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우산을 쓰기에는 너무나 가늘다 싶은 비가 내렸다. 한시간 전부터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멍하니 걸음만 재촉하고 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세미정장에 신발은 새 것인 냥 항상 깨끗하다. 구두에 물방울이 조금씩 모이다가 어느 정도 크기가 되면 주르륵 미끄러져 내린다. 내 머리야 오늘도 단정하게 무스로 올백이다. 언제나 그랬듯 내가 걷는 이 걸음에 특별한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기약 없이 걷다 버스정류장에 멈춰 섰다.
<제우스호프집 아르바이트생 구함(남). 저녁 6시부터 새벽 3시까지 서빙. 문명예식장 옆 2층. 시간당 3000원>
잔뜩 습기를 먹은 광고지에 남자의 글씨로 보이는 투박한 글씨체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빗물이 튀어서인지 약간 잉크가 번진 상태이고 잘못 건드리면 찢어질 듯 너무 습기 차서 미끄러져 내릴 것 같았다. 광고지에 적혀진 핸드폰 번호를 세자리만 누르다가 그냥 접어버렸다.
"전화비도 아껴야지. 방세도 밀렸는데."
사실 요새는 내가 서울에 온 것이 조금 경솔했다는 생각도 든다. 너무나도 오래 전 일이라 가물가물 하지만 고향에서 듣기론 서울 놈들은 밥먹듯 사기를 치네, 눈감으면 목을 베어가네 등등 온갖 과장된 소문이 나돌았었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서울이란 곳은 내게 아버지의 죽음으로 처음 다가온 도시다. 병원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가 않지만 아마도 어느 명문대의 부속병원이었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간암 말기에 천식까지 심해서 목숨도 보존키 상태였다. 정말이지 그렇게 고래처럼 술을 마시다간 어디가 고장이 나도 단단히 나겠다고 예상하고 있었던 차였다. 아니 평소에 그렇게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별세 날 나는 슬픔도 아닌 애매 모호한 마음을 안고 태어나서 처음 지하철을 타보았다, TV에서만 보아오던 여자들의 미니스커트를 실제로 처음 본 것도 그때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꼭 다시 서울로 와 서울에 살면서 서울아가씨를 사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여기에 와서 그런 서울 아가씨들은 많이 사귀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렇게 마음 설레게 했던 그런 처자들은 드물었다. 술 잘 마시는 계집들은 역시 돈 냄새만 귀신같이 맡고 몰려든다. 한창 잘나가던 20대 초반 때엔 참 많이도 돌아다녔던 것 같다. 일주일마다 여자들을 바꿔가던 나는 여자들의 심리에 대해서는 논문이란 걸 내도 박사학위쯤 쉽게 딸 수 있을 정도로 빠삭했다. 거의 다 나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순진한 지방출신 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네들에게 가장 큰 소원은 돈 많은 오빠 하나 꼬셔서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제법 소박함 것이었다. 한창 가출이 무슨 유행처럼 번져가던 시절이었다. 90년대 중반이니까 아마 내가 열 일곱 살 정도 됐을 때 이야기이다. 누구에게나 집을 나와 서울까지 오는 것은 수월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앵벌이로, 소매치기로, 강도로 소년원을 화장실처럼 드나들었다. 좀 똑바로 살고 싶은 녀석들은 막노동에 단체 합숙정도가 정석이었다. 한참 놀다가 군대에 끌려간 녀석들도 많았다. 허나 누구도 집을 그리워한다고 감히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암묵적으로 우리들 사이에 약속된 하나의 금기였다. 집이 그리우면 그냥 조용히 사라져버리면 되는 것이다. 물론 내 나이가 이제 스물하고도 일곱이라 그런 일들은 아련하게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강산은 한번 변했지만 나는 수도 없이 방황했다.
