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의 뿔 거북의 털
권자이
“토끼의 뿔이요, 거북의 털이다.”
간화선看話禪 1700 화두공안 중 하나다. 이런 화두공안을 선지식들에게 사용허가도 없이 쓴다는 것은 머리 조아릴 일이다. 공안을 빌어 깨달음을 얻고자함이 아니니까.
요즘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마치 토끼의 귀를 뿔이라 여기고, 거북의 등에 털이 났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 허황된 소리를 늘어놓는 선동자가 우후죽순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자를 이념이나 사상적으로 자신과 뜻이 같으면 무조건 옹호하고 따르며 패를 가른다는 것이다.
말로만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국민의 혈세로 공산주의자를 국가유공자로 둔갑시키려고 했다. 북한군의 나팔수요, 중공군의 응원 대장이었던 한 음악가를 지자체장이 영웅으로 포장하고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의 이름을 딴 길을 만들고, 생가를 복원하고, 공원을 만들고 있다. 생가 옆에 한옥을 사들여 전시관까지 만든다고 한다. 2018년에는 그의 노래로 동요대회를 열어 어린이들에게 중국어로 모택동 찬가를 부르게 했다니 어떻게 된 나라인가. 이런 일들을 황당히 여기며 반대하는 국민들에게 그곳 지자체장의 변명 같은 논리는 황망하다 못해 폭소를 터트릴 일이다.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분을 테마여행지로 만들어 놓으면 중국인 관광객이 늘어난단다. 궁색하기 그지없는 논리다. 이런 사람의 머릿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사람이 이러하니 AI까지 토끼의 뿔이요, 거북이 털이라고 하며 인간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몇 개월 전 글로벌 이슈로 일간지 한 면을 장식했던 글과 사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AI가 만든 미국 국방부 본부 건물에 검은 연기가 치솟는 모습의 사진은 실제상황과 다름없었다. 가짜 사진과 함께 AI뉴스 사이트 125곳이 진짜 같은 가짜 뉴스를 쏟아낸다는 이 기사엔, 세상이 어쩌려고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에까지 지배를 당하고 살아야하나 개탄스러웠다. 펜타곤 가짜 뉴스는 순식간에 페이스북과 트위트, 소셜미디어를 통해 일파만파로 전해져 미국S&P지수가 500까지 출렁이었다. 무엇이 백로인지, 무엇이 까마귀인지 분간이 안 된다. 전 세계에 AI발 가짜 뉴스에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이런 가짜 뉴스를 때려잡는 AI도 개발되고 있다니 “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다. 순간순간을 두고 변화하고 엎치락뒤치락 하는데 무엇을 믿어야 할까?
이런 일들이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나 자신 몹시 부끄러운 과거가 있으니, 이 글로 반성문을 대신하고 싶다. 광우병 사태로 나라가 들끓을 때다. 늙어서 도축한 미국 산 수입 소고기를 먹으면 머리에 구멍이 숭숭 뚫려 발작을 하다가 죽는다고 100만 시민이 촛불 집회를 할 때였다. 나야 고기를 안 먹었으니 상관없는 일일 수 있으나, 주의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명분하에 분노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도회지에 살고 있던 친인척들에게 촛불집회에 동참하라고 독려했다. 지난날도 지금처럼 ‘~라고 하더라’, ‘만약 사실이라면’ 이런 말들을 그대로 믿었으니 내 어리석음의 소치였다.
변명 같지만 그때는 웬만큼 해박한 지식과 식견이 없으면 가짜도 열 번, 스무 번 되풀이해서 주입시키면 ‘그럴까?’ 좀 더 우기고 눈을 가리면 ‘그럴 수 있겠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그럴 것이다,’ 로 본의 아니게 단정해 버렸다.
이제는 수없이 겪다가 보니 이런 일들만큼은 심안心眼도 혜안慧眼도 열리는 것 같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거짓 선전 선동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을 골탕 먹이고 아무런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심지어는 죽음으로 이르게까지 해도 말이다.
붓다는 “어떤 중생도 결국엔 성불 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는 그의 저서 싯다르타에서 이렇게 말한다.
“죄인도 언젠가는 열반에 이를 것이고 붓다가 될 것이네, 그런데 이 ‘언젠가는’ 이란 것은 한낱 미망이요, 비유에 불과한 것일세, 죄인은 부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네, 죄인은 발전과 정情속에 있는 것이 아닐세.”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정 능력과 냉정한 판단력으로 토끼의 귀요, 매끈한 거북의 거죽이라고 당당히 말하면서 농담처럼 웃을 수 있는 날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