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춘추> 평론의 장
기행 수필의 문학적 향기
-<수필춘추> 봄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1.
한국의 현대 수필은 그 명칭 자체가 ‘기행문’으로 표시가 됐을 만큼 수필과 기행문은 등식이 같은 것이었다. 세계화 선언과 함께 우리나라 사람들의 발걸음이 종종 외국으로 뻗치게 되었다. 근간에 와서는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정부 방침에 맞물려 많은 사람들이 레저 문화를 누리고 있다. 자연히 견문을 넓혀야 하는 작가들의 여행이 늘고, 그만큼 기행문도 많이 쓰여지고 있다. 문제는 기행수필이 아니라 기행문이 수필이란 이름으로 발표된다는 것이다. 이는 작가들의 창작 동기가 충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기행체 수필은 신선한 충동만 가지고 써서는 수필이 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시공간을 적절히 옮기면서 흔적을 적어 나가는 글이 수필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는 것이다.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신선한 충동이 되려면, 기행수필이 여행의 추억, 견문과 해방감, 동경과 사색의 기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문예적 감흥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호에 실린 좋은 수필도 많았지만, 기행문 또는 기행수필만 다루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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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집을 벗어나야만 좋은 글감을 건질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변잡기라는 틀에 빠지기 쉽다. 아내와 어미라는 자리, 남편과 아비라는 자리를 홀가분하게 박차고 한 마리 자유로운 새가 되어 낭만의 시간을 가져본 끝에 탄생한 수필이 기행수필이다. 잊고 있던 기억 저편의 모습을,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서정어린 그림처럼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 기행수필이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기행수필의 근간은 깊은 자연관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과의 만남이고 문화와 예술의 상호 교류에 있다. 기행의 세계는 이동의 세계다. 그 이동에 따라 초점을 맞추고 서술하는 것이 기행문이기 때문에 극히 주관적인 글일 수밖에 없다. 대체적으로 작가는 여행을 통해서 자연 속에 제 나름의 자태를 뽐내며 존재를 밝히는 물상들의 모습을 보며 삶의 새로운 의미를 터득하게 된다.
서명자의 <필리핀을 다녀와서>는 제목 그대로 기행문이다. 이 작품은 필리핀 여행기가 발단, 전개, 결말의 삼단 구조로 되어 있다. 발단은 여행의 배경 설명으로 되어 있고, 전개는 필리핀에 대한 인상, 결말부는 여행의 의미에 대해 나름의 해석을 달았다. 이 글의 특징은 흔히 기행체 수필이 갖는 여정이 시간 순서대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당연히 시간 순서에 따른 공간적 배경도 이동적이다. 작가는 필리핀 여행에서 마주친 필리핀 사람들의 순박한 눈길을 가장 인상적인 모습으로 기억한다. 인간의 가슴 속에는 누구에게나 순수에 대한 향수가 서려 있다. 경쟁 사회에서 여러 갈등과 마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살고 있지만, 순수를 등진 환경이 감동을 주지 않는다. 작가는 한국을 떠나 필리핀 여행에서 사람의 체온과 향기를 만나고 이 글을 썼다. 자연과 사람의 만남으로 성립되는 소중한 관계가 정겨운 강물처럼 출렁이고 있어 일단 이 작품은 작은 감동을 준다. 이 작품은 판에 박은 듯한 안내문 같은 정보 전달, 소개 형태의 기행 형식에서 탈피하고 있어 예술적 감흥도 준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 게 있다. 주제의식을 ‘시선’이라는 제재에 담아 집중적으로 조명했더라면 휠씬 더 주제가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감촉, 개인적 체취가 강하게 풍겨났으리란 것이다.
우리나라가 산업사회로 들어가면서 우리의 시선은 물질에 집착할 뿐, 사람을 바라보지 않았다.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예쁜 옷에 좋은 음식을 먹게 되었지만 마음은 예전보다 평화롭지 못하다. 서로가 바라보는 시선이 없다. 이미 넘칠 만큼 소유하고 있는데도 더 가지기 위해 싸운다. 필리핀 사람들은 행복지수가 높은 민족이라고 했다. 낮에 노를 젓던 사공의 셔츠를 가여워하던 내가 부끄럽다. 행복이 물질을 더 소유하는데 있지 않음을 깨닫게 했다.
