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와 겨자씨와 누룩 비유(2)
마 13:24-35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 설 교 >
곡식과 가라지
마 13:24-30 / 조재호 목사
성경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 나라(하늘나라, 천국)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외친 중심 메시지는 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이 끝나고 신약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사명, 곧 선지자들이 말한 메시야가 왔음을 알리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세례요한의 외침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맞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가장 많이 사용하신 말은 하나님 나라(천국)라는 말입니다. 현재 U.N.에 가입한 국가는 2000년 9월 현재 189개 국가입니다. 통상 191개 국가가 존재하는데 인구로 가장 작은 나라는 총 인구 500명도 안되는 바티칸이고, 가장 큰 나라는 12억이 넘은 중국입니다.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나라는 평방 킬로미터당 1명 정도인 몽고이고, 가장 높은 나라는 800명이 넘는 방글라데시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하나님 나라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 없고 너희 마음속에 있느니라"
천국은 아시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유럽이나 아메리카에 자리 잡고 있지도 않습니다. 천국은 오염되지 않는 히말라야 산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지도 않고 남태평양 아름다운 휴양지에 자리 잡고 있지도 않습니다. 천국은 좋으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천국은 은총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천국은 은혜와 축복의 하나님 말씀이 살아 역사하시는 곳입니다. 천국은 하늘의 하나님이 부르실 때 믿고 구원받은 모든 백성이 가는 영원한 축복의 나라지만 천국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현재 자리 잡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인 좋은 씨앗이 뿌려지는 밭이 곧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농부가 되셔서 사람들의 마음 밭에 좋은 씨앗을 뿌리십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좋은 씨앗은 곧 천국을 이룹니다. 백성의 마음에 좋은 씨앗이 떨어져 열매를 맺게 되면 마음의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정에 하나님의 좋은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열매를 맺게 되면 가정 천국을 이루게 되고 하나님의 교회에 좋은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열매를 맺게 되면 지상교회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열매를 맺게 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이루게 됩니다.
꽃씨가 밭에 떨어지면 꽃밭이 되고 채소 씨가 떨어지면 채소밭이 되고 과일 씨가 떨어지면 과일밭이 되는 것처럼, 말씀의 씨가 떨어지면 천국 밭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 평생 혼자 사시는 80세가 넘으신 오용주 할머니가 계십니다. 할머니께서 젊은 여집사님의 사랑으로 함께 난생 처음 백화점이라는 곳을 가 보았습니다. 백화점을 둘러보시고는 너무 좋아하시며 말했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천국에 온 것 같네요. 그러나 진짜 천국은 더 좋겠죠..."
지난 주 대구 세미나에 다녀오면서 대구 지하철 참사현장을 보고자 시내로 나갔습니다. 지하 2층까지 밖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여기 저기에 참사의 흔적들이 남아있었습니다. 4개월이 지났는데도 그 현장을 눈뜨고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둡고 싸늘한 현장을 보며 누군가 말했습니다. "생지옥이 따로 없네요"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마음과 가정---- 안에서 평강과 희락과 행복이 존재하는 천국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교회 속에서 복음의 의로 말미암는 구원과 순종과 역사가 일어나는 현재의 천국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천국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나 교회에 말씀의 좋은 씨앗이 뿌려지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의 마음속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째는 "왜 씨를 뿌린 대로 나오지 않습니까? 밀을 심었는데 왜 아무 쓸데없는 가라지가 생겼습니까?" 하는 질문이었고 둘째는 왜 곡식보다 더 크게 자라고 있는 쓸데없는 가라지를 뽑아 버리지 않습니까?"하는 것이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곡식은 하나님이 뿌리시지만 가라지는 사단이 뿌린다는 것입니다. 좋은 씨앗을 뿌리면 알곡이 나고 가라지를 뿌리면 가라지가 납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대답을 하십니다. "가라지는 농부가 뿌린 것이 아니라 악한 자가 밤에 몰래 와서 덧뿌린 것이다.", "중간에 가라지를 뽑지 않는 것은 함부로 뽑다가는 알곡까지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가라지를 뿌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가라지는 사단이 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좋은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뿌리시는 말씀의 씨앗은 좋은 것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최고로 좋은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84:11)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잠16:20)
2. 하나님이 좋은 씨앗을 뿌릴 때 사단은 아무도 모르게 가라지를 뿌립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가라지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원수들이 그렇게 하였구나" 제자들이 묻습니다. "뽑아 버릴까요?" "추수 때까지 가만 놔둬라. 지금 잘못 뽑다간 알곡까지 뽑히느니라"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아 잘 묶어 불쏘시개로 쓰고 곡식은 묶어 곳간에 들이자"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언제나 가라지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밭에 하나님께서 좋은 말씀의 씨앗을 뿌리실 때, 사단은 그 가운데 아무도 모르게 가라지를 뿌리려고 애씁니다.
사단은 가룟 유다에게 의심의 가라지, 배신의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유다의 마음 속에 넣어 주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도마에게 의심의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사단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도록 의심의 가라지를 부지런히 뿌렸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를 손도 대지 말라고 하셨느냐?"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하더냐?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괜한 의심과 불평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까? 미움과 시기가 마음속에서 솟아오릅니까? 사단이 뿌리는 가라지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때 가라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 이단의 가라지를 뿌리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지난 5월 기독교와는 관계없는 모 이단 종교단체에서 살인 사건 벌어졌습니다. 신도들에게 말을 안듣고 신심이 부족하다며 감금하고 폭행해서 숨지게 했고 시신을 암매장한 것입니다. 이단의 교주가 공사중에 땅에서 지하수가 나오자 지하수를 생명수라고 속여 생명수를 마시면 죽은 사람도 낫게 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단의 교주인 49세의 송 모 여인은 위염 관절염 등으로 병원을 수 십 차례나 드나들며 신도들을 속였습니다.
또한 이단 중의 이단인 문선명의 통일교가 요사이 큰 일 두 가지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는 통일교가 주도하는 정당인 [천주평화통일가정당](약칭 가정당)이 출범한 것입니다. 지난 3월 리틀엔젤스회관에서 문선명(文鮮明)교주가 참석한 가운데 가정당 창당대회가 열렸습니다. 다른 하나는 7월15일에 세계1급 프로축구팀 7팀을 초청해서 우리나라에서 [대륙간 클럽 선수권대회]를 개최하는 것입니다. 펠레를 조직위원회 고문으로 위촉하고 상금과 초청비 체제비 모두를 통일교가 부담하기로 했습니다. 대회의 공식 명칭은 [월드피스킹컵](World Peace King Cup, 세계 평화의 왕 컵)인데 최근에 대회의 공식명칭을 바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재림하는 세상 끝 날까지 악한 가라지는 늘 존재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지가 내 영혼에, 교회 안에 뿌려지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주의하고 빠져들지 말아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은혜와 평강과 축복의 좋은 씨앗들을 여러분과 교회 가운데 뿌리실 때마다 알곡으로 충만하게 결실되기를 축원합니다.
가라지 비유
마 13:24-30 / 박덕기 목사
비유란 원어로 ‘파라볼레’(παραβολη)라고 하는데 ‘옆에’라는 전치사 ‘파라’(παρα)와 ‘던지다’ ‘두다’라는 동사 ‘발로’(βαλλω)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비유란 두개의 유사성을 가진 사물 또는 사건을 대조함으로써 거기에 담긴 원리 또는 교훈을 은연중에 쉽고도 정확히 설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비유란 말하고자 하는 교훈이나 원리를 일상생활의 낯익은 상황이나 사물 혹은 자연 현상들을 들어 이야기함으로써 그 뜻을 좀더 쉽고도 인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평범한 가르침으로 즉 당시 사람들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써 하늘나라의 깊은 비밀을 가르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라지 비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가라지의 비유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놀라운 하늘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통해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 오늘날 지상에 있는 교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지상 교회의 특징은 혼합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도 있고 심지어는 가라지 까지 밤에 사탄이 와서 뿌려 놓고 갑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문제점입니다.
1. 좋은 씨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36절 이하에 가라지 비유에 대한 주님의 해석이 나오는데, 좋은 씨를 뿌리는 분은 예수님이요, 좋은 씨란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렸다는 말씀은 현재 우리 삶의 위치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고, 주님께서 처소 처소에 심어 놓은 자리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지금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든지, 그것은 주님이 자기 밭에 의도적으로 심어 놓은 줄로 믿고, 있는 그 자리에서 반드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곡식이 열매를 맺기까지 때로는 비바람이 치기도 합니다. 가뭄이 오기도 합니다. 메뚜기 떼가 몰려오기도 합니다. 병충해로 인하여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 신앙의 결실을 방해하는 고난의 요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유야 어떠하든지 추수 때 열매를 내놓을 수 없다면 우리는 심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2. 가라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했습니다. 가라지는 밀과 아주 흡사하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밀의 종류가 아니고 독보리의 일종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독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라지를 먹게 되면 흔히 구토증이 생기고 심하게는 생명의 위험성이 있을 만큼 아주 독한 그런 풀입니다. 가라지는 크기가 밀보다 좀 작은 것이 차이점이고 자라나는 그 자체는 거의 비슷합니다. 그래서 가라지가 자라날 초기 단계에는 전문가들도 잘 구별하기가 어렵고, 열매를 맺게 될 때 비로소 구별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라지는 뿌리가 밀 주변으로 번져 나가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면 밀이 함께 뽑혀져 나오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라지를 제거하는 데는 굉장히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라지는 소량이 음식에 들어가도 쓰고 불쾌한 맛을 냅니다. 그래서 추수 때 미처 가리지 못한 것은 제분소에 가기 전에 여자들이 넓은 바닥에 펼쳐 놓고 골라냈습니다. 가라지는 비록 모양이나 크기가 밀과 비슷하지만 색깔이 짙푸르러서 눈에 띕니다. 그래도 간혹 섞일 때가 있지만, 장차 알곡과 가라지를 고르기에 전문가인 천사들은 마지막 날에 틀림없이 가라지를 골라낼 것입니다.
3. 누가 가라지를 뿌립니까?
가라지를 뿌리는 자는 바로 우리의 원수 마귀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밭에다 고의적으로 가라지를 뿌리는 일은 실제적으로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인도에서는 자기 원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위협이 ‘네 밭에 가라지를 뿌리겠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에덴동산을 시기하여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그 마귀는 지금 내 심령과 내 가정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 언제 무서운 독밀 곧 가라지를 뿌릴지 모릅니다.
원수 마귀가 왜 곡식밭에다 가라지를 뿌립니까?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먼저 마귀는 자신들의 열매를 위한 씨를 번식시키기 위해서 가라지를 뿌립니다. 사탄은 자신들을 추종할 더 많은 군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가라지를 뿌리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천국의 열매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밭에 있는 가라지는 곡식의 거름을 다 빼앗고, 그래서 성장을 방해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와 같이 원수 마귀는 주님을 믿는 성도들로 하여금 열매 맺지 못하도록 방해하여 천국 창고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가라지를 뿌려 대는 것입니다.
4. 언제 가라지를 뿌립니까?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잠잘 때가 언제입니까? 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잠을 잘 때에, 밤에 사탄은 와서 가라지를 뿌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밝은 빛 아래서 일하시지만, 사단은 어두움 가운데서 활동합니다. 질병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밤에, 실직하여 고통을 당하면서 애쓰는 그 밤에, 이런 저런 시험의 밤에 사탄 마귀는 와서 가라지를 뿌립니다. 마귀는 어두울 때 우리의 영이 어두워 잠잘 때 곧 우리가 신앙의 잠을 잘 때 의심의 가라지 불신앙의 가라지를 덧뿌리게 됩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기도하지 않을 때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온갖 쾌락의 잠에 빠져 있을 때에 가라지를 뿌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일어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졸고 있을 그 때에, 잠자고 있을 그 때에, 기도하지 아니한 그 때에 사탄은 가라지를 자꾸 뿌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은 가라지를 뿌리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 영혼이 잠자지 않도록 늘 깨어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것만이 사탄이 가라지를 뿌리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5. 곡식과 가라지는 함께 자랍니다.
가라지는 잡초 속에 자라지 않고 좋은 곡식 가운데 자랍니다. 가라지는 풀숲이나 자연적인 들과 산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꼭 좋은 곡식 가운데 전혀 구별하지 못하게 자랍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불신자들 세계에 들어가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꼭 잘 믿는 성도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꾀이는 것입니다. 잘 믿는 신자들에게 가서 계속 부정적인 말로 기존 진리를 비판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존재합니다. 그들은 좋은 곡식 사이에 교활하게 위장하고 살아갑니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세상은 천국의 은혜와 지옥의 악취가 한데 섞인 혼동되어 있는 회색 지대입니다. 가라지와 곡식은 같은 밭에서 자랍니다. 같은 농부의 보살핌을 받습니다. 같은 영양을 먹고 자랍니다. 모든 여건이 동일합니다. 그러나 씨종이 다르기 때문에 자란 후에는 엄연히 구별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같은 진실한 성도들도 있지만, 가라지와 같은 거짓 신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알곡 신자와 가라지 신자도 반드시 구별될 때가 옵니다.
6. 교회의 완전성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씨를 뿌려 놓은 교회 안에도 사단은 가라지를 뿌려 놓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교회 중에 완전한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초대 교회 안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담의 집에는 가인과 아벨이 섞여 있었고, 아브라함의 집에도 에서와 야곱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서 악한 자의 아들들이 나타나도 당황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가라지가 좋은 곡식 가운데 있을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7. 형식과 모양만으로도 훌륭한 신앙인 인척 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를 향한 봉사와 전도도 하지만, 내적으로는 냉담한 육신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곡식도 가라지 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위장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자고’라고 하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다른 새의 흉내를 잘 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새가 알을 품고 있으면, 이 자고 새는 낳지도 않은 알을 품은 체 합니다. 그러나 다른 새는 새끼를 까지만, 자고새는 새끼 까는 것까지 흉내를 내지는 못하고 낭패를 당합니다. 이처럼 신앙을 모양만 내고 비슷하게 흉내만 내다가는 마지막 날 지옥 불에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8. 가라지는 잠시 동안 그대로 둡니다.
본래 주인은 좋은 씨를 뿌렸으나, 원수가 가라지를 뿌림으로 자라면서 점차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종들은 주인에게 ‘우리가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인은 ‘가만 두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심판 때 곧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만 두어라’는 말씀은 심판을 안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추수 때 주님 자신이 반드시 심판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까지는 교회 안에 곡식과 가라지가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까지 가라지를 남겨 두는 이유가 과연 무엇입니까?
1)곡식과 가라지가 유사하여 착오로 뽑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전문가들까지도 잘 분별하기가 힘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외식하는 자로 정죄해야 할 사람도 더 깊은 곳에 생명의 진실이 감추어져 있다가 마지막에 가서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날 수 있고, 의인으로 인정받던 사람 속에 깊은 거짓이 있어서 최후에 쭉정이로 판명될 수도 있습니다. 진실이 미숙한 삶 때문에 정죄되고, 외모의 진실성을 표방하는 기술 때문에 의인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성경은 말씀 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2)뿌리가 한 곳에 얽혀 있어 곡식이 상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독밀은 보통 밀보다 뿌리가 대체로 더 강합니다. 구별도 힘들지만 구별했다고 하여 쉽게 뽑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라지를 뽑을 때 오히려 그냥 두는 것보다 곡식에게 더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원수가 그 불타는 시기심과 악의를 가지고 밤에 와서 가라지를 뿌릴 때, 쉽게 뽑아버릴 만큼 적게 뿌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가라지를 다 뽑으면 그 밭은 훤하게 곡식까지 뽑히게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라지와 같은 남편을 뽑으면, 신실한 그의 아내와 착하게 성장하는 자녀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한 자식을 죽이면, 선한 그의 어머니가 고통을 당합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한 기업가를 뽑아 버리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그 직원이 고통을 당하고, 그 가족들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악행하는 가라지와 그의 가족들 중에는 의인이 있어 서로 뿌리가 심각하게 엉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주님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그냥 두시는 하나님에게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9. 반드시 추수 때가 옵니다.
이 세상에서는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합니다. 속이는 자가 다스리며 정직한 자가 눌려 신음합니다. 불의한 자가 의인이 되고 진실한 자가 정죄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급한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 갔느냐고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그의 공의 칼은 영원히 잠자지 않습니다. 반드시 추수 때가 옵니다. 추수 때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말합니다. 성경 전체에 약 360번 정도 종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어서, 평균 3장에 한번씩 종말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역사의 사건과 인류의 모든 개인적인 행위와 동기는 그리스도의 표준에 의해 결판나게 됩니다. 그 날이 주의 날 즉 성도들에게는 찬란한 영광의 날이지만, 악인들에게는 무서운 환난의 날이 될 것입니다. 성도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을 준비하고 모든 가라지에 대하여 인내해야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더 이상 가라지와 함께 있고자 하여도 있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속히 악의 역사를 끝내고, 의의 역사, 자유와 평화의 역사를 이룩하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성급한 욕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교훈은 추수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라지를 싫어하시지만, 자기가 사랑하시는 좋은 밀 때문에 추수 때까지 참으시며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추수꾼들의 분리는 완전합니다. 추수꾼들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천사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수천 가마니 곡식 중에 있는 한 알의 가라지도 여지없이 골라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의 눈을 피해 하나님의 곡간에 들어갈 가라지는 없습니다. 선인의 무리 중에 있다고 모두가 선인은 절대로 아니 듯,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 있다고 모두가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염소가 양 무리 속에 섞여 있다고 양인 것 같이 안심하면 안 됩니다. 많은 인조보석이 있습니다. 껍질만 맥기 칠한 것도 많습니다. 가짜일수록 위장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위장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불꽃같습니다. 그 누구도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습니다.
가라지의 최후는 파멸입니다. 못된 가라지는 결국 불에 태워지듯이, 악인은 여지없이 가차 없이 지옥 불에 던져집니다. 영원한 불못 속에 던져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알곡은 모아서 하늘의 곡간에 간직할 것입니다. 좋은 곡식은 타작하고 풍구질하는 연단은 있어도 주인의 창고에 들여지듯, 알곡 같은 성도들은 비록 세상에서 모진 비바람과 많은 시련을 겪는다 할지라도, 최후에 하나님의 천국 창고에 다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교훈을 찾아보았습니다. 좋은 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이 씨를 뿌리는 분은 인자이신 예수님이시며,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이 씨를 뿌리는 자는 원수 마귀라고 했습니다. 사단이 어느 때에 가라지를 뿌립니까? 밤에 곧 신앙의 잠을 잘 때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며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곡식과 가라지는 함께 자랍니다. 그러므로 현실 교회는 불완전합니다. 또한 곡식과 가라지는 매우 비슷합니다. 신앙을 형식과 흉내내는 모양으로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가라지를 지금 당장에 뽑아 버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곡식에 대한 피해 때문입니다. 알곡과 같은 성도들이 가라지와 엉겨 있어, 가라지를 뽑게 되면 의인들이 큰 슬픔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추수 때는 오고야 맙니다. 그 때에 가라지는 지옥의 풀무 불에 던져져 완전히 타지도 않고 슬퍼하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추수에 대비해야 됩니다. 추수 때를 어떻게 대비해야 됩니까?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내 마음속에 불신앙의 가라지, 탐심의 가라지, 나태의 가라지, 의심의 가라지, 쾌락의 가라지가 뿌려져 있지는 아니한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내가 곡식은 곡식이로되 그야말로 알알이 잘 영글은 알곡인가, 아니면 곡식의 모양은 다 있는데 그 안에 알이 제대로 차 있지 못한 설익은 쭉정이는 아닌가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됩니다.
