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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경희여고 인문반 학생들과 함께하는 -서울인문학기행
-부암동과 청와대 주변의 역사와 문학 장소 탐방
일시: 2018년 9월1일(토)
장소:부암동과 청와대 주변 역사와 문학 장소 탐방
강사: 김경식
경희여고 담당교사: 김애령
부암동이라는 지명은 부침바위(부암)에 의해 얻어졌다. 부침바위는 큰 돌에 작은 돌을 붙여기 때문에 생겼다. 현재 이 돌의 위치는 부암동 134번지이다. 유원빌라 입구로 추정을 하고 있다. 돌을 이곳에 부착하면 사내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이 있었기에 주로 여인들이 몰래 이곳에 돌을 붙였다고 전한다. 이곳을 조선 태조실록에는 한성부 북부 의통방이라 했다.
<도성삼군문분계총록> 의통방의 경리청계로 기록되어 있다. 도성삼군문분계총록은 영조27년(1751)에 간행된 역사 자료이다.
<육전조례≫에 의하면 부암동은 상평방 경리청계라는 지명이었다. 육전조례는
고종 4년(1867)에 간행된 자료이니 조선 후기의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1895년에는 한성부 성밖 상평방 경리청계의 무계동, 부암동, 백석동이 이 지역에 속해 있었다. 1947년에는 서대문구에 속했는데 부암동과 홍지동, 신영동 일대가 새검정동으로 부르기도 했다. 당시 이 지역 전체는 아마도 새검동이었을 것이다. 이 지역에 서대문구에서 종로구로 편입하게 된 것은 1975년 10월1일이다. 현재 부암동사무소는 부암동, 홍지동 대부분을 관할하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삶과 죽음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하숙집터의 단상 □서론
봄기운은 언제나 가슴을 흔든다. 아직도 아침과 저녁으로 바람은 차고 시리지만 봄은 멀지 않았다. 봄날을 기다리며, 자하문(紫霞門)이 있는 고개를 오른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라는 문학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를 찾는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오르는 길”이라는 까만 흘림체 글씨가 하얀벽에 선명하다. 인왕산에서 백악산으로 이어진 능선에는 윤동주의 시심이 일렁인다.
서울특별시 서민들의 삶터였던 청운아파트는 몇 년 전에 철거되고,
이제는 청운공원(淸雲公園)이 되었다.
서울시는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고, <윤동주언덕>을 만들고 시비와 정자를 세웠다. 청운공원 정자 옆으로 난 샛길을 돌아 언덕으로 오르면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서울 도심을 향해 서 있는 시비(詩碑)에 새겨진
‘서시’를 읽으면, 그가 추구했던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시인의 시 '서시'
그러나 윤동주 시인의 시 '서시' 를 읽으면, 현실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언제나 서시를 읽으면서도 떳떳할 수 있을지...
언덕에는 몇 년 전에 중국 용정의 윤동주 시인의 묘소에서 가져온 흙을 뿌렸다. 윤동주 시인은 인왕산 수성동계곡의 밑에 자리잡고 있는 누상동(樓上洞)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이 언덕은 그가 사색에 잠겨 시심을 가슴에 품고 당시 경성과 북악산 인왕산을 바라봤을 장소다. 윤동주의 삶과 문학적인 정서가 가슴의 파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윤동주 시인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한 시인이다. 그에게는 조국이 없었다.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이다. 식민지 청년이 당해야 했던 정신적 고뇌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자유와 희망의 시로 승화하였다. 결백하고 지성적인 청년은 하늘의 별을 그리워했다. 맑고 순결한 시어를 조탁하며 한글과 민족을 하늘에 심었다. 삶이 고단하고 부끄러운 날이면 하늘을 보았다.
그의 삶은 짧았고 슬펐다. 마지막 그가 숨을 거둔 곳은 일본의 감옥이었다. 독립운동 협의로 일제는 그를 감옥에서 죽인 것이다. 1945년 2월16일, 28세의 젊은 청년은 서럽고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누구인가. 윤동주다. 순국이었다. 죄가 있다면 빼앗긴 조국을 사랑한 죄였다. 당시 많은 대한의 젊은이들이 윤동주처럼 죽어갔다. 윤동주는 시를 썼다. 살아생전에 그를 시인이라 불러준 이가 없을 정도로 무명이었다. 고독했다. 그러나 순결하고 맑은 영혼은 하늘을 지향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칼날은 오히려 그가 좋아했던 하늘을 두려워했다. 맑고 순결한 시어를 창조하였다고 하여, 그가 독립의지를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총과 칼을 들고 일제에 항거하는 것만이 독립운동은 아니지 않는가. 윤동주는 조용하지만 은밀하게 일제에게 PEN으로 항거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거룩한 저항정신은 자신의 부끄러운 고백으로부터 출발한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국에서 살아가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자기 고백의 언어조차 일제는 위험하게 여겼다. 윤동주의 시어들은 전달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무서운 의식화로 받아 들여 졌을 게다. 부끄러움을 알게 되면 참회하고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현실에 대응하게 된다. 이것이 독립의식으로 발전하면 결국 일제에 투쟁한다. 이것이 일제 경찰이 그를 체포한 이유다. 윤동주는 죽는 날 까지 인쇄된 시집을 발행하지도 못하고 육필시집을 3권 만들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한글로 시집을 발행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적인 부활은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되고도 3년을 기다려야 했다.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 발행되었다. 이 시집을 읽은 해방 된 조국의 젊은이들은 가슴으로 울었다. 민족의 시인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읽는 사람들에게 별을 가슴에 품게 만들었다.
식민지의 밤길을 걸을 때에 썼던 그의 시들은 순결하고 결백하여 감동을 준다.
삶과 시가 일치하였기에 민족의 등불이 되었다. 등불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이제 그의 시편들은 민족의 별이 되어 하늘에 떠 있다. 아직도 시련의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 삶의 길을 평화롭게 인도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민족의 재단에 바쳐진 순교였다. 윤동주를 대표적인 민족 시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결국 그의 삶과 죽음의 현장을 찾아 떠나는 일은 민족의 역사와 문학을 탐방하는 기행이다.
□본론
1) 윤동주의 삶과 문학
조국의 식민지 상황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였다면, 그는 아마도 그 체제에 순응하면서 잘 살았을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민족의 부끄러운 현실을 알았기에 펜을 들었다. 참회해야 하는 부끄러움을 그냥 알았던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남다른 민족의식이 있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출생과 유년시절을 이해해야 한다. 윤동주 시인은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1917년 12월 30일 태어났다. 북간도다. 윤동주의 삶의 궤적을 찾기 위해서는 북간도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좁게는 두만강과 압록강의 사이 섬을 간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이주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결국 간도의 범주도 넓어진다. 계속해서 북방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곳은 옛 고구려, 발해의 영토이므로 우리 땅이라는 의식이 많았다.
간도에는 서간도와 동간도, 북간도가 있다. 서간도는 백두산 서편이다. 달리 말하면 압록강 건너편과 요령성 봉성시 부근 봉황성 주변까지다. 동간도는 백두산과 송화강 상류지역의 서부지역이다. 북간도는 두만강 인접 지역과 동부지역이다.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가 모두가 북간도 땅이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북간도는 그의 문학의 원천이 되었다.
