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양양 선림원지 (강원도기념물 53호)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424번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옛 절터로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이 1985년 7월부터 1년 이상에 걸쳐 조사한 결과 순응법사(順應法師) 등이 창건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광복 직후 출토된 신라 범종의 범종명문(梵鐘銘文)에 따르면 이 종이 만들어진 무렵인 804년경에 해인사 등 화엄종 계통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 당시 출토된 초창기 때의 기와로 보아 적어도 9세기 초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이후 대량출토된 기와나 삼층석탑, 석등, 비석귀부 등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물들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 이 무렵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절의 가람배치는 삼층석탑 뒤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금당건물로 되어 있다. 주춧돌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오른쪽에 금당과 잇대어 또 하나의 건물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편 언덕의 석등 북쪽에서도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지가 발굴되었다. 중요문화재로는 선림원지삼층석탑(보물 444), 선림원지석등(보물 445), 홍각선사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446), 선림원지부도(보물 447) 등이 있다.
응복산(해발 1360미터)과 만월봉(해발 1281미터) 아랫자락에 위치한 선림원지(禪林院址)로 들어가는 미천골은 고적하기 이를 데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포장이었던 길이 포장도로가 되었고, 길 아래로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56번 국도에서 2.5킬로미터쯤 들어가면 산비탈에 축대가 쌓여 있고 그 뒤에 선림원지가 있다.
응복산 아랫자락에 위치했던 선림원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804년(애장왕 5)에 순응법사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1948년 선림원지에서 출토된 신라 범종에 순응법사가 제작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범종은 당시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어서 월정사로 보내졌다가 한국전쟁 당시월정사와 함께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다. 조성 내력과 연대가 새겨져 있던 선림원지동종은 오대산 상원사동종, 성덕대왕 신종과 더불어 남북국시대의 가장 빼어난 유물 중 하나였다. 선림원지 가는 길 선림원지로 들어가는 미천골은 고적하기 이를 데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포장이었던 길이 닦였고 그 아래로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그렇다면 선림원을 창건한 순응법사는 누구인가? 순응법사는 언제 태어나고 어디에서 입적했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802년 해인사를 창건한 사람이다. 일찍이 출가한 순응법사는 신림의 지도를 받다가 766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불경을 배우고 선을 공부하였다. 그 뒤 보지공의 제자를 만나 『답산기』라는 책을 얻었고 보지공의 묘소에서 7일 동안 선정에 들어가 법을 구하였다. 그때 묘의 문이 열리면서 보지공이 나와 친히 설법하고 의복과 신발을 전해주며 우두산 서쪽 기슭에 대가람 해인사를 세우라고 지시하였다. 귀국한 순응법사는 가야산으로 들어가 사양문의 인도로 현재 해인사 자리에 초암을 짓고 선정에 들었다. 그 무렵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이 나서 고생하고 있었지만 어떤 약도 소용이 없었다. 애장왕이 신하들을 보내 고승들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고 가야산에 들어간 신하들이 선정에 든 순응법사를 발견하여 왕궁으로 갈 것을 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대신 순응은 오색실을 주면서 실의 한쪽 끝을 배나무에 매달고 다른 한쪽 끝을 아픈 곳에 대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대로 실행하였더니 배나무는 말라죽고 왕후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애장왕은 고마움의 표시로 해인사를 지을 때 인부를 동원하여 중창불사를 도왔고, 순응법사는 해인사에서 수많은 승려들을 지도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순응법사가 창건할 당시 선림원은 화엄종 사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문왕 때 고승 홍각선사가 이 절로 옮겨왔고 헌강왕 때 홍각이 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선종 사찰로 전이해간 것으로 보인다. 홍각선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비의 파편과 『대동금석서』에 따르면, 경서와 사기에 해박하고 경전을 암송하였으며 영산을 두루 찾아 선을 단련하였고 수양이 깊어 따르는 이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