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루 이야기(1)
명 칭 : 문소루(聞韶樓)
소 재 지 : 의성읍 원당리 산1(원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후죽리)
건축시기 : 고려 중엽 (최고 신라시대로 추정)
중건시기 : 고려 말엽(1차), 1694년(2차), 1825년(3차), 1983년(4차)
문소루의 건축시기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자료를 살펴보면, 최고(最古) 신라시대까지 추정 합니다.
현재는 고려중엽으로 그 시기를 추측하고 있어, 영남을 대표하는 안동 영호루,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등 경상도 4대 누각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건물이 훼손되기도 하고, 전란으로 전소되기도 하여 여러 차례 중건을
하게 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의성현(義城縣)」편에 고려 공민왕 시절의
인물인 화지원(華之元)이 ‘현령 이광제(李光濟)가 당시 문소루의 지세가 낮고, 건물이
비좁아 손님 접대에 곤란해지자, 현청의 북쪽에 중건하였다.’는 사실을 기문에 기록
하였는데, 이것이 문소루의 중건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문소루(聞韶樓) 객사(客舍) 북쪽에 있다. ○ 화지원(華之元)의 기(記)에, “현령 이광제(李光濟)군이 화산(花山)을 지나는 길에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자네는 우리 현(縣)의 공관(公館)을 아는가. 지세가 낮고 건물이 비좁아서 손님이라도 올 경우 여름이면 답답해서 숨쉬기도 어렵다네. 화풀이를 현령(縣令)에게 하고 관리들을 못살게 굴어서 참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네. 좀 넓게 새로 짓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전쟁이 10년이나 계속되어 백성들이 편히 살 수도 없었지. 다행히도 주상 전하께서 천명(天命)ㆍ인심(人心)에 순응하시어 이제 어지러운 세상을 반정(反正)하였으니, 도탄에 빠지는 것을 면하고 겨우 숨을 돌리게 된 것이 몇 년 못 되었소. 이 마당에서 역사를 한다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할 것이요, 또 개작(改作)한다는 비난을 살 것도 같아서, 다만 관청의 북쪽에 옛터가 있길래 이를 누정으로 세우고자 하니, 고을 사람들이 다투어 나와서 일해 줬다네. 산에서 재목을 얻고 흙을 파서 기와로 만들어 집을 짓되, 농한기를 틈타서 며칠 만에 준공을 보았다네. 역사를 한 사람은 백성이 아니면 중들이었는데, 모두들 품삯을 주어서 노고를 보상했네. 이후로는 사신으로 이 누정에 오른 자는 즐거워하기만 하고 화내는 일이 없어서, 화풀이가 백성을 박탈하는 재앙이 없게 되겠지. 아직 다 되지 않은 것은 단청 뿐일세. 이제 임기가 다 차서 언제 떠날지 모르겠네. 나를 위해서 그 본말(本末)을 적어주게. 그리고 성명을 써두어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 보여주도록 하세.’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현에 북루(北樓)가 있다는 것은 나 또한 알던 바이다. 옛날 학사 김지대(金之岱)가 일찍이 이 도(道)의 안렴(按廉)으로 있을 때, 이 누대에 대해 읊기를, ‘문소(聞韶)의 공관은 후원이 깊어, 가운데에 백여 척 되는 높은 누정이 있네.’ 했었다. 어느 해에 이것이 쓰러지게 되었는가. 부로(父老)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마 현명한 이가 이를 일으켰고 우둔한 이가 이를 쓰러지게 했을 것이니, 다시 이를 일으키는 것은 또한 현명한 일이겠고,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은 더욱 우둔한 것이다. 