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갈망하는 이유는 첫째, 그것이 아주 강력한 희열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충만함의 몇 시간을 얻기 위해 내 남은 삶 전부라도 바쳤을 것이다.
둘째, 그것이 끔찍한 고독에서 구원해 주기 때문이다.
고독 속에서 세계의 가장자리를 홀로 바라보는 의식은 생명 없는 심연을 내다 보는 것일 뿐.
마지막으로 내가 사랑을 갈망하는 이유는, 사랑의 합일 상태에서 신비로운 모상으로나마
성인들과 시인들의 생각에 나타났던 하늘의 예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버트런드 러셀 <자사전> 中 -
누군가 말했습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고..
위대하디 위대한 사랑.
빼앗긴 들에도 꽃은 피었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향기를 가지고..
들은 군홧발에 짓밟히고 꽃은 순식간에 사그러들었어도,
꽃이 풍기던 진한 향기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시대에 피어난 사랑
비극적 최후를 알면서도 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랑
군국주의의 탄압과 혁명의 이데올로기 속에 아스라히 사라져 간..
'열정'으로 시작해 '비극'으로 끝맺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의 사랑..
1919년 일어났던 3.1운동
3.1 운동은 단순히 일시적인 식민지 치하의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3월에 불 붙은 조국해방운동은 무려 두 달 간이나 지속되었고,
함경북도 북단에서 한반도 최남단인 제주도까지 전 지역에 걸쳐
1백만 명 이라는 경이로운 인원이 항쟁 대열에 합류했고,
1200회 이상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3.1운동이 위대했던 이유는 장기적으로 이어갈
조직적인 지도부 없이 국민 자발적 이었다는 점에 있었죠.
절망의 끝에서 급기야 터져 나온 '한'의 목소리는
무시무시한 전염성을 수반한 채 전국으로 퍼지며,
신분, 지역, 신앙을 초월한 전 민족의
일치된 독립의지를 행동으로 표현한 해방 운동이었습니다.
일제시대 대표적인 친일파인 인간말종 이완용 마저
3.1 독립 운동의 제의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에게 동참을 요구할 경우 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일제에 제압 당할 위험이 있다'
는 이유로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이 일어나기 약 보름 전,
친일 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의 독립에 기여할 것을 부탁하는 목소리를
그는 당연히 무시했지만, 일제에게 거사 계획을 결코 발설하지 않았던 것처럼
3.1 운동은 사상의 여하를 초월한 전 민족의 뜨거운 민족애의 표출이었습니다.
7천여 명의 사상자, 1만 5천여 명의 부상자..
3.1운동은 결과적으로 보면
일제의 총과 칼 아래 제압당한 실패한 혁명운동 입니다.
허나 3.1운동이 이후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력은 그야말로 대단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3.1운동은 뜨거운 동기 부여만 있다면 전 국민의 단결이 가능하다는
일종의 가능성을 보여준 혁명의 위대한 표출이었고,
막연히 조국 해방만을 갈망하던 독립운동 노선이
3.1운동 이후부터 체계적이고 뚜렷한 계획을 바탕으로 진행되게 됩니다.
그 중, 안창호 선생님이 주장하셨던 '민중의 계몽', 즉 문화주의론은 전 국민을 크게 고취시키게 되죠.
그리고 이 때 즈음... '연애'라는 불 덩어리는 식민지 조선과 처음 조우하게 됩니다.
20세기 초, 정확하게는 1919년 이전,
우리나라에도 사랑은 존재했습니다.
허나 그들이 '사랑'이라 불러야했던 대상은
종교적, 혹은 사상적인 막연한 대상이었죠.
종교적으로는 신을 사랑해야 했고,
사상적으로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나라를 사랑해야 했습니다.
(이때 까지만 해도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같은 성격을 띄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되지만)
현재 우리는 사랑을 보통 '남녀 간의 애틋한 감정'으로 생각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사랑이 포괄하는 범위가 너무나도 광범위해서
위의 뜻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무하다시피 했죠.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결혼이란 개념은 정략적 결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딱히 지칭하는 용어 조차 없을 정도로
남녀 간의 사랑에 폐쇄적인 인식이 지배하던 우리나라에
명백히 독립적으로 '남녀 간의 애틋한 감정' 만을 뜻하는
'연애'라는 단어가 피어났던 건 1919년 3.1운동 이후였습니다.
