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까딱하면 국제미아가 돼요. LA를 떠나면서 딸은 걱정이 많은 척한다. 그러면 보내지 말 것이지, 돈도 아끼고. 그러나 이 말은 목구멍을 넘어오지 못한다. 너나 운전 조심해라. 이 말은 진심이다. 캘리포니아 산호세에서 LA까지 꼬박 여섯 시간 달려왔고, 또 먼 길을 그만큼 달려가야 한다, 말동무도 없는 밤길을….
5박6일간의 남미 페루여행, 나는 애초에 별로 내키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로 몸과 마음이 편치 않은데다 아무래도 호기심이 예전 같지도 않다. 동네 공원이나 어슬렁거리다가 낮잠을 자도 좋고 어디 있은들 어차피 남의 나라 구경 아닌가, 싶은 것이다. 공항에서 촌놈 행세 하는 것도 성가신 일이요 사실 국제미아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칠십 고개를 넘기면서 고소공포증이란 것도 정도를 더해가고.
마누라가 결단을 내린다. 잉카와 마추픽추 꼭 보고 싶다, 평생에 한번인데…. 분위기를 깰 용기가 남자인 나에게는 없다. 이유는 자꾸 찾기 마련이다. 부모를 이런 곳에 보내는 것도 딸의 용기가 아닌가. 아비로서 그 용기에 딴죽을 걸 용기까지는 없는 것이다.
아침에 LA 공항 부근의 호텔을 나서서 페루의 리마 공항에 내린 시각은 이튿날 새벽 두 시. 그러니까 2017년 9월 12일은 우리 부부가 적도를 넘어 남반구의 공기를 처음으로 마신 날이 된다. 남태평양의 물결, 안데스의 장엄 그리고 잉카의 신비를 마주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9년 전의 일이다. 영주의 선비촌에 놀러 갔다가 11월 쌀쌀한 날씨에 목구멍이 탈났다. 목구멍과 숨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혹이 부풀어 오른 것이다. 숨 못 쉬면 죽는다는 자명한 진리를 며칠간 뼈저리게 체험한 후 대학병원 수술대에 누웠다. 진단서의 병명은 인두종괴(咽頭腫塊). 목을 따고 그 안에 칼을 디밀어야 한다. 그것도 단순한 혹이 아니란다.
친구가 묻는다. ‘반암(半癌)’이란 말 들어봤나. 한양 이남 최고의 두경부 명의라는 그를 만난 것도 행운이다. 처음 듣는데, 반쯤 암이란 것도 있나. 설명을 하면서 서울서 보내왔다는 조직검사 용지를 보여 주는데, ‘borderline malignance’ 경계선의 악성종양. 나도 반쯤은 알아들었다는 시늉을 할 수밖에.
잠든 친구의 얼굴이 불쌍하게 보여서일까 나름대로 모험을 감행할 용기를 냈을까. 그는 집도 직전에 마음을 바꾸어 목을 따지 않았고, 입 속으로 칼을 넣었다. 구강접근 수술의 어려움은 누구라도 알만한 상식이 아닐까 싶다. 차가운 이성과 촉촉한 감성 사이에서 고민했을 무뚝뚝한 그의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 한참 후에 마누라가 한 말이지만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나. 하여튼 수술은 성공했다. 약간의 불편은 몇 년을 넘지 않았고 중증환자도 때맞추어 졸업을 해서 없던 일로 되어버렸다.
