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라라.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어디로 가시든지", 즉 주님께서 가시는 장소로 주님을 따르겠다는 이에게
예수님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는, 당신의 장소가 없다는 답변을 하신다.
당신은 우리가 기대하거나 상상하는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도적 생각이나 기대가 단절된 곳에 계신 분이다.
예수님을 따름은 우리가 기대한 곳(position)을 따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따르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따라다닐 장소(position), 지위, 신분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인 주님의 현존이 따름의 관건이다.
따름의 핵심은 미래 사항(어디로 가시는지)이 아닌 지금의 현존(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 아닐까?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주님을 따름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어떠한 관습보다 우선할 일이라는 말씀이다.
따름은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이기에 더 이상 죽은 이를 위한 장례로 지연될 수 없는 사건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살아있음이요, 하느님을 떠난 것이 죽음이다."(성 아우구스티노)
"죽은 이들의 장사" - 하느님을 떠난 상태의 사건들, 과거의 사건은 과거에 맡기라.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를 알려라" - 하느님을 만난 그대는 지금의 삶을,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전하라.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엘리사를 부를 때 작별 인사를 허락한 엘리야(1열왕 19, 19-21)와 달리 주님의 부르심은 절박하다.
주님의 현존, 하느님 나라의 현존에 우선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에
당신을 추종하려면 가족마저 단절할 것을 요구하신다.
삶이 근원적으로 새로워지는 길에서 이런저런 인연과 과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주님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하신 요구들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이 가신 길이었다.
서로 어긋나 보이는 "따름"에 관한 세 장면의 말씀에서 제자는 스승과 하나가 되라는 호소를 듣는다.
[출처] 연중 제26주간 수 - 나를 따라라.|작성자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