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3. 09. 토요일
오늘 최저 기온은 영하 8도이고 내일은 영하 7도가 예보되었다. 매서운 꽃샘추위이다. 더구나 바람까지 많이 불었다. 예정대로 아내가 내려온다고 해서 미리 나가 장을 보고 아내와 안동역에서 반갑게 재회했다. 봄이 돼서 그런지 아니면 토요일이 돼서 그런지 역전 주차장과 공영 주차장이 만차가 되어 도로변에 주차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빨리 빠져나온 아내가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내려올 때는 웬만하면 역사 안에서 마중한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나오니 이미 승객이 쏟아져 나왔다. 도로변에 주차해 놓으면서 위치를 아내에게 카톡 했는데, 어쩌면 아내가 이미 나와서 차로 갔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역 안에서 기다리지 않고 먼저 차로 갔더니 차 옆에서 나에게 전화하고 있었다. 반갑게 포옹하고 햄버거를 사서 학가산 온천 주차장에서 먹고 온천을 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손자에 소식을 물었다. 내가 손자 손녀에게 영어 공부를 시키는데, 가르친다기보다는 전화로 공부한 것을 확인하고 감독하는 정도이다. 그런데 손자가 몹시 공부하기를 싫어했다. 손녀는 아직 어리니 할아버지가 무서워서도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공부하는데 손자는 점점 커갈수록 버티며 공부하지 않으려고 한다. 또 요령도 적당히 피웠다. 몇 달 전에도 공부하기 싫어해서 고집과 신념과 믿음에 대해서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런데도 공부를 잘하다가 중간에 짜증을 부리고, 범위를 줄여달라느니 조금 덜 하자느니 떼를 쓰고 나는 안 된다고 씨름하다가 내가 이제 할아버지하고 공부하지 말자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조금 후에 다시 손자가 전화를 걸어 잘못했다고 열심히 할 테니 다시 공부하자고 했다. 그래서 하기 싫은 공부하지 말고 이제 네 마음대로 실컷 하라고 했다. 손자는 울면서 월요일부터 다시 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카톡도 보냈다. 손자가 거듭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며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잘못한 벌로 다음 주 일주일 동안은 쉰다고 했더니 그대로 월요일부터 하겠다고 계속 말해서 내가 수요일로 양보하다가 벌로 월요일 하루만 쉬고 화요일부터 다시 하기로 했다. 내가 손자의 공부에 간섭하는 이유는 첫째 며느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스트레스가 있다고 해서였다. 손자를 가르치는 일이 자기에게 그렇게 스트레스가 되는지 몰랐다는 말을 듣고 나는 몹시 황당했었다. 그리고 그 말이 진심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손자가 서너 살 때 우연히 옆구리에 멍이 든 것을 발견했는데 자기 엄마가 손으로 꼬집어서 그렇게 됐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을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며느리의 말을 들은 다음 그렇다면 내가 손자를 가르쳐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두 번째 이유는 손자가 영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새끼가 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내 손자가 잘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손자는 나의 주관적인 판단을 넘어 비교적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공부시킬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공부시킬 재능이 없는 아이를 억지로 공부시킬 필요가 없다고 나는 평소 생각한다. 재능이 없는 아이를 억지로 공부시키는 것을 일종의 낭비일 수 있다. 그러나 재능이 있는 아이를 공부시키지 않는 일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재능이 있는 아이는 사회가 국가가 찾아내어서 공부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손녀를 공부시키는 목적은 손자와 다르다. 손녀는 내가 판단하기에 아직 공부할 만한 그런 재능은 보이지 않는다. 손녀는 매우 감각적일 뿐만 아니라 손녀에 대해 내가 우려하는 점이 있어서 손녀의 그 관심을 공부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훈련하기 위해 영어 공부를 시키고 있다. 그동안 공부시킨 결과 아주 작은 변화가 손녀에게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손녀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람은 그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식물로 말하면 싹이 이제 났다. 그 싹이 내가 기대하는 열매를 맺을 싹인지 아니면 손녀의 재능이 드러낼 수 있는 싹일는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나는 손녀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다. 내가 영어 공부를 손녀에게 시작한 것을 오빠가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할 때 영어 공부는 어떤 재능이 있어서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통한 연습과 숙달로 되는 것이기에 손녀가 충분히 잘할 수 있다. 