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에서는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합니다. 그들은 밀전병 같은 떡이 떼어지고 포도주를 마시는 순간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화체설이죠. 그러니까 그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를 죽이는 겁니다.
예수님은 성찬을 이야기하시면서 너희들은 모일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의 뜻은 포도주와 떡이라는 형식이 아니라도 말씀 나눔을 통해서 예수의 살과 피가 나누어지는 것이 진정한 성찬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전 우주의 달과 별들이 제자리에 있는 것부터 주님의 말씀에 의해 붙들려 있는 것이며 그것이 우주적 성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에서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아래에 있던 군병들이 예수님께 포도주와 몰약을 권했습니다. (몰약은 진통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엔 신 포도주를 해융에 묻혀 드렸는데 이것은 드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것으로 마시는 포도주입니다. 마지막 만찬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이었고 지금은 못 박히심으로 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성찬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루어진 그 십자가에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가 동시에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모르고 여전히 자기 정욕으로 자기 구원을 탐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교인들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자기 구원으로 읽고 예배도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하고 헌금 하는 것 구제와 선교와 전도에도 모두 자기 마일리지가 들어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와 구제가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순서를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십자가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 다 이루심을 누리지 못하면 자꾸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안한 거에요. 자꾸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자고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들이 사실은 믿음 없음에서 나오는 것들인 거에요,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밖에 없습니다. 우리 죄인들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칠 수도 없고 하나님은 받지도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영광은 예수님만이 드리시는 겁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요17:22)...
우리가 무엇을 행해서 영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아버지께 받으신 그 영광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에요. 구원에 참여 된 자들은 반드시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됨으로 해서 예수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선한 행위가 나올 수 있는데, 이것은 자기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착한 일(토브, 선)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우리의 선함이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다 하신 후에 우리가 한 것인 양 여겨주시는 겁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충성을 다했구나.. 충성된 종아.. 그러니까 우리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와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전도도 선교도 할 수 있다고 나대는 사람들은 나중에 주님 앞에 서면 자기가 행했다고 여기는 것들을 자랑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듣게 될 겁니다.
지금도 세상교회 안에는 세상과 벗된 자들, 정욕으로 잘못 구하는 자들, 살인하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각종 종교행위로 예수를 도륙하는 자들이 있고 형제들을 영적으로 죽이는 자들이 있어요.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자기 것으로 전하는 자들이 있단 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준엄하게 질타를 하면서 “우리는 우리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됨을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기독교가 깨달음의 종교가 되어서 가급적 많은 지식을 축적하여 그것으로 자기를 증명하고 존재화 하려 하는데 이것이 야고보서가 말하는 정욕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구약(옛 언약)을 주시면서 그 계명 안에서 우리를 율법의 정죄 아래(불순종 아래) 다 가두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그 율법이 우리에게 몽학선생(가정교사)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하나 됨이 최종 목적입니다. 그런데도 율법 행위로 의로워 질려고 하는 자들이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입니다.(빌3:18)
하나님이 정하신 의로 오신 그분과 하나 됨이라는 것을 바울의 예로 설명을 하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던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눈이 어두워졌는데 이것은 예수를 알기 전의 인간은 모두 소경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바울이 아나니아에 의해서 비늘이 벗겨지고 난 후에 바로 예수를 만난 기쁨으로 간증과 전도를 하러 다닌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제대로 모르면서 전도를 한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오늘날뿐만이 아니라 초대교회 때에도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복음의 훼방꾼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개’라고 하고 ‘손할례당’이라고도 합니다. 손할례당은 할례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자들을 말합니다. 할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육적 몸을 벗는 것을 의미해요. 아브라함에게 할례 언약을 주신 것은 이것을 미리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도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던 놈들이 거짓교사들이었단 말입니다.
초대교회 때 가짜 교사들이 돌아다니면서 했던 말이 뭔가 하면 너희가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고 예수 믿는 것은 좋은데 예수를 믿는 자라면 안식일과 절기, 할례 정도의 율법 행위는 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예수와 십자가를 몰랐던 겁니다. 믿음없음
어제 제 옆에 앉은 목사가 계속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기본으로 할 것은 해야 한다...그건 스스로 예수를 모른다는 것을 나타내는 거예요. 복음 안에 있는 자유를 이야기하는데도 주일성수 십일조 이야기를 자꾸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계속 나오시다 보면 차츰 알게 될 겁니다...
