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마리 위고 (Victor-Marie Hugo)
프랑스의 시인·소설가·극작가이다.
일찍이 문학에 뜻을 두었으며 20세에 처녀시집 《오드와 잡영집(Odes et Poésies Diverses, 1822)》을 간행하고 그 해에
결혼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시작하여 정력적으로 작품을 계속 발표하였다.
시집 《오드와 발라드집(Odes et Ballades, 1826)》, 《동방시집(Les Orientales, 1829)》,
소설 《아이슬란드의 한(Han d'Islande, 1823)》, 《뷔그자르갈(Bug-Jargal, 1826)》,
《사형수 최후의 날(Le Dernier jour d'un condamné, 1829)》 등이 있다.
초기의 작품에는 왕당파적·가톨릭적인 색채가 농후하나 그 후 점차 자유주의 경향이 현저하게 되었다.
젊어서 야망에 불탄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지배하고 있던 의고전파와 대립하여 당시의 문단에 발흥하고 있던
낭만주의 운동에 참가하여 자택에 같은 경향의 젊은 작가와 화가를 모아 차차로 낭만파의 지도자가 되어갔다.
희곡 《크롬웰(Cromwell, 1827)》에 붙인 서문은 고전주의 이론에 대항한 낭만주의 연극이론의 선언서로서 유명하다.
7월 혁명의 해인 1830년에는 위고의 희극 《에르나니(Hernani, 1830)》의 초연에 즈음하여 낭만파와 고전파 간에 문학사상
유명한 '에르나니 논쟁'이 일어났다. 이 논쟁에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를 압도하여 이후 1850년경까지 문단의 주류를
점유했다.
그 후에도 위고의 왕성한 활동은 계속되어 시집 《가을낙엽(Les Feuilles d'automne, 1831)》,
《황혼의 노래(Les Chants du crépuscule, 1835》, 《마음의 소리(Les Voix intérieures, 1837)》,
《빛과 그늘(Les Rayons et les ombres, 1840)》, 희곡으로 《마리용 들로름(Marion Delorme, 1831)》,
《루이 블라스(Ruy Blas, 1838)》 등이 이어서 발표되었다.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Notre-Dame de Paris, 1831)》는 위고에게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혀 주었다.
1841년에는 대망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그뒤 10여 년 간 위고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정치활동에 전념하였다.
그 원인으로는 희곡 《성주(Les Burgraves, 1843)》가 낭만주의 풍조에 싫증난 관객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패로 끝난
것과 가장 사랑하는 딸이 사고로 죽은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848년 2월 혁명 당시는 주위 정세에 자극을 받아 인도주의적 경향을 더한층 굳혀 1851년에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여 국외로 추방을 당하였다.
그는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을 전전, 거의 19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보냈다. 이 망명생활은 결실이
풍부한 시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잡다한 일에서 해방되어 창작에 전념한 때문이다. 시집 《징벌(Les Châtiments, 1853)》,
《명상시집(Les Contemplations, 1856)》, 《세기의 전설(La Légende des siècles, 1859)》(제1집),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1862)》, 《바다의 노동자(Les Travailleurs de la Mer, 1866)》 등 위고에 있어서
걸작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나왔다.
1870년 보불 전쟁에 의한 나폴레옹 3세의 몰락과 함께 위고는 공화주의 옹호자로서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국민적 시인으로서 영예에 싸인 비교적 평온한 만년을 보낸다.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은 《두려운 해(L'Année terrible, 1872)》, 《세기의 전설》(제2집, 제3집),
소설 《93년(Quatrevingt-treize, 1874)》 등이 있다.
그의 죽음은 국장의 예를 받았고 또한 유작도 수없이 간행되었다.
위고의 83년간에 걸친 일생은 19세기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사회의 변천과 함께 그의 사상과 작품은 보수주의에서 자유주의
또한 공화주의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일관해 흐르는 것은 인류가 한없이 진보할 낙관적 신뢰와 이상주의적 사회
건설의 불 같은 정열이다.
위고의 시는 시대의 낭랑한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이렇게 너무나 낙관적인 이상주의적 태도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정열적인 웅장함은 감상에 빠지기 쉬운 낭만파 시인에게는 볼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그의 비길 데 없는
천성과 함께 위고를 낭만파 지도자로 만들었고 19세기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시인의 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
<출처: 위키백과사전>
빅토르 위고 (Victor Hugo 1802~1885)
겨울이 끝난뒤
모든게 새로 살아난다. 사랑하는 그대여!
회색빛 하늘에 핏기가 돌고
대지에 향기로움이 가득찰때,
우리의 심장은 더없이 뛰는구나.
사랑이 넘쳐흐르는 저 하늘
모든 고통이 사라진 이땅
똑같은 불빛이
별과 꽃을 함께 불붙이는 구나.
근심과 불안의 계절 겨울은 가고
눈물에 젖은 수액이 심장에서 눈에까지 차오르는
비밀스럽고 검은 사월
고통과 눈물로 이룬
달콤한 휴식의 시간
고독속에서 우리가 사랑하기를
그대는 원하는가.
햇살에 반짝이며 황금색으로 물든 나뭇가지는
막 피어나는 봉오리를 감싸려고 팔을 뻗고
노래하려는 새위로 몸을 기울인다.
우리 사랑을 나누던 그 새벽빛도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보이느니
푸른창공에서 웃음 짓듯 오월은
우리 영혼속에서 환하게 미소를 짓는구나
저 화사한 웃음 소리
세상 모든것이 차례차례 빛나는 구나
밤에는 별들이 반짝거리며 소리를 내고
낮에는 별들이 붕붕거리는 모습을 보아라.
