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변화
이재현
*
휘바 휘바 신나는 노래. 나는 괜히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본디 따발총처럼 화를 쏟아내는 사람보다 입을 꾹 닫고 아무말도 안하는 게 더 무서운 법이다. 지금 엄마 얼굴을 큐알코드로 전환하고 찍어내본다면, 분노 99% 증오 1%로 차있을 게 분명했다. 이럴수록 더욱 눈치 없는 척 굴어야했다. 스물 넷의 나이에도 빵댕이를 열심히 흔들어댔다. 엄마가 웃을 때까지 아브라카다브라 골반춤부터 나훈아의 화려한 바지 퍼포먼스까지 흉내냈다. 그제야 엄마가 픽 하고 웃었다.
"어휴 내 명에 못살지."
"쏘리. 다신 이런 일 없게 할게."
"그니까 날 좀 적당히 닮게 나오지 그랬어."
"암요 암요. 여사님 너무 닮아서 팜므파탈 딸로 나옴."
중년 여사님의 마지막 화룡점정. 자기자랑까지 군말 없이 들어주면 엄마는 그나마 화가 풀렸다. 다시 평온한 얼굴로 여섯 시 내 고향이 나오는 티비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엄마는 완경기가 다가와서인지 무엇이든지 금방 질려했다. 다른 건 다 닮아도 쉽게 질리는 점은 닮으면 안되는 거였는데. 엄마는 채널을 돌리다가 연애의 참견 채널에 멈췄다.
"폴리아모리? 저 머시기 니 얘기 아니냐."
"난 적어도 한 번에 많은 사람을 만나진 않지."
"자랑이다 자랑. 남에 눈에 눈물나게 하면 니는 피눈물 나."
하지만 어떡해. 사랑의 유효기간이 남보다 조금 더 짧은 걸. 어렸을 때부터 유통기간 1시간 지난 우유라도 먹지 말라며 때찌때찌한 게 엄마잖아요. 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닫았다. 오분 도 채 넘기지 못하고 엄마는 또 채널을 돌렸다. 채널 탐방기를 함께 하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불안불안 하다 했드만, 하필 내가 잠깐 알바하러 간 사이에 집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나는 차단한 연락처 저 끝에 있는 두 명의 이름을 불러왔다.
<< [수연아 집에 찾아오지마. 나 이제 너 안좋아하니까.]
<< [김민식 니 집에 한 번만 더 찾아오면 부랄 으깨버림]
연하 애인이었던 수연이에게는 나름 친절하게. 꽁치남이었던 김민식한텐 가차없이 보냈다. 한 달 차이로 연애했던 전 연인들이 우리집에 찾아왔다. 그것도 하필 엄마가 꿀같은 낮잠을 즐기고 있을 때. 5월의 연인 수연과 6월의 애인 김민식은 우리집 앞에서 조우했다. 연애기간이 겹친 건 아니어서 환승연애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분노하는 점도 어느정도 이해됐다. 바락바락 소리지르며 우리집 앞에서 싸웠고 엄마의 단잠은 와장창 깨졌다.
젊을 때 많이 만나세요. 그래야 사람 보는 눈이 생긴답니다.
나는 내가 부끄러운 짓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인을 사귈 때는 옆에 있는 인연에게 충실했다. 한 사람을 만나는 동안에는 절대 한 눈을 팔지 않았다. 그냥 한 순간에 일방적으로 헤어짐을 통보받은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간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주말을 보낼만큼 인생은 길지 않다. 언제나 유효한 문장.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이 명제로 삼단 논법을 전개해보면 이렇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유효한 삶 속에서 최대한 많이 사랑하자.
그러러면 어쩔 수 없이 짧게, 많이 만나야한다.