윤동주의 고향마을 명동촌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다. 서북쪽으로 선바위란 삼형제 바위들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절경이다. 그 산 정상에는 성터의 흔적이 있다. 선바위 언저리는 명동촌 사람들의 놀이터였다. 동쪽에서 뻗어 내린 장백산맥은 오봉산과 살바위란 험한 산들 휘돌아 명동촌으로 다가왔다. 명동촌에서 바라보면 고산준령이 첩첩이 뻗어 선바위 주변을 서성거리는 이유다.
윤동주는 초등학교 방학 때 선바위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필자는 1989년 가을 날 이웃에 살던 문익환 목사에게 직접 윤동주와 그의 유년 시절이야기를 들었다. 명동촌 선바위로 윤동주와 함께 소풍 같던 이야기도 했다. 당시 사진도 보여 주었다. 문익환 목사는 유년 시절 윤동주의 친한 친구였다.
윤동주의 생가는 5칸의 기와집이다. 그의 어린 시절에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서 있었다.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약 30그루의 살구와 자두나무가 있는 과수원이었다. 동쪽 쪽대문을 나서면 우물이 있다. 우물가에는 큰 뽕나무가 서 있었고, 교회당과 초등학교 건물이 보였다. 이 우물은 시 <자화상>의 작품의 무대이다.
그는 왜 이곳에서 태어났을까. 만주는 함경도보다 농사짓기에 땅이 비옥했다.
회령과 종성 등지에 살던 네 가문의 어른들은 모여 함께 두만강을 넘기로 약정한다. 회령과 종성은 두만강변의 도시였다. 자신들이 살던 터전을 정리한 4가문의 어른들은 모두 141명의 식솔들과 더불어 1899년에 두만강을 건넌다. 당시는 국경이 지금처럼 확실하지 않을 때다. 목숨을 걸고 떠난 이들에게는 잘 살아보자는 강한 소망이 있었다. 1899년 2월 찬 바람이 불던 날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 김약연, 남종구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 네 가문의 식솔들은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도착한다.
당시 간도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고 있었다. 청나라는 간도에 사람들이 사는 것을 금했다. 그들의 조상들이 터전을 잡았던 장소였기 때문에 신성시했다.
그러나 간도는 고구려의 영토였다. 우리 역사를 잘 알고 있었던 이들은 작은 영역부터 우리 땅으로 만들 작정을 하고 떠난 것이다. 조선의 불꽃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어떤 지배에서도 벗어나 자유롭게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마음들이 간도로의 이주를 결정하게 만들었다.
윤동주의 고향 명동촌은 기독교가 일찍 전해졌다. 조선에서 이주한 사람들에게 교육과 독립운동의 거점이 된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1900년 두만강을 건넌다. 18명의 식구들과 함께 명동촌에 자리를 잡는다. 윤하현은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아들인 윤영석을 북경에 유학을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했다. 윤영석의 아들이 윤동주다.
윤동주는 장로교 유아세례를 받았을 정도로 집안 모두가 기독교인이었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당시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김약연 선생이 활약하던 이 지역은 이미 독립운동의 거점 같은 장소다. 자연적으로 그는 민족적인 정기를 가슴에 새기면서 자랐다. 1931년(14세)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에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김약연 선생(1862~1942)은 회령에서1899년 이주해 온 분으로 1909년 기독교인이 된다. 청국인에게 땅을 구입하여 조선인 마을을 만든 장본인이다.
북간도 최초의 신교육기관은 1906년 10월경 이상설 등이 용정에 설립한 서전서숙(瑞甸書塾)이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1907년 4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떠난 후 문을 닫는다. 이후에 명동촌의 명동서숙(明東書塾)설립된다. 김약연 선생에 의해서다. 그는 명동서숙을 설립하고 명동소학교 명동중학교를 세운다. 또한 교회당을 신축하고 서울에서 교사를 초빙한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1875~1947) 선생은 1910년 기독교인이 된다.
윤하현 선생은 김약연 선생에 버금가는 선각자였다. 김약연 선생에게 윤하현 선생이 없었다면 “그의 지도력은 그 권위를 잃었을 것”이다. 이 말을 문익환 목사의 모친에게 직접 들었다. 김약연 선생의 여동생 김용과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과 혼례를 올린다. 명동촌의 경사였다.
윤동주는 두 누님을 잃고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동주의 10세까지 이름은 해환(海煥)이었다. 동생 윤일주는 달환(達煥), 나이 어려 세상을 떠난 동생은 ‘별환’이었다. <해>와 <달>과 <별>을 첫 자에 넣어 이름을 지었던 부모의 생각은 그를 시인이 되게 만들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육필시집을 만들기도 했던 윤동주의 이런 결과물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
윤동주는 9세 때인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한다. 김약연 선생이 설립한 민족학교였다. 이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조선역사'였다. 같은 반 학생이 고종사촌 송몽규와 문익환이었다. 이 학교에는 항상 태극기가 게양 되었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 졸업생 14명에게 주어진 선물은 김동환의 <국경의밤> 시집이었다. 학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명동촌에서 십리 떨어진 대립자에 있던 중국인 소학교에 편입한다. 그곳에서 1년간 수학한다. 그의 대표시 <별 헤는 밤>에서 “패(佩),경(鏡) 옥(玉)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라는 시어는 이 학교에서 만났던 중국인 소녀들과의 추억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유년기를 보낸 윤동주에게는 자연히 독립 정신이 뇌리와 가슴에 흐른다. 당시 가족들과 이웃들의 화두는 민족과 독립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어는 별'이다. 이런 이유로 그를 천체 미학의 시인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민족과 독립, 희망의 상징어를 별로 만들었다.
조국 광복은 자신이 살아서 보기에는 너무 멀리에 존재하는 별이었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서시의 '주어진 길'은 자신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희생 재물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그의 시는 아름답고 맑고 순결하지만 내면에는 이런 민족적인 자각이 꿈틀거리며 흘러간다.
1932년 4월 윤동주는 은진중학교로 진학한다. 가족들도 모두 용정으로 이주한다. 자식교육을 위해서였다. 생가도 이때 매도되어 다른 사람들이 살다가 1981년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자신의 고향 마을 명동촌의 유년시절의 삶과 풍경들을 동시에 담았다.
생가는 1994년 8월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용정문학연맹과 연변대학연구소 기타 많은 이들의 성원으로 복원되었다.
윤동주가 15세까지 살았던 집이니 그의 문학소년 시절의 꿈과 희망이 싹튼 유서 깊은 곳이다. 이 집에서 어린이잡지 ‘아이생활’과‘어린이’를 구독하여 읽었다. 시인의 꿈을 키우던 생가가 문학 산실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초등학교 친구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만들기도 했으니 생가는 당시의 추억이 묻어 있는 집이다. 1931년 3월 20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인 소학교에서 1년간 공부한다. 그 무렵 명동에는 공산주의자들의 테러가 성행했다. 평화를 갈구하던 가족들은 윤동주의 중학교 입학에 즈음하여 용정으로 이사를 한다. 명동촌은 정든 땅이었다. 용정은 명동촌에서 북쪽으로 30리쯤 떨어진 해란강 하류의 소도시였다.