풀숲이나 둥지속
우리눈길이 닿는곳마다
달콤하게 속삭이는 저소리들
"축복받은 연인들이여!"
참을수 없는 향기에 취해
네가 그 예쁜 팔을 내몸에 감았을때.
오 장미넝쿨 위에는 장미꽃만이!
우리들 심장속에는 한숨만이!
넌 새벽별처럼 나를 사로잡는다.
너의 사랑스러운 입과 눈은
네가 울때 눈물을 보여주다가
네가 웃을땐 진주를 보여주는구나
자연은 쌍둥이 자매 이브와 아담처럼 오늘
우리는 사랑하고 어루만지며
그의 신비를 우리들 사랑과 함께 섞는다.
하늘이 널 찬미하고 꿈꾸게 하도록
너는 그냥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된다.
그러면 그 모든 그림자가
사랑의 애무를 우리에게 되돌려 주리니
우리들은 빛과 향수,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는
사랑의 환희, 그속에서 우리는
행복의 수액으로 흠뻑 젖어든다.
어떤 걱정도 널 짓누르지 않고
나에게도 번민이 되지 않으리니
내가 별을 애인으로 갖고 있다면
태양은 바로 너의 연인.
우리 입과 입술이 맞닿은 꽃들에게
훈훈한 입김을 불어 넣는동안
오 빛의 입맞춤이여
이토록 감미롭고 향기롭다니.
씨 뿌리는 계절
지금은 해질녘
나는 문간에 앉아
일하는 마지막 순간을 비추는
하루의 끝을 찬미합니다
남루한 옷을 걸친 한 노인이
밤 이슬 젖은 땅에
미래의 수확을 한줌 가득 뿌리는 것을
마음 흐뭇하게 쳐다봅니다
그의 크고 검은 그림자가
이 넓은 밭을 가득 채우니
그는 계절의 소중함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우리는 알겠습니다
농부는 넓은 들판을
오가며 멀리 씨를 뿌리고
손을 폈다가는 다시 시작하고
나는 숨은 목격자 혼자 쳐다봅니다
떠들썩한 소리 들려 오는 저 그림자가
장막의 깃을 펴며
별나라에까지 이를 듯해
나는 씨 뿌리는 이의 장엄한 모습을 지켜봅니다
올랭피오의 슬픔
어두운 들은 아니었다, 암울한 하늘은 아니었다.
아니, 아침 해는 빛나고 있었다, 끝없는 하늘에 누워 있는 대지에.
하늘은 향기로 목장은 초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찍이 정열이 그렇듯 마음을 상처내 주던 여기에
내가 다시 찾아왔을 때에!
가을은 미소 짓고 있었다. 언덕은 평지를 향하여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아름다운 숲을 기울고 있었다.
하늘은 황금빛이었다.
새들은 만물이 사모하여 부르는 하느님을 향해
모름지기 인간이 무슨 말인지 말하며 노래한
거룩한 가락에 맞춰 노래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보고 싶었다.
숲 속의 샘과 주머니 털어 적선하던 그 오두막집
가지 숙인 이 늙은 물푸레나무
숲 속의 눈에 띄지 않는 사랑의 은신처
일체를 잊고 두 영혼이 용해될 때까지 그 속에서
입맞추던 나무 구멍을!
그는 찾았다, 마당을 또 외딴 집을.
오솔길을 내려다보는 문의 철책과 경사진 과수원을
그는 창백하게 걷는다 - 무겁게 딛는 발자취 따라
그는 본다, 아아! 하나하나의 나무에서 일어나는
지나간 날의 망령들!
그는 듣는다, 숲에서 그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이고
바람은 마음 속의 모든 것을 떨게 하면서
마음에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떡갈나무를 뒤흔들며 장미를 스쳐
하나하나의 사물 위에 깃들려 하는
만물의 혼인가 여겨진다!
쓸쓸한 숲에 떨어지고 있는 나뭇잎은
그의 발밑에서 땅으로 날아오르려고
마당 한가운데를 달린다.
우리의 추억 역시 그와 같이 때에 따라 혼이 침참
하게 될 때 상한 날개로 한 차례 날아오르고서는
즉시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는 오래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들판에 자연이
장엄한 형태로서 나타나 있는 것을
그는 저녁때까지 꿈에 잠겼다.
하루 종일 그는 방황했다, 골짜기의 물을 따라
하늘의 숭고한 얼굴과 호수의 맑은 거울을
하나하나 모두 찬미하면서!
아아! 생각나는 감미로운 사랑의 모험.
천한 종처럼 들어가지도 못하고 울타리 너머로
모양을 살펴보면서
그는 온종일 방황했다. 밤이 날개 펼 무렵
그는 느꼈다, 무덤과 같이 쓸쓸한 마음을
그리고 외쳤다 -
오오, 이 서글픔! 혼의 착란. 나는 알려했다.
정열의 액은 어느 만큼 아직 이 병에 남았는지.
나는 보려했다, 내 마음이 여기에 남긴 것 들을
이 행복의 골짜기가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모든 것을 바꾸기에는 실로 짧은 세월로 족하다!
신선한 표정의 자연, 어찌 너는 빨리 잊고 마는가!
그 탈바꿈 사이사이에 왜 무참히 자르는가
우리의 마음이 맺어져 있는 신비의 실을!
우리 둘이 묵던 나뭇잎 방은 숲이 되었다!
우리 둘의 머리글자를 새긴 나무는 말라버렸는가
쓰러졌는가?
우리 둘이 키운 정원의 장미는 도랑을 넘어
놀러 오는 아이들 발굽에 망가지고 말았다.