뜨겁게 불어닥친 교육열, 문화열에 힘입어 조선의 젊은층들 사이에서 연애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잡았죠.
양복에 중절모, 안경에 지팡이를 든 신남성,
모던 보이의 시대가 꽃 피울 무렵,
'연애'라는 단어가 조선 땅에 막 첫 발을 디딘 무렵,
뜨거운 교육 열기로 남성 뿐 아니라 여성들도 체계적인 교욱을 받던 무렵,
어지러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생이란 존재는 연애의 비극적 수단으로 '사용'되어 집니다
1920년대 전,
거리를 활보하던 사람의 성별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간혹 거리에서 눈에 띄는 여성은 곧 기생을 뜻했습니다.
고운 비단 옷과 짙은 분칠에
양산을 손에 들고 살랑살랑 거리를 활보하던 기생들은
그 화려한 겉모습과는 극히 대조적으로
(혹은 당연하게도) 편견의 시선과 질타를 받아야 했고,
남성들조차도 그 모습을 보며 '양반 부녀자들까지 사치스럽게 물들이는 년들'
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쾌락 충족의 대상을 비난했죠.
허나 3.1운동 이후,
1920년대 초 부터 기생들 뿐만이 아닌 신여성,
즉, 교과 과정 교육을 받고 있던 여성들이 학생의 신분으로 거리를 활보하면서부터
더이상 거리에서 보이는 여성의 모습을 천편일률적으로 부정적 시각으로 보지만은 않게 됩니다.
기생과 여학생
너무나도 달라보이는 이 둘 사이를 묘하게 이어 준 공통분모는 '동경'이었습니다.
기생들은 사람들의 여학생에 대한 따뜻한 시선(자신들에게는 결코 없었던)을 동경했고,
여학생들은 기생들의 아름답고 화려한 외적인 모습을 보며 자신들도 그들처럼 되기를 원했죠.
기생은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산을 벗어 던졌지만, 여학생들은 양산을 집어 들고 거리를 활보합니다.
당시 시대(1920년대)에서
남성들이 신여성들에게 보내는 시각은 찬양, 그 자체였습니다.
게다가 '연애'사상의 폭발적인 확산 속도와는 달리
연애의 감정을 이입할 대상이 없던 남성들에게 신여성은 곧 '연애의 대상'이 되었죠.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지배적이었던 '남녀칠세부동석' 풍토는
그들에게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일종의 벽이었고,
이 와중에 신여성과 신남성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있던
기생이란 존재는 연애를 적용해 볼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자 물건이었습니다.
1920년대에 기생은..
유행의 물결 속에서 단순히 실험품에 지나지 않았던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23년에 일어났던 기생 강명화의 자살사건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우발적 사건' 이 아니었습니다.
당대 유명한 기생이었던 강명화는 만연하던 연애열에 휩쓸려
(자의적, 혹은 타의적으로)부호의 아들 장병천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너무나도 주변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강명화는 자살을 선택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를 한 기생의 자살이
대서특필 된 이유는 당시 급속도로 불어 닥친 연애 사상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때 당시에도 메스컴은 유행에 민감했고,
당대 최고의 유행 '연애'는 이들을 비극적인 주인공으로 포장할 수 있는 훌륭한 재료로 사용되게 해줬죠.
('이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강명화의 뒤를 이어 장병천 역시 얼마 안있어 자살을 했기 때문입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폭발적인 주목을 받던
강명화의 자살 사건은 조선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연애의 이면에 숨겨진 깨름칙한 '암흑'의 정체를 보여줬고,
식민지 시대의 남녀 간 연애의 귀착점은 결국 '자살' 뿐이라는
염세주의적 관점으로서의 해석을 낳게 됩니다.
이후, 연애와 자살은 빼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식민지 조선의 남녀 간 사랑은 비극으로 점점 치닫게 됩니다.
