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고독이 가져다준 속수무책을 경험하고 나자, 나는 더욱더 책에 얽매이게 되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혹은 조심해야 하는지,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낯선 나라에서 내 삶이 어떤 길을 택하게 될 것인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이 책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낯선 오지에서 나를 인도해 줄 안내서를 읽듯,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책을 읽어 나갔다.
도와 달라고, 내가 아무런 사고 없이 안전하고 무사하게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인생이 이 안내서 속에 들어 있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단어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나의 갈 길을 찾으려 애썼고, 한편으로는 완전히 길을 잃게 만들 수 있는 경이로운 상상들을 하나하나 꿈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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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내가 상상하지도, 생각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했던 어떤 세계가 점점 더 내 존재 속으로 침투하며 내 영혼을 사로잡았다.
내가 알았거나 한때 고민했던 모든 것은 사소한 것으로 변했고, 예전에 내가 몰랐던 것들은 숨어 있던 곳으로부터 하나씩 나타나 내게 신호를 보냈다.
이것들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했다 해도,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사물에 대한 관심이나 호기심이 사라져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내 앞에 펼쳐진 새로운 인생에 대한 기대와 흥분 때문에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관심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엄청나고 다양하면서도 복잡한 가능성들이 일종의 공포와 같이 변해 버렸을 때,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기대에 들떠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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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책을 읽는 동안 나의 시선은 책의 말들로, 그리고 책의 말들은 나의 시선으로 변했다. 그리고 눈부신 빛 때문에 내 눈은 더 이상 책 속의 세계와 바깥 세계 속의 책을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다.
마치 온갖 종류의 색깔들과 사물들을 모두 갖춘 하나의 완전한 세계가 책 속에 존재
하는 단어들 아네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즐겁게 책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처음에는 속삭이다가, 그다음엔 두드리듯, 그다음엔 막무가내로 책이 내 머릿속에 욱여넣으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처음부터 내 영혼의 심연 속에 존재해 왔음을 나는 읽을수록 깨닫게 되었다.
책은 오랫동안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사라진 보물들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나는 행과 행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찾아낸 것들을 이제는 나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 어딘가에서는 나도 이것과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실제로 동트기 직전의 여명 속에서 천사처럼 빛나는 죽음을 본 것은 책에서 묘사된 세계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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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의 미래가 완전히 내 손에 달려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지만, 지금 나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책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책은 일종의 비밀이나 죄악처럼 내 존재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을 뿐 아니라, 나를 마치 꿈속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말문이 막힌 상태에 빠뜨려 놓았다.
나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나와 닮은 영혼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에게 말을 걸었던 꿈을 찾을 수 있는 나라는 또 어디에 있는가?
나와 같이 책을 읽은 다른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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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삶이 정말로 내가 책 속에서 읽은 것과 같다면, 정말로 그런 세상이 가능하다면, 사람들이 왜 기도를 하러 사원에 가야만 하고, 커피숍에서 쓸데없는 수다나 떨며 인생을 낭비하고, 너무나 지루해서 죽어 버리지 않기위해 매일 저녁 티비 앞에 앉아 있어야만 하고, 혹시 조금이라도 재미있는 일, 예를 들면 자동차가 쌩 하고 지나가거나, 말이 히힝 하고 울거나, 거리에서 술주정꾼이 행패를 부리는 일이 일어날까 봐 커튼을 완전히 치지 못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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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경청을 하고 있었나? 아니면 다름 학생들처럼 듣는 척만 하면서 공과대학 토목공학과 소속의 학생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잠시 후, 나에게 익숙한 과거의 세계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라고 느껴졌을 때, 나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혈관에 약 기운이라도 도는 것처럼 머리가 혼미해졌다. 그러고는 책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힘이 목덜미에서 온몸으로 천천히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고 전율했다.
새로운 세계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을 없애고 현재를 과거로 바꿔 놓았다.
내가 보거나 만졌던 모든 것들은 애처로울 정도로 옛것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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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방, 집, 세계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야. 더 이상 내가 속한 곳이 아니야. 내가 책을 처음 본 게 네 손에 들려있을 때였으니, 너도 분명 책을 읽었겠지. 네가 여행한 세계에 대해 말해 줘. 내가 그 세계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줘. 우리가 왜 아직도 여기 있는지 설명해 봐. 왜 새로운 세계가 내 집처럼 익숙한지, 내 집이 새로운 세계처럼 낯선 건 또 어찌된 일인지 말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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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지금 내게 말한 것들을 메흐메트에게도 말해야 해. 그는 책 속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람이야. 그곳에 갔다 왔기 때문에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알겠어?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도 그곳에 갈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아.
끔찍한 일을 겪고 난 후로 믿음을 잃어버렸거든. 그와 얘기해 보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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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는 아주 평범한 날에, 주머니 속에는 사용한 극장표와 담배꽁초가 들어 있고, 머릿속에서는 신문기사와 자동차 소음, 구슬픈 말들이 서로 부대
끼는 가운데, 매일매일의 일과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갑자기 자신이 엉뚱한 장소에 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발을 내디뎠던 그곳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유리창 뒤에 서 있을 때, 세상에서 가장 옅은 색보다도 더 옅은 색 속으로 녹아 없어졌다.
당신이, 발을 디딜 그 어떤 땅이나, 그 어떤 세계로, 현실로 돌아오길 원한다면, 여자를, 그 여자를 안고, 그녀의 사랑을 얻어야만 한다.
숨 가쁘게 고동치는 나의 심장은 어쩌면 그리고 빨리 이런 오만함을 배웠는지!
나는 사랑에 빠졌다.
측정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나의 심장에 굴복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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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는 그걸 믿었어. 그 세계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 끊임없이 버스를 타고 이곳저곳, 이 도시에서 저 도시를 돌아다녔어. 그 나라를, 그 사람들을, 그 거리들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내 말을 믿어. 그 길의 끝에는 죽음 말곤 아무것도 없었어. 그들은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이지. 지금도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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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여, 네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 이 죽은 도시의 공원을 덮고 있는 눈과 재 위에 굶주린 개들과 넝마주이들이 남긴 흔적 속에서 너의 발자국을 본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어.
그런데 이틀 전 노점상에서 산 책이 비밀처럼 내게 가르쳐 준 새로운 세계를 목격하다록 정해져 있던 방식이 정말 이것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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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습들은 일련의 잘못 해석된 표시와 맹목적으로 따르는 습관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진정한 세상과 인생은 이것들의 안쪽이나 바깥쪽, 혹은 어떤 곳이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슬픈 진실을 알게 되었다.
자난 말고는 그 누구도 나를 인도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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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한참 흐른 후, 모든 것이 한순간에 절대적인 고요 속으로 녹아 버리자, 갑자기 눈앞에 환상이 나타났다.
그러자 택이 내 영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었다.
펼쳐진 책이 뿜어내는 빛을 향해 내 얼굴을 고정하자, 내 영혼은 마치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공책의 표면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책에 쓰여 있는 하나하나가 내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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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그 방으로부터, 집으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어머니의 냄새로부터, 내 침대로부터, 22년 동안 살아온 내 인생으로부터 달아나야만 했다.
새로운 인생은 그 방을 떠나야만 시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아침마다 그 방을 나와서 밤마다 그 방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한, 자난이나 그 나라, 둘 중 어느 쪽에도 가까워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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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내게 설명한 것들을 더 많이 옮겨 적을수록 내가 가야 할 곳에 대한 짓기이 점차 내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왔고, 나는 내가 서서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느끼며 행복해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뿌듯해하는 여행자처럼, 내가 베낀 페이지들을 보고 있을 때, 나는 내가 변해 가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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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많은 버스에 올라탔고, 수많은 버스에서 내렸다.
수없이 많은 터미널을 돌아다니며 버스에 올랐고, 버스에서 잠을 잤다.
밤낮으로 버스를 탔다.