엄마 앞에서 이 얘길 했다가 꿀밤을 석 대나 맞았다. 그래서 엄마나 내 일기장 외에는 이 삼단 논법을 내뱉지 않는다. 왜 노희경 작가님 에세이 제목도 있지 않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 *
어서오세요 <우릴 위한 디저트>에. 대학 세 개 중심부에 딱 위치한 디저트집이었다. 나카무라 아카데미를 졸업한 김영훈 사장님은 베이킹 맛집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결과적으로 이 집 디저트 잘하네 얘기보단 사장님 얼굴이 맛집이에요라는 후기가 더 많았다. 처음에 개업할 때 인테리어가 덜 채워진 가게에서 면접을 봤다. 가오픈 기간을 겨우 지난 사장님의 얼굴은 누가봐도 초췌해보였다.
"홈베이킹 경력이 있으시다구요?"
"네."
"혹시 아르바이트 떨어지시면 어떻게 하실 건지 여쭤봐도 되나요."
"접시물에 코박고 죽을 돈도 없어요. 바로 딴 데 구해야죠."
진지하게 말했다. 대학도 졸업하고 더이상 엄마카드를 빌려쓸 순 없었다. 이제 정말 딱 한 달 버틸 생활비만 남았다. 죽고 못사는 연하 애인을 못만드는 것도 이 이유였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연하를 만나.
"오케이. 합격!"
김영훈 사장님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와하하 웃었다. 그리고 바로 손에 쥐고 있던 파일에서 근로계약서를 꺼냈다. 그래. 한시가 급했던 시기였으니까. 그렇게 오픈 멤버로써 3년 간 일할 줄 몰랐다. 그동안 '우릴 위한 디저트'는 쑥쑥 컸다. 가끔 아이돌 팬들 컵홀더 이벤트를 하기도 했고 유명한 빵 리뷰 유튜버에게 소개도 됐다. 인기가 많아질수록 사장님 혼자 구워낼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주방 직원으로 뽑아서 레시피를 알려줄 순 없었다. 임시방편은 하나였다. 오래 일한 알바생에게 가르쳐서 같이 굽게하기.
나는 다우니에 절인 앞치마와 유니폼 티셔츠를 꺼냈다.
"여주야. 너 우리 신메뉴 먹어봤나?"
"인스타에서 보긴 봤어요. 저 저번주 대타 부탁하고 여행 갔잖아요."
"맞다. 먹어봐."
"그 설탕수 늘리는 걸로 픽스한 거예요?"
"응. 줄이니까 크랙이 잘 안나더라. 달긴해도 막 머리 아플정돈 아니라서."
인절미 쿠키였다. 디저트집이 점점 잘되긴 했지만 시그니처 메뉴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장님은 늘 메뉴 개발에 목맸다. 지난 번 5차 테스트 때보다 훨씬 맛이 균일하고 잘잡혀있었다.
"괜찮아? 어때?"
"괜춘. 이대로 팔아도 될듯."
아직 오픈 전이어서 한가했다. 사장님은 어제 잠이 안와서 평소보다 더 구워놓고 가셨다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아메리카노 한잔씩 여유롭게 때릴 수 있었다.
"오늘 뭐 없죠? 달력에 안적혀있긴 하던데."
"예약은 없는데 지난 번에 유튜브 탄 이후로 손님 쏟아져. 그래서 주말알바도 당분간 나오기로 했어."
"누구요? 성민이?"
"아니. 재현이. 너 한 번도 못봤지?"
이름은 대충 알았다. 단톡방에 가끔 '네'만 대답하고 사라지는 사람. 카톡 프사도 없고 회식 때도 거의 안오는 사람. 이재현 씨는 오픈 멤버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오래 일한 걸로 아는데. 아직까지도 한 번도 못마주친게 신기하긴 했다.
"언제 온대요?"
"아침에 운동 때문에 못온다는 거 오라고 꼬셨지. 우리보다 한 시간 늦게 와. 10시."