샘은 돌담에 쌓였다. 무더운 오후 숲에서 내려와
장난스럽게 그녀가 마시던 샘물
손바닥에 물을 떴었지, 아아 귀여운 요정이여,
그리고 흘렸지, 손가락 사이로 예쁜 진주를!
길은 험해져 울퉁불퉁 돌이 삐졌다, 지난날에는
깨끗한 모래길이었다 - 거기 또렷이 박힌
그녀의 작은 발이 그것보다 너무나 큰 대조를
귀엽게 웃는 듯 보였다. 내 발과 나란히 서서!
헬 수 없는 세월을 겪은 길가의 바위
일찍이 나를 기다리기 위해 그녀가 앉았던 곳
그 돌 역시 닳아졌다, 저녁 길에
삐걱거리며 굴러 가는 수레바퀴에,
숲은 이쪽이 줄어들었고 퍼졌다.
우리 둘의 것이었던 모든 것에서 살아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불이 꺼져 싸느랗게 된 잿더미처럼
수많은 회상은 바람 따라 없어진다!
우리 둘은 이미 존재하지 않은가, 우리의 때는 지나갔는가?
오고가는 그 때는 아무리 소리쳐도 헛되단 말인가?
내가 울고 있는 것을 보면서 바람은 나뭇가지와 희
롱하고 집은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우리 둘이 있던 곳에는 다른 사람이 머물리라.
우리 둘이 오던 여기에 이제 다른 사람이 오리라.
일찍이 우리 둘의 혼이 꾸기 시작한 꿈을
이제는 그들이 보리라, 영원히!
아무도 이 세상에서는 모두 다 볼 수 없는 것이니.
인간의 가장 나쁜 점도 가장 좋은 사람처럼
우리 모두는 같은 곳에서 꿈을 깨어난다.
모든 것은 이 세계에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저쪽에서 끝난다.
그렇다, 다른 사람들, 흠없는 남녀가 찾아오리라.
이 행복하고 한적한 매혹의 안식처에서
호젓한 사랑에 섞여지는 자연 풍물의
몽상과 장엄 모든 것을 걸어 올리리라!
우리의 들과 오솔길과 은신처를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리라.
내 사랑하는 이여. 네 숲은 낯선 남녀의 것이되리라.
체면을 모르는 여자들이 목욕하러 와서
네 맨발이 닿는 깨끗한 물결을 흐리게 하리라.
그래! 여기서의 우리 사랑은 헛되었단 말인가!
꽃 피는 언덕, 정열의 불꽃을 섞으며
우리 두 존재가 하나 된 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단 말인가.
그런데 무감각한 자연은 재빨리 모든 것을 빼앗았다.
오오! 말하라 골짜기여, 찬 시내여, 익은 포도여,
새둥지 가득한 가지여, 동굴이여, 숲이여, 딸기여
너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속삭이는가?
다른 사람을 향해 노래하는가?
우리는 너희를 친절하고 주의 깊고 엄격하게 이해하였고
우리의 메아리는 깊이 너희 소리 속에 용해되었다!
우리는 아주 열심히 귀 기울였다. 너희 비밀을 범하지
않고 너희들이 이따금 말하는 심원한 말에!
대답하라 해맑은 골짜기여! 대답하라 쓸쓸한 땅이여,
아아, 마을에서 떨어진 이 아름다운 장소에 깃든 자연이여,
무덤의 모양이 영원한 명상으로 돌아간 죽은 자들로 하여금 취하게 하는
그 모습으로 우리 둘이 잠에 빠질 때에도
그대는 계속해서 무감동하게 우리를 지켜보고
그 사랑과 더불어 죽어 누워 있는 우리를
그대의 평화로운 즐거움을 계속하면서
여전히 미소 지으며 여전히 노래할 것인가?
그대의 산이나 숲이 즉시 분별해 주는 망령의 모습으로
그대의 은신처에서 방황하는 두 사람을 알아보고
그대는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을 것인가?
재회한 옛 친구에게 사람들이 말하는 그 은밀한 사실들을?
그대는 슬픔과 탄식조차 없이 볼 수 있는가,
일찍이 거닐던 곳에 우리 옛 그림자가 방황함을.
또한 눈물 흘리면서 흐느껴 우는 샘물가로
사뿐히 껴안으며 나를 인도하던 그녀의 모습을?
눈뜬 사물 하나 없는 어두움 속에 사랑하는 남녀가
그 도취를 은밀히 그대의 꽃그늘에 기대어 있다면
그 귀에 그대는 속삭이러 가지 않겠는가 -
“너희들 살아 있는 자여, 죽은 자를 생각하라!”
신은 잠시 동안 우리에게 목장과 샘과
소근대는 넓은 숲과 깊은 부동의 바위굴과
푸른 하늘과 호수와 평야를 주시고, 그리고 거기에
우리의 마음과 꿈과 사랑을 안겨 주신다.
이윽고 모든 것을 거두어 가고, 신은 우리의 불꽃을 불어 끄신다.
우리가 불빛 밝히는 동굴을 신은 어두움 속에 잠기게 한다.
신은 우리 혼이 새겨진 계곡을 향해 우리의
흔적을 지우고 우리 이름을 잊으라고 하신다.
그래라! 우리를 잊어라, 집이여 마당이여 나무 그늘이여!
풀이여, 우리 문을 황폐하게 하라! 가시덤불이여, 우리
발자국을 가려라!
새들아 노래하라! 시내여 흘러라! 나뭇잎이여 울창하라!
너희는 잊더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못한다.
너희는 우리 사랑의 반영 그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여행 도중에 만나는 오아시스이다!