지난 번 속초 캠프에서도 제일 앞자리에서 계속 저를 째려보는 분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쉬는 시간만 되면 와서 시비를 걸더라고요.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는데 이번에 또 오셨길래 물어봤더니 이제 좀 알겠다고 해요. 문제는 아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인데 그 믿음은 누구도 줄 수가 없지요 오직 주가 되신 분과의 관계니까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것이 부정되면 자기를 부정한 사람에 대해 분노하게 됩니다. 지난 일본 캠프에서도 보면 복음을 얘기하면 다들 인상을 쓰고 다음날은 인사도 안 하고 그랬어요. 바울의 심정이 이해가 되더라구요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런데 이런 현상이 나와야 정상입니다. 오히려 복음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면 참 수상한 거에요. 복음의 자유를 이용해서 자신의 정욕을 합리화 시켜요. 우리는 그렇게 매일 가면을 바꾸어 씁니다. 다중이에요 우리 속에 있는 수많은 애벌레 자아들이 오늘은 이것을 쓰고 내일은 저것을 쓰고 나옵니다. 십자가도 알고 복음의 자유도 알고 다음엔 자기부인도 알고.. 이렇게 하나하나 알아가는 지식으로 자기를 만듭니다. 라캉이 말한 타인의 욕망이 나의 자아를 형성한다는 것처럼 복음을 마치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로 삼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건 믿음 아니에요
십자가복음은 그런 게 아니고 우리를 우리의 육적 자아를 하나하나 해체해서 뼈까지 발라낸 후에 예수만 남깁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은 분들은 힘이 빠지고 우울증까지 온다고 해요. 인간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렇게 있음의 흉내를 내던 내가 죽어 없음의 자리로 되돌리는 게 복음의 능력이란 말입니다. 새창조는 그런 없음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진짜 있음 곧 우리의 존재 의미는 딱 하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찬송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지으신 원래 목적입니다. 모든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살 수 없는 존재에요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해 있단 말이지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음부터 그렇게 만드셨으면 될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우리는 원래 죽은 흙, 티끌, 먼지였어요. 그런 우리는 하나님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우리도 하나님적인 존재들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적인 존재가 된다는 말은 원래 우리에게 없었던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생명이 담길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선 죄로부터 구원이라는 하나님이 정하신 구조, 새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희생, 즉 피가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언약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해오다가 어느 날 화들짝 놀라게 되는 것이 뭐냐하면 내 안에 생명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거에요 내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알고 나면 다른 것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찬송을 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도다”... 왜 부족함이 없었겠습니까? 다윗도 자기애착이 많으니까 침 질질 흘리면서 미친 사람 흉내를 내고 이방 족속에게 가서 빌어먹고 했잖아요.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눈이 열려서 보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자기에게 주신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영원한 기업이요 방패라” 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 자신을 주셨어요. 그걸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인 범죄를 통해 죄와 의는 오직 주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에요
우리가 이것을 알고 ,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이 세상을 등지고 별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굳이 죄 있는 몸으로 인생을 살게 하신 거예요.
본래 없음인 네가 있음의 흉내, 하나님의 흉내를 한 번 내 봐.. 하고 일부러 선악과를 먹게 하셨다니까요.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에게 재산을 주어서 세상에 내보낸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잃어버림과 되찾음이라는 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피’를 남기신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피가 생명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남기고 가신 것이 바로 그 언약의 피였습니다. 우리의 거룩과 생명은 그 피에 있음을 아는 것이 믿음 안이에요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힘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회개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끝나버린 겁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져야 그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도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니까 실패한 이스라엘처럼 자꾸 무언가를 행하려고 하는 겁니다. 자기를 책임져 주실 주가 계신 것을 모르는 거에요 그분의 은혜, 사랑, 용서, 긍휼 안에 들어간 자는 누가 시키지를 않아도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사모하고 모이기를 힘쓰게 되고 섬기게 되고 나눔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 착한 일은 우리가 아닌 그분이 주체가 되어서 우리를 섬기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란 말입니다.