명동촌은 이념의 갈등을 일으킨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아편이라고 몰아 붙였다.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을 살해하려고 했다. 더 이상 이주를 미를 수 없었다. 용정가 제2구 1동36호 20평 정도의 초가집으로 이사를 한다. 윤동주는 1932년 4월,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1932년은 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해였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앞 세워 괴뢰국을 만든다. 푸이는 허수아비였다. 결국 북간도는 만주국의 영토가 된다. 북간도의 위기였다. 북간도의 실권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진중학교와 그들이 경영하던 병원들은 일종의 치외법권적 혜택을 받았다.
은진중학교는 기독교 학교였다. 캐나다 선교부에서 경영했다. 학교 분위기는 일본의 간섭으로 부터 자유로웠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에서 축구도 잘 했고 교내 잡지를 만드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웅변도 잘 했다. <땀 한 방울>이란 제목으로 1등을 하기도 했다.
동급생인 송몽규가 북경으로 문익환이 평양 숭실중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935년 9월 숭실중학교에 편입한다. 그러나 1936년 봄 신사참배로 숭실중학교는 폐교된다. 이 무렵 문학에 심취한다. 도서관에서 백석의 시집 <사슴>을 빌려 자신의 필체로 필사한다. 신문을 스크랩하고 시를 습작하며 열심히 독서한다.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카톨릭소년>지에 동시를 발표한다.
중학교 때 그의 서가에는 정지용시집, 변영로의 <조선의 마음>, 주요한의 <아름다운 새벽 >, 김동환의 <국경의 밤>, 한용운의 <님의침묵>, 양주동의 <조선의맥박>, 이은상의 <노산시조집>, 윤석중 동요집이 꽃혀 있었다. 연희전문학교 입학당시 그의 서재는 약 800권의 장서로 벽면이 가득했다.
예수의 탄생일 성탄절에 최초의 시 작품이 탄생한다.
<초 한 대 >,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는 바로 1934년 12월 24일 성탄절에 쓰여졌다. 이듬해 그는 평양 숭실중학교로 3학년에 편입한다. 은진중학교에서 4학년 1학기를 마친 상태였지만 편입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에 한 학년을 낮춰 편입한다.
윤동주는 어렵게 편입했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1936년 3월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한다. 1938년 2월에 졸업한다. 은진중학교와 광명학원 중학부는 용정중학교의 전신이다.
윤동주 시인은 은진중학교와 광명학원을 5년 넘게 다녔다. 용정중학교 교정이 윤동주 문학기행의 산실이 된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다. 교정의 윤동주 시비는 1992년 9월10일 동아일보와 서울해외한민족연구소가 후원하여 세워졌다.
윤동주는 1938년에 서울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다. 의과대학을 선택하라는 아버지의 반대는 심각했다. 문과입학을 반대에 윤동주는 단식으로 호소했다. 조부와 외삼촌 김약연 선생이 부친을 설득하여 윤동주 연회전문 문과에 입학 할 수 있었다. 이양하 교수에게 영시를 배우고 최현배 교수에게 조선어와 민족의식의 깨우친다. 그의 시는 민족적이며‘슬픔의 미학’으로 변모한다.
식민지의 상황인식과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동시를 쓰던 천진무구함에서 벗어나는 때는 이 무렵이다. <슬픈 족속>에는 당시의 그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 시는 자신이 처한 현실 상황을 표현한다. 불과 4행이지만 흰 수건, 흰 고무신, 흰 저고리, 흰 띠로 모두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그런데 흰 수건은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은 거친 발에 걸리고, 흰 저고리는 슬픈 몸집을 가리고 있다. 백의 민족인 우리 민족은 슬픈 족속이 된 것이다. 나이 22세 때에 비로소 통렬한 자기 성찰을 하며 민족을 가슴에 담는다. 절망의 정서가 고개를 숙이는 현상으로 나타난다면, 희망은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다. 결국 절망과 희망은 가까운 거리에 존재한다. 절망의 정서는 슬픔을 동반하며 지상의 것들을 추구한다. 동주가 발견한 희망의 상징어 들은 모두 지상에 존재한다. 그것은 하늘과 별과 달이다. 그는 희망의 길을 준비했다. 1938년 5월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여 꿈을 키우고 있었다. 걷기를 좋아했다.
그는 연희 동산을 거닐며 절망의 길이 <새로운 길>이 시 같이 되어 주길 기원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 마을로
-윤동주 시인의 시‘ 새로운 길’ 전문
이 시가 쓰여 지던 1938년 당시 연희전문학교 정문 앞에서 서강 쪽으로는 논이었다. 자신의 고향 북간도를 그리워하며 아름다운 조국의 농촌을 사랑했다. 윤동주는 논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그는 산책을 좋아했다.
윤동주의 시작품은 모두 110여 편이다. 이중 35편이 동시이다.
지금도 연세대 교정에 남아 있는 기숙사 건물은 고색창연하다. 지금은 연세대재단사무실로 쓰고 있는 기숙사 3층 지붕밑 방에서 송몽규, 강처중과 같은 방을 쓰면서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태평양 전쟁으로 많은 젊은이들은 전선으로 끌려갔다. 일제는 전쟁물자 수급에 혈안이 되었다. 당연히 그 파급이 연희전문학교 기숙사까지 영향을 미쳤다. 기숙사의 식단이 열악해지기 시작하자 윤동주와 후배 정병욱은 하숙집을 찾아 나선다. 당시 윤동주는 4학년 정병욱은 2학년이었다. 1941년 5월부터 시작된 누상동 하숙생활은 행복했다.그집은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김송의 부인 조성녀는 성악가였다. 저녁 식사가 끝나며 음악을 듣고 문학과 삶에 관해 정담을 나눴다.
지금의 수성동계곡에서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있는 곳까지 산보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일본 형사들이 소설가 김송과 윤동주의 방을 가택수색하며 책의 목록을 기록하고 편지를 압수해 갔다. 그들이 북아현동으로 하숙집을 옮긴 이유이다.
그의 대표시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별혜는 밤>과 <서시>가 누하동 집에서 하숙생활을 할 때 쓰여졌다.
지금 그 하숙집 담벽에는 <윤동주하숙집터>라는 동판이 부착되어 있다.
그 고샅길이 끝나는 곳이 수성동계곡이다.
1941년 11월5일에 쓴 윤동주 시인의 시 <별 헤는 밤>을 읽으면 언제나 마음이 숙연해진다. 당시 그의 하숙생활도 형편이 좋지 못했다. 일 년 후에 다시 기숙사로 돌아온다. 학교 후배인 정병욱과 친숙한 생활을 한다. 훗날 정병욱은 윤동주의 시 원고를 간직하였기에 광복 후에 시집을 출간 수 있었다. 1948년 육필시집을 세상에 알리며 무명시인을 세상에 알리는데 일조한다. 윤동주 시인의 육필 시집은 3부를 똑 같이 써서 묶었는데,
1부는 이양하 교수, 1부는 연전 후배 정병욱, 마지막 1부는 윤동주 자신이 보관했다. 이양하 교수는 이 시집이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인쇄 출판을 보류하도록 권했다. 윤동주는 연전 졸업 기념으로 자신의 시집 77부를 자비 출간하려고 했었다. 이 무렵 윤동주는 정지용 시인을 만나 문학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고 전하지만 확실한 문헌이 없다. 다만 1948년 윤동주 시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정지용 시인이 써 준다.
그러나 1950년 정지용 시인이 행방불명되어 1955년 발행된 시집에는 그의 서문이 삭제되었다. 당시 좌익과 우익의 이념은 서로에게 증오와 두려움의 존재였다.