흔히 현대를 일컬어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우리는 확실치 아니한 시대에 확실치 아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불확실한 시대, 불확실한 삶 속의 확실한 것 즉 ‘사람은 한 번 죽는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라는 두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에는 모르는 것 셋, 아는 것 셋이 있습니다. 전자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라는 것이요, 후자는 ‘반드시 한 번은 죽는다.’ ‘아무도 함께 가지 못한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은 모두 알곡 신자가 되어서, 언제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언제 여러분들에게 지상 최후의 순간인 죽음이 찾아올지라도 한 분도 빠짐없이 천국 창고에 다 들어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마 13:24-35 / 박조준 목사
본문에서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란 간구를 생각합니다. 보통 주기도문을 생각할 때 일곱 가지 간구로 생각합니다. 그 둘째 간구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여 달라 는 간구입니다. 먼저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말씀한 나라 에 대하여 생각해야겠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천국 이란 말로 표현하였고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는 하 나님의 나라 라는 말로 나타나는데 사실은 같은 뜻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상대하여 쓴 복 음인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를 꺼려하였습니다. 그 래서 천국 이란 말로 기록한 것 같습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나라 는 물론 하나님의 나라 를 의 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 는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이 땅의 정치적인 왕국을 의미하지 아니합니다. 요한복음 18장 36절에 예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의 속 한 것이 아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정치적인 혹은 경제 적인 의미로 생각하고 세상적인 나라의 의미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 당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할 때에 예수님은 그 곳에서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신 것입니 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는 어떤 지경(地境)이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령한 나라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나라는 크고 어떤 나라는 작습니다. 미국이나 소련이나 중공이나 그 밖에 몇 나라는 우리 한국의 몇 십배가 되는 큰 영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덴마크나 스위스 같이 우리 나라보다 작은 나라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나라 강원도 정도의 크기밖 에 안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저 남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 온 목사 한 분이 있었습 니다. 그 나라의 이름을 세계 지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조그마한 나라입니다. 레소토 라고 하는 나라인데, 넓이가 우리 서울특별시만한 나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도 그리 작 은 나라는 아닙니다. 하여간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보통 세상에서 생각하는 일정한 영토를 의 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주권 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 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시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실 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가정이 될 때, 그 가정에 하나 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또 이 하나님의 나라 는 은혜와 영광의 왕국입니다.전에 헬라 아덴에는 두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덕의 신전이요, 다른 하나는 명예의 신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명예의 신전을 들어가려 면 반드시 덕의 신전을 통과해야 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은혜와 영광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나라를 통하지 않고서는 영광의 나라에 이를 수가 없습니 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는 외적인 것이 아니고 내적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0절과 21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즉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에 있다 는 말씀도 됩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윤리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 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참고. 눅 7:28).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히 새로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새로운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세상에서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꼭 그대로 사 신 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하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의 안에 하나님의 나 라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육신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 파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생애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중국 교인들은 기도할 때 주여, 주님의 교회가 부흥케 하시되 나로부터 시작하옵소서 라고 한다고 합니다. 퍽 지혜 있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해서 우리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여, 하나님 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시되 나로부터 시작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인격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는 기도는 주 님,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저를 도와주소서 하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43절과 47절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뜻을 또한 분명하게 합니다. 마가복음 9장 43절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 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였고, 47절에서는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 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는 같은 것입니다. 우 리는 오직 하나님께 순종할 때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의 뜻을 행할 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누 리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인 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개인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이 됩니다. 마치 큰 잔치를 배설해 놓고 초대하는 데 이 초대에 응하면 영광이고 불응하면 수치인 것과 같습니다(마 22:1∼14; 눅 14:16∼24). 하 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여 그 손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손 님은 그가 들어온 그 가족의 규례와 법도를 항상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회개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실 때 제일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는 것이었습니다(막 1:14; 마 4:17). 회개 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회개는 뒤로 돌아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기 전에는 자기 중심의 욕망, 소원으로 살아왔으나 하늘 나라에 입적한 후에는 그 마음이 변화해서 새 사람이 되고 과거의 모든 욕망은 다 끊어버리고 자신의 소욕을 쫓던 것을 멈 추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며, 그 뜻대로 행하려고 힘쓰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 기를 기쁘게 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인이 되면 다메섹 도상의 바울과 같이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행 22:10)하고 묻게 됩니다. 전에 는 내가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기쁘게 할까?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하늘 나라 시민이 되면 어떻 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으로부터,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출발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는 많은 무리가 한꺼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 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기로 마음을 정하는 그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마태 복음 13장 31∼32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겨자씨는 비 록 작지만 이것을 심으면 점점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이게 되는데 하늘 나라가 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하늘 나라는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섞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누룩이 점점 부풀게 하여 온 덩이에 퍼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작은 데서부 터 시작하여 점점 커집니다. 확대됩니다.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는 것입니 다. 요사이 흔히 기독교에게서도 혁명 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기독교의 운동은,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은 혁명이라기보다는 점진적인 운동입니다. 누룩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온 세상에 퍼지게 될 때가 분명히 있을 것을 주님께서 가르쳐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 가 개인적으로 임하게 될 때에 점점 그 사회, 문화, 정치 각 방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 사 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 역사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가면서 악과 충돌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 나 라 백성이 때때로 환난과 핍박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미리 우리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면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하셨습니다. 사실 교회 역사를 통해 보면 하나 님의 나라를 위하여 싸운 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더구나 신령한 전쟁에서 부상당한 사람, 전사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어떤 이는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졌다 고도 하고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 라고도 하였습니다. 스데반, 야고보, 베드로, 사도 바울 그밖에 우리 기독교 역사상 얼마나 순교자가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패망하지는 아니합니다. 마지막 승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말라 천국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나라에는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예수님 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네 모든 노력의 목적으로 삼으라 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 로 침입하느니라. 여기서는 군인이 성에 들어가기를 시도하는 의미의 낱말을 사용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하늘 나라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찾는 사람이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때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게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쓴 잔을 면케하여 주옵소서 그러 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피땀을 흘리시며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고민, 피, 눈물 그리고 땀은 세상의 무엇을 얻기 위함 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함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가장 귀한 값을 치러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44∼46절에 비 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하면서, 이를 발견한 사람이 기뻐 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 하는 장사와 같아서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 고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귀한 보화를 발견했을 때 그 전의 소유 전부를 팔았다는 비유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식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최고의 값을 치 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려면 쉽고, 편하고, 향락적인 것들을 희생해야 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내 손이, 내 발이, 내 눈이 하늘 나라 에 들어가는 데 방해가 되면 잘라버리고 뽑아버리라는 것이 주님의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 희 것이요…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고 했습니다. 또 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고 하였습니다(마 18:3 ).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였습니다.
4.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마태복음 18장 23절 이하에 보면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하면서 비유를 하였습니다. 어떤 주인이 종에게 1만 달란트 빚을 주었습니다. 그 종 이 갚을 것이 없으니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주인은 종을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탕감받고 나온 종이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나서 자기 빚을 갚으라고 목을 잡고 강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빚을 다 갚으라고 옥에 가두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던 종의 빚을 취소하고 말았습니다. 형제들이 우리에게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1백 데나리온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는 1만 달란트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큰 죄를 용서받았으면 다른 사람이 내게 지은 작은 죄를 용서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 자격이 있나 검토해보기 바랍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까? 가장 귀한 것을 값으로 치렀습니까? 얼마나 희생합니까? 마음이 겸 손합니까? 과연 온전히 회개하고, 주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하나님의 뜻을 쫓기로 작정하였습 니까? 남의 죄를 온전히 용서하였습니까?
하나님은 왜 악인을 벌하시지 않는가
마 13:24-43 / 최영기 목사
우리를 속상하게 하는 것이 악한 사람이 잘 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이 잘되는 반면에 선한 사람이 피해를 보면 우리는 더 속이 상합니다. 악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서 속이 상해하는 것은 질투의 감정이 섞여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 나 그 감정의 근본에는 정의감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 았기 때문에 동물에게는 없는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양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악 한 사람은 벌을 받고 선한 사람이 복을 받아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 한 생각이 뿌리가 깊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악한 사람이 잘되고 선한 사람이 억압 을 받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게까지 되기도 합니다.
왜 천벌을 받아야 마땅할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냥 두어 두실까에 관한 해답의 일 부를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비유를 통하여 얻게 될 것입니다.
마태는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비유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34절 ). 예수님이 이 시점에서부터 대중을 가르치실 때에 비유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 셨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교훈을 주는 동시에 예 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트집거리를 제공하지 않 기 위한 방안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3개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24-30 절). 이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예수님은 36-43절에서 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이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이 비유를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 비유는 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한 가지 교훈을 찾는 것입니다. 배경에는 교훈을 설명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유를 잘못하면 은유 즉 알레고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알레고리라는 것보다 영적 해석이라고 하면 더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눅 30-35) 은유적 즉 영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제사장은 종교 의식을 의 미하고 레위인은 율법을 의미하고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의미하고 주막은 교회를 의미하고 두 데나리온은 성찬식과 침례식을 의미하고 다시 오마 고 한 것은 재 림을 의미하고 . . . 별 신기한 해석을 다 해 놓습니다. 이렇게 해석하여서 잘못 된 결론을 끌어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자신이고 좋은 씨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는 사단의 자손임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 씨를 뿌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설명을 하지 않으셨고 좋은 씨가 먼저 뿌려지고 가라지가 나중에 뿌려졌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설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비유의 올바른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하여 무슨 교훈을 주려고 하십니까
I. 하나님은 의인 때문에 악인을 존속시키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왜 말씀하셨을까요? 당시에 보통 사람들이 메시아에 관 한 기대는 메시아가 오셔서 악한 사람들을 다 멸해버리고 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당시 사상에 젖었기 때문에 그러한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악한 사람들은 항상 같이 있을 것을 예고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왜 악한 사람들을 즉시 정리해버리지 않으실 까요? 의인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에 보면 28절에서 종들이 주인에게 원수가 뿌린 가라지니까 즉시 뽑아버리라고 여쭈니까 주인은 29절에서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악한 자를 벌하다가 선한 자들이 피해를 입을까 봐 벌하는 것을 보류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악한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합시 다. 하나님이 천벌을 내려서 즉사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착한 사람이라면 그 아내가 고생을 해야합니다. 또 그 자녀들이 착한 사람들이라면 그 자녀들이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사회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회가 악하더라 하더라도 하 나님은 심판을 주저하십니다. 소수의 착한 사람들이 피해를 받는 것을 원치 않으 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잘 되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악한 사람과 같이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받아드려야합니다. 우리 마 음 속에는 거룩한 사람만이 모인 교회, 사랑하는 사람만이 모인 공동체, 의로운 사람으로 이루어진 국가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허망한 꿈에 지 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하고 악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꿈꾸지 말고 가라지 틈에서 열매 맺 는 곡식처럼 악한 사람들 틈에서 열매 맺는 강인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바랍니다.
II.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심판 날에 분리하신다
그러나 악인과 의인을 구분하는 날은 반드시 옵니다(39절-43절). 하나님 이 악인 들은 그냥 두시는 것은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꽃이나 동물을 향한 사랑과 다릅니다. 거의 동등한 차원에서 자녀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는 결정권을 주셨습니다. 이 결정권을 존중해주셔서 아담 과 해와가 죄를 짓는 것까지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을 가진 인간 은 이 특권을 어떻게 행사하셨는지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1.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이 잘 되는 것을 볼 때에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와 자 비를 찬양할 뿐만이 아니라 악한 자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하겠습니다. 이 런 가정을 해봅시다. 여러분이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Enron이 한 참 잘 나나고 주식 값이 200불이 넘을 때에 여러분은 Enron이 어떻게 될지를 알고 있다고 합시다. 그때에 작지만 착실한 회사를 그만 두고 Enron으로 직장을 옮기 는 사람들, 돈을 다 투자에서 Enron 주식을 사는 사람들, 보유한 주식을 믿고 분 에 넘치는 집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느꼈겠습니까? 불쌍한 마음일 것입니 다. 악인이 그렇습니다. 예언의 은사도 필요 없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가진 것을 다 날릴 날이 옵니다. 그리고 낭비한 인생에 관해 문책을 받고 지옥에 떨어질 그날이 옵니다.
2. 복음을 전하여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이들을 측은히 여기고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악 인을 두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벧후 3:9).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시고 곧 다시 오시지 않는다는 사 실로 인하여 회의에 빠졌습니다. 이미 오셨다는 이상한 이론을 제시한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이 헛 약속을 하셨던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 이러한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하나님이 아직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이들이 잘 될 때에 이들을 시기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합 니다. 여러분들은 악인이 잘 되어도 그가 하나님께 꾸중만 듣기를 원하지 영원히 지옥 불에서 고생하는 것은 원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정도로 남을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 얻기를 위하여 연민의 마 음을 갖고 복음을 전해야하는 것입니다.
III. 작은 순종이 큰 결과를 가져온다
다음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겨자씨가 새들이 깃들을 수 있는 나무처럼 크게 자라는 것에 빗대어 하늘 나라를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31-33절). 이 비유는 왜 말씀하셨을까요? 제자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하나님의 나 라가 즉시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왕이 되어 압박하는 외세 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리라는 일반 사람들의 기대를 제자들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를 아시고 예수님은 하늘 나라는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겨자씨처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인가는 새들이 와서 깃 들일 수 있는 큰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과연 이루어졌습니다. 회교의 시작은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무 력으로 인근 국가를 정복하고 회교를 국교로 삼음으로 처음부터 웅장하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불교는 4계급으로 이루어진 인도의 카스트 시스템에서 둘째와 셋째 계급인 무사와 상인 계급의 지원을 얻어서 급속히 팽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별로 볼 것도 보일 것도 없는 120명의 평범한 제자들로 시작하였습니다 . 그들 가운데에는 마호멧 같은 군인도 석가모니 같은 귀족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무리가 커져서 이제는 세상 구석구석까지 교회가 없는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하늘에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도 있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 라 살아있을 때에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작은 일 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이라면 작다고 무시하지 말고 성실해야합니다. 뜻이 분 명하고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올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 화요일 생명의 삶 시간에 말씀드렸는데 저는 천국에 갔을 때에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분은 저를 키워주신 제 조모님이십니다 . 또 한 분은 1974년 길에서 성경을 나누어주고 있던 전도대원입니다. 생명의 삶 을 수강하신 분들은 제가 길에서 나누어주는 영어 성경책을 공짜라고 해서 받아가 서 읽는 것을 계기로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때 에 저에게 성경을 전달해준 분이 누구인지 궁금한 것입니다. 이분은 제게 성경을 전달해주었을 때에 전달받은 사람이 목사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고 가정 교회를 세계적으로 전파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입 니다. 어쩌면 이분은 다른 전도 대원들에게 이끌려서 한번 길가에 서서 성경을 나 누어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이 길가에 서서 성경책을 나누어주었 기 때문에 제가 성경을 손에 쥐게 되고 읽게 되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 로 우리는 우리의 작은 사역이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올지를 모릅니다. 하나님 나 라는 겨자씨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새가 깃들 정도로 큰 나무가 됩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지금 보기 에는 아무리 사소하게 보일지라도 어떤 큰 결과를 가져올지 모릅니다. 우리가 천 국에 가면 즐거움 놀라움이 많을 것입니다. 제게 성경책을 전달해준 사람도 자신 의 작은 헌신이 가져온 결과를 보고 놀라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 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성실히 일해야합니다. 겨자씨처럼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 의 뜻이 분명하다면 큰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에 성실하십시다. 유아부 영아부 사역도 그렇습니다. 어린이는 태어나자 마자 성격 형성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특히 영아는 그 단계에서 세상이 믿을만한 곳인지 믿지 못할 곳인지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안아 주고 돌보아줄 때에 그 손길을 통하여 세상을 따뜻한 곳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 여러분이 안아주는 아기들이 나중에 커서 어떤 위대한 사람이 될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역 밑에서 살고 그의 뜻에 순종하면 큰 일을 이루리라는 것을 믿고 작 은 일에 성실하시기 바랍니다.
IV. 작은 의인이 큰 영향력을 가진다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로 예수님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33절). 지 금은 빵을 불리기 위하여 이스트를 쓰지만 옛날 사람들은 누룩을 사용하였습니다 . 누룩은 곡물을 발효시켜서 술을 만들거나 빵을 불리는 효소를 가진 곰팡이를 곡 물에 배양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누룩으로 불린 빵을 떼어놓았다가 다음 빵을 만들 때에 넣어서 누룩의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교훈은 하나님의 나라는 작게 시작하 지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역시 이 비유도 제자들의 잘못된 기대치를 고 쳐주기 위하여 말씀하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하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막강한 나라입니다. 막강한 힘을 휘두르기 위하여서는 인원도 많아야하고 권세도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는 작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입니 다.
이 말씀도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보잘 것 없는 몇 명으로 시작된 기독교는 세 계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의 기초를 마련하 였습니다. 그리스에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귀족들의 민주주의입니다. 사회적인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동등하다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상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사회적 신분에 상관 없이 하나님에게 귀한 존재라는 기독교 정신 하에서만 가능합니다. 기독교는 또 여권 신장을 가져왔습니다. 타 종교 밑에서 여성들이 받는 압박과 학대를 생각해보면 의미가 확실해질 것입니다. 기독교는 또한 신체 장애자 불우한자 과부 고 아를 위 한 복지 시설을 가져왔습니다. 불교를 믿는 태국에서는 불우한 자에게 대한 배려 나 관심이 없습니다. 전생의 업보 때문에 어려움을 치르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에 환생해서 더 개선된 삶을 누리려면 업보를 치르도록 두어야한다는 사상 때문입니 다. 우리 나라도 노인들을 고려장을 했습니다. 택시 운전수들은 새벽에 시력 장애 자를 보면 재수 없다고 침을 뱉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귀한 존재라는 기독교 사상이 없이는 참된 복지 시설이 시작될 수가 없었 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도 번역된 많은 책을 저술하신 Phillip Yancy라는 분이 최 신호 Christianity Today라는 기독교 잡지에 쓴 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국 이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복 주시는 이유는 미국이 그래서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부패해가고 있지만 선교사로 자원해 가고 선교사를 후원하는 소수의 사 람들 때문에 미국이 진노를 받지 않고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나로 인하여 우리 집안이 살고 직장이 살고 나라가 산다는 자부심을 가져야합니다. 이러한 영향력은 오직 주님 통치 밑에 살고 예수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만이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항상 주님의 통치 밑에 머물러 있고 그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여서 영향력 있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겨자씨와 누룩
마 13:31-33 / 이강웅 목사
서론: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수없는 실망과 좌절을 안고 살아갑니다. 청치가의 사욕과 정리정략에 의한 잘못된 정책을 볼 때, 기업가의 과도한 탐욕을 볼 때, 연예인의 부도덕한 삶에, 그리고 종교인의 위선에 우리는 실망하거나 분노하게 됩니다. 실의에 빠지게 되면 매사 의욕을 상실하게 되어 자신감 없는 무력한 사람이 되고, 모든 일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인간에게는 창조적인 능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의에 빠지면 그 창조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천재적인 사람도 실망에 빠지면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 실의에 빠지면 무감각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어도 좋아하는 느낌이 없이 무덤덤하게 앉아 있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장래의 계획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실망과 좌절감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 모두의 인생 숙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실망과 좌절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대부분 잘못된 기대감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결혼 상담할 때 꼭 가르쳐 주는 것이 있습니다. 결혼생활에 대한 잘못된 환상과 배우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이야말로 결혼생활을 불행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하기만 한다면 당연히 배우자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는 기대감입니다. 그런데 행복이란 결혼하면 자동적으로 오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피차 노력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용납과 용서가 끊임없이 필요합니다. 만약 결혼에 대한 비현실적인 환상을 가지고 출발한다면 이내 실망하고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실망하는 경우를 참 많이 겪습니다. 심지어 좋은 일이라 여겨져 선한 동기로 시작했다가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받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내가 괜히 이 일을 시작했구나..."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주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격려나 칭찬 대신 오해나 비방을 받을 때는 후회하며 낙심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에 있어서 실망이나 낙심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괴롭히는 괴물과도 같습니다.
예수께서 오늘 본문 비유를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현실과의 괴리감에서 실망하고 낙망하는 제자들에게 천국이 무엇인지를 비유로 설명해 주십니다.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들은 커다란 기대감을 안고 흥분하여 좇았습니다. 자기 생업을 버리고 전적으로 주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고 좇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인파가 몰리는 광경을 보고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곧 세상이 뒤집어 지고 하나님 나라가 들어설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불의하고 부정합니다. 그들이 학수고대하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내심 회의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내린 판단과 선택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과연 후에 내가 어떤 보상을 받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점차 의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현재 상황이 불만스럽고 실망스럽습니다. 그들이 실망한 까닭은 처음 부터 천국에 대한 잘못된 기대감을 가지고 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과 유대인들이 가진 메시아에 대한 대망은 하루속히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섬멸하고, 부국강병의 나라로, 불의가 제거된 공의로운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기대감이었습니다. 그런 시각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을 바라보니 이것이 과연 그들이 원하던 천국 운동인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했던 세례 요한도 오해를 했습니다. 그 당시 불의한 정권 헤롯 안티파스를 비판했던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그가 사람을 보내어 물었습니다. (마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당신이 과연 메시야가 맞습니까?’ 왜 그렇게 물었을까요? 그를 메시아라고 믿었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은 그들의 기대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도 오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곧 일어나게 될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예고하였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말렸습니다.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아니, 예수님이 고난을 받아 죽으신다니요, 메시아가 어찌 죽음을 당하신다는 말입니까? 오히려 큰 권능으로 원수들을 쫓아내고 왕으로 등극해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던 민중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메시아로서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자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이런 오해와 실망, 잘못된 기대와 좌절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자동으로 기도가 응답될 줄 알았는데...병 고침을 받고, 자식 문제도 해결되고, 부진한 비즈니스도 잘되고, 매사가 슬슬 잘 풀릴 줄 알았는데, 왜 갈수록 힘든 일들이 생기는 것일까요? 전도하면 상대방이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고, 예수 믿겠다고 돌아서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오히려 더 완고해지고 반발하는 모습을 보며 실망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나도 삼천층까지 올라가서 신비한 것도 좀 보고, 이상한 소리도 듣고, 그래서 나도 무얼 좀 봤다고 사람들에게 간증이라도 하게 되면 좋겠는데, 그러기는 커녕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복 받고, 불순종하면 벌 받을 것이라고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주위를 보니 신앙없이 사는 사람들이 더 형통하게 사는 것 같아 이제부터 나도 적당히 믿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렇게 실망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천국이란 땅에 심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같다. 밀가루 서말에 섞은 조그만한 누룩과도 같다’고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1. 비유의 해석
1) 겨자씨 비유
먼저 겨자씨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겨자씨가 어떤 것인지, 또 그 당시 사람들이 겨자씨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겨자나무는 지중해 남동쪽 지방과 메소포타미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라는 식물로 다 자라면 약 3-4미터(10-12 피트)가 됩니다. 겨자씨는 색깔이 까맣고,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작은 씨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겨자씨 비유는 천국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어떤 한 단면만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밭에 심은, 하잘 것 없는 겨자씨 한 알처럼 천국 운동은 그 시작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가운데 이루어질 것을 보여 줍니다. 겨자씨는 씨 중에 가장 작은 씨입니다. 그런데 자라서 나무가 되는 이 놀라운 성장이 바로 천국의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으나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그 속에 겨자 나무가 들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죽은 것처럼 보이나 실상 그 속에는 ‘새들이 깃들이는’ 겨자나무의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천국 운동에는 이와 같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출발 속에 이미 천국 완성이 들어 있습니다. 천국 운동에서 미미한 시작과 창대한 결말 사이에는 성장이라고 하는 서로 뗄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셨지만 그 안에는 이미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장차 신약시대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기 위해 뗀 첫걸음은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첫걸음만큼이나 소중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역사, 그리고 그 후 세계 교회의 역사는 겨자씨 비유에 대한 산 증거요 실상입니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관심 밖 변두리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 목수가 로마의 죄수로 십자가에 처형되는 미미한 사건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연결됩니다. 자기들도 붙잡혀 죽을까봐 문을 닫아 걸고 부들부들 떨던 소수의 무리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되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자 하루에 3,000명, 5,00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마침내 로마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와 로마제국 황실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결국 로마를 무릎 꿇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은 팔레스타인에서 시작하여 소아시아(터어키),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유럽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로, 이렇게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천국 운동은 코로나팬데믹 상황이라고 좌절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진군할 것입니다. 마침내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순복하는 그 날까지, 그리스도의 나라가 완성점까지 계속 성장할 것입니다.
