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八章 갈 길은 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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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산 중턱은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해남도의 한여름은 화로의 불길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글이
글 타오르는 땡볕도 오지산 전부를 익혀버리지는 못하는 듯
했다.
꽈아아……!
계곡 물이 마치 범람하는 강물처럼 거세게 흐른다.
깊은 곳도 꽤 많아서 자칫 수영이라도 하겠답시고 뛰어들었
다가는 익사(溺死)하기 딱 알맞다.
리아는 오지산에 들어오면서부터 생생한 활기를 되찾았다.
그런 걸 보면 비가보에 있는 여족인 중년 부부는 산에서 생활
한 듯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어 알 수 없
었다.
"히히히! 아씨, 여기 또 있어요. 이 놈은 굉장히 커요."
리아가 개울물에서 가재를 잡아 올렸다.
리아의 말대로 가재는 꽤 컸다.
"조심해. 깊은 곳에는 가지말고."
"히히! 아씨, 걱정 말아요. 나 수영도 잘한다고요."
"그래도 깊은 곳에는 들어가지 마."
리아는 유소청의 말을 귓가로 흘려버리고 개울 속에 틀어박
힌 바윗돌을 들어내기에 여념 없었다.
'데려오기를 잘했어.'
요즘 들어 유소청에게는 리아가 큰 위안거리였다.
리아를 보면 외팔이 중년인이 떠오르고 일밖에 모르는 듯한
중년부인이 떠오르고, 적엽명이 떠오른다. 그랬다. 비가에 있
을 때 그녀는 늘 적엽명과 함께 했다. 혹여 둘 사이에 방해꾼
이 있다면 바로 리아.
유소청은 흐뭇한 얼굴로 리아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열 살 배기 어린 소녀다운 천진함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부러웠다. 유소청의 어린 시절은 늘 검과 함께 했다. 그녀
도 개울물에서 마음껏 멱을 감고 심었지만, 엄격한 가법이 모
든 행동을 통제했다.
유교는 진시황(秦始皇)이 나라를 통일한 다음 분서갱유(焚
書坑儒)라는 사상 초유의 박해를 받았다. 그러던 것이 한(漢)
무제(武帝) 때에 동중서(董仲舒)가 건의하여 국교(國敎)가 되
었다.
유가에서 전승하고 있는 유교는 그 시절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학자는 오경(五經:역경·서경·시경·예기·춘
추)을 읽는 것이 도리라고 알고 있는.
시절은 많이 변했다.
전한(前漢) 때는 1경(經)에만 치중했고, 후한(後漢)시대에
는 경서들을 종합하여 주석(註釋)하는 훈학(訓學)이 성행했
다.
당나라 때에는 한유(韓愈)가 숭유척불(崇儒斥佛)을 외쳤다.
남송(南宋)의 주자(朱子)는 주자학(朱子學)을 확립하며, 오경
대신 사서(四書:대학·논어·맹자·중용)를 존중하지 않았는
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련만 해남
도 유가는 오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씨, 이제 구워먹어요."
"그래, 구워먹자."
대답은 쉽게 했지만 유소청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잔가
지를 주워오는 일이 고작이었다. 산에서 생활하는 일은 그녀
보다 어린 리아가 훨씬 나았다.
리아는 능숙한 솜씨로 가재 등껍질을 벗겨낸 다음 모닥불
위에 올려놓았다.
하얀 속살을 지닌 가재는 곧 불그스름한 색으로 변해갔다.
"맛있겠는데?"
"얼마나 맛있다고요."
리아는 한껏 어깨에 힘을 주며 바싹 오그라듦은 가재 한 마
리를 건네주었다.
"이제 먹어도 되는 거야?"
"네. 머리까지 먹어도 되는데 징그러우면 살만 발라먹어
요."
가재는 맛있었다. 그동안 먹어왔던 어떤 음식보다도 입에
착 달라붙었다.
근 스무 마리에 이르던 가재는 눈 깜짝할 순간에 바닥나 버
렸다.
"또 잡을까요?"