이광수의 <무정>은 근대 문학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비록 제 몸뚱아리 하나 편하자고 친일을 하고,
그 천재적인 필력을 친일을 위해 써먹은 인간이었지만
문학 자체로도 그의 작품은 뛰어났고,
문학사 적으로 봐도 이광수가 집필한 작품들은 큰 의미를 갖는게 사실이죠.
<무정>은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었고, 최초의 근대 소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이 당시 연애 풍토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무정>은 소설 그 자체로서 평가가 가능했던 최초의 작품으로,
신문에 연재될 때나 책으로 출판되었을 때나 폭발적인 판매량을 기록하며
본 작품이 세상에 나온 이후로 '독서 대중'이라는 독특한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
비로소 독서라는 단어를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각인시켜 주었죠.
(그러나 당시 문맹률이 70%가 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해석은 매우 상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형석이 기생 영채와 신여성 선형과 나누는
애틋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연애 열풍이 불어닥치기 전(소설이 나온 시점은 1917년)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었죠.
때마침 이 무렵, 다이쇼 데모크라시에 의해
일본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자유주의의 열풍은
식민치하에 있던 조선에도 희미하게나마 부분적으로 불어왔고,
그 결과 서구문화의 제한적 개방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비록 1930년대에 들어서 쇼와 천황이 집권하며
군국주의 파시즘의 발 아래 조선은 다시금 처참하게 짓밟혔지만,
군국주의의 틈비구니 속 아주 잠깐의 시기였던
1920년대에 불어닥친 열풍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무정>으로 불 붙은 독서 열풍, 혹은 연애의 감정은
이 때 즈음해서 수입된 톨스토이의 작품 등, 외래 문학과 만나며 더더욱 커져갔고,
1919년 3.1운동 이후, 비로소 '연애'라는 유행이 전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퍼지면서 그 정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독서 대중들에게 서양 문학은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였죠.
당시 대부분 거의 모든 한국 문학에 존재했던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을 수 없었던 시대성의 한계,
그것이 친일의 메세지든, 항일의 메세지든
이념적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었던 국내 문학은
이성보다 감성에 더욱 끌리고, 문학 자체의 예술성을 느끼고 싶었던
당시 신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이광수의 <무정> 역시도 이러한 시선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감정을 섬세하고 긴장감있게 표현했던 뛰어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만,
소설은 점점 결말로 다가갈수록 노골적으로 이념과 메세지에 지배됩니다.
초, 중반부 굉장히 빼어나게 묘사되는 가슴 설레이는 인물들의 감정은
뒤로 갈수록 계몽주의와 국가주의 이념에 서서히 잠식되어
결국 남는건 '일제의 근대화에 모두 동참하자' 라는 친일적 사상 뿐이었죠.
이러한 국내 문학계의 현실에서 느끼던 '갈증'을
당시 젊은이들은 서양 문학에서 해소했습니다.
순수하게 사랑이란 감정 만을, 연애란 감정 만을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 가슴 떨리게 묘사 해주던 작품들로 말이죠.
이 와중에 스웨덴 교육학자 엘렌 케이가 주장하던 사상은
당시 조선을 그야말로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뜨려버립니다.
"사랑의 가치는 영혼의 성장과 개인의 행복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어떠한 결혼이든 거기 사랑이 있으면 그것은 도덕적이다."
<무정>에서도 언급되는 엘렌 케이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 이유는
신여성, 신남성들의 도덕적 죄의식의 해방구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로지 '연애의 감정'만 있다면,
오로지 '사랑의 위대함'만 있다면 모든 것은 '도덕적'이다.
이러한 생각은 너무나도 위험한 생각이었죠.
빠른 속도로 증가하던 신여성들은 비교적 어린 나이었음에 비해
교육을 받은 남자들 중 절반은 유부남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신여성과 신남성의 시작점부터가 달랐던 것이었죠.
그저 남편의 내조만을 위해 일평생을 바치고 ,
자식들 뒷바라지로 등골이 휘는 집안의 아내는
신여성이 등장하면서부터 단숨에 퇴물로, 구여성이란 인식이 자리잡게 되고,
서구 문물과 근대화의 물결 속에 머리만 커져버린 조혼한 남성들은
부모가 정해준 '정략 결혼'에 염증을 느끼고,
유행에 휩쓸려 신여성과의 '연애'에 빠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죠.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무서웠고,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싫었습니다.