할머니가 독사에 물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기 전가지만 해도 나는 그런 대로 그런 생활에 익숙해 있었다. 고향인 신정으로 급히 내려간 것이 염병처럼 머리를 괴롭게 했다. 독은 빼냈는데 무슨 심술이 들었는지 그놈의 할망구가 일어나질 못한 채 숨만 소새끼 마냥 쉬어댔다. 할머니가 죽을 것을 나는 직감이 아닌 직관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할머니 자신도 그래 보였고 나 자신도 그렇게 원했다. 희망이라는 단어에 철저하게 삶의 대부분을 희롱 당한 채 세월의 노리개로 살다간 지겹게도 긴 인생이었다. 다 쓰러져 가는 토담에서 할머니와 나와의 기억은 이제 누렇게 뜬 흑백사진으로 남았다. 우리들처럼 가난에 대해 연구하며 살아온 천재들은 드물었을 것이다. 내가 가난에 대해 설명해도 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삶은 한마디로 거시기가 찢어질 정도였다.
"보호자 되세요?"라고 묻는 간호사의 말에 아주 어색하게 "그렇소"라고 대답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 보호자였던 할머니가 졸지에 나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힘없고 병든 노파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때 나는 열심이었다. 할망구 장례식이라도 치뤄 주기 위해 그놈의 공사장을 몇 판이나 뛰어다녔는지 모른다. 어깨에 굳은살이 베길 만큼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이놈의 할망구가 내 속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손을 턱 잡더니. "야. 병한이 이 썩을 놈아. 뭐가 될라고 이리도 내 속을 썩히노. 니도 니그 아부지꼴 나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정신차리고 검정고신가 그거나 준비해 봐라. 내가 이대로는 눈을 못 감을 것 같애 이눔아. 인생 아무 것도 없어. 그냥 성실하게 살면 되는기야" 라고 귀신 콩알 까먹는 소리를 하는 거다. 그러고는 꼭 두 시간만에 저 세상사람이 되어버렸다. 없는 힘에 말을 하는 모습이 차라리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었다. 물론 눈물 따윈 흘리지 않았다. 슬프다기보다는 평생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죽은 한 할망구의 인생이 불쌍했을 뿐이다. 삶이 지옥이었다. 그건 내가 잘 안다.
그날 나는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다. 그 동안 시내에 나가 나물을 팔던 할매의 그 손이 죽자마자 푸른빛을 띄며 변해가기 시작했다. 난 그 투박해 보이던 그 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손은 많은 말을 차마 하지 못한 한마디 목소리처럼 보였다.
얼마쯤 걸었을까. 저기 횡단보도 앞에서 어떤 남자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푯말에 완장까지 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여러분이 죽어서 천국에 가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야 하고......"
나는 그냥 그 중년 사내의 옆을 스윽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내 어깨를 짚었다.
"청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재림이 멀지 않았네."
남자는 꽤나 심각한 사태라도 벌어질 것처럼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거 왜이래. 쪽팔리게."
나는 팔을 세차게 뿌리치고 가던 길을 걸으려던 찰나 또 이 양반이 내 앞으로 서더니 외쳤다.
"청년 젊은 나이에 영접해, 예수님께서 청년을 위해 돌아가셨네."
짜증스런 예수쟁이를 한 두 번 만난 것은 아니지만 오늘 만난 이 양반은 그 중에서도 강적인 듯 했다.
"꺼져. 예수쟁이 새끼야. 예수 하나 때문에 죽은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데. 짜증나게 바쁜 사람 붙잡아 놓고 지랄이야 지랄이."
어머니는 신자였다. 물론 나도 어렸을 적엔 엄마와 함께 교회라는 곳에 가 본 적이 있었다. 나의 기억에 목사라는 사람은 중형차에 말끔한 양복에 좋은 집을 가지고 있었다. 상당히 시골인데도 불구하고 어린 마음에 목사라는 사람이 그렇게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목사의 설교는 항상 현세에 집착하지 말고 힘들더라도 내세에 대한 희망을 가지라는 말들이었다. 놀랍게도 엄마는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 아멘" 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나는 그러면 옆에서 "엄마 울어?"하며 "엄마 울지마"라고 엄마의 등을 다독거렸다. 어린 마음엔 괜히 엄마를 울리는 목사가 싫었을까. 좀 커버린 후에야 알았지만 엄마는 항상 소득의 10분의 1을 그 목사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던 것이다. 고무장갑 공장에서 엄마는 자주 데었다. 그리고 그 데인 손으로 십일조봉투에 꼬박꼬박 돈을 바쳤다. 받는 월급이란 고작 50만원이었다. 생활비, 내 학비, 그리고 아버지란 인간의 술값으로 버티기에는 너무나 작은 액수였다.