이(李)군은 청렴하게 정치를 하고, 백성을 사역시키되 괴롭히지 않았고, 재물을 없애고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고도 오랫동안 쓰러져 있던 것을 다시 일으켰으니, 현명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기록할 만한 것이다. 건축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나 조망의 넓고 좁은 데에 대해서는 내 아직 본 적이 없으니, 잠시 대가의 손을 기다리기로 하자.” 하였다. ○ 김지대(金之岱)의 시에, “문소의 공관은 후원이 깊어, 가운데에는 백여 척 되는 높다란 누정이 있네. 향기로운 바람 십 리(十里)에 구슬 발이 걷히고, 밝은 달 일성(一聲)으로 옥피리 날리네. 연기는 가벼워 버들 그림자가 서로 가늘게 이어졌고, 비는 개어서 산빛이 짙은데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 용황(龍荒 흉노(匈奴))이 팔을 꺾은 갑지랑(甲枝郞), 그냥 난간에 기대고 있는 것 더욱 애석하네.” 하였다. 지대의 이 시는 사람 입에 오르내리다가 시판(詩板)을 잃었다. 그 뒤 10년에 어떤 군수가 이 시를 몹시 찾으니 고을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시 현수(縣守) 오적장(吳廸莊)에게 딸이 있었는데, 일찍이 장일(張鎰)의 아들 정하(廷賀)와 약혼했었다. 오(吳)가 딸을 데리고 임지에 간 동안 정하는 다른 사람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오녀(吳女)가 듣고 미쳐서 함부로 지껄이다가 갑자기 이 시를 암송해 내었다. 고을 사람들이 이를 베껴서 바치니 군수가 놀랐다고 한다.
고려 이문화(李文和)의 시에, “문소(聞韶)의 산수(山水)는 깨끗하여, 밤은 고요하고 발은 성기고 달은 기울었네. 버들 빛 푸릇푸릇한 객사(客舍), 향기로운 내[煙] 모락모락하는 절간[僧家], 백성 걱정에 금방 변한 흰머리[鶴髮], 비[雨]를 얻어 기슭에 돌아온 검은 모자[烏紗], 여섯 달 동안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다만 앞뒤의 황화(皇華 사신(使臣)에게 부끄럽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문소(聞韶)의 누정 아름다운 곳, 비를 피해 오르니 해가 기운다. 풀빛의 푸름은 역로(驛路)에 닿았고, 복숭아 꽃의 따뜻함은 인가(人家)를 덮는다. 봄의 시름은 꼭 술같이 진하고, 세상의 맛은 점점 깁처럼 얇다. 애끊는 강남의 길손, 변방의 당나귀는 또 서울로 간다.” 하였다. ○ 김자수(金子粹)의 시에, “오천(烏川) 선생의 훌륭한 작품은 점과 획이 바르고 비스듬. 도덕(道德)은 성역(聖域)에서 자유로이 놀고, 문장(文章)은 시가(詩家)에서 홀로 뛰어났네. 벽 사이에서 농묵(濃墨)을 즐겁게 보고, 마루 위에서 농사(籠紗)를 한탄치 않누나. 우뚝하게 높은 산을 우러러 보니, 얼굴 시드는 것 바로 나이가 두렵다.” 하였다
문소루 원문2(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문소루는 1657년(효종 8년)에 화재로 전소되어, 1694년(숙종 20) 현령 황응일(黃應一)이 두 번째 중건을 하게 됩니다. 이 때 문소루 상량문은 우리군 금성면 구련1리 출신인 모성당 임세장(1637~1695년)이 건립 상량문을 썼는데, 모성당 임세장은 한성부 부윤 임 훈의 중손으로
어릴때부터 영리하고 지역내 학문이 높아 10여차례 향시에 합격했는데, 두 차례의 삼장에 합격하고 동당(東堂)시험에서 장원했으나, 정시에는 불운하게도 시험관들의 배척에 의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평소 그를 잘 알고 있던 홍문관 관원이 그의 답안지를 돌려 보내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원통해 했다는 일화가 전해 옵니다.이후 조정에서 영남에 운둔하고 있는 선비 10인에 대한 등용논의가 있었으나, 당시 조정의 큰 변(기사환국)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모성당 선생이 낙방했던 시기는 경신환국(숙종6년, 1680년)이후 남인이 배척받던 시기로 세월을 잘못만나 아까운 인재가 불운을 당하는 시기였다고 보여집니다. 모성당은 청빙계서원병향삼선생소(請氷溪書院並享三先生疏)로 서애, 여헌, 학봉 세분을 빙계서원에 추향토록 노력했습니다.
