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남후면 카페
김 준현 회장 이 종원 총무 장 선화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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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남후면향우회 역대 회장 초대 - 김광현 / 2대 - 이재은 / 3대 - 탁명광 / 4대 - 박해건 / 5대 - 권태정 / 6대 - 장경동 7대 - 황석윤 / 8대 - 손오현 / 9대 - 황석윤 / 10대-황병철 재경남후면향우회 역대 총무(사무국장) 초대 - 박병주 / 2대 - 박해양 / 3대 - 김정태 / 4대 - 권병태 / 5대 - 김정태 / 6대 - 김문배 7대 - 이종철 / 8대 - 박종덕
가시밭 길과 꽃 길을 걸어온 40년 재경 남후면향우회가 1972년 5월 8일 창립되어 2012년 40주년이 지났다, 김광현,박재석,권현갑,김택현,장태연 등 선배 어르신께서 발기위원회(發起委員會)를 만들고 고군분투 하셔서 「재경남후향우회」를 탄생 시켰다. 당시 신설동 노벨극장 옆에 박대식선생께서 '대지출판사'라는 지도를 출판하는 출판사를 운영하셨는데 그 출판사의 사무실이 산파역을 하는 장소였다. 창립총회는 우이동 조병옥박사 묘소와 가까운 곳에서 건축업을 하는 권현갑 선배 향우님이 지은 주택에서 30여명이 모임을 가졌다. 박재식선생께서 박종덕에게 향우회에 봉사를 하라고 부탁하여 창립총회의 사회를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재경남후면향우회」의 총무직을 맡아 40년을 이어오게 되었다.
회(會의 성쇠(盛衰) 40년 이라는 긴 세월을 걸어오는 여정은 평탄한 길도 있었지만 가시밭길도 많았다. 향우회의 기금을 어느 회원이 깡그리 없에고 변재할 능력까지 상실해 풍전등화의 신세가 되기도 하고, 또 어느 회장은 자기 낯 내는데 기금을 펑펑 써버려 기금이 고갈되어 많은 회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회(會)의 친목을 심히 상하게 하기도했다. 그러나 회원 명부에 등재된 회원 수 390여 명이 말해주듯 「재경남후면향우회」는 총회 때마다 적게는 120~130명, 많게는 170~180명이 참석하여 '만나는 기쁨-상면' 즐거운 하루-프로그램 '먹는 즐거움-넉넉한 음식' 푸짐한 선물-기념품과 경품을 한아름씩 안고 가는 훌륭한 잔칫날, 1년을 기다리는 날이 되었다.
「재경남후면향우회」의 공로자들 역대 회장과 총무 중 어느 하나 고생 안한 사람이 없고 훌륭한 업적 안 남긴 사람이 없지만 오늘의 남후면향우회가 있게 한 몇몇의 공이 두드러 지기에 재경남후면향우회는 오늘 번창을 맞게 되었다. ●고 권현갑 발기위원 권위원은 정말 우리 향우회를 맘속깊이 사랑하신 분이었다. 기금이 고갈되어 회가 와해될 지경이되자 당신의 사적 엄무를 다 마뤄두고 총무를 대동하고 유력한 회원들을 찾아가 기금 충당을 위해 협찬금 모금하는 일에 발벗고 나서 우리 회가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였다. ●탁명광 고문 3대 회장에 취임하자 회세(會勢)확장을 위해 발벗고 나선 것을 회원들 모두가 모르는 이가 없다. 고향 인사들의 친척 모임인 화수회에 찾아가 향우회 참가를 권장하고 마을향우회(고일향우회)에 찾아가 참가를 당부하고 이들의 명부를 입수해 개별로 장문의 서신을 보내 향우회를 알리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7~80명이었던 회원이 230명이나 되게 하였다. 기금이 고갈되자 당신의 가족을 다 동원하여 향우회 총회에서 200여 만원 상당의 식,음료를 직접 현장에서 끓여 제공해 회원들을 감동케했다. 회원간의 갈등이있어서 회장 선임이 어렵자 이미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황석윤 고문을 다시 회장으로 천거하고 자신은 자청 총무가 되어 회를 살리는 살신성인의 길을 걸었다. ●장경동 고문 회장 재임 시 해마다 관광버스를 1대씩 기증하고 경품으로 대형TV2대, 커피포트15대, ...등의 물질적 희사뿐 아니라 향우회를 한 단계 업그래이드 시키는 역을 했다. '남우회(南友會)'라는 임원 친목 모임을 만들어 우선 임원들부터 화합 하도록 제도를 만들었다. 장경동 고문은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분이다. 경기도 서해에 섬(영흥도)에다 100여 억원 넘게 희사를 하여 장애인 시설을 만들어 무연고 중증 장애인 5~60여 명을 수용하여 교육 재활하도록 돕고있고, 고향 모교에 교실마다 컴프터 놓아주기, 고향면 사무소에 사무집기 기증 등 훌륭한 일을 꾸준히 하고있다. ●황석윤 고문 외양으로 보아 미남이고 멋쟁이인데 속은 더 신사이다. 필요한 말은 적게하는 과묵형인데 재임 중에 임원회가 가장 활성화 되었다. 연말 임원 모임에 보통 1~2백만원은 쓰셨다. 그리고 모교 동창회, 고향 면사무소 행사, 고향 노인회 행사 안동시 행사 등 많은 행사에 참석하여 자기 주머니에서 협찬금을 지출하여 우리 향우회의 위상을 높혀 주었다. <자료출처: 재경 안동향우회 2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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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안동의 지명유래] 안동민속박물관 발행>
남후면 소재지 무릉리 일대<사진출처 : 20세기 안동의 모습> - 남후면 소개 -