2) 윤동주의 죽음
1941년, 일제는 태평양전쟁으로 광분한다. 조선의 학제는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진다. 그가 대학을 1941년 12월 27일에 졸업하게 된 이유이다.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간다. 부친이 일본 유학을 권하여 1942년 4월 2일, 동경의 릿쿄(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1942년 여름방학 때 그는 북간도 용정 고향집을 방문한다. 2학기가 시작 될 때 교토에 있는 동지사대학 영문학과로 전학을 한다. 당시 그의 사촌 송몽규와 교토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경에서 교토 행은 결국 죽음의 길이었다. 1943년 7월10일 독립운동 협의로 송몽규가 검거되고, 윤동주도 7월14일 검거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특별고등경찰에 독립운동 협의로 체포된다. 윤동주는 교토의 카모카와경찰서 유치장을 거쳐 검사국 감옥의 독방에 넣어진다. 그가 일본에서 쓴 시와 산문 대부분이 이 무렵 압수되어 유실된다. 처음에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찰 조사관은 윤동주 앞에 많은 서류를 던진다.
그 서류는 일 년 동안 일제 경찰이 자신을 미행하고 엿들은 정보를 그대로 기록한 문서였다. 윤동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자신의 방에 불이 몇 시에 꺼지고 켜지는 지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송몽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자세하게 기록한 서류에 기가 질렸다. 그러나 윤동주가 일제에 어떤 행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
그러나 일제는 윤동주에게 2년형을 선고한다. 당시 그는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는 문화운동을 하고 싶어했다. 연극을 통해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문화운동을 더 두렵게 여겼다. 교토지방재판소는 윤동주에게 치안유지법 위반 협의로 구속한다.
큐슈(九州)의 후쿠오카 형무소 생활은 비참했다. 독방에서 그는 깡보리밥 한 덩어리에 단무지 몇 쪽으로 연명한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당시 한국인 수감자들은 생체실험을 당하고 있었다. 그의 당숙 윤영춘의 증언이 그것이다. 윤영춘은 윤동주가 사망하였다는 통보를 받고 윤동주 부친과 함께 후쿠오카형무소에 가서 유해를 운구한 분이다.
송몽규를 감옥에서 만났는데 그는 반쯤 깨어진 안경을 눈에 걸치고 있었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50여 명의 한국 청년들이 주사를 맞고 있었다. 그 대열에 송몽규가 줄을 서 있다가 다가섰다. 송몽규의 몰골은 참혹했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그가 하는 인사말조차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 하니 송몽규는 간신히 들릴 목소리로 “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며 말꼬리를 흐렸다고 한다.
당시 윤동주 같은 시기에 감옥살이를 했던 김헌술씨도 같은 진술을 했다. 그는 5~10cc 주사를 일주일 이상 맞으며 암산 능력을 테스트 받았다고 증언했다. 윤동주 시인은 자신의 수인번호를‘모기소리 같은 가냘픈 소리’로 복창할 정도였다고 한다.
1945년 2월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 시인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 윤일주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사망통지의 전보가 온 날은 일요일이었다. 식구들은 다 교회에 출석하고 나와 동생이 집을 보는 고요한 오전, 날아든 전보는 <2월16일 동주 사망,시체 가지러 오라> 였다."
윤일주는 교회로 달려갔다. 예배를 마친 교인들이 집으로 몰려왔다. 윤동주 집은 삽시간에 초상집이 되었다. 북간도로 윤동주의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 부친과 삼촌 윤영춘은 길을 떠난다. 분노의 길이었다. 그러나 조국을 잃은 자식들이 모두들 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도 북간도에서 일본을 가기는 어려운 상황인데 당시는 어떻게 했겠는가. 동주의 시신은 화장을 하여 유골로 가져왔다. 동생 윤일주는 용정에서 2백리 떨어진 두만강변의 한국 땅 상삼봉역까지 마중을 나갔다. 아버지로부터 시신을 넘겨받아 두만강 다리를 건넌다.
윤동주의 장례식은 1945년 3월6일 눈발이 날리는 날이었다. 조국해방을 불과 5개월 남겨두고 그의 육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북간도로 돌아왔다.
집 앞뜰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북간도가 울었다.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의 집례였다. 놀라운 사실은 이 장례식에서 그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송되었다는 것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눈발 날리는 하늘과 산천을 바라보았다. 조국해방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
북간도에 살던 사람들의 민족의식과 품격에 고개가 숙연해 진다. 장지는 용정의 동산으로 결정되었다. 그해 5월 윤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시인 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시비를 세웠다. 그의 가족들이 시인이라고 제일 먼저 인정하였다.
윤동주가 운명한 시간은 새벽이었으며, 자신이 4년 전에 썼던 시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민족의 해방과 부활을 알리는 <새벽이 올 때까지> 란 시다.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 올 게외다.
-윤동주 시인의 시 ‘새벽이 올 때까지’ 전문
조선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죽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민족을 위해 순교한 것이다. 그들의 고결한 피는 민족의 재단을 더욱 순결하고 결백하게 만든다. 부활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민족이 존재하는 한 그의 시들은 읽혀질 것이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다시 살아났다.
윤동주 그는 27년 2개월의 순결한 삶을 민족의 재단에 바쳤다.
그의 죽음은 억울하고 슬프지만 의미 있는 이유는, 우리 국민은 이미 그의 시를 통해 별과 하늘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에 담겨 있는 그의 맑고 순결한 영혼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다.
□결론
윤동주 시인의 문학은 정직성, 민족의식,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별을 노래한 시인이다. 이 별은 희망의 상징어다. 밤이라는 일제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국 광복의 별은 너무나 멀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히브리 예언자들처럼 그는 고독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조국의 독립을 기다렸다. 그가 일제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후에야 조국은 독립되었다.
맑고 순결한 그의 영혼의 시어들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그의 시를 읽으면서 하늘의 별을 본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삶과 문학을 가슴에 담는다. 시는 일상의 삶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윤동주 시인의 시어들은 우리 삶을 비추는 햇살 같은 존재이다. 윤동주의 삶과 문학기행은 우리가 학창시절에 읽었던 그의 시들을 다시 탐구해 보는 경험이 될 것이다. 당시에 느끼지 못했던 그의 삶과 문학을 인식하면, 감동의 흔들림으로 가슴이 두근 거릴 수도 있다. 가슴의 흔들림은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한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이 고통은 행복한 삶으로 인도할 것을 나는 믿는다. 그의 삶과 문학을 가슴으로 느껴보기 위한 시 읽기와 기행이 의미있는 이유다.
<서시>, <참회록>, <쉽게 쓰여진 시>는 윤동주 시인이 당시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면서 살았는지 알게 한다. 그의 짧았던 28년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은 “우리는 지금 진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화두다.
따듯한 가슴을 지니며 이웃과 민족을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의 삶을 따라가 보자. 그의 짧은 시어들은 당신의 삶을 더욱 맑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아울러 이 글을 읽은 독자들도 맑고 욕심 없는 삶에 행복을 느끼길 기원한다.
윤동주 시인의 삶과 문학을 통하여 아름답고 소박한 삶을 얻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윤동주 시인이 당신에게 준 선물이다.
