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 비유 설명하심
마 13:36-43
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 13:36-43 / [가라지 비유 설명]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와서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청하였다. 37)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좋은 씨를 뿌리는 농부이며 38) 밭은 세상이다.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백성들이며,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다. 39) 밀 사이에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이고, 추수 때는 세상이 끝나는 날이며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세상 끝 날이 오면 이 비유와 같이 가라지를 따로 뽑아 불어서 불에 태우듯 41) 인자가 그의 천사들을 보내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모든 악한 자들을 그 나라에서 추려 내어 42) 불구덩이 속에 던져 넣을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통곡하며 몸부림 칠 것이다. 43) 그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산 사람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갈이 빛날 것이다.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
예수님께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며 최후의 심판 날을 경고하십니다.
비유 설명(36-39)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비유에 나오는 일곱 요소들의 참뜻을 설명하십니다. 먼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이십니다. 인자는 천국을 건설하시는 왕, 또는 메시야를 의미합니다(단 7:13).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실 때 자주 사용하셨습니다(마 9:6; 11:19; 12:8; 16:13; 17:22; 19:28; 20:18; 26:45). 밭은 심판 때까지 천국의 아들들과 사탄의 아들들이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곧 참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며, 마귀가 뿌린 자들입니다. 원수는 마귀인데, 조상 아담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졌으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마 4:1-11). 추수 때는 심판의 때이며, 이때에 알곡과 가라지가 구별될 것입니다.
최후 심판(40-42) 우리는 악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에 대한 심판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심판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을 때 사람들은 당장 악을 제거하는 대변혁을 행하시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며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벧후 3:9). 하지만 그 많은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불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추수꾼이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듯이, 마지막 심판 날에 천사들이 악한 자들만을 모아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교회와 성도들은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해와 같이 빛나리라(43) 예수님의 설명에서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 악인이 받을 심판과 의인이 받을 영광이 대조됩니다.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다른 길 중에 반드시 하나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악인이 가는 길로서 심판을 받고 멸망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의인이 가는 길로서 하나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의 길입니다. 이 영광의 길은 먼저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길로서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과 섬김과 희생으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적용: 의인이 고난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일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때에 당신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주님만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편입니까?
어떤 일을 하다가 난관에 봉착하거나 힘든 시기를 만나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진정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훗날 그 때를 돌아보며 웃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힘든 일도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 땐 심각한 위기였지만 훗날 돌이켜보면 별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 어려운 일을 만났다면 지나감을 생각하면서 힘과 용기를 내어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해와 같이 빛나리라
마 13:36-43 / 손상률 목사
세상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말할 수 없이 존귀한 자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장 가치있는 존재로 여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6:3에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에게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2:9).
적어도 이와 같은 신분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부여해 주신 특권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세상이라는 불완전한 상황에서 그 신분에 걸맞는 위상이 나타나지 못하고 맙니다. 오히려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에게 너희가 우리보다 나음이 무엇이냐? 하고 물어올 경우 이렇다 할 만큼 드러나는 증거가 없어서 궁색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교훈은 「알곡과 가라지 비유」로써 세상이라고 하는 밭에서 일정기간 동안 알곡과 가라지는 어쩔 수 없이 공존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시기에 가면 알곡과 가라지는 분리되어 하나는 곳간으로 다른 하나는 꺼지지 않는 불길속으로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세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세무궁토록 즐거움이 지속되는 영광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에게 주어진 축복의 언약입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라도 세상에서 고난당하거나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더없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 되고 축복의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Ⅰ. 의인들이란?
어두운 밤을 별과 같이 밝게 비추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창세기 15:5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실 때 그의 후손들을 하늘의 별과 같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의인」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창15:6).