2) 누룩의 비유
예수님은 천국을 또한 어떤 여자가 빵을 굽기 위해서 누룩을 밀가루 속에 넣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는 것으로 비유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 모친 마리아가 밀가루에 물과 누룩, 그리고 약간의 소금을 넣고 반죽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하루 밤을 지나면 밀가루 반죽 전체가 부풀어 있습니다. 33절 ‘가루 서말’이라고 했는데 약 20 kg(50파운드)가 되는 양이라서 한 가족을 위해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입니다. 이렇게 많은 양의 밀가루에 얼마만큼의 누룩이 필요할까요? 아주 조금입니다. 이 조그만 양의 누룩이 밀가루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적은 양이지만 일단 밀가루 속에 들어가면 보이지 않게 밀가루 전체에 스며들어 그 전체를 철저히 발효시킵니다. 천국은 이와같이 외부로부터 어떤 강요나 억지가 아닌 내부로 부터 조용히 변화시킵니다. 처음에는 미미하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지만 마침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일곱 귀신 들려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어 그분을 섬기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뵙게 됩니다. 맘몬신에 사로잡혀 살던 삭게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가난한 자를 위해 자기 재산 절반을 내놓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여러분 안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알고 있습니까? 그 변화를 느끼고 있나요? 내 속사람이 변화하고 있습니까? 소리 없이, 소문 없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여러분도 받고 있나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하는 교회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됩니다.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통치는 이 땅에서 계속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결코 무력을 동원하지 않으십니다. 억압하거나 강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힘과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십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누룩이 발효시켜 전체에 변화를 가져오듯이 우리 마음 속에 그 놀라운 일을 지금도 행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우리 삶 속에, 우리 교회 속에 이렇게 성령님이 역사하고 계심을 믿습니까?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미미한 시작과 큰 결과를 이어주는 성장을 공통적으로 말해 줍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겨자씨 비유는 천국의 외부적인 성장에 초점이 있고, 누룩 비유는 내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자라서 커지는 것이고, 누룩은 스며들어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외부적인 성장을 말하고, 누룩은 내부적인 변화를 보여줍니다. 겨자씨 비유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복음화를 말해 주고, 누룩 비유는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는 삶의 변화’로 설명해 줍니다. 이렇게 천국의 시작은 미미하지만 외적으로 내적으로,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하여 마침내 커다란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미미하게 시작하지만 조용한 성장과정을 거쳐 어느날 마침내 엄청난 나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2. 비유의 교훈
오늘 비유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일까요?
1) 천국에는 무시할 만큼 작은 일이 없습니다. 민들레 씨 한 알이 담벼락 틈에 떨어질 때 거기서 움튼 새싹이 점점 자라고, 마침내 노랗게 꽃을 피우는 것을 봅니다. 어떤 경우에는 식물이 자라면서 돌을 쪼개고, 시멘트 포장을 들추고 나오는 경우를 목격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생명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심은 말씀의 작은 씨앗이 이와같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내면생활의 틈바구니에 파묻힌 채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영혼과 심령을 사로잡아 변화시켜 결국 밖으로 뛰어 나와 그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야 맙니다.
우리 모두에게 신앙생활에 대한 현실적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하나님 교회를 위한 헌신과 수고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손해를 보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지금도 억압체제 아래서 핍박을 당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희생은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요? 욥의 이유없는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또한 축복이 없어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세상은 크고 화려하고 많은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작고 사소한 것을 중요하게 평가합니다. 예수님도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다” 고 하셨습니다. 과부의 엽전 두 푼, 정말 보잘 것 없는 연보이었지만 그 여인 속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헌신된 마음을 주님은 보시고 기억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작은 어린아이에게 건네 준 냉수 한 그릇도 상급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겨자씨가 자라 새가 깃드는 나무가 되고, 적은 양의 누룩이 전체 반죽을 부풀리게 합니다. 천국에는 무시할 만큼 작은 일이란 없습니다.
2) 천국의 생명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파할 때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냈다는 대목이 복음서에 자주 언급됩니다. (마 4:23-24)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병 고치는 것과 귀신 쫓겨남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함께 나타나는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천국 복음이 전파함으로써 지금 이곳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선포되며 현존하고 있고, 병고침과 귀신이 쫓겨나가는 사역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로 사단의 권세가 지금 무너져서 쫓겨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와 저주, 질병과 사망을 붙들고 있는 사단의 권세가 하나님의 통치권이 임하자 쫓겨 나가는 것입니다.
(막 1:23-27)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이 부분에서 중요한 단어는 ‘권세 있는 새 교훈’ 그리고 ‘명한즉 순종하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자 더러운 귀신이 쫓겨 나갑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임하자 더 이상 사악한 영이 물러설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빛이 임하자 어둠이 물러가는 것처럼. 왜요?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자비하시며 사랑이시기 때문에 어둠의 권세가 후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천국이란 이상향을 꿈꾸는 사람들이 말하는 유토피아도 아니요, 죽어서만 가는 천당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천국은 임하였고, 지금 이 시간에도 진군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생명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천국 복음이 전파되어감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결론
예수님은 이 땅에 또 하나의 세상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문제는 단순히 돈 문제, 교양 문제, 교육 문제, 문화 수준의 문제, 군사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되지 않는 이상 세상 나라는 언제나 문제투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만이 빛으로 충만하고, 공의롭고, 은혜롭고, 죄에서 자유하고, 생명력이 넘치고, 사랑과 평화가 있고, 영생이 충만합니다. 예수님은 이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생명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도 우리 가운데 여전히 충만하게 임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다스림이 임하기에 어둠의 세력이 쫓겨나가고, 하나님의 회복과 축복이 나타나게 됩니다. 온갖 병과 귀신, 간질, 중풍병자들이 다 고침을 받고, 상처와 약한 영성이 치유되고, 폭력과 거짓과 불의와 불법이 떠나가게 됩니다. 대신 생명과 자유가 임하게 되고, 화평이 임하고, 기쁨이 임하고, 거룩과 의로움, 은혜와 평강이 임합니다. 천국이 이미 임하였습니다.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중단되지 않고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전 세계로 확산 중입니다.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약속대로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능력과 권세를 주십니다.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저주를 이기고, 사망의 권세를 이길 힘을 주십니다. 이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서 담대하게 복음전파에 힘쓰는 자가 되시기 바립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천국은 성장하고 확장하게 됩니다. 이 천국 운동에 힘써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겨자씨 한 알의 비유
마 13:31-32 / 김양인 목사(목양교회)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가르치실 때 비유를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진리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감추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고, 후자는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입니다. 또는 전자는 마음이 겸손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교만하고 은혜에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각 사람의 마음 상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이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님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줄 믿습니다.
마태복음서 13장에는 천국에 대한 비유가 여덟 가지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목만 소개하자면 1)씨 뿌리는 비유 2)가라지 비유 3)겨자씨 비유 4)누룩비유 5)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 6)값진 진주 비유 7)그물 비유 8)좋은 집주인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은 각기 다른 표현을 사용하지만 실은 다양한 방법으로 천국을 소개하려는 것입니다.
오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천국의 비밀을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1) …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로, 이 비유는 천국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크게 될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그 시작이 작고 약하게 보이나 그 나중은 심히 창대해진다는 점에서 겨자씨를 닮았습니다. 겨자씨는 좁쌀처럼 작은 씨앗이지만, 밭에 심으면 싹이 나서 자라나 4미터 정도까지도 되며, 무수한 씨앗을 맺어 많은 새들이 와서 쪼아 먹으며 그 드리운 그늘에 머뭅니다. 천국과 겨자씨의 비슷한 점은 시작이 미약하나 나중에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겨자씨 한 알처럼 미약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시했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어려서부터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살았던 고향이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 및 아우들과 누이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할 무렵,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다가, 안식일에 회당에서 회중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며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예수님을 새롭게 평가하고 인정해야 할 텐데 그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면서 배척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갈릴리 출신에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 출신이 네 사람이나 되었고, 세리가 한 사람, 과격한 성향을 가진 열심당원이 한 사람, 나머지도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목수 노릇을 하던 예수님과 내세울 것이 없는 제자들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같이 예언했습니다. “1)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
그러나 세인들의 평가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가 급속하게 자라듯이 나날이 확장되어 나갔으며,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사도들에 의해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로마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복음은 온 세계에 전파되었고,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해서 전파되어 나가고 있으며, 드디어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둘 것은 하나님의 일은 시작이 작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가 놀라워할 만큼 짧은 기간에 기독교가 부흥을 이루었는데, 여기에는 선교사들의 헌신이 큰 몫을 했으나 그들 못지않게 무명의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쪽복음을 지고 다니면서 팔았던 권서인 서상륜과 서경조는 황해도 소래 마을에 있던 그들의 초가집에서 교회를 시작했는데, 소래교회는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교회입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밤하늘을 붉게 수놓는 교회의 십자가들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무명의 헌신자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간 증거입니다.
오늘날 중국에는 일억 명에 달하는 기독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중국당국의 극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중국 인민들 사이에 힘차게 전파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할지라도 날마다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핍박받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은 19년째 세계에서 제1위의 종교탄압국가입니다. 어느 북한선교단체의 자료에 의하면 현재 북한에는 약 30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북한당국이 과거처럼 주민들을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시킬 수 없으므로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북한 정권의 핍박에서 기독교인들을 지켜 주실 것과 복음이 더 힘차게 전파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천년 교회사가 증언하는 것은 아무리 무서운 핍박도 복음을 말살하는 데 실패했으며 결국 교회를 핍박하던 세상 권력은 망했으나 복음은 여전히 살아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이 겨자씨와 같음은 성도의 개인 생활에서도 입증이 됩니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계기가 되어 온 가족이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된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씨가 자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복음의 능력을 믿고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은 농부처럼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2. 이 비유는 천국이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릴 때 자기 밭에 뿌리지 남의 밭에 뿌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만인에게 전파될지라도 복음을 듣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믿음의 작용이 일어나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이 와서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으나 다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었으나 또 어떤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악감정을 품고 배척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만 전하신 것이 아니라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고 귀신들을 쫓아내셨으며,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셨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벳세다 해변에 나가시니 수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느라 해질녘이 되도록 돌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장한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시간에 그 많은 사람을 먹일 빵을 구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한 소년이 가져온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후에, 제자들을 시켜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더니, 장정만 셈해도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러나 떡을 얻어먹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같은 이적을 행하신 것은 단지 굶주린 무리를 동정하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하나같이 그가 메시아이심을 보여주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메시아의 표적으로 본 자들은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마음눈이 감긴 자들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단지 떡을 얻어먹은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신 이튿날 아침에, 한 무리가 부지런히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자 반기며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하고 인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6)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곧이어서 말씀하시기를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서로 다투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떠났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순전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생각을 가졌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마음의 동기가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떠난 후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애초부터 바르지 못한 동기로 따랐으므로 기어코 주님을 배반하고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농부가 씨를 뿌리기 전에 밭을 기경하듯이 회개를 통하여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마음이 교만하고 온갖 욕심이 가득하면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길가 같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처럼 무익한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호세아 선지자는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기를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고 했던 것입니다.
밭을 기경하여 땅속에 박힌 돌멩이들을 골라내고 비닐조각을 비롯하여 쓰레기를 말끔히 제거한 후에 씨를 뿌리듯이, 반성과 회개를 통하여 악한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겸손하고 정하게 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어 깨닫게 하시고 순종하도록 도와주셔서 선한 결실을 맺게 해 주십니다.
회개는 처음 복음을 대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에게도 필요합니다. 한번 기경한 밭이라도 시일이 지남에 따라 굳어지기 때문에 호미로 김을 매주듯이, 성도들도 수시로 자신을 살펴서 마음 자세를 바루고, 열심이 식었거든 다시 불을 붙이고, 세상 욕심을 버리고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언제나 열매 맺는 마음 상태가 되도록 보살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셔서 우리 마음에 심겨진 말씀의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 열매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3. 이 비유는 천국의 문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시작은 지극히 미약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자라남과 더불어 그 풍성한 잎새에 새들이 깃들어 가지마다 가득히 맺힌 씨앗을 쪼아먹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쉼을 주고 영의 양식을 공급해 줍니다.
이 지구상에는 국가의 수가 200개가 넘지만 영토가 넓든 좁든 간에 너그럽게 이민을 받아주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미국이 가장 많은 이민을 받아들였으나 점차 절차가 까다로워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남미의 가난한 나라들에서 출발한 수천 명이 미국 국경을 향해 행진하였으나 중도에서 체포되거나 길이 막혀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부자는 어느 나라든 이민을 환영하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국경이 개방되어 있습니다. 입국 조건은 단 하나,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외에 다른 조건은 전혀 없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차별이 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지식인이든 무식한 자든, 황인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상관없이 천국의 시민이 될 길이 열려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0장에 이르기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에게든지 차별 없이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인간 사회에서는 부자와 지위가 있는 자가 대접을 받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빈부 귀천의 차별이 없이 누구나 환영을 받습니다. 가난하고 낮은 자를 부자와 지체 높은 자와 똑같이 대접하는 이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아니, 천국은 세상에서 무시당하는 자들을 더 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8)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호의를 무시하고 천국의 초대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일수록 천국의 초대장을 받지 않으려 합니다. 이에 비하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는 사람들 가운데 호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부자와 성공한 사람은 교만하여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은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말씀하기를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가난하고 부족해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런 조건이 사람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어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유리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부족해도 여전히 교만한 사람은 여기서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부자라도 겸손히 마음을 낮추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천국의 시민이 됩니다. 결국,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 사람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아 천국의 시민이 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이 위대한 은혜에 불신 이웃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복음을 믿고 안 믿는 것은 그들의 몫이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그들 자신이 책임을 질 것이지만,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은 먼저 믿은 우리의 책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찌어다 8)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9)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겔 33:)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수꾼으로 임명받았습니다. 성안 백성들의 안위가 파수꾼에게 달렸듯이, 우리에게는 불신 이웃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신 이웃이 나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찌어다”(겔 2:7)라고 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도 이르기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사명은 복음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전도는 우리 자신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오직 순종해야 할 주님의 명령입니다. 복음을 믿든지 거부하든지는 그들의 책임이지만 만일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아 멸망했다면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명심할 것은, 우리가 천국 백성 된 것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해 줄 수 있는 선행 가운데 최상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을 다 이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독교 교리를 잘 몰라도 됩니다. 로마서 10장에 이르기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겨자씨 한 알은 너무나 작아서 훅 불면 날아가고 말지만 그것이 밭에 심겨지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 큰 나무처럼 되어 많은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됩니다. 그것은 겨자씨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무한한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갑니다.
우리 마음에 심겨진 복음도 밭에 심긴 겨자씨처럼 왕성한 생명의 작용을 나타내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 가정과 교회가 굳건히 서고, 우리의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나날이 확장되어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친 영혼들을 찾아가자
마 13:31-32 / 김근중 목사
금년에도 어김없이 봄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금년 봄은 우리에게서 또 한 해의 봄으로 그냥 지나가 버리게 해서는 안 되고 새로운 신앙의 봄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을 깨우며 역사를 깨우며 미래를 향한 힘찬 부흥의 도약을 약속하고 있는 사순절을 맞고 있는 봄이기에 더욱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봄이 되면 나무에서 움이 돋고 잎이 나며 꽃이 피는 것은 열매를 위한 목적이 있는 변화이며 열매를 위한 출발신호인 것입니다. 변화는 기독교의 이상입니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변화는 목적이 있는 변화입니다. 얼어붙고 침체된 동토의 신앙에 봄이 와 언행심사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말하는 것도 훈풍처럼 부드러워지고, 행동하는 것도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며, 생각하는 것도 싱싱하고 푸르게 바꾸어져야 합니다. 내적인 변화, 상태의 변화, 존재의 변화로 입체적인 변화가 와야 합니다.
내자신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는가?
여러분은 지금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고 계십니까? 별 볼 일 없고 하찮은 존재로 이해하십니까? 남다른 재주 하나 없는 처지, 그래서 낮은 자존감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존재로 이해하십니까? 혹은 위대한 존재로 이해하십니까? 아니면 비록 지금은 위대하지 않지만, 앞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희망에 대한 믿음은 어느 정도입니까?
내자신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여러분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고 계십니까?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미래를 생각하면서 몹시 어두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밝은 마음만으로 살고 싶은 바람은 있지만, 정말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도무지 자신이 없는 입장은 아닌가요? 혹은 희망적인 미래를 확신하면서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밝은 마음이다가도, 어떤 순간 갑자기 쓸쓸하고 허한 마음이 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자신에 대해 그런 생각과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향하여 오늘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용기를 잃지 말라고, 충분히 가능하다고, 힘을 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될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신비로운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간결하게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욥8:7) 개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네 처음 시작은 심히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으로 성장하는 신비, 이것이 오늘 본문이 전하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1. 작은 것의 가치
사람들은 대체로 큰 것을 좋아합니다. 큰 차, 큰 집, 큰 교회, 큰 나라 등 큰 것을 좋아합니다. 작은 것은 가치가 없고, 큰 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작은 것을 가치 있게 보고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가장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고, 가장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눅16:10)는 말씀이 있는데 우선 작은 일의 가치를 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최후의 심판 기사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25:40)라고 말씀하시는데 지극히 작은 자와 하나님이 동격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 그가 받을 상이 크다"(막9:41)고 말씀하시면서 하찮아 보이는 물 한 잔의 친절을 그리도 크게 여기시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하나님이 택하시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강하고, 권력을 갖고 있고, 가문이 훌륭하고, 지식이 많고, 잘난 사람보다는 어리석고, 비천하고, 멸시받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더 많이 택하신다는 것입니다.(고전1:26-28) 곧 큰 사람보다는 작은 사람을 택하여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명하시면서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되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작은 것을 나타낼 때는 늘 겨자씨만큼 작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맥락에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17:20) 그러니까 겨자씨는 가장 작은 것의 상징이지만 그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면, 가장 큰 풀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으로 된다는 의미이고 가장 하찮아 보이는 것이 가장 위대한 것으로 된다는 의미이고 가장 상한 마음이 가장 기쁜 마음으로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두 마음 사이에 가로 놓여있는 그 엄청난 거리,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멀고 먼 거리, 그 요원한 거리, 그 거리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기에 이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해 보이지만, 얼마든지 가능하고 그 가능성이 반드시 실현되고 하늘나라란 바로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신앙인이 누릴 위대한 은총이요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하나님께 자신의 삶의 주권을 맡기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백성에게, 지금 자신의 볼품없음으로 낙망하는 사람에게, 오늘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미국 잡지인 타임지는 금세기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 100명을 선정해 발표하였는데 그중 한 명이 미국에서 토크쇼를 진행하고 있는 여자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입니다.매일 그의 프로를 보는 사람이 1400만 명이나 되고 132개국에 위성으로 중계되고 있습니다.하지만 이렇게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윈프리라는 사람은 아픔이 있는 여자입니다.1954년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외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손을 전전하며 상처투성이로 자랐지만 그는 눈물 속에서도 성경을 매일 읽고 암송하며 위로를 받으며 자랐으며 열심히 책을 읽었습니다.아픔과 슬픔과 비애를 독서로 달랬습니다.심지어는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었습니다.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선생님이 장학금을 추천하여 주었고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주었습니다.윈프리는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하여 이렇게 훌륭한 100명중에 한 명의 인물이 되었습니다.그는 사명을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1),남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무엇이든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할 사명이 주어진 사람들이고, 남보다 지혜가 많다면 그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명령이며, 남보다 물질을 많이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사명을 받은 것이고, 남보다 더 건강하다면 남을 위하여 건강을 사용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2),남보다 아파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하나님이 아픔을 주셨다면 그것도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픔을 통하여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랑하라고 하시는 명령입니다.한 여인이 남자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마약을 한다고 말할 때 윈프리는 "나도 사생아로 태어나 어렸을 때 강간을 당한 적이 있어요" 라고 1400만 명이 보는 앞에서 솔직하고 담대하게 이야기함으로 동감을 갖게 하였습니다.내가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남의 아픔을 나누어 가지라는 사명이라고 그는 늘 말했습니다.