그러나 엘렌 케이가 우리나라에 등장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비로소 자유연애란 개념이 피어났고, 이어 자유이혼이란 말 역시 생겨납니다.
그에 따르면 연애의 감정이 없는 아내를 버리고 신여성들과 사랑을 꽃피우는 것은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길이었고,
나아가 조국의 번영을 꽃 피우는 일이라는 비약적인 해석까지 나오게 됩니다.
엘렌 케이의 사상은 명백히 우리나라의 풍토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녀의 사상이 우리나라에 제대로 정착하고 발전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엘렌 케이의 사상, 나아가 서양의 사랑에 대한 결과는 행복의 필수 조건임과 동시에 한없이 낙관적이지만,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서... 사랑은, 연애는 그 시작점이 어디였건 간에 모두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26년 8월
윤심덕과 김우진은 조국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함께 동반 자살을 합니다.
당대 신여성과 신남성을 대표하던 두 인물의 정사(情死)는
지금에 와서야 비극적 사랑의 표상으로 불리워지지만,
당시 이들의 동반자살은 앞에 강명화의 자살 사건과는
너무나도 달리 메스컴에서 큰 질타를 받습니다.
급격하게 불타올랐던 '연애'라는 유행의 급물살이 시간이 지나며
차츰 비극적 시대상과 만나 사그러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애틋한 연애의 감정이 정사라는 암울한 결과로 귀결되는
현실에 대한 깊은 슬픔의 부정적 표출 방법으로도 볼 수 있겠죠..
우리에게 '사의 찬미'를 안겨준 윤심덕은
당대 연애에 빠진 청춘남녀들에게는 '죽음' 이란 암흑의 현실 을 안겨주었습니다.
연애와 자살의 불가분의 관계는
정사(연인의 동반자살) 라는 초비극적 존재로 조합되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것처럼,
윤심덕 김우진의 정사는 연애에 빠진 청춘남녀가 그 매혹적인 향기에 취해
잠시 망각한 식민 시대의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는 냉혹한 기능을 수행하며
수많은 연인들은 꽃다운 생을 마감 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당대 조국해방의 각성제로
무섭게 떠오른 사회주의 사상은 연애하는 신지식인들을
'현실을 외면하고 방관한 채 오직 욕정에만 취한 한심하고 나태한 동물들'
이라고 비난하며 사회적으로 질타를 받습니다.
게다가 엘렌 케이의 사상이 퍼지며 마음에도 없는
정략 결혼의 '원흉'인 부모들과 신남성들과의 사이는 원수지간 이 되고,
조혼 여성들 사이에서도 졸지에 이혼녀가 되게 한 연애열은 없어져야 할 몹쓸 사회 현상이었죠.
하지만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연애에 대한 신랄한 비난과는 반대로
정작 자신들 마저도 연애의 변형된 형태를 추구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연애사상은 만남 - 교제 - 결혼이라는
일종의 공식화 된 틀을 바탕에 두고 있었습니다.
지금에서야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이지만,
정략 결혼이 거의 모든 남녀 사이의 결과로 인식되던
당시 사회상에서 저러한 감성의 단계적 진화는 대단히 큰 의미 를 지니고 있었죠.
(사랑이란 인간의 감정을 도식화 한 저런 표현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실 지 모르겠지만 이해해주세요 ㅠㅠ)
사람의 감정이 결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며 자연스레 '정신의 고귀함' 과 '육체의 순결함' 이 부각됩니다.
연애가 조혼 여성들을 구여성으로 취급하며 멸시하던 부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었던 반면에,
위와 같이 육체의 고귀함을 강조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인식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죠.
남녀 간 마음이 통하지 않던 기존의 결혼방식과 성생활은
상대적으로 몸을 섞는다는 잠자리의 인식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취급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정신을 통해 육체적 결합으로 이어지는 연애관에서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하게 인식됩니다.