작은 마을에서 버스에 타고 내렸다.
며칠 동안 어둠 속을 달리기도 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 젊은 여행자는 미지의 영역으로 가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나 확고해서, 그를 새로운 세계의 입구로 데려다줄 길에서 쉼 없이 이동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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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았던 것이 이것이었고, 내가 원했던 것 또한 이것임이 분명했다.
내가 찾은 것을 어떻게 가슴속에서 느꼈던가. 평온, 잠, 죽음, 시간! 나는 그곳에도 존재했고, 이곳에도 존재했다. 나는 평안 속에도 있었고 유혈이 낭자한 전쟁 속에도 있었다. 유령 같은 불면 속에도 있었고 끝없는 잠,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과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영화처럼 슬로모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망자들의 세계로 떠난, 물병을 손에 쥔 젊은 차장의 시체 옆을 지나갔다. 나는 뒷문을 통해 어두운 밤의 정원으로 나갔다.
끝없이 황폐한 정원의 한끝은 깨진 유리로 덮인 아스팔트였고, 보이지 않는 다른 한끝은 되돌아갈 수 없는 나라였다.
몇 주 동안 천국과도 같은 따스함으로 흔들거리던 고요한 나라가 바로 이곳이라고 믿으며 밤의 벨벳 같은 어둠 속으로 두려움 없이 걸어갔다. 깨어 있으나 꿈속을 걷는 것처럼, 걷고 있으나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처럼.
어쩌면 내 발이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이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쩌면 단지 그곳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오직 내가 있을 뿐이었다.
마비된 몸과 의식.
나는 나 자신만으로도 충만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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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어둠 속에서 바위 옆에 앉은 다음, 땅 위에 누웠다.
하늘에는 별이 드문드문 있었고, 내 옆에는 진짜 바위가 있었다. 그리움을 느끼며 바위를 만졌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황홀한, 그러나 실제이기도 한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한때, 모든 감촉이 감촉이고, 향기가 향기고, 소리가 소리였던 진짜 세계가 있었다. 그때를 지금 이 순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내 인생을 어둠 속에서 보고 있었다.
나는 책을 읽고 너를 찾았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추억도 과거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다.
새로 시작한 티비 연속극에 나오는 매력적인 신인 탈렌트처럼, 혹은 몇 년만에 처음으로 별을 보는 탈주범이 그러하듯 어린아이같이 경이로움을 느끼며,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어둠의 부름을 듣고 나는 물었다.
왜 버스였고, 밤이었으며, 도시들이었는가?
왜 그 모든 길들과 다리들과 얼굴들이어었는가?
왜 송골매처럼 밤을 짓누르는 외로움과 표면에 남아 있는 단어들과 돌아알 수 없는 시간인 것인가? 나는 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시계가 째깍이는 소리를 들었다.
시간은 삼차원적인 고요함이라고 책에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삼차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인생과 세계와 책을 파악하지 못하고, 너를 다시는 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것일까 생각했다.
이렇게, 새롭디새로운 별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천진한 어린아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나는 죽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다.
나는 사물의 감촉을, 향기를, 그리고 빛을 새로이 발견하면서, 내 이마에 흐르는 피의 따스함을 차가운 손으로 느끼며 행복해했다.
나는 행복에 겨워 이 세상을 바라보았다.
자난, 너를 사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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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에게, 우리 같은 신의 피조물들에게, 가끔이긴 하지만 이런 비할 데 없는 행운의 순간이 은총처럼 찾아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었다.
천사여, 네가 나타날 거라고, 인생에 단 한 번 이 기적의 시멘트 구름 우산 아래, 이 멋진 순간에 네가 보이리라고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것인지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서로를 거리낌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온몸으로 껴안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음껏 울고 있는 어머니와 아들, 피가 립스틱보다 더 빨갛고, 죽음이 삶보다 더 인자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귀여운 여인, 아버지의 주검 앞에 서서 인형을 들고 별을 바라보는 운 좋은 아이, 너에게 묻는다, 이 충만함과 완벽함을 우리에게 선사한 사람은 누구인가? 내 마음속의 어떤 소리가 한 단어로 답해 주었다.
탈출구, 탈출구……그러나 나는 내가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죽을 아주머니는 피보다도 붉은 얼굴로 내게 차장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가방을 빨리 찾아서, 다음 도시에서 출발하는 아침 기차 시간에 맞춰야 한다며, 그녀의 피 묻은 기차표는 내게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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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마을로 데려다준 트럭 짐칸에서, 살아 있는 자들은 참을성 있는 주검들과 함께 혹한을 피하기 위해 바닥에 누워 별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우리에게 침착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치 우리가 침착하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 위에 누워 트럭의 흔들림을 느끼며 떨고 있을 때, 몇 점의 성급한 구름들과 당황한 나무들이 비단 같은 밤과 함께 우리 곁을 찾아왔을 때, 어슴푸레하지만 생기 넘치는 빛과 주검들 사이에서 행복과 흥겨움이 뒤엉킬 때, 그 모습은 마치 명랑하고 농담도 잘할 것 같은 나의 사랑하는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내 마음과 인생의 비밀을 열기 위한 완벽한 시네마스코프 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르프크 아저씨의 만화책에 나왔던 장면은 실현되지 않았다.
나뭇가지들이 머리 위를 흘러가고 어두운 전신주가 연이어 미끄러질 때, 나는 둥근 밤하늘에 떠 있는 북극성과 큰곰자리를 바라보며 p기호를 떠올렸다.
나중에 생각한 바에 의하면, 사실 그 순간은 완벽하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부족했다.
내 몸에는 새 영혼, 내 앞에는 새 인생, 내 주머니에는 돌돌 만 돈, 그리고 하늘에는 새 별들이 있는데, 무엇이 부족한 것인가?
나는 그 빠진 부분을 찾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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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끔찍한 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주검 사이,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과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주저하는 그 행복한 가벼움의 순간에……
일곱 층의 하늘을 올라가 여행을 준비하기 전에, 피바다와 유리 조각들로 시작하는 돌아올 수 없는 나라의 문턱에서 어두운 광경에 눈이 익숙해지려고 할 때, 나는 희열을 느끼며 생각할 것이다.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돌아갈까 계속 갈까?
다른 나라의 아침은 어떨까?
여행을 완전히 그만두고 한없는 밤의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어떨까?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자난을 품에 안는 황홀한 시간이 지속되는 나라를 생각하자 소름이 끼쳤고, 꿰맨 이마와 다리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행복한 조바심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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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느 날 밤에는 버스가 얼음 덮인 미끄러운 아스팔트 위에서 절벽을 향해 달콤하게 미끄러질 때, 갑자기 성에 낀 창을 통해 신과 눈이 마주치는 것 같은 번쩍임을 보기도 했다.
내가 존재, 사랑, 인생, 시간의 유일하게 공통된 비밀을 발견하려는 찰나, 희롱이라도 하듯 버스가 텅 빈 어둠에 걸려 멈추고 말았다.
어디선가 운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무지한 것이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운이라는 것은 통계와 확률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위안거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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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빛이 더욱더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먼지 구름들 속에서 행복한 영혼들을 보았다.
죽은 사람들과 주검들.
여행자여, 너는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
하지만 분명 더 나아갈 수도 있다.
자신이 바로 그 순간의 문턱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문 뒤에 있는 정원, 아니면 그 뒤에 있는 다른 문에 서 있는 것인지, 그리고 더 뒤에 올 죽음과 삶, 의미와 행동, 시간과 우연, 빛과 행복이 서로 뒤섞인 또 다른 비밀의 정원에 있는지 모르고 너는 어떤 기다림 속에서 달콤하게 흔들리고 있구나.
갑자기 타는 듯한 욕망이 내 몸 전체를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존재하고 싶은 욕망.