(3),남보다 가슴 설레이는 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는 것, 그것만 생각하면 미치도록 좋은 것, 마음 속에 불타는 소원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사명입니다.사명감을 가진 사람은 가장 작아 보이더라도 가장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2. 내재되어 있는 왕성한 생명력
오늘 본문이 전하는 두 번째 메시지는, 생명력을 구비하는 문제입니다.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가 풀 중에서 가장 큰 나무로 성장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왕성한 생명력입니다. 씨가 작고 크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왕성한 생명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이 작고 볼품없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우리 안에 왕성한 생명력이 있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그 생명력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외적인 형편이나 조건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는 작은 씨가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편 그 생명력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데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임재해 계십니다.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임재해 계신 그분을 찾아 들어가 만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아 들어가 만나는 일, 그것이 바로 기도이고 찬송이고 예배이며 혹은 명상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왕성한 생명력, 그것이 가장 작은 씨가 가장 큰 나무로 성장하는 열쇠인 것입니다. 그 생명력을 구비하기 위해, 우리는 늘 하나님을 호흡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세 번째 메시지는,
3. 새들이 깃들 수 있는 나무로 성장하는 문제입니다.
작은 씨가 큰 나무로 성장하니,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합니다. 가시나무에는 새들이 왔다가 상처만 입고 돌아가지만, 겨자나무에는 새들이 와서 충분히 쉬는 것입니다. 작은 씨가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큰 나무가 되는데, 어떤 나무가 되는가의 문제가 마지막으로 남습니다. 가시나무가 되는 사람이 있고, 겨자나무가 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나무에 가까우십니까?
여러분! 인생의 나무에 새들이 날아들고 있습니다. 그 새들이 여러분 안에서 편한 쉼을 얻습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 사람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성한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심신이 피곤하여 그에게 찾아가면, 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제공받고 생명의 말씀을 듣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소개받습니다. 그의 온유하고 넉넉한 기운에 의해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인생의 열매가 열리고 있습니까?
지친 새들이 편히 쉬게 하자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의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왜 우리는 그분의 축복을 받으려 하는 겁니까? 우리가 축복을 받기 원하는 오직 하나의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받은 축복을 이웃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축복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과 그 기쁨을 나누라고, 피곤한 이웃에게 우리에게 주신 그 안식을 나누라고, 지친 새들이 찾아와 편히 쉬게 하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축복은 내릴까요?
우리 교회가 축복받기를 원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만 잘 되고 큰 교회가 되고 우리 교회의 이름이 날리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 하나님을 사랑을 한껏 나누어주기 위해서입니까?
나의 형편과 처지는 작은 씨와 같이 초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여 그분의 생명을 공급받음으로 말미암아, 이 작은 씨가 자라나서 마침내 큰 나무로 성장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 흔들리지 않는 나무, 푸르고 울창한 나무, 그늘이 그윽한 나무, 풍성한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나무, 그 나무에 지나가는 새들이 찾아옵니다. 그 새들이 편히 쉽니다. 새 힘을 얻어 다시금 제 길로 날아갑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그런 나무와 같은 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말합니까? 그들이 여러분에게 찾아오고 싶어 합니까? 혹 가시에 찔릴까봐 피하려 하지는 않습니까? 잘 모르고 찾아왔다가 상처만 입고 돌아가지는 않습니까?
영국 런던의 테임즈 강변에 있는 재판소의 뜰에는 포도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이 포도나무에서 열리는 포도는 영국에서 가장 맛이 좋고 또한 많이 열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식물학자들이 이 포도나무를 번식시켜 널리 보급하기 위해 조사를 했는데 그 포도나무는 다른 포도나무와 조금도 다른 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 자세히 그 나무를 살펴봤더니, 이 포도나무의 뿌리가 강 밑바닥에까지 뻗어있더라는 겁니다. 뿌리가 강 밑바닥에까지 뻗어있어 늘 충분한 수분을 빨아들일 수 있는 조건, 그것이 바로 이 포도나무의 맛과 양의 비결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뿌리가 하나님의 생명력 있는 곳, 능력 있는 생명의 말씀과 깊고 열렬한 기도와 뜨거운 찬송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가장 풍성한 은혜의 맛을 내는 열매가 맺힐 수 있으며 그 열매를 가지고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맛을 주고 기쁨을 주고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혼의 뿌리를 깊게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조건이 겨자씨와 같이 작고 초라한 상태입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황량하고 어두운 상태입니까? 그럴지라도 결코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런 조건과 마음을 더 사랑하십니다. 놀랍게도 그런 조건과 마음을 더 귀히 여기십니다. 다만 여러분 내면 깊숙한 곳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께 여러분 영혼의 뿌리를 영국 테임즈 강변의 포도나무와 같이 깊게 내리십시오. 그리하여 그분으로부터 생명의 자양분을 끊임없이 공급받으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 안에 왕성한 생명력을 구비하십시오. 그 힘을 사용하여 겨자나무와 같이 성장하십시오. 생명 강가에 심어진 뿌리 깊은 나무, 흔들리지 않는 나무, 푸르고 울창한 나무, 그늘이 그윽한 나무, 풍성한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나무와 같은 인생을 일구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지친 영혼들을 찾아가자
그러한 여러분에게 지친 영혼들을 초대하십시오. 아니, 지친 영혼들을 찾아가십시오. 아니, 지친 영혼들이 여러분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 이웃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전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더욱 크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하늘나라를 어떻게 이루어 가셨는지, 세상 사람들에게 벅찬 감격으로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름답고 큰 나무로 자라나기
마 13:31-32 / 지태일 목사
마태복음 13장에는 7개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가장 값진 진주의 비유, 그물의 비유가 있습니다.
먼저 7가지 비유에서 7이란 수는 유대인에게 완전한 수이며, 거룩한 수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의 완전하신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7가지 비유로 천국의 특성을 모두 다 완전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7가지의 비유가 하나 하나 다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7가지 비유를 상호 비교 해석해 보면 그 공통점은 천국의 시작과 내용 그리고 확장, 즉 교회의 성장과 발전 단계를 모두 포함하는 보다 더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1)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복음, 즉 생명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터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이냐 길가나 가시밭이냐 돌짝밭이냐 아니면 옥토냐에 따라 떨어지는데 따라 아예 열매를 못맺거나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비유입니다.
2) 가라지의 비유는 그 복음의 터에서 말씀이 자라날 때 선과 악이,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자라남을 보여 줍니다. 가라지를 보고 이상히 생각하지 말고, 심지어 구별이 안갈 정도로 가짜 신앙도 있지만 주인이 오시면 다 골라 뽑아 불에 던지우니 놀라거나 낙심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3) 겨자씨 비유는 하늘 나라의 양적인 성장과 영향력의 확대가 얼마나 크고 노라운가를 보여 줍니다. 작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있음으로 1년만 자라도 큰 나무가 되고 잎이 우거지고 새들이 깃들고 사람들이 그늘에 쉴 수 있는 그런 나무로 자라남을 천국비유로 말씀하십니다.
4) 누룩의 비유는 보이지 많지만 그것이 밀가루 반죽속에 들어가 크게 확장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질을 높이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5,6) 밭에 감추인 보화와 진주의 비유는 천국을, 복음을 소유할 때 그 기쁨과 가치를 알고자기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는 지혜로움을 의미합니다.
7) 그물의 비유는 마지막 교회의 종말적인 심판을 그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7가지 비유의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비유의 형식을 빌어 말씀하신 것은 깨닫는 자에게는 명료하고 신비롭게 알게 하시는 것이고,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진리를 덮어두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음이 열린 사람에게는 알고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완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덮어 두시려는 뜻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마13:14에 보면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저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마13:11에서도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라 고 하셨습니다. 알아들을 사람에게는 알게 하시고, 완악한 심령의 사람에게는 숨기시고자 하신다면 이 말씀은 심판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늘나라의 진리를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은 진리를 구체화하고, 재미있고, 깊이 생각하게 하고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말씀은 '천국이 마치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 속에 들어있는 의미를 발견하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겨자씨는 어떤 것입니까?
1. 겨자씨는 정말 작은 것입니다
우리 몸은 여러 세포들이 모여 이루어졌습니다. 세포의 평균 크기는 0.017mm라고 합니다. 1mm도 아니고 1mm의 1/100 정도의 크기가 세포 하나라는 것입니다. 정말 작지만 우리 몸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입니다. 이 세포 하나에라도 암세포가 붙어 성장하면 모든 세포로 확산됩니다. 그러니 작다고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겨자씨도 보면 정말 작은 것입니다. 깨보다도 더 작습니다. 볼펜으로 점을 찍어 놓을 정도로 모든 씨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작은 것을 말할 때 겨자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실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가 있지만, 유대인들은 가장 작은 것을 말할 때 겨자씨를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아주 예민한 저울로 달아볼 수 있는 아주 가벼운 무게의 씨앗, 자로 재어볼 수 있는 물질 중에 가장 짧은 길이의 씨앗을 겨자씨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자씨라고 하면 가장 작은 것을 말하는 유대인의 속담, 격언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서는 속이 아주 좁은 사람을 말할 때 밴댕이 속이라 하고, 거기다가 아주 속좁은 사람을 말할 때 벤뎅이 콧구멍보다도 못하다는 말을 합니다. 아주 작은 것을 말할 때 바늘 구멍을 말합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이렇게 아주 작은 것을 말할 때는 바로 겨자 씨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겨자씨는 작지만 생명이 있습니다.
작다고 무조건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만. 겨자씨는 작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있으니 작아도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말라빠져 보이는 작은 씨 하나같지만! 별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봄이 되어 땅에 묻으면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가 맺힙니다. 큰 나무로 성장합니다. 1년만 성장을 해도 얼마나 크게 자라나는지 큰 나무는 4-5m까지도 자라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성장합니다.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들이 실만한 그늘을 가진 나무로 자라납니다.
생명 있음은 작아도 소중합니다. 비록 우리의 신앙이 보잘것없이 보여도, 우리의 삶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 굉장한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황금이 아무리 귀하고 보석이 아무리 값지다 하여도 사실은 한 알의 겨자씨에는 비길 것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겨자씨 속에는 생명이 있으나 황금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17:20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 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적은 믿음을 말씀하실 때 참 믿음을 겨자씨 한 알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도 작아 눈에 보일 듯, 말 듯 하는 그 하찮은 겨자 씨앗을 가지고 천국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작은 씨로 보기에는 작은 하찮은 존재이지만 그 속에 생명력이 있어 자라나는 무한 생명의 가능성을 보시고 계십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1년만 자라도 32절의 하신 말씀처럼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 교회의 규모가 작다고 낙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실망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이나 자녀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물질적 좀 가난하다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좀 낮다고 의기소침하십니까?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소수이지만 작아도 생명있기 때문에 전9:4은 말씀처럼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맞는 말씀입니다. 죽은 사자보다 산 개가 낫습니다. 아주 작은 것처럼 보여도 살아 있는 것, 생명력이 있는 신앙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작지만 생명 있기에 크게 자랍니다.
본문 32절에 예수님은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시작은 작지만 잘 성장하면 큰 나무가 되고 거기에 새들이 깃드는 그런 나무입니다. 작은 씨를 밭에 심으면 겨자씨가 다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어 말 탄 사람이 지나가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란다고 하는데 크게는 4-5m 정도까지도 자라는 나무가 됩니다. 큰 나무로 자라나면 피곤하고 지친 새들이 찾아와 깃들어 안식을 얻습니다. 사람들도 와서 쉴만한 그런 큰 그늘이 생김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는 난초 씨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난초는 자라나도 나무가 되지 못하고 풀입니다. 약한 풀위에는 새들이 깃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겨자씨는 나무가 됩니다. 큰 나무로 성장함으로 거기에 새들이 깃들 수 있습니다.
겨자라는 나무는 십자화과의 1년 또는 2년 초의 재배식물로 봄에 노란 꽃이 피고, 씨는 매우면서도 향기로운 맛이 있어 가루로 만들어 양념이나 약재로 사용합니다. 우리가 냉면 먹거나 해파리 냉채나 중국음식 팔보채가인가요. 그 때 넣어서 매콤하게 맛있게 넣어 먹는 것이 겨자 소스입니다. 톡 쏘는 음식 맛을 낼 때 많이 사용합니다. 또한 겨자의 잎과 줄기는 채소로 먹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아름답게 더욱 성장할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은, 때로는 비록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시작은 미약해도 얼마든지 아름답게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그러면, 그러면 겨자씨 한 알의 비유가 제자들에게 주는 뜻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거대한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면서 크고 힘있는 역사를 동경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기적적으로 당장에 크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눅19:1). 이 때문에 그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작은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고 특히 한 사람을 인내심을 가지고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겨자씨 한 알과 같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서서히 크게 성장하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생활 하면서 걱정되고 시험에 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땅에다가 믿음으로 겨자씨를 심어 놓았지만 오랫동안 변화가 없어 보이는 현상, 느낌 때문에 조급한 마음이 생겨 땅을 파보고 싶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씨가 살아 있다면 왜 싹이 아직 안돋는지? 이렇게 의심하고 땅을 파고 실망하면 그 땅속에, 마음에 자라고 있던 말씀의 씨는 죽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일군들은 농부의 심정으로 참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자라 열매를 맺고 큰 거목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의 역사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를 귀히 여길 줄 아는 영적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커다란 각광을 받지 못하는 두 목사님이 앉아서 자신의 피곤한 목회 생활을 이야기했습니다.
한 목사님이 말합니다.
"나는 지나간 3년 동안 사역을 했지만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거듭난 성도는 로버트 마펫이라는 청년 한 사람 밖에는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목사님이 말합니다.
"나는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한 주간 동안 부흥회를 가졌는데 커다란 기대를 걸고 이 집회를 인도했지만 한 사람 밖에는 얻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숫자가 너무 적어 한 분은 3년 동안에 1명, 한 분은 한 주간 부흥회 결과로 한 사람 밖에 못얻었다는 실망의 대화였습니다.
그런데 수 년 후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한 목사님을 통해서 3년만에 얻었던 한 명의 결신자 로버트 마펫은 아프리카 선교의 기초를 놓았던 선교사가 되었고, 일주일간의 부흥 집회를 통해서 얻었던 유일한 결신자인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륙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불을 지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역사는 하나의 작은 겨자씨로부터 시작됩니다. 작은 것이라고 멸시하고 무시하고 낙심해서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큰 것 되게 좋아합니다. 큰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작다고 멸시하면서서 큰 것만을 추구하는 삶은 올바르지도 못하고 자라지 못하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저 겉물만 들어 작은 것을 우습게 여기는 교만, 여기에서 큰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은 잘 이겼습니다. 그러나 아이성은 작다고 우습게 여기다가 큰 코 다쳤습니다. 너무나 큰 것만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작아도 그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을 때 반드시 자라납니다. 성장합니다. 잘됩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건강한 복을 받습니다.
작은 겨자씨를 심으면 1년 이내에 큰 넝쿨 나무가 됩니다. 성장이 빠릅니다. 본문에서 새들이 깃들인다고 했는데, 이 표현은 새들이 앉게 된다는 뜻입니다. 심기 전에 그 작았던 겨자 씨앗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씨앗의 크기에 비하면 몇 만 배로 자라니까요. 이런 축복을 누리실줄 믿습니다.
물론 씨앗이 넝쿨로 성장하는 데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비가 내려 물을 공급해 주어야 하며, 흙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따듯한 햇빛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라는데 방해거리가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돌멩이나 나뭇가지, 바람이나 환경이 적당치 않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적당히 피하고 넘기면서 식물은 자라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신앙생활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시험을 만나도 생명력 있는 신앙인은 자랍니다. (엡3:16-19)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뿌리가 견고하면 시험이 와도 자랍니다. 바람이 불어와도 괜찮습니다. 흔들리기는 해도 뽑히거나 말라 비틀어져 죽지는 않습니다.
요12:24절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교만이 죽고 혈기가 죽고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때로는 성질도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고 썩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싹이 돋아 납니다.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경은 작은 것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마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작은 것에 비중을 두십니다. 얼마나 충성했느냐이지 얼마만큼 많이 받았느냐가 아님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눅16:10 에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12:32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제자들을 적은 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적은 수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소수에 의하여 확장되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2명의 사도들은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 제국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점점 자라나 마침내 로마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대부분은 학벌도 지위도 없는 어부들이었고 숫자도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수의 12명의 제자들에게 믿음의 씨를 심었습니다. 당시는 아무도 이 사람들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승천하실 때 말씀하신 약속을 보고 들었던 500여 형제들 가운데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합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립니다.
마침내 오순절 이후 성령강림으로 온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증거합니다. 나가 외칠 때마다 하루에도 3천, 5천명씩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울도 함께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세계 선교에 대한 불타는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죄수의 몸으로 사슬에 매여 로마에 가서도 셋집에서 자기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1대1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보기에는 마치 태평양 한 가운데 돌을 던지는 것처럼 무모하고 무의미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셋집에서 한 1대1 역사는 생명력이 있어 점점 자라나 마침내 AD 313년에는 거대한 로마 제국을 복음으로 무너뜨리고 로마의 국교를 기독교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독교는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의 증거가 그랬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믿기 시작하여 한 가정이 다 믿는 가정으로 인도귀가 되었고, 그 가정이 한 집안을 구원하고 한 동네를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크고 웅장한 예배당을 가지고 수만 명 이 모이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세계50대 교회의 절반 정도가 우리 나라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들이 시작할 때는 아주 미약한 출발이었습니다. 어느 가정 집에서 한 두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 주교였던 폴리갑의 젊은 제자가 겨자나무에 기대어 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폴리갑은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슬퍼하는가?" 그 때 그는,
"하나님 나라 확장속도가 너무나 느립니다. 모처럼 신앙에 들어가는 자가 있다 싶으면 다시 신앙을 버리는 자도 많으니, 이래서야 도대체 언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겠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슬퍼집니다."
그 때 폴리갑은 그 제자가 기대고 있는 겨자나무를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그를 격려했습니다.
"근심하지 말게. 하나님 나라는 지금 자네가 기대고 있는 겨자나무처럼 처음에는 작은 씨지만 성장함에 따라 구름을 찌를 정도의 거목이 된다네. 그 성장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여기에 세월을 빌려주기만 하면 차차 무성해진다네. 하나님 나라의 성장 역시 이와 같다네. 자네도 희망을 크게 갖고 날마다 자기의 직분에 충실하며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좋겠네."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욥8:7)고 했습니다. 현대어 번역에는 "네가 처음엔 보잘 것 없었지만 나중에는 크게 번성할 것이다." 처음부터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좀 부족해도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족하다고 말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는 작으니 적으니 없으니 안된다고 말하지 맙시다. 말하는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을 무시하지 말고, 아주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정신을 소유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들에 안전히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많은 양보다 길 잃어 방황하는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열 개의 은전 중에 잃어버린 하나를 찾기 위하여 등불을 켜고 쓸면서 찾아 기뻐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어린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믿음으로 주는 것을 기억하고 상을 잃지 않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일없이 큰 일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마을에 네 사람이 빵집을 개업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우리 나라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이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이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우주에서 제일 맛있는 빵을 만드는 집”이라고 했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은 어느 집으로 갔겠습니까? 네 번째로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으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작은 곳에서,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동네에서, 교회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어디에 내어 놓아도 최선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최고가 되려고 하는 한 사람이 수단을 써서 잠시 정상에 머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선의 기반을 다지면서 올라온 사람은 언제나 정상에 머물 수 있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의 농부처럼 겨자씨를 가지고 자기 밭에 갖다 심어야 합니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앞(존귀함)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 밭, 자기 사업에라고 함은 자기의 것이어야 하는 뜻입니다. 자기 사업, 자기 밭, 자기 일터, 자기 교회, 다른데 가서 많이 뿌리고 많이 거두지 못합니다. 내 가정에, 내 교회에, 내 직장에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가 있음을 믿고 다른 사람의 밭에 뿌려 가지고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밭은 우리 밭이지만, 중요한 생명의 씨앗은 가져와야 합니다. 그 씨앗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씨앗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에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며, 우리는 그것을 심고 기르는 농부들입니다. 씨를 뿌려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열매를 맺으려 할 때 주의 할 일이 있습니다(32절)
농부가 호박밭을 경작하고 있었습니다. 호박이 달리기 시작하자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 밭 사이를 걷다가 밭고랑에서 유리병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밭 옆에 있는 도로를 지나가던 자동차에서 누군가가 내 던진 것일 것입니다. 농부는 시험삼아 아직 어린 호박을 줄기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병 속에다 집어넣었습니다.
그 후 여러 달이 지나 호박이 완전히 익어 추수할 때가 가까워졌습니다. 밭을 살피던 농부가 다시 그 유리병을 발견하였습니다. 유리병은 전에 그가 집어넣었던 호박이 자라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같은 줄기의 다른 호박들은 크게 자라서 잘 익어 있었는데 병 속의 호박은 병의 크기 정도밖에 자라지 못했고 모양도 병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제대로 익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도 열매를 제대로 맺으려면 어떤 크기와 어떤 모양의 병 속에다 자신을 집어 넣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면 마음이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신앙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여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라고 했습니다.
신앙성장을 방해하는 그런 곳에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생활터전을 옮겨야 합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노가 가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지 신앙이 성장하지 유혹과 시험이 기다리는 것으로 빠져들어가면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성장을 위하여 믿음으로 주변을 변화 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머지 않아, 큰 나무로 자라 공중의 새들이 모일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겨자씨는 작지만 자라나 나무가 되었습니다. 나물 정도에 멈추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같은 콩을 물속에서 키우면 콩나무가 아닌 콩나물이 됩니다. 한 알의 콩에 1개만이 올라 오는 콩나물이 됩니다. 그러나 그 같은 콩지이만 그 콩을 밭에다가 심으면 콩나무가 됩니다. 거기에는 많은 콩들이 맺힙니다.