하루는 목사가 "전도를 생활화하자"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어머니는 그 날 역시 벅찬 마음에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대뜸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여보 당신도 교회에 한 번 나가보는 게 어때요." 라고 했고 술이 덜 깬 아버지는 "저 썅년이 예수쟁이가 되더니 미쳤나?" 하며 집안의 물건을 눈에 집히는 대로 던지고 발로 밟았다. 아버지의 구타는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그날 따라 더 강도가 심했다. "매달마다 왜 5만원이 비어?"라며 아버지는 물었고, 엄마는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아버지는 "내가 모를 줄 알았지 하며"제법 속은 듯 살아온 게 분하다는 듯이 엄마를 구타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아버지란 작자는 헤아릴 수 없는 존재였다. 막상 자신의 가장으로서 해야 할 역할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아내가 벌어오는 봉급에 의지해 사는 잉여인간이었다. 월남전에 참전해 베트콩이고 민간인이고 할 것 없이 총을 갈겨대서 자기가 죽인 사람만 족히 백은 넘을 것이라고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어린 나의 눈에 그런 아버지는 대단해 보였건만 막상 아버지는 그러한 공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도리어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세상은 역시 전쟁같이 좃같아"라며 괴상스럽게 지껄이기만 했다. 아버지는 국가에서 마련해 주는 많은 혜택도 단호히 거절하고 술만 마셨다. 마치 술을 마시기 위해 창조된 사람처럼 그렇게 밤낮 구분 없이 마셔댔다. 그날 할머니는 텃밭에 나가 고추를 돌볼 시간이었다. 말릴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었지만 나는 엄마를 지옥으로부터 구원해내지 못했다. 한달 후 엄마는 머리에 커다란 피멍이 고여 곪아버렸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변변한 수술비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무렵 나는 초등학교를 때려치웠다. 면사무소에서 생활보호 대상자 자녀 학자금이 지급된다고 신청하려 했는데 문제는 아버지였다. 사지 멀쩡하고 노동능력이 있지만 술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폐인일 뿐인 사람이 집안에 떡 버티고 있었다. 물론 그 전부터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 일 순위는 아버지였다. 그는 차라리 우리 가족이 아니거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인간이었다. 아니면 베트콩인가 뭔가 하는 그 자들의 총에 맞아 장렬히 전사해야 맞다. 그는 도무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하나님조차도 그런 쓰레기를 그냥 썩게 방치해 두셨다.
하나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나는 다음에 목사란 인간들을 모조리 심판 할 것이다. 그들이 항상 말하던 야훼의 최후의 심판보다 더 무거운 심판을 준비하리라 마음먹었다. 목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주일 설교시간에 "하나님이 악랄한 아버지를 암으로 쳐서 심판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전까지 아버지를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해 안타까웠으나 증오의 대상이 예수쟁이들로 늘어났다.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사랑을 모른다. 왜 교회 건물은 나날이 커지는데 엄마는 무력하게 죽어야 했을까. 만약 엄마가 그 십일조라는 엉뚱한 돈은 교회에 갖다 바치지만 않고 모았어도 자신의 머리에서 곪아버린 피고름을 짜낼 수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정말이지 무슨 배짱으로 먹고살기도 힘든 판에 십일조를 교회에 바치고 아버지라는 괴물을 전도까지 하려는 야욕에 불탔을까. 전혀 정답이 없는 사고들이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죽이고 싶은 세 번째 인간유형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의사 놈들이다. 나는 그놈들 만큼 돈에 환장한 놈들은 세상에 없다고 본다. 녀석들은 항상 당당하다. 죽어 가는 생명들 앞에서 심판자처럼 앉아 생명을 담보로 거래를 한다. 참 흥미로운 게임이다. "돈을 이천만원정도 내놓아라. 그렇게 않으면 너의 부모는 죽는다." 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암묵적으로 하는 족속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부모, 아니 자신의 생명을 대할 때에도 그런 식일까. 엄마, 할머니, 아버지는 다 그런 식의 거래가 모조리 실패된 연고로 죄다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세상은 엄격하게 가진 자는 살고 없는 자는 죽는 구조로 굳어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구원해 내지 못했다. 나는 돈이 필요했다. 아니 목말랐다. 그래서 서울에 왔던 것이다.