남후면(南後面)은 안동시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적은 63.09㎢이고 인구는 2,761명이다. 조선시대에는 안동부(安東府)의 남쪽에 있다하여 부남(府南)이라 칭하다가 숙종(肅宗)때 남선과 남후 두 면(面)으로 갈라졌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면제도가 생겨서 남후면이라 칭하였다. 법정리는 10개리였으나 1983년에 수상리와 수하리가 안동시 강남동에 편입되고 단호리가 편입되어 현재는 9개 리에 33개 자연 마을로 되어 있다. 면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북부에 낙동강의 본류가 흐르고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미천이 동부에서 곡류하면서 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하며 그 연안에 상당히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주요산업은 농업으로 주곡을 주로 생산하고 사과, 배추, 무 등도 재배한다. 하아리와 고상리및 고하리에서는 고추, 마늘, 참깨 등을 특산물로 재배하고 있으며, 광음리의 한골에서는 야산을 개간하고 포도단지를 조성하여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도로는 면의 동부를 중앙선 철도와 5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으며, 면내에도 구담∼무릉 간의 군도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재로는 천연기념물인 광음리의 구리측백나무자생지가 있다. 수령이 수백년 된 측백나무 400여 그루가 자생하며, 비늘이끼, 부처손, 은빛고사리 등이 함께 자라고 있는데 이 일대 1,500평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안동의 남쪽관문 자연경관의 표상이 되고 있다. 조선 전기의 유적으로 보이는 광음리 분청사기요지가 남아 있고, 하아리에도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민무늬토기 유적이 있다. 주요 관광지는 무릉리의 기암절벽에 맑은 물이 흐르는 무릉유원지가 있다.
개곡리 이 마을은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검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개곡리라 한다.
▶ 접실·개곡(皆谷) 이 마을은 고려말에 사복재(思復齋) 권정(權定) 선생이 접거(接居)하였으므로 접실이라 하며 안동 김씨와 밀양 박씨의 동성 마을이다. 이 마을은 골마와 덕마로 나누는데 별신굿이나 동채싸움을 할 때는 골마와 덕마로 나누어서 겨룬다. 예부터 맛 좋은 무가 생산되어 왕께 진상했다고 한다. 영조께서 접실 무가 맛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하에게 그 무를 구해 오라 했더니, 신하는 안동 접실까지 가지 않고 동대문 시장에서 구해 왕에게 바쳤다. 왕께서 접실 무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장물에 담가 보니 보통 무와 같으므로(접실 무는 장물에 담그면 무 전체가 간장을 빨아 들임) 즉석에서 처형하였다고 한다. 접실 마을 앞 밭 전체가 무를 재배해도 다 그런 것이 아니고 2, 3필지가 그러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 진 골:이 골은 접실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로서 골이 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골로 계속가면 수하동 무즈무가 나온다. 예전에 이곳 사람들은 이 골을 통해서 안 동시내로 다녔다고 한다. ◇ 집 골:이 골도 접실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인데 예전에 집이 있었다고 집골이라고 한다. ◇ 불미골:이 골도 역시 접실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로서 예전에 대장간이 있었다고 불 미골이라 한다. ◇ 도둑골:접실 뒤에 있는 골짜기로 산모퉁이가 나와 있어서 안쪽이 보이지 않는다고 부르는 이름이다. ◇ 문니골:산의 양쪽 능선 모양이 문과 같이 생겼다고 칭하는 이름이나 지금은 채석장 이 생겨서 그 모양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골은 접실 마을 앞 미천 건너편에 있는 골 이다. ◇ 샘 골:이 골도 마을 앞 건너편에 있는 골로서 아랫골과 윗골이 있는데 샘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등앞들:접실 앞에 있는 들 이름이다. ◇ 된빗대바우:접실 뒤에 있는 바위이다. ▶ 말루골·마장동(馬場洞) 접실 남동쪽에 인접한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아래쪽에 있는 마을은 아랫말루골 이고 위쪽에 있는 마을을 웃말루골 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앞 들에서 삼과 무를 많이 생산했다 한다
고상리 이 마을은 본래 남후면 지역으로 고일 위쪽이 되므로 웃고일 또는 상고곡, 상고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납시리, 중방리, 흠실 등을 병합하여 고상리라 한다.