이것을 몰랐을 때에는 나의 열심을 통해서 내가 예수 믿는 자가 맞는지 자꾸 확인하려 합니다. 불안하니까..거기에 교회 안에서 그런 구원의 확신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보니 그들이 시키는대로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전도하고 그런 종교행위만 따라하면 되는 줄로 알아요.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대한 유대교인들입니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도 평안도 없단 말이지요
그런데도 놀랍게도 우리의 요청이나 자격과 상관없이 그분의 때가 되자 그분이 찾아오시어서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 복음을 듣게 해주셨습니다. 창세전에 약속하신 복음, 하나님의 죽음 안에 있는 생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종교의 신전에 갇혀있던 우리를 거기서 불러내신 거에요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복음을 알게 된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살인과 간음과 다툼과 도둑질 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안에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것이 된 그들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그런 사건들이 계속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의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그게 말씀의 사건으로 발생되는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있는 ‘전투하는 교회’가 바로 그들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에베소나 갈라디아 등에 흩어진 교회라고 해봐야 가정집에 몇 명 모이는 작은 교회였어요. 당시 사도들은 각 지방에 있는 유대 회당들에 가서 복음을 전해요. 그럼 유대교를 믿던 사람들 중에서 복음을 믿는 자가 생겨나게 되고 그 사람들이 집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복음을 나누면서 교회가 생겨난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나면 거짓 교사들이 뒤따라 들어옵니다. 정말 귀신들이 귀신같이 알고 옵니다. 바울은 그것을 두고 에베소를 떠나면서 장로들을 모아놓고 이리떼들이올거라고 했습니다. 내가 떠나면 이리떼들이 찾아올 텐데 ‘나는 너희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맡긴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반드시 교회 안에서 분리 됨, 다툼, 싸움 등이 발생해야 정상이에요. 그러나 그것 젤 싫어하는 사람들이 목사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교회를 홪아하고 키우고 싶지 쪼개지는 건 원치 않으니까 “은혜롭게 합시다~” 이 은혜롭게 가 한국교회를 망쳐버렸어요. 참된교회는 진리의 전투 속에서 새롭게 교회가 발생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거룩은 그런 분리 속에서 나타나는 거란 말입니다.
멀리 볼 것도 없습니다. 서울 서머나카페에 한 번 가보세요. 대한민국 귀신이란 귀신은 다 들어와 있습니다. 김성수 목사님이 1년 정도 말씀을 전하고 가셨는데 가시자마자 변질되어서 순식간에 교회를 위한 교회로 바뀌어버렸어요. 그래서 지금은 서머나 가족 한 마당이 아니라 귀신들의 한마당이 되었습니다. 영지주의, 자유주의 신비주의 율법주의 거기다 원어파들까지 총집합해서 잠시 전해진 은혜의 복음을 훼방하고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복음 안다는 사람들이 그런 훼방을 가만히 둡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을 성경으로, 진리로 반박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매주 6,7백 명이 모인다 하고 회원수도 7천명이나 되는데 누구 한 사람 복음을 변개하고 대적하는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이 노는 무대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복음의 진리가 아니라 서머나 교회 하기에 있기 때문이에요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비복음에 대해 아니요 라고 할 복음의 전사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땅의 교회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도 십자가 복음, 은혜의 복음,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뚜렷이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빛은 어둠을 배경으로 나타나는 빛이니까요 야고보 사도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시면서 주기도문으로 기도에 대해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는데, 야고보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 동생이잖아요. 야고보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에는 형제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성령(예수의 하신 일을 증거 하는 영)이 임하시자 오고오는 세대의 교회들을 향해서 자기 형이 했던 이야기들을 풀어서 해석을 해주는 거예요. 여기에 나오는 단어들은 모두 산상수훈의 단어들입니다. 그러니까 산상수훈을 제대로 이해하면 야고보 사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 구했으나 받지 못함 때문에 최초로 살인한 자가 가인이었습니다.
제사라는 게 무엇입니까? 제사는 고대사회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있어서의 제사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의 희생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에 의해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유월절 정신을 계속 보존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제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 제도는 인간이 바랐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율법입니다. 그 제사를 통해 오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약속을 알아야 하는 거에요. 그것을 모르고 반복적이고 형식적인 희생제사를 통해 자신의 욕심을 이루려고 한 것이 이스라엘의 실패인 것입니다.