■ 송강 정철의 생가터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
1579년 담양 면앙정에서는 송순의 회방연(回榜宴)이 열렸다. 회방연이란 선비가 과거에 합격한 후 60년이 되는 해에 열리는 잔치를 말한다.
당시 수명으로 60세를 넘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거늘 회방연을 맞이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송순의 나이 87세 때이다.
이 무렵 정철은 홍문관 교리로 잘 나가고 있었다. 그는 선조의 어사화와 어사주를 가지고 담양 이 곳의 면앙정으로 왔다.
때를 맞추어 전라도의 관찰사는 물론 각 고을 원님들과 호남의 문인들이 거의 모두 모였다. 아마도 면앙정 마당이 비좁았을 터이다. 잔치가 어느 정도 끝나가고 있었다.
이때 성격이 호탕한 송강 정철이 나서며 “면앙정 선생님을 댁까지 우리 제자들이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우리 제자들이란 기대승, 고경명, 임제, 정철이다. 의자모양의 간편한 가마인 ‘남여’에 스승 송순을 태우고 네 명의 제자들은 길을 떠난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자원해서 앞과 뒤에 가마의 멜빵을 어깨에 걸었다는 것이 후세에 까지 미담이 되어 오늘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송순의 이런 회방연의 호사는 조선 사회에서 전무후무한 사례가 될 것이다.
다만 전쟁과 사화로 일그러진 참혹한 시대 배경 속에도 한 폭의 아름다운 송순의 회방연 분위기를 연상하면 마음이 흐뭇하다. 스승과 제자의 분위기가 적어도 이 정도라면 살만한 세상이 아닌가. 당시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일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 다행이다. 이 미담은 면앙정이 존재하는 한 다음세대로 전달 될 것이다. 300년이 지난 어느 해에 한 선비가 면앙정을 지나가고 있었다. 강화도 출신의 대문호 영재 이건창이었다. 그는 보성에서 유배살이를 하고 돌아가던 길에 면앙정에 들린다. 면앙정이란 시 한편을 짓고 송순 선생을 부러워했다. 삶의 의미는 중요하다. 세상에는 많은 의미들이 존재한다.
여행에서도 어떤 의미를 발견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서울에서 만나는 문인들의 행적도 어떤 의미를 지닌다. 뜬금없이 어떤 역사적이며, 문학적인 의미를 꺼내어 여행을 무겁게 하자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의미 있는 흥미를 가지고 떠나고 싶기 때문이다. 흥미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답사지의 지식이 있어야 생긴다. 사전 지식과 문학적인 상상력이 없으면 의미가 삭감된다. 한문을 숭상하던 시대에 한글로 문학을 꽃피운 분이 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이다.
송강은 조선 최고 문인중의 한 분이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문학작품을 썼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지닌다.
송강 정철의 생가터가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청운초등학교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나마 학교 통학로를 따라 송강 정철의 문학비를 세우지 않았다면, 송강이 이곳에서 태어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욱 적었을 것이다.
1536년 정철은 이 터에서 태어나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던 10세 까지 성장한다. 당시 그는 자주 궁중을 출입할 수 있었다. 큰 누이가 인종의 후궁이었으며, 셋째누이가 계림군 류(桂林君 溜)와 혼인했기에 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궁중에서 훗날 왕이 되는 명종과 벗이 되기도 했다.
을사사화로 송강 정철의 집안은 졸지에 역적으로 몰린다.
그가 한양을 떠나야 했던 이유다. 을사사화는 인종이 제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어린 명종이 등극하면서 일어났다.
명종의 어머니는 문정왕후다. 을사사화는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小尹)이 인종의 외척이었던, 윤임(大尹)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을사사화로 100 여명의 선비가 죽거나 유배를 당한다. 이때 송강의 매형인 계림군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고, 큰 형인 정자(鄭滋)는 심한 고문을 당하고 귀양지에서 세상을 떠난다. 송강의 아버지는 귀양지를 전전하였으며, 어린 정철 역시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다니며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1580년 1월 송강 정철은 울진의 바닷가에 서서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런 궁금증이 있었기에 그는 관동별곡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송강 정철의 나이 45세, 하늘과 하늘 밖의 어떤 존재를 찾기 위한 스스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을 찾기 위해 그는 기행을 하였으며 문학작품을 남기게 된다. 이것이 <관동별곡>이다.
경치 좋고 전망이 좋은 곳에는 정자가 있다. 담양은 이런 정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곳이다. 정자 문화가 가장 활발하고 발달되었던 곳 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자는 그냥 노는 곳이 아니었다.
사상과 철학을 설파하고 현실적인 정치를 비판하고 대안을 논하던 곳이다. 또한 귀양살이 후에 고향으로 돌아온 선비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하였으며 지조를 이어가던 선비들의 거처였다. 담양의 정자 문화권에는 서로 다른 집안과 선비들의 인맥이 실타래처럼 엉켜있다. 그들의 학맥관계를 찾아가다 보면 16세기의 정치사와 문학사, 사회사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곳으로 송강 정철이 이주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송강의 부친은 함경도와 경상도 영일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고 어린 정철도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떠돈다. 6년 후 자유의 몸이 된 정철 아버지는 한양 생활을 청산 한 후
가족과 함께 전남 담양으로 내려간다. 담양은 정철의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곳이었다. 송강 정철의 나이가 16세 되던 해였다. 담양에서 정철의 삶은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안정적이며 따스한 시기였다. 16세 까지 제대로 학문을 익힐 수 없었다. 그러나 담양에서 10년 동안 생활하면서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면앙정 송순 등 호남사림의 대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웠다. 정철은 무엇보다 석천 임억령에게 시를 배워 장차 대 문인이 되는 기초를 확립한다.
무등산 자락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는 담양 땅에 묻혀 살며, 시인으로서의 길로 들어선다. 동갑이었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도 인연을 맺고 우정을 돈독히 한다. 17세 때에 강항의 외손녀와 결혼한다.
송강 정철의 묘소는 충북 진천에 있다. 강화도에서 1593년에 세상을 떠난 정철은 1594년 2월에 신원리에 묘소에 묻힌다.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원당에서 일영으로 넘어 가는 고개 밑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30년이 지난 1624년(인조 2년)에 관작이 회복된다.
1665년(현종 6년)에 우암 송시열이 충북 진천, 현재 위치에 묘자리를 정한 후에 이장한다. 1684년(숙종 10년)에 문청이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정철은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문인이며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타협하기 어려운 외골수의 성격으로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평가의 인물이다. 다만 문학적으로 그는 한글을 한 단계 발전시킨 조선의 큰 문인이다. 언문(諺文)으로 천시 받던 한글로 성산별곡, 사미인곡, 관동별곡을 창작한다. 이 송강가사는 우리 국문학발전의 큰 업적이다.
선조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쓴 가사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다. 정철의 이 작품에 대해 조선의 작가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초나라의 굴원이 쓴 이소(離騷)에 버금가는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굴원의 이소(離騷)라는 작품은 중국 시가 중에서도 가장 긴 서정시라고 한다. 성산별곡은 정철이 25세 때 전남 담양군 남면에 있는 성산(별뫼)의 경치와 식영정, 서하당을 배경으로 하여 김성원을 그리워하며 쓴 작품이다.