▶ 납시골·납시(納是) 마을 옆에 창(倉)이 있었는데 그 창 옆에서 세금을 바쳤기 때문에 납시(納是)라 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은 공주 이씨가 처음 자리를 잡았으나 지금은 평해 황씨가 많이 살고 있다. ◇ 납시지:납시골 북서쪽에 있는 못이다 ◇ 고상리 선돌떼:이 선돌은 고상리 고곡초등학교터에 2기가 있고 학교 앞 논둑에 1기 가 있다. 처음에는 3기의 선돌이 40∼50m 간격으로 나란히 있었다고 한다. 교실 앞 화단에 있는 것은 운동장 중간에 있는 것을 옮겨놓은 것이라 하며, 선돌 중에서 학교 담장 옆에 옮겨지지 않은 것 하부에는 5개의 성혈이 있다. 크기는 각각 105㎝, 142 ㎝, 80㎝이다. 이 선돌을 마을 주민들은 수구맥돌이라고 하는데 지리적으로 맥이 되 는 곳에 서 있어 마을의 재난을 막아준다고 한다. 또 이를 없애거나 함부로 옮기면 마 을이 화를 입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 딱밭머리 납시골 입구에 있는 마을인데 딱나무 밭이 있었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고곡초등학교 터가 있고 고일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 동리거리 이 마을은 상리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동리거리라고 불려지고 있다. 지금은 독립된 마을이 아니고 상리에 속한다. ◇ 고계정(高溪亭):동리거리 서쪽에 있는 정자인데 공주 이씨들이 세웠다. ▶ 상리(上里) 이 마을은 납시 보다 약 100년 뒤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납시 위쪽에 있다 하여 상리라고 부르며 고상리의 중심지이고 가장 큰 마을이다. ◇ 염상봉[監峯]:화산이어서 마을에 불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어느 대사의 말에 의 하면 바닷물을 항아리에 담아서 묻어 두고 물이 마르기 전에 또 바닷물을 길러다 붓 곤 하면 마을에 불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또 이 산에서 음력 7월 에 풋굿을 하고 정성을 드려 마을 제사를 올려 왔으나 지금은 중단되었다. ◇ 비적골:상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음식골:상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솟발이마 이 마을은 솟발 같은 모양으로 세 집이 있다 하여 솟발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네 집이 있으며 상리 마을에 속한다. ▶ 흠실·흠곡(欽谷) 흠실 마을은 상리 서쪽 중방리(中坊里) 동쪽에 위치하고 토지가 비옥하고 살기가 흡족하다 하여 흠실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 예전에 이 마을에 신흠이란 부자가 살았다고 흠실이라고도 한다. ◇ 내용골:흠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나링이골이라고도 한다. ◇ 늘근테:나링이골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노현곡이라고도 한다. ◇ 정 골:늘근테 건너에 있는 골짜기인데 예전에 그릇점이 있었다고 한다. ◇ 노현지:늘근테에 있는 큰 못이다. ◇ 신선봉:흠실 북서쪽에 있는 산이다. ◇ 항 골:나링이골 건너에 있는 골짜기이다. ◇ 항골못:항골 안에 있는 못이다. ◇ 흠실유지:흠실 서쪽에 있는 못이다. ▶ 중뱅이·중방리(中坊里) 이 마을은 산 중턱에 있다 하여 중뱅이라 했다고 전해지며 고일의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늘과 고추가 특산물이다.