가인의 살인사건은 가인이 자기의 정욕으로 구한 것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가 만약 정욕으로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만 기다리면서 하나님으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였다면 제사를 받으심의 여부와 상관없이 동생을 죽일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의 제사는 정욕으로 구한 제사의 표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단절된 아담이 낳은 첫 자식이 살인자라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면서 안식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이 어떻게 범죄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 때문에 이천년 동안 기독교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선악과는 아담의 잘못인가 하나님의 책임인가 거기서 나온 게 아담의 자유의지란 거에요 성경에도 없는 그 자유의지
하나님은 6일간 창조를 하신 후에 안식을 하셨지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문제가 있게 지으셨다면 안식을 하시면 안 되잖아요. 안식을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제 창조 끝! 하고 손을 터셨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인간이 범죄를 했어요.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고 죽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선택한 거지요 (어떤 분은 선악과 범죄가 하와로부터 시작된 거라고 하는데 그 하와는 아담의 몸에서 나온 하와입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이 이 선악과 범죄에서 하와와 뱀의 결합의 결과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시간을 빼고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도 과정도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처럼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분이 아니란 말이지요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가 아니라 시작도 끝도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란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묵시 안에서 완성하신 아들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죽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서 완성된 자들인데 이들은 이미 묵시 안에서 완성되어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식을 하신 거예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지금 이미 하나님 나라에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통한 생명 얻음과 그 모든 약속을 십자가로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 등이 우리의 질그릇 안에 담겨야 합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배우기 위해 그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하나님의 안식 안에 이미 완료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아들들이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의 협조나 열심히 필요한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 완성된 새피조물들이 여러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요 하나님의 그 죽음같은 사람이 부어져 완성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의 나라입니다.
좀더 설명을 드리면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오실 때에 무덤이 열려서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궁금해 하기를 그럼 지금 죽은 자들은 그 때까지 잠자고 있는 거냐고 묻습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죽으면 바로 천국에 갑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을 한 것은 시간 속에서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죽자마자 시간 밖으로 튕기어 나가서 묵시 안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우측 강도에게 말씀하시길 “네가 오늘 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잖아요.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정하시고 약속하신 그 자체로 완성입니다. 우리가 있기 전 말씀이 약속이 먼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대로 이 역사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자손으로 선악과를 입에 문 채 태어나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간음과 살인과 도적질 등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길 교회야, 너희들은 간음한 여자들이야.. 하나님과 이혼한 상태야.. 너희들은 하나님을 살해한 자들이고 하나님을 도둑질 한 자들이야 본문이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인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역사내내 시도를 했습니다. 이것을 시편73편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셨다고 했습니다. 오르면 미끄러지고 오르면 미끄러지고 하는 것 이것이 율법입니다. 이런 실패를 통해 율법으로는 의에 이를 자가 없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대로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달라는 절규가 나오게 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란 말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의 어둠이 드러날까 봐 살해까지 해버린 세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자체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며칠 있으면 크리스마스지요 원래 크리스마스는 봄이었어요. 예수님이 오실 당시에 목자들이 양을 풀어놓고 먹였는데, 이스라엘이 양을 풀어놓고 먹일 시기는 겨울이 아니라 봄입니다. 12월 25일이라는 날짜는 로마의 태양신의 날에 끼워 맞춘 겁니다. 성탄절이 되면 나오는 말이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인데 그말은 그렇게 함부로 입에 올릴 말이 아닙니다. 너희들 이제 다 죽었다.. 세상 끝났다.. 라는 뜻이에요.
하나님 아들을 살해한 세상, 하나님의 원수 된 자들,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지 못한 자들은 모두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사이가 좀 안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세상’이라고 하는데, 그 세상과 벗 된 자들이 다 간음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태어나 세상밖에 모르고 살아가는 자들은 다 간음한 자요 하나님과 원수된 자라는 말이에요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아주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너희들 안에 성령이 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날 수 있니?...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성경이 말하는 교만은 잘난 척 하는 그런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도 나 혼자 독자적으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인 교회들아, 너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살수 없는 자들이야.. 그 은혜의 절대성이 아니면 너희가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자들만 이스라엘이야.. 교회야 거지 나사로의 삶이 너희들의 삶이란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존재일 수 있는 거야..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거했던 고센땅은 매우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노력만 하면 이모작, 삼모작을 하면서 잘 살 수 있었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지나 들어갔던 약속의 땅은 천수답 땅이에요.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지 않으면 굶어야 했던 곳입니다. 구약에는 비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요.
