름답고 긴박합니다. 발목까지 늘어지는 겉옷 자락을 올려 띠로 묶는 것은 즉시 일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모습이요, 이스라엘인들이 파스카 축제를 지낼 때에 취하는 여행자의 자세요, 메시아를 기다리는 몸가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끊임없는 기도등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깨어
있음입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을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깨어 있을 때 살아 있습니다.
깨어 있을 때 깨달음도 옵니다.
깨어 있을 때 어둠의 유혹도 없습니다.
깨어 있을 때 영육의 건강입니다.
깨어 있음은 축복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다림입니다. 주님을 기다릴 때 깨어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제가 9.29일 대천사 축일에 고속도로에서 대형교통 사고에도 무사할 수 있었음은 사고 순간 내내 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보다 시피 은총의 기적처럼 일체의 후유증도 없고 머리에 흉터의 흔적도 거의 없는 모습입니다.
어제 어느 자매가 선물한 빵 포장지의 세 영어 말마디가-love, free, happiness- 좋아 카톡 사진에 담았습니다. 즉시 깨어 있음에 연결되었습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행복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은 영성생활의 모두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깨어 살며 최선을 다할 때 내일은 내일대로 주님이 잘 돌봐 주시어 잘 될 것이니 내일 걱정은 전혀 안해도 됩니다. 쓸데 없는 시간 낭비요 기우입니다. 믿음 부족의 반영입니다. 마치 강론이 깨어 있음 예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복음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마지막 죽음도, 또 주님을 맞이하는 순간도 깨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
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종들은 행복하다.”
마태복음의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한 혼인잔치의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깨어 있다가 주님을 반갑고 기쁘게 환대할 때, 주님도 우리를 시중들며 환대한다니 얼마나 가슴벅찬 행복한 주님과의 만남인지요!
그대로 오늘 복음은 깨어 기다리다가 오시는 주님을 환대하는 미사잔치 장면을 상징하는 듯 참 은혜롭습니다.
2020년 한해는 참 각별한 사상 초유의 잊지 못할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참으로 깨어 내적 삶에 전념할 기회를 선물로 받은 한해입니다. 두달 여의 긴 장마와 수해와 태풍에도 배밭 피해는 전무하고 오히려 풍작에 배맛은 근래 드물게 좋으니 저절로 하느님 찬미와 감사가 솟아 납니다.
또 올해는 제가 장마가 계속된 두 달 동안 맑게 흐르는 시냇물과 물오리들이 좋아 시냇가를 가장 많이 산책하며 난생 처음 동요를 가장 많이 부른 해이기도 합니다. 얼마전부터 시냇물은 말라 끊기고 물오리들도 떠나
이제 시냇가 산책은 끝냈습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은 그대로 참 좋은 깨어 있음의 영적 상징입니다.
맑게 흐르는 물이 끊기니 고인 웅덩이 물은 썩고 잡초들은 우거지고 맑은 백사장 모래들은 이끼들로 보기도
흉합니다. 바로 끊임없이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바치는 우리의 공동전례기도 즉 시편성무일도와 미사가 바로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의 개인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개인을, 공동체를 만들어 준다는 것
입니다. 제 좌우명 자작시도 깨어 있음을 상징합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천년만년 깨어 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깨어 임 향해 흐르는 강”-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깨어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으로 깨어 있을 때 공동체의 평화와 일치의 선물도 주어집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도 참 아름답고 깊고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우리를 하나도 만드시고 우리를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하여 당신 안에서 우리를 하나의 새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그대로 깨어 봉헌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얼마나 놀라운지 보여줍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으로 깨어 일치의 평화를 이룰 때, 비로소 다음과 같은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에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성장과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참 좋으신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깨어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이런 끊임없이 성장하는,
늘 좋고 새롭고 아름다운 살아 있는 공동체를 선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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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두 존재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인과 종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과 우리 관계를 이야기하십니다. 주인이 혼인 잔치에 갔다가 돌아올 때 종이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는지 보여 주시지요.