광음리 이곳은 넓고 큰 바위가 여러 곳에 산재하고 있어 광암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광음이 되었다 한다. 예부터 광음 열두 동네라고 하는 말은 자연마을이 많다는 뜻이고, 광음리는 중앙선 철도와 미천(眉川) 및 5번 국도를 함께 접하고 있는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리, 암산, 신기, 장성배기, 원당곡, 한곡 등을 합하여 광음리라 한다.
▶ 한골·한곡(閑谷) 큰광음 북쪽에 있는 마을로 안동 권씨의 집단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큰 저수지인 한골못이 있고, 긴 골짜기는 모두 논과 밭을 이루고 있으며, 근래에는 야산을 개간하여 포도 단지를 이루어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다. ◇ 한곡유지:한골 앞에 있는 못으로 1939년에 축조했다. ▶ 큰광음 광음리에서 제일 큰 마을이라 하여 큰광음이라 불리고 있다. 장씨와 김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으며, 밭이 많은 곳으로 고추가 많이 생산된다. 도로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서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 황새개골:큰광음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 장성배기·장성백(丈城伯) 마을 입구에 장승이 서 있었다 하여 장성백이라 한다. 장승이 서 있었던 주변은 마을 회관이 들어섰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벼농사를 짓고 있다. ◇ 딱밭밑:장성배기 앞에 있는 골짜기인데 닥밭이 많았다고 한다. ▶ 새터·신기(新基) 장성배기 동쪽에 있는 마을로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신기라고 칭한다. 안동 권씨와 안동 김씨들의 집단마을이며 마을 동편에는 중앙선(中央線) 철로(鐵路)의 신기터널이 있다. ◇ 바티골:새터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새터굴:새터 옆에 있는 중앙선의 굴을 말하는 것으로 1939년에 뚫었다. ◇ 홈건너:새터 앞에 있는 들로서 철도를 건너가서 있는 들이다. ▶ 암산(岩山) 산줄기 밑에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경치가 아름답다 해서 암산이라 한다. ◇ 안동구리측백나무:안동시 남후면 광음리 속칭 암산은 암벽이 100m에 80°∼90°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암벽 밑은 독천으로서 소(沼)를 이루고 있다. 암벽바위 사이 사이에는 20∼70㎝ 크기의 측백나무가 400여 그루가 자생하며 부근에는 비늘이끼, 부처손, 은빛고사리들이 함께 자라며 일대 1500여 평을 보호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측백나무의 키는 10m 정도이나 이곳은 암벽사이에서 고생스럽게 성장하느라 거의 가 20∼70㎝로 기형에 가깝고 작은 나무에도 열매가 많이 달리며 그 수령은 적어도 수 백년이 넘은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1975년 9월에 천연기념물 252호로 지정되 었다. ◇ 암산유원지: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5번 국도를 따라 5㎞ 정도 가면 우측에 큰 냇 물과 함께 못이 나온다. 이 못은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둘려 쌓여 있고 굴도 뚫려 있다. 이 못은 귀담(龜潭)이요, 냇물은 미천(眉川)이며 동쪽에는 하늘을 치솟는 만장 암(晩將岩)이 있다. 멀리 황학산(黃鶴山)에서 흐르는 미천은 의성군 옥산, 점곡, 단촌 등지의 골짜기 물 을 모아 일직 남후를 거쳐 낙동강에 합류한다. 만장암 위태로운 절벽이 남동언덕을 지어 못물을 누르고, 서쪽 고산 기슭에는 노송들이 더욱 운치롭게 보인다. 여기는 일 찍부터 이상정(李象靖) 선생이 즐겨 놀던 곳으로 고산서원이 있어 유적과 함께 명소 이기도 하다. 이곳은 안동에서 유명한 유원지로 교통이 편리해서 봄, 여름, 가을은 뱃놀이를 즐기 고, 겨울철은 아주 좋은 천연 스케이트장이다. ◇ 고산서원(高山書院):이 마을 뒤에 있는 서원으로 대산 이상정 선생과 소산 이광정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 안절골:암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서당골:암산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대산 선생의 서당이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 이다. ◇ 암산굴:암산 마을에 있는 대구 영주간 국도의 굴인데 1912년에 뚫었다. 그러나 지 금은 5번 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고산서원 뒷산을 지나간다. ▶ 구리날·구리·귀리·동진(銅津) 암산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앞에는 나루가 있었다 한다. 5번 국도와 인접한 마을로 양로원이 세워졌으며 밭에는 거의 사과나무를 심어서 과수원을 경영하여 생활이 윤택한 편이다. ◇ 골챙이골:구릿날 앞에 있는 골짜기이다. ▶ 박극·방곡(方谷) 광음리의 한 모퉁이에 위치한다고 해서 방곡이라 일컫는다 한다. 무릉 유원지와 인접한 마을로 지금은 소수의 가구뿐이고 사과농사를 주로 한다. ▶ 웃보마을 암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보(洑)가 있는 위쪽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5번 국도 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 섯박골:웃보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절벽밑:웃보마을 건너에 있는 골짜기인데 절벽이 있다고 부르는 이름이다. ▶ 원당골·원당곡(院堂谷) 조선시대에 출장중인 관원에게 숙식(宿食)을 제공하던 원(院)이 있었던 곳이라서 원당골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원당골에 장씨가 많이 살았으나 지금은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 공신당:원당골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모장골:원당골 옆에 있는 골짜기로서 예전에 모정(茅亭)이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이 다. ◇ 지절골:원당골 앞에 있는 골짜기이다. ◇ 쑤밑골:지절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 제4미천교:원당골 남쪽에 있는 중앙선의 기차길 다리이다. 이 다리는 미천에 놓인 철교 가운데 넷째이며 1939년에 놓았다. ◇ 제5미천교:제4미천교 북쪽에 있는 철교이다. ◇ 지진바우밑:광음리 맨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일직현의 지경이었다. ◇ 진밭뚝:지진바우밑 앞에 있는 들이다.