"아니야. 오늘은 리아 덕분에 포식했구나."
"히히! 아씨, 말씀만 하세요. 언제든지 잡아드릴께요."
"그래."
"아씨, 개미 알 좀 드실래요?"
"개미 알?"
"시큼한 것이 얼마나 맛있다고요."
"어머, 싫다 애."
"그렇게 맛있는 걸 왜 싫어하시지?"
유소청은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이제 그만 내려가자."
"내려가면 뭐해요? 심심하기만 한데……"
"글 가르쳐 줄까?"
"글요? 히히! 그럼 좋아요. 내려가요."
리아는 어린아이치고는 특이하게 글공부를 좋아한다. 청천
수가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쳐 주었는데, 한 달만에 완전히
체득하고 말았다.
요즘 리아는 시경(詩經)을 읽는다.
'잘 올라왔어.'
유소청은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아 한결 개운했다.
수련총 연무장(練武場)은 무예를 수련하며 내지른 고함소리
로 시끌벅적했다.
유소청은 리아의 손목을 잡고 연무장을 빙 둘러 갔다.
"쳇! 이거 빨리 통령이 바뀌던가 해야지……"
누군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부러 들으라고 한 소리.
유소청은 못들은 척 하고 발길을 옮겼다.
수련총 무인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반감이 무엇 때문인
지 아는 까닭이다.
첫 번째는 리아다.
한인들의 긍지라고 할 수 있는 해남파에, 그것도 무예를 수
련하는 연무장에 여족 계집을 데리고 나다니는 것이 못마땅한
게다. 못마땅한 정도가 아니라 수련총 무인들은 흡사 모욕이
라도 당한 듯이 분개했다.
"연무장에 여족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시다니 제정신으로 하
시는 행동입니까?"
"저희들이 워낙 미숙해서…… 자칫 연무 중에 다치거나 죽
일 지도 모르겠군요. 만약 그런 사태가 벌어져도 별 문제가
안 생기겠죠? 그런 보장을 해주셔야만 마음놓고 무공을 수련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흑구(黑狗)를 묶어둘까요? 이것 참 그럴 수도 없고……"
흑구는 현임 수련총 통령인 전방이 중원에서 들여온 개다.
전신에 까만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흘러서 보기는 좋지만 맹수
에 가까울 만큼 사납다. 전방은 수련총 통령을 유소청에게 물
려주었지만 흑구는 아직 데려가지 않았다. 정식으로 자리를
물려준 것은 아니기에.
흑구는 덤벼들었다.
리아는 겁에 질려 살려달라고 소리치면서 도망쳤지만 흑구
를 벗어날 수 없었다. 리아는 종아리를 물렸다. 흑구는 살점
을 뜯어내겠다는 듯 미쳐서 날뛰었고, 리아는 울음 반 고함
반으로 대항했다.
주위에는 수련총 무인들이 많았지만 열 살 배기 어린 아이
가 흑구에 물리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유소청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으면, 리아는 흑구에 물려죽
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살점이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큰 상처였다. 흉터도 남을 것 같았다. 리아는 평생 수련총에
서 당한 일을 잊지 못하리라.
"비가로 돌아갈래?"
리아는 울먹이면서 엄마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행낭을 꾸리기 시작하자 리아는 생각을 바꿨다.
"아씨 곁에만 있을 래요.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유소청은 리아를 꼭 보듬어 안아주었다.
리아를 돌려보내기도 수월치 않다.
유소청은 근신(謹身) 상태였다. 명목은 무인이 자신의 검을
내준 것과 떠도는 소문이 좋지 않다는 것이지만 적엽명과의
관계를 차단하기 위한 조처가 아니고 무엇이랴.
리아를 비가로 돌려보내려면 믿을만한 사람을 붙여줘야 하
는데 본문에는 그런 사람이 없으니…… 영리한 리아는 유소청
의 생각을 읽고 생각을 바꾼 것이 틀림없으리라.
