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효 아키텍트-15] 청년 동네건축가들의 현재와 미래
매일경제 2019.12.20
[효효 아키텍트-15] 서울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과 서울역 사이에 후암동이 있다. 일제시대는 일명 적산(敵産)으로 불린 일본식 건축 형태인 문화주택들이 아직도 산재해 있다. 이곳에 '도시공감 협동조합 건축사 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30대의 이준형 건축가는 동시대 청년, 주민 등 건축 사용자의 행태에 주목했다. 청년 세대는 기성세대와 달리 원룸에서 많이 생활한다.
기성세대에 집은 신앙이다. 대부분 어렵게 마련한 아파트는 실내 구성이 비슷하다. 30평형 아파트 거실에 앉은 가족들은 대형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부채꼴로 앉는다. 가족 간에 소통은 없다. 반면 청년 세대는 온라인 플랫폼만 있다면 노트북만 가지고 수개월간 지방 살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외국인과 함께하는 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1회 학생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은 게 계기가 되었다. 이준형은 2014년 말 도시공감을 세우고 청년 세대의 삶의 행태를 주거가 중심인 마을, 후암동에 적용했다.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집안의 공간을 집 바깥 동네 보행로를 중심으로 만들었다. 후암거실, 후암주방, 후암서재, 홍보관 성격의 후암가옥 등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들 공간은 사전 예약제이고 무인으로 운영한다.
▲ 후암주방 전경 /사진 제공=도시공감 협동조합 건축사사무소
도시공감은 추억이 깃든 집을 그려주기도 한다. 3D 컴퓨터를 도구로 사용한다. 손으로 그린 어반 스케치 작가들도 같이 참여한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현재의 장소와 공간을 기록하는 미술 운동의 일환으로도 보인다. 이러한 활동의 중심에 건축가가 있다. 건축가의 힘은 그들이 가진, 건축과 도시계획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와 도면 설계 능력에서 나온다.
동네 건축가의 역할은 관 주도의 행정에 건축 전문가로 참여하기도 한다. 그도 강남의 대형 건축사무소에 다닌 적이 있다. 해외 프로젝트의 경우 현지에 가보지도 않고 구글로 지역을 검색하고 지형을 읽고 설계 작업을 하니 허망하기조차 했다.
▲ 후암가록 실내 모습 /사진 제공=도시공감 협동조합 건축사사무소
김지은 블랭크 건축사 사무소 공동 대표는 대형 건축사 사무소에 다니면서 일의 보람, 창의성에 갈증을 느꼈다. 건축 이용자 및 사용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블랭크 건축사 사무소는 성대 전통 시장을 지난 성대골 상도동에 자리 잡고 있다. 김지은 대표는 상도동에서 일하고 돈 벌고 쓰고 살고 있다. 일터와 생활하는 곳이 동일 지역이다 보니 상호 영향력과 안정감이 피부로 느껴진다고 말한다.
블랭크는 기획, 디자인(설계)과 운영을 동시에 한다. 커뮤니티 다이닝 바인 '공집합' 1호점을 사무실 인근 5분 거리에 만들었다. 2호점은 후암동에 위치한다. 2호점의 경우 1, 2층은 블랭크가, 3층은 도시공감이 운영한다. 공동 명의로 임대를 하고 각각 공간 설계를 맡았다. '공집합'의 기획 의도는 '동네에서 편하게 술 한잔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건축가들이 참여했기에 리모델링비가 많이 들지 않아 유지비는 건진다고 한다.
블랭크는 2013년 상도동에 공유 주방 '청춘플랫폼'으로 시작되었다. 공간을 찾는 주민이 늘어나며 2015년 공유 작업실 '청춘캠프'를 열었다. 공간 한쪽은 블랭크 사무실로 쓰고, 나머지는 로컬 프리랜서 등이 사용토록 했다. 김지은 대표는 이때 합류했다. 블랭크는 2017년 공유 주택 '청춘파크'로 영역을 확장했다. 청춘캠프 바로 위층이다. 1인실 3개와 3·4인이 작업할 수 있는 스튜디오 2개, 공유 서재, 공유 부엌 등으로 구성됐다. 기존의 청춘플랫폼은 어린이도서관으로 개조했다.
▲ 청춘캠프 실내 모습 /사진 제공=블랭크 건축사 사무소
블랭크의 실험은 다른 동네로 확장되고 있다. 외부 설계 프로젝트는 블랭크의 주요 수입원이기도 하다. 구성원 중 절반이 건축을 전공했다. 블랭크 구성원이기도 한 '공집합'의 주방장 셰프는 남산을 보며 요리하고 싶었는데, 그 소망을 2호점에서 이루었다. 주방 창으로는 남산 자락이 날씨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시공감과 블랭크는 실제 시공 설계가 가능한 인력은 보유하지 못한 듯하다. 그러다 보니 나름 유명세에 비해 실제 시공을 원하는 고객을 많이 놓친다. 이들은 대학 건축학과를 나오고 건축사 자격증을 가진 건축가들이다. 리모델링 사업에 치중하다보니 건축물 설계 실무에서 멀어진다는 심리적 두려움도 있다.
후암동 후암로와 두텁 바위로 사이 평지 지역은 협소주택 건축 붐이 시작된 지역이다. 협소주택은 아파트 가격이 오르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수요가 많아졌다. 협소주택은 설계비가 많이 든다. 20~30평의 대지 면적에 3~4층을 올리려다 보니 밀리미터까지 고려해야하는 초정밀 설계가 필요하다. 이들은 아직 협소주택을 설계한 경험은 없다.
어쩌면 '청년 동네 건축가'는 시대가 낳은 산물일 수 있다. 변호사 숫자가 늘어나면서 전관 출신이 아닌 이들이 대형 로펌 대신에 기업으로 들어가거나 법무사 수준의 일을 수주하는 행태와도 비교할 수 있겠다. 불경기가 심화되면서 건축업계에는 대형 사무소들이 어렵다는 흉흉한 소문이 돈다.
한편으로는 이들의 선택이 도리어 미래를 내다본 혜안일 수도 있겠으나 이들의 현재 사업 범위가 반드시 건축가들의 본질적인 역량이 필요한 업종인지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선배 건축가들은 대체로 경제개발에 따른 도시화의 점증에 따라 집합건축에 매진하는 등 많은 일거리가 있었으나 사회 전체적으로 청년 세대는 취업, 자영업 등 어디서든 경쟁력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 불평등과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도시 재생은 기성세대의 잘못으로 인한 구조적 병폐이다. 유럽과 달리 한국의 기존 주택은 기초가 부실하다. 리모델링이라고 하지만 건축가들의 역량이 많이 요구된다. 자본의 노예가 되거나 필요 이상으로 과대평가되지도 않으면서 농민, 어민보다도 더 취약 계층인 도시 빈민을 위한 본격적 도시 재생 사업 현장에 내실을 갖춘 좀 더 많은 젊은 동네 건축가들이 포진한다면 건축으로 콘텐츠를 강화한 도시 기반은 우리 삶 전체를 풍요롭게 할 것이다.
[프리랜서 효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