무릉리 이곳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트골, 중산, 몽곡, 묵느므를 병합하여 무릉리라 한다. 이곳은 면소재지로서 학교, 면사무소, 지서 등이 있다.
▶ 무른개·무릉 이 마을은 미천(眉川)이 산부리를 돌아 흘러 들어가므로 무른개라 했는데 변하여 무릉촌이라 하였다. ▶ 돌트미·돌티미·중산리(中山里) 주로 돌로 이루어진 암산(岩山)과 석산(石山) 사이에 있기에 돌트미라 하며 지금은 중앙선 철로가 이 동네 가운데를 지나가며 암산을 뚫은 터널이 있다. ▶ 동트골·동티골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 삼릉(三陵) 김씨가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하루는 부친 마중을 나갔다가 이곳에서 동사(凍死)했다는 유래와 동채싸움을 했던 곳이란 유래가 겸해 전해지고 있다. ▶ 숨실·몽곡(夢谷) 이 마을은 골이 험하고 삼면(三面)이 꽉 막혀 외부의 소식을 잘 듣지 못한다 하여 숨은골, 꿈꾸는 골이라는 뜻에서 숨실 또는 몽곡(夢谷)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동녘골:숨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뒷 골:숨실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육십골:동녘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자리골:육십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먹 골:자리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먹골못:먹골에 있는 못이다. ▶ 묵느므·진답(陳畓) 이 마을은 미천 강변에 묵는(경작하지 않는) 논이 많이 있었는데 이를 경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넓은 앞들의 토질이 비옥하여 옛날에는 배추와 무가 잘되었다 하나 지금은 사과의 산지로 유명하다. ◇ 소 장 골:묵느므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면적이 비좁은 골이라 하여 소장골이라 한다. ◇ 건 넌 들:묵느므 앞 미천 건너에 있는 들이다. ◇ 남 악 들:묵느므 남쪽에 있는 들이다. ◇ 무짓개울:묵느므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담 방 골:무짓개울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사안(思案) 무릉리와 수상동 및 월림리 등 3개 마을 사이에 있다 하여 사안이라 하며 마을 사이에 작은 내가 흘러 경계를 이루고 있다. ◇ 단지계곡:이곳은 산 위에서 돌을 던지며 항아리 속에 물을 넣는 소리가 난다해서 단 지계곡이라 했다 하며 이 계곡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집에서 아기 장수를 낳았는데, 낳는 즉시 벽장 위로 뛰어오를 만큼의 힘이 있었으므로 부모들이 겁에 질려 안반(국수를 미는 두터운 나무 판자)으로 눌러 죽였다. 그런데 그 아기 장 수가 태어날 때 계곡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났다가 이 아기 장수가 죽었다는 것을 알 고 소장골을 향하여 날아 들어갔다고 한다. ▶ 보안 보의 안에 있는 마을이란 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강가에 위치하여 소(沼)를 이루고 있으며 근자에 와서는 유원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 여싯골·골안마을 이 마을 이름은 예전에 여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또 여우가 많이 출몰했던 골짜기였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하아리 아틈실(阿谷) 아래쪽에 위치한 하아리 전체를 아래아틈실이라 부르며 다음과 같은 작은 마을을 통틀어 일컫는 마을이다.