유소청은 아무 생각 없이 어린아이를 사지로 데려온 자신을
자책했다. 자신은 그렇더라도 황함사귀와 무자음사는 왜 가만
히 있었을까. 그들은 이런 사태를 읽었을 텐데.
리아가 받는 냉대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유소청은 수련총 무인들뿐만 아니라 해남파 무인들 전체의
공격대상이 되어버렸다.
겉으로는 공손한 말로 대하고 있지만 말속에는 언제나 가슴
을 저며내는 비수가 자리했다.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던가.
비웃음, 조롱, 멸시, 도전…… 온갖 좋지 않은 감정들이 말속
에 틀어박혔다.
한마디로 해남오지 수련총 통령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
생아 놈과 몸을 섞은 더러운 년'쯤으로 보고 있다.
전가주가 죽은 다음부터 해남파 무인들이 드러내는 적엽명
에 대한 적의는 상상을 초월한다.
무인들은 또 강성오가의 가주들과 해남오지, 다른 삼십육검
도 원망하고 있다.
전가주가 죽었는데 모두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인데……
그런 원망은 자신들끼리라도 뭉쳐서 여족 사생아 놈을 베어버
리자는 쪽으로 의견이 결집되는 듯 하다.
그 모든 원망과 원한이 유소청과 리아에게 쏟아지고 있었
다.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서려던 유소청은 잠시 흠칫거렸다.
"이제 오나? 어서 와. 한참 기다렸지. 오……! 그 계집
은…… 맞아. 얼굴이 익어. 그 여족 놈의 새끼군."
한광은 탁자 위에 발을 올려놓고 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유살검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다. 눈빛은 들개처럼 빛난
다.
유소청은 소름이 쫙 끼쳤다.
마주 치고 싶지 않은 사람…… 전에는 이런 감정까지는 못
느꼈는데 어쩐지 날이 갈수록 한광에게는 정이 붙지 않는다.
그녀는 리아를 데리고 서가(書架)쪽으로 걸어갔다. 한광과
마주 앉기 싫어서였다.
"어쩐 일이에요? 폐관수련을 한다고 들었는데……?"
"수련할 게 뭐 있나?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소문을 그렇
게 흘렸지. 혼자 있고 싶었거든."
"차 한 잔 드려요?"
"아니. 지금은 싫어."
"……?"
"차는 나중에 마시지. 그대와 혼인하는 날."
순간, 유소청은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듯 했다.
'기어이……'
"오늘 유가주가 오실 거야. 아버님을 만나서 혼인에 대한
상의를 하겠지? 혼인예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무엇이 좋을 지
고민 좀 했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적엽명의 목은 어떨
까?"
"조금 피곤하군요.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듣죠."
"피곤? 아!"
한광은 몸을 일으켰다.
예상외로 그는 고분고분 방을 물러나려는 것 같다. 한광은
늘 이런 식이다. 마음이 차디차게 식어있다는 것 같은데 입으
로는 열정을 말한다. 간절히 가질 마음이 없으면서 놓지도 않
는다.
그런 면이 한광을 냉정한 이성의 소유자로 생각하게 하는
모양인지 한광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뛰어난 용모와
말쑥한 의복도 한 몫을 하고 있지만.
"한 마디만 더 할까?"
"하세요."
"나는 내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성결한 여자이기
를 바래. 몸은 물론 마음도. 그렇지 않으면 나는 슬퍼져."
"그런 사람은 깨끗한 가요?"
"물론."
한광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내 영혼은 극히 말고 투명해. 육체도 건강하고 깨끗해. 나
는 더러운 것을 가장 싫어하거든."
한광이 돌아간 다음 유소청은 생각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
하니 앉아있었다.
혼인을 막는데 도움이 될 사람은 세 사람이다.
장문인, 그러나 장문인은 안 된다. 장문인은 자신과 한광과
의 혼인을 바라는 쪽이다.
아버님, 아버지도 안 된다. 아버님이 장문인을 만나 혼인을
상의한다고 해서 절연한 부녀관계가 회복된 것은 아니다. 아
버님은 고집이 강하시다. 혼인을 서두르는 것은 딸 때문에 유
가 전체가 욕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지 부녀간의 정
때문이 아니다.