그런데 세상은 재미있는 일이 더러 생기는 모양이다. 목소리가 트였다. 말하자면 생래의 고음 불능이 치유된 것이다. 삼거리에 장애물이 없어지고 대로가 뚫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치명적일 뻔했던 불운이 기가 막힌 선물보따리로 둔갑한 것이다. 우연히 들른 노래교실에서 이를 확인한 이후 나에게는 전에 없던 버릇이 생기게 된다. 노래를 배우게 되면서 걸핏하면 실전에 돌입한다. 누가 청하지 않아도 부를 자리가 아닌데도 말이다. 뒤늦게 입문한 음악의 세계, 넓고 넓은 바다의 한 끄트머리에서 발을 적시는 정도일 뿐인, 나는 내 수준을 안다. 노래라기보다 그냥 고함을 내지르는 것이다. 나이 들어 고약한 버릇이라고 눈치를 주는 일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는다. 하느님과 부처님의 선물을 즐겨야 하지 않으리. 앞으로 살 날, 의미 있게 살 날을 계산하더라도 이것저것 따지면서 움츠릴 일도 아니지 않는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 한가운데, 그리고 차는 계속 직선을 달린다. 일행은 부부 세 팀, 가이드와 현지인 기사가 전부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너무 싱겁다, 세 시간 반이랬지, 내가 사고를 쳐야 하나. 나스까의 경비행기 투어를 끝내고 빠라까스 항구로 가는 길이었다.
가이드는 말이 없다. 원래 말수가 적은 게 아니라 여유가 없는 듯하다. 마지막 이벤트, 한 섬에서 물개와 펭귄을 구경하는 옵션이 문제다. 마지막 배편을 예약했으니 시간 내에 도착해야 하고 바람이 불면 배가 뜨지 않는다나. 시간과 바람, 두 가지 변수가 그의 여유를 앗아간 것일까. 그러나 그건 그의 사정이지 역대급 호사를 즐기고 있는 손님들로선 무미건조, 맛이 없고 따분한 순간들이 하릴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 애국가를 힘차게 한번 불러봅시다. 나이 들어서는 별로 부른 적 없겠지만. 네? 네? 전해오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텍사스에서 날아온 재미동포 두 부부와 페루에서 30년 살았다는 가이드…. 그네들의 내밀한 어딘가를 건드린 모양이다. 나는 아예 차문 옆으로 붙어 서서 무대효과를 노린다. 가이드가 한술 더 뜨는데, 기왕이면 4절까지 불러야지요! 입만 열면 ‘페루 땅이 한국의 열두 배’란 걸 으스대듯 강조하더니만. 이럴 때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로소이다 해야 하나. 이리하여 ‘동해물과 백두산, 남산위의 저 소나무, 가을 하늘 공활한데, 이 기상과 이 맘으로’가 사막의 적막을 뚫고 안데스의 하늘로 울려 퍼진 것이다.
빠라까스는 페루 남해안의 작은 항구마을이다. 도착하니 시간도 늦었고 바람이 불어 만사휴의, 그러나 그림 같은 항구의 풍광이 아늑하기만 하다. 전망이 끝내주는 식당에서 때 이른 저녁을 먹는데, 원주민들의 악기 연주가 흥취를 돋운다. 마음씨가 넉넉한 우리 텍사스 일행은 술의 달인들이다. 어디서 구하는지 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당연히 먹어 주기만 하면 되고. 양주 한 병을 남자 셋이 똑 같이 나누는데, 희한하게도 공짜 술 먹어먹는 내가 분배역을 담당한다. 매일처럼.
술병을 반쯤 비웠을 때 나는 또 사고를 치기로 작심한다. 일생일대의 생선스페셜 만찬, 마지막 술자리, 뭐 이런 배경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내 노래 한 곡 하겠소이다. 제목은 The road to my star! 식당 안에는 백인 관광객 한 테이블과 흑인과 히스패닉 혼성이 한 테이블. 무척이나 불안해하는 마누라와는 달리 그들은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다. 순간 원주민들의 토종 악기 연주만큼은 볼거리가 되어야 한다는 욕심이 생긴다.