성산별곡은 정극인의 상춘곡,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가와 함께 조선 문단의 우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근무하던 시절 관동팔경을 여행하면서 쓴 기행가사인 관동별곡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는 오랜 기간 여러 번의 유배로 떠돌아 다녔기에 문학적인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그의 생애는 유년 시절부터 부친의 유배와 형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삶을 문학으로 지탱했다. 정철은 27세로 과거에 급제하는데 1561년의 일이다. 끝내 그는 서인의 거목으로 우의정까지 지낸다. 그러나 정치인으로 송강 정철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못했다. 40세 때에 당쟁에서 밀려 담양으로 낙향한다. 3년 후에 복직되어 승지 등을 지냈지만 동인의 탄핵으로 담양으로 내려간다.
1580년 그의 나이 45세 때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는데 이 때 관동별곡을 쓰게 된다. 전라도 관찰사, 도승지, 함경도 관찰사, 예조판서, 대사헌이란 직책을 가지고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이후 4년간 벼슬살이를 못할 때 다시 담양지방의 송강정에 은거한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은 문학적으로는 정철이 오히려 벼슬을 잃어버린 후에 쓰여 진다. 그의 귀양과 관직 삭탈이 문학적으로는 작품을 쓸 수 있게 만들었다. 만약 그가 동인의 탄핵을 받지 않고 편안한 벼슬살이를 하였다면 오늘날 그의 좋은 작품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정여립사건(1589년 기축년)이 발생하자 정철은 우의정으로 승진하여 서인의 영수가 된다. 그리고 동인들을 철저하게 추방하고 좌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세자 책봉문제로 유배를 떠나야 할 신세가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명나라의 조선 출병에 감사하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동인에게 공격을 당하고 강화도에서 가난과 고독 속에서 1593년 12월 18일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정철은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였지만 때로 낭만적 기질도 풍성했던 사람이다. 시와 술을 즐기며 거문고에도 조예가 있었다. 성삼문이 심었다는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를 자주 켜곤 하였다고 전한다. 술을 좋아하는 정철에게 선조 임금은 은으로 만든 술잔을 하사하기도 했다.
정철이 1580년에 지은 연시조 16수 훈민가는 강원도 관찰사로 근무할 때 도민들을 교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썼다.
정철은 정치적인 회오리바람이 불 때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많이 본 사람이다. 청운동 일대는 그가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서울을 답사하며 문학의 발자취를 찾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기행이다.
역사 속의 인물로 남아 있는 관념적인 작가를 현실 속으로 모셔오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김상헌 집터
궁정동 2번지와 3번지 일대는 김상헌(金尙憲 1570년~1652년)이 살았던 집터이다.
지금은 청와대 무궁화동산이 되었지만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서울 종로구 궁정동 3번지에 있던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터엔
궁궐의 우물이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도 ‘정(井)’자(字) 모양의 우물이 있다.
궁정동이란 지명은 이 우물에서 유례되었다.
청와대 앞을 서성거리다가 이곳을 답사할 때면 언제나 역사의 진실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1979년 10월26일 저녁에 충격적인 대사건이 발생한다.
이날 저녁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시해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해 장소가 놀랍게도 김상헌 선생이 태어난 집터다.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김상헌 선생은 예조판서로서 인조를 모시고 간 남한산성에서 죽음을 불사하며, 최명길이 만든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했다.
광해군 때에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 출세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붕당과 파벌을 타파하기 위한 상소를 인조에게 제안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결국 인조반정의 주체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벼슬을 포기하기도 했다.
1639년 청나라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한다.
김상헌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청나라는 김상헌을 잡아 오라고 조선에 명령한다. 이때 청나라로 압송되어 가면서 그는 자신의 심정을 시조로 남겼다.
조국의 산천을 그리워하는 불후의 명시조이다. 청구영언에 전하는 ‘ 가노라 삼각산’ 이란 제목의 이 시조를 읽으면 가슴이 울렁인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 김상헌의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 청구영언
1649년에는 좌의정에 임명되기도 한다. 자신이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고 판단하면, 녹봉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명필이었으며, 청음전집 40권이 있다.
김상헌의 손자는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다. 그도 이 터에서 살았다. 6세 때에 안동 풍산의 할아버지(김상헌)의 옛 집에서 살다가 16살 때부터 이 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의정으로 서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남인과 항상 대결했다. 훗날 안동김씨들에 의한 세도정치는 그의 직계 후손들이 주축이 된다.
장희빈의 아들 왕자 윤(昀)의 원자책봉을 반대하다가 숙종의 미움을 받아 전남 진도에 유배된다. 위리안치의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사약을 받고 환갑을 몇 개월 앞두고 세상을 떠난다. 이렇듯 왕에게 반대 상소를 올리는 행위는 결국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김수항 선생은 한양 궁정동의 이 터에 있던 자신의 집과 식구들을 그리워하면서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아득한 먼 길 진도에서...
이곳에서 옛 집 주인들의 삶터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지만 다행스럽게 김상헌 선생의 <가노라 삼각산>이라는 시비가 최근에 세워졌다.
■ 해공 신익희 고택
1956년 5월5일 서울은 울음바다였다. 해공 신익희 선생이 호남선 기차를 타고 가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당시 정권 교체의 희망이 무너진 사람들의 심정은 참담했다. 그의 시신이 서울역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수만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슬픔을 지닌 인산인해의 인파는, 마치 파도처럼 효자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몰려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막았다. 불상사가 속출했다. 경찰의 총기 발사로 2명이 죽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한다. 청와대로 이어진 이 길은 아름답지만 슬픔이 넘실거리는 길이다. 이 길은 어쩌면 민족을 위해 죽어간 순교자의 길이다. 이 길에서 4,19혁명의 주체인 학생들이 피 흘리며 죽어갔기 때문이다. 그들이 죽어가면서 보았을 푸르른 하늘은 여전하지만, 50년의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1956년 5월 해공 선생의 집을 찾아 가려고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으리라. 해공 신익희 선생의 고택을 찾아 가는 날, 나는 그의 삶과 당시 한국의 정치사를 생각했다. 당시를 기억하던 선생님들 통해서 나는 신익희 선생의 죽음과 당시 정치사를 이해 할 수 있었다. 기회가 되면 신익희 선생 고택을 여러 사람들과 답사하고 그의 삶과 당시 정치사를 이야기 하는 희망을 간직하곤 했었다. 금년 이른 봄에 그런 기회가 드디어 왔다. 신익희 선생의 고택은 옛 진명여고 뒷 골목에 자리 잡고 있다. 막다른 골목의 맨 끝집이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 된, 대지 47평에 건평 약 30평으로 겹처마, 팔작지붕, 5칸의 평범한 한옥이다. 19세기 와 20세기 초의 경기 지역의 도시형 한옥 형태이다. 이 집에서 1954년 8월부터 1956년 5월5일 사망 직전까지 살았다. 국회의장을 지냈지만 평범한 한옥으로 겹처마, 팔작지붕, 5칸이다. 신익희 선생의 삶과 정치를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신익희기념사업회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그의 일대기를 약술해 본다. 신익희 선생은 1894년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한성관립 외국어학교 영어과 졸업하고, 1912년 일본 조도전대학교 정경학부 입학하여 고학으로 학비를 조달하며 정세윤, 송진우, 문일평등과 학우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학지광을 발간하며 민족정기 선양한다. 1918년 최린, 최남선 등과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것과 해외 독립운동단체와 동시에 궐기할 것을 모의한다. 기독교 대표 이승훈과 천도교 대표 손병희 선생의 협조를 받아 중국 각지의 독립운동단체를 탐방한다. 이 때 3.1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3.1운동 거사를 설명하고 이시영, 홍범도, 김우진, 조소앙 등도 만나 거사를 준비한다. 1919년 2월말 귀국,3.1운동을 지휘하다 일경의 지명체포령을 피해 3월 19일 상해로 망명,4월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의원에 선출된다. 이시영,조소앙 대한민국 임시헌장 기초위원으로 위촉받고 내무차장겸 내무총장서리, 의정원 법제분과위원장,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한다. 1923년 중국 정부의 요청으로 중국 국민군 중장에 위촉되어 우리 독립운동을 지휘하며, 1927년 중국 남경정부 심계원에서 도움을 받아 한중합작 전선을 도모한다. 1933년 김규식, 김원붕 등과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으며 1935년 신한독립당 의열단,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 등을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조직한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조국광복을 맞아 임시정부요원의 귀국절차를 중국정부와 주중미군 당국과 교섭대표로 위촉받고 적극 교섭에 성공하고 1진을 출발시킨다. 자신은 11월1일 임시정부내무부장으로 요원들과 함께 2진으로 군산공항에 귀국한다.