우리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는데 기왕이면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어야 하룰 믿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죽은 씨앗을 심은 사람들도 아님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생명은 자라나는 신비함이 있습니다.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씨앗을 뿌린 밭인지, 안 뿌린 밭인지 구분도 안갑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식물은 자라고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막4:26-29에 보면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밤낮으로 물을 주시고 이슬도 주시고 햇빛도 주셔서 자라게 하여 열매를 거두게 하심니다.
이사야27:2-3에서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그 날에 여러분들의 아름다운 포도원, 가정, 자녀손들, 사업이, 학업의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할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자녀손드이 나물이 아닌 나무로 자라날줄 믿습니다. 그것도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쉴만한 그늘을 낼 수 있을줄 믿습니다. 많은 새들이 날아와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와서 그 가지에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 자라나 열매를 공급하고, 그늘을 내고, 새들의 보금자리가 될줄 믿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뜨거운 햇볕을 피하여 그 나무 그늘에 들어와 쉬고 싶어지는 나무, 교회가 될줄 믿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질병으로 죽음으로 피곤하고 지친 영혼들이 꼭 가보고 싶고 오르고 싶은 우리 교회, 내가 다니는 교회, 섬기는교회,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교회가 될줄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이러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인구성 지역의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요, 교회의 본질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 안에는 안식이 있어요 평안이 넘쳐요. 십자가 보혈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아요. 예수 믿으세요.....
이런 영원한 안식을 줄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야 합니다. 때로는 뜨거운 햇볕을 피하고 때로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찬송과 같이 ♬ 피난처 있으니 환란을 당한 자 이리오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만물이 약동하는 3월이 다가옵니다.
봄이 점점 오고 있습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 추위도 기세를 떨치지만 그래도 신앙의 봄은 오고 있습니다. 만물이 새싹으로 돋아 오르듯이 우리 신앙에도 새 봄이 시작되게 해야 합니다. 추운 겨울이라고 방에 움크리고 앉아 있는 소극적인 그런 자리에서 일어나 씨를 심고 자라 이제는 점점 우리 신앙도 아름답게 성장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교회와 가정들이 심령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든 가정이고 자녀들이고 사업이고 직장이고 공부고 직분이고 일이고 모두 부흥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도 성장해 부흥해야 합니다. 가정도 점점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 나오던 자녀들이 이제 교회 나오고 냉냉하던 사람들이 뜨거워지고 주변에 머믈던 사람들이 신앙의 깊은 자리로 점점 더 나아가는 그런 계절이 오는 줄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나물 정도에 멈춘 교회가 아니라 우리 주변의 많은 죽어 가는 심령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생명을 살리고 구원의 안식을, 참 평안을 제공할 수 있는 큰 신앙의 나무들, 거목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겨자씨 비유
마 13:31-32 / 박상훈 목사
오늘은 우리가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되어 있는 세번째 비유인 겨자씨의 비유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번은 사막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가도가도 끝이 없는 모래벌판만 계속되었습니다. 또 태양 볕은 사정없이 내려 쬐고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물도 이미 오래 전에 바닥이 났습니다. 두 사람은 지칠 때로 지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아들은 체념한 듯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힘들게 걸어가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차라리 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달래었습니다.
"얘야,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걸어가면 틀림없이 시원한 오아시스가 우리를 반겨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다시금 앞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걸어갔습니다. 한 동안 걸어가던 그들의 눈앞에 몇 개의 큰 무덤들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본 순간 아들은 절망한 듯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보세요. 이 사람들도 결국은 죽어서 여기에 묻히고 말았지 않습니까? 우린들 별 수 있겠습니까?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얘야, 이제는 우리가 정말 안심해도 되겠구나! 여기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산 사람들이 이들을 여기에 묻지 않았겠느냐? 그러니 틀림없이 이 근처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을 것이다."
과연 얼마가지 않아서 큰 오아시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동안 갈했던 목을 시원하게 적실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일화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점이 무엇입니까? 소망의 중요성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소망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겨자씨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그것이 자란 후에 커서 나무가 되는 것을 보셨습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셔서 그 가지에 새들이 깃들여 지저귀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를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소망입니까? 예수님이 가지셨던 이 소망을 우리도 마음에 품고서 매일 매순간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참으로 악합니다. 우리가 이미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길가, 돌밭, 또 가시떨기가 나있는 밭처럼 마음이 굳게 닫혀서, 아무리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가라지처럼 온갖 불법을 자행하면서 주변에 있는 곡식들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와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들으면서 마음 한 구석 속에는 일말의 불안한 생각도 가졌을 것입니다.
"저 무수한 가라지들 때문에 곡식이 어떻게 자랄 수가 있겠는가? 저러다가 곡식들마저도 질식해서 죽지 않겠는가?"
이런 불안한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겨자씨의 비유로 제자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그들에게 소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나가서 겨자씨 한 알을 심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시골에 가면 마찬가지입니다. 마당 한 가운데 채소밭을 일구어 놓습니다. 그리고 가지, 고추, 상추 등등 간단한 채소를 심어서 먹습니다. 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자는 톡 쏘는 맛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념이라든지 향료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약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잎과 줄기는 먹기도 합니다.
그런데 겨자씨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작다는 것입니다. 눈에 잘 뜨이지도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무엇을 작다고 할 때 깨알같이 작다고 합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겨자씨만큼 작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깨알씨보다 훨씬 더 작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농부가 자기 밭에 그 작은 겨자씨를 한 움큼 심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두 알도 아닌 한 알을 심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겨자씨에는 놀라운 생명력이 있습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랍니다. 싹이 틉니다. 일단 싹이 트게 되면 쑥쑥 자랍니다. 적어도 그 키가 2m, 또 큰 것은 5m이상으로 자라기까지 합니다. 또 버드나무 가지처럼 양사방으로 그 가지를 뻗어 냅니다. 그러니 한 알만 심어도 채소밭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겨자씨는 새들에게 있어서 좋은 먹이가 됩니다. 그래서 공중의 나는 새들이 그 가지에 둥지를 틉니다. 그러면 어미 새는 일부러 먹이를 구하기 위해 멀리 날아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천국의 특성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간단하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습니다.
천국의 시작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작은 데서 출발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보다도 앞서 와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너무 미미했습니다. 그래서 요1:46에 보면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예수님은 시골에서 목수 일을 하던 무명의 존재, 곧 겨자씨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수가 고작 12명에 불과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실패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배운 것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높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제자들을 이끌고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하니까, 그 당시 종교 지도자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웃기게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눅17:20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눅17:20∼21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또 중요한 뜻이 있는 줄 압니다. 그 당시로서는 백성들의 수가 너무나도 작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처럼 미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겨자씨에는 놀라운 생명력이 있습니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나중에는 심히 창대해 지는 것이 바로 천국의 특성입니다. 따라서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겨자씨처럼 미미할지라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이 겨자씨처럼 하찮게 보인다할지라도 그것을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싹트고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서 태평양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 줌의 눈도 그 무게가 얼마 되지 않지만, 계속해서 쌓이면 나무의 가지를 꺾어버리는 것입니다.
미국의 석유 왕이었던 쟌 록펠러(John Rockefeller, 1839∼1937)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세 가지의 기적을 일으킨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첫번째 그는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일당 4센트의 적은 돈을 받고 땡볕에서 하루종일 감자 캐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자수성가해서 세계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두번째 그는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은 돈을 남을 위해 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일평생 동안 자선사업에 희사한 돈이 7억 5000만 달러였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 돈으로 계산해도 1조에 가까운 돈입니다. 그러니 그 당시에는 얼마나 큰 금액이었겠습니까? 또 그의 후손들과 자식들이 함께 자선사업에 쾌척한 돈의 액수를 모두 합치면 25억 달러가 넘습니다. 아무튼 그는 세상에서 남을 위해서 가장 많은 돈을 쓴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그 기록을 깬 사람이 없습니다.
세번째 그는 한 때 건강이 아주 악화되었습니다. 의사가 얼마 살지 못한다고 진단했습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루에 비스킷 한 조각과 우유 한 잔이 다였습니다. 그런 그가 9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면서도 그의 치아는 하나도 썩지 않았습니다.
록펠러는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남을 위해서 가장 많은 돈을 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절대로 작은 돈이라고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단골로 가는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자기를 위해서 봉사하는 종업원에게 언제나 15센트의 팁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식사를 하고 나서 팁을 주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더니 5센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업원에게 5센트만 팁을 주었습니다. 평소에도 작은 팁에 불만이 많았던 종업원은 결국 록펠러에게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록펠러씨, 내가 만일 당신 같은 부자라면 그까짓 10센트 때문에 쩨쩨하게 굴지 않겠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록펠러는 종업원을 점잖게 타일렀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종업원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네. 부자인 나도 10센트를 아끼는데 어떻게 자네가 10센트를 하찮게 여기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처지가 겨자씨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내가 하는 일이 시원찮아 보인다 할지라도 절대로 그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다. 겨자씨 같은 적은 물질, 겨자씨 같은 적은 시간, 겨자씨 같은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것이 심히 창대해 지는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2. 겨자씨는 자란 후에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됩니다.
천국의 두번째 특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시작은 미약합니다. 그러나 점차 확대되어서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배척했던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만 죽이면 모든 문제는 끝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과연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겨자씨 한 알이 골고다 언덕 위에 심겨졌습니다. 사흘 후에 싹이 텄습니다. 쑥쑥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가지를 뻗어 나갔습니다. 그 가지는 예루살렘을 넘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뻗어 나갔습니다. 안디옥을 거쳐서 소아시아로 뻗어 나갔습니다. 지중해를 건너서 마게도냐로, 로마까지 뻗어 나갔습니다. 온 유럽을 복음으로 점령했습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120년 전에는 그 가지가 우리 나라까지 뻗어 나왔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며 천국의 특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현실이 지금 겨자씨처럼 미미합니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될 줄 압니다.
인도의 수녀 테레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시 그는 알바니아의 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몸집도 작았습니다. 인물도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겨자씨 한 알처럼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늘 자신 스스로를 가리켜서 즐겨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I am nothing(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1979년,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을 때도 그는 연설 가운데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I am nothing(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테레사가 인도의 빈민촌에 뛰어 들었습니다. 사랑을 품고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버려진 사람들, 병든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뭇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사랑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빈민굴의 성자가 되었습니다. 1997년 그가 죽었을 때, 인도에서 국장으로 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 세계에 그의 장례식이 방영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겨자씨 같이 작게 시작했던 그의 삶이 놀랍도록 성장해서 큰 나무처럼 된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주일학교 교사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교회를 가는데 골목길에서 코흘리개 아이들 네 명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잘 설득해서 교회로 전도했습니다. 사랑을 다해서 매 주일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당시 아이들에게 심겨진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큼 미미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삼십 수년이 흘렀습니다. 그는 생일을 맞아 네 통의 축하 전보를 받았습니다. 삼십 수년 전의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이 모두 장성해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선생님의 생일을 기억하면서 축하 전보를 보내온 것입니다. 첫번째 사람은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두번째 사람은 미국 연방 은행의 총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번째 사람은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네번째 사람은 바로 백악관의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의 31대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클라크 후버(Herbert Clark Hoover, 1874∼1964) 대통령으로 우리에게 후버땜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떠한 사명과 직분을 주셨든지 감사한 마음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하십시다. 지금 시작은 미약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나중은 반드시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생명력입니다. 천국의 특성인 것입니다.
3.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게 됩니다.
여러분, 나무로 인해서 누가 혜택을 본 것입니까? 새들이 혜택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의 세번째 특성이 여기 있습니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곳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놀라운 혜택을 받습니다. 그 사람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상관없이 혜택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20년 전에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곳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놀라운 혜택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곳곳에 병원과 학교가 생겼습니다. 문맹이 퇴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천민들의 인권이 향상되었습니다. 어린 아이와 여성의 권리가 향상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도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 경제적으로 잘 살고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축복인 줄 압니다.
그러나 문을 닫아놓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북한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꿈대로 지상의 낙원이 되었습니까?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병들어도 좋습니다. 광우병에 걸려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니 도살하는 소들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앙상한 뼈마디만 남은 손을 내밀어서 도움을 청하고 있는 비참한 나라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
하나님은 지금도 그 믿음의 후손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잘 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나로 인해서 내 가정과 내 이웃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복을 누리면서 살아간다면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서 로마로 후송이 됩니다. 배 안에는 모두 27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동안 평안하던 바다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에 모두가 죽을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선장, 선주, 또는 백부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바울아,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승선한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너의 손에 붙였노라."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 한 사람 때문에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헤르만 헤세의 작품 가운데 어거스터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바로 어거스터스였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 한 신비한 노인이 밤중에 산모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그 아이를 위해서 내가 꼭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습니다.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거스터스의 어머니는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살게 해 주십시오."
그의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는 자라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선생님의 사랑도 받고, 친구의 사랑도 받고, 이웃의 사랑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은 행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사랑만 받고 베풀지 못하니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거스터스는 노인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외롭고 비참한 삶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신비한 노인이 또 나타났습니다. 노인은 어거스터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삶에 만족합니까?"
어거스터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도 한 가지 소원을 이루어주겠습니다.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 받으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받기 보다 베풀어 주고,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해 주고,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축복된 사람일 것입니다.
겨자씨는 지극히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자란 후에는 나무가 됩니다. 그리고 공중의 나는 새들도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 우리의 현재 삶이 겨자씨처럼 미미하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다. 슬퍼하지 마십시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에서 큰 나무를 보시며, 그 가지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셨던 예수님의 소망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로 인해서 내 가정과 내 이웃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축복을 누리는 삶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겨자씨 비유
마 13:31-32 / 박세갑 목사
본문의 이 비유는 주님께서 뚜렷한 설명을 해주지 않은 첫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우리의 자의대로 해석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통속적인 의견으로 모든 것을 보려하고 자기 지식과 경험의 틀 안에서 이해하려 합니다. 이런 문제는 언제나 오류를 낳게 됩니다. 이런 문제를 조심하지 않으면 항상 성경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고 맙니다. 한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 교회 사무실 컴퓨터의 바탕 화면에 귀여운 기린의 얼굴이 나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만화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연스럽게 영수가 이런 화면을 만들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본인에게 물었더니 아니랍니다. 제가 물어보고 확인하지 않았으면 계속해서 오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아무런 문제나 피해가 없기에 괜찮지만 심각한 문제가 그 속에 있을 때에는 쉽게 생각한 작은 편견이 커다란 문제를 만들고 피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 비유를 통하여 일관된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비유도 앞서 우리가 살펴본 씨 뿌리는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와 함께 뒤의 여러 비유들이 일관된 통일성 속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비유들과 모순되는 해석들은 한번 의심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더구나 앞서 공부한 두 비유를 예수께서 해석하셨다는 사실이 이것을 알게 합니다.
이런 해석의 원칙들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본문의 겨자씨 비유는 천국의 모습을 지극히 미미한 것에서 아주 크게 자라는 것으로 나타냅니다. 우리가 앞에서 읽은 두 가지 비유에서 주님께서 설명하셨지만 이 비유에서 제시되는 천국의 성취는 부분적이면서 막연함을 암시합니다. 처음 씨 뿌리는 비유에서 밭에 뿌려진 세 종류의 씨들은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 씨는 가라지와 함께 두 번째 비유를 이룹니다. 그런데 이 두 비유를 해설까지 들은 청중들이 천국의 모습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없는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오히려 ‘이것이 전부인가?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하고 질문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보다 분명한 천국의 모습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음 두 비유에서 천국의 보다 밝은 미래의 전망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 비유를 살펴봅시다. 겨자는 배추 과의 일년생 혹은 이년생 풀입니다. 씨가 많고 향기롭기 때문에 약재와 양념으로 사용되며, 잎과 줄기는 식용으로 이용됩니다. 그 씨는 다른 씨앗보다 작지만 성장력을 대단하여 보통 1미터이상까지 자라고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3미터까지 자라 마치 나무처럼 무성하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중에는 겨자를 정원수로 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겨자씨를 천국에 비유하신 것은 이런 겨자씨의 특성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시작과 성숙한 끝맺음의 유기적 결합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고대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알 수 있도록 크고 웅장하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실제로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임하였습니다. 그 방법에서도 살아있는 씨앗처럼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자라왔습니다. 현세의 천국의 예표인 교회가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으로 시작된 교회는 처음 12제자로 시작되지만, 곧 마가의 다락방의 120문도로 자라고, 이들에 의하여 발전하여 현대에 와서는 온 인류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큰 나무로 성장하였습니다.
교회의 역사 2000년을 살펴봅시다. 교회가 천국을 예표하며 현실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사이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할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의 현상에서 천국을 완전하게 이루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까? 기독교 국가를 이야기 하지만 세상에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가 이미 2000년이 지났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는 단지 “부분적이고 막연한 것”에 그쳤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 세상과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이 미치지 않는, 더 커다란 성취를 위한 능력 있는 일들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일부 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에 실패로 보일지라도 그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비유를 가지고 하나님나라의 목적이 현세대에서 완전하게 성취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려 하는 것은 해석상의 오류에 빠지게 하며 역사의 실체를 오해하게 합니다. 비유들이 공통으로 가르치는 것은 세상의 끝날 까지 어려움, 한계, 혼합, 적대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대립과 분리는 세상의 끝날 까지 계속될 것이고 그날에 완전한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로 돌아갑시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묘사되는 겨자 나무는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겨자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풀(초목)입니다. 결코 나무가 아닙니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크게 자란 것입니다. 이 겨자를 심은 사람은 결코 이렇게 공중의 새가 깃들 정도가 되도록 자라는 것을 바라고 씨를 뿌린 것이 아닙니다. 겨자씨에서 보게 되는 발전의 참된 원리는 겸손하고 온유하며 주제를 넘지 않는 성장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발전은 겸손의 초목인 겨자에서부터 교만심과 우월감 그리고 이기적 욕심을 상징하는 크고 높은 나무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너희 중에 큰 자는 먼저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들은 이런 원칙을 깨뜨린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언제부터인지 교회는 봉사에 앞서 권세를 추구하고, 희생에 앞서 소유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교회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회와 국가가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냉철한 분별력과 이성을 가지고 한번 물어 봅시다. 과연 하나님의 교회가 천국의 이상인 겸손과 온유와 봉사로써 하나님나라를 실현해 왔었는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던 그 당시에 주님을 따르던 자들은 끊임없이 수군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기들 가운데 누가 주인이며, 누가 큰 자이며, 누가 왕의 우편에 앉게 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모두 똑 같은 정신이 팽배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모습은 정말 유대의 작은 씨에 불과 했던 기독교가 갑자기 크고 우람한 나무가 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성장이 기독교에 도움을 주었을까요, 아니면 해를 주었을까요. 많은 학자들이 기독교의 공인이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들을 훼방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때부터 교황주의로 점철된 중세의 기간을 우리는 암흑기라고 평합니다. 세속적 권력과 권위를 갖고자 교회가 노력할 때 겸손과 온유와 봉사의 정신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씨가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가 깃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이고 물질적인 위대함은 위조된 위대함입니다. 기독교가 세속적 권력과 이와 유사한 세력을 취하는 곳마다 부정과 불의와 오염과 생명을 파괴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상의 역사적 현실에서 주님의 겨자씨 비유가 하나님나라의 참된 본질을 다루고 있지 않고, 천국의 궁극적인 결과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언젠가 이 땅에 세워져야 하며, 그 때에는 주님의 낮아지심과 그의 가르침에서 보이신 참된 원칙들이 세상의 역사와 현상 가운데에서 실제로 실현될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때, 우리는 남을 지배하는 자가 큰 자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이웃을 섬기는 자를 큰 자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ideal한 현상이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때에 실현되고 나타나게 될 효과가 지금 사람들 속에 발휘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본 겨자씨의 비유는 하나님나라의 비교적인 실패를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가지셨던 이상들이 오해되고 그릇 적용된 결과를 가르칩니다. 사람들이 세속적인 것들을 이룸으로 기독교를 거대한 제국의 세력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사용하신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예언대로 하나님나라의 표상인 온유함과 겸손함의 상징인 씨가 거짓된 길을 따라 성장한 것입니다. 그 결과 악하고 부정직한 것을 숨겨주고 보호하는 세속적인 세력의 나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본문의 비유의 실질적인 뜻이 무엇입니까? 이 비유의 사실들이 우리의 실생활과 교회 생활에서 우리가 주님의 목적을 실현하려고 최선을 다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온유함과 겸손함, 끊임없는 열정과 헌신적인 봉사, 희생적 수고와 헌신,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받은 사명에 쉬지 않고 나아가는 충성, 세속적인 화려함과 겉치레와 오만 같은 세상의 이상들과 소박하고 친절하게 봉사하는 영적인 이상들의 대조를 분명하고 끊임없이 세상에 잘 보여 줄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습니다. 뿌려진 씨 중에 좋은 땅에 뿌려진 씨만 목적대로 결실합니다. 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뿌려진 씨 중에 원래의 특성을 뛰어넘어 악한 것들을 비호하는 나무로 자랐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책임 영역 안에서 주님의 이상을 따르고 주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온전하게 성별하여 드리는 일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끝 날과 그 뒤에 오는 새 세상의 여명에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성별하여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믿음과 성령
마 13:31-32 / 강용규 목사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영원한 삶을 주시기 위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네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에이지 골든이라는 신학자는 우리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성령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믿음과 성령을 논할 때 짚고 넘어가야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가 갖겠다고 해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종종 믿음을 크기로 말하지만 믿음은 크기가 아니라 질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겨자씨의 비유에서 깨닫게 됩니다.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하지만 이 겨자씨가 땅에 심겨져 자라게 되면 나무가 되고, 많은 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보잘것없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게 되었을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기도하고 산 아래 내려오셨습니다. 어떤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자기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는 이유를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이 산들을 옮겨 저리로 가라 하여도 옮겨질 것이다.” 이 말씀에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겨자씨만한 믿음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는 번역상의 잘못이 있습니다. “너희가 이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because of 그 이유가 뭐냐? You're unbelieve 너희가 믿음이 없다.” 이 말은 믿음이 작고 크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크고 작음을 말하는 양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자신의 종이 병들었으니 고쳐 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따라 나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명령만 하시면 내 종이 나을 줄을 믿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향해 “내가 이스라엘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백부장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따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귀신 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하여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 개들도 자녀에게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삽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크도다. 말씀합니다. 자신이 어떤 대접을 받던지 상관없이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을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100% 예수님을 믿도록 역사하십니다. 80%만 믿고 20%는 우리의 지혜대로 산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여러분을 향해 믿음이 작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반면 100% 예수님을 믿으면, 백부장처럼,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네가 믿음이 있다.”고 축복해 주십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저희가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해라.” 이렇게 용서하려면 우리의 믿음이 더 커야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크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너희 마음속에 있는 미움, 원한, 시기, 이 모든 것이 뽕나무가 뿌리째 뽑혀지듯이 뿌리째 뽑혀져서 저 바다에 던져질 것이다.”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참으로 어려운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하며 산다는 것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원한의 쓴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의 쓴 뿌리, 원한의 쓴 뿌리, 미움의 쓴 뿌리는 성령의 역사로 뿌리째 뽑혀져서 바다에 던져질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미움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작은 겨자씨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 큰 나무를 이루게 됩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큰 나무가 될 줄을 믿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산이 움직여질 줄을 믿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뽕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던져질 줄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님 나를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는 겨자씨 한 알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실 때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 삶 속에 임하며 하나님께로부터 귀히 쓰임받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역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 속의 천국
마 13:31-32 / 안양준 목사
성경을 통해 아무데서나 자유롭게 설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어떤 때는 회당에서, 어떤 때는 산에 올라가서, 어떤 때는 배 위에 올라 서서 말씀을 전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간에 읽어드린 본문의 말씀은 바닷가에서 예수님은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설교는 참 쉽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예수님의 설교의 재료들은 모두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고 아무나 들어도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저도 예수님처럼 쉽고 그러면서도 참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배운 것도 없으면서 자꾸만 어려운 얘기가 나올 때는 참 속이 상하기도 하구요.