(1) 믿는 자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고 간 인물들의 역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도 제일 첫머리에 나오는 사람은 아벨입니다(히11:4). 예수님께서는 아벨을 가리켜 "의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마23:35).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근본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이거나 그의 행실이 흠잡을 데 없는 완전한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본바탕은 다 죄인이고 현재도 완벽한 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이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버리면 그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0:8에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33-34에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인정하시는 기준은 믿음입니다. 갈라디아서 3:10-11에는 사람이 율법에 근거한 도덕적 행위로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지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실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5:6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4:5에는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에베소서 1:4-5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16에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17에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5:1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특수한 관계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며 자녀를 보호하고 그를 도와 주며 자녀를 위해서 희생도 감수합니다. 그뿐 아니라 부모가 하려는 일을 자식과 함께하고 자식으로 말미암아 계승되고 발전되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세상 가운데서 의인으로 불러 주신 성도들을 통하여 그의 원대하신 뜻과 경륜을 펼쳐 나가십니다. 의인 아벨에서부터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 나라의 주역으로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구속사(救贖史)적 경륜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끼시고 소중히 여기십니다. 시편 1:6에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24:16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97:11에는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렸도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34:15에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
Ⅱ. 아버지의 나라
복음서의 기자들 중 마태는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소개하면서 그의 비유나 설교가운데 천국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주의적인 관점에서 주로 「하늘 나라」(Kingdom of heaven)라는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를 다르게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눅13:18, 요3:3)로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본문에서는 유독 「아버지의 나라」(Kingdom of Father)라고 하였습니다.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는 성도가 천당에서 영원토록 빛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은 하늘 나라 내세에만 고정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통지권이 행사되는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늘 나라뿐만 아니라 세상 나라까지를 통틀어서 하나님의 나라로 보는 것입니다. 다만 현세적 천국의 개념은 불완전한 요소를 지니고 있는 미완성된 상태이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미래의 천국은 완성된 천국임을 뜻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자녀(의인)들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계의 어디에서나 해와 같은 존재로 그 가치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1)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그리스도인의 왕적 권세는 세상 나라에서도 적용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지상명령(至上命令)을 선포하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우주적 대권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으로서 오대양 육대주의 모든 지역과 모든 족속을 상대로 하여 주님의 분부를 수행하여야 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리스도의 왕적 권세를 행사하면서 이 일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와 마귀가 활동하는 이 세상을 「어두움의 권세」라고 하였습니다(엡6:12). 해는 빛을 내어 뿜는 발광체로서 어두움을 추방시키며 죄와 불의와 모든 악의 세력을 파괴시키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햇빛이 있는 곳에는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어두움의 그늘을 좋아하고 그 속에서 서식하는 모든 병균과 부패의 요소는 소멸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강론하시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세운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5:14-15).
시편 84:11에는 「여호와 하나님은 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78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돋는 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9에도 예수님을 「참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밤하늘의 달과 별들이 태양 빛을 받아서 반사하듯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을 받아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2)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사람의 집단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고 성도는 그의 백성으로서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표본입니다. 그렇지만 지상 교회는 엄격한 의미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있는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도 교회를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밭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3:24-25에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보면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라고 하였습니다(38-39절).
이 말씀대로 세상에 있는 교회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원수 마귀의 표적이 되어 여러 가지 시험과 모순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천국의 아들들)은 그 가운데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자기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은 가라지가 알곡보다 더 무성해 보여도 어디까지나 가라지는 가라지일 뿐 결국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들어갈 과정을 밟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알곡은 천국 곳간에 들어 갈 수 있도록 충실하게 영글어가는 법입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합2:4)고 하신 말씀처럼 어떤 상황에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 진리만을 붙들고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경건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리없이 자기의 위치에서 이웃을 향하여 생명력과 의로움을 제공하는 빛의 공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3) 천당입니다.
이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계시록 21:1에 "또 내가 새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완성된 천국을 뜻합니다. 거기에는 가라지도 없고 가라지를 뿌리는 원수 마귀도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죄 문제로 고민하거나 질병과 재난과 죽음에 대한 염려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즐거워하며 찬송과 감사와 영광이 충만한 가운데서 영생복락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의인을 위하여 준비된 처소라고 할수 있습니다(요14:1-3). 그곳에서 의인은 승리자로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딤후4:7-8).
Ⅲ. 해와 같이 빛나리라
성도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빛으로 밝은 삶을 주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되는 말씀을 통하여 그 가는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시119:105). 이사야 60:1에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가 의의 태양으로서(말4:2), 우리에게 언제나 밝은 빛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1) 성별된 삶을 살게 합니다.