"넹."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이제 대충 식은 빵들을 진열하고 완전히 식은 건 포장할 시간이었다. 열시가 되기 오분 전. 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들어왔다. 보라와 분홍이 섞이고 아기자기한 이 곳과는 그렇게 잘어울리지 않는 남자. 남자는 들어오는 출입문과 키가 거의 비슷해서 살짝 숙이면서 들어왔다. 워 멀끔하네. 운동하고 온다던 말이 진짜였는데 머리칼이 젖어있었다. 사장님이랑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하기도 했다. 근데 사장님보다는 약간 냉한 느낌. 나는 OPP 봉투 접착면을 뜯다가 말고 멈췄다. 어정쩡한 자세로 있고, 남자도 무표정한 얼굴로 내쪽을 봤다.
"어. 재현이 왔어?"
"네. 옷 갈아입고 올게요."
남자는 내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지나갈 때 시원한 향기가 났다. 와 쿨샴푸 쓰나 향 좋네. 나중에 친해지면 물어봐야지. 역시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맞았어. 목소리도 무뚝뚝한게 냉하고 말 수도 별로 없을듯. 나는 빨대나 컵홀더를 채우고 홀을 한바퀴 돌았다. 어제 바빴다더니 정말인가보다. 마감 애들이 이런 걸 안채울 애들이 아닌데, 어제 단톡에 한참 앓는 소리를 한 게 순 뻥은 아니었다. 포스기에 찍힌 매출을 보니 화장실 한 번 가기도 어려운 매출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사장님은 이미 주방안에서 열심히 키친에이드 반죽기를 돌리고 있었다. 반죽기 소리가 차라리 더 컸으면 좋겠다. 손님이 오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을 미리 다 해놨다. 차라리 친한 알바애들이 오면 노가리라도 깔텐데 할 일이 없었다. 나는 괜히 주방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사장님은 구워진 곰돌이 쿠키에 표정을 그리기에 정신이 팔렸다.
"제가 할게여."
"왜?"
초코 짤주머니를 옮겨 받았다. 어차피 포스기 앞은 이재현 씨가 지키고 있으니 두 명까진 필요 없겠지. 사장님은 일을 자처하는 날 보면서 작게 입모양으로 "어 색 해?" 물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일거리라도 계속해야지 했는데 그림 그리기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완성된 곰돌 쿠키를 들고 홀로 나가면서 이재현 씨 쪽을 슬쩍 봤다. 심각한 표정으로 포스기를 몇 번 만지더니 노래가 바뀌었다. 알바생마다 멜론 플레이리스트를 짜놓은 게 있는데, 나는 주로 떼껄룩파였다. 잔잔한 알앤비 팝송을 틀어놓고, 누구는 케이팝 아이돌 수록곡만 틀어놓고, 누구는 멜론 탑100만 만들어놨다. 태연의 플레이리스트가 흘러나왔다. 와 이 노래 아는 사람 별로 없는데. 생긴거랑 다르게 따뜻한 노래를 들으시네. 이상한 공통점의 발견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그마한 거 가지고 말을 걸기엔 서로 어색했다. 곰돌 쿠키를 다 진열한 후에 할 게 없었다. 난 앞치마에 손을 꽂으면서 괜히 2층 홀에 올라가서 앉아있었다. 오늘 오전은 왜이렇게 한가하지. 차라리 바쁘길.
* * *
시발 취소. 완전 취소. 퉤퉤퉤다. 차라리 바쁘길이라고 한 말을 취소하고 싶었다. 알바 N대 금지어가 "아 오늘 왤케 한가하냐."였다는 걸 잠시 까먹었다. 왜 영훈 사장님이 홀 알바생을 한 명 더 추가한지 여실히 느꼈다. 평소보다 매진되는 속도가 빨랐다. 저번 주에 대타 부탁하고 여행다녀와서 그런지 유난히 더 힘들었다. 디저트 포장과 직장인 점심 러쉬를 쳐내고 나니 이미 기력이 쇠했다. 당장 바닥과 뽀뽀하기 직전이었다. 간이 의자에 앉아서 핸드폰을 깨작였다.