몇 마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추웠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문으로 나의 자난, 학교 복도에서 보았을 때 입었던 그 하얀 옷을 입고, 피투성이 얼굴을 한 채 네가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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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가 어떤 버스에 탈 것인지를 즐겁게 논의하고 있을 때였다.
“메흐메트는 그 인생을 책 속에서 만났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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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는 내게 메흐메트로 하여금 책에 대해 언급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과거에 두고 온 인생이나 우울의 원인에 대해 언급하게 하는 것만큼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이스탄불의 거리를 슬픔에 잠겨 걸으면서, 보스포루스 해협에 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함께 공부를 하면서, 가끔씩 그에게 그 책을, 그 마법의 물건을 요구했다.
그러나 메흐메트는 단호하게 그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곳, 그 책 속의 나라에서는 죽음, 사랑, 공포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얼굴이 얼어붙고 가슴은 상처 입고 절망에 빠진 자들의 가면을 쓰고 귀신처럼 황망히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난 같은 여자가 가슴에 상처 입은 사람들과 실종된 자들, 살인자들의 나라를 상상하는 것조차 옳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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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타슈크슐라의 강의실 창문으로 메흐메트가 총에 맞은 것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 자난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인생은 둔해 빠진 바보들의 ‘우연’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명백하고 의도된 만남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메흐메트가 총에 맞고 한참이 지난 후, 자난은 맞은편 햄버거 전문점에서 동요가 이는 것을 보곤 예기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느꼈다.
그러고는 자신이 총소리를 들었던 것을 기억해 내고 부상당한 메흐메트 곁으로 뛰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메흐메트가 총에 맞은 장소에서 곧바로 택시를 타고 카슴파샤 해군 병원으로 간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택시 기사는 얼마 전 그곳에서 군 복무를 마친 사람이었다. 어깨에 입은 상처가 심각하지 않아 메흐메트는 사나흘 안에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날 아침 병원에 갔을 때 자난은 그가 도망쳐 사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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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눈은 모든 곳에, 모든 것에 있어. 항상 그곳에 있지……그렇지만 가련한 우리 인간들은 그 눈이 없음을 괴로워해. 우리가 잊었기 때문일까? 의지가 약해져서일까? 인생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길을 가다가,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다가, 어떤 날, 어떤 밤에 버스 창문으로 천사와 눈이 마주치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알아. 그것을 보려면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해. 천사들은 이 버스를 결국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지. 나는 버스를 믿어. 때론 천사를 믿지. 아니야, 항상 믿어. 그래 항상, 아니야,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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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찾는 천사를 책에서 발견했어. 그 책은 다른 사람의 생각 같았어. 일종의 손님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나는 그를 맞아들였어. 내가 그를 보았을 때, 인생의 모든 비밀이 내게 한 순간에 보이리라는 것을 난 알고 있었어. 버스에서, 사고 현장에서 그의 존재를 느꼈어. 메흐메트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어. 메흐메트가 어디로 가건 그의 주위에서는 죽음이 반짝거려. 어쩌면 그가 마음속에 책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라. 그렇지만 책에 관해서도, 새로운 인생에 관해서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고 현장에서, 버스에서, 천사에 대해 말하는 것들을 들었어. 나는 그를 따라가고 있어. 그가 남겨 놓은 표시들을 모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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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던 어느 날 밤, 메흐메트는 자기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행동 개시를 했다고 내게 말했어. 그들은 어느 곳에든 있을 수 있어. 지금 이 순간 우리 대화를 듣고 있을 수도 있어. 오해하지 마. 너도 그들 중 한 명일 수 있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거든. 그 나라에 갈 때 진정한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책을 읽고 있다고 생각할 때 다시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야.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할 때 너 자신이 상처 입을 수도
있어. 사람들은 대부분 사실 새로운 인생을, 새로운 세계를 원하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책의 저자를 죽였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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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노인을 지치게 만들고, 그가 책을 썼다는 것을, 그의 영호네서 책이 나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만들었어. 놀랄 일이 못 돼. 결국 그를 죽인 것도……노인이 죽은 후 메흐메트에게 차례가 온 것도……우리는 살인자들보다 먼저 메흐메트를 찾아야 해. 중요한 건 이거야.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믿는 사람들이 있어. 도시에서, 터미널에서, 상점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나는 그들을 만나곤 해. 그들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책을 읽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눈은 달라. 눈 속에 있는 슬픔과 갈망이 서로 비슷해. 이런 것들을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 비밀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향해 가고 있다면,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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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느 저녁 자난이 말을 시작했다. 내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지만 억제되어 있는 단어를 노련한 성우처럼 갑자기 타오르게 하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목표를 향하게 만들고, 물건들 속에서 인생을 꺼내지. 지금 깨달은 건 결국 사랑은 우리를 세상의 비밀로 이끌어 준다는 거야. 지금 우리는 그곳으로 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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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처럼 메흐메트도 책을 읽자마자 그의 인생이 바뀌리라는 것을 알았대. 그리고 자신이 이해했던 것의 끝까지 가고 싶어서 간 거야. 끝까지……의대를 다니고 있었지만, 모든 시간을 그 책에, 책에 나오는 인생에 바치기 위해 그만두었어.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모든 과거들을 버려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래서 아버지와 가족과의 관계도 끊었어. 그렇지만 그들로부터 쉽게 벗어나지는 못했대. 진정한 해방은, 새로운 인생으로 가는 첫 출구는 교통사고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어. 맞아, 사고들은 출구야, 출구는 사고들이고……천사는 그 출구가 시작되는 순간의 마법 속에 있지. 그리고 그때 인생이라는 소용돌이의 진정한 의미가 우리 눈앞에 나타나. 그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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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난이 벽에 걸린 사진 속에 있는 유명한 배우들 중에, 우리가 보았던 영화에서 폭력을 행사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하나하나 말하고 있을 때, 나는 화려하게 꾸며진
레스토랑 안의 손님들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가 미지의 배에 승선해 환하고 으스스한 식당에서 수프를 마시며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여행객이라고 상상했던 것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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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망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무엇을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리고 있을 때, 모든 것이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행복하게 폭발했고 녹아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먼저 그 황홀한 굉음을 들었다.
그리고 사고 후에는 한순간 평온한 정적을 느꼈다.
이번에는 텔레비전도 운전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보았다.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시작되자 나는 자난의 손을 잡고, 노련하고 안전하게 그녀를 땅위로 데리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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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이의 아름다운 얼굴은 자난을 감탄과 그리움, 행복에 가득 차 바라보았다.
“내가 항상 좇아 왔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내 앞에 나타났다간 사라지는, 사라졌기 때문에 찾게 만드는 시선은 너의 시선이었어.” 라고 그녀는 말했다.
“너의 시선과 만나기 위해 우리는 길을 나섰어. 너의 이 부드러운 시선과 마주치기 위해 수많은 버스에서 밤을 지새웠어. 모든 도시를 돌아다녔어. 책을 반복해서 읽었어. 천사, 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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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 입은 여자는 죽음의 문턱에서 “내게 웃어 줘.”라고 말했다.
그녀가 죽으리라는 것을 천사는 알고 있었다.