그래서 오늘 야외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시면 또 이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을 들려주셨을까?”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저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서 재미있는 비유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 주위에도 커다란 나무들이 울창하게 심겨져 있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사람들도 이 그늘에 편히 쉴 수 있고 공중에 나는 새들도 마음대로 앉아서 쉴 수 있고…
그런데 이 자리에 겨자씨를 보신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아직 성지 순례를 못가보았지만 다녀오신 분들 얘기로 선물로 사올 때 가장 싼 것이 겨자씨라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저에게도 겨자씨 선물이 들어오는데 겨자씨 한 웅큼이래야 손톱만큼도 안됩니다. 그러니 한 알이야 얼마나 보잘 것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 겨자씨가 심겨지면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처음에는 보잘것없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그 믿음이 점점 더 자라나서 나중에는 큰 믿음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 복음, 천국 복음을 이 땅에서 외치니 와닿지도 않고 그게 무슨 얼어죽을 말이냐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이 세상에서 천국을 희미하게 보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천국같은 삶을 사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그 분들도 처음에는 어린아이같은 믿음으로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적은 것입니까?
그래서 저는 믿음의 분량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믿음의 분량은 되도록 크게 가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왕하 13:에 엘리사 선지자가 병들어 죽기 직전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활을 가지고 땅을 치라고 하는데 세 번만 치니까 통탄을 합니다. 왕이 다섯 번 정도만 쳤어도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을 텐데 세 번 쳤기 때문에 세 번밖에 이길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 만큼 하나님도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에게 제발 믿음의 분량을 크게 가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 잘 쓰시던 대로 ‘받을 사람만 받으라’는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겨자씨 한 알이 엄청나게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믿음이 큰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겨자씨 비유
마 13:31-32 / 박덕기 목사
‘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이 왔으되 봄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금년 우리나라의 봄은 100년만의 3월중 폭설과 혹한, 그리고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이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꽁꽁 얼어붙은 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대주재되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불의와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기사 사태를 잘 수습해 주시고, 세계 선교에 우리 민족과 한국 교회를 버리지 마시고 계속 사용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비유 중 ‘겨자씨 비유’를 상고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겨자씨 비유의 배경
겨자씨 비유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적인 주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두 가지 개념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천국입니다. 우리는 분명 우리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 우리가 거하게 될 영광스런 천국이 있음을 믿습니다. 둘째는 상태적인 천국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은 주님이 통치하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셨는데, 이는 귀신이 쫓겨 가고 주님의 통치가 임한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세계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거부되고 경시되는 세계는 그 어떤 개념으로든지 천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거부되는 곳에 어찌 인간의 자유와 희망과 행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유대인들은 이 땅에 불의한 인간의 나라 대신, 하나님의 나라가 그 언젠가는 구세주를 통하여 실현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주님 당시나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먼 미래에 닥치는 ‘종말의 나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으면 천국 갈 텐데 이 땅에서야 어떻게 살면 어떠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물질적이며 현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던 제자들 중에도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진 이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룟 유다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써 압제자 로마 제국을 쳐부수고, 예루살렘 성전에 열두 보좌를 베풀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천국운동을 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아주 영광스럽고 장엄하게, 아주 힘 있고 강력하고 멋지게 성장할 줄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보면, 제자들의 낙담, 실망, 좌절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이 땅의 빵과 검을 외면하는 듯 보이는 예수님께 실망을 하고 주님을 배신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오해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겨자씨 비유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인생들이 보기엔 겨자씨처럼 하찮게 보이지만, 큰 권세와 능력으로 성장해 갈 것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2. 겨자씨 비유의 내용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했습니다.
1)하나님 나라의 시작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하신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이 땅에 시작된 것입니다. 귀신이 쫓겨 가고, 죄인이 용서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악은 패배당하기 시작하고, 인생들에게는 하늘의 신령한 빛이 비취기 시작했습니다. 무언가 인류의 역사에서 없었던 전대미문의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2)하나님 나라의 요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무력일까요? 권력일까요? 재력일까요?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했습니다. 겨자씨는 이 세상의 모든 씨 중에서 가장 작은 것들의 하나라고 합니다. 씨앗은 외견상으로 무척 작고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씨앗에는 그 어떤 것에도 없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씨앗은 조그만 한 알갱이의 모습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는 신비하고 놀라운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로 비유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생명’이라는 의미를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작은 겨자씨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놀라운 생명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요소는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그 인격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상, 하나님 나라는 기필코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특히 겨자씨는 복음의 시작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초라하게 말구유의 아기로 초림 하셨던 예수님과, 사회적으로 미천했던 제자들과, 초대 교회 공동체의 미약함은 겨자씨에 비견될 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씨앗과 같은 생명력이 있다는 데에 참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들의 믿음 또한 성도들의 존재는 모든 씨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 한 알과 같습니다. 그 작은 겨자씨 한 알 속에 감추어 있는 생명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원자력보다 더 강한 세력을 가진 복음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의 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린 부활의 생명력입니다. 씨앗의 생명은 겨울의 추위도 이겨내고 굳은 땅을 헤치고 솟아오르는 힘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력이 곧 복음의 생명력이며,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담대히 신앙을 지키는 생명력입니다. 이처럼 생명력 있는 신앙의 소유자는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고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자라납니다. 기독교는 성장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교회나 성도들의 삶은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말씀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성장력은 무한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가 성장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자라지 않는 성도가 있다면 그는 비정상입니다. 무언가 잘못된 신앙의 병에 걸렸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자라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 잘못된 부분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회개해야 합니다.
3. 겨자씨 비유의 교훈
1)하나님 나라의 확장성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것은 천국 혹은 기독교의 출발이 얼마나 미미하게 시작되었는지 암시해 줍니다. 겨자씨는 씨가 아니라 차라리 티끌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천국을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신 것은 천국 또는 기독교의 출발이 아주 미미함을 나타내 줍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아주 오래 전 성지 순례를 다녀오면서 겨자씨를 가져 왔는데, 교인들이 그것을 구경하려고 데려다 보다가 그만 숨결에 날아가 버리고 찾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제가 서울의 사랑 교회에서 목회할 때 교회 장로님이 저보다 먼저 성지 순례를 다녀오면서 겨자씨라고 하는 것을 가져왔는데 봉숭아 씨나 무우 씨만큼 제법 크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그 다음 해 성지순례 때 제가 직접 겨자 나무에서 겨자씨를 채취해 보았더니 채송화씨보다 훨씬 더 작아요. 여기에 제가 가지고 있는 겨자씨가 있는데 눈이 안 좋으신 분들에게는 아마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습니다. 그러니까 장로님이 가져왔던 봉숭아 씨만큼 큰 씨앗은 많은 사람들이 겨자씨를 찾으니 속여서 팔았던 것이지요.
주님은 천국을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이러한 겨자씨에 비유하심은 이유가 있습니다. 즉 겨자씨와 같이 작은 씨앗이, 싹이 나서 자란 후에는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도 비록 작고 미미한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장차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된 천국 또는 기독교회는 처음에는 아주 미미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천국 복음을 심으셨으나, 그것은 겨우 팔레스틴이라는 지구촌의 한 구석에서 행해진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심으신 주님도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아주 미미한 분이셨습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갈릴리 나사렛 촌 동네 출신이요, 비천한 목수의 가정에서 나신 분이셨습니다. 게다가 주님께서 행하신 일도 하찮게 보이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강도들과 함께 처형당하셨으니, 그 분의 행하신 일이 사람들에게 위대한 일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또 그 분이 훈련시킨 제자들의 면면과 그 수효는 어떻습니까? 모두 서민이거나 무식한 어부 출신이었습니다. 그 숫자도 12 사도를 포함해서 겨우 일백 이십 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출발할 때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기독교가 세계적인 대종교가 되고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종교가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 제일의 종교가 되었고, 세계 인구 1/3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심으신 천국 복음이 지닌 위대함입니다. 마치 겨자씨가 씨앗 중에 가장 작지만 나중에는 3m까지 자라는 것처럼, 천국 혹은 기독교도 처음은 그처럼 미미하게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도록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2)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목표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했습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다 피곤하여 지친 새들은 크게 성장하여 그늘까지 제공하는 겨자나무의 가지에 앉아서 쉼을 얻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뇌와 슬픔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지친 영혼들이 안식처를 찾아 헤매다,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 비로소 참된 안식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부한 사람도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도 있고, 지식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가난한 사람도 있고, 낙심한 자들도 있고, 병든 자들도 있고,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이런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두 와서 깃들일 수 있는 곳,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영혼의 안식과 쉼을 얻는 그런 교회가 되도록 우리는 힘써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3)복음 전파의 사명
주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예언하신 대로 지상의 하나님 나라인 기독교회는 놀라울 정도로 성장을 거듭하였습니다. 천국 운동은 무명의 목수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서 12제자로, 70문도로, 120문도로, 3000명으로, 5000명으로, 큰 무리로,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였습니다. 그 후로도 사도행전을 보면 6:7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 11:21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허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12:24에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14:1에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16:4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19:20에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했습니다. 실로 사도행전은 전도행전이요, 성령행전이요, 부흥행전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교회의 성장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9년 전 언더우드, 아펜셀러 등의 선교사로부터 복음이 전파되어, 현재는 1천 2백만 성도를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성장은 질적인 것이어야 하느냐? 아니면 양적인 것이어야 하느냐? 이 같은 질문은 어리석고 무지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신자가 우리 교회는 한 300명 모이는 가족적인 교회를 만들자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신의 가족적인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 교회의 규모를 미리 제한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숫자 늘리기에만 급급 하는 것이 잘못된 인본주의라고 한다면, 교회의 규모를 자기 취향에 맞게 미리 정하는 것도 똑같이 잘못된 인본주의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아예 숫자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지상 과업은 전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나 숫자에 아주 무관심한 성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일에 태만한 신자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성도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은 교회의 부흥을 위해 전도도, 기도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은 수적인 성장에 열망을 갖고,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비유 중 겨자씨 비유에 대한 교훈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이 비유는 천국 운동의 확장성, 곧 교회와 성도들의 성장에 대한 교훈입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하늘나라는 아주 작은 데서 출발하지만 성장하면서 커져 열방이 거기에 모여 들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그러나 자란 후에는 3. 4m나 되는 큰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크게 자란 겨자나무에는 온갖 새들이 찾아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회도 처음에는 겨자씨처럼 아주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겨자씨와 같은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에 심겨지자 온 유대에 복음의 열매가 맺혔고, 한 사람 빌립 집사의 전도에 원수지간이던 사마리아가 복음화 되었으며, 유대인들의 핍박에 온 세계로 흩어졌던 미미한 성도들로 인해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에 복음의 열매가 맺혀졌습니다.
우리 송정 중앙 교회도 지난 47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이만큼 자랐습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앞으로 더욱 자라나야 합니다. 그 성장에는 어떤 제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의도에 있는 순복음 교회의 신자는 70만이라 하고, 콜롬비아의 보고타에 있는 ICM(International Charismatic Mission) 교회는 현재 40여만 명의 신자들이 모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교회들은 그토록 많은 신자들이 모이니까 이제 전도하기를 그만 두어야 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교회들이 더욱 전도에 열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우리 주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천국 운동은 계속해서 확장되어 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송정 중앙교회도 앞으로 끊임없이 더욱 성장하여 큰 나무처럼 자라서, 큰 나무에 많은 새들이 깃들이듯이, 우리 교회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안식을 얻고, 축복을 받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해를 거듭할수록 구원받은 백성의 수가 크게 더 많아지는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서 어려운 이웃과 교회도 더 많이 돕고,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우리 총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계에도 큰 감화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 기도합시다.
그리고 사 60:22에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고 했는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겨자씨 한 알 같은 미미한 존재일지라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열심히 전도하여 자란 후에는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되는 겨자씨와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 바라고, 그리하여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생명이 자라 생명을 낳고
마 13:31-32 / 이동규 목사
생명이 자라 생명을 낳고
기쁨이 자라 기쁨을 낳고
변화가 자라 변화를 낳고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저희 집 사람이 요즈음 구로동 할인 매장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구로동 공단 근처 어디엔가 유명 브랜드 공장에서 출하하는 이월상품 등을 아주 싸게 파는 곳이 있는 가 봅니다. 대개 80~90% 할인을 하는 가 봅니다. 그래서 저희 집에는 최근에 칠 천원, 만원, 2만원짜리 유명 브랜드 옷들이 늘어났습니다.
한번은 20만원 정도 하는 옷을 2만원에 샀다고 하면서 천하를 얹은 것 보다 더 기뻐하는 걸 보았습니다. 하기야 저희 집은 이태 것 ‘길거리 표’를 전매특허처럼 온 집안이 사용해 오던 터라 집사람이 흥분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제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느낀 것이 많았습니다. 명품은 고사하고 브랜드 한번 마음 놓고 못 사 온 세월이구나 이런 아쉬움도 있구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옷 한 벌에 저렇게 천하를 얻은 것 보다 기뻐하다니.. 한 영혼을 얻고서 저렇게 기뻐했으면 얼마나 좋을 까 이런 생각도 해 봤습니다.
그러더니 며칠 전에는 한 술을 더 뜹디다.
이제는 우리 교우들을 만나면 구로동에 갔더니 이런 옷은 얼마 저런 옷을 얼마.. 정상가격표는 얼마인데 만원 이 만원 밖에 안한다고... 입에 침을 튀기면서 열심히 선전합니다. 그러다가 귀가 얇은 우리 교우 몇 사람은 우리 집사람의 전도를 받고 구로동 옷 가게를 다녀왔을 것입니다. 제가 그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핀잔을 준적도 있습니다. 아무리 싸지만 공짜로 주는 것 아니지 않느냐고.... 그래도 머리카락 휘날리며 삼삼오오 전도를 해서 구로동 옷가게를 다녀 온 것 같습니다. 아마 다녀오지는 못했지만, 저희 집사람 전도받고 구로동 언제 한번 가리라고 맘 먹은 분들, 푹 익은 고구마들 많을 겁니다.
야~ 이런 열정으로 복음증거 하면 오늘은 봉천동 내일은 세계로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기쁨이 이렇게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구나.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어떤 분은 E마트 다녀와서는 완전히 E마트 전도맨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어떤 찜질방 다니면서 완전히 그 찜질방 전도맨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팔체질 한의원을 다니더니 완전히 팔체질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어떤 여행지를 다녀오더니 완전히 그 여행지 홍보,판촉,여행기획,가이드 까지 되었습니다. 물론 완전 무료봉사들입니다. 돈이 나오고 떡이 나오지 않아도 나에게 커미션 한 푼 안 들어와도 입에 거품을 물고 선전하고 자랑합니다.
우리 주님을 자랑하는 마음이 이와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31)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기쁨이 넘치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예수믿고 진정 새생명 얻은 자는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돈이 나오지 않고 떡이 나오지 않아도 입에 거품을 물고 예수자랑, 교회자랑, 믿음자랑, 목사님 자랑, 교우 자랑 합니다.
오늘 본문은 비유입니다. 그런데 무슨 비유인고 하니 하나님 나라 즉 천국에 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 하나님 나라의 속성, 하나님 나라의 본질 이런 것들이 다 이 비유에 나타나 있습니다. 에수님은 그 어려운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아주 간단한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13장은 온통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들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주제는 하나님 나라예요.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의 비유, 감추인 보화 비유, 값진 진주 비유, 그물의 비유...
그 중에 겨자씨의 비유가 두 구절로 아주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모든 씨 중에 가장 작은 씨인 겨자씨가 심겨져 자라 큰 나물이 되듯.. 천국도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배추과의 일, 이년생 풀입니다. 그런데 다 자라면 1-3m 가량 크게 되어 나무처럼 무성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중에는 정원수로 심기도 했습니다. 겨자씨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작은 씨의 대명사처럼 되었습니다. 지름이 1mm 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람에 땅에 심는 씨앗 중 가장 작은 씨앗이라고 합니다. 유대격언 ‘겨자씨만큼 작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겨자씨만 한 게 까분다’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매우 작은 것을 비유하는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작은 씨에도 생명의 DNA가 들어 있으니, 움이 트고 자라 무성한 나무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중의 새들이 깃든다고 했지요. 검은 방울 새, 홍방울 새입니다.
그렇습니다. 겨자씨는 ‘생명력의 위대함’의 상징입니다.
보잘 것 없고, 미약하고 미미하고, 영향력이 없고, 하찮고, 무시할법한, 무게 없는 그런 씨앗, 거기에 위대한 생명력의 파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생명, 기쁨, 변화가 있으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나의 말한 마디, 나의 권유, 나의 하찮은 행동 하나... 이런 복음증거의 씨앗들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는 잘 실감하지 못합니다. 저는 4,50대에 인생의 방황을 끝내고 믿음으로 돌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게 됩니다. 그 중에 십중팔구는 어릴 적 유년주일학교에서 주는 눈깔사탕 하나 받아먹으러 교회에 나가 봤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가본 적이 있는 교회가 그리워 교회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럴적 눈깔 사탕하나 얻어 먹으러 교회로 향한 그 순간 그의 영혼의 DNA 코드에 기독교 신앙의 싸앗이 뿌려지는 겁니다. 그래서 중년의 나이에 신앙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 이 기독교 신앙의 DNA 코드가 작동되어 연어처럼 교회로 회귀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학교에서 주는 눈깔사탕 하나의 위대함을 노래 한 적이 있습니다. “아~ 위대한 눈깔 사탕 하나의 위대함이여!‘
겨자씨처럼 미미 하기 짝이 없는 눈깔 사탕 하나도 이리 위력을 발휘하는 데 우리의 복음도전의 노력은 얼마나 무성한 나무가 되어 자랄까요?
생명력은 심으면 자란다는 것입니다. 심지 않고 두면 썩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씨도 그냥 두면 썩어 없어지고 그냥 한 알로만 존재하다 없어집니다. 그러나 한 알이 심기어지고 썩어지면 큰 열매를 맺고 수 천 개의 씨앗이 됩니다. 나무도 나무지만 얼마나 풍성하고 무수한 씨를 또 낳게 되는 지요. 이것이 바로 생명풍성, 기쁨풍성, 사랑풍성, 은총풍성의 원리입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기쁨이라도 심으면 크고 무성한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주 하찮은 생명이라도 심으면, 아주 크고 무성한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아주 미미한 변화라도 내 안에 있는 변화를 이웃에게 심으면 풍성하고 큰 변화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마25장의 달란트 비유의 핵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묻어두면, 그냥 썩고 맙니다. 내 안의 기쁨, 썩어서 자꾸 작아지고 부패합니다. 묻어두면 내 안의 변화도 자꾸 작아지고 진부해 집니다. 묻어 두면, 내 안의 생명도 신선도를 잃어 갑니다.