오오 골짜기여, 너는 최상의 은신처,
네 속에서 우리는 마주 손잡고 울었었나!
정열은 나이와 더불어 사라지고, 그 어떤 것은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쓰고, 어떤 것은 비극의 칼을 늘어
뜨리고서 유랑 악단의 떠들썩한 한 패거리처럼
그 무리는 언덕 너머로 멀리 사라져 간다.
그러나 사랑이여, 아무것도 매혹스러운 너를 지을 수는 없다!
흐릿한 안개 속에 빛나는 너, 타오르는 횃불, 계속 불타는 등불
너는 기쁨으로 또 특히 눈물로 우리를 사로 잡는다.
젊은 때는 너를 저주하고, 나이들면 너를 찬양한다.
세월의 무게에 머리가 힘없이 숙으러지는 날,
인간이란 계획도 목적도 환상도 없고 이제 자기가 묻힐 묘석밖에 없고
그 아래 덕의 힘도 사랑의 힘도 모두 묻혀지는 것을 느끼는 날,
우리 혼이 꿈꾸며 우리 존재의 깊숙이 내려가
드디어 얼음으로 화한 우리 마음 안에
흡사 전장에서 시체를 세듯 하나 또 하나
쇠퇴한 고뇌와 사라진 몽상을 셀 때,
현실의 대상, 활짝 웃는 세계에서 멀리
마치 등불을 손에 들고 탐구하는 사람처럼
그 혼은 어두운 언덕길을 지나 느릿한 걸음으로
내부의 심연에 내동댕이쳐진 쓸쓸한 곳에 이른다.
그리고 거기 어떤 빛도 비치지 않는 칠흑 속
모든 것이 다해진 것처럼 생각되는 곳에서 혼은 느낀다.
아직 무엇인가 베일에 가려 숨쉬고 있음을 -
바로 그것은 어둠 속에 잠자는 그대이러니,
오오 거룩한 회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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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오는 올림포스 산의 뜻.
위고가 시집<내심의 소리> 이래로 사용한 가칭으로서
세상 평판에 대해서 초연한 자세로 불가사의 세계를 내려다보는
위고의 사상과 예술의 상징적 분신이다.
시의 배경이되고 있는 자연은 파리 남쪽 20킬로미터 지점인
비에브르 골짜기라고 일컬어지는 지방,.
위고는 1834년과 1835년 가을을 그 근처에 있는 친구의 소유지에서 보냈다.
애인인 줄리에트 도루에도 이 지방과 레메스라는 마을의 농가를 중심하여
부근의 숲과 언덕에서 매일 뜨거운 정열을 불태웠다.
올랭피오라는 분신이 탄생한 것은 그때 그자연 속에서였다.
위고는 1837년 가을에 혼자서 이 땅을 방문하였다.
농가의 주인은 부재중여서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자연은 회상에 충실치못했고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모든것이 일변한 사실을 느끼고
그 인상을 사랑의 회상의 우위라고 하는 주제로 하여
거기 머무는 동안 즉시 작품화한 것이 이 작품이다.
자필 원고에는 제목이 없고
"나의 줄리에트를 위하여,1837년 10월,비에브르 골자기를 방문하여 짓다"
라는 글이 적혀있다.
이시는 단순히 낭만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시 가운데서 최고 걸작으로 꼽히고 있으며
라마르틴의<호수>,뮈세의<화상>과 더불어 낭만파 대시인의 3대 애정시로 꼽히고 있다.
시집 <빛과어두움>에 수록됨
<자료: 시인의 숲>
노틀담의 곱추
1482년 1월 6일 이 날은 예수 축일과 바보제가 겹친 축제일이어서 온 동네가 시끄러운 날이었다. 그리고 이날은 파리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그레브 광장에서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날이었다. 이 날의 연극은 정오에 있는데 그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부유층의 사람들과 거지와 평민 등등.. 그런데 이 공연이 늦어지는 것이었다. 많은 군중들은 왜 공연을 안
하는가! 라고 외치며 외치자 그제서야 공연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려는 참에 느닷없는 거지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공연이 방해를 받는다. 또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추기경이 들어와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공연은 다시 중단되게 된다. 그 뒤에는 더 유명한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게 된다. 오스트레일리아 대사,
플랜더스에서 온 고관 등이 들어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아 가는 통에 자기의 연극이 망쳐진 것을 보고 그랭그와르는 실망한다.
그 뒤에 공연은 다시 시작하게 되는데 뒤의 한사람이 이런 재미없는 공연을 보느니 바보 교황을 뽑자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바보 교황을 뽑는다고 거의 나가 버렸다 그런데 그 교황 뽑는 방법은 이상한 방법이었다. 고해실 벽에다가
구멍을 뚫어 얼굴을 내민 사람들의 얼굴 중 가장 못생긴 사람으로 바보 교황을 선발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콰지모도가 바보교황으로 선출된 것이다. 콰지모도는 노틀담 성당의 종치기였다. '콰지모도'란 반만 인간이란 뜻이다.
꼽추에다 추악한 얼굴, 그리고 귀머거리이다. 그래서 성당 밖으로 나가지 않고 숨어살았지만, 이 축제일에 사람들과 같이 하고
싶은 욕망이 불쑥 솟아 나왔다가가 실수로 사람들에게 들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콰지모도를 데리고 나갔다.
이렇게 되자 그랭그와르는 자기의 연극을 얼른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몇 안 남은 사람을 데리고 공연을 실시하는데 갑자기
집시인 에스메랄다가 나타나서 거기에 남아있던 사람들마저 모두 나가버리게 된다.