- <필리핀을 다녀와서>에서 -
수필은 주제적 양식이다. 수필문학의 문학적 향기는 철저하게 제재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단일한 주제의식을 건져내는 데서 나온다. 작가가 받아들이는 필리핀 사람들에 대한 시선은 정말 인간적이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물질을 통해 획득되고 정신에 의해서 결실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면목은 인간의 내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순수에서 찾아야 한다. 작가는 여행을 통해서 필리핀 사람들의 순수를 발견하고, 감화되면서 기행의 목적이 여행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임을 말해주고자 한다. 비교 대조의 기법을 이용해 주제의식을 구체화하려는 전략도 엿보인다. 성찰을 통해 자기를 반성하고, 교훈을 얻어내어 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를 주제의식으로 승화시키는 문학적 형상화가 아쉽다. 제목을 <필리핀을 다녀와서>라고 하기보다는 <시선>으로 하고, 필리핀 여행을 통해 가장 인상 깊었던 필리핀 사람들의 따뜻한 눈길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기행문이 아니라 기행수필로써 더욱 멋진 글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신선호의 <이집트 여행기2> 역시 기행수필이라기보다 기행문에 가깝다. 3박 4일간의 이집트 여행기가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다. 이런 글을 읽으면, 수필은 세계에 대한 관심의 구체화란 생각이 든다. 미지의 세계에 발길을 옮겨 놓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비행기표를 사지 않고도 이집트를 여행할 수 있는 것이다. 기행문은 작가가 독자에게 베푸는 일종의 서비스인 셈이다. 이 수필은 발단이 생략된 채, 전개-결말 구조로 된 변형 수필이다. 첫날은 아부심벨의 신전을 구경하고 적은 감상이 주류를 이룬다. 수필은 정화된 감정을 바탕으로 하는 관조의 문학이어야 한다. 작가가 작품 속에서 자기를 지나치게 내세워서는 안 된다. 느낌표가 세 개씩이나 있는 걸 보니, 작가는 여행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붓을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문학 글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절제되고 순화된 마음으로 쓰는 글이다. 실감의 유리가 필요한 것이다. 자칫 하면 느낌표의 남발로 유치한 분위기를 줄 수 있다는 데 유의해야 하겠다. 수필이 경험한 것의 나열이라면 의미가 없다. 가치 있는 체험이 되기 위해서는 경험들이 주제 중심으로 재구성되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부심벨 대신전과 시장 구경의 공통분모가 설정되지 않은 채 글이 마무리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둘째날도 몇 군데 다녔던 이야기로 수놓아져 있다. 셋째날 네째날도 이동 경로에 따른 느낌을 적었다. 작가는 결말부 말미 문장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끼게 했던 이집트 여행은 알차고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술회한다. 이런 글이 수필이 되려면, 이집트 여행에서 배우고 여러 가지 느낀 점 가운데 어느 하나를 주제나 제재로 취택해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기행수필의 형식 원리나 수필창작의 원리에 대한 인식이 아쉽다.
이양순의 <모하비사막의 기적>이란 기행문은 표면적으로 논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앞의 글과는 달리 발단-전개-결말구조가 분명하다. 다양한 용기에 담을 수 있는 유연한 양식이 수필이라지만 하필 수필의 내용을 딱딱한 그릇인 논문 양식에 담았는지 모를 일이다. 제목도 그렇다. 원제가 있고, 부제를 달아 두었다. 내용의 기술 방업도 논문식이다. 작가는 서두에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역사적 지리적 배경과 국민성 등을 보고 느낀 대로 기록하려고 한다. 수필의 본래 모습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신만의 느낌을 참신하게 소개함으로써 시작된다. 먼저 경험한 사람이, 무엇에 대해 절실히 느끼고 온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해 쓰는 글이 수필이다. 이 수필은 이러한 체험을 단적으로 구체화한 사례라 하겠다.