<< 성민아 너 평일 오픈 왜 안한다 했어ㅜ
>> 여주 언니...... 저 그정도로 자낳괴는 아님
>> 주말에 힘들어 뒤지는데 어케해여
<< ㅜ 주륵
>> 대신 재현 오빠가 하지 않아여? 재현 오빠 쩜 차갑긴해도 일 잘함
>> 근데 뭔가 언니랑은 상극일 거 같은 늑김 ㅋㅋ
성민이랑 했으면 더 즐겁게 했을텐데. 하긴 거의 주말 풀타임 하는 애가 평일까지 알바를 할리가 없지. 왜 상극일거 같냐고 물어보려는 찰나에 손님이 왔다.
"어서오세요."
"어서오세요~"
이재현 씨는 좀 신기하긴 했다. 대부분 무표정이긴한데 손님 앞에선 은근히 말투가 친절해졌다. 그래서 사장님이 좋아하는건가? 오래 일한 짬밥답게 점심 러쉬 때 손발 처음 맞춰보는데도 잘 맞았다. 내가 아아메 대량주문 때 샷 뽑기 머신이 되어있으면, 옆에서 조용히 얼음컵을 다 만들어놨다. 틈날 때마다 커피 캐리어도 착착 접어놓고 내가 홀을 돌고 있으면 마카롱도 추가 진열해놨다. 바쁜 와중에도 파트너가 일을 잘하니까 신경쓸 게 덜했다.
"오늘 좀 일찍 닫으까?"
"옙. 완전 찬성."
"네."
확실히 유튜브빨이 있긴 있나봐. 지난 달을 기점으로 손님이 늘긴했는데, 저저번주에 비해서 디저트 매진 속도가 더 빨라졌다. 카트라이더 빨간 부스터를 단 것처럼 빨리 팔렸다. 평소에 마감할 때는 스콘 종류는 조금씩 남았는데 이제 아예 텅텅이었다. 마감 때 좀 가져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입맛을 괜히 다셨다. 그래도 내일은 사장님이 도넛 만들기 교육 받으러 간다면서 특별 휴무라고 했다. 평소보다 한시간 반이나 일찍 마감했다. 불을 꺼놓고 홀 마감부터 시작했다. 쓰레기도 어마어마했다. 예전에 마감할 땐 혼자서 질질 끌고갈 수 있을 정도였는데 이젠 아니었다. 쓰레기장까지는 삼 분정도 걸어야했다. 혼자서 버리고 가고 싶었는데, 도저히 그럴 양이 아니어서 이재현 씨랑 뒷문으로 나섰다.
"여주 언니..."
아뿔싸. 그걸 까먹고 있었다. 말랑 순두부 같이 생긴 수연이가 은근히 고집이 있다는 걸. 내가 늘 이시간이면 마감하러 뒷문으로 나간다는 걸 수연이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옆에 있는 이재현 씨의 눈치를 봤다. 수연이는 울망울망한 눈으로 내쪽으로 왔다.
"그 새끼랑 만나는 거 아니죠? 언니 얼굴 보고 얘기 좀 해요. 언니......"
"저...수연아."
아무리 수연이어도 이건 아니었다. 그래서 사귈 때도 절대 내가 일하는 곳에는 데려오지 않았다. 괜히 헤어지고 나서 민망하기도 하고, 사장님은 엄한 동네 고객 하나 잃는 거니까. 이재현 씨는 내 손에 들려있던 종량제 봉투 두 개를 가지고 갔다.
"제가 버리고 올게요."
"...예. 감사합니다."
눈치껏 피해준 것 같았다. 이재현이 자리를 뜨자 수연이는 아예 눈물을 쏟았다. 나는 그나마 밝은 가로등 밑으로 데려갔다. 뒷골목에서 헤어진 지 두 달이나 된 둘이 서있는 것도 웃긴 장면이었다.
"수연아. 내가 찾아오지 말랬잖아. 연락하지도 말고."
"그래도. 그래도 이런 게, 어딨어요. 언니. 나랑 헤어지고, 얼굴 좆창난, 그런, 끅, 새끼랑 만나고오......"