우리의 특권이자 의무는 그냥 심는 것입니다. 심기만 하면, 생명 현상은 하나님이 알아서 해 줍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심지 않아 부패해 졌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에는 ‘기쁨’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에덴이라는 말이 재귀동사가 되면 ‘주색잡기에 빠지다’라는 뜻이 된다고 합니다. 내 안의 기쁨을 자기에게로만 고착 시킬 때 그 기쁨은 부패하고 썩어집니다. 변화는 고착(固着)이 되고. 생명은 썩음이 되며, 은총은 원망이 되고, 기쁨은 쾌락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심으면 커집니다. 천국은 심는 것입니다. 다이너 마이트 보다 더 엄청난 생명의 파괴력을 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내가 복음증거로 심으면 나 보다 더 풍성하고 빛나는 사람이 탄생할 것입니다.
심으면, 내 안의 기쁨, 내안의 은총, 내 안의 변화, 내 안의 생명, 무한히 커지고 풍성해 집니다. 하찮다고 생각 말고 크게 심읍시다. 내안의 작은 감사라도 심어 봅시다. 더 큰 감사가 무성한 감사가 생길 것입니다. 내안의 작은 고백이라도 심읍시다. 더 큰 고백 더 풍성한 고백이 될 것입니다. 내 안의 작은 믿음이라도 심읍시다. 작은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이라도 심으면 이 산을 들어 저 바다로 옮기라 하면 그렇게 된다고 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심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삶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묻어 두지 마세요. 시간, 여가, 돈, 재능, 학식... 풍성히 심어 봅시다. 사장 시키지 말고..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 것입니다. 풍성하고 풍성해 질 것입니다. 예수 믿고도 자꾸 오그라들면 심지 않은 까닭입니다. 더 기뻐지고 더 풍성해집니다. 더 감사 넘치고 더 강해집니다. 더 산 같은 믿음이 됩니다.
이런 풍성한 믿음의 결실들이 한 주간의 삶에 넘치기를 바랍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나무 되듯이
마 13:31-32 / 홍문수 목사
할렐루야! 오늘 신반포교회 창립 50주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오늘이 있기까지 눈물로 헌신하신 신앙의 선배들과 성도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1954년 5월 4일 6.25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에 몇 분의 성도들이 이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50년 하나님은 한결같은 은혜로 오늘의 교회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마치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듯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성도들이 이 교회를 통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신 분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 민족과 세계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일이 확인할 수 없지만, 그 복음의 겨자씨가 곳곳에서 큰 나무를 이룬 줄로 믿습니다. 그 가지마다 새들이 깃들 듯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고, 은혜와 축복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일은 앞으로도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줄로 확신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이것은 천국의 법칙입니다. 복음에는 놀라운 생명력이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가 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가장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작은 마을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비참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부활 후 승천하실 때는 소수의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회는 유럽과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 확장되었습니다. 우리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1885년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입국한 후 120년 만에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1천2백만 성도에 5만 교회가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마24:14) 이것이 곧 기독교 역사요 인류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확신 가운데 우리 신반포교회가 앞으로 10년 후에 더 좋은 교회,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흥왕하는 교회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앞으로 더욱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 나아가야 합니다. 흔히 신앙생활의 3대 원리를 “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 말합니다. 정말 성숙한 성도는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오늘 창립 50주년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교회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1] 교회가 중요한 이유
교회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다음의 세 가지 면에서 그 중요성을 살펴봅니다.
① 하나님에게 교회가 중요한 이유 : 교회는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것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고 특히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그 머리이십니다. 성도들은 각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보다 귀중한 존재입니다.
② 세상에 교회가 중요한 이유 :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합니다. 인간 세상의 온갖 질고가 죄로 인하여 생깁니다.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멸망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십자가 복음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행자로서 복음을 전파하며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미국 윌로우 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즈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③ 내 인생에 교회가 중요한 이유 : 하나님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과 상대하십니다. 동시에 교회 공동체를 통해 상대하십니다. 신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1대1 관계의 개인적 행위이지만, 더 나아가 성도들과 함께 교회와 함께 하는 공동체적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을 나누게 하며,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이 세상 살 동안 축복을 누리게 하시고,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하늘의 상급과 영광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사명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i) 은혜의 공동체 - 교회는 어머니의 품과 같습니다. 그 품에 안겨서 영혼의 평안을 맛봅니다. 그리고 신령한 은혜의 젖을 먹습니다. 그럴 때 우리 영혼이 강건해집니다. 영혼이 강건해지면 생활에도 활력이 넘칩니다. 결국 축복된 삶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삼2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것은 기도문이면서 동시에 신앙 인생의 법칙입니다.
ii) 사랑의 공동체 - 교회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입니다. 인종, 성별, 연령, 고향, 학력, 직업, 경제력, 성격 등 모든 게 다른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 예수 믿는 신앙으로 하나가 되고 조화를 이룹니다. 반면 이 세상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반목질시하고 원수가 됩니다. 그렇다고 혼자 살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혼자서는 고독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를 통해 위로 받고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외로운 사람들일수록, 나이 든 사람일수록 교회 공동체의 사랑은 너무 귀한 것입니다.
iii) 사명의 공동체 - 교회는 천국 대사관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당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죄악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변화시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인하여 불의와 부패, 편견과 갈등, 무지와 가난, 질병과 고통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모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으로만 해결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무리 살기 좋은 모습으로 변화된다하더라도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 개선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궁극적으로 천국을 소망합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죄 사함 받고 천국 영생을 얻게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최대 사명입니다. 곧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마28:19~20)
우리는 이런 일들을 감당할 때 인생의 참 보람과 가치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의 사라질 것들, 헛된 것들만 추구하며 인생을 낭비하면 후회막심하고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 협력하여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나의 사명을 도와주는 셈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함께 사명을 감당함으로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상급과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생각해 볼 때, 내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내 인생에 있어 ‘행복의 절대 조건’인 것입니다.
[2] 좋은 교회의 선택과 더 좋은 교회 만들기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교회를 만나야 하고, 일단 교회를 선택하면 더 좋은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① 좋은 교회 선택하기 : 교회 선택은 마치 결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나고, 좋은 교회 만나면 신앙의 방황이 끝난다!”
그러나 이 지상에는 완전한 교회가 없습니다. 완전한 천상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선택하되 그러하고 완전한 교회를 찾느라 교회 쇼핑을 하거나 거듭 방황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처녀가 완전한 신랑감을 찾아 고르고 고르다 평생 결혼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좋은 교회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을 참고하면 됩니다. 나의 영혼을 위해 지속적으로 은혜를 공급받을 수 있는 교회인가? 내가 공동체 안에 들어가 어울리며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교회인가? 사역 프로그램들을 나의 사명으로 삼고 헌신할 수 있는 교회인가?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기본 조건들이 맞으면 일단 좋은 교회라고 보고 선택하면 됩니다.
② 더 좋은 교회 만들기 : 교회를 선택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더 좋은 교회 만드는 데 헌신하는 일입니다. 더 좋은 교회가 되면 그 지체인 내 인생이 잘 풀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은 ‘나의 일’(My Work)입니다. 교회 일이 내 가정의 일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교회를 사랑하는 게 당연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인데, 교회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어찌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귀히 여기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 땅에서 복을 누리고, 저 천국에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반교회는 완전한 교회는 아니지만 좋은 교회입니다. 좋은 성도들과 좋은 장로님들이 있는 사랑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의 은혜가 있는 은혜 공동체입니다. 주님 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선교 지향적 교회요 사명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주마가편(走馬加鞭)의 심정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 50주년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우리는 새롭게 결단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나 자신의 인생을 위해, 그리고 내가 떠나도 계속 이 교회를 통해 신앙 인생을 살아갈 내 후손들을 위해, 더 좋은 교회를 만드는 데 헌신하겠다고 말입니다. 아무쪼록 이런 결단과 헌신으로 우리 신반포교회가 갈수록 더 좋은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저도 여러분도 남은 생애 복된 인생을 살아가고, 주님 오실 때까지 자손만대가 복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새들이 깃드니라
마 13:31-32 / 김상복 목사
위대한 일은 작은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합니다. 그 씨는 너무 작아 별 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에는 대단한 인물이나 선지자가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갈릴리 어부들을 포함한 보통사람 열 두 명과 함께 시작한 교회는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오십일 째 되는 오순절에 무려 3천명의 교회로 성장하였고, 몇 년 사이에 그 예루살렘 교회가 성도 1만 명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핍박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에 보면 그 핍박으로 인해 예루살렘 교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핍박은 축복으로 변하여, 흩어진 성도들이 세계 선교를 담당하였습니다. 이 복음은 전 아시아와 유럽, 영국, 그리고 미국으로 전해졌고, 영국과 미국을 통해 전 세계로 널리 전해졌습니다.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한국에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작은 겨자씨 한 알로 인해 세계 인구 62억 명 중 1/3에 달하는 20억 명 오늘 이 시간에도 세계 방방곡곡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리고 있습니다. 작은 씨앗 하나가 큰 나무가 되는 것이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사내아이가 혼자 동네 교회에 나갔습니다. 교회에서 주는 빵이 좋아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이가 이제 50대 중년이 되었고, 그를 통해 온 가족이 예수를 믿음으로써 그 가문의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데서 출발하시지만 조용히 그 나무를 키워 큰 나무가 되게 하시고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장소가 되게 하십니다.
보스턴의 15살 난 구두수선공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아이는 후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배출한 신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오늘도 그 학교의 영향력은 전 세계에 미치고 있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D. L. 무디입니다. 그는 구두수선공에 불과했으므로 주일학교 교사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교회 선생님들에게 인계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 한 분이 결석을 해서 무디 선생이 대신 가르쳤습니다. 그 이후 무디는 시카고 무디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지금도 그 교회는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신앙운동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작습니다. 작은 겨자씨는 다른 씨와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큰 나무를 이루는 것이 신앙운동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서울의 대치동 골목에서 한 작은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아세아연합신학교 신약학 교수이신 이종윤 목사님 가족 5명과 최순영 장로님 가족 8명 등 모두 13명이 모여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오늘 이 시간 무려 11,000명의 등록교인이 있는 큰 나무로 성장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얼마나 능력이 많고 크신 분인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십니다. 그 분이 여러분의 삶 속에도 같은 역사를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씨앗 하나가 큰 나무를 이루도록 만드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와 함께 큰 나무로 성장해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작은 영적인 씨들이 처음에는 덤불로 자라다가 점점 큰 나무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세계복음화와 교회성장이 민족들과 나라들을 통해서 전 세계에 퍼져갑니다. 겨자씨처럼 시작한 할렐루야 교회는 어느덧 23세의 어엿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삼사백 명 들어가는 가족 채플로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는 23년이 지난 오늘 무려 4천 평의 대지에 건평 2만 평의 건물로 한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큰 나무로 축복해주셨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지,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과 긍휼과 위대하심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십니다. 우리의 삶도 시작은 작아도 하나님이 손들어 축복하실 때 큰 나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교회창립 23주년을 맞아 교회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시작할 때는 장로님이 한 분도 안계셨습니다. 그런데 2년 후인 1982년에 하나님은 6분의 장로님을 세우셨고 그분들을 통해 교회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져나가셨습니다. 그 명단에 보니까 이완익 지창범 최순영 박희완 김인민 여경구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벌써 원로장로님들이 생겼고, 은퇴 장로님들과, 25명의 장로회 회원들과 협동장로님 11분을 포함해 44명의 장로님을 세운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9배의 성장입니다.
처음 8년 동안은 안수집사님과 권사님들이 안계셨습니다. 기록에 보니까 이종윤 목사님께서 아세아연합신학원 교수로 섬기시면서 일종의 파트타임 목회자로서 일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점차 교회가 성장하자 3년 후인 1983년에 신학원을 그만두시고 이 교회의 전임목사로 부임하셨습니다. 그리고 5년 후인 1988년에 처음으로 12분의 안수집사를 세우셨습니다. 고봉호 신성균 강기만 문일석 유성열 심대복 고배식 김영생 송학수 김현구 김국진 김갑중 집사 등입니다. 그런데 현재까지 89명의 안수집사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39명의 권사님이 처음 세움을 받았습니다. 이사례 박복순 조인영 김봉자 조순희 강영호 이선애 정신희 이순자 이광순 권사 등입니다. 지금은 19분의 협동권사를 포함하여 180명의 권사님들이 섬기고 계십니다. 작은 겨자씨지만 점차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제가 1990년 여름에 이 교회에 왔는데 1년 반 만에 예배당을 옮겼습니다. 대치동 교회당이 너무 비좁아서 기도하던 끝에 무조건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1992년 1월 첫 주에 양재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하나님께서 이 분당의 야탑산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달 전부터 권사님들에게 기도하게 하시더니 기도한 지 한 달 만에 이 땅을 주셨습니다. 그 해 10월에 기공예배를 드렸습니다. 6년 만에 오늘의 이 모습을 완성했고 1997년 IMF 한 달 전에 이곳으로 이사하였습니다. 물론 IMF로 많은 어려움을 입었지만, 드디어 23살이 된 2003년 11월 16일 이 시점에는 본당건축이 다시 힘있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내년 봄에 본당에서 예배드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건물로 치면 대치동 당시와 비교할 때 10배의 가치로 불어났습니다. 기업을 하더라도 13년 만에 10배의 성장을 했다면 아주 잘 한 것이지요. 무려 1000%의 성장이 아닙니까? 작고 조용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속에 위대한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 것을 우리가 체험해왔습니다. 이 교회가 이렇게 큰 나무가 된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이 건물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작은 지체들인 우리를 모아 큰 나무를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의 양식 사역은 13년 전 1990년 가을에 3,000부를 출판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1백만 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겨자씨 하나를 큰 나무로 성장시킬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교회는 비교적 조용한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왜 조용한지 가끔 생각해봅니다. 아마 제가 조용한 사람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목사의 성품을 닮는 것 같아요. 뭐 그렇게 떠드는 것이 없어요. 작은 겨자씨가 언제 크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성장해서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곳으로 변해가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 속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 것을 기뻐하십시다.
평신도목회연구원은 1991년에 시작하여 그동안 2,800개의 교회에 영향을 끼쳤고 32,000명이 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무엇입니까? 작은 겨자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께서 계속 움직이시는 것을 보며 깜짝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올립니다. 이 교회를 통해 복음이 선포되고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장하고 성장한 사람들이 뛰어나가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로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셨습니다.
우리 교회의 직원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제가 왔을 때는 몇 명 안 되었지만 지금은 목회자가 33명, 풀타임 직원이 30명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7개의 교구, 60개의 지역, 369개의 다락방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조용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돕고 서로 돌보며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교회를 위해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역적 측면을 보면 36개의 은사중심 사역위원회, 20개의 연령별 선교회, 그리고 교육자선교회, 군선교회, 호스피스 등 7개의 직능별 선교회가 있습니다. 군 선교회는 지난 몇 년 동안 8개 사단의 1,428명의 군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외국어예배 3개, 갓난아이부터 시작하는 교육부서가 8개, 젊은이 부서가 4개, 할렐루야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핸드벨을 비롯한 찬양대가 10개가 있습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는 데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들의 헌신과 성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해외선교사역을 보니 우리 교회 64개 가정과 한 단체에서 23개국에 110명의 선교사가 나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와 헌금 등 여러 방법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선교학교와 DTS, 선교전략학교 등 해외선교훈련을 받은 사람은 1216명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세계를 향한 비전을 품은 성도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 장단기 선교사로 나가 섬기는 모습은 저로서는 보통 기쁜 것이 아닙니다. 국내 선교를 보니, 57개의 농어촌교회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감사하게도 어느 한 교단에 속해 있지 않은 독립교회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교단 교회는 주로 자기 교단을 도와야 하지만 우리 교회는 어느 교단의 선교사든 농어촌 교회든 지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들을 보더라도 14개 교단 목사님들이 함께 섬기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교회는 하늘에나 있지 이 땅에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14개 교단 목사들이 한 교회에서 섬기는 일이 가능합니까?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이 넓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형제자매가 어디에 있든지 지체의식과 통일된 하나의 마음으로 주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더 많은 교단과 교회들을 지원하고 선교사를 지원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의료선교사역을 보니 1981년에 시작되었는데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을 비롯해서 우리나라의 외국인 근로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한 사람의 수가 무려 12,000명입니다. 방송선교도 활발하여 국내 라디오에 2곳, TV 1곳, 워싱턴 기독교 방송국 1곳, 그리고 인터넷 방송으로 이제는 세계 어디서든 우리의 이 예배를 볼 수 있습니다. 엊그제 미국 오클라호마에 계신 어느 분이 우리 교회에 헌금을 보냈습니다. 100불쯤 되나 했더니 무려 7,000불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인터넷을 통해 공부를 하는데 너무 은혜를 받아서 감사헌금을 한 것입니다.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된 우리 교회의 나무그늘 아래에서는 미국에 계신 분들도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할렐루야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고 계십니다.
1997년에 시작된 전도폭발훈련을 통해 무려 709명이 전도훈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전도훈련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복음이 확실해지니까 구원의 감격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훈련된 분이 709명이나 된다는 것은 교회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훈련받을 수 있는 평신도 훈련학교가 8개가 있습니다. 전도학교, 선교학교, 교사학교, 기도학교, 호스피스, 상담, 평신도목회연구원, 성경대학, 부부학교 등입니다. 여러분이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훈련받아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작은 씨 하나가 큰 나무를 이루듯 영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여러분이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복지관을 주셔서 성남의 어른들과 어린이들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지금 다락방마다 교대로 가서 섬기고 있습니다. 처음엔 가고 싶지 않아도 섬긴 후에는 기쁨으로 돌아옵니다. “There is joy in serving Jesus”라는 찬송대로 섬김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지금 건축 중임에도 불구하고 복지관에 많은 지원을 함으로써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센타는 매 학기마다 20개 이상의 유익한 강좌를 개설하여 지역주민들이 배움의 기회를 갖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겨자씨 한 알 같지만 절대로 무시할 일이 아닙니다. 작은 겨자씨가 크신 하나님과 접목될 때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말씀하신 대로, 할렐루야교회는 지난 23년 동안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에서 시작되어, 영적인 훈련을 거쳐 성장하며, 은사대로 섬기는 할렐루야교회가 이 땅에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요, 저입니다. 우리는 성장하는 할렐루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작은 겨자씨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에도, 여러분의 가문에도, 할렐루야 교회처럼 계속 성장하고 창대해지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난 23년을 축복하셔서 크신 일을 이루셨습니다.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올리세!” 여러분과 제가 믿는 하나님은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의 인도자요, 우리를 축복하시는 분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박수를 드리십시다. 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은혜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아멘.
천국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마 13:31-32 / 안효관 목사
화가 미켈란젤로가 무명 시절 어느 날 화방 앞을 지나다가 버려져 있는 대리석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화방에서 돌을 깎고 있는 주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주인장, 저 밖에 있는 대리석은 당신이 버린 것이오?" "그렇소. 그 돌은 쓸모가 없어서 내가 버렸소." 미켈란젤로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왜 저 돌을 쓸모 없다 하시오? 나는 당신이 버린 돌 속에서 자기를 꺼내주기를 갈망하고 있는 한 천사의 모습을 볼 수 있소." 화방 주인은 미켈란젤로를 미친 사람쯤으로 여기고는 "필요하면 가져가시구려!"라고 대답했습니다. "고맙소. 내가 돌 속에 있는 천사를 꺼내주겠소." 미켈란젤로는 화방 주인이 쓸모 없다고 버린 대리석을 주워다가 그 돌 속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한 인물을 끄집어냈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다윗상'이라는 조각입니다. 그는 그 첫 작품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예술가는 사물 속에서 영혼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시인이나 화가들을 보십시오. 저들은 마술사 같아서 저들이 만지는 것들은 무엇이든 꿈틀거리는 생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음악이 그렇고 미술이 그렇고, 모든 예술세계가 다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인들도 예술가이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 또한 사물에게까지도 영혼을 부여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이 세계는 언제나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오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결코 볼 수 없는 천국을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시는 주님도 바로 그런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겨자씨에 깃든 천국'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십니다.
겨자나무는 갈릴리 중부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1년생 식물입니다. 씨의 크기는 아주 작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깨 씨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씨가 자라면 커다란 나무와 같이 됩니다. 커다란 나무와 같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느티나무나 정자나무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키가 약 4m 정도 되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32절에 보면 "나물보다 커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겨자나무의 크기를 나물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씨는 다른 나물의 씨와 다를 바가 없이 작은 것인데, 그 씨가 땅에 뿌려져 싹이 나고 자라면 새들이 길들일 정도로 큰 나무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천국)은 거대한 나라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들어가고 남는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거대한 나라인 천국을 작은 겨자씨 하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겨자씨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천국은 결코 큰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은 작고 미미하지만, 그 안에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큰 역사를 이루어갑니다. 그게 천국의 본질입니다.