부주교 프롤로가 갑자기 콰지모도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랭그와르는 그 공연을 망친 에스메랄다를 미행하다가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려는 콰지모도를 보고 공격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때 페뷔스 대위가 나타나 에스메랄다를 구출해주고
콰지모도는 페뷔스에게 잡히게 된다.
16년 전 콰지모도가 버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꼽추에다가 너무 흉측해서 죽여야 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젊었을 때의 프롤로 신부가 그 아이의 양아버지가 되겠다고 하여 살려낸다. 그 뒤 성당에서 종을 치는 일을 시켰는데 얼마 후
그는 종소리에 귀가 먹어버렸다.
그 뒤 그는 근위병에게 잡혀서 판사에게 갔는데 귀머거리인 콰지모도는 판사의 이야기를 잘 못 듣고 대답한 것을 판사는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형틀로 데려가 채찍질을 했다. 한시간을 맞고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는 물이 먹고 싶어졌다.
그는 물을 구걸했다. 아무도 물을 주지 않았지만 에스메랄다가 물을 주어 그는 그녀를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콰지모도는 석방되었고 두 달이 지난 뒤에 페뷔스 대위 집에서 페뷔스와 그의 여자들이 춤을 추고있는 중에서 에스메랄다
보았다. 며칠 후에 페뷔스는 한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주막집을 나서게 된다. 걸어가다가 누군가 자기 뒤를 쫓아오는 사람이
있음을 느꼈다. 그 미행자는 페뷔스를 잡으며 누구를 만나러 가느냐고 물었다. 그 미행자는 바로 프롤로였다.
몇 분 뒤에 에스메랄다가 나오고 그녀는 페뷔스 대령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된다. 그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숨어있던
프롤로는 페뷔스 대령을 단검으로 찌른다. 그 뒤에 에스메랄다는 정신을 잃었고, 깨어났을 때에는 순시병에게 둘러
쌓여있었다. 물론 프롤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한 달이 지난 뒤에 에스메랄다는 마녀와 함께 근위병을 죽이려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고문 끝에 거짓 자백을 한다.
교수형의 형벌을 언도 받고 어두운 감방에 갇힌 채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프롤로 신부가 나타나서 에스메랄다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같이 도망치자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신부와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한다.
그녀는 압송되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페뷔스 대위를 보게된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바라보자 그는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래서 그녀는 그 충격으로 쓰러졌는데 이것을 본 콰지모도가 밧줄을 타고 내려와서 호위병을 때려눕히고
그녀를 노틀담으로 데려간다. 그곳은 성역이라서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교회 꼭대기의 작은 방으로 데려가서
음식과 옷과 잠자리를 마련해준다.
에스메랄다는 왜 자신을 구해주었는지 물었다. 그는 자신에게 물을 준 일을 말하며 고마워서 그랬다고 한다. 그리고
콰지모도는 그녀에게 자기를 싫어한다면 여기에서 떨어져 죽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고 그녀는 희망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페뷔스가 말을 타고 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녀는 그를 보고 싶어했고
그것을 알아차린 콰지모도는 그를 데리고 오겠다고 한다. 그러나 페뷔스는 자기는 곧 결혼할 것이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콰지모도는 페뷔스를 만나지 못했다고 거짓으로 말한다.
한편 에스메랄다가 어떻게 구해졌는지 전해들은 프롤로 부주교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다가
그랭그와르를 만나게 된다. 부주교는 3일 뒤에 정식으로 에스메랄다를 잡기 위해 공격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에스메랄다를
빼돌리기 위해서 거지와 도둑들을 이용해서 공격하게 하고 자기들은 그 혼란한 틈을 타 같이 성당을 공격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도둑들과 거지들이 모여서 성당을 공격한다. 콰지모도는 성당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향해 대들보와 돌을 던지며
저항한다.
에스메랄다가 있던 작은 방으로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콰지모도가 없는 사이에 그랭그와르와 어떤 다른 사람이 와서
에스메랄다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원을 내려와서 건물 뒤쪽에 있던 배를 타고 강을 건넜던 것이다.
에스메랄다와 프롤로는 그레브 광장으로 온다. 그리고 자신과 그리고 교수대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녀는
교수대를 택하겠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프롤로는 군인들을 불러온다.
그녀가 교수대에서 처형당하는 모습을 본 프롤로는 성안에서 웃는다. 그때 갑자기 콰지모도가 들어와 양아버지인 프롤로
부주교를 성 밑으로 밀어 떨어뜨려 죽인다. 그런 뒤에 콰지모도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2년 뒤에 무덤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한사람은 교수형을 당한 여자였고 남자는 꼽추였다.
<자료출처: 슬픈열대 / 칼리오페>
레미제라블
부당하고 공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는 곧잘 “그런 법이 어디 있어?”라고 말한다. 무의식 속에서 법은 공평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계급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법, 강자에게만 이익이 되는 법은 그래서 재검토되거나 폐기돼야 옳다.
프랑스 혁명도 구법(舊法)과 구체제가 특정 계급의 시녀로 전락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소설 『레미제라블』의 무대가 된 1789년 7월의 대혁명 당시 프랑스의 국가 재정은 바닥난 상태였고 흉작과 물가 폭등으로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그럼에도 성직자와 귀족들로 대표되는 구체제 옹호자들은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날품팔이 노동자 장발장은 누이동생과 조카 일곱을 부양하다 빵을 훔친 죄로 3년형을 선고 받는다.
가족 생계가 걱정돼 탈옥을 시도하다 13년 만에 만기 출옥한 장발장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밀리에르 신부의 은그릇을
훔친다. 하지만 밀리에르 신부는 그를 용서한다. 용서의 힘은 컸다. 장발장을 새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 자베르 경감에게 장발장은 감시 대상인 전과자일 뿐이었다.