문명예식장 앞이다. 건물 안에서는 식이 한창 거행되고 있고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입이 심심해 담배를 하나 꼬나 물고 예식장 안으로 유유히 들어갔다. 사람들의 찌그러진 표정에 담배연기를 토해내며 2층 연회장으로 발을 옮겼다. 식이 끝난 쌍이 있는지 피로연이 풍성하게 베풀어져 있었다. 나는 담배를 끄고 접시를 집어들어 음식을 고른다. 음식을 놓고 고민해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어느 쪽 손님이오?"
머리가 한창 벗겨지고 있는 오십대로 보이는 남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신부 쪽이오."
어려울 것은 없다 O,X문제보다 더 쉽다. 둘 모두 정답이고 또한 오답이다.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나는 음식을 접시에 담는 것을 잠시 멈추고 살짝 눈을 치켜 뜨며 말했다.
"옛 애인이오."
남자는 피식 웃더니 수정과가 있는 반대쪽 대열로 돌아갔다. 나는 나 자신이 이런 용감한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때 가장 대견스럽다. 나는 배가 두둑해지게 먹고 테이블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보려던 찰나 어떤 젊은 남자가 정중히 다가와 손까지 모으며 말했다.
"손님, 죄송합니다. 여긴 금연구역입니다. 주위 분들에게 피해가 가니 담배를 꺼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꽤나 잘 훈련받은 듯한 구호로 발음하나 새지 않고 또박또박 말도 잘한다. 개를 훈련시키는 것보다 역시 돈주고 사람 훈련시키는 게 훨씬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긋이 웃어주며 담뱃재를 접시에 털며 말했다.
"아, 이제 불붙였는데 아깝게 어떻게 담배를 끈답니까? 한 대만 좀 피웁시다."
"안됩니다 손님, 그렇다면 연회장을 잠깐 나가 주십시오."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안다. 내가 가장 재미있어 하는 상황중의 하나이다.
먼저 얼굴 색을 갑자기 바꾸고 노려본다.
"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녀석이 당황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갑자기 반말로 내려 깔아버리니까 "기분 나쁘다" 이 소리다.
"지배인 불러."
"네? 손님."
"사람 말 못 알아들어? 지배인 부르라고 새끼야."
그러면서 상을 손으로 한바탕 쉬익 엎어준다. 시선이 한곳으로 몰리고 그러면 그 중에서 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인상 좋은 남자가 나온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불편한 점이라도?"
"아 무슨 장사를 이따위로 해냐고? 모르고 담배 좀 빨았기로서니 손님한테 소리를 질러도 되는 거야. 처음 본 손님한테 그래도 돼?"
그러면 그 훈련된 개는 아주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대부분 그냥 참고 지배인의 눈치를 본다. 웃긴 건 사람들이 내가 정말 부잣집 자제라도 될 거라고 믿는 것이다.
"손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뭐 필요한 거라도?"
"아, 됐어. 기분 잡쳤으니까 당신들이나 많이 먹어. 마지막으로 신부 얼굴 좀 보려고 왔더니 별 꼴같잖은 것들이."
이쯤 해두면 됐다고 생각하고 유유히 연회장을 빠져 나온다. 담배가 오늘따라 쓰다. 담배도 날씨를 타서 그럴까. 왠지 담배연기와 오늘 구름 낀 하늘이 흡사 닮았다. 제우스호프집이 2층이었지. 이층의 층계를 올라가는 벽면에 제우스가 스파크를 뿜는 삼지창 대신 3000cc맥주만 한 컵 들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잔뜩 기대를 머금고 올라갔다. 나와는 대략 한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을 듯한 대학생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저들과 나와는 도대체 얼마나 거리가 있을까. 나도 저들과 같은 삶의 수속절차를 밟았다면, 나란 인간은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아직도 자취방 아주머니는 내가 고려대생인줄 안다. 세상엔 의외로 순진한 족속들도 많다. 허나 여기서 나란 그냥 살려고 발버둥치는 인간 한 마리에 불과했다.
"저쪽 테이블에 앉으실래요. 일행은 있으십니까?"