'겨자씨'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이 '작다'는 것입니다. 작지만 그 안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공중의 모든 새들이 깃들일만큼 자라갑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부터 크고 장엄하게 시작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보여준 모든 역사가 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초라하고 무력한 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이는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 제국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 안에는 하늘나라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점점 자라나, 마침내 로마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겨자씨 한 알과 같았습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이 학벌도 지위도 없는 어부 출신들이었고 숫자도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12명의 제자들에게 믿음의 씨를 심고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당시는 아무도 이 역사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 안에 있던 복음의 생명력은 점점 자라나 마침내 온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처음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들은 거대한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면서 크고 힘있는 역사를 동경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기적적으로 당장에 크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9:11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장 로마 제국을 뒤엎고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지는 그런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은 로마제국을 뒤엎는 신적 능력을 가진 자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늘나라의 생명력과 복음의 생명을 가진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사람들로 세우셨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는 평범한 목사님 두 분이 앉아서 자신의 피곤한 목회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말씀합니다. "나는 지나간 3년 동안 사역을 했지만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거듭난 성도는 로버트 마펫이라는 청년 한 사람 밖에는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목사님이 말씀합니다. "나는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한 주간 동안 부흥회를 가졌는데, 커다란 기대를 걸고 이 집회를 인도했지만 단 한 사람 밖에는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수 년 후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한 목사님을 통해서 3년 만에 얻었던 한 명의 결신자 '로버트 마펫'은 아프리카 선교의 기초를 놓았던 선교사가 되었고, 일주일간의 부흥 집회를 통해서 얻었던 유일한 결신자였던 데이빗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륙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불을 지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의 작은 겨자씨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자라납니다. 자라서 거대한 나무가 됩니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을 보면 사실 작은 자 하나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우리 중에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남들 앞에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어느 누구 앞에 서도 꿀리지 않는 높은 학문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 말 그대로 '작은 자' 하나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작디 작은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작은 겨자씨들인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이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거대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작지만 우리 안에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면, 믿음의 생명력, 복음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천국을 만들어 가는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몇 백명, 몇 천명, 몇 만명씩 모이는 커다란 교회처럼 성장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진정한 복음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명력만 가지고 있다면 몇 만명씩 모이는 거대한 교회가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아동부나 학생회가 도시의 그 어떤 교회들처럼 굉장히 많은 아이들로 붐비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력을 심어주면, 우리 아이들이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와 같이 거대한 일을 이루는 하나님의 일꾼들로 자라 세상을 놀라게 만들 것입니다.
사사기 7장에서 나오는 기드온의 이야기를 여러분은 잘 아시지요. 기드온의 군대가 미디안 군대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쳐들어온 미디안 군대는 온 들판을 가득메운 메뚜떼와 같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손에 붙여주신 군사는 겨우 300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300명의 군사가 메뚜기 떼보다도 많던 미디안 군대를 무리쳤습니다. 승리했습니다.
우리에게 숫자가 적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사도회 가운데도 약한 사도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복음의 생명이 있고, 믿음의 생명력이 있다면, 그 작은 겨자씨 같은 그 사도회가 우리 교회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데 일등공신이 될 수 있습니다. 전도서 9:4절에서 말씀합니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개와 사자는 그 힘에 있어서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있는 개는 생명력이 없는 사자를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작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생명력이 있는 신앙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은 작아도, 우리 사도회가 지금은 약해 보여도, 우리의 신앙이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생각되어도, 우리 자녀들이 시골에서 자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어도,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복음의 생명력, 믿음의 생명력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지금은 겨자씨 하나처럼 작다 할지라도, 언젠가 그 생명이 자라서 온 새들이 깃들 수 있는 커다란 나무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작은 겨자씨는 땅에 떨어져 썩어질 때에 커다란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명력을 가진 겨자씨라 하더라도 그 씨앗이 땅에 떨어져 묻히고 썩지 않으면 겨자나무로 자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4-25) 땅에 떨어져 죽지 않는 씨앗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죽지 않으면 겨자나무는 고사하고 잡풀도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땅에 떨어져 죽어간 씨앗은 커다란 나무로 자랄 수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겨자씨가 움이 트고 자라서 새들이 깃들 수 있는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의 생명력이 우리의 삶에 드러나 열매 맺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으로 일평생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사명인 복음이 세상 속에 드러나 열매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날마다 죽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죽지 않으면 복음이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까지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행 20:24)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꽃피고 열매맺게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죽어지지 않는 한 우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열매는 맺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어지지 않고 맺혀진 열매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가 아니라, 우리 자신 - 인간의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날마다 십자가 아래 철저하게 죽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기 위해서도 우리는 죽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도 죽어야 하고,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욕정도 죽어져야 합니다. 내 고집을 내세우던 자존심도 죽어져야 하고, 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교만함도 죽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져야 열매가 맺혀집니다.
겨자씨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끄집어내는 가장 중요한 과정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의 생명력, 믿음의 능력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십자가 아래서 죽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내가 죽어지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능력,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놀라우신 능력과 어마어마한 신앙의 잠재력을 주셨습니다. 그게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매일 십자가에 못박는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자랄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맺혀가길 원하시는 아름다운 천국의 열매들을 많이 맺어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세 번째로, 작은 겨자씨가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되었을 때, 그 나무는 모든 새들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포용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죄인도, 창녀도, 강도도,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사던 사람이든지 다 품을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많은 인기와 명예를 얻은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나이 많은 분들이나 젊은이들이나, 천국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모두를 품을 수 있습니다. 그게 하늘 나라의 포용력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4m정도 자란 겨자 나무에 새들이 와서 즐겁게 지져대며 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참새도 있고, 먼 길을 가다가 힘들어서 잠시 쉬어 가는 철새들도 있습니다. 그 나무 위에는 어떤 새도 와서 쉴 수 있습니다.
천국의 모형인 교회도 그래야 합니다. 교회에는 문턱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누구 나가 와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인생의 즐거움을 노래할 수 있는 곳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의 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참된 행복을 찾은 사람들이 모여 잔치하는 공동체입니다.
천국의 잔치 자리에 먼저 모인 우리들이 세상에 아름다운 찬양의 소리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겨자나무 가지에 앉아 즐겁게 노래하는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듣고 지나가던 새들이 함께 깃드는 것처럼, 우리들이 하나님의 품 안에서 행복에 겨워 찬양하며 사랑을 나누는 소문이 세상에 들려져야 하고, 그 소문을 듣고 세상에서 지치고 힘든 영혼들이 이곳을 찾아오도록 해야 합니다. 이곳이 바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겨자씨는 작습니다. 아주 작습니다. 그러나 작은 겨자씨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이 껍질을 깨고 자라서 큰 나무를 만들어 많은 새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겨자씨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혀가야 할 겨자씨이고, 이제 우리의 작은 품에 세상을 품고, 이웃을 품을 수 있는 겨자나무로 자라가야 합니다.
한 여객선이 항해 중 태풍을 만났습니다. 바다는 갑자기 성난 맹수로 돌변했습니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곧 배를 삼킬 기세였습니다. 더구나 칠흑 같은 밤이라서 승객들은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승객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죽음'을 떠올렸습니다. 그때 구조선의 고동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들은 구해달라고 고함을 질렀으나 바람과 파도소리에 파묻혀 구조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지지 않습니다.
승객들은 구조선에 신호를 보내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캄캄한 밤인지라 불빛으로 밖에는 구조신호를 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불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승객이 선장에게 성냥개비 하나를 전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옷을 벗어 바람을 막았습니다. 만약 단 한 개비의 성냥으로 불을 붙이지 못하면 모든 사람의 생명이 파도 속으로 삼켜질 상황입니다. 결국 선장은 그 하나밖에 남지 않는 성냥개비로 등에 불을 붙여 구조신호를 보낼 수 있었고, 모두가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거대한 파도와 휘몰아치는 태풍과도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 인간은 지극히 나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냥 한 개비에 따라 생사(生死)가 갈리는 무력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약한 우리들이라 하더라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에, 복음의 생명력을 가졌기에,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졌기에 우리는 세상 속에 사는 삶이 두렵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희망이 있습니다. 작은 겨자씨 안에 있는 생명이 큰 겨자나무를 만드는 것같이, 우리 안에 있는 그 생명력이 우리를 세상을 품을 수 있는 큰 사람들로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디안 광야에 있던 모세도 지극히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세 안에 있는 구원의 생명력이 거대한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낼 수 있었습니다.
베들레헴 주변에서 양치기로 살던 다윗도 지극히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윗의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의 생명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가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도 그런 생명력이 있습니다. 모세와 같이, 다윗과 같이, 또는 작고 보잘 것 없은 자리에 오신 예수님처럼 우리에게는 역사를 바꿀만한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가정을 변화시키고, 우리 후포를 변화시킬 능력이 우리 안에 잠재해 있습니다. 그건 내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생명력입니다. 믿음의 생명력입니다.
그 생명력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열매 맺혀갈 수 있도록 여러분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크고 놀라운 일을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겨자씨같이 연약해도
마 13:31-32 / 조상호 목사
1872년 도쿄와 요코하마 사이를 달리는 기차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기차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산간벽지의 사람들에게 기차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상당히 고심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기차란 언덕을 달리는 증기선을 말하는 거야." 증기선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기차를 모르는 사람들도 증기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차란 증기의 힘으로 땅위를 달리는 배'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 후 전차가 일본에 수입되었을 때 역시 "전차란 어떤 형태의 것인가?"라는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약속이나 한 듯이 "전차란 말이 없는 마차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시 마차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말이 끌지 않지만, 전차가 마차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 없는 마차가 레일 위를 달린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했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의 사물들을 설명할 때, 상대방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하늘의 일을 깨닫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4장 33절과 34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은 비유 설교의 대가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천국은 마치"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원리가 아닌 천국의 원리를, 사람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의 원리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을 가리켜 '천국장'이라고 부릅니다. 발음을 잘못하면 집에서 요리할 때 먹는 청국장으로 들릴 수 있는데, '청국장'이 아니라, '천국장'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천국>에 대한 개념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천국>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 본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천국을 생각할 때, 우리가 죽으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멸망당하지 아니하고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분명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또 다른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제가 샘지기 모임 때, 자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뉴질랜드에 살고 있습니다. 뉴질랜드의 법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데 뉴질랜드 안에, 우리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아마 이 말을 듣고 놀라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분명히 뉴질랜드 안에 한국이 있습니다. 그곳은 뉴질랜드 법이 미치지 못하고 뉴질랜드 경찰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뉴질랜드 법이 아닌, 한국의 법에 따르는 곳입니다. 어딘 줄 아십니까? 웰링톤에 있는 한국 대사관입니다. 땅은 분명히 뉴질랜드 땅이지만, 한국 정부의 통치를 받는 곳입니다. 범죄한 죄수가 한국 대사관에 들어가도 뉴질랜드 경찰은 그곳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고 한국 정부에 협조를 요청할 뿐입니다. 그래서 뉴질랜드 한국대사관은 뉴질랜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의 통치를 받지 아니하고 한국의 통치를 받습니다. 헬렌 클락 수상의 지시를 받지 아니하고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를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 안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이 하나님 나라이지만, 이 땅에서 예수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그 사람 안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한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하나님 나라는 지상에서 확장되어 가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그러한 차원에서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겨자씨 비유를 가지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31절과 32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우리 나라에서는 작은 것을 묘사할 때, '새앙쥐 같다', '좁쌀만 하다'하다고 합니다만, 유대인들은 작은 것을 묘사할 때, 겨자씨 같이 작다고 표현합니다. 겨자씨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볼펜으로 찍어놓은 점 만한 크기의 씨입니다. 매우 조그마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한다고 말씀합니다. 한번 역사를 뒤돌아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갈릴리라는 조그마한 동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겨우 고기잡이 어부들이나, 당시에 천대받고 손가락질 당하던 세리와 창기, 등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난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97% 이상의 언어로 성경이 이미 번역되었고 5대양 6대주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이 복음이 확산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겨자씨와 같이 연약한 존재이지만,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1)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
우리는 지금의 연약한 모습, 작은 모습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겨자씨가 자라나듯이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작지만 나중에는 거창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원리로는 큰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큰 것을 선호합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시작을 거창하게 하고 큰 것을 좋아합니다. 수년 전 기독신문에 인상적인 기사 하나가 실렸습니다. 박스 기사로 '한국 제일 큰 교회가 문을 닫다'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기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기사를 처음 보았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라면 <여의도순복음교회>인데, 그 교회가 문을 닫다니 무슨 일이 일어났나?' 그런데 그 기사를 자세하게 살펴보고 난 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배꼽을 잡았다고 합니다. 기사에 등장하는 한국 제일 큰 교회는 서울 여의도에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아니라, 어떤 동네의 개척 교회였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허름한 상가 건물의 지하실에 10평정도 되는 공간에 교회를 개척한 후, 교회 이름을 '한국 제일 큰 교회'라고 붙였습니다. 그리고 1년 정도 그곳에서 목회를 하였지만, 교인이 별로 모이지 않자 결국은 문을 닫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조그만 나라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유별나게 큰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나라 이름부터 큰 대(大)자를 앞에다 붙여 대한민국이라고 부릅니다. 왕도 그냥 왕이 아니라, 큰 대(大)자를 사용하여 양평대군, 수양대군, 세종대왕이라고 대(大)자를 넣어 불렀습니다. 요즈음에도 최고수반을 큰 대자를 앞에다 집어넣어 대통령이라고 부릅니다. 최고 학부도 큰 대(大)자가 앞에 붙어 대학교, 대학원이라고 부르고, 외교 사절도 대사라고 부르고, 길 이름도 강남대로, 양재대로, 다리 이름도 한강대교, 성수대교, 잠실대교, 다 대(大)자를 붙여 부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큰 것을 좋아하는 반면, 작은 것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체어맨이나 다이너스티 같은 대형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프라이드 같은 소형차를 운전하는 사람을 우습게 본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아이들에게도 나타나는데, 32평 짜리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13평 짜리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하고 함께 놀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대그룹 회사를 다니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구멍 가게에서 일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을 아예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작은 것은 곧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작은 것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낮아지면 높여줍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됩니다. 약할 때 강하게 됩니다. 약한 자를 통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합니다.
하나님께 아름답게 쓰임 받았던 인물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결코 훌륭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 쓰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삭개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에게는 키가 작은 핸드캡이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의 가장 첫 번째를 기록할 수 있는 영광을 얻은 마태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는 당시에 탐관 오리였던 세리 출신이었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의 과거는 어떻습니까? 과거가 대단히 복잡하여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고 동네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그렇게 좋은 출신 성분의 사람이 아닙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어릴 때부터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본래 학문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하찮은 겨자씨처럼,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리스도의 손을 잡았을 때, 성령의 능력을 받았을 때, 그들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복음으로 뒤집어엎는 거룩한 복음의 혁명군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겨자씨처럼 연약하게 보인다할지라도,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믿는 주님의 사람은 특별한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겨자씨와 같이 연약한 존재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살짝 불면 날아가는 겨자씨 같은 조그마한 존재처럼 보인다할지라도, 스스로를 비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엄청난 가능성이 있고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2) 앞으로 창대케 될 것을 꿈꾸라
그러므로 조그마한 씨앗에서 창대케 될 것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에수님께서는 작다는 이유 때문에 겨자씨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은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모래알도 작고 먼지도 작습니다. 그러나 그것들과 겨자씨가 다른 것이 있다면 생명력입니다. 모래나 먼지는 정성을 다해 땅 속에 심고, 최선을 다해 물을 주고 가꾸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겨자씨는 다릅니다. 그 안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싹이 나고 자라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겨자씨는 대단히 작습니다. 겨자씨의 직경은 약 1mm정도 됩니다. 눈이 나쁜 분들은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작습니다. 그런데 작은 씨 한 알을 심었을 때, 나물보다 자라서 나무로 성장합니다. 보통 1.5미터까지 자라고, 어떤 종자는 높이가 3~4미터에 이를 만큼 자라나, 새들이 날아와서 그곳을 안식처로 삼을 만큼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겨자씨는 작지만 나중에는 창대케 됩니다. 겨자씨 안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엄청난 역사를 일으킵니다.
금요집회에서 한번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미국의 마르타 베리 여사는 몹시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늘 기도하는 기도 제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기처럼 가난하여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든지 학교를 세워서 진정한 교육을 해보겠다는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그녀가 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응답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생각이 나는 것이 있어서 당시에 미국에서 제일 거부로 알려진 헨리 포드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사정 이야기를 하며 학교를 세울 돈을 달라고 당돌하게 요청했습니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포드씨는 다임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우리 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100원 짜리 동전 하나였습니다. 헨리씨는 거절 의사를 그렇게 표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리 여사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다임을 내던지고 돌아왔을 터인데, 베리 여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고 한 행동인데, 그런 결과가 나왔다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베리 여사는 다임 하나를 가지고 씨앗 한 봉지를 샀습니다. 그리고 공터에 뿌리고 열심히 가꾸었습니다. 추수 때가 되어 추수를 하였습니다. 베리 여사는 추수한 것을 가지고 다시 심었습니다. 이렇게 몇 해를 반복했더니 씨앗의 양은 점점 많아졌습니다. 마침내 베리 여사는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건물 한 동을 지은 다음, 베리 여사는 헨리 포드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포드씨, 당신이 몇 해 전에 주었던 다임 하나로 이룬 성과를 둘러봐 주십시오." 포드씨는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는 다임 하나로 건물을 지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직접 확인하기 위해 그 농장에 세워진 학교에 갔습니다. 도착한 후, 농장에 세워진 그 건물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위해서 그 자리에서 100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결국 베리 여사는 그 돈으로 건물들을 세워서, 지금도 LA 근교에 가면 '베리 스쿨'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베리 여사는 작은 동전 속에서 큰 비전을 보았습니다. 하찮은 동전을 보면서 큰 학교 건물을 그렸습니다. 결국 그 작은 동전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베리 여사처럼 작은 씨앗에서 큰 나무를 꿈꾸시기 바랍니다. 조그마한 씨앗을 보면서 새들의 노래 소리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머리에 노랑물감 들이고 바지 자락을 찢어 바람이 솔솔 들어가는 바지 입고 다니는 청년들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밤마다 인터넷 게임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날밤 새우는 아이들을 보면, 도저히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난 달 18일자 신문에 한 책을 간략하게 소개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자서전입니다. 푸틴은 어릴 때 매우 거친 아이였습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푸틴은 길거리에서 무자비하게 싸움을 하던 아이였습니다. 얼마나 싸움박질을 했는지, 그의 콧잔등이 성할 날 없었습니다. 학교에 입학 후에는 학교 규율을 지키지 않았고, 특유의 호전성 때문에 교사들을 성가시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그의 어린 시절은 별 볼 일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러시아의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자녀가 겨자씨처럼 연약해 보여도 창대케 될 가능성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우리 학생들과 청년들이 지금은 연약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학생들과 청년들의 미래를 그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저들을 사용 하실까', '저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을까'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8년 6개월 전에 우리 교회는 두세 가정이 모여 겨자씨같이 부족한 모습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장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어떻게 사용하실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꿈을 꾸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은 연약해도 창립 10주년, 15주년이 될 때에는 엄청난 주의 일을 감당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지금은 뉴질랜드, 그것도 남섬 크라이스트처치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감당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기대하십시오. 겨자씨를 겨자씨 자체로만 보지 마시고, 겨자씨 안에 엄청난 가능성을 보십시오. 겨자씨를 겨자씨 자체로만 보지 마시고 창대케 될 것을 꿈꾸십시오.
3) 주위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을 기대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겨자씨와 같이 연약한 존재이지만, 창대케 되어 주위에 거룩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32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겨자씨 하나가 땅에 심기워졌습니다. 싹이 납니다. 나물보다 커졌습니다. 이제는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조금 있다가 보니까 새가 한 마리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새들이 날아와서 그 나무에 앉아,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작은 겨자씨 한 알이 수많은 새들에게 편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와 놀이 공간을 제공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한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위에 축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축복관과 세상의 축복관과의 차이점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열심히 일해서 내가, 우리 가족이 잘먹고 잘 살면 그만입니다. 누가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준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우리 가정에게 축복하셨으면 그 축복으로 이웃을 섬기라는 것이 기독교의 축복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공부해서 남 주냐?`며 공부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부해서 남 주자!'는 정신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는 남을 주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후에 남을 돕고 남을 섬겨야 합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출세해서 남 주냐?`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출세해서 남 주자!`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남을 돕고 섬기기 위해서 출세해야 합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돈 벌어서 남 주냐?`하며 돈을 열심히 법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돈 벌어서 남 주자!`는 정신으로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좋은 차 타고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선교하기 위해서 열심히 돈벌어야 합니다.
유명한 웨슬리 목사님이 한번은 돈에 대해 설교하겠다고 하자, 그날 따라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어떤 설교를 할 것인가"하는 관심을 가지고 모인 것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돈에 대한 첫 번째 설교 대지는 "할 수 있는 한 돈을 버십시오"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이 밤낮 하늘나라 복음만 전하는 줄 알았는데, 현실감각도 있고 센스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두 번째 설교 대지는 "할 수 있는 한 돈을 저축하십시오"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목사님이 저축까지도 이해하시는구나. 역시 목사님은 센스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대지에 가서 "그것을 다 써버리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하고 열심히 저축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까? 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곳에 쓰기 위해서, 할 수만 있으면 많이 벌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실력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에 크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고지를 점령하시기 바랍니다. 고지를 선점하면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공부만 잘해서 다 고지를 점령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공부하는 지적 능력보다 특별한 손재주 기술을 받았다면, 한눈 팔지 말고 열심히 기술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여러분들이 일하시는 분들이라면 열심히 돈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선교헌금으로, 구제헌금으로, 장학헌금, 등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위에 영향력을 끼치시기 바랍니다. 저는 신문기사를 통해서 택시를 운전하는 기사 아저씨들의 영향력에 대해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선거 때에 택시기사 몇 천명을 당원으로 가입하여 상대방 후보를 교묘하게 비방하고 자기 당의 후보를 선전하는 작전을 써서 크게 재미보았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택시 기사 아저씨들도 주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Dairy를 경영하는 분들도, 식당을 경영하시는 분들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손님들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또한 세계적인 골프 선수인 타이거 우드가 가는 곳마다, 엄청난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데, 크리스챤 골퍼가 세계 정상에 오르면 수많은 골프 팬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위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겨자씨를 시시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겨자씨는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력이 그 안에 있기에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겨자씨와 같이 연약한 존재로 보이지만,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엄청난 가능성이 있고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음을 깨닫고 창대케 될 것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위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