(모성당 임세장 문소루 상량문1)
(모성당 임세장 문소루 상량문2)
(모성당 임세장 문소루 상량문3)
(모성당 임세장 문소루 상량문4)
그리고 당시 현령 황응일은 친교가 있는 유재(游齋)* 이현석(李玄錫:1647 ~ 1703)에게 기문을 요청하여 중건기를 쓰게 됩니다.
유재 이현석의 문소루기(聞韶樓記)
순(舜)임금의 음악이 아홉 번 이루어지자 봉황이 뜰에 날아왔다.
우(禹)임금과 탕(湯)임금이 음악을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신령스러운 새가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이는 곧 봉황이 소(韶) 음악 때문에 왔다는 것이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순임금 이후로 소 음악은 갖추어져 있어서 성음(聲音)과 절주(節奏)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부자[孔子]는 석달동안 고기 맛을 잊었고, 오계찰(吳季札)은 ‘관지(觀止)’라고 탄식했지만 봉황이 다시 날아오지 않았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말하는 자들은 소 음악이 봉황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순임금[重華]의 현묘한 덕이 성음과 통하여 봉황을 이르게 한 것이라고 하니, 이는 과연 그렇다.
다만 후세의 정치는 진실로 순임금의 정치에 대해 만에 하나라도 감히 바라지 않으면서 봉황과 신작이 때로 어진관리를 위해 모여든다고 하니, 또한 무슨 덕이 쇠하였겠는가?
아마 봉황도 쇠한 세상의 의미일 것이다.
우리나라 영남에 문소현(聞韶縣)이라는 고을이 있는데, 관아북쪽에 문소루(聞韶樓)가 있다.
안찰사 김지대(金之岱: 1190∼1266)가 지은 시 한편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고려시대부터 이미 아름다운 볼거리로 이름이 났다.
그런데 누각을 처음 세운 해를 기록하지 않았고, 가운데 허물어졌다가 다시 세운 사실은 화지원(華之元)의 기문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또한 중건한 때가 어느 해였는지
자세하지 않다.
그 후에 또 불에 타서 남아있지 않았고 또 그 햇수도 알지 못한다.
증명할 만한 문헌이 없으니 이렇게 탄식할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의 문소현령 황응일(黃應一)이 탄식하며 중건하니 옛터에 나아가 새로운 제도를 개척하였다.
여러 층의 누각 아홉 칸을 세웠는데 서쪽에도 아홉 칸의 복도[閣道]가 있다. 우뚝한 처마와 기둥이 눈앞에 높이 솟아 있으니, 관내(管內)를 두르고 있는 맑고 빼어난 물과 기이하게 솟은 산 가운에 누각아래에 모조리 바쳐서 누대에 올라 감상하는 즐거움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 없다.
향기로운 바람과 밝은 달빛, 버들 그림자와 산 빛은 완연히 갑지랑(甲枝郞)의 시속의 그림이고, 화지원의 기문에서 ‘청렴함으로써 정사를 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재물을 손상시키거나 백성들을 해롭게 하지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폐지된 것을 복구한 것을 또 오늘날 다시 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또한 위대하지 않은가?
현과 누각에 ‘문소’라는 이름을 취한 것은 비봉산이 있기 때문이다.
비봉이라는 이름은 오래되어 그 의미를 망녕되이 억측할 수 없지만,
혹 다섯 가지 무늬를 가진 신성한 새가 영천(穎川)에 모였던 것과 같은 것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기다리다 못해 억지로 이름을 지은 것이 거의 맞아떨어진 것인가? 헤아려보건대 반드시 이 두 가지 경우에서 나오지 않았다.