구법의 수호신과도 같은 자베르 경감은 집요하게 장발장의 뒤를 쫓는다. 장발장이 어느 소도시의 시장이 되자 자베르는 그가
과거에 탈옥수였다는 것을 공개하려고 한다.때마침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장발장을 존경하던 청년대원들은 자베르를
총살하려 한다. 하지만 장발장은 자베르의 총살을 말린다. 자베르가 그 이유를 묻자 장발장은 이렇게 답한다.
“이 세상에는 넓은 것이 많이 있소. 바다가 땅보다 더 넓고 하늘은 그보다 더 넓소. 그러나 하늘보다 더 넓은 것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용서라는 관대한 마음이오.”
용서를 외면하는 법, 사랑과 관용을 모르는 법,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옹호해 주는 법, 현실에 존재하는 민중들의
고통과 한숨을 보지 못하는 법, 약자의 항변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법을 의심하지 않았던 자베르. 그는 강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장발장에게 용서를 구한다.
『레미제라블』의 서문에서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쓰고 있다. “법률과 풍습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 지옥을
만들고, 인간의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한, 가난에 의한 남성의 타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과 같은 이 시대의 세 가지 문제가 고쳐지지 않는 한, 어떤 지역에서도 사회적 진실이 통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하자면 더욱 넓은 의미에서 지상에 무지와 비참이 존재하는 한, 이 책과 같은 성격의 책들이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법의 공평성이란 따지고 보면 더 많은 사람을 껴안으려는 관용과 사랑의 정신의 발로다. 이런 원칙이 로스쿨 정원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우리 현실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출처 : 중앙일보 - 김보일 / 배문고 교사>
빅토르 위고 탄생 200주년
- 19세기 프랑스의 문학과 정치적 총화
최근의 프랑스 작가 중 외국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는 누구일까? 렉스프레스지에 의하면, 라쁠륨 지난 겨울호에서도
언급된 우엘벡이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주변 유럽국에서는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한다. 프랑스의 누보로망 이후, 그를
진정한 작가로 인정하든 않든 우엘벡은 주변 유럽 독자들에게 다시 프랑스 문학에 관심을 갖게 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그의 작품은 현대 서구 사회의 다양한 성풍속을 다루어 오늘날의 서구사회의 총체적인 성적 방탕을 간파하고 있는
반면, 다른 유럽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등의 앵글로 색슨 국가에서는 그의 작품이
너무나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을 거쳐 프랑스 국민들이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일까? 몰리에르 스탕달 플로베르 사르트르? 무모한
질문이지만 흥미꺼리가 되리라. 프랑스의 어린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한 달에 두 세편의 고전과 현대시를 외우기
시작한다. 그 목록에서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가을 시편』은 언제나 빠지지 않는다. 프랑스 사람들은 시(詩)로 위고를
만나 소설『파리의 노트르담』과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가련한 사람들이라는 뜻)』, 연극『뤼 블라스』,
오페라『리골레토(위고의 『왕은 즐거워』를 베르디가 각색한 작품)』등으로 위고와 평생을 함께 한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아시아 끝에 자리한 우리도 어린 시절,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시작하여 한평생 고통을 겪는 『레미제라블』속의 장발장의
생애에 슬퍼하고 분노하였다. 요즈음 지구촌 어린이들은 디즈니판 만화영화 『노트르담의 곱추』속의 에스메랄다와 곱추
카지모도의 슬픈 사랑에 눈물을 흘리고, 청소년과 어른들은 뮤지컬 『노트르담의 곱추』에서 카지모도 역을 맡아 노래를 부른
카나다 출신의 남자 가수 갸루(Garou)의 쉰목소리에 빠져든다.
프랑스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좌우파로 나뉘어져 자신들의 견해를 뜨겁게 표명하고 토론하고
투쟁한다. 작가 위고는 약간은 우파적 성향의 작가로 분류되지만 죄우파 양진영으로부터 공통적으로 높게 평가되는 예외적인
작가이다. 사회당 출신의 미테랑 정권 시절인 1985년에도 위고 서거 100주년 기념 행사가 학계를 중심으로 하여 온 프랑스에서
떠들석하게 치루어졌다고 한다. 있는 위고가 태어난지 200주년이 되는 올해 2002년에는 우파 대통령 시락이 집권하고 있으니
더욱 많은 각종 추모행사가 줄을 잇고있다.
그는 1802년 나폴레옹 휘하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시인 소설가 극작가 정치가로 제정, 왕정, 공화국 등의 총체적 격변시대를
온몸과 머리로 헤쳐나가다 1885년 온국민의 슬픔과 애도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위고의 삶과 작품은 19세기 프랑스의
사회-문화적 격변과 혼란을 온전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와 작품을 간단하게나 언급하겠다.
그의 생애는 1851년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집권하여 황제로 즉위한 것에 반대하여 벨기에 영국을 거쳐 대서양의 영국령
게르네세(Guernesey) 섬으로 망명하여 살던 망명 시대(1851-1870)와 그 이전 시대(1802-1851), 그리고 그 이후
시대(1870-1885)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귀족으로 태어난 위고는 시인으로 등단하여 루이 18세 왕의 연금을 받고 루이 필립 왕을 지지한다. 1843년, 사랑하는 딸
레오폴딘이 죽자 글쓰기를 잠시 중단하고 자유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정치 활동을 펼치며, 1848년 2월 혁명시에는
국회의원이 된다. 1851년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위고는 억압적 정치를 피해 망명했다가 1870년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으로 제3제정이 무너지자 조국으로 돌아온다.