가벼워야 하리 가난한 내 영혼, 저 하늘 빛나는 나의 별에 이르기 위해…. 대한의 가곡을 목청껏 뽑아낸다. 나는 무대의 중앙에 섰고 하늘과 바다, 고기잡이 배들과 사막의 산들도 관객이 된다. 술의 힘도 빌렸을 것이다. 가수가 따로 있나, 파바로티가 ‘오 솔레 미오’를 열창하는 퍼포먼스를 떠올리면서. 흑인 팀에서 바로 반응이 온다. 엄지를 치켜 세우는 모션들이 마음에 든다는 얘기렷다. 왁자지껄, 별명이 ‘이디 아민’이란 친구와 어깨동무하고, 가이드는 신나게 인증샷을 찍고…. 그렇게 또 남태평양에서의 하루가 저물었다.
리마 공항, 작별의 순간이 왔다.
마추픽추와 꾸스꼬여 우루밤바와 나스까여 그리고 빠라까스의 파아란 하늘과 바다여, 우리의 이승의 인연은 여기까지요. 그러나 마음에 새겨진 흔적은 꽤 오래 갈 것이요. 잘 있으시오.
집 떠난 지 달포가 지났다. 낯설고 물도 설고 말까지 설은 곳,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며 감기 한번 안 하고 버티어 낸 것이 어찌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누구보다도 잉카의 태양신에게 경배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어떤 충만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기분이 좋아진다.
가이드가 말없이 우리 부부를 따라 온다. 세 팀 중에 상품가치가 가장 떨어지는 우리 부부일 텐데 아니었던가. 체크인 카운터까지 와서 곰살궂게 나의 수고를 덜어준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게 해준 보상일까. 아니면 빠라까스의 하늘 아래 국위를 선양한 공로를 인정해 주는 것일까. 나는 멋대로 생각하고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2017년 10월)
# 빠라까스, 나스까 등은 외래어표기법(파라카스, 나스카)을 떠나 생생한 현지 발음을 살렸습니다.
첫댓글 Simon & Garfunkel 이 부른 El condor pasa 는 원래 남미 안데스 산맥
근처의 민요에서 왔습니다.
처량한 선율이 아름답습니다.
Peru를 정벌한 Spain의 Pizzaro는 원래 돼지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장군이나 귀족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거칠고 교활하고 야비한 사람이었습니다. 황금을 가져다 주면 페루의 왕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페루의 황금은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바쳤습니다.
그쪽 동네도 역사가 복잡하겠군요.
엘 콘도르 파사는 저는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방장님은 두루 박학하시네요.^^
멋진 여행이셨군요.
따님의 효성도 제가 부러워 하는 점이지만..
고음을 얻으셨다니..
되로 주고 말로 받으셨으니 그 또한 부럽기만 합니다.
제가 고음 불가 거든요.
성대에 문제가 있다고 들었는데..
저도 수술을 해야할지..ㅎ
다음 모임 때..
득음하신 노래 한 소절 들려주세요.^^
塞翁之馬란 말을 이럴 때 써먹으면 되는가 모리겠심다.ㅎ
下次一定见面!
저도 목에 경계성 종양이 있어서 목에 칼을 댔었는데요...한강이남의 명의를 만났었더라면
물메님 처럼 득음의 경지에 올라섰을지도
모르는데 아깝습니다.
그 굵은 성량의 이유가 수술이셨다니 전화위복이
되셨습니다.
풀문님의 음악실 음향이 끝내준다 들어서
기대가 큽니다.
방장님 비롯 운영위원님들 김포미남님
샤론님 리진님 뱃등님...울 가히양...등등
님들의 노래실력에 소름돋을 일 대비해서
전 대패를 준비해야겠어요~
애국가를 4절까지...초로의 동양남자가
연출한 로맨스그레이에 마나님께서
뿅 가셨을듯 합니다.
물메님을 뵈면 저의 경상도머시마 공식이
깨집니다~^^
멋지십니다~~~~~!!!!
가곡은 분위기 깬다고 싫어하는 경우가 많던데요.ㅠㅠ
선배님, 언제 한번 좋아진 목청으로 부르는 노래를
한번 들려주세요.
下次聚会,我们见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