혹시 손녀가 관심을 공부에 돌리고 몰입하다 보면 영어를 잘하게 되고 또 잘하는 영어로 인해 다른 일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더욱 노력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손자는 오히려 이런 반복되는 지루한 공부는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부는 재능뿐만 아니라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기에, 그런 것을 손자에게 훈련 시키려는 것이다. 어릴 때 이런 훈련은 고등학교, 대학교에 가서 크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할 때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런 훈련이 신앙 곧 믿음의 훈련에도 기초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손자가 공부하지 않겠다고 했으면 정말 그만두려고 했었다. 나로서는 손자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며 다시 공부하겠다 한 일이 참 다행스러웠다. 아들을 공부시킬 때도 아들이 공부시키는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어머니가 너무 걱정하셔서 중단했던 일이 생각나, 손자와의 일이 있은 다음, 줄 곳 마음이 무거웠다. 또 한편 그렇게까지 손자를 울리며 겁주면서 할 필요가 없었는데, 좀 더 인자하게 말할 수는 없었을까 하며 자책하기도 했다. 더구나 우리를 계속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더욱 나의 온유와 사랑이 부족함을 느끼면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어제는 피곤해서 9시 좀 넘어서 잠들었다고 1시쯤 깨어 3~4시경까지 잠 못 이루었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많은 교인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 나는 그러한 교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교인이 사람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지는 결코 않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지는 모르지만, 사람에게는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나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 시작 한때는 결혼 후 한참 지나 늙어가면서 일 것이다. 그전까지 필경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기보다는 나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앞섰기 때문일 거다. 나는 아내가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자세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잘못을 인정하고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그때는 분명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남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다. 때로는 아내가 나에게 대한 미안함을 그의 자세에서 보고 느낄 수 있었지만, 나에게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내가 신앙을 갖기 전의 젊은 날에는 이런 상대방, 나에 대해 자기의 잘못을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은 사람은, 단칼에 잘라내는 단호함이 있었다. 그러나 신앙을 갖고부터는 그런 사람을 마주치지 않고 피했다. 지금은 오히려 나의 잘못을 껴안고 가는 아내이지만, 신앙을 가진 후 결혼한 나는 아내의 모든 부족을 내가 껴안았다. 그래서 늘 나는 철없는 아내와 삶을 살면서 참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그 어려움을 나는 신앙으로 견디어 냈다. 때로는 아내에게 강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당신이 결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라고 경고했다. 그런 경고는 결코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명령하시는 하나님 사람의 모습은 먼저 사람과 화해하고 하나님께 와서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이다. 손자가 자기 잘못에 대해서 용서를 비는 그 자세와 마음이 무엇보다도 나를 기쁘게 했고 또 한편으로 온유하지 못한 나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 한없이 부끄러웠다.
공부하기 싫다고 짜증 부리는 것이 손자의 잘못은 아니다, 손자의 잘못은 자기의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다. 그래서 손자가 ‘열심히 할께요’라고 문자를 보냈을 때 ‘열심히 보다 성실하게 해야 한다’라고 회신했다. 손자가 공부하기는 싫지만 공부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진심임이 느껴졌다. 울면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손자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밤새도록 계속해서 억눌렀다. 아내로부터 손자 소식을 듣고 나서 무거웠던 내 마음이 가벼워졌다. 키는 아주 크지만, 마음이 여린 손자가 이 기회에 그 마음이 좀 더 커졌으면 좋겠다. 옆에 가까이 있었으면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나도 주님처럼 온유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