▶ 남짓골·남지곡(南池谷) : 이 마을은 남쪽에 못이 있었다고 남짓골이라고 한다. ◇ 공 실:남짓골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샘수골·천수곡(泉水谷) 약 300년 전에 한발이 심하였을 때 식수가 없어 이 곳에 하천을 파니 많은 물이 나와서 샘수골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굿 봉 들:샘숫골 서쪽에 있는 산으로 해발 335m이다. ◇ 굿봉들재:굿봉들 남쪽 기슭에 있는 재이다. ▶ 고개너머 고개 너머 위치하고 있다고 부르는 이름이다. 낙동강에 인접한 마을로 강 건너편은 풍산읍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채소가 잘되기로 손꼽히고 있는 마을이다. ◇ 딴 섬:고개넘 북서쪽에 있는 넓은 사장이다. ◇ 하아리 무문토기 산포지:이 유적은 하아리 낙동강 연안 수직 암벽이 끝나는 곳으로 부터 서쪽으로 풍천면 병산리가 마주 보이는 곳까지 약 1㎞의 제방 위에 있다. 이곳 에는 민무늬 토기와 석기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제방을 쌓는 과정에 다른 곳으로부 터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구멍무늬 토기, 붉은 간토기 등이 수습되었다. ▶ 재궁못 이 마을은 재궁(재실)이 있다고 부르는 이름이다. 낙동강에 가까운 고개 너머 마을 남서쪽에 있는 10여 가구인 작은 마을이며 고추가 특산물이다. ◇ 가는골:재궁못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소새박골:재궁못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수박등:재궁못 뒤에 있는 산인데 해발 177m이다. ◇ 배고기재:이 재는 아틈실에서 안동으로 갈 때 아주 산세가 가파르고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만 하는데 아무리 든든하게 배불리 먹고 길을 나서도 고개를 올라 넘어서면 허 기질 정도가 되었다고 배고픈 재라 하였다가 차차 변음하여 배고기재가 되어 전하여 오고 있다.
검암리 이 마을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야리를 병합하여 검암리라 한다.
▶ 검방우·검암(儉岩) 이 마을은 400여 년 전에 순천 김씨가 개척하였고 마을 뒤에 검은 바위가 있어서 검바우라 했으며 이곳은 선비들이 모여서 소일하던 곳이기도 하다. 특산물로는 무와 배추이고, 맛이 좋아서 옛날 임금님께 진상하였다고 전한다. ◇ 당골·당곡(堂谷):검방우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울창한 수목들이 연중 아름답게 단 장되므로 이곳에 당을 지었다 하며 검방우 주민은 물론 인근 사람들도 봄과 가을이 되면 이 곳 을 찾아와서 경관을 음미했으며 모두가 이 곳을 당골이라 부르고 있다. ◇ 안동마령동기와까치구멍집:이 집은 남평 문씨의 종가로 약 300년 전에 지은 것이다. 안동지역 의 전형적인 겹집평면 구성이며 일반적으로 초가지붕이나 보기 드문 기와지붕이다. 까치구멍집 은 북부산간형 서민주택으로 안동이 남방한계선이다. ◇ 안동권씨 검암리 재사(安東權氏 儉岩里 齋舍):이 건물은 안동 권씨 집안에서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지은 재사이다. 건물의 형태는 안채와 부속건물이 연결된 ㄷ자형이다. ◇ 신천강씨 검암리 재사(信川康氏 儉岩里 齋舍):이 건물은 신천 강씨 집안에서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지은 재사이다. ◇ 도원들:검방우 앞에 있는 들인데 새들이라고도 한다. ◇ 배웃골:검방우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대실·대애실·대야곡(大也谷) 조선 숙종 때 삼척김씨와 안동권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지형이 야(也)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대야곡, 대양동, 대애실이라 불려진다. ◇ 김성경 유허비(金成慶遺墟碑):단칸 맞배지붕 비각안에 세워진 비이다. 이 비에는 "通訓大夫行 安東判官金公諱成慶遺墟"라고 적혀있다. ◇ 모운사:대실 서쪽에 있는 절인데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 행계·한계·대계(大溪) 이곳은 낙동강과 미천이 합쳐지는 한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계라 하고, 낙동강을 숫물, 미천(眉川)을 암물이라 한다. 두 강물이 합쳐지는 지점에 넓은 백사장이 있는데 이 백사장에서 모래 뜸질을 하면 만병에 좋다고 한다. ◇ 딱 밭:한계에 있는 골짜기로서 저전이라고도 한다. ◇ 딴 섬:한계 서쪽에 있는 섬인데 독섬이라고도 하며 낙동강과 미천이 합하는 지점인데 모래사 장으로 되어 있다. ◇ 산막골:한계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소릿골:한계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고하리 이 마을은 고일 아래쪽에 있다고 아랫고일, 하고곡, 하고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곡, 신기, 덕곡, 죽리를 병합하여 고하리라 한다.
