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2:1-6 두려움과 번민할 때 이걸 해보세요 마음에 평안이 찾아올 것입니다
인간은 두려움과 번민을 피할 수 없다. 두려움과 번민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살 때가 많다. 골리앗을 죽인 천하의 다윗도 이유 없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로 인하여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삼상20:3)라고 요나단에게 하소연했고, 사울이 두려워 평소 적으로 지내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갔다(21:10). 예수님조차 십자가를 앞에 두고 심히 놀라고 슬퍼하고 고민함으로 두려워하셨다(막 14:33,34, 마 26:37,38).
번민하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에 시달린다(단 2:1). 소화불량, 식욕 저하, 두통, 피로, 수면과다에 시달린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두려움은 하나님을 피하고 숨게 만든다(창 3:10).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 두려움이 생기면, 기쁘게 살지 못하고 매사에 흥미가 없고 우울해진다. 비관하고 의욕과 비전이 없어진다. 모든 일에 열정과 활력이 감소 된다. 쉽게 짜증 내고 사고와 행동이 느려진다. 집중력, 기억력, 학업, 업무능력이 저하된다. 집안살림, 생업, 사역 등 주어진 일에 소홀해진다. 정신적인 충격과 상처와 스트레스를 자주 받고 내가 해결하려다가 주저앉는다.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치자 모압은 심히 두려워했고 번민했다. 왜냐하면 전쟁에 능한 시혼과 옥이 이스라엘에게 속절없이 무너졌고, 이스라엘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2,3). 모압 왕 발락은 지레 겁을 먹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 먹음 같이 우리 사방에 있는 것을 다 뜯어 먹으리로다"(4)
모압 왕 발락은 번민 끝에 전쟁으론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복술의 힘을 빌려 이스라엘을 제압해야겠다고 가닥을 잡았다. 그렇다면 최고로 용한 점쟁이가 필요하다. 수소문 끝에 브돌 강 근처에 최고로 신령하고 유명한 역술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누구일까? 브올의 아들 발람이었다. 발람은 하나님을 믿는 자라기보다 복술가들이 자기가 의뢰한 귀신을 통해 점괘를 보듯이 하나님을 통해 점괘를 보는 복술가 중 하나였는데 그 적중률이 당대 최고였다. 발람이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정도로 신통했다(6).
복술을 선택한 발락은 그 발람에게 집중했다. 발람의 거처 브돌과 모압과의 거리는 무려 약 640km나 떨어져 있는 먼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 왕 발락은 메소포타미아의 술사 발람을 부르기 위해 복채와 함께 급[비중]이 있는 모압과 미디안 장로들을 보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발락 왕은 더 두둑한 복채와 함께 1차 때 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내고 크게 존귀하게 하고 원하는 소원을 다 들어줄 것이라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했다. 마침내 초청에 성공했다. 모압의 최고 권력자인 발락 왕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친히 국경 지대까지 가서 일개 역술인에 불과한 발람을 극진히 맞이했다.
그만큼 발락에게 발람은 국가의 운명을 가를 중요한 인물이었다. 발락이 발람을 초청하는 데 성공해야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있고, 이스라엘을 저주해야 이스라엘을 물리칠 수 있고, 이스라엘을 물리쳐야 이스라엘에 대한 두려움과 번민이 사라진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발락 왕은 발람에게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발람은 왕과 모압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최적의 인물이었다.
발락 왕이 발람을 만나자마자 "내가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그대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그대가 어찌 내게 오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어찌 그대를 높여 존귀하게 하지 못하겠느냐?"(37)며 급이 있는 사람들을 보내 특별 대우했는데 오지 않음에 서운함을 표시했고, 발락이 발람을 충분히 존귀하게 만들 능력이 있는 왕임을 상기시켰다. 이번 일만 잘 성사되면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럇후솟에서 소와 양을 잡아 성대하게 잔치까지 열어 줌으로써 끊임없이 발람에게 집중하면서 뇌물 공세를 퍼부었다.
[청중] 사람이 불안하고 초조해지면 타로, 사주팔자에 기울인다. 정월 초만 되면 교회 직분자들이 점쟁이를 찾는다고 한다. 얼마나 하나님이 안 믿어지면 이럴까? 사울은 길보아 전쟁을 앞두고 두려워서 하나님을 찾아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두려움과 번민에 사로잡힌 그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다음 아닌 자신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내쫓은 무당이었다(삼상 28:4-7). 평소 불순종한 자들은 하나님을 찾아도 찾을 수 없어 결국 역술인을 찾는다. 정월 초하루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소원을 빈다. 소원의 뒤엔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 출 22:18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 레 20:27 남자나 여자나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신 18:9-14] 역술가 위에 귀신이 있다. 그들은 귀신의 힘을 빌린다. 귀신의 앞잡이다. 자신과 타인을 죄로 오염시킨다. 그 귀신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다(삼상 16:14-16,23, 18:10, 19:9). 역술인을 찾을 게 아니라 하나님을 찾으라.
발락 왕이 발람을 만났을 때만큼은 심히 두려워하고 번민하는 모습이 사라졌다. 용한 발람 술사를 수중에 넣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물리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배가 아픈 사람이 병원에만 찾아가도, 진료를 받고 아직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이미 아프지 않는 것과 같은 효과이다. 발락의 얼굴이 최근 들어 가장 행복해 보인다. 과연 발락의 행복은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발락의 계획은 과연 성공할까?