“내게 웃어줘. 그래서 내가 그 세계의 빛을 한 번이라도 네 얼굴에서 볼 수 있게끔.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 손에 책가방을 들고 과자를 사기 위해 들어갔던 빵집의 따뜻함을 기억하게 해 줘. 더운 여름날 부두에서 바다로 얼마나 신나게 뛰어들었는지를 기억하게 해 줘. 기억하게 해 줘. 첫 입맞춤을, 첫 포옹을, 혼자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호두나무들을, 내가 황홀해했던 여름밤을, 즐거움에 취했던 밤을, 내 이불 속을, 나를 좋아하며 바라보았던 예쁜 아이를 기억하게 해 줘. 그들은 모두 그 나라에 있어. 그곳에 나도 가고 싶어. 도와줘. 도와줘. 매번 숨을 쉴 때마다 내가 조금 더 소멸해 가는 것을 행복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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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옥수수 밭에서 들려오는 죽음과 기억의 비명 소리 사이에서 “당신네 천사들은,” 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끔찍하고 얼마나 비정한 사람들인지! 그러나 아름다워! 우리가 모든 단어와 모든 물건과 모든 기억들로 인해 서서히 말라 가고, 먼지가 되어 사라질 때, 당신들과 없어지지 않는 당신들의 빛이 닿는 모든 곳은 어떻게 해서 시간을 초월해 평온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래서 책을 읽은 후로, 불행한 내 애인과 나는 버스 창 너머에서 당신의 시선을 찾았지. 천사, 당신의 시선을. 책이 약속한 유일한 순간은, 지금 생각하건대, 당신의 시선인 것 같아. 두 세계 사이의 경계. 그곳도 아니고 이곳도 아닌. 나는 지금, 그곳과 이곳에 동시에 서 있는 이때에 출구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어. 평온, 죽음 그리고 시간이 무엇인지를 행복하리만큼 잘 알게 되었어. 내게 좀 더 웃어 줘,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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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계는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순간이 오면 그것을 알아채고 자동으로 멈춘다고 했다. 그렇게 행복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불행한 순간에는 시계의 초침과 분침이 빠르게 돌아가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세상에,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군.’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고민도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
노인이 내게 보여 준 이 똑딱거리는 작은 시계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잠든 밤 시간 동안 자동으로 시간을 계산해서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른 이들과 함께 일어나게 해 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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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보고 싶었을 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재창조하면서 천지를 만들어 냈소.
숲속을 으스스하게 비추며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달빛은 텔레비전 화면과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벌판의 아침, 청명한 하늘, 바위 해안에 부딪히는 깨끗한 물의 이미지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체화했소.
식구들이 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한밤중, 전기가 나갔다가 갑자기 들어왔을 때 홀로 거실을 비추는 텔레비전처럼, 어두운 밤하늘의 달은 혼자였소.
달과 함께 다른 것들도 존재했지만 그것들을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
사물을 비추지 못하는 거울처럼 모든 것들에겐 영혼이 없었소.
그런 것들을 많이 보았을 테니, 당신들도 그게 어떤 것인지 알게요.
지금 한 번 더 이 영혼 없는 세상을 보시오.
분명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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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화면 위로는 장면들이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빛, 혹은 색이 빠진 빛, 혹은 천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다.
폭탄이 터진 후의 모습들을 보는 것은, 죽음 이후의 생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어느새 나는 그러한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데 완전히 흥분에 사로잡혀서 화면에 나오고 있는 장면을 소리 내어 설명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한테 들은 얘기를 내가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두 개의 영혼이 다른 세계에서 만나는 우애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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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신이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자, 아담의 눈도 영혼과 함께 새롭게 세상을 인식하게 되었소. 그때 우리는 뿌연 거울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렇소, 아이들이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소.
보았던 것들에 이름을 짓는, 그 이름과 보았던 것들을 일치시키는 우리 아이들은 그때 얼마나 즐거워했었는지! 그때 시간은 시간이었고, 사고는 사고였으며, 인생은 인생이었소. 이것은 행복이었고, 이것이 악마를 불행하게 만들었소. 그것은 악마였소.
그는 거대 음모를 실행에 옮겼소.
거대 음모의 앞잡이인 구텐베르크는 부지런한 손, 참을성 있는 손가락, 그리고 섬세한 필기 도구가 쫓아갈 수 없을 만큼 단어들을 증가시켰소.
그리고 단어들, 단어들, 그 단어들은 구슬처럼 사방으로 흩어졌소.
거리로 나 있는 문 아래, 비누틀, 계란판 위를 단어와 글 들이 굶주리고 미친 바퀴벌레처럼 휘감아 버리고 말았소.
한때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던 말과 물건들이 서로 등을 지고 말았소.
결국 달빛 아래서, 시간은 무엇이냐고 우리에게 물었을 때, 혹은 인생은 무엇인가, 슬픔은 무엇인가, 운명은 무엇인가, 고통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한때 명백했던 답들이, 시험 전날 밤을 세운 학생이 답을 헷갈리는 것터럼 서로 섞여 버리고 말았소.
어떤 바보는 시간이 소음이라고 말했소. 어떤 불운한 자는 사고가 운명이라고 했소. 또 다른 사람은 인생이 책이라고 했소. 우리는 혼란에 빠졌고, 맞는 답을 우리 귀에 속삭여 줄 천사를 기다리곤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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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고 하는 도박에서 진 우리 불쌍한 패배자들은, 승리감을 맛보기 위해 수백 년 동안 서로에게 폭탄을 던질 것이고, 신, 책, 역사, 그리고 세계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설탕 꾸러미, 코란 그리고 기어 박스에 설치한 폭탄들로 우리의 영혼과 몸을 폭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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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나린 박사와 내가 그의 땅을 둘러보러 긴 산책을 나갔을 때, 그는 내게 이 두 개의 희망을 인생의 두 가지 가능성으로 관대하게 제시했다.
아버지들이 - 무한한 기억력과 기록 노트를 가진 신들처럼 - 아들들의 머릿속에 스쳐 가는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연이다. 사실 그들은 단지 가지 아들들 또는 아들과 닮았다고 여기는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실현하지 못한 열정들을 반영할 뿐이다. 그것이 이에 대한 진실의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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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젊은이가, 이 모든 살아 있는 땅과, 삼나무들, 미루나무들, 사과나무들, 소나무들, 이 성채, 아버지가 그를 위해 준비한 생각들을 포기하겠는가?
게다가 이 모든 것들과 잘 어울리는 물건들이 가게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말이다.
왜 자기 아버지에게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미행당하고 싶지 않으니 뒤에 사람을 붙이지 말라는 편지를 남기겠는가? 왜 사라지고 싶어 하겠는가? 나린 박사의 ㅇ러굴에 때때로 알 수 없는 표정이 나타나곤 했다.
나는 그가 왜 나나, 나 같은 사람들을 그리고 세상 전체를 비난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이 저주받은 세상을 진작에 포기한 불만스럽고 귀 먹은 사람처럼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음모 때문이야.” 그가 말했다. 거대한 음모가 있다고 했다.
자신과 자신의 생각 그리고 전 인생을 할애했던 물건들, 이 나라를 위해 전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에 반대하는 음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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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는 동지들에게 ‘거대 음모’가 의식적, 무의식적인 협공을 가해 오고 있으며 스파이들이 글과 책들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따라서 우리도 이에 대항해 경계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 바위에서 다른 바위로 민첩한 보이스카웃처럼 건너뛰며, “어떤 글, 어떤 책인가?”하고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이 얼마나 세심하게 생각하는지, 이 생각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를 보여 주고 싶기라도 한지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내가 가시 관목에 바지가 걸려 움직이지 못하자 손을 뻗어 나를 끌어 당기며 설명했다.
“단지 그 책, 내 아들을 꾄 그 책에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야. 인쇄소에서 나오는 모든 책이 우리 시간과 우리 인생의 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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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 박사가 반대하는 것은 빛, 진실, 사실을 잃어버린 책들인데, 더욱이 그런 책들은 빛, 진실 그리고 사실들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유한한 세계 속에서도 우리에게 천국의 마법과 평온을 약속하는 이 책들은, 거대 음모의 앞잡이들이 찍어 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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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온 바람이, 기억을 없애는 망각의 흑사병을 우리에게 전염시킨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원하는 것은 심약함일세……심약한 사람, 분명치 않은 사람, 아무것도 아닌 사람! 그는 사라졌어. 파괴되었어. 이 세상에서 지워졌지.” 라고 말하며, 책의 저자가 살해된 것에 대해 전혀 유감스럽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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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하루가 나를 깨워 맞이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일어나 하루를 맞이하지.”
풍경을 바라보며 나린 박사가 말했다.