"진짜 나 화내. 다시는 이러지마."
수연이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아예 작정하고 우는 것 같았다. 동정심 유발 작전이든 진짜 마음이든 날 위로해줄 처지가 안됐다. 그렇게 가로등 밑에서 떠나가라 우는 수연이를 두고 나는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얼마 되지 않아서 이재현 씨도 들어왔다. 괜히 못볼 꼴을 보인 거 같아 내심 신경 쓰였다. 일터에서는 일만 해야하는데 이런 사적인 사건을 끌어들이기 싫었다. 사장님은 주방 마감까지 마치고 나왔어.
"수연이 또 왔어?"
"또요? 언제 또 온적 있어요?"
"너 저번 주에 대타 부탁하고 간 날. 맨날 왔어."
정말 아이고다. 저번 주에 자리를 비운 걸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여기서 기다리다 못해 우리집으로 온 걸 불행으로 여겨야하나.
"사장님 오늘 저녁 안사주세요?"
"그래? 하긴. 재현이도 오늘 평일 첫출근 하느라 고생했는데 간단하게 저녁에 맥주 먹고 갈래?"
"...네."
원래 쉬는 날 전에 인간은 용감해진다. 1차는 간단하게 치맥이었다. 이재현 씨는 술이 들어가니 사회성이 나쁘지 않았고, 영훈 사장님이랑은 워낙 친하고 편하니 꽤 괜찮은 자리였다. 그러다보니 2차로 자리를 옮겨서 이자카야까지 갔다. 원래 하루에 두 가지 이상 술을 마시면 다음 날 작살인데, 오늘은 그 금기를 깼다. 간단한 안주 몇개와 사케를 시켰다.
"재현이 평일에 해보고 정 힘들면 말해. 아직 여주나 너만큼 일할 애를 못찾아서 그래."
"네."
"할만해?"
"네. 괜찮아요. 어차피 아침에 운동가서 일찍 일어나니까요."
체대인가? 남자는 가슴근육으로 말한다던데 그런 의미에서 이재현 씨는 침묵하는 편은 아니었다. 나는 무순을 왕창 두른 연어를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잠깐. 형이다. 전화받고 올게."
나나, 사장님이나, 그리고 맞은 편에 앉은 이재현 씨도 술을 꽤했다. 1차에서 맥주에 소맥까지 달렸는데 2차 사케를 마시는 속도도 꽤빨랐다. 사장님은 전화를 받고 온다며 잠시 나갔다. 나는 입안에 떠다니는 연어를 헹구기 위해 사케를 쭉 들이켰다. 이재현 씨가 자연스럽게 잔을 채워줬다. 나도 사케 병을 받아들고 맞은 편 잔을 채워줬다.
"그 사람이요."
"네?"
둘만 남으니 어색하긴 했다. 내가 먼저 "평일도 하는 거 안힘드세요?" 물어보려고 했는데 입을 먼저 연 건 이재현 쪽이었다. 나는 우동을 젓가락으로 휘휘젓다가 이재현 씨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무언가 입을 달싹였다. 솔직히 생긴 건 내취향이 아니긴 했다. 잘생기고 예쁨까지 가지고 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 차가웠다. 말그대로 상타치의 길만 걸어왔을 거 같은 사람. 나는 예전부터 쭈굴과 찌질에 대한 아름다움을 찬양한 사람으로써, 이재현은 사실 얼굴 예선전만 합격이지 본선에는 탈락할거였다. 김여주 얼굴스타K TOP10에도 못드는 얼굴.
"누구요? 아... 수연이요?"
"네. 아까 많이 우는 것 같던데."
"거기서 달래주면 더 희망고문이죠. 헤어진 지 꽤 됐어요."
이재현 씨는 대충 아……하고 말끝을 흐렸다. 처음보는 사람 앞에서 전 연인을 험담하고 싶진 않았다. 그냥 적당히 둘러대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둘 다 얼굴이 발그레해질 때까지 마셨고, 이런 얘기정도는 할 수 있다고 해서 늘어놨다.