1946년 국민대학교와 경남대학교를 창립하여 학장에 취임하고 6월1일에는 자유신문사장에 취임하고 대한체육회 회장에 추대 된다. 1948년 제헌의원선거에서 경기도 광주에서 무투표로 당선되고, 5월30일 국회부의장에 선출된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탄압을 무릅쓰고 당선되고 그해 12월 소위 사사오입개헌파동 의 충격으로 호헌동지회를 결성한다.
1955년 9월18일 재야정치인연합으로 민주당을 창당하여 대표최고위원으로 피선된다. 1956년 3월18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저 유명한 한강백사장에서 30만군중 당시 서울시민 150만에 유명한 연설을 한다. 5월 4일 호남유세차 호남행 열차로 전주로 가던중 하늘도 무심하여 5월5일 아침에 열차안에서 향년 63세로 서거했다. 5월5일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하여 효자동 자택으로 행하던 중 애도하는 군중과 선생의 사인에 의문을 가진 공명선거촉진 전국학생들의 시위로 2명의 사망자와 2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700여명이 검거되었다. 그날 검거 구속된 분들이 동지회를 만들었으니 지금의 오.오 의거동지회다. 5월23일 전 국민의 애도속에 수유리 산 74-3 산록에 안장되었다.
해공 신익희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2년에 집약되어 있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시대의 개막과 함께 시작되기 때문이다. 부산정치파동이후 이승만은 총통시대를 준비했다. 민중의 삶이 파탄 난 것에
아랑 곳 없이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에만 몰두한다. 그 상징의 시작이 바로 4사5입 사건이다. 1954년 4사5입 개헌파동으로 자신의 3선 출마의 길을 열어놓은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1년 반 동안이나 모략적인 정치작업을 했다. 해괴한 일도 만들었다. 1956년 3월 5일 개최된 제3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후보로 지명받자 돌연 불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박력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국토통일을 이룩해 주기 바란다”였다. 모든 국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 고단수 이승만 대통령의 여론 집중 쇼였다. 불출마 선언 이후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을 번복해 줄 것을 촉구한다. 경무대 주변 지금의 청와대 사랑채 앞 분수대 주변에는 관제 대모대가 집결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재출마를 탄원하는 대모가 연일 계속되었다. 경무대에서 이를 지켜보는 이승만 대통령은 그들을 기특하게 생각했으리라. 경무대 앞은 호소문, 결의문, 혈서를 쓰는 대모대로 북적거렸다.
급기야 1956년3월23일 “민심에 양보하여 불출마를 번복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한다. 이승만의 이중성이 그모습 그대로 검증된 사건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악한 정치형태로 인해 사월 혁명에 의해 하와이로 망명하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이승만의 번복 성명에 민주당과 혁신계 진보당은 이승만의 정치 쇼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단결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통령 후보 자리를 두고 신익희 선생과 장면 선생의 지지 세력들은 대립양상을 보였다.
또한 부통령 후보의 선정과정에서도 조병옥과 김준연이 치열하게 경합을 벌였다. 다른 야당 계열의 혁심계 진보당 대통령 후보에는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는 박기출이 선임된 상황이었다. 그해 5월은 제3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로 전국이 요동쳤다. 야권을 단일화하지 못하면 이승만 대통령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봉암은 책임정치의 수립, 수탈 없는 경제체제의 실현, 평화통일의 성취 등을 신익희 후보가 공약에 넣는 다면 대통령 후보를 사임하겠다고 발표한다. 민주당은 이를 받아드린다. 결국 신익희 선생은 야당 단일 후보가 된다.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보자 ”는 선거 구호를 외치며 길거리로 나서기 시작한다.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 수 없다”는 구호로 물타기를 했다. 신익희 후보의 선명성과 선거 구호는 서울을 시작으로 급속하게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대부분의 언론도 민주당에 동조했다.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급속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켰다. 신익희 후보의 5월3일 서울 한강백사장 유세에는 무려 30만 명의 인파가 몰려 선거사상 처음 있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150만 명이었다. 신익희 선생은 이때“대통령은 국민의 심부름 꾼이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다. 또한 “국민의 심부름 꾼인 대통령이 잘 못하면 그를 국민들이 갈아 치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유세장에 나온 국민들은 이 때 공명하게 선거만 한다면 신익희 선생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지방이 문제였다. 민주당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신익희 선생은 호남으로 선거 유세를 떠난다. 1956년 5월4일 그날은 일요일 밤이었다.
부통령 후보인 장면 선생과 함께 호남선 열차를 타고 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5월5일 새벽 4시경 호남선 기차는 강경을 떠나 함열 근방을 지나 이리(익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신익희 선생은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기차에는 의사가 없었다. 기관사에게 부탁하여 기차는 전 속력을 달려 이리역에 닿는다. 이리시의 병원에 도착하였지만 이미 신익희 선생은 숨을 거둔 뒤였다. 신익희 선생의 서거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갔다. 신문의 호외가 낙엽처럼 뿌려지고, 사람들은 울음보를 터트렸다. 이때 유행한 노래가 <비 내리는 호남선>이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을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 내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신익희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비 내리는 호남선’은 전 국민을 울리는 유행가였다. 이 노래가 유행하자 당황한 것은 자유당과 경찰들이었다.
작사가 손로원은 경찰 수사관에게 끌려가 뺨을 맞으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손로원은 일제 때에는 절필하며 숨어 지낸 분이었다. 겨우 해방이 되어 <귀국선>, <물방아 도는 내력>, <페르시아 왕자> 등을 작사하고 있었다. 작곡가 박시춘이 1955년도에 작곡한 자료를 근거로 제출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 작곡자 박춘석은 당시에 박단마 그랜드쇼의 악단장으로 있었다. 그는 목포공연을 위해 타고 다니던 호남선 열차에서 식민지 시절의 호남선의 애환을 떠올렸다. 그는‘비내리는 삼랑진’과 ‘이별의 부산 정거장’처럼 경상도 지역의 노래는 불려 지고 있는데, 호남선의 노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작곡가 박춘석은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제목을 정하여 작사가 손로원 선생에게 가사를 의뢰한다. 그는 일제의 수탈과 질곡에 허덕이던 호남 사람들을 아픔을 기억했다. 호남선 기차를 이용하던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가사를 썼다. 박춘석은 가사를 보고 만족하여 가수 손인호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한다. 손인호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 였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수가 아니었다. 영화 녹음 기사였기 때문이다.