보고 느낀 대로 적어서 수필이 되는 글이 나온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요즘 수필을 아무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하는 데 동의할 사람은 없다. 발단에는 논문의 서론부 기능처럼 전개예고도 있고, 주제도 설정되어 있다. 주제는 짧은 역사를 지닌 나라가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원동력이 어디 있었는가 하는 점에 두었다. 작가는 미국인의 의식구조와 우리의 의식구조를 비교하면서, 우리 국민성을 비판하고, 이런 우리 국민의 몽매한 의식이 우매한 지도자를 만든다고 질타한다. ’통분을 금할 수 없다‘는 진술이 두 번이나 나오는 걸 보면, 모하비 사막의 기적에서 받은 감동이 아직 작가의 내부에서 정제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수필은 감정의 절제를 요하는 글이다. 비판은 차분한 언술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모하비사막을 기행하면서 작가는 정서를 침잠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들끓게 하여 눈에 보이는 미국의 위대성을 채색해 나가고 있어 글에 박진감을 준다. 폭발적인 감정의 과잉은 자칫 설득의 목적을 상실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겠다. 괄호, 느낌표, 영어 스팰링, 한자어의 남발은 글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이해면의 <단종의 비애가 깃든 청령포>는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를 둘러보고 쓴 글이다. 작가는 한정된 시간을 살면서 권력을 잡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의 비정한 세계를 단종애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을까, 역사 속에서 오욕의 표본으로 남아있는 비극의 현장을 비통한 마음과 안타까운 시선으로 돌아보고 있다. 조카를 상대로 한 숙부의 권력 찬탈의 부끄러움도 이 글에서는 세월에 마모되어 비애로 흐르고 있다. 주제는 한국문학의 특징이기도 한 ‘한’이다. 작가는 청령포 서쪽 절벽 위에 세워진 ‘망향탑’에 오른다. 왕위를 빼앗기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 궁궐에서 자신을 그리며 눈물로 지새우는 왕비를 그리워하며 막돌을 주워 모아 단종이 탑을 쌓았다는 ‘망향탑’을 보며, 작가는 부부간의 애절한 정을 일깨워주고 있는 듯하다고 적고 있다. 단종이 답답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관풍헌에 올라 지었다는 ‘자규류’라는 시를 인용한 것이나, 돌아오는 길에 영월 시민들이 세운 노래비 가사를 전달한는 것은 주제 구체화를 도와 유용하게 쓰였다.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잔인한 죄를 지을 수 있을까, 한 세상 머물다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일진데, 우리 네 삶은 투쟁으로 얼룩져 소란스러운 건 예와 지금이나 마찬가지란 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평범한 인간도 아닌 왕좌에서 쫓겨나 애를 태우며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살았던 단종의 흔적이 한 조각 아픔으로, 슬픔으로 남겨질 수 없기에 이곳을 스쳐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단종애사를 글 속에 담는다. 우리 역사가 후세 사람들에게 남기고 있는 것은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다. 이러한 아픔의 역사도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되풀이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 수필의 값어치는 크다고 하겠다. 이 땅의 수필가들이 치열한 사회의식을 가질 때, 그리고 역사의식을 드러낼 때, 명실상부한 문학의 본령에 값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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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각기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생활의 윤택으로 말미암아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여러 곳을 여행하게 된다. 그 여행 경험의 내면에는 간곡한 사연이 있는가 하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발견이 있고, 이러한 것이 삶의 실상이라는 깨달음도 있게 된다. 위의 기행수필이 과연 기행수필로 값할 만한 가치를 지녔는가 안 지녔는가에 상관하지 않고, 각기 자신이 여행한 곳을 소개하면서 깨닫고 느낀 바를 영원히 기억해두기 위해, 또한 다른 독자들에게 정보를 주기 위해, 또한 문학 본래 목적인 정서적 감화를 주기 위해, 어쨌든 여행 경험을 수필 형식으로 적었다. 기행 수필이 성공적으로 쓰여지려면, 여행은 기행 수필을 쓰기 위한 여행이어야 할 것이다. 철저하게 준비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여행 전에 어떤 테마를 설정하고, 어떤 시각과 관점에서, 어떤 곳을 볼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구상하고 떠나야 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각종 문학회의 문학 기행이라는 프로그램도 좋은 기행문을 쓰게 하는 데 한 몫을 한다고 하겠다. 작가 자신의 느낌과 사물에 대한 해석, 인생의 총체적 경험의 산물로써 얻어지는 정감, 그리고 발견의 세계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당겨야 할 것이다. 단순히 일정한 곳을 다녀와서, 보고 형식으로 그 과정을 소개하는 데 그치는 글은 보고문이라 할 수 있지만, 기행수필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