으례 혼인 잔치는 며칠씩 계속됩니다. 요즘처럼 통신 수단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교통 수단도 변변치 못한 때니, 집에서 기다리는 이는 출타 중인 사람에게 마음이 많이 쓰입니다. 도착이 언제일지 모르니 긴장의 끈이 쉬이 놓아지지 않겠지요.
"허리에 띠를 매고"
외적인 자세입니다. 쉬거나 잠들지 않고 언제라도 당장 일어나 움직일 수 있는 태세지요. 옷을 단단히 허리띠로 여미는 건 맞이하고 여독을 풀게 도울 때 걸리적거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는 무언의 상징이지요.
"등불을 켜 놓고"
캄캄한 어둠이 닥쳐도 주인이 멀리서 불빛을 보고 찾아올 수 있도록 등불을 켭니다. 상대의 안전을 위해 환경을 만들어 놓는 것이겠지요.
거기에 더해 이 말씀은 영혼의 준비까지도 포함합니다. 마치 등불이 반짝이듯 영혼도 밝게 빛나는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이지요. 이는 육신을 회복시키는 물리적 잠을 거부하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기다리는 대상, 주인(님)을 향한 사랑의 불꽃이 계속 타오르게 하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
주인의 도착으로 깨어 기다린 보람을 느낀 종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또, 지금 이 순간에는 주인 역시 그에 버금가게 무척 행복합니다. 누군가 기약없는 나를 충실히 기다리며 기억하고 고대했다는 뜻이니까요. 그것도 의무가 아니라 사랑으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과 "종"으로 비유하셨지만, 사실 비유 속 두 존재의 모습은 연인에 가깝습니다. 기다리는 이는 충심을 다해 열렬히 기다리고, 오는 이도 사랑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 옵니다. 이 좁혀지는 거리를 관상하다 보면, 아가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아가 2,8)
"내게 문을 열어 주오, 나의 누이
나의 애인,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이여!
내 머리는 이슬로,
내 머리채는 밤이슬로 흠뻑 젖었다오."(아가 5,2)
그렇게 만난 두 존재는 행복합니다. 기다린 이는 갈망하는 이를 맞아들였기에 행복하고, 달려온 이는 드디어 그를 만나서, 그의 사랑을 확인해서 행복합니다. 주인이 종을 식탁에 앉히고 시중을 들만큼 주인은 행복에 겨워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런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종도 더 바랄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이 벅차도록 설레는 해후의 절정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 언젠가 이루어질 약속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화해와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에페 2,13)
하느님을 모르던 우리가 하느님과 가까워집니다.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희생 제사와 속량을 통해 우리가 그분께 나아간 것이고, 그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도 기꺼이 우리에게 다가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8)
그리스도의 제자요 벗이며 신부가 된 우리는 어느 민족, 어느 태생이든 관계없이 한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각자 출발점은 다르지만 하느님을 향해 점점 모여듭니다. 이 좁혀지는 거리의 정점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거기 그분 안에서 우리는 만나고 일치하며 하나가 됩니다.