요한1서 1:5에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1:7에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빛 가운데서 교제하므로 어두움과 상관없는 밝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는 각종 우상숭배와 음행와 죄악된 일을 일삼다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고부터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이를 어두움에서 빛으로 변화된 모습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5:8-9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사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두움이 발을 붙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도록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어두움」은 죄와 거짓과 불의, 마귀와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한편 「빛」은 의와 진리와 생명을 뜻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5에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9에는 "…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어디에서나 의의 태양되신 그리스도의 빛을 제대로 선전하게 되면 죄와 죽음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의와 생명의 능력을 공급하여 새로운 소망을 갖게 합니다. 말라기 4:2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고 하였습니다.
(3)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뜻합니다.
해와같이 빛나는 얼굴은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17:2에는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을 소개하였는데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하였습니다.계시록 1:16에도 "…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모세는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나와 백성들이 쳐다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출34:29-35). 신약의 스데반도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을 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광채나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행6:15). 오늘도 해와 같은 주님의 얼굴 빛 앞에서 사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예수님처럼 존귀하고 영광된 삶을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 얼굴의 밝은 빛을 반영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있다가 없어지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해와 같이 영원토록 그치지 않는 빛입니다. 이는 자자손손 계대하는 축복이요 이 세상뿐만 아니라 하늘 나라에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축복을 의미합니다. 다니엘 12:3에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의인들의 삶이야말로 매우 복되고 존귀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선언하면서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민6:25-26).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선언하면서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민6:25-26).
천국의 뒷면
마 13:36-43 / 이정선 목사
달의 뒷면을 보신 적 있습니까? 우리는 평생 달을 보면서 살지만, 달의 뒷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달은 지구를 공전하면서 또 동시에 자전하는데, 신기하게도 공전주기와 자전주기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래서 지구에서는 늘 달의 한 면만을 보게 되고, 토끼가 방아를 찧는 그림은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달의 뒷면에는 거대한 인공구조물이 존재한다느니 하는 우스개 같은 소문이 나돌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볼 수 없다 해도 달의 뒷면이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는 뒷면이 있습니다. IMF 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파산을 했지만, 그 경제위기 때문에 돈을 쓸어담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 장수는 싱글벙글 하겠지만, 짚신 장수는 눈물을 삼켜야 하는 것입니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무슨 일이든지 그 뒷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왕으로 오신 예수께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메시야 사역이 그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메시야 사역의 앞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뒷면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메시야의 사역 역시 앞면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천국복음은 의인들만 모아 천국에 들여보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그것이 천국복음의 뒷면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르치시다가 이번에는 집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을 대상으로 특별 과외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말씀들을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은 군중과 구별되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군중은 깨닫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지만, 제자들은 깨달을 때까지 묻고 더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왜 군중은 이해하지 못한 것을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질문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사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자기들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몰랐을까요?
공부하는 학생들도 모르는 것은 선생님께 물어봐야 배울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께서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많은 사람들은 천국의 비밀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더 알려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모르는 것을 예수님께 묻고 더 설명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말씀처럼,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천국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간절히 찾고 구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역시 진리에 대해 별 관심도 없고 열정도 없는 군중과 같은 신자들과, 더 배우고 더 알고 싶어하는 제자들과 같은 신자들로 나뉘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누워 있는 사람 입에 감이 떨어질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잘못하면 코나 눈에 떨어질 수도 있겠네요. 막대기로 따든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따든지 해야 감을 먹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열심히 모이고 공부하고 실천해야 믿음이 자랍니다. 교회 다닌 지는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새신자인 사람들 있어요. 기도도 할 줄 모르고, 성경을 다 읽어본 적도 없고, 교회 다니는 것 빼놓고는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것이 없어요. 반면에 믿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봉사하는 일에도 빠지지 않고, 믿음도 날로 날로 쑥쑥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늘 제자리걸음만 합니까?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믿음이 퇴보하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삽니까? 이거 큰 문제 아닙니까? 