이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이에요. 은혜의 필연성을 배우는 곳. 우리는 이거 하나 배우고 가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해서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맛나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결국은 아버지의 품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세상 맞구나 그것을 알고 집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상거가 아직 먼데 동네 어귀에서 아버지가 기다리시는 게 보이는 곳까지 가는 것 그게 우리의 신앙여정이에요
아버지가 동네 어귀에서 기다리는 이유는 아들이 오면 맞아죽을까 걱정을 해서입니다. 당시엔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타내서 나간 놈들은 율법에 따라 동네 장로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기다린 겁니다. 이게 아버지 마음이에요.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을 하십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그 시간까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 과정이 우리의 인생살이에요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싫어하고 이용하려 했는지가 발각이 됩니다. 왜 십자가여야 하고, 왜 놋뱀을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되고, 왜 불뱀에 물려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율법의 정죄 아래 가두어진 세상 중에서 그 율법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와 자유와 사랑과 은혜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그들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 직접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담아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 육신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선악을 하나의 진리로 가르쳐주시기 때문에 그분이 모노게네스(독생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마음과 약속을 알게 되면 비로소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하는 기도는 우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자입니다. 죽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그 약속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게 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제게 약속하신 그빚 갚으세요.. 가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내시겠다는 창세전 약속을 말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다 이루셨습니다. 그분의 영이 우리 교회에게 임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가 누구시며 예수가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데 그러면 드디어 하나님께 구할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게 바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그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그 은혜의 영광을 구하라는 겁니다.
무조건 예수 이름으로 구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갚으시기를 기도하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동물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눈만 뜨면 기도를 합니다. 우리 속에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욕망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점점 입을 닫게 됩니다. 나이가 많아서도 엄마한테 젖 달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라는 기도가 바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교회가 구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본문에서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참 아들이 되는 것,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는 것,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해와 달이 없다고 해요. 왜? 우리가 빛의 아들이니까요. 하하 자체발광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참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또 묻는 겁니다. 너희들 정신을 어디에 팔고 어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느냐고... 말세에는 귀가 가려워서 자기가 좋아하는 많은 스승을 두고....목회서신에 나온잖아요 요한사도는 요한1서에서 지금은 마지막 때라 이미 많은 거짓 선지자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까 정신을 차려서 영을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영을 분별하라는 말은 진리와 비진리 생명과 생명 아닌 것, 곧 말씀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성도는 영의 분별을 통해 이스라엘의 병기 든 자들, 장성한 자들..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프로슈코마이)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늘을 향해서 똑바로 세워지면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이 되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교회에게 편지를 보낼 때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기도를 빠뜨리지 않습니다. 평강은 은혜 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은혜와 평강은 이렇게 같이 붙어 있습니다.
중동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서로 ‘샬롬’이라 인사하잖아요. 워낙 전쟁에 시달리다 보니 가장 관심사가 평화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말하는 평강은 전쟁이 없는 그런 세상 평강이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가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평화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에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할 때의 그 평강입니다. 이 평강이 주어진 자들이 어떻게 정욕으로 잘못 구하고 예수를 도륙하고 살인하고 하나님을 훔치고 세상과 간음하고 있을 수 있냐는 이야기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은 이러이러한 자들이야.. 이러이러한 자들이 이스라엘이야.. 를 구약의 언어로 우리 교회를 향해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들이 이러이러한 것을 지켜서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십사만사천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이런 자들이야..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이스라엘이 되고 싶어서 하나님께 요청한 적도 그럴 자격도 없고 가능성도 없는데 저희들에게 이스라엘에게만 주시는 은혜와 말씀과 진리의 사랑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가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의 실체를 바로 알고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꼭 붙드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궁금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조명이고 도우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