이 상태가 곧 평화입니다. 저마다 다른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 서로 존중하고 포용하며 일치를 이루는 그때, 우리는 자신을 잊은 채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하는 완전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능력으로 끊임없이 아버지와 "가까워지고" 있고, 그분께 "나아가는" 중입니다. 서로가 결합하여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2)
사랑하는 벗님! 이렇게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점점 좁혀지고 있습니다. 무한히 근접하는 정점을 향해 서로 나아옵니다. 종이 주인을 기다리듯, 주인이 설레며 달려오듯 하느님과 우리는 서로를 향해 움직입니다. 상대가 가까워질수록 흡족하고 충만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 내부를 꽉 채울 때, 묵직한 평화가 밀려듭니다.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벗님! 말씀이 우리를 종이라 부르시든, 신부라 부르시든 사랑을 마음에 한가득 안고 열렬히 주님을 기다립시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 기쁨에 겨워 달려오시는 주님을 향해 마주 나아갑시다. 기다림은 갈망이 연소되어 더 큰 사랑의 불을 일으키는 시간입니다. 이 여정 안에 계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우리, 지치지 말고 사랑하는 분을 충심으로, 열렬히, 반짝이며 기다립시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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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12,3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12,35-37a)
깨어 있는 종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자기의 본분(신원), 곧 자기가 주인이 아니고 주인의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하는 종이라는 신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2,14.19-20)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건물의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인 우리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잘 헤아리고, 이 뜻을 잘 실행하려고 땀 흘려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종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진 '자기 성소'가 있습니다. 이 성소에 충실하는 것, 내 방식이 아닌 예수님의 방식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성소를 기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깨어 있는 종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깨어 있는 종들은(사람들은),
당당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뻐합니다.
평화가 충만합니다.
너와 불편하지도 않고 갈등 속에 있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며, 행복입니다.
오늘도
이 은총과 행복을 위해 파이팅 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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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에페소 2,12-22
루카 12,35-38
허리띠를 맬 때 마다
사제들이 미사 전 정식 제의를 입을 때는 꽤나 복잡한 절차를 거칩니다.
하나 하나 걸칠 때 마다 그 순간에 합당한 기도도 바칩니다.
제일 먼저 착용하는 것은 표현이 좀 특별한데 개두포입니다.
어깨 위로 하얀 보자기를 걸친 후 끈으로 묶습니다.
이때 바치는 기도는 이렇습니다.
“주님 내 머리에 투구를 씌우시어 마귀의 공격을 막게 하소서.”
이어서 장백의를 입고 허리에 띠를 매면서 또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조찰함의 띠로 저를 잡아매시고, 또 제 안에 사욕을 없이 하시어 욕망을 절제하며 정결의 덕이 있게 하소서!”
이윽고 마지막 단계 제의를 입으면서
“주님,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을 가볍다고 하셨으니 제가 주님의 은총을 입어 이 짐을 잘 지고 가게 하소서.”
사제의 기도는 이미 제의방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예식을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해 사제는 허리에 띠를 매면서 준비를 시작합니다.
사제서품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장엄한 입당성가와 함께 입장행렬이 시작됩니다.
저희는 장백의를 입고 허리에 띠를 매고 왼쪽 손에는 제의를, 오른 손에는 큰 초를 하나 들고 입장을 초긴장 상태로 입장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손에 켜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몸과 마음이 흐트러질 때 마다
그때 당시의 가슴 설레고 떨리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언제까지나 사제품 때의 긴장과 설렘의 마음으로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장 35~36절)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 등불을 켜놓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오늘날 신발 끈을 동여매는 것, 손전등을 챙기는 것과 유사한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몸을 움직일 준비를 한다는 것, 머나먼 밤길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스카 축제일마다 파라오의 압제를 피해 이집트를 탈출하던 기억을 되살리는 파스카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때 마다 그들은 허리에 띠를 매었습니다.
이유는 약속의 땅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언제든지 응답하겠다는 의미에서의 행동이었습니다.
요즘 미사 전 제의를 갖춰 입을 때 허리에 띠를 맬 때 마음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우리 선배 살레시안의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주님, 지금 제가 봉헌하려는 이 미사가 제 생애 마지막 미사인 듯 봉헌하게 하십시오.”
매일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바지를 입고 허리띠를 맬 때 마다 짧은 화살기도를 되풀이해야겠습니다.
“주님, 오늘 이 하루가 제 생애 마지막 날인 듯 살게 하소서.
만나는 모든 인연을 마지막 만남인 듯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지상에서 완수하는 마지막 임무인 듯 정성껏 임하게 하소서.