"첫만남에 성정체성 묻는 건 좀 그렇지만 전 양성애자거든요."
"네."
생각보다 더 쿨하군. 아 오늘 자리가 파하기 전에 쿨삼푸 뭐 쓰냐고 꼭 물어봐야지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처음에 사귀기 전에 이말을 하면 그래? 괜찮아! 하다가 다들 점점 변해요. 바람 필 확률도 두 배라고 생각하는거죠."
"계속 의심해요?"
"예. 뭐 원래 이 판에서도 양성애자가 딱히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에요."
이재현은 생각보다 리액션이 좋았다. 세명에서 얘기할 때보다는 말도 많이 붙였다. 내 취향 아니지만 동료로는 좋은 사람. 내 맘속에서 이재현의 등급이 한 단계 올라갔다.
"뭐 그냥. 나중에 다들 중년되고 보수적으로 변하면 난 사랑하긴 글렀으니까. 지금이라도 많이 만나자 하는거죠."
이재현과 나는 계속 사케를 들이켰다. 새로 나왔다던 새로운 사케도 추가 주문했다. 사장님이 마음껏 먹으랬으니 연어도 더 달라고 했다. 이자카야 사장님 보조개 깊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근데 아까 태연 노래 틀던데. 태연 노래 좋죠. ……콘서트도 갔어요. 와 언제요? 나도 가족이랑 같이 간 적 있는데. 영훈이형이랑 같이 갔어요. 아하 그렇군. 둘이 친형제는 아니죠? 학교 같이 다녔어서 친해요. 아아 그렇구나.
시덥지 않은 얘기도 원래 술이 들어가면 재밌다. 이래서 초면에 술을 마셔야 말을 술술 틀 수 있었다. 전화가 꽤 길어지는지 사장님은 삼십 분이 지나서야 들어오셨다. 아직 초여름이긴 해도 밤공기는 싸늘해서 사장님의 양 두볼이 빨개졌다.
"형 전화 끝내고 들어오려다가,"
"애인한테 전화 오심?"
"엉. 이따 잠깐 만나기로 해서 오늘 이만 헤어질래? 아님 너네 둘이 마실래?"
"노노. 걍 오늘은 이만큼만 마시죠."
가방을 챙겨서 일어났다. 벌써 새벽 두 시였다. 조금만 먹고 마신다는 게 벌써 이시간이었다. 사장님은 멋드러지게 두꺼운 신용카드로 계산했다. 역시 돈쓸 때가 가장 멋진 사람.
"데려다줘?"
"됐어요. 재현 씨랑 걸어갈게요."
영훈 사장님은 쿨하다. 두 번 묻지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이재현과 나는 조용한 거리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찬바람을 쐬니 술이 어느정도 깼다. 아 가디건 챙겨올 걸. 요새 낮은 덥다 못해 뜨거워서 반팔만 입었는데 밤공기가 확실히 찼다. 이재현 쪽을 살짝 봤는데 따뜻한 후드집업을 입고 있었다. 살짝 빌려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건 뭐 연인이나 썸 단계에섬나 옷빌려입기를 하니 그러진 않았다. 걍 추운채로 걷는 게 어색하게 옷을 받아입는 것보단 나았다. 휴대폰 액정으로 살짝 비춰보니 누가봐도 개 얼큰하게 마신 사람의 얼굴이었다. 완전한 술톤. 근데 그건 이재현도 마찬가진 거 같았다.
"전 일로 가요."
"저도요."
그렇게 말 없이 걸었다. 아까 대화를 나눠서 그런지 이 공기가 어색하진 않았다. 가끔 차소리도 들리고, 우리처럼 취한 사람들의 고성방가를 배경음악으로 삼으면서 걸었다. 이 근처에 산다더니 알고보니 가까운 아파트였다. 이제는 갈림길이었다. 각자의 길로 가야할 때였다. 내일은 출근 안하고, 내일 모레 출근하니 또 얼굴을 볼 거였다.