위기의식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만약 위기의식마저 없다면,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채 집으로 돌아간 군중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예수께서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데, 지금까지 천국의 비유에서 이처럼 부정적인 내용은 없었습니다.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데 실패한 케이스는 있었지만, 여기서처럼 천국에 대하여 적대적이고 거스르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귀신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왕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했던 사건에 비교될 만합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몹시 화가 나셨었지요.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어두운 것처럼, 예수님의 천국 이야기의 뒷면의 모습이 매우 강렬하고 뚜렷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이 다가올 때의 악인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천국의 주인으로서 예수님의 의도는 천국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불러모으시고 천국에 합당한 사람들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밭에 좋은 씨를 뿌려 좋은 곡식을 거두는 것으로 비유되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밭에 가라지들이 같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하셨는데, 천국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에 관심이 없거나 혹은 더 나아가 방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가라지가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표현된 것은 그들이 마귀의 수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자연 상태의 인간, 즉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사탄의 지배와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 자체가 죄로 물들었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 인간의 입맛에 맞습니다. 여러분, 악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 보셨습니까? 악한 일은 자기자신과 싸우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심지어는 고행을 하면서까지 힘들게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고 죄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없는 인간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자들로서,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일컬어질 만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해서 말할 때, 천국은 현재성과 장래성을 모두 포함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말씀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천국의 현재성입니다. 우리는 지금 천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빌 3:20)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의 천국은 이미 도래한 천국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Already, not yet"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 가라지 비유에서는 천국의 장래성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추수 때는 세상 끝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우주적인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적 종말입니다. 한 개인이 이 세상에서의 생을 마감하고 죽음에 이르면, 그 사람에게는 즉시 종말의 사건과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는 오른편의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마찬가지로 지옥의 형벌에 합당한 사람도 즉시 그렇게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가 이 땅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끝이 예비되어 있고, 그때 우리 주님은 두 번째 오실 터인데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주적 종말입니다. 그때야말로 천국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지금까지 예언되고 논의되던 모든 것이 그때 성취되고 종결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요 5:29).
그렇게 천국이 완성되는 순간은 악인들의 심판도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그 마지막 심판의 날은 여기서 추수하는 날에 비유되고 있는데, 매우 적절한 비유입니다. 쓸모없는 가라지를 모아 불에 사르는 모습은 악한 자들을 풀무불에 던져 넣는 것의 상징입니다.
41절을 보면, 풀무불에 던져지는 대상으로 그 나라에서 넘어지게 하는 모든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지목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물론 하나님의 나라, 좋은 씨를 뿌려 놓은 밭입니다. 그런데 그 밭에 들어와서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넘어뜨리는가 하면 좋은 씨앗, 천국의 아들들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에 노골적으로 대적하고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사탄의 전략은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는 것입니다(마 24:24). 우리 모두 한두 번 이상 그런 것을 목격하거나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 잘 믿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믿음을 저버리는 일도 있고, 또 때로는 우리 자신도 너무 낙심되고 실망해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갈팡질팡하게 되기도 합니다.
또 이 세상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 악을 일삼는 자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악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요, 도전을 의미합니다. 국가에서 법을 만들어 시행하는데, 그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의 권위와 권력에 반항하고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우리 집에 들어올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누군가가 흙 묻은 신발을 신고 그냥 들어온다면, 그것은 저를 무시하고 우습게 본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행해지는 모든 악한 행위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반항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끝날 최후의 심판 때에 악인들은 가라지를 묶어 불에 사르는 것처럼 거두어 지옥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 받고 천국에 간다는 말은 쉽게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옥불의 형벌에 처해진다는 것을 말하기 어려워합니다. 당장 우리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달의 한쪽 면만 보고 그것이 달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처럼, 천국복음의 한 면만 생각하고 말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동기는 그들이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심판을 면하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대로 놔 두면 영원한 형벌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거기서 꺼내주기 위해서라도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을 행한 자들은 다 거두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악이 자행되고, 악한 자들이 득의하는 것을 봅니다. 또 의인이 이유없이 고통을 당하고 악의 피해자가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면 마땅히 악인들이 벌을 받고 의인들이 구원을 받아야 할 터인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흐릅니다. 우리가 억울해서 눈물이 나기도 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 속이 상해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실 때에 하나님의 공의가 온전하게 시행되고, 우리의 슬픔과 한이 끝날 것입니다.
