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깨달은 복음을 귀하게 여기며 주어진 직분에 충성된삶을 살다가 간 역사적인 인물이 얼마나 많은가. 남강 이승훈, 월남 이상재, 고당 조만식,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 송재 서재필,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 인덕 대학교의 설립자 박인덕, 중앙대학교의 설립자 승당 임영신 등등 말이다. 중앙대학교 홈페이지에 실린 대학의 역사에 설립자 승당 임영신(1899∼1977)에 대한 이런 내용을 접하게 된다.
승당 임영신은 78년 동안 살면서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로서 영광과 시련과 고난의 일생이었다. 승당은 전북 금산읍(현 충남 금산)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승당 부모는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근대적인 사상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딸은 가정적이고 평범한 여성으로 커 주기를 바랐다. 유난히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던 승당은 진학문제로 아버지와 자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승당은 14살 때 금산을 방문해서 금산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있던 전주의 기전 여학교 설립자인 미국인 여자 선교사 미스 골든을 찾아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골든 선교사가 전주 기전여학교 입학원서와 초청장을 보내왔다. 결혼을 강요하며 진학을 극구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해서 15살 때에 기전여학교에 입학해서 중·고등 4년 과정을 졸업하게 된다. 승당의 인물됨과 애국정신은 학교생활에서부터 나타난다. 일본어 시간에 입을 열지 않는 등 혼자 항일의식을 다지고 있었던 승당은 같은 반 동무인 김연실의 집을 방문했다. 김연실의 아버지인 김인전 전주 서문교회목사를 만나면서 한국역사에 제대로 눈을 떴다. 김인전 목사는 후에 임시의정원 의장과 학무총장 대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기전여학교사 박현숙선생을 중심으로 승당과 여섯 동기들이 기도회를 조직하였다. 나라를 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매일마다 드렸다. 김인전 목사에게서 <동국역사> 책을 얻어다가 이를 여러 권 베껴서 전교생에게 돌려 읽도록 하다가 골든 교장에게 들통나 책을 서문교회에 모두 파묻는 사건도 있었다. 승당을 비롯한 기도회원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공주회(公主會)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였다. 매일 조회 시간에 부르는 일본국가를 부르지 않고 신사참배도 거부했다. 교실에 붙어있는 일본천황 사진의 눈을 뾰족하게 깎은 연필로 찔러 장님을 만들어놓는 등 반일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3. 1 운동 전주 지역 만세 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붙잡혀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다. 그녀의 나이 20살 때의 일이었다. 일본 히로시마여자전문학교 유학 후에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도 있었다. 나중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일본의 관동 대지진 때 학살된 수천 명의 한국 사람 사진첩과 사건자료를 가지고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이승만을 만났다. 이승만은 제네바의 국제연맹에서 이 자료를 보이며 일본의 만행을 규탄,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미국 남가주대학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하면서도 미국 한인 사회에 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할 계획으로 학업 외 시간을 쪼개서 청과물장사, 주유소 경영, 불도저 운전까지 돈 버는 일에 열중했다. 한편으로 한인교회를 세워 선교사업을 전개하면서 이승만의 독립운동 업무를 뒷받침했다. 미국 생활 중 이승만의 청혼을 받기도 했던 승당은 남가주대학원까지 졸업하고 고향을 떠난 지 10년 만에 귀국해서 서울YMCA 총무에 취임했다. 그의 호 승당은 이승만의 ‘승’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승당은 서울 흑석동 일대의 토지 20만 평을 매입해서 운영난을 겪고 있던 15년이 된 중앙보육학교를 34살에 인수하였다. 그는‘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교육 이념을 마음껏 펼치게 된다. 승당은 모자라는 학교건립비를 충당하기 위해 또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프랭크린 루스벨트대통령 부인을 만나는 등 노력 끝에 후원회를 조직하였다. 중앙보육학교 교사와 기숙사와 유치원을 세웠으며 오늘날의 중앙대학교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 당시 그는 과거 감옥에서 고문을 많이 당한 후유증으로 사경을 헤매기도 하였다. 미주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지지하던 승당은 광복 후 이승만 중심의 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 의장이었던 이승만의 비서로 일하면서 유엔대표로 유엔총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승당은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정치에서 손을 떼고 교육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대한교육연합회장, 상공일보, 경제일보 사장, 한국부인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68년에 아이젠하워상, 1969년에 대한민국 청조근정훈장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