따라서 기생들처럼 정(情) 없이
여러 남자들과 몸을 섞는 일은 연애에서 '악덕'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러한 연애의 인식에서부터 기생들은 철저히 배제될 수 밖에 없던 슬픈 운명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한건 이 시기가 성에 대한 '지식'이
(체위의 종류 등) 급속도로 발달해 갔던 시기였단 점입니다.
이런 '육체의 순결함' 에 관한 전반적인 인식은 '금지된 것의 추구'라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맞물려 음란물이 대대적으로 유행 하기도 했었죠.
어쨌건, 이러한 인식들은 연애를 '교감'의 결정체라는
일종의 '연애의 신성화'를 가져왔고,
아예 연애사상 자체를 조국 해방에 반하는 것으로 취급하던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연애에 관한 신랄한 비난은
역설적으로 연애의 신성화를 파괴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붉은 사랑' 이라는
이념과 성욕이 합쳐진 변종 연애론을 추구하며 당대 연애사상을 가열차게 비난합니다.
붉은 사랑, 적련..
그들이 주장하던 사랑의 방법은
만남 - 교제 - 결혼의 도식화를 변형 시킨 것이었습니다.
만남 이후, 교제는 생략 하고
결혼은 극히 낮은 선택적 확률로 존재하며
곧바로 '성교'로 이어지는 것이었죠.
그리고 남녀 간의 만남은 반드시 '이념이 일치' 해야 한다는
강력한 전제조건 아래.. 그들이 내건 슬로건은 이것이었습니다.
"연애는 우리들 인간성을 높이며 우리들의 새로운 사회를 위하여 싸우는 능률을 증가하는 것이어야 한다"
1920년대 조선 연애 사상의 가장 근본이 되었던
(혹은 전부였던) 정이 통하는 감정을 배제한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붉은 사랑은 연애가 아니었고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카프(KAPF)가
결국 최후에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었던 것처럼,
그들 사이에 흡수되어버린 연애는 척추가 잘려나간 초라한 살 덩어리였고,
정신이 배제된 '욕정' 만이 걸레처럼 남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건, 당시 연애가 열풍이었다고는 해도
해당자들은 전체 국민을 놓고 봤을 때 극소수인 신지식인들이었고,
3.1 운동 이후 더더욱 악랄해지는 일제의 탄압에 국민들이 신음하는 채
'특정 부류'에서 피어난 유행이었기에 '연애'는 사회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도 납득이 가지 않았던 퇴폐적 유행이었단 점입니다.
이러한 당시 시대적 풍토 아래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연애에 대한 비난은 묘한 설득력을 갖고 퍼져갑니다.
급기야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연인들을 '부르주아적 위선'을 가진 사람들로 취급하며
그들을 사상에 반하는 자들로 적대시하게 되고..
그렇게 점차.. 뜨겁게 타오르던
1920년대 연애의 열기는 혁명을 추구하는 이데올로기 아래 차갑게 식어갑니다.
일제의 탄압 아래 민중이 고통받던 그 시절,
연애의 소용돌이에 빠졌던 청춘남녀들을 단순히
뼛속까지 태평한 룸펜의 시각으로 바라 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당대의 비극적 시대상은 연애라는 강렬한 향기 속에 묻혀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혁명적인 이념이나 절망적인 현실도
인간의 본능마저 잠식할 수는 없었습니다.
경성의 유명한 그 누군가도 지난 여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죠.
"조국은 왜놈에게 짓밟혀 신음해도 청춘남녀들은 사랑을 한답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맞아요..
그게 인간이겠죠..
시대를 무시했던 그들은
어찌 보면 한 줄기 빛도 없던 암흑 속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었던 선택받은 자들 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식민지 시대의 암울한 시대상..
젊은 남녀들의 피 끓는 청춘..
그들은 연애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내면속에서나마 혁명을 실현한
식민시대 유일무이한 위대한 혁명가였습니다.
행복한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나누는
사랑이란 우리의 감정을..
누군가는 사상을 초월 하며,
암흑 속 현실을 애써 눈 감으며,
목숨을 내던지며,
비극의 끝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독약을 마시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시대의 최초이자 최후이자 유일한 돌파구였던
연애의 향기에 취했던 그 시대의 수많은 룸펜들을 기억하며...