발락은 발람 술사가 오면 어떻게 할지 계획을 다 세워 놓았다. 잔치 후 다음날 발락은 발람을 데리고 기럇후솟에 있는 바알 산당에 올랐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진영을 한눈에 보면서 한꺼번에 싸잡아 저주하기에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22:41). 일망타진(一網打盡)하겠다는 것이다. 발락은 이곳 바알 산당에서 끝을 보고 싶었다.
발락은 발람이 시킨대로 7제단을 쌓고 수송아지 7마리, 숫양 7마리을 제물로 준비했고 발람이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가 되어 하나님께 제사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알려 주신 제사 방식과 거리가 멀었다. 점괘를 보기 위해 발람이 자신의 임의대로 만들었을 뿐이다. 발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으러 간 사이 발락은 저주의 계시를 기대하며 제단 앞에서 간절히 염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저주는 없고 제다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뿐이었다. 발락은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오히려 축복하였도다"(23:11)라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장소 선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발람의 저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한눈에 보이는 바알 산당을 선택했는데, 막상 발람이 이스라엘을 한눈에 보니 두려운 나머지 위축되어 실수로 축복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진영이 부분적으로 보이는 비스가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일부분만 보면 이스라엘이 약하게 보여 쉽게 저주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러나 두 번째도 발람은 저주는커녕 이스라엘을 축복했다. 이에 대해 발락은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23:25)라고 요구하면서 극도로 짜증을 냈다.
어렵게 역술가를 데려왔는데 여기서 끝내면 안 된다. 많은 정성과 비용을 들여 데려온 술사를 아무런 성과도 없이 보낸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2번은 축복했어도 세 번째만큼은 저주가 나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다시 브올 산꼭대기로 데려가 저주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들려오는 것은 듣고 싶은 저주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이었다. 바알산당(22:41), 비스가 산(23:14), 브올 산(23:28). 발락은 세 곳으로 장소를 옮겨가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다. 그만큼 모압에서 이스라엘을 몰아내고 싶고, 왕과 모압 백성들의 마음에서 두려움과 번민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발람 술사의 입에선 듣기 싫은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만 나왔다.
지금까지 공들인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자 발락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1차, 2차로 특사를 보내고, 국경까지 마중 나가고, 성대하게 잔치해 준 것이 너무 아까웠다. 복술로 이스라엘을 물리치겠다는 계획이 와르르 무너졌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발람 역술인에 대한 기대도 신뢰도 모두 와장창 무너졌다. 초 치러 온 발람이 꼴도 보기 싫었다.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는 것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그대의 곳으로 달아나라"(24:10,11)라고 경멸과 조소의 표시로 손뼉을 치며 분노했다. "네가 유명한 점술가라고? 당장 네 고향으로 꺼져! 형편없는 자 같으니라고. 죽일 수도 있으니 내 눈 앞에서 당장 사라져! 달아나라" 하나님과 그 백성을 복술로 꺾을 수 없다. 두려움과 번민은 역술로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를 키울 뿐이었다.
세상의 종교는 자기 소원 성취가 주목적이다. 복술가를 찾는 것도 소원 성취이다. 저주를 막아 최대한 소원 성취에 금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 욕구를 위해 종교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모압 왕 발락이 복술가 발람을 부른 이유이다. 이를 해결해 줄 수 없다면 결별이다. 욕하고 저주한다. 혹시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고 있는가? "교회 다녀보니까/기도하고 예배했는데도 되는 것이 없더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소원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함이다. 물론 그 속엔 우리의 소원도 함께 성취되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거절하시면 그 거절을 수긍하고 주님이 원하는 길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찾는 것이다. 자기를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기독교이다.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분노하고 교회를 떠난다면 하나님을 가지고 미신 놀이를 한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 소원 들어주지 않는다고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고 그리스도의 길을 포기했는가? 아버지 하나님의 원대로 되길 기도했고 자신을 하나님의 뜻대로 바꾸셨다. 그리하여 순순히 잡히셨고, 어떤 변명도 주장도 하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 십자가를 통과하자 부활하셨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내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다면 최상이겠지만,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가는 것이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대로 잘 지고 가면 말씀대로 역사와 복이 떨어진다.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결론 - 두려움과 번민을 복술로 풀다 분노하다.
하나님께서 복 주기로 작정한 자를 저주할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술사라 할지라도, 아무리 지극정성으로 준비해도. 따라서 저주마저 축복으로 바꿔버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라. 두려움, 분노, 우울, 근심 걱정, 불안, 초조, 조급, 등을 해결하겠다고 역술가를 찾지 말라. 이런 악감정들을 회개하자. 그리고 이런 악감정을 하나님께 솔직히 소상히 말씀드리고 위로받자. 만약 모압 왕이 이스라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나님을 거부하면 끊임없이 두려움과 번민 속에서 살게 되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복술가를 찾게 되고, 복술가를 찾아도 귀신의 사주를 받고 점을 치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아 더 두려워하고 번민하고 분노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속히 귀신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