하파도 있다. 해남파의 모든 행동 뒤에는 가물함 수좌인 하
파가 도사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본문 귀환 조
치도, 이번 혼담도 하파의 머릿속에서 나왔으리라.
사면초가(四面楚歌), 유소청은 찾아갈 곳이 없었다.
* * *
한광은 해남파를 빠져나와 여모봉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는 불쾌했다.
유소청은 다른 사내의 손때가 묻은 여자들에게서 맡을 수
있는 불결한 냄새를 풍긴다.
끈적끈적하고 생선이 썩는 냄새보다도 더욱 고약한 냄새.
한광은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렀다.
유소청같이 불결한 여자를 볼 때마다 생기는 현상이다.
그 더러운 여자의 마음은 한 사내의 영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것은 육신을 더럽힌 것보다도 더 더럽다. 육신이 불결한
것은 물이나 절절한 반성으로 씻어낼 수 있지만 마음이 불결
한 것은 무엇으로도 씻어내지 못한다.
다른 여자 같았으면 벌써 성스러운 땅에서 추방해 버렸으리
라.
한광은 고민스러웠다.
유소청 만한 여자는 찾기 힘들다. 그게 한광을 고민에 빠지
도록 만들었다.
미모 따위에 현혹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
할지라도 늙으면 보기 싫게 된다. 죽으면 한 줌 흙이 되는 것
도 똑 같다. 천하제일 미녀를 얻는다 할지라도 몇 년만 같이
살면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타고 난 재능만은 무시할 수 없다.
여자에게는 무공을 전수하지 않는 해남도에서, 더군다나 법
도가 엄격하다는 유가에서 절정검법인 비천검법을 전수 받았
다는 사실만으로도 여걸임이 입증된다.
유소청은 상승검법을 익히기 위해 기를 쓴 적이 없다. 유가
주가 그녀의 재질을 알아보고 특단의 결정을 내렸을 뿐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질을 타고 태어났다 할지라도 여자로 태어났
으면 무공을 전수하지 않는 해남파……
유소청은 여걸이 아니다.
유소청의 성격은 야심이나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순종할
줄 알고, 효심이 깊고, 사람을 편하게 해줄 줄 아는 여자……
풋풋하고 청초한 들꽃 같은 여자다.
그런 여자는 지조(志操)라는 말을 이상하게 해석한다. 일단
사내에게 마음을 주면, 그 사내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될 악
인이라 해도 믿고 따라주는 것을 부덕(婦德)으로 안다.
적엽명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도, 살인이라는 최대의 결정을
내리면서까지 적엽명을 따르는 것도 다 그 때문이리라.
한광은 그 점이 아쉬웠다.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고나 할까?
적엽명과 유소청이 만나는 것을 방치한 것이 잘못이다. 빼
앗으려면 그 때 빼앗았어야 옳다. 적엽명에게 마음을 주기 전
에.
지금은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럴 생각도 없다. 여자 한 명 때문에 원대한 이상을 늦춘
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육체만 빌리면 된다.
해남오지라는 밭에 자신의 씨앗을 심어 자란 곡물은…… 곡
물을 수확하기만 하면 밭은……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곡물을 수확하면 밭은 갈아
엎어야겠지. 유소청, 네 뼈와 피를 아이에게 물려줘야 한다.
뛰어난 놈을 낳아야 돼. 그러면 네 죄를 용서하고 극락에서
살 수 있게 해주지.'
여모봉 초입에 들어선 한광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대부분이 불사(佛舍)를 찾는 사람들이다. 나약한 인간
들…… 쇳조각으로 만든 불상(佛像)이 무슨 힘이 있다고 밤을
새며 손바닥을 비비적거리는지.
혼자서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는 인간들이다. 쇳조각에게
라도 기원을 해야만 두 발을 뻗고 잘 수 있는 인간들이다.
얼마나 불쌍한가.