“해는 저 산 너머에서 떠오른다네. 하지만 제비를 보면 다른 곳에선 벌써 몇 시간도 전에 해가 떴다는 것을 알 수 있지. 나는 아침에 때로 멀리 이곳까지 걸어와 내게 인사하는 태양을 반기곤 해. 온 세상이 고요하고 벌고 뱀들은 아직 주위에 보이지 않지. 나와 세상은 서로에게, 왜 우리가 존재하는지를, 왜 이 시간에 이곳에 있는지를, 목적, 가장 큰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지.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이를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네. 그들의 머릿속에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하지만 자신들의 생각이 라고 여기는 몇 가지 가련한 생각들이 있지. 그건 그들이 자연을 보고 발견한 것들이 아니야. 그들 모두는 심약한 사람들, 분명치 않은 사람들, 그리고 하찮고 깨지기 쉬운 사람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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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거리들, 긴 세월을 묵묵히 살아 온 나무들, 희미한 전등들은 나에게 무심했다네.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모아 나의 시간을 정리했지. 역사와 역사를 정복하려고 하는 자들의 놀이에 굴복하지 않았어. 왜 내가 굴복해야 하지. 나는 나 자신을
믿었어. 내가 나 자신을 믿었기에 다른 사람들도 나의 의지와 내 인생의 시를 믿었다네. 그들을 내게 결속시켰지. 이리해서 그들도 자신들의 시간을 발견했다네. 우린 서로 합치가 되었다네. 우린 서로 암호로 소식을 전했고 애인 사이처럼 편지를 썼으며,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다네. 귀뒬 마을에서 열린 우리의 첫 정기총회는 몇 년 동안 계속된 투쟁의, 바늘로 우물을 파는 것 같은 인내로 만들어지고 계획된 어떤 운동의, 거미줄처럼 주의 깊고 세심하게 짜인 한 조직의 승리라네. 알리! 무슨 수로도 서양은 우리를 저지하지 못할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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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자연을 보며, 거기서 자신의 한계, 부족함, 두려움을 보곤 하지. 그러고는 자신의 나약함을 두려워하며 이건 자연의 무한함, 자연의 위대함 때문이라고 둘러대곤 한다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자연이 내게 건네는, 반드시 유지해야 할 나의 의지를 상기시키는 강한 성명서, 내용이 꽉 찬 글을 보곤 한다네.
나는 그것을 단호하게, 무자비하게, 두려움 없이 읽지. 위대한 사람들이란, 위대한 시대, 위대한 나라와 마찬가지로, 곧 터질 것같이 충전된 힘을 자기 안에 축적한 사람들을 말한다네. 때가 오면, 기회가 되면, 새로운 역사가 쓰일 시기가 되면, 이 거대한 힘은, 행동을 개시할 위대한 사람들과 함께 무자비하게 폭발하지.
그 역사적인 날에 여론, 신문, 당시의 사상, 아이가스, 럭스 비누, 코카콜라와 말보로 담배, 서양에서 불어온 바람에 현혹된 가련한 우리 형제들의 사소한 물건들과 보잘것없는 도덕들은 무시되고 말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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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로, 아이스크림, 냉장고, 소다수, 고리대금업, 햄버거를 판매하는 국제적 대기업들과의 경쟁에 의해 사업에 실패한 이 사람들은 르프크 아저씨의 책뿐 아니라 괴상하고 특이하고 생소한 책들을 읽은 젊은이들을 전부 다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나린 박사도 이들을 격려해 줬기 때문에 이들은 이 젊은이들을 미행하고, 감시하고, 분노로 가득 차 편집광적인 보고서를 쓰는 것을 기꺼이 자신들의 의무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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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에 다섯 번의 기도 시간을 갖는다네. 라마단 기간 동안에는, 일몰 무렵 금식을 종료하고 저녁을 먹는 ‘이프타르’와 일출 직전에 아침을 먹는 ‘사후르’가 있지. 우리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시간표와 시계는 서양에서처럼 세계와 보조를 맞추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신에게로 향하기 위한 도구라네.
(중략)
난 이 한 가지 사실을 절대 잊지 않는다네. 몇백 년 동안, 돈이 생겼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사는 것은 시계라는 사실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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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락당한 주인공은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며 내가 기쁘게 받아들였던 우연의 일치는 다른 사람이 짜 놓은 허구에 불과했구나.”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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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호기심을 흉내내는 것은, 책을 좀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가 아는 것처럼, 진정한 사랑의 문이 눈 앞에서 닫혀 버리는 것을 경험한, 나와 같은 사람들이 시도하는 방법이다. 홍수를 연상케 하는 소나기가 내리던 어느 날 밤, 아프욘시에서 퀴타히아시로 가는 도중에, 천장에서부터 창문으로 물이 억수같이 흘러내리는 버스 안에서 함께 보았던 ‘가짜 천국’이라는 영화를, 1년 전에 자난이 더 행복하고 평온한
분위기에서 애인 메흐메트와 손을 잡고 보았었다고, 세이코가 내게 조금 전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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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심연 속으로도 내려가지 못하고 자난의 진지함에도 다다르지 못한 나는 이 밤늦은 시간에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자난에게 가장 끔찍한 것은 시간 그 자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 여행을 떠났다.
이 때문에 우리는 출발했고, 이 때문에 시간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순간, 충만함의 비할 데 없는 순간을 찾아 헤맸다. 우리가 그것에 접근했을 때 어떤 출구가 있을 거라고 느꼈고, 이 믿을 수 없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죽은 자와 죽어 가는 자들과 함께 우리 눈으로 충분히 목격했다.
지혜의 씨앗은 우리가 아침 내내 뒤적였던 만화책 속에 가장 어린이다운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고, 우리는 이제 머리를 사용하여 그것을 파악해야 했다.
저편, 저 먼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행의 처음과 끝은 우리가 어디에 있건 그곳에 있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길과 어두운 방은 손에 무기를 든 살인자들로 꽉 차 있었다.
책에서, 책들로부터 죽음이 삶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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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쪽에, 나린 박사의 영지가 내려다보이는, 바위가 꽤 험준한 곳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올라가 앉았다. 자연의 광대함과 무성함을 보며 고귀한 생각에 빠지는 대신, 내 인생이 얼마나 불행한 곳에 다다를 것인가를 생각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이렇게 힘겨운 때에 예언자들, 영화배우들, 성자들, 정치가들을 도우러 뛰어다니는 천사들, 책들, 수호신들, 현자들이 내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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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과 가게에서 해바라기 씨를 살 때, 아니면 나 자신을 비춰 볼 거울 몇 개를 식료품
점에서 살펴볼 때, 아니면 냉장고와 난로들로 가득한 행복한 삶을 볼 때, 내 속에 있는 저주스럽고 사악한 목소리가 으르렁대면서 너는 유죄라고 외쳐 댄다.
하지만 천사여, 나도 한때는 인생을, 선행을 믿었어.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믿을 수 없는 자난과, 내가 믿는다면 내가 곧 죽여 버려야할 메흐메트 사이에 끼어서, 발터 권총과 행복한 삶에 관한 환상 외에는 달리 매달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 불신과 불안이 극단적으로 얽혀 있는 계획에 바탕을 둔 오리무중의 상상 말이야. 내 마음속에는 냉장고들, 오렌지 짜는 기계들, 월부로 판매하는 안락의자들의 이미지가 소리 없는 통곡을 반주로 해서 차례로 흘러 지나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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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영향으로 그 역시 어린 시절에는 신앙을 가졌었고, 금요일마다 사원에도 가고 라마단 기간에는 금식도 했다. 그러다가 한 여자를 사랑하면서 믿음을 잃었고, 그 뒤에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 모든 폭풍이 흔적만 남기고 지나가 버린 후, 그는 영혼에 빈 공간을 느꼈다. 그러나 한 친구의 책장에서 가져온 이 책을 잃자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았다. 그는 이제 죽음이 우리의 인생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죽음을 정원에 없어서는 안 될 나무, 거리의 친구처럼 받아들였고, 거부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또 그는 어린 시절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과거에 스쳐 갔던 사소한 것들, 가령 풍선껌이나 만화책 같은 것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법도 배웠다
첫사랑이나 그가 읽었던 첫 번째 책도 모두 그의 인생 안에서 자리를 잡았다.