"잘가요 재현 씨."
"이거요."
이재현이 자기 옷 빌려주기를 시전했습니다. (1) 승낙 (2) 거절 (3) 기타
내 앞에 갑자기 놓여진 선택의 기로가 어색했다. 이재현은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후드집업을 벗고는 내쪽으로 건넸다. 나는고민하다가 결국 1번을 택했다. 우리집은 안쪽 단지여서 못해도 8분을 걸어야했다. 감기 걸리는 것보단 낫지. 겉옷을 벗은 이재현은 흰 반팔티만 입고 있었다. 진짜 청순하게 생기긴했네. 혼자서 생각하고 후드집업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하고 뒤돌아서려다 이번에는 내가 이재현을 잡았다. 나도 모르게 다급하게 이재현을 돌려세웠다.
"맞다. 재현 씨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네?"
처음 보는 당황한 얼굴. 별 건 아닌데 너무 크게 말했나.
"그게 좀...변태 같을 수도 있고. 좀 실례일수도 있는데요."
"……"
아 오바인가. 지나갈 때 향이 너무 좋아서 물어보는 거라고 하면 진짜 너무 변태인가. 그래도 궁금한 걸 바로 물어봐야 직성이 풀렸다. 이 사람을 또 얼마나 볼 줄 알고.
"혹시 샴푸 뭐써요? 쿨샴푸 써요?"
"...아."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좀 무례했나. 이재현은 미간을 한 번 찌푸렸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런 박장대소에 얼떨떨했다. 이재현은 '존나 훈남 웃음'을 짓더니 아직까지도 잡힌 자기 손목을 내려다봤다. 나는 급하게 잡은 손목을 놨다. 아 설마 이거 내가 꼬시는 거라고 오해하진 않곘지.
"이따 전화로 알려줄게요."
"네?"
그리고는 존나 훈남 웃음 띄운 채 뒤돌아서 갔다. 어찌 가는 포즈가 달리기와 가까웠다.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다가 집 쪽으로 걸어갔다. 이 묘한 기분 어쩐지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나는 손에 쥐어진 후드집업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방금 전까지 앞에 있었던 이재현의 얼굴을 곱씹었다. 결국에 복잡한 마음 떄문에 후드집업은 입지도 못했다. 그냥 예린 아씨를 모시는 가인 집사처럼 팔에 걸치고 왔다. 이럴거면 왜 받아왔지. 다들 자고 있을 시간이니까 조심스럽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마지막 별을 누르면 단계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 여주야 재현이가 너 번호 물어봐서 알려줬어
사장님의 카톡과 함께 연달아서 이재현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열심히 뛰어가던 이유가 이거였나.
>> (사진)
>> 이거예요
야무지게 쿨샴푸를 들고 찍어보냈다. 나도 모르게 아까 이재현처럼 웃었다. 그러다 너무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지는 내 웃음 메아리를 듣고 자중했다. 나는 현관키를 내리고 이재현이 보낸 카톡을 계속 봤다. 흠 아까 너무 속단한건가?
<< ㄳㄳ요
이재현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냈다. 애교가 많은 편인가? 갑자기 마음이 이상해졌다. 현관문에 기대서 이재현이 보낸 사진을 계속 봤다. 큰 손으로 야무지게 쿨샴푸를 쥐고 있는거며. 잘 정돈된 손톱이며. 희미하게 아웃포커싱 되어있는 푸우 욕실 슬리퍼가 귀여웠다. 취향은 언제든 바뀌니까 본선에는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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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브금이랑 같이 보니까 뭔가 분위기가 잘그려지는거같아서 좋아요 ..ㅜ
자연스럽게 전화할 구실 만들고 훈남 웃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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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제발 숫자 붙여주시술.. 제발 ..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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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니..... 고소한다.., 진짜㉰..,
아 존나 훈남 웃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근데 재현님 샴푸 뭐 써요????? 아니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건데 제 번호는요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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