한광은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부부 한 쌍을 주목했
다.
여자는 아이를 안았고, 사내는 옆에서 무엇인가 말을 해주
고 있다.
여자가 까르르 웃는다.
행복한 모습이다. 저들 부부에게는 다정함이 있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은 같이 걷는 모습만 보고도 알 수 있
다. 여인이 안고 있는 아이는 사랑의 결정체이리라. 아이가
튼튼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두 남녀는 삶의 보람을 찾으
리라.
그러나……
그들은 완전하지 않다.
그들은 불사를 찾았다. 무엇을 기원했을까? 가족의 평안?
가족을 지킬만한 힘이 없단 말인가?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도
록? 말도 안 된다. 아이를 튼튼하게 키울 자신이 없으면 차라
리 낳지 말았어야지. 그럼……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리다. 몸은 어른이되 마음은 어린아
이와 다를 바 없다. 쇳조각에 기원을 할 정도라면 중한 병일
게다. 의원이 말했겠지. 가망 없으니 준비하라고. 바보들……
그럴 때는 편히 보내주는 것이 도리인데, 쇳조각에 손이나 비
벼되다니.
한광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들 부부를 뒤쫓았다.
"이게 누구야? 한광 아니냐? 넌 폐관수련 중이라고 들었는
데?"
사내가 반색을 했다.
"불사에 다녀오시더군요."
"응? 하하! 봤나? 하하하! 이거 영 쑥스럽군. 이 사람아,
그럼 그 때 아는 척을 할 것이지……"
한광은 옅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하하! 이십 년 전 오늘 이 사람을 절에서 만나지 않았나.
하하!"
사내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한광은 검을 뽑으려다 급히 생각을 바꿨다.
불공을 드리고 오는 길이 아니란 말인가. 절에서 아내를 만
난 기념으로 한바퀴 돌아보고 오는 길? 그렇다면 그건 세상에
살아남아서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마음껏 만끽하며 살 자격
이 있다. 여흥 삼아 추억이 서린 장소를 찾아본다는 것은 강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다.
"그리고 늦둥이를 봐서 아들놈 자랑도 할 겸 우리 부부 백
년해로(百年偕老)하게 해 주십사 빌고 왔지. 하하!"
한광은 짙은 웃음을 뱉어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창화항으로 통하는 관도는 늘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도 오가지 않는다
는 것은 하늘이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지 않은가.
스르릉……!
한광은 검을 뽑아들었다.
섬뜩한 광채가 햇살을 받아 번뜩인다.
"아!"
여자가 옅은 신음을 뱉어냈다.
사내의 안색도 서서히 굳어졌다. 그리고 서서히 노기(怒氣)
가 떠올랐다.
"이게…… 무슨 뜻인가!"
"백년해로는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
"자신을 믿어야죠. 강성오가 범가의 무인이라면 당연히 자
신을 믿었어야죠. 노해검신(怒海劍神) 범사(凡赦)이라는 이름
이 아깝지 않습니까? 쯧쯧! 약함을 숨기고 살아오시다니 힘드
셨겠습니다."
사내의 이름은 노해검신 범사다. 남해삼십육검 중 일인이며
건곤검 한혁, 금잔서생 유광, 화혈검 전방, 노신룡(怒神龍)
석문(石紋)과 함께 십이대 해남오지의 일원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현직 가물함 통령이다.
범사는 한광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소
리를 하는 것인지. 하지만 자신을 모욕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
다.
"한광…… 건방져졌구나!"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죽기 전에는."
"뭣이!"
이제는 분명히 알아들었다. 원인은 모르지만 한광은 살검을
뽑아든 게다.
"통쾌하게 가십시오. 범통령께서는 사검법( 劍法)에 능통
하다고 들었습니다. 사어( 魚:상어)의 공격…… 한 번 보겠
습니다. 얼마나 강한지."
스르릉……!
범사가 검을 뽑았다.
해남파 무인들은 도전을 사양하지 않는다. 상대가 자신보다
무공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면전에서 검을 뽑아들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누구든 함부로 검을 뽑지 않는
것이 불문율.