다만 지금 황공(黃公)의 정사가 한(漢)나라 때 훌륭한 정사를 폈던 황패(黃霸)와 비교해서 누가 더 나은지 못한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성조(聖朝)의 문덕(文德)은 하(夏)와 은(殷)나라 두 대를 대신하고 순임금을
도우며, 성명(聲明)은 하늘을 감동시켜서 펼쳐지지 않은 곳도 없고 실리지 않은 곳도 없으니, 순임금과 같은 음악을 기다리지 않아도 지극히 선하고 지극히 아름다운 실체가 이미 어우러져 있다.
저 빛나는 새가 편지를 물고와서 천 길의 하늘을 날며 덕이 빛나는 자를 보고 있으니, 장차 분명히 위로 치솟아 너울너울 날아오를 것이다.
이 누대가 완성되어 마침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아침 햇살이 빛나는 곳에서 봉황이 노래하는 것은 바로 이 고을에서 시작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것을 먼저 보는 쾌감은 아마도 이 누각에 오르는 자에게 있지 않겠는가?
현령 황응일이 나에게 기문을 짓게 하였는데, 내가 그를 위해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 즐겁다. 그래서 오천(烏川) 이문화(李文和: 1358∼1414)가 지었던 육언시를 차운하여
잇는다.
구름 낀 산은 난간 밖에 짙게 빼어나고 雲巒檻外濃秀
은하수는 처마 앞에 그림자를 비꼈네. 星漢簷前影斜
신선마을에서 관리 속의 은자를 보는데 仙府仍看吏隱
신기루는 도리어 민가와 가까이 있다. 蜃樓却近民家
시냇물 노을은 새벽에 섬돌나무를 에워싸고 溪霞曉籠砌樹
골짜기 달빛은 한밤에 비단 창을 비추구나. 壑月夜透窓紗
한가한 날 이곳에 올라 아무 일 없을 때 暇日登臨無事
거문고 노래에 앉아서 봄날을 보낸다. 絃歌坐送春華
舜樂之九成也。而鳳儀于庭。禹湯非不作樂。而未聞有靈鳥至也。是則鳳之爲韶來也質矣。然繇舜以降。韶樂具在。聲音節奏繹如也。夫子忘味。季札觀止。而鳳卽不再儀也。此何以哉。說者謂匪韶之召鳳也。蓋重華玄德。與聲音通。有以致之耳。斯果然矣。第後世之治。固不敢望虞氏萬之一。而鳳凰神爵。時爲一循吏而集。又何德之衰也。豈鳳亦衰世之意也歟。我東之嶺以南。有縣曰聞韶縣。治北有聞韶樓。金按使之岱一首詩膾炙今古。自勝國時。已以佳觀鳴。然而創始之不記年也。中廢而更新之。可考於華之元記。而亦未認其爲某歲也。後又燬不存。而又莫知其幾載計也。文獻之無徵。嗟乃至此哉。今使君黃公應一慨然重建之。卽舊基而拓新制。立層樓者九楹。西有閣道亦九楹。巋然簷棟。突兀眼前。環治山水之淸絶奇聳者。無不畢獻於窓廡之下。以供登覽之翫。香風明月。柳影山光。宛然申枝郞詩中畫。而華記所云爲政以廉。使民以逸。不傷財害民。而能復久廢者。又可謂再見於今日也。不亦韙哉。縣與樓之取名。以有飛鳳山也。飛鳳之名古也。其義不可妄臆。而無或五章仙禽。倘類穎川之集焉者而名之乎。其亦佇待之不可得而強爲之名。庶幾乎遇之者耶。料必不出於斯二者矣。顧今黃公之爲政。未知與黃霸孰上下也。而聖朝文德。軼夏殷而協姚帝。聲明動天。無不幬而無不載也。不待韶箾之奏。而盡善盡美之實。已純如矣。彼其彩珍含書。翔千仞覽德輝者。將必奮翮而翩翩然來乎。而玆樓之成。適與相會。吾知朝陽之雝雝。定自是縣始。而先覩之快。其不在登斯樓者乎。使君俾余文以記之。余不得不樂爲之說。仍次烏川六言以係之曰。
雲巒檻外濃秀。星漢簷前影斜。仙府仍看吏隱。蜃樓却近民家。溪霞曉籠砌樹。 壑月夜透窓紗。暇日登臨無事。絃歌坐送春華。
이후 1825년 누대가 거의 허물어지려는 지경에 이르자 당시 현령인 김홍근(金弘根, 1788~1842)이
세 번째 중건을 합니다.중건 기문은 당시 영돈영부사였던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1765~1832)
에게 부탁하여 쓰게 되었습니다.