첫댓글 어제 밤에 올렸다가 많은 분들이 쪽지로 글 읽기가 불편하다고 하셔서..ㅠㅠ 수정해서 다시 올려욜!
좋은 글 감사드려요 잘 읽어보고..개인소장 할게요 감사합니다 ^^ㅂ
그대의 연인은 독립투사 나의 그대는 변절자 청춘은 언제나 봄 조국은 아직도 겨울 아아 해방된 조국에서 실컷 연애나 해봤으면 이거생각나요 ㅠㅠ 이광수 딸이 그렇게 신여성이었대요 뒷모습보고 쫓아와서 앞모습보고 돌아간다는 말이 이분땜에 생겼다네요 그때나 지금이나 외모를 중시하는군여
저도 두고두고 읽으려구 스크랩해요 잘읽었씁니다 ^_^
경스 생각나!♥ 희망가 진짜 좋음ㅠㅠ
제목보자마자 경성스캔들이 생각나서 클릭했는데^^ 올려주시는 글 항상 잘 보고 있어요~~팬이에요 ㅋㅋ 블로그로 스크랩해갈게요~^^
진짜 경성 스캔들 생각나요. 선우완ㅠㅠㅠㅠㅠㅠㅠㅠㅠ담아갑니다.
너무 좋은 글이네요~~마음이 찡해요~
감솨합니다 메일로 스크랩 할게요 ㅋㅋ
경스진짜잊을수업다긔ㅠ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색,계 보면서도 전 이생각 들었는데...이때는 정말 개인의 행복이나 감정보다 이념이나 사회에대한 그것만 있던 시대잖아요 참 슬픈시대라고 생각해요 지금과는 참 많이 다르죠 우린 개인의 행복이 최우선이니까 뭐가 옳다 뭐가 맞다는 소린 아니구요
고마워요~~경스가 생각나요~~담아갈게요
경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조국은 겨울, 청춘은 언제나 봄....경스에 나오는 말이 생각나네요ㅎㅎ 너무 잘봤습니다. 재미있어요^^
경스경스 ㅜㅜ..... 좋은 자료 감사해요 개인카페에 스크랩해갑니다.
이런 글 정말 좋아요. 잘 읽었어요.
언제나 정성 가득한 좋은 글 올려주시는 parismatch님! 늘 잘 읽고 있습니다. 스크랩도 할게요. 스크랩 하시는 분들 번거로우시겠지만 꼬리 하나씩만 달아요 우리. ^^
와~ 뭔가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경스랑도 잘 어울리는 글이네요~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parismatch님 게시물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에서 네번째 사진, 군중들 앞에 한 여성을 세워놓은 사진은 어떤 배경을 가진 사진인가요? 혼자 이리저리 추측을 해봤는데 궁금해서요. 근데 이 리플 너무 늦게 달아서 못보시는 건 아닌지;
in the ... 님 안녕하세요~ ^^; 말씀하신 사진은 중국 문화대혁명 때 사진인데요~ 어마어마한 규모의 홍위병들이 모여있는 상태에서 단상 위의 여자를 반모택동 세력인'흑방'의 단원으로 몰아붙이며 처단하려는 사진이에요..ㅠㅠ 본문과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사진은 아니지만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극단적인 면을 보여주는 사진이라는 점에서 '붉은 사랑'과 어느정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서 첨부해 봤어요. 혼란스럽게 해드려서 죄송하긔..ㅠㅠ
앗, 아니예요. 저도 여성분의 복장을 비롯한 사진 속 복식을 보고 문화대혁명 시기 군중집회에서의 공개비판 장면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만 당시 반우파투쟁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홍위병들에 의해 '처단'되었다는 점과 본문의 내용을 연결해서,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있어서도 자유연애사상이 일종의 유행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필히 자유연애사상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을 것인데 그것은 봉건의 잔재를 때려부수자는 마오쩌둥의 슬로건과는 좀 다르지 않나-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 뿐이었답니다. ^-^ 오히려 이 사진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글도 사진도 항상 잘 보고 있고요, 답글 달아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