중원에는 성격이 편협한 사람들이라고 소문났지만 해남파
무인들은 진정한 강함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기백에서 나온
다고 믿고 있다.
기백이 있으면 죽어서도 산 것이요, 기백이 없으면 살아도
죽은 것이다.
범사와 한광은 일 장 거리를 두고 검을 마주 대했다.
범사의 아내는 중성오가 중 일가인 악가주 악빈(岳彬)의 딸
이다.
그녀는 무공을 모르지만 무가에서 자랐고, 무가로 시집온
사람. 사태를 짐작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에
놀람이나 당혹함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만큼 남편을 믿고 있
는 것이리라.
"도로도로 지미 옴 못다하 구루우자 사바하……"
한광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의
그의 눈이 돌아가며 검은 동공이 없어졌다.
흰자위뿐인 눈!
"탈혼검!"
범사가 경악을 터트렸다.
쉬익!
그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날렸다. 한광이 접신 의식을 끝내
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차앙!
범사와 검과 한광의 검이 얽혀들었다. 순간,
"헉!"
범사는 경악을 터트렸다.
한광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하늘을 가려버리는 착각이 들었
다. 머릿속이 텅 비어지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광
과 싸우고 있다는 것도, 뒤에 아내가 늦둥이를 데리고 지켜보
고 있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기억 저편에 묻혀버렸다.
쉬익! 하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지만 범사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소리처럼 여겨졌다.
"커억!"
범사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심장이 불로 지지는 듯 화끈거렸다. 그리고 그제야 제 정신
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싸움은 끝난 뒤였다.
"사, 사이(邪異)…… 한 검…… 법……을……"
"섭섭한 말씀. 이것이야말로 최강의 검법인 것을."
"허……! 하…… 하……! 한가는…… 그대 때문에…… 망할
것."
범사는 비칠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아내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 점점 더 흐릿해진다.
쿵!
범사의 신형이 무너져버렸다.
악야(岳惹)는 범사의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소리지르거나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끝없는 설움이 목
구멍을 타고 솟구친다.
검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니 죽음도 편안하게 받
아들여야 한다.
알고 있다. 하지만 서러운 걸 어떡하랴.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인데 이제 영원히 보지 못하고,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귀여운 아들 응석도 받지 못하고…… 하필이면 부처님께 백년
해로를 기원한 날 가시다니.
한광은 피묻은 유살검을 들고 악야의 등뒤로 돌아갔다.
악야는 한광의 뜻을 알았다.
"우리를 죽이는 이유가 무엇이냐!"
악야는 하늘이 쩌렁 울리도록 일갈을 내질렀다.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어서."
"뭣이!"
"얼마나 두려우셨습니까? 사람은 나약한 자신을 느낄 때 절
대적인 무엇에 매달리게 되어 있죠. 이제 겁내면서 살 필요
없습니다. 저 세상에서 편안하게 사십시오."
"무슨 헛소리를……"
악야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뒷목이 화끈하다 느낀 순간, 그녀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
리고 그 순간은 그녀의 목이 범사의 배 위로 굴러 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파아앗!
악야의 몸에서 피가 솟구쳐 올라왔다.
한광은 무너지는 악야의 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제
이들 부부는 그 누구에게 기원할 필요도 없는 곳에서 행복하
게 살리라.
또 하나 만족한 점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탈혼검이 강해져간다. 하가주를 죽일 때보
다 훨씬 강해졌다. 탈혼검을 만난 사람들은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탈혼검을 피맛을 볼수록 강해진다. 피맛을 볼수록 주술을
외우면 단전의 진동이 강해지고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솟구친
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연공수련이다.
그는 땅바닥 한쪽에 곱게 뉘어져 있는 아이에게 눈길을 돌
렸다.
"으앙! 으앙……!"
아기는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 자지러지게 울어 젖힌다.
한광은 지나가면서 슬쩍 유살검을 흔들었다.
그것으로 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