풍고 김조순 聞韶樓 重修記
聞韶樓者。義城縣之公舘也。其刱未有知所自。然樓有高麗鄭圃隱先生及金學士之岱題詠。板刻而揭之。鄭先生固麗末人。金學士之名見於麗初。以玆推之。樓之刱。其在新羅之世歟。余生老京師。足不踰鳥嶺一步。故嶺以南七十州山川風俗。尙未能髣髴其要領。况其亭臺廨宇之有無。又况其景槩眺賞之佳否。顧何以知之。惟昔正廟己亥。伯父宰是縣。從兄歇菴公隨之任。歸而爲余道玆樓之勝。仍誦鄭先生之詩。余尙童識寡聞。欣然在心。至于今如舊。嘗遊覽也。今上庚辰。兒子元根爲宰。則樓將圮矣。勸其重修。徑遞未果。後五年而弘根。又爲宰。纔數月書報云。玆樓千年古蹟也。不忍以終廢。旣修之。願得叔父記之。余曰。善。吾之知玆樓。因吾兄。而汝又吾兄之子。吾嘗願一見。而至白首未諧。今因汝而託名玆記。與鄭先生之詩。並揭而垂傳。雖終身不見。與夫朝夕登臨者奚異。吾無憾焉爾。雖然。吾舊聞義名邑也。民殷而吏馴。公門百事。不煩申令。挽近來逃亡相續。奸僞日滋。弊弊然將至於危亡。信斯言也。求芻之誠不實。束薪之政不行也。庸詎非縣令之責乎。有邑而無樓。尙以安享。有樓而無邑。將誰與爲樂。吾固知弘根之存心爲政。汲汲於蘇積瘼革衆弊。然因之而又勉之。不亦善乎。 <楓皐集卷之十五>
(1927년 1월경 문소루 전경)
그 뒤 문소루는 일제 강점기때 2층 누각에 창문을 달아 군청 회의실로 사용했으며, 해방이후 까지
존치했으나, 불행하게도 6.25동란 때 불타서 그 자취를 찾지 못하게 되었는데, 1983년 현재의 자리에 중건을 하고, 당시 의성군수인 김희윤(金熙潤)이 중건기문을 지어 오늘에 이릅니다.
