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4:1-10 하나님의 역사는 숫자에 있지 않다.
어떤 교회가 큰일을 할 수 있을까? 인원이 많고 재정도 풍부한 교회일까? 일반적으로는 맞는 답이지만 실제로는 교인들이 많아도 일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은 어느 사회 공동체나 마찬가지다. 숫자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언제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심 즉 믿음을 보심) 교회가 크고 많은 숫자가 모인다 해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우리 주님이 피 값 주고 세우신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그저 육신의 생각과 판단만 있다면 큰 사이즈와 숫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사이즈와 숫자는 의미가 없음) 그래서 위대한 역사가 토인비는 일찍이 “인간의 역사는 많은 사람에 의해 진보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소수의 신념과 용기에 의해 이룩된다.”고 말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것을 우리 모두에게 말씀해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는 많았지만 온전한 믿음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은 모세와 아론을 비롯해 여호수아와 갈렙...등 소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는 리더십에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었다. 여러분들은 모든 상황 속에서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창조적인 소수가 되기 바란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창조적 소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자.
1.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5절에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땅 앞에 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밤새토록 통곡하며, 한 지휘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반역하였다. 1-4절에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온 회중이 하나님의 뜻에 반역할 때, 모세와 아론은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엎드렸다. 더 이상 그들을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불신으로 반응함 - 인간의 힘으로 해결이 안 되므로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함 -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심) 이처럼 사람과 상황을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만이 창조적인 소수가 될 수 있다. 렘33:2-3에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창조적 소수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신다. 기도자 캐더린 마샬이 말했다. “우리가 기도학교에 입학하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을 쓰기만 하면 된다. 첫째는, 네게 꼭 필요한 것이 있느냐? 이 질문에 예, 있습니다. 하고 답을 쓰면 된다. 둘째는, 필요한 것을 네 힘으로 도무지 얻을 수 없느냐? 이 질문에 예, 그렇게 느낍니다. 하고 쓰면 된다. 그 다음에는 답안지를 들고 당당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 그러면 응답을 받게 된다.” 내 힘과 능력으로 안 될 때,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인간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셨다. ‘와이미’의 저자 김춘근 박사는 미국에서 교수 생활하다 1976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간경화와 간염으로 죽음을 선고받게 되었고, 인생의 마지막 정점에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극적인 치유를 받은 후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으로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열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은혜를 주심)
1980년부터 시작된 16년 알라스카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로 알라스카의 요셉이 되게 했다. 그는 탁월한 교수 활동으로 ‘알라스카 주립대학 최우수 교수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알라스카 국제 경영무역 연구소’, ‘알라스카 세계무역센터’ 등을 설립·운영하여 알라스카 주립대학 개교 이래 최고 영예상을 수상했다. 한편 그는 10년 동안 알라스카 주지사 경제·국제무역 특별 고문으로 일하면서 300%의 수출증가를 이루어 알라스카 주로부터 주 경제개발 공헌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1985년에 기도하던 중 하나님으로부터 '미국을 신앙으로 위대하게 만들라'는 놀라운 비전과 사명을 받으면서 김춘근 박사의 삶은 다시 달라졌다. 그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300만 마일을 다니며(4,828.032km) 복음을 전하였으며, 1993년부터 미국의 신앙 회복 영적 회복을 위해 쓰임을 받게 되었다. 김춘근 박사는 영적으로 타락한 미국을 청교도 신앙으로 회복시켜 무너진 미국 교회와 사회를 재건하기에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며 헌신을 하였을 때,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김춘근 박사는 기도를 쉬지 않고 매일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며, 다음 세대 성령 충만한 리더들을 양육하여 주님의 지상 명령을 땅끝까지 이루도록 그의 남은 인생을 다 바쳤다.
2. 신령한 눈을 가져야 한다.
6-7절에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하셨다. 여호수아 갈렙은 신령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영적인 눈 - 믿음의 눈) 그들은 온 회중이 가진 눈과 달랐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열 명의 정탐꾼들의 눈에는 가나안 땅이 사람을 삼키는 멸망의 땅으로 보였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의 눈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심히 아름다운 땅으로 보였다. 똑같은 땅과 상황을 보고 왔는데 열 명의 정탐꾼은 아주 나쁜 땅이라고 말하였고, 여호수아 갈렙은 좋은 땅이라고 말하였다. 왜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왔을까?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이다. 옛말에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다. 성공적인 사업을 위해서는 투자하기 전에 투자를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정확히 현실 상황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성공하는 자는 보는 눈이 있고 실패하는 자는 보는 눈이 없다. 사업의 성공과 실패를 보는 눈이 좌우하는데, 하물며 영적인 일에는 어떠하겠는가? 영적인 성공과 실패 역시 보는 눈이 좌우한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신령한 눈으로 (영적인 눈) 끝까지 반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매일 말씀을 보고, 보았던 말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함 - 여호수아 갈렙처럼 반응을 할 수 있게 됨) 여호수아 갈렙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현실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이 좋은 땅으로 보이고 그 곳에 거인 아낙 자손이 살고 성이 견고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자 - 긍정적인 해석이 나옴) 시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셨다.
3. 긍정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
8-9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여호수아 갈렙은 모든 상황 속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영적 내공 대단함, 영적인 고수임 - 진정한 고수는 실전에서 볼 수 있고 진정한 믿음은 어려운 상황속에서 볼 수 있음)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게 불가능은 없다. 눅1:37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셨다. 현실에 민감한 사람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 없다. 벳새다 들녘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을 때, 제자 빌립은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떡을 파는 곳이 없고, 설령 떡을 파는 곳이 있다 해도 이들을 다 먹이려면 200 데나리온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돈이 없어 먹일 수 없다고 말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빌립은 현실주의, 계산주의자였음 – 믿음이 잃으면 그렇게 됨)
만약, 우리들이 주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지 못하고 현실적인 계산만 한다면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숫자와 사이즈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와 아론처럼, 여호수아 갈렙처럼 반응한다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에 넉넉히 들어가 그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숫자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