반면에 의인들은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해와 같이 빛난다는 것은 성도에게 주어질 영광의 광채를 의미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렇게 높이시고 귀하게 여겨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죄 없이 인간을 창조하셔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셨던 그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의 승리를 통해 이루어진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그 모습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습니까? 감사와 감격이 홍수처럼 넘쳐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들어가게 될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미 이루어졌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천국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거하게 될 우리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인내로 싸우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 'Already, not yet'의 천국을 사는 우리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천국을 가져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천국에서 해처럼 빛나게 되는 그 순간까지 여러분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날이 다가옵니다
마 13:36-50 / 박조준 목사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해서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비유를 사용하셨습니까? 비유란 천국의 심오한 진리, 영적 세계의 진리를 우리가 잘 아는 이 세상 이야기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비유는 요샛말로 예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를 해석할 때 중요한 것은 삶의 정황 (life situa- tion)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동기가 있고, 배경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씨뿌리는 비유, 알곡과 가라지 비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보물과 진주를 발견한 비유가 있습니다. 그런 데 천국은 미래적인 측면과 현재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천국을 하나의 장소적인 개념으로 이해하 기 앞서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천국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지배하신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가 오늘 주신 말씀에서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을 왕으 로 모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역사 속에 어떻게 일하고 계십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역사, 우리의 현실, 우리 개인들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가를 구체적으로 교훈하고 있습 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일하십니다.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일으 키시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십니다. 혹 우리 가운데는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이렇게 반문을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역사 속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면, 왜 이 세상이 이렇게 모순과 부조리 투성이입니까? 하나님 이 이 역사 속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면, 왜 아직도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고 어두움 가운데 헤매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이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면 하나님의 백성 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도 갈등과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 이 유가 무엇입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 종류의 밭이 나옵니다. 길가와 같은 밭, 돌작밭 같은 밭, 가시덤불 같은 밭, 그리고 옥토 같은 밭이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뿌리를 내릴 겨를도 없이 새들이 와서 주워 먹었습니다. 돌작밭에 뿌려진 씨는 흙이 얇기 때문에 싹이 나는 것 같더니 해가 나니까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위에 뻗 어 있는 가시덩쿨 때문에 싹이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옥토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 맺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놀라운 역사 속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하 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과 핵심은 진리의 말씀이 우리 마음의 밭에 떨 어질 때 그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씨뿌리는 비유에서 네 가지 마음의 밭이 주는 교훈입니다. 둘째, 알곡과 가라지 비유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고통스러운 성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국 은 고통하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밭에 곡식을 뿌렸습니다. 농부는 알곡만 뿌렸는데 이 밭 에는 농부가 뿌리지 않은 가라지가 함께 자라 있었습니다. 가라지는 독초입니다. 먹으면 구역질 이 나고 심하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그런데 가라지는 곡식보다 빨리 자라고 그 뿌리가 얼마나 강 한지, 가라지를 잘못 뽑다가는 곡식이 다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밭은 가라지 때문에 아픔과 혼 란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곡식을 뿌렸습니다. 그 러나 마귀가 가라지를 뿌립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역사하는 곳에는 반드시 사단이 교묘하게 역사합니다. 사단을 뽑아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설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승리 해서 확장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셋째,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자랍니다. 겨자씨는 아마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작은 것을 깨알같다 고 합니다만, 겨자씨는 깨알보다도 작습니다. 이렇게 작은 것이 자라면 공중에 나는 새 가 깃들 수 있을 정도까지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고 미약한 것으로 시작했지만 매우 창대하게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유대 땅 한 구석에서 자라기 시작한 복음의 씨가 지금은 온 지 구를 뒤덮을 정도로 자라고 수십억의 심령이 구원을 얻고 안식을 얻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누룩처럼 부풀어오릅니다. 계속 자랍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단체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입니다. 군대는 지휘 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명령에는 복종만 있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는 사장이 지시하면 사원은 그 지시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압력기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가장 많은 곳이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교회를 버 리지 않으시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문제와 아픔을 가지고 있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며, 복음의 사역을 계속하십니다. 넷째, 보물과 진주를 발견한 비유입니다.