오늘 매 순간 주님 은총 안에 깨어있는 하루를 살게 하소서.”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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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 12,35-38
근심, 우울, 무기력, 공황: 사막 위의 펭귄
오늘 복음은 ‘깨어있음’이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라고 충고하십니다.
당시 혼인 잔치는 일주일 동안 지속하기도 하였기에 종은 일주일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하다시피 하여 언제 올지 종잡을 수 없는 주인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깨어있음’을 넘어서서 ‘삶의 활력’에 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이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시중드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은 종의 배고픔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자신이 따르는 뜻의 주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먹어야 힘이 나는데, 그 힘은 깨어 주인의 뜻을 따를 때
그 주인에게서만 온다는 것입니다.
2019년 6월, 방송, 연극, 영화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전미선(50)씨가 갑자기 극단적인 선택을 했었습니다.
출연 예정이었던 드라마도 있었고 송강호씨와 함께 한 영화 개봉도 앞둔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하던 30년 차 중견 배우가 무엇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그녀는 우울증 치료중이었습니다.
당시 전미선의 소속사는 전미선의 사망 원인에 대해 “평소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았지만 슬픈 소식을 전하게 됐다”며 “충격과 비탄에 빠진 유가족을 위해 확인되지 않은 루머에 대한 자제를 부탁드린다”고 당부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전미선씨는 “죽기 전까지 연기하고 싶다”,
“기억력이 없어질 때까지 연기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우울할 이유도 없는데 남편과 자식까지 남겨두고 극단적 선택을 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본인만 알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고인이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우울증 증세가 있는 것을 알아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중견 배우로서 이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이고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이 결실을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삶의 에너지를 충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은 생명체가 마치 신이나 된 것처럼 삶의 에너지를 자신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처럼 믿게 합니다.
저절로 진화했으니 에너지도 저절로 충전되는 것처럼 믿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맘만 먹으면 우울함과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렇게 진화론을 믿는 일부 상담가들도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더 큰 무기력과 절망으로 이끌 수도 있음을 간과합니다.
누군가가 무기력은 ‘사막 위의 펭귄’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펭귄인데 사막 위에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때 무엇을 먹어야 할지 걱정이 앞섭니다. 근심, 초조함의 증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막과 같은 환경에서 음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 우울하게 느껴집니다.
삶의 에너지가 소진되지만, 음식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상담을 받으면 끊임없이 움직이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음식을 발견할 것이라 말해줍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 써서 살아갈 힘을 찾지만,
사막에서는 좀처럼 펭귄의 음식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어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을 하게 합니다.
만약 운 좋게 오아시스라도 발견을 하면 상담가는 “그것 보세요, 되잖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펭귄은 오아시스에서도 오래 살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충고는 끊임없이 한 방향으로 걷다 보면 탈출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향을 알려주지 않으면 사막을 헤매다 끝납니다.
혹은 적도만 걷다가 지쳐 쓰러집니다.
펭귄은 온도가 낮은 쪽으로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먹이가 충분하고 살기에 적당한 곳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사는 환경은 내가 따르는 ‘뜻’입니다.
나의 뜻일 수도 있고, 부모의 뜻일 수도 있고, 나라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누구의 뜻이든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태어날 때의 자기 뜻만을 따른다면 모기나 기생충처럼 자기만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관계를 맺지 못하고 공동체에 속할 수도 없게 됩니다.
만약 부모의 뜻만을 따른다면 착한 마마보이로 자랄 것입니다.
나라의 뜻만을 따른다면 애국자라 불릴 수도 있지만, 국수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에너지가 소진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따르는 뜻을 주는 그 대상이 자신에게 그 뜻을 이룰 양식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양식을 줍니다.
그 양식 안에 자기 뜻도 함께 넣어줍니다.
뜻이 내가 사는 환경이고 그 뜻을 주는 대상이 에너지도 줍니다.