우리에겐 위고의 문학적인 면만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최근 전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있는 사형제와 관련한 그의 정치
활동과 주장은 중요하게 조명되어야겠다. 1829년 작품인 『사형수의 마지막 날』에서, 위고는 감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수인의 고통을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정치활동 내내 집요하게 밀고나갔던 사형제의 폐지 투쟁을 시작한다. 그는 사형수의
잘못을 보여주려 하지 않고 사형의 잘못됨과 사형의 참혹함을 보여주려 하였다. 신의 존재를 믿는 신자인 위고에게 인간이
인간을 처형하는 사형제도는 신에 대한 모욕이고, 공화주의자 위고에게 사형은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었다. 위고는 주장한다: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은 권리 중의 권리이다. 사형은 인간의 존엄성과 문명, 진보에 대한 최대의 모독이다. 사형대가 세워질
때마다 우리는 모욕당하는 것이다. 이 범죄는 우리의 이름으로 행해진다.〉〈사형은 야만의 특수하고도 영원한 기호이다.〉
1846년 루이 필립 왕을 저격 시도한 범인을 변호하지만 범인의 생명을 구하지는 못한다. 그는 작가로서 모든 노력을 다해,
또한 국회의원으로서 행동과 투표로써 이 오래된 비지성적인 사형제도와 투쟁할 것을 피력하고, 공개된 광장에서의 처형에도
반대하였다. 1870년 망명지에서 돌아온 후, 위고는 파리 코뮌 자체에는 반대하지만 그 참여자들을 처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여론과 맞서 싸우고, 도망 사형수들을 위해 정치망명권을 주장하며 벨기에에 있는 자신의 집을 피난처로 제공하였으며,
죽기 전까지 상원의원으로서 파리 코뮌 참가자에 대한 사면과 사형의 폐지를 위해 투쟁하여 참여 지식인의 모범을 선구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의 사형제는 1981년 사회당 출신의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시 법무부장관 바뎅테르(Badinter)에 의하여
폐지된다.
위고는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한편, 당대 민중의 빈곤의 심각성을
환기시키고, 다가오는 혁명을 대비하라고 역설한다. 빈곤을 해결하지 못하면 가난한 사람들의 저항을 불러올 뿐이라고...
또한 1848년 까베냑 장군이 민중폭동에 대처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언론검열을 시행하자, 법의 정지는 기괴한
상황이라고 위고는 주장하면서 국회가 그러한 상황을 용인해서도 안되고 국회가 위대한 민중을 그러한 상황에 두어서도
안되며, 언론자유는 보호해야 할 문명의 무기라고 주장하여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위고는 교육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교육은 국가가 담당해야 하며, 종교와 분리되어야 하고, 무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모든 국민은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걷잡을 수 없이 피폐해져 가는 한국의 공교육 여건과 이에 따라
확대되는 사교육 부담을 고려할 때 150년전 프랑스에서의 교육에 대한 토론과 분위기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현재 프랑스는 고등학교 2학년까지 의무무상교육이며 대학의 1년 등록금은 1000프랑-18만원 정도이다.)
위고는 왕당파로 시작하여 1848년 혁명을 체험하면서 공화주의자가 되고 나폴레옹3세의 독재에 항거하며, 죽을 때까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며 공화주의의 양심, 자유의 선구자, 인류애의 예언자, 억압받는 자들의 옹호자로 활동한다.
부켕(Bouquins)판 『위고 전집』은 모두 1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7500페이지에 달한다. 그는 시 소설 연극 여행기 등
모든 문학 쟝르를 넘나든다. 위고는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는 포부로 청년기부터〈샤토브리앙(Chateaubriand:1768-1848
귀족출신의 초기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rien)〉도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1822년-1828년까지의 초기 시작품들에서 부르봉 왕가에 대한 충성심을 숨김없이 밝히면서 문학적으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결합한다. 1827년에는 『크롬웰(Cromwell)』의 서문에서 비극과 희극을 섞고, 장소 시간 행동 등의 일치 법칙을
배제하여 예술 속의 자유를 주장하여 낭만주의 이론가로서 자리잡는다. 1833년에는 극의 국가적 사회적 인간적 임무를
주장하고, 극시인의 목표는 위대함과 진실함에 도달하는 것이며, 드라마가 군중을 위한 영원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830년 위고는『에르나니(Hernani)』의 서문에서〈신의 목소리와 유사한 민중의 높고 강력한 목소리는, 이제부터
시가 관용과 자유라는 정치적 표어와 같은 표어를 갖기를 요구한다. 〉라고 역설한다. 위고에게 드라마는 예술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장소이며, 그 속에서 과거를 재구성하고 현재를 조명함로써 역사를 연출할 수 있어야 한다.
『가을 시편(1931)』『징벌(1853)』『사색(1856)』등이 대표적 시작품이며, 『난장이 나폴레옹(1852)』은 반체제
작가로서 나폴레옹 3세를 풍자하기도 한다. 1862년에 발표된 『레미제라블』은 1845년부터 쓰기 시작한 작품으로 프랑스
문학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히고 있으며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지금까지 20여번이나 영화화되었다. 쟝발장의 성공과 실패
이야기와 소년 가브로쉬(Gavroche)의 혁명의 이야기를 얽어짜 정치적이고사회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으로, 작품의 전편에
빈곤이 유령처럼 가득차 있으며 혁명이 가까이 다가옴이 느껴지는 낭만주의적인 장편민중문학으로 평가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1864)』『바다의 노동자(1866)』『웃는 인간(1869)』『93년(93년은 공포정치가 시작된 1793년을
의미한다-1874)』 등은 당대의 언어와 지식, 역사가 혼합된 걸작들로 평가된다. 대중적 인기 속에 10번이나 영화화 되었고
현재 여러 나라에서 뮤지컬로 각색되어 공연되고 있는 『파리의 노트르담』에 대하여는 언급을 생략하겠다..
