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타 니파타 12-210 자림 가사단상]
뱀의 품
12.성자의 경
210. [석가세존]
모든존재 머무는곳 너무나도 잘알기에
그것들의 가운데에 어떤것도 바램없는
탐욕떠난 욕망없는 성자시니 그분께서
저언덕에 도달해서 다툼없기 때문이네
----2565.7.22 자림 심적 합장
[숫타 니파타 12-210 자림 시조단상]
모즌 존재의 처소에 대해 잘 알아
그것들 가운데 어떤것도 바리지 않는
그 분은 탐욕을 떠난 욕심없는 성자네
그 분은 저 언덕에 도달하셨으며
그 어떠한 다툼도 없기 때문이니
그 분은 진정한 해탈 열반을 체험하셨네
●●●더하는 말○○○
그러므로 진정한 해탈을 목표로 정진하는 수행자는 그 어떠한 욕망의 흐름의 세계, 물질의 흐름의 세계, 정신의 흐름의 세계가 진정으로 의지하고 안전하고 완벽한 세계가 아님을 분명하게 간파하기에 치우침과 걸림과 매듭과 애착과 집착이 없는 저 열반의 세계를 체험한다. 만약 그가 즐거운 욕망의 하늘나라의 흐름을 흠모했다면 그는 그 욕망의 흐름에 휩쓸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세계에서 좋아하며 즐기고 있을 것이다. 섬세한 물질의 세계는 고요한 마음을 닦아 집중력이 생겨야만 태어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고요만을 즐기며 홀로 지내기가 습관이 된 사람은 그러한 고요하고 안정된 섬세한 물질의 세계를 최고의 안정된 세계로 착각하고 그 고요한 세계의 흐름 속에 세월아 네월아 하며 편안하게 지내지만 그러한 고요한 흐름의 세계도 고요함으로 익힌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낮은 단계로 다시 떨어져 돌고 도는 삶을 맛보아야 하므로 최상의 열반을 이상으로 삼는 수행자는 이러한 고요한 흐름의 세계에 안착하지 않는다.
제일 높은 단계의 마음만 존재하고 아주 미세한 마음 작용만 있는 정신의 세계 순수한 마음의 세계는 너무나 안정이 되고 몸과 물질 등의 간섭을 이미 떠났으므로 시간도 그들이 체감하는 시간은 곧 영원이며 다른 욕망의 세계나 섬세한 물질의 세계 수준은 차원이 다르기에 마치 하루살이의 삶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 이 마음의 세계도 마음의 조작에 의해서, 움직임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이므로 그곳 존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원하지 않으며 욕망의 세계보다 섬세한 물질의 세계보다 길기는 하나 영원한 안정의 세계는 아니다. 순수한 마음 세계의 최고의 경지인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닌 생각의 고요한 마음 상태의 세계[비상비비상처천, 비상비비상처정]은 어차피 생각의 범위 마음 작용 안의 일이니, 손오공이 십만 팔천 리를 한숨에 날아가도 결국은 부처님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었다는 서유기의 비유는 참 적절한 비유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 어떠한 세계도 해탈 열반의 세계는 아니라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수행자는 머묾이 없고 머물려는 마음 작용도 쉰다. 그에게는 아무리 소녀시대가 소원을 말해보라고 손짓해도 소원을 말하지 않는다. 어떠한 소원을 말하는 순간 벌써 그 마음은 소원의 노예가 되어 그물에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양 없음과 소원 없음, 행위 없음으로 완전한 해탈을 체험하며 탐냄이 없고 성냄이 없으며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으로 완전한 지혜를 운용한다. 그러한 성자들은 욕망의 존재라는 흐름, 섬세한 물질의 존재라는 흐름, 순수한 정신의 존재라는 그 어떠한 존재에도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존재를 초월한다. 초월하므로 자유자재하며 걸림과 치우침이 없는 완전한 해탈 열반의 삶을 누린다.
잘 제어된 마음은 더는 마음이 아니기에 완전하게 편안한 마음이라 하며 모든 경계를 뛰어넘었으므로 그 어떠한 경계에도 걸리거나 막히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의 체험은 불교가 다른 당시의 전통 종교의 주장과 결을 달리하니 현생에서 죽도록 참을 수 없는 생고생을 하고 죽어서 다른 세계에 태어나 보답을 받는다는 당시 나체 고행자의 주장과 다른 해탈 열반으로 해석되며 이생에서 죄인의 과보를 받아 천하게 살다가 죽어서 절대신의 하늘에 태어나 그 신과 하나가 되어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는 전통 바라문의 주장도 그 절대신을 만나본 바라문이 한 사람도 없으니 허구의 전대신이며, 죽어서 보장된다는 주장을 역시 확인이 되지 않기에 모순이 된다. 그러느니 지금, 이 순간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알고 보아 현재의 자기 자신을 잘 제어해 새로운 행위를 쌓지 않고 완전한 청정의 마음을 체험해서 해탈지견을 얻으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현생에서 그 대안을 제시하여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제어하는 수행과 깨침 그리고 그것이 더욱더 깊어지고 넓어져 완전한 해탈을 체험하는 수행과 깨침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와서 보라고 자신 있게 외치신 붓다의 사자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