※ 유재 이현석
본관 전주(全州). 자 하서(夏瑞). 호 유재(游齋). 시호 문목(文穆). 1667년(현종 8) 진사가되고 1675년(숙종 1) 증광문과 을과로 급제, 검열(檢閱),3사(司)의 벼슬을 역임하고 1682년 우승지, 1688년 동래부사,경상도관찰사,중추부동지사를 거쳐 1693년 춘천부사가 됨. 이듬해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697년 우참찬, 1700년 형조판서에 이름
※ 풍고 김조순
본관은 (신)안동(安東)이며, 자(字)는 사원(士源), 호(號)는 풍고(楓皐),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이며 서흥부사(瑞興府使)김이중(金履中)의 아들이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의 부친으로 순조 즉위 후 영돈녕부사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고 정순왕후 사후노론 벽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
※ 여영 황응일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여영(汝濚). 황영(黃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산군수(安山郡守)를 지낸 황도형(黃道亨)이고, 아버지는 양성 현감(陽城 縣監)을 지낸 황석(黃錫)이고, 어머니는 지평(持平) 김주우(金柱宇)의 딸 안동김씨(安東 金氏)이고, 부인은 부사(府使) 이송로(李宋老)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황응일(黃應一)[1655~1716]은 생원시에 합격한 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고, 1691년 의성현령(義城縣令)이 되어, 1694년에 문소루(聞韶樓)를 중건 하였다. 1704년에 와서 별제(瓦署 別提), 1705년 형조좌랑(刑曹 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쳐 1708년 금부도사(禁府 都事), 1709년 서흥 현감(瑞興 縣監)을 역임하였다. 묘는 강원도 철원군 어운면 양지리(陽地里)에 있다. 1934년 의성군 사곡면 신감2리에 후손들이 소헌정(韶軒亭)을 지어서 추모하는 한편, 매년 양력 12월 10일에 창원황씨 대종회 회의장소로 활용.
※ 춘산 김홍근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의경(毅卿), 호는 춘산(春山). 달행(達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이경(履慶)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명순(明淳)이며, 어머니는 신광온(申光蘊)의 딸이다.
1829년(순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우권독을 거쳐 1831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승지·대사성·이조참판·홍문관부제학 등을 지내고, 1839년(헌종 5) 한성부판윤을 거쳐 이조·공조·병조의 판서와 홍문관제학·우참찬 등을 지냈다.
이듬해 대사헌으로서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의 세력다툼에 대한 시폐의 상소를 올리고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의정부좌참찬으로 기용되었다. 1841년 좌의정에 올랐다가 이듬해 사퇴하고 판중추부사가 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문익(文翼).
※ 참고자료
ㅇ 모성당 임세장 모성당일고
ㅇ 한국국학진흥원 자료
ㅇ 의성군지
ㅇ 신증동국여지승람 “의성현”편
ㅇ 의성현지
ㅇ 풍고(김조순)집
ㅇ 유재(이현석)집
ㅇ 의성의 전통 건조물(2010년, 의성군)
ㅇ 1927년 1월 동아일보 기사
ㅇ 서울대학교 규장각 자료
ㅇ 한국학 중앙연구원 자료
첫댓글 원본을 볼 수 있어서 좋았으며, 1927년 문소루 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문소루를 처음 자리에 복원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을 내일(9일) 연찬회 때 도서관에서 뵐 수 있을련지요. 뜻깊은 자료를 매번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회장님 저는 그저 역사적 사실을 조사를 통하여 기록했을 뿐 역사에 대한 지식도 별로 없습니다.
혹시 시간이 나면 참석하도록 노력 해보갰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재 기계 김노선 공의 시판이 걸려있지요
우선은 문소루 건축과 관련된 내용을 주로 다루고 다음에 문소루를 다녀간 주요 인물과 관련시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현재 문소루에는 포은 등 8인의 시판이 있으나, 실제로는 더 많은 관리, 묵객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이중 향리 출신으로는 김노선, 신봉석 선생 등이 있습니다.
소중한 글 잘 읽었습니다. 여러 내용들 중에 신증동국여지승람 내용을 읽다가 그 중에 화지원(華之元)에 대해 제 생각을 적어 봅니다.
신돈이 처형 당하자 바로 그의 재물을 모두 탈취한 지윤의 무리들과 어울렸다는 내용과 또한 그가 따르던 지윤은
' 탐욕스럽고 음험했으며 벼슬을 팔고 옥사를 이용해 뇌물을 받았으며 다른 사람의 노비를 얻는 등, 헤아릴 수 없는 부정을 저질렀다.'라고 훗날 사료에 적힌 내용을 보면서 과연 바른 정사를 보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