열정적인 정치적인 활동과 더불어, 모든 문학 장르를 골고루 선택하여 프랑스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있는 위고의
문학적 권위와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스스로 말한 태양왕 루이 14세의 정치적
권위와 비교하여, 위고를 문학의 태양왕(le Roi-Soleil de la littérature)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위고 탄생 200년을
기념하여 올해 그의 작품들이 다시 출판되고 극작품이 다투어 공연될 계획이며, 생애와 작품을 새롭게 조명하는 책과 저서가
줄지어 나오고 있으며, 많은 학술행사와 전시회, 방송 프로가 2002년 내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위고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프랑스를 보며, 몇년 전 세상을 떠난 미당 서정주를 둘러싼 우리 사회
각 진영의 엇갈린 평가와 최근 이문열을 들러싼 혼란을 멀리서 소문으로 접하며 우리도 21세기에는 한국의 빅토르 위고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자료출처: 정병주의 프랑스리포트>
파리, 그리고 노틀담 성당
판테온 신전 가는 길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런던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외국에서 내뱉는 알파벳의 숫자가 적을 정도의 영어
수준을 갖은 저는, 무대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대작은 대작이었습니다. 대사를 알아듣지 못해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으니까요. 아직까지 귓속에 맴도는 대사가 있습니다. “Who am I? Who am I? I am Jean Valjean!” 자신의 죄를
부끄럽지만 떳떳하게 밝힐 줄 아는 사람이야 말로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그러면 저는 참 불행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레 미제라블>의 인연 때문이었을까요? 판테온 신전을 가게 되었습니다. 일행들과 함께 파리를 거닐다가 잠깐 헤어져서
다니기로 결정을 하자마자, 저는 판테온 신전으로 갔습니다. 언덕에 위치한, 거대한 건물은 참 찾기 쉬웠습니다. 웅장한 돔을
보고 걸어가면 길 잃을 걱정은 없었습니다.
판테온 신전 정면
파리의 판테온 신전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로마의 판테온 신전을 본딴 성당입니다. 1744년 병석에 있던 루이 15세가 파리의
수호 성녀인 성 쥬느비에브에게 기도를 하면서 "병이 나으면 성 쥬느비에브를 위한 성당을 짓겠다."고 서원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병이 치유되자 폐허가 된 쥬느비에브 대수도원(Abbaye St. Genevieve) 자리에 성당을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설계는 자크 제르맹 수플로(Jacques Germain Soufflo)에게 맡겨졌으며 성당 공사는 1764년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780년 수플로가 사망하자 장 밥티스테 롱들레(Jean Baptiste Rondelet)와 막시밀리안 브레비온
(Maximilien Brebion)이 공사를 이어받아 1790년 돔Dom 83m, 정면 84m, 측면 110m의 웅장한 성당을 완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1789년 프랑스 혁명이후 1791년 혁명정부의 정치가였던 미라보(Honore Gabriel Riqueti de Mirabeau)가 급사한 후
이곳에 처음 안치되면서부터 로마의 판테온(Pantheon: 신들을 모시는 신전)에서 이름을 빌려 "파리의 판테온"이라 명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둥이 있는 돔의 모양은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의 영향입니다.
웅장하지만 아름다운 돔
한참 멀리 가서야 전체 모습이 잡혔습니다
화려한 코린트 양식으로 만들어진 정문의 6개 기둥 위에는 다비드 당제(David d'Angers)의 페디먼트가 있고 그 아래에는
“조국이 위대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Aux Grands Hommes la Patrie Reconnaissant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안에는 퓌비 드 샤반느(Puvis de Chavannes)의 작품과 안토니 장 그로(Antoine Jean Gros)의 천장 그림과 다양한
조각 등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중앙에는 1851년 3월 31일 장 베르나르 레옹 푸코(Jean Bernard Leon Foucault)의 진자 실험
때 사용되었던 추가 아직도 있다고 합니다.
볼테르, 루소,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등이 이곳에 묻혀 있습니다. 위대한 사상가와 작가가 파리의 높은 언덕에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똑똑한 위인들이 밤중에 토론이라도 하면 어떤 풍경이 벌어질까요? 누가 가장 말을 잘
할까요? 볼테르가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걸겠다."라고 말하면서
침을 튀긴다면 다들 고개를 휙, 돌리겠죠. 내부를 보고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늦게 찾아가 문 앞에서 발걸음을 놀려야
했습니다.
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노트르담 성당
일행과 다시 만나기 위해 노트르담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고딕양식의 화려한고 날카로운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건물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유럽인의
장인정신, 본받을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하늘 높이 올라간, 첨탑. 중세시대 유럽인은 저 첨탑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갔습니다. 고딕시대의 수직적 질서가 무너지고 르네상스의 수평적 질서가 찾아올 때까지 어둠의 시대를 살아야
했습니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곱추처럼요.
노트르담의 정면
세느강이 흐릅니다
시간이 남아 다시 강을 건넜습니다. 세느강을 옆을 담배 사러 나온 백수처럼 거니는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자유로운 도시,
파리. 곳곳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도시, 파리. 제 기억에 남은 파리의 모습입니다.
문득, 빅토르 위고도 이 길을 거닐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니, 그가 옆에서 걷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는동안
날이 저물었습니다. 파리의 아름다운 밤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진출처: 유랑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