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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김구(1876∼1949)의 기념연설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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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1892~1950?)는 한국 현대문학의 문을 연 문호였으나 친일문인으로서 오점을 남겼다. |
문제는 적극적 친일파냐 소극적 친일파냐, 고인이냐 생존인이냐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55년'에 있습니다. 55년이 지나도록 그들 중 누구 한 사람 참회의 자세를 취한 분이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비극입니다.
뉘우침이 없는 역사, 그 치욕의 시절은 해방된 지 55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장되었던 것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해방이 되자 이광수는 자서전 『나의 告白』을 쓰고 수필집 『돌베개』도 상재합니다. 이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참회록이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을까요. 민족을 위한 어찌할 수 없는 변절이었으며, 그것이 자신으로서는 최선의 방책이었음을 누누이 변명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장편 『女人戰記』를 쓰면서 일본에 충성하던 채만식은 해방이 되자 「民族의 罪人」을 발표해 민족 앞에 용서를 빕니다. 이 작품은 그래서 친일 문인의 유일한 참회록으로 거론되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앞뒤 막힌 상황에서 누가 죄인이고 누가 죄인이 아니냐, 과거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앞으로 잘만 하면 될 것 아닌가, 이런 식의 구렁이 담 넘어가는 결론을 냉소주의자 채만식은 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는 양심 선언과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뼈저린 자기 학대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양심의 결단은 용기 있는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최재서가 해방이 되자 평론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고 영문학 연구에만 몰두한 것도 일단 반성의 표시라고 볼 수 있지만 떳떳하고 공개적인 참회의 표시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문학사와 문단사는 불행했던 그 시대를 터부시하는 데 급급해왔고, 친일한 문인을 변호해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1985년 계간지 『실천문학』에서 친일문학 특집을 다룰 때까지만 해도 유일한 비판적 업적으로 임종국의 『親日文學論』(1966)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책은 친일했던 문인들의 행적을 몇 가지씩 열거하고 자료를 모아 정리한 것이니 본격적인 연구서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언급조차 하지 않는데 혼자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으고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처음으로 진실을 밝힌 그 용기와 의지에는 고개가 절로 수그려집니다.
몇 해 전에 이완용의 증손자가 조상이 남긴 땅 소유권 인정 소송에서 이겼습니다. 이기자마자 땅을 팔고 미국으로 갔지요. 이 재판의 선례로 아마도 친일파 후손은 조상의 땅 되찾기 소송에서 계속 이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는 악명 높았던 친일파 송병준의 증손자가 2천5백만 평의 땅(7천억 원 상당)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송병준의 외손자는 자유당 때 장관을 했습니다. 자유당 12년 집권 시기의 장관 96명 중 해외 망명객은 4명이었으나 친일경력자가 30명이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1988년도까지 우리는 '월북문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람은 연구를 하지 못했습니다. 시인 정지용·백석·김기림·이용악·오장환·임화 등이, 소설가 이기영·한설야·홍명희·이태준·박태원·김남천·최명익 등이 포함된 100여명 중에는 당대 1급 문인이 거의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문인이 북의 공산주의 이념과 남의 민주주의 이념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을 때 북을 택한 이유는 북에서는 친일파를 한 사람도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외에,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등 공약이 있어 북한의 정책에 귀가 솔깃하여 북을 택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친일파의 후손은 이 사회의 상층부를 형성했는데 주로 법조계로 진출했습니다. 친일파 가운데 상당수가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는 가짜서류를 만들어 시치미를 딱 뗐고,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은 사례도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일제시대 때이건 광복 이후에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선친은 만주벌판을 떠돌며 독립운동을 했으니 묘소조차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역사가 심판하지 않은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면 거기서 역사의 교훈이나마 얻어야 하지 않을까요.
출처-한국 문화예술 진흥원
첫댓글 북한에서도 친일파를 등용했는 걸로 알고 있는데....얼마나 되는지 확실히 모르지만....한사람도 등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좀 왜곡된 듯 하네요..
법조계! 이런데 이런 썩은 물들이 들어갔으니 그 법이 제대로 된 법이 됬을까?
나라가 안 망한게 신기하다. 이런
김구,,,,,,단도(칼)한자루 차지도 못하고 들어온 못난이,,,,,계속된 헛발질로 호구=호개가된 찌질이,,,,난중에 자신의 찌질이짓을 깨달았을 때엔 이미~~~~게임셋!!반드시 죽인다는 원칙에 희생된 ,,,죽어서도 찌질이,,,,무현이봐라! 결국 찌질이래도 죽이잖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