하지만 피조물이 피조물을 배부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몸은 배를 불려도 영혼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영혼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순종해야 할 뜻은 나를 만든 이의 뜻이어야 합니다.
내가 사람인데 늑대의 뜻을 따른다면 늑대가 주는 양식을 먹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늑대 수준밖에 살지 못합니다.
그러면 다 채워지지 않은 배고픔으로 끝없는 공허함과 배고픔을 느낍니다.
아이는 태어나서 부모의 뜻을 따르고 부모가 주는 양식으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춘기를 넘으면 이제 새로운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 뜻을 주는 대상은 반드시 자신을 창조한 이여야 합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충전시킬 수 있는 능력은 그것을 만든 인간뿐이고, 자동차에 기름을 넣고 운전할 수 있는 대상도 인간뿐입니다.
만든 대상을 만나지 못하면 뜻도 알지 못하고 에너지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면 무기력과 우울증으로 겉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믿어도 속으로는 배고픔에 쓰러지고 맙니다.
인간은 신이 아닙니다.
창조자를 만나지 않으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은 자신의 영혼도 만든 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영혼이 배고프면 영혼을 만든 분을 찾아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의 양식이 충분한 곳에 살게 됩니다.
그분의 뜻을 따를 때 펭귄은 사막에서 벗어나 남극에 머물게 됩니다.
뜻을 바꾸어야 먹이가 풍부한 환경에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르는 이에게 당신 손수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이가 50대가 되면 지금까지 추구해 온 모든 것에서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옵니다.
많이 이뤄놨어도 배가 고픕니다.
그러면 사막에서 펭귄이 먹이를 찾는 것처럼 또 고생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음식을 주지 못하는 누군가의 뜻을 따르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따르는 그 뜻을 바꾸지 않으면 사막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 지배하게 만듭시다.
그러면 내가 하느님 나라에 있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먹고 마실 것이 풍부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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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이영근 신부님.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세상걱정과 하느님 나라’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는 부분을 건너뛰고, 오늘 <복음>은 “깨어있어라”는 종말에 대한 주제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여기에서, 깨어있음의 표시는 두 가지입니다. 곧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과 ‘등불을 켜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스카 음식을 먹을 때 삼가 조심하라고 일러주신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그것을 먹을 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라”는 것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허리에 띠를 매듯이 일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경계하고 있는 것이요(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곧 임을 맞아들여 시중 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루카 12,39) 모르듯, “생각하지도 않을 때 사람의 아들이 올 것”(루카 12,40)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는 것은 마음과 지성에 등불을 밝히고 기운차게 깨어 있으라는 것이요(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선의 행실로 등불을 밝힘을 의미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 곧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임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불을 밝혀두고, “빛 속에 있어라”는 말씀이요, 그것이 빛을 맞이하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빛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 빛 속에 있는 것이 “깨어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119,105)에서는 “말씀은 발의 등불”이라고 하니, 말씀의 등불을 밝히고 반추하며(되새기며) 빛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 있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여기서 ‘깨어있음’은 단지 잠들어 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이가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는 것이 깨어있음이요, 임을 희망하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사실,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임께서 기다리는 이 안에서 이미 빛을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 기다리는 이는 이미 빛 속에 있는 이요, 그들 안에 이미 등불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음”은 이미 품고 있는 임으로 말미암아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곧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 빛으로 당신을 봅니다.”(시 36,10).
그런데 이 비유의 주인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종이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이 당연하거늘, 오히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인님은 그러한 분이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복된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풍성한 잔치 상을 차려주십니다. 바로 이 미사의 성찬을 차려주시니, 주님 사랑에 깊이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주님!
깨어있게 하소서!
단지 잠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임을 기다리게 하소서!
기다림이 이미 축복임을 알게 하소서.
그리워하는 임을 이미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망을 품고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임이 나를 이미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이 날 그리워하는 희망 안에 깨어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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