황량한 그의 나라도, 그 거리를 달리던 난폭하고 슬픈 버스들도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었다. 천사라는, 이 기적 같은 존재도 그는 이성으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믿게 되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그는 천사가 어느 날 자신을 찾아와 함께 새로운 인생으로 비상할 것임을, 예를 들면 독일에서 직장을 얻어 정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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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가사는 아마 이렇게 흘러갈 것이다.
“선생님, 선생님, 천사가 누구죠?” 라고 젊은 환자가 물었을 때, 자신감에 찬 의사는 “천사라구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도를 꺼내 테이블에 펼쳐 놓고 불쌍한 환자의 엑스레이 필름에서 가망 없는 내장 기관들을 보여 주는 것처럼 이곳은 ‘의미의 언덕’, 이곳은 ‘유일무이한 순간의 도시’, 이곳은 ‘순수의 계곡’, 그리고 이곳은 ‘사고 지점’이라면, 보시오. 이곳은 ‘죽음’이오, 라고 말한다.
선생님, 천사와 만나는 것처럼, 죽음과 만나는 것도 사랑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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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여자가 뱀과 이야기할 때 내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사람은 때때로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추억이 갑자기 떠올라서, 왜 지금 그것이 기억났는가를 궁금해하면서 완전히 혼란에 빠질 때가 있다.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은 혼란보다는 평화에 가까웠다.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르프크 아저씨 댁에 갔던 적이 있다.
그때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기차가 서는 곳이기만 하면 나는 세상 그 어떤 곳에서도 살 수 있단다. 설사 그곳이 세상 끝에 있는 간이역이라도 말이야. 나는 잠자기 전에 기적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삶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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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내일에 대해 단순히 책을 베껴 쓰는 일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몰라.
그러나 내 일은 단순한 복사를 넘어선 것이야.
나는 느끼면서, 이해하면서, 매번 모든 문장, 모든 단어, 모든 철자들이 나의 발명품인 것처럼 써. 이렇게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열정적으로 일하지.
다른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아. 그 어떤 것도 내가 그 일을 하는 걸 방해할 순 없어.
아침에는 대개 일이 더 잘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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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찾았던 균형의 평온은 그에게 결코 끝나지 않을 영원한 시간을 주었다.
나는 호기심과 긴장 때문에 테이블 밑에서 다리를 떨었다.
한순간 마음속에서 질투심이, 사악한 짓을 하고 싶은 욕망이 솟아났다. 그러나 나는 더욱더 무시무시한 사실을 알아챘다. 내가 지금 총을 꺼내서 그의 눈동자를 쏜다 해도, 그는 책을 베끼는 행위를 통해 이미 영원한 시간의 균형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정지한 시간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계속 존재해 나갈 것이다. 쉼없이 불안에 떠는 나의 영혼은 목적지를 잊어버린 버스 운전사처럼 어디로든 가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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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여, 나는 네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는 나에게 “책 속에 등장했던 천사는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어.” 라고 말했다.
“사람이 죽을 때에나, 어쩌면 버스 유리창을 통해 볼 수 있을 거야.”
그는 얼마나 아름다우면서도 비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가.
나는 그를 죽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잃어버린 내 영혼의 초점을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는지를 그에게서 알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처한 비참함은 내가 필요로 하는, 정확한 질문을 하나도 묻지 못하게 만들었다.
라디오에서 비가 올 거라고 말했던, 가끔 구름이 끼곤 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평범한 아침은 평온한 기차역의 청명함, 플랫폼 끝에서 무심히 땅을 헤치는 닭 두 마리, 손수레로 역 매점에 부닥 사이다 박스를 운반하며 대화하는 행복한 젊은이 둘, 담배를 피우는 역무원, 지나가고 있는 하루의 존재를 내 마음속에 완전히 장착시키고, 흐트러진 내 이성에 인생과 책에 관하여 제대로 물을 말한 그 어떤 힘도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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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동안 머릿속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공개 토론을 하는 프로그램을 상상해 보았다.
왜 아름답고 감성적인 여자들은 인생을 망친 비참한 남자들과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내가 살인자가 된다면, 그리고 그 흔적이 평생 동안 내 눈에 남는다면, 나는 비참한 남자의 모습으로 보일까? 아니면 고뇌에 찬 남자의 모습으로 보일까? 자난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할까, 잠시후에 내가 죽일 남자를 사랑했던 것의 절반만큼이라도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도 니히트 - 메흐메트 - 오스만처럼 평생을 철도원 로프크 아저씨의 책을 반복하여 노트에 베끼면서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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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좋은 책이란 우리에게 모든 세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것이야. 어쩌면 모든 책이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하고.” 라고 말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책은 실제로 책 속에 존재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에 쓰여 있는 말을 통해 내가 그 존재감과 지속성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의 일부분이야.”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세상의 정적 또는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그 무엇일 수도 있지. 그렇지만 정적과 소음도 그것 자체는 아니야.”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내가 자신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봐 다시 한번 다른 말로 설명하고자 했다.
“좋은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 일종의 무, 일종의 죽음을 설명하는 글이지……그렇지만 단어들 너머에 존재하는 나라를 글과 책 밖에서 찾는 것은 헛일이야.”
그는 이것을 책을 반복해 쓰면서 알았고, 충분히 배웠다고 말했다. 새로운 인생과
나라를 글 밖에서 찾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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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것에, 변하지 않는 것에, 진실한 것에 이르고 싶은 거지?
그렇지만 그런 근원이나 시작은 없어.
우리 모두가 모방하고 있는 어떤 진실, 어떤 열쇠, 어떤 말, 어떤 기원을 찾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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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난을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 천사여, 그가 너의 존재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역에 가는 길에 죽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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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넌 나 같은 사람을 찾아서, 책을 주고 읽게 만들어. 그리고 인생을 망쳐 버리게 만들지.” 라고 말했지만 그건 혼잣말이었다.
그가 총에 맞았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과 가슴에 대고 정면에서 세 방을 쏘았다.
그렇게 총을 쏜 다음,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내가 방금 사람을 죽였소.” 라고 말했다. 극장 밖으로 걸어 나오는 동안, 나는 ‘끝없는 밤’이 상영되고 있는 스크린 위에 비친 내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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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와 함께 버스에서 보냈던 그 멋진 밤들로부터 온 물건과, 어느 터미널에서 손에 찻잔을 들고 대화를 나눴던 아주머니와 그리고 그 아주머니의 얼굴에 비친, 그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내 얼굴로 반사되었다고 확신한 한줄기 빛과 만날 수 있다면, 그 빛의 힘으로 한순간 자난을 내 곁에서 느낄 수 있다면, 나는 내 모든 것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스팔트로 덮여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어둡게 하고, 교통 신호들, 꺼졌다 켜졌다 하는 빛들, 무자비한 선전 간판들로 둘러싸인 그 새 도로처럼, 모든 것이 우리와 우리의 추억으로부터 빠르고 성급하게 벗어나기에 바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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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난의 남편이 삼순 국립 병원에서 일하는, 책을 읽은 후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건강한 방법으로 책을 소화하여, 평온하고 행복하게 사는 넓은 어깨를 가진 잘생긴 의사라는 것을 알아내기까지 그리 많은 질문을 할 필요는 없었다.