제1 야당의 후보 신익희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이승만은 약 504만 표를 얻어 승리한다. 그러나 이승만의 득표율은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겨우 52%에 그쳤다.
부통령은 장면이 401만 표를 얻어 이기붕에게 승리했다. 신익희 선생이 살아 선거를 했다면,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반증이다. 이승만은 4년 후에 전 국민이 분노하여 일어선 4.19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 시신으로 조국으로 돌아왔다. 결국 신익희 선생의 죽음은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비극이었다. 만약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 선생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면,
오히려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 추앙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는 이렇듯 승자가 패자가 될 수 있음을 일러준다. 가끔 나는 <비내리는 호남선>을 들으면 신익희 선생의 죽음과 이승만 대통령의 죽음을 비교한다. 신익희 선생의 장례식에는 50만 명이 운집하여 가슴으로 조문을 했지만,이승만 대통령은 망명지 하와이에서 시신으로 돌아와 사람들의 외면속에 장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울 서촌 효자동의 신익희 선생의 고택과 골목길은 그의 삶과 죽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이다.
■창의문
한양도성의 4소문의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부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축물이다. 우진각지붕은 4면에 지붕면이 존재하고 귀마루(내림마루)가 용마루에 접하게 되는 지붕 형태이다.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역사와 건축학적으로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1396년(태조5년)에 한양도성 8문의 하나로 건축되었다. 경복궁을 누르는 위치에 있다는 풍수지리설적인 해석 때문이지만 역적들의 문이 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실제로 1623년 이 문을 통해 인조반정의 세력들이 창덕궁을 공격했다. 현재 창의문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17)에 건축했다. 1956년에 보수할 때 건축더미 속에서 묵서(墨書)가 발견되었다. 1741년 6월16일에 상량(上樑)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역사성을 인정받았다. 이 문은 서울의 4대문의 대표적인 숭례문이나 흥인지문(興仁之門)을 닮아 있다.
석축과 축대로 이어진 홍예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단층의 문을 건축했기 때문이다. 북으로 통하는 숙정문이 항상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주 등 북쪽으로 가던 백성들은 이 문을 이용해야 했다.
1623년 인조반정 당시에 능양군을 비롯한 의군들은 이 문을 통과하여 창덕궁으로 진입했다. 자하문 다락에 인조반정 때의 공신의 명단을 적은 게판이 걸려 있는 이유다. 창의문은 무엇보다 북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지점에 건축하였다는 의미가 크다. 서쪽으로는 인왕산과 만나고 동쪽으로는 북악산과 이어지는 문이 바로 창의문(彰義門)이다. 이곳이 한때 자하동이었기 때문에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창의문으로 넘어가는 입구의 동네가 장의동이었다. 지금의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인근이 마을이었다. 장의동은 창의문에서 유례했다. 창의문이 있는 동네라 창의동이라 불렀다. 음이 변이되어 장의동이 되었다. 그래서 였을까? 장의사(藏義寺)란 절이 당시에 제법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연산군 11년(1505년)에는 창의문 밖 높은 곳에 탕춘대(蕩春臺)를 건축했다. 창의문(彰義門)은 '의로움을 펼치는 문'이란 한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인조반정 전에도 불리워진 문루의 이름인데, 1623년 3월 12일 자정 무렵에 인조반정 세력의 첫 거사 지점이 창의문이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광해군은 그날 저녁에 창덕궁 어수당(魚水堂)에서 연회 중이었는데, 반정이 일어날 것이란 투서를 알고도 이를 무시하다가 변을 당했다.
1623년 이이반은 자신의 친구 이후원에게 반정 건사 권유를 받고 반정 계획을 대궐에 보고했다. 유희분과 박승종 역시 광해군에게 보고했다. 그때 훈련도감 대장 이흥립에게 궁궐 경호를 강화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이흥립은 이미 반군에 가담한 광해군에게는 적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이를 알지 못했다.
김류, 이귀 등 반정군의 세력 1,300여 명은 3월 12일 자정 무렵에 창의문을 열고 들어가 창덕궁 방향으로 전진했다.
이흥립의 부하 초관 이항이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열자 바로 반정세력들은 창덕궁으로 진했다. 궁궐 호위군들은 약속이나 한것처첨 모두 사라졌다. 광해군은 후원 문을 넘어 달아났다. 의관이었던 안국신의 집을 찾아 들었다가 곧바로 체포되어 평민으로 강등된 후 강화도에서 귀양살이가 새작되엇다.
많은 우여곡절의 삶을 살아야 했다. 끝내 제주도에서 유배 19년을 살다가 67세에 한 많은 삶을 마쳤다. 유언으로 자신의 어머니 무덤 아래 묻어 달라고 하였다.
광해군(1575~1641)의 묘소는 왕 재위(1608~23)를 15년을 하였지만 초라하다. 부인과 합장되어 있는 그의 묘소는 현재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비탈에 위치한다.
다만 자신의 유언처럼 어머니공빈 김씨 무덤 아래 묻혀 있는 것이 위안이다.
■ 무계정사(武溪精舍)지
세종대왕의 아들 안평대군의 유적지이다.
2003년에 문화재청에서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당호에서‘무계정사지’로 변경했다. 최근에는 안평대군 이용 집터로 변경되었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건축했다. 안평대군은 어느날 꿈에 도원(桃園)에서 지내고 있었다. 꿈에서 본 장소를 많이 찾아다니다가 이곳을 꿈에서 보았던 곳으로 정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이곳을 설명하면서 탄생한 했다. 그는 또한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활을 쏘면서 미래를 대비했다.
바위에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글귀가 현판 모양으로 새겨져 있는데 안평대군의 필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평대군의 이곳에 집을 짓고 1만 여권의 장서를 소유하면서 학문을 탐구하고, 선비들을 초대하여 문학적인 행위를 했다. 그러나 1453년(단종1년) 안평대군은 역모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다. 당연히 이곳은 폐허가 되었다.
■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
대한제국 당시 법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역임한 반계 윤웅렬(1840년~1911)년이 전염병을 피해 이곳에 별장을 지었다. 윤웅렬은 윤치호(尹致昊,1865년~1945년)의 아버지이다.
1905년 6월에 서양식 건축을 착수하여 1906년 3월에 2층의 벽돌조로 지었다. 그러나 윤웅렬은 이곳에서 오래 이용할 수 없었다. 이 집이 완성 된 후 5년이 지난 1911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셋째 아들이었던 윤치창이 상속받아 안채 등 한옥 건물을 추가로 건축했다.
이 집의 경사진 정원을 지나 언덕 위에 석축을 쌓고 건축했다. 경사면에 지었기 때문에 계단식 형태의 입체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석축 위에 행랑채를 건축했고, 대문을 통과하면 왼쪽에 사랑채과 서 있고, 오른쪽에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행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一'자형 평면형태로 건축했다. 1칸의 대문간 좌우로는 각각 방 2칸이 있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사랑채는 'ㄷ'자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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