젊은 남자가 자리를 안내했다.
"아니요. 다름이 아니라 광고지를 보고 왔는데요. 저 혹시 일할 만한 자리 있습니까?"
인간 구병한 스타일 완전히 구겨진다. 내 생각에도 내가 아르바이트 따위를 하기엔 나이가 많이 됐다.
"유감입니다만 어제 이미 서빙 할 사람은 구했습니다. 한 발 늦으셨네요."
거리로 나왔다. 또 걷는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진 것 같다. 주머니를 뒤졌다. 일금 칠천 팔백 원이 남았다. 오늘 저녁을 또 농심튀김우동으로 때우기엔 어딘지 모르게 우울했다. 비는 더 세차게 내린다고 예고라도 하듯 고인 대지에 전속력으로 추락한다. 어찌 되었건 간에 오늘 안에 아르바이트 자리는 해결을 보고 싶었다. 비가 내리더라도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고 싶었다. 그렇다고 호스트 바에 다시 내 발로 찾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들도 목사처럼 사랑을 모른다. 그녀들은 그저 남편들 몰래 외간 남자들과 나누는 짜릿한 정사와 명품 핸드백, 지갑, 그리고 사치처럼 따라 다니는 사모님이란 칭호로 살았다. 그녀들도 외롭기는 매 한가지일 것이다. 그 동안 수없이 잠자리를 함께 했던 많은 귀부인들은 또 어떤 젊은 수컷을 사냥하러 나갈 것인가. 서울은 미쳤다. 여자들도 남자들도 자동차도 건물들도 도시 전체가 미쳤다.
모두들 제각기 우산을 펴들기 시작한다. 회색 빛 도시의 비가 무스로 잘 정돈된 머리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항상 그렇듯 무방비 상태이다. 누구도 나를 공감할 수 없으며 누구도 나의 아픔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옷은 순식간에 젖어버린다. 누가 과연 내게 우산을 씌워줄 것인가. 아무도 없다. 아니 내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것은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눈물 흘리고 마는 것이다. 나는 그게 좋다. 우산이 없으면 비에 젖는 것, 진리란 이리도 간단한 것이다. 엄마가 나를 위해 하늘에서 기도라도 해 주었으면 한다. 내가 갈 곳은 지옥이 뻔하다. 그 이유는 내가 지옥을 지금껏 너무 사랑해 왔기 때문이다. 천국과는 전혀 상종치 않은 채 지옥과만 정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교회에 불질러 버릴 거야. 하나도 남김없이 다 태워버릴 거라구요. 목사아저씨가 우리 엄마 살려달라고 기도 좀 해주세요. 예수님 때문에 우리 엄마가 죽었으니깐 예수님 보고 살려내라고 하란 말예요. 안 그러면 진짜 불질러 버릴 거야. 우리 엄마 살려내. 목사 아저씨!>
<속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가득 찼구나. 박집사, 김집사, 이 아이 좀 단단히 잡아줘요. 안수 기도 좀 해야겠어요.>
<놔! 놓으란 말이야. 난 악마가 아니야. 아니라구!>
난 또 방황할 것이다. 나를 위한 기도는 세상에 없다.
하늘은 우산 없는 내 몸에만 비를 뿌린다.
첫댓글잘 읽었습니다. 방황하는 한 남자를 통해 종교와 도시 속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날카롭고 깊게 비판한 것 같아요. 그런데 "아버지는 국가에서 마련해 주는 많은 혜택도 단호히 거절하고 술만 마셨다."는 대목에 이유가 잘 모르겠습니다.응당 받아야할 혜택을 왜 거부한거죠?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방황하는 한 남자를 통해 종교와 도시 속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날카롭고 깊게 비판한 것 같아요. 그런데 "아버지는 국가에서 마련해 주는 많은 혜택도 단호히 거절하고 술만 마셨다."는 대목에 이유가 잘 모르겠습니다.응당 받아야할 혜택을 왜 거부한거죠?
민간인 학살이라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데 역시 저의 부족함으로 읽으시는 분들로 하여금 헷갈리게 만들었네요. 국가의 수당을 받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심각한 죄책감 때문이겠죠. 다음엔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올리겠습니다. 리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