수년 전에 그 의사와 병원의 방에서 인생과 책의 의미에 대해 남자 대 남자로 나누었던 대화의 슬픈 세부 사항을 나의 비정한 기억력이 자꾸 기억하지 못하도록, 나는 한동안 술에 자신을 내던졌지만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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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계속해서 상처와 아픔을 전시하는 이 주인공들을, 체홉을 투박하게 모방하고 훔쳐서 다른 지형과 기후에서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작가들도 사실상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한다. 보시오, 우리를, 우리의 고통과 상처를 보시오, 우리는 얼마나 예민하고 얼마나 섬세하고 얼마나 특별한가요! 고통은 우리를 당신들보다 더 섬세하고 감성적이게 만들었습니다. 당신들도 우리처럼 되고 싶고, 당신의 불행을 승리로, 특히 우월함으로 바꾸고 싶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우리를 믿으십시오. 우리의 슬픔이 인생의 평범한 즐거움보다 더 멋지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니 독자여, 그다지 섬세하지도 못한 나 같은 인물을 믿지 말고, 나의 고뇌나 내가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의 폭력성도 믿지 말라.
오직 이 세계가 잔인한 곳이라는 사실만을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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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는 것을, 마치 극장에 가는 것과 신문과 잡지를 뒤적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좋아했다. 이러한 행위는 어떤 이익이나 결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뭐랄까,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월하고 더 지식 많고 더 심오하게 생각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책을 많이 읽는 것이 내게 겸손함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르프크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 누구에게도 내가 읽었던 책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책들이 내게 대화를 하고 싶게 자극을 불러일으켰지만, 나는 이를 주로 머릿속에서 책들끼리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때로, 계속해서 여러 권을 읽으면 그 책들끼리 속삭이는 게 들렸고, 이렇게 해서 내 머릿속이, 모든 구석에서 각각의 다른 악기가 소리를 내는 오케스트라 연주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내 머릿 속의 이 음악 때문에 내가 인생을 견디며 산다고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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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지 않았다고 믿을 때는 그가 다시 방에서 책을 똑같이 쓰고 있다고 상상하곤
한다. 이러한 생각은 나를 얼마나 견딜 수 없게 만드는지! 내가, 착한 아내, 귀여운 딸, 티비, 신문, 책, 시청에서의 직무 그리고 같은 사무실의 동료, 수다, 커피 그리고 담배로 나와 화합할 수 있는 위안의 세계를 만들려고 노력하며, 구체적인 것으로 나를 감싸고 보호할 때 그는 자신을 전적으로 단호하게 정적에 맡긴다.
한밤중에 그가 믿고, 자신을 겸손하게 양도했던 정적을 생각하면, 책을 다시 쓰는 모습을 눈앞에 떠올리면, 내 머릿속에는 가장 커다란 기적이 실현된다.
그곳에서, 그이 책상 앞에서, 그가 인내심으로 항상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을 때, 정적이 그와 말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곤 한다.
내가 도달하지 못한, 그러나 나의 희망과 나의 사랑이 보았던 것의 비밀은 그 정적과 어둠 속에 있다. 자난이 사랑한 남자가 글을 쓸수록, 나 같은 사람은 절대 도달하지 못한 깊은 밤의 진정한 속삭임이 말을 하기 시작할 거라고 나는 생각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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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며 티비를 볼 때 라티베 아주머니는 내 딸아이가 어떤지, 그리고 내 아내가 어떤 여자인지 물었다. 아주머니를 결혼식에 초대하지 못했던 데 죄책감을 느끼며 나는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내가 지금 사는 골목에 이전부터 살고 있던 집 딸이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후에 내 아내가 될 이 여자를 책을 처음 읽었던 때에 본 것을 기억해 냈다.
지금 이것들 중 어떤 것이 더 근본적이고 더 놀랄 만한 우연의 일치일까?
우리 집 맞은 편에 있던 빈 아파트에 이사 온 그리고 그날 밤 강한 전등 빛 아래서 티비를 보면서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던 가족의 딸을, 몇 년 후에 나와 결혼할 그 슬픈 여자를, 책을 처음 읽었던 날 처음 본 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이 우연을, 결혼하고도 몇 년이 지나 내 인생의 숨겨진 기하학을 찾아내기 위해 로프크 아저씨의 소파에 앉아 있을 때 기억해 낸 것이 우연일까?
그 여자의 머리색은 옅은 밤색이었고 티비 화면은 초록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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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손에 들린 사탕 그릇을 계속 쳐다보았다. 내가 왠지 모를 죄책감과 불편함을 느꼈다고 말한다면 독자들은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만 말해 두자. 내가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기억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은제 사탕 그릇에 거울과 같이 방 전체와 나, 그리고 라티베 아주머니가 동그랗게 휘어져서 비쳐 있었다.
얼마나 마법 같은가.
한 순간 세상을, 우리의 눈이라고 말하는 열쇠 구멍을 통해서가 아니라, 잠시 동안 일종의 다른 이성의 렌즈 체계를 통해 보는 것이.
영리한 아이들은 이것을 이해한다. 영리한 어른들은 이에 미소짓는다.
도자여, 내 이성의 반은 다른 곳에 있었고, 나머지 반은 또 다른 곳에 신경 쓰고 있었다. 당신들에게도 무엇인가를 기억하려다가, 기억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하기도 전에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기억하는 것을 나중으로 미루는 일이 일어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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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 나는 나의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오늘 같은 봄날 저녁에, 우연과는 한참 거리가 먼 지점에 나의 기억이 고착되어 가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서, 기차역 이름을 떠올리려 애쓰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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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나를 에스키셰히르로 데려다 준 최신식 메르세데스 버스의 운전사가, 14년 전에 자난과 나를 가냘픈 첨탑이 있는 초원의 작은 마을에서 태운 후 홍수 때문에 늪으로 변한 진흙투성이 마을에 내려놓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내 눈보다는 콩콩 뛰고 있는 내 심장이 먼저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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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나무들을 베어 버리라고 한 것은 누구인가?
교도소의 담장처럼 아타튀르크의 동상을 둘러싸고 있는 콘크리트 아파트 건물을 바라보면서, 나는 누가 발코니의 철제 난간들을 저렇게 찍어 낸듯 똑같이 만들라고 명령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지나가는 버스에 돌을 던지라고 가르친 건 누구인가?
인체에 유해하고 냄새까지 지독한 소독약을 호텔 방에 뿌리자는 발상을 내놓은 것은 대체 누구인가?
백인 미녀들이 그 기다란 다리 사이에 타이어를 끼고 있는 달력을 전국에 유통한 자는 누구인가?
또 엘리베이터나 환전소나 대기실 같은 생소한 장소에서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고
싶다면 상대방을 적대적인 눈빛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결정한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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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가 우리를 초대했던 뒤뜰을 산책할 때처럼 자난과 마치 소꿉놀이라도 하듯 감상에 빠져 돌아다녔던 그 모든 천진한 작은 도시들, 그리고 세밀화에서 뛰쳐나온 듯한 뒷골목들이, 이제는 어떻게 해서 서로를 모방하는 위험 신호와 감탄 부호들로 들끓는 공포스러운 무대 장치로 변해 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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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하면 기억 상실로 고통받고 있는 이 나라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애쓰는 불행하고 바보 같은 주인공이다. 나는 자난의 얼굴, 미소, 그녀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리게 함으로써 나에게 행복한 도피처를 제공해 줄 신선하고 한적한 곳을 찾고자 했다. 행복한 추억이 서려 있는 뽕나무와, 나린 박사가 한때 사랑스러운 딸들과 함께 살았던 저택을 향해 걸었다. 계곡에는 전신주가 세워져 전화선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전기도 들어왔지만 이 지역에는 인가가 전혀 없었다. 폐허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폐허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라 일종의 재앙 때문에 형성된 것처럼 보였다. 같은 내용의 글을 반복해 쓰면서 영원한 시간의 평온과 인생의 비밀을 - 이것을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 찾을 거라고 생각한 자난의 옛 애인을 죽이길 잘했다고, 예전에 나란 박사와 같이 올라갔던 언덕에 설치된 아크 은행의 광고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그의 아들을 이 더러운 광경으로부터, 이 모든 비디오와 문자 들의 범람으로부터, 이 빛도, 광채도 없는 세상에서 장님이 되는 것으로부터 구하였다.