▶ 갈골·갈곡(葛谷) 이 마을은 칡이 많이 자라던 골짜기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새터 북동쪽에 있고 참깨와 고추가 특산물이며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다리바웃들:갈곡 주위에 있는 들인데 바위로 다리를 놓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선밧들:다리바웃들 남서쪽 위에 있는 들이다. ◇ 아를골:갈곡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아를지:아를골에 있는 못이다. ▶ 새터·신기(新基) 임란 전에 현재 마을 뒤의 골에 마을이 있었다. 조선 선조 때 권익상(權益相)이라는 선비가 피란 와서 이 골에 살다가 자손이 번창하여 새로 터를 잡아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새터라 하였으며, 이 골의 마을은 없어졌다. ◇ 덕 골:이 골에서 앞으로 마을 옮겨서 별다른 피해 없이 임란을 무사히 넘겨 덕을 보았다고 덕골이라고 한다. ◇ 무일골:새터 동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남봉골이라고도 한다. ◇ 절 골:죽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예전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 숨실재:새터에서 무릉리의 숨실로 가는 재이다. ▶ 죽리(竹里) 이 마을은 예전에 마을 입구 쪽에 대나무 밭이 있었다고 죽리라고 하며 새터 서쪽에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고추가 특산물이고 뽕나무를 심는 등 복합 영농에 힘쓰고 있다. ◇ 건 골:죽리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독수리봉:건골 뒤에 있은 산으로 독수리가 많았다고 부르는 이름이다. ◇ 송리재:죽리에서 일직으로 가는 재를 말한다.
단호리 이 지역은 본래 서선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현과 오미를 병합하여 단호리라 하여 풍산읍에 있었으나 지금은 남후면이다.
▶ 상단지·웃단지 낙동강이 동쪽에서 북서쪽으로 흘러 다시 서쪽으로 돌아 흐르고 있어 흐르는 형상이 마치 단지 모양과 비슷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또 이 마을 주위의 흙 빛이 붉고 못이 있어 단지라 하기도 한다. ◇ 낙 암:건지산 남동쪽 강변에 있는 벼랑이며 뒤에는 건지산이 수려하고, 앞에는 낙 동강이 소를 이루어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이곳을 낙암벨 혹은 건잔벨이라고도 한 다. ◇ 상락대:고려 후기의 명장 김방경 선생이 즐겨 유상하던 상락대는 남후면 검암 속칭 대애실 앞 미천 물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약 2㎞ 지점이다. ◇ 낙암정:이 정자는 반누각식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팔작지붕 홑처마이다. 세종 때 문신인 배환 선생이 은퇴하여 만년을 지내던 곳이다. ◇ 회곡나루터:상단지 북쪽 낙동강에 있는 나루터로서 단지에서 회곡으로 건너간다. ▶ 꼬지골·중단지 상단지와 하단지 중간에 위치하여 꼬지골 또는 중단지라고 한다. ◇ 고지고개:중단지와 아랫단지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 우 모 정:중단지 북쪽에 있는 정자이다. ▶ 아랫단지·하단지 강 하류에 위치한다고 하단지라 한다. ◇ 논 들:아랫단지 뒤에 있는 골짜기인데 논이 많다고 논들이라고 한다. ◇ 단지못:아랫단지 뒤에 있는 못이다. ◇ 큰 골:아랫단지 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이다. ▶ 오미단지 마을 뒷산이 강쪽으로 뻗어 있는데 자라가 강에서 산으로 기어오르는 것과 같다하여 자라 꼬리에 비유하여 오미단지라 한다.