그들은 보물과 진주를 발견하자마자 자기의 모든 소 유를 팔아서 보물과 진주를 자기 것으로 샀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 소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 놀라운 교회, 이 진주, 여기에 천국의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백성들의 주인이시 고 왕이신 예수님, 그분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102장은 G. B. Shea라는 분이 작곡한 것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예수를 믿었습니다. 교회학교에도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 런데 세상에서 출세하고 돈을 벌면서 점점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이 멀어지기 시작했습니 다. 그는 시카고방송국의 연출가였고, 인기 절정의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은 많이 벌면서 도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출세를 하면서도 마음속에서 불안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어릴 때 믿던 예수님에 관한 추억과 향수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지금 인생을 낭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 을 때 어느 성회에 참석하게 되고, 거기서 예수님께 대한 헌신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방송국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다시 전속계약을 하면 지금까지 보다 몇 갑절의 출연료를 주겠다는 내용의 전화였습니다. G. B. Shea는 나는 이제부터 내 모든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라고 하며 방송국의 계약 청원을 거절했습 니다. 그때부터 G. B. Shea의 마음속에서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녀의 친구인 밀러(Miller) 여사에게서 가져왔던 시에 작곡을 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 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 네 예수밖에는 없네 내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라도 소유해야만 하는 보물이 있습니다. 그 보물이 예수님이십니다. 다섯째, 그물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천국이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정의롭고 영광스런 평화가 통치하는 그 나라가 언제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 습니다. 고기를 잡는 어부가 그물을 당겨 해변에 도착했을 때, 그 안에 있는 여러 고기 중에서 못된 것은 추려 내버리고 좋은 고기는 골라서 그릇에 담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세상 끝에도 이 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 를 갊이 있으리라 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이 비유들은 하나의 단계적인 것들입니다.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에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교훈을 하나씩 더 첨부해 나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릅니까?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보면 농부가 알곡만을 그의 밭에 뿌렸는데 농부도 모르는 사이에 밭에는 어느덧 가라지가 섞여서 자라고 있었 습니다. 농부는 자기 밭에 가라지가 곡식과 함께 자라고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밭에 가라지가 없이 곡식만 자라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농부는 알곡만을 생각하고 씨 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이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그렇습니다. 설교자는 말씀을 전할 때 이 말씀의 씨가 알곡이 되기를 바 라는 마음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이 복음을 꼭 받아들여서 진리 안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하나님 께 온전히 순종해서 이 말씀 듣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알곡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바 램으로 목회를 하고 말씀을 전합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복음을 전파하실 때 그런 심정으로 하셨 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현실의 밭을 보면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적입니다. 나는 알곡을 뿌렸는데 마귀가 나도 모르게 가라지를 심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게 별 수 있나? 다 그렇고 그런 거지. 저런 사람이 다 교회엘 나가? 라며 실망하는 말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교회에서 알곡을 기대하십니다. 목회자도 역시 알곡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교회라는 밭에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 밭 에 알곡뿐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자라도록 허용하십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가 라지는 원수 마귀가 뿌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원수 마귀의 역사 때문에 이 현 실에는 가라지가 섞여 있게끔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원수 마귀의 공격목표는 이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세상은 이미 마 귀의 수중에 들어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마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 귀의 공격 목표는 어디입니까? 그 공격 목표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하나님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수 마귀의 공격목표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에 있는 잡음과 아픔이 있는 배후에는 반드시 원수 마귀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하나님의 교회가 소란하도록 그것을 허 용하시는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넓고 깊은 지혜로 그것을 허용하신다는 것 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아마 그와 같은 일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바라보게 만 드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마귀 때문에, 그리고 가라지 때문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여행할 때에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민수기 11장 4절에 이스라 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올 때 같이 섞여 나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서도 같이 섞여 나온 그들에게 서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짜증이 나기 시 작했습니다. 그러나 더 불행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삶을 배워 덩달아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디서 삶을 배웁니까? 어떻게 하루를 살아야 합니까? 마땅히 하나님에게서 교 훈을 받아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 우리들이 주변의 세상 사람들에게서 삶의 방법을 배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래서 교회가 어두움과 고통을 경험하는 일은 없습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은 순진한 농부처럼 시작합니다. 그래서 씨를 뿌려서 순진한 알곡만 거두리라 는 부푼 기대 속에서 신앙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3년, 5년 지 나는 동안에 우리는 더 이상 순진한 농부가 될 수 없습니다.우리는 현실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아, 교회라는 데에도 가라지가 있구나. 그래서 우리는 환멸을 맛보게 되고 때로는 실망합니다. 교회라는 곳이 선남선녀들만 모인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비유의 두 번째 의미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왜 알곡과 가라지 비 유로 끝내지 않고 그물 비유를 말씀하십니까? 여기에 다른 점이 있습니다. 농부가 알곡을 얻기 위해 씨를 뿌릴 때 가라지를 기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은 가라지가 섞여 있었습니다.어 부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가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을 때 그물에 좋은 고기만 있을 것을 기 대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으레 못된 고기도 섞여 있다는 것을 어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 면서도 함께 끌어올립니다. 그러나 바닷가에 이르게 되면 그 순간에 그 문제가 처리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지혜로운 어부처럼 현실적인 안목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그물 속에, 우리의 공동체 안에 가라지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가짜 신자도 있고 가짜 목사도 있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진짜를 버려서는 안됩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현명한 안목을 가지고 똑바로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바라볼 때마다 가라지를 뽑아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 다. 바닷가에 이르기 전에 당장 못된 고기와 좋은 고기를 갈라내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그러 나 오늘 주신 말씀의 중요한 교훈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판단이 정확하 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이 알곡이고 어느 것이 가라지인지, 어느 것이 못된 고기이고 어 느 것이 좋은 고기인지 가장 정확하게 판단하고 가려내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잘 모릅 니다.