이 괴상하고 소심한 잔인함을 가진 나라에서 누가 나를 빛으로 감싸 구해 줄 것인가? 한때 상상의 극장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색깔을 꿈꿀 수 있게 하고, 내 가슴속에 단어들을 속삭였던 천사로부터 이제는 그 어떤 목소리나 신호도 받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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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반복하는 가장 단순한 일상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현명하게 깨달아 알고 있는 그들은 거리를 달구는 금빛 햇살에 평온하게 녹아 가고 있었다. 그들이 곁눈질로 바라보는 이방인은, 이 생소한 동화 속 장면에 자신을 빼앗기고, 한때 미치도록 사랑했던 자난이 우리 할아버지들의 오랜 유산인 시계와 잡지 한 뭉치를 손에 들고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띤 채 첫 번째 골목에서 자기 앞에 나설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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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사실 이렇다.
사고가 있고, 운이 있고, 사랑이 있고, 외로움이 있다.
즐거움이 있고, 슬픔이 있고, 빛과 죽음, 그리고 있을 듯 말 듯한 행복이 있다.
이러한 것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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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 있는 이 작은 마을에서 나를 은행 광고판과 담배 광고, 사이다 병 들과 텔레비전 화면의 소음으로 데려다 줄 버스를 기다리면서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했다.
세상, 책, 인생의 의미와 본질에 도달하기 위한 희망이나 바람이 이제는 별로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 어떤 것도 표시하거나 암시하지 않은 모습들 사이에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목적 없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열린 창으로 식탁 주위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가족을, 사원 벽에 걸린 게시판에 붙어 있는 코란 강좌 시간표들을 보았다.
등나무가 있는 커피숍에서는 부닥 사이다가 코카콜라, 슈웹스, 펩시의 전 방위 공격 속에서도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음을 보았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길 맞은편에 있는 자전거포 앞에는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빛 아래서 바퀴를 고치고 있는 기술자와 손에 담배를 들고 그와 정담을 나누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왜 친구라고 하는가, 어쩌면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적의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 수도 있는데.
두 가지 경우 모두 내게는 흥미롭지도, 흥미롭지도 않지도 않았다.
나를 아주 비관적인 자라고 생각할지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등나무가 있는 찻집의 그늘 아래 앉아 그들을 구경하는 것이, 구경하지 않는 것보다는 더 좋았다고 느꼈음을 밝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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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 인생에서 찾지 못했던 의미를 우연의 숨겨진 질서에서 찾아야지 하며 본능적으로 37번 좌석에 앉았기 때문인지, 혹은 그녀가 앉았어야 할 빈 자리에 기대어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면서 한때 우리에게 시간처럼, 환상처럼, 인생처럼, 책처럼 결코 끝나지 않을 듯 비밀스럽고 매력적으로만 여겨졌던 벨벳 같은 밤을 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보다 더 슬픈 비가 유리창에 뚝뚝 부딪히기 시작하자 나는 의자를 완전히 뒤로 젖혀 기대었다.
그리고 추억의 음악 속에 나 자신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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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마비가 오는 것을 감지한 경험이 있는 환자처럼, 고치를 취하면서, 위기를 넘기려고 속수무책으로 몸부림치며 괴로워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저 음악을 꺼 주시오, 자난과 내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우리가 손을 잡고 함께 들었던 음악이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식당에서 자난과 함께 밥을 먹으며 벽에 걸린 우리 나라 여배우의 사진들을 쳐다보면서 우리가 무척이나 웃어 댔다오, 라고 그들에게 소리 지를 수도 없었다.
내 호주머니에는 슬픔의 위기에 잘 듣는 알약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수프 한 접시와 빵 한 조각 그리고 라크 한 잔을 산 후에 그것들을 쟁반에 올려 놓고 구석 테이블로 물러났다.
수저로 수프를 젓는데 접시에 짜디짠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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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버스 내부의 어둠과 바깥 어둠의 농도가 같아졌던 그 마법적인 순간에, 앞의 큰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언제 사라질 것인지, 그리고 가축 우리의 그림자와 나무의 환영이 깜깜한 초원에 언제 나타날 것인지를 궁금해하던 차에, 갑자기 내 눈으로 환한 비치 들어왔다.
버스의 넓은 창유리 오른쪽에 비친 그 새로운 빛에서, 나는 천사를 보았다.
천사는 나와 매우 가까운 곳에, 그러나 동시에 내게서 너무나도 먼 곳에 있었다.
그래도 나는 알았다. 그 깊고, 적나라하고, 강렬한 빛이 나를 위해 그곳에 있다는 것을. 마기루스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천사는 내게 가까워지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았다. 주위의 환한 빛 때문에 정확히 무엇을 닮았는지도 볼 수 없었다. 내가 천사를 알아봤을 때 나는 기쁨, 가벼움,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 천사는 페르시아 세밀화에 나오는 천사를 닮지도 않았고, 캐러맬 포장지에 있는 천사를 닮지도 않았으며, 사진에서 본 천사를 닮지도 않았고, 내가 오랜 세월 그 목소리를 듣기를 갈망해 온 내 상상 속의 존재를 닮지도 않았다.
한순간 나는 천사에게 뭔가 말하고 싶었다. 천사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쩌면 여전히 느끼는 그 어렴풋한 즐거움과 놀라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처음 느꼈던 우정이나 친밀감, 연민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나는 그것들로 평온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몇 년 동안 기다려 왔던 바로 그 순간이라고 생각하며 내 마음속에서 버스의 속력보다도 더 빠르게 커지는 두려움을 진정하기 위해 이 순간의 나에게 천사가 시간, 사고, 평온, 글, 인생, 새로운 인생의 비밀을 알려 주길 원했다. 그러나 모두 쓸데 없었다.
천사는 내게서 너무나 멀고 또한 너무나 멋졌지만, 그만큼 무정했다. 무정하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앞에 나타나기만 했을 그 순간 다른 어떤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반쯤은 어더운 초원을 달리는, 빈 깡통처럼 덜컹거리는 마기루스의 앞 좌석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찬란하게 떠오로는 빛 속에서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나 자신을 보았다. 그 정도였다. 모든, 그 모든 무자비하고 피할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힘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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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년 전에 경험했던 사고 뒤에 따라왔던 평온함에 대한 기대를 기억해 냈다……. 슬로모션으로 촬영한 것처럼 느껴지는 사고 뒤에 따라오는 전이의 느낌을, 나는 마치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시간을 서로 나누듯 행복감으로 가득 찬 채 꿈틀거리며 이곳에 있지도, 저곳에 있지도 않았던 승객들을 기억해냈다. 곧 잠들어 있던 여행객들이 깨어날 것이고, 아침의 고요함은 행복한 비명과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오는 고함 소리에 깨어질 것이다. 두 개 사이의 문턱에서, 무중력 상태의 공간에서 끝나지 않는 장난들을 발견하듯, 우리는 혼돈과 흥분 속에서 피투성이 내장과 쏟아져 나온 과일들, 조각난 시체들, 찢어진 가방에서 나온 빗이며 신발, 어린이 책 등을 한꺼번에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니다. 모두 함께는 아니다. 그 비유할 데 없는 믿을 수 없는 순간을 경험할 행운아들은 버스가 굉장한 소음으로 폭발한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뒤 좌석에 앉은 여행객들 중에서 나올 것이다. 맨 앞 좌석에 앉아 다가오는 트럭들의 빛을, 책에서 분사되는 가공할 만한 빛을 보았던 것처럼 감탄과 두려움으로 눈부시게 바라보며 나는 즉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려 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죽는 것을,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결코, 결코 원하지 않았다.
이스탄불에서
1992 ~ 199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