상아리 ▶ 웃아틈실·상아(上阿) 원래 아틈실(阿谷)은 상아리와 하아리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위쪽에 있다 하여 웃아틈실이라 하고, 아랫쪽에 있다고 해서 아래아틈실이라 부르고 있다. ◇ 돌문:마을 어귀에 돌문이 서 있다. 타지방 사람이 이 곳을 지날 때는 절을 하고 말을 탔을 때는 하마하여 통과해야 화를 입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 돌문은 상아리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어서 돌문을 없애거나 무너뜨리면 마을에 피해가 온다 하여 지금 도 소중히 보호하고 있다. ◇ 집앞골:상아리 앞에 있는 골짜기이다. ◇ 조산들:집앞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 갱변들:조산들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 징골들:갱변들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 늘근태골:상아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따바짓골:못밑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 왜샛골:따바짓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 딧골재:상아리에서 고상리의 납시로 가는 재를 말한다. ◇ 말응골:상아리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못밑골:상아유지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 웃개골:상아유지 위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지삿골:상아리와 풍천면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 살그밋골:지삿골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상아유지:상아리 남쪽에 있는 못인데 1935년에 정부 보조로 축조했다. ◇ 흠실재:상아리에서 고상리의 흠실로 가는 재이다. |
첫댓글 이종원 총무님 사진 올려 주시십시요,
그리고 수정사항 있으시면 연락 주십시요.<카페지기:이원갑 010-3288-0900>
김준현입니다.
정보수정에서 사진올렸는데요. 이미지 준비중이라고 뜹니다.
어떻게 해야하나요?
회장님 사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진 올렸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업그래이드 할 사항 있으시면 자료 주시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요.
좋은정보 잘보았습니다
게곡동은 잘못된 역사를 알리는것 같습니다 저가알기로는 동내를 게척한 분들은 개곡에사시는 황씨내
선조입니다 동회관에 가면 기록이 있는걸로 알고있습니다 권영식씨 한분에 말을 인용하여 역사를 잘못일리는
것은 황씨내 조상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그분은 작고하시고 안계시지만 옛날부터 권씨내 일이라면 좋은쪽으로
끌고가는 분입니다 앞으로 많은 남후면민이 보시게 되는대 하루빨린 수정하시거나 삭제 바람니다
제송합니다 다시 학인하겠읍니다
산야님 카페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카페지기 입니다,
먼저 카페에 회원등록을 하시고 의견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정보를 공유할때 연락도 할수있고 잘못된 정보는 바르게 잡을수있습니다,
산야님이 수정하거라 삭재하여라 하실수는 없습니다,
정회원도 아니고 산야님의 정보가 맞다는 근거도 없습니다,
상기글은 접실과 개곡을 병합하여 올린글 입니다(개시글에도 접실이라고 되어있음)
접실은 고려말 사복재(思復齋)권정(權定)선생의 접거(接居) 세거지가 아니란 말씀입니까?
제가올린 정보는 공인된 안동시청 홈페지에 올려저있는 정보입니다,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산야입니다 예의를 같추지 못한점 대단의 제송함니다
지방유래는 저가 알기로는 전설에 불과한 걸로압니다
개곡도 마찬가지입니다 며칠전 고향을 다녀왔읍니다 개곡동을 찾게되었는대
알만한 사람들과 알아본결과 역시 학답을 찾을수 없었읍니다
저도 칠십후반에 나이로서 어린시절 살던고향입니다 동내 학식이 많으신 분들에 하시는말씀과 황씨문중 분들에 말을 들어본결과 개곡은 황씨 선조분이 다래아무 숲을해치고 왔기때문에 開열개 谷골곡 열고 개곡에 들어왔다 하여
개곡이라하고 그후 도둑이 많고 악조건에 살수가 없서 잠시 나갓다가 다시살게 되었다하여
皆다개 谷 골곡을 개곡이라 한다고합니다
한정된 글자라 연결합니다
사복재(思復齋)권정(權定)선생의 접거(接居)는 그이후입니다 이런일들이 옜날 구장 동장업무를 오래보시던 분들에 말씀을 저가 전해들어왔으며 역사를 아시는분들이 작고하시고 자료를 수집당시는 개곡에서 권영식 어른신깨서 제일 연로하섰는 걸로압니다 그래서 그분 한분에 말씀이 잘못전해 오고 있는걸로 압니다 지기님깨서 저에 경솔합을 이해하시라 밑습니다
앞으로 안동카페 무궁한 발전있기를 바라면서 심려를 끼처들여 제송합니다
남후면 여자 총무는 이번에 바뀐걸로 알고 있습니다.
장선화 전임 총무는 본부 일을 보시고
다른분으로 교체 되었다는데 알아보고 연락 드리죠
수고 하셨습니다
남후면 새 총무로 고하동 출신 권외현님을 모셨습니다.
앞으로 활약을 기대합다.
새로 선임된 임원분들 사진과 연락처를 올려주시거나 보내주시면 업그래이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