그러므로 우리 판단대로 하면 알곡을 다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알곡을 다치게 할까 염려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이 가짜를, 이 악을, 이 어두움을 허용합니까? 내버려두세요. 그 위대한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심판의 날, 거룩하신 주님께서 완전하시고 공의로운 판단으로 가라지와 알곡 을 가려낼 날, 못된 고기와 좋은 고기를 가려낼 그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날에 주님께서 하 실 것입니다. 여기서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의 같은 점이 드러납니다. 어떻게 주님이 심판하십니까? 지금은 섞여 있지만 그날에는 모든 것이 확실하게 구별될 것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 종류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양과 염소,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 른 종,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었지만 그날에는 구별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그날에 가서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상태에 의해서 이미 결정된 것을 주님이 집행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알곡은 언제나 알곡이었습니다. 가라지는 언제나 가라지였습니다. 그날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심판의 그날, 주께서 마지막 선언을 내리시면 그것으로 영원합니다. 풀무 불에 던지우면 그것 으로 끝납니다. 제 2의 기회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구원과 멸망이 다 결정됩니다.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단 한 번의 삶의 기회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을 믿고 구원받으면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이고, 지금 주님을 놓치면 영원한 멸망입니다. 다른 기회는 없 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니까 풀무 불이 등장합니다. 거기서 이를 갈며 우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 리가 심판을 받아 버림받았다는 것은 어떤 현상을 말합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고통입니다. 이를 갈며 는 고통의 극치를 표현한 말입니다. 마취를 하지 않고 수술을 할 경우에는 입에 수건 같은 것을 넣어 이를 갈지 못하게 합니다. 안 그러면 이가 부서질 정도로 간다고 합니다. 이를 가는 고통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상상해 보세요. 바로 이것이 지옥의 절망입니다. 이것이 주님 앞에 버 림받는 절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후회를 동반합니다. 왜 슬피 웁니까? 후회스럽기 때문입니다. 후회해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음부에 떨어진 부자의 외침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여, 사람을 보내사 내 형제들에게 전도를 해 주십시오. 그들만은 여기에 오지 않게 해 주세요. 이 부자였던 사람의 호소는 회개가 아니라 죄책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울고, 자기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발견 하지 못한 후손들이 당해야 할 영원한 고통을 기억하며 아파하는 이 영원한 후회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후회는 할수록 불행한 것입니다. 끝으로, 가라지나 못된 고기가 좋은 고기가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될 수가 있습니 다. 무슨 뜻입니까? 인간적인 방법이나 노력, 혹은 개선이나 수양을 통해서는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점점 노력하면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 은 도덕과 복음의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의로, 우리의 방법으로, 우리의 노력으로는 절 대로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 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어떻게 알곡이 될 수 있습니까?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을 깨 닫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와 죽음과 절망을 담당하신 사실을 믿고, 갈보리 언덕의 예수님을 향하여 내 영혼 중심에서부터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할 때 그 순간 주의 성령께서 는 새생명을 우리 마음속에 심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거듭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알곡이 됩니 다. 추수 때에 탐스러운 알곡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농부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 농부의 기 쁨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자녀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한 생명을 얻어, 탐스러운 생명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을 바라보는 이 아버지의 기쁨, 이 기쁨을 위해서 사시겠습니까?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주인이 내 인생의 문을 두드리는 그날.내 삶을 끝내게 하기 위해서 내 문을 두드리는 그날, 나는 내 주인 앞에 생명이 가득 찬 그릇을 갖다 놓겠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 생명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 풍성한 생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날이 다가옵니다. 그날을 대비하는 삶의 지혜를 소유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