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백두산 기행문
올 여름은
유난히도 일찍 우리곁으로 다가와 연일 30도를 오르내리며 지구속 조그마한 한반도를 달구어 가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사는 영월땅이 전국에서 제일 덥다고 뉴스에서 나온다.
이모두가 기후 온난화와 지형 변화 환경 오염등 여러모로 복합적인 요소들 때문인가 생각하여본다 그래도 더위를 잊어 버리려고 산을 오르면 숲속에 왠 쇠파리들이 그리도 많은지 눈을 못 뜰지경이다.
모름지기 그래도 희망의 꿈을 꾸고 있기에 6월이 어느 사이 후다닥 지나가 버리고 드디어 백두산 여행을 하는 7월 1 일 아침 05:00 일어나 세수를 하고 07:00 전에 공항에 도착하여 주위를 둘러 보아도 아직 낮 익은 친구들이 안보이기에 박원서 회장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거의 다왔단다.
약속장소로 걸어가 조금 기다리니 친구들이 하나 둘 나타난다 반가움에 악수를 하고 곧이어 가이드와 집행부의 설명을 듣고, 입국 여행 비자를 받아들고 하나 둘 짐을 부치기 위한 수속을 마치고 입국심사장을 빠져 나와 잠시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고서 대한항공825 편 비행기에 올라 좌석에 앉으니 이제 정말 백두산으로 떠나는 실감이 난다.
10:00 정각에 이룩하여 비행기는 서해안을 돌더니 구름 속으로 상승을 하기 시작 얼마나 지났을까, 기장의 안내 멘트가 나온다. 고도 8천 항속 560 키로. 밖을 보아도 온천지가 하얀색들 뿐이다.
신문을 뒤척이며 얼마나 지났을까 기내식이 배달 되어 맥주와 같이 기내식으로 아침을 때우고 커피 한잔으로 여유를 찾아본다.
잠시 졸았나, 기내 방송에 이제 곧 목단강 공항에 도착 한다고 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 멀리 중국의 산하가 시야에 들어오고 목단시내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드디어 비행기가 공항 활주로를 미끄러지더니 안착하였고 우리 일행은 12:50 분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빠져 나오니 이곳 날씨도 덥다. 후덥지근한 더위를 느끼며 여행사 버스에 올라 시내 주점인 식당으로 향했다. 흑룡강성은 3천만 인구중 31 만 조선족이 거주 한다고 한다.
14:00 식사를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올라 약 5 시간 걸리는 연길로 향했다. 주변은 허허벌판 옥수수밭과 콩밭 우리와 비슷한 농촌 풍경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곳이 옥수수가 중국에서 제일 많이 생산되는 옥수수 주산지라고 한다.
16:00 드디어 길림성 경계에 도착하여 우리는 휴계소가 없는 경계지점에서 자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아야 했다. 남자들은 괜찮은데 여자들은 꽤나 불편했으리라 생각 ㅎㅎ 깊옆에서 대충 볼일들을 보고 경계기념 촬영을 하였다. 길 바로 옆에 멧돼지가 차에 치여 죽은 것을 그대로 방치하여 버려져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게 왠 횡재냐고 얼릉 가져 갈 것인데 이곳에는 흔하다보니 그냥 버려져 있었다. 에구 산돼지 쓸개가 얼마나 좋은디. ㅎㅎㅎ
연변에는 약 200 만 인구중 조선족이 120 만 정도 거주 한다고 한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들~ 소를 몰고 지개를 지고 귀로의 농부들 모습이 우리가 어릴적에 영월 들녁에서 보던 그런 풍경들이 연출되고 있어서 정겨워 보였다. 드디어 도문을 지나고 18:20분 연변에 도착 버스로 달려온 긴 여행 피로를 발마사지로 풀고 저녁식사 장소인 리경호텔로 향하였다.
모두들 배가 고프고 허기가 진듯 음식이 나오자 마자 번개같이 먹어 치운다. 밥이 몇 사발 더 추가 되고 나서야 먹는 속도가 조금 둔화되는 듯하였다 북한 들쭉주가 나오고 한잔씩 들며 ‘위하여’를 테이블 마다 외쳐 되며 취기가 오르는 모습들이다. 북한여성공연단의 공연이 시작되고 박수를 치고 흥얼거리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 간다. 전 경기지역 하 회장이 무대로 올라가 공연팀에게 팁을 주고 나니 무대 여성들이 내려와 손을 잡고 같이 춤을 추자고하여 친구들이 하나 둘 어울려 춤을추며 중국의 첫날밤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밤 10 시가 다되어서야 숙소인 신포원 주점가 호텔로 돌아왔고 방 배정이 끝나고 피곤함에서 인지 나는 이내 잠에 떨어져 버렸다.
이튼날 새벽 잠에서 깨어나 창밖을 보니 후드득거리고 빗방울 소리가 들려 온다 에고~ 하고 아쉬움의 한숨 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어쩌랴 운에 맡겨야지. 위성방송으로 뉴스를 보니 멕시코 만에 허리케인이 지나가며 2 만명의 실종자를 내고 난리였다.
서둘러 세면 후 식당으로 내려가 조당숙과 함께 아침식사를 끝내고 여자 친구들이 가지고 내려온 커피로 마감을 한 뒤 08:00 호텔을 출발 장도에 올랐다. 4시간 30분 걸리는 용정을 거쳐 이도백하를 지나 백두산으로 가기 위하여서다.
천지를 넘어 흘러 내려온 강물이 혜란강이 되어 연길시내를 가로질러 흐른다. 창밖으로는 우리나라에서 70년대나 사용하던 버스들이 시내버스가 되어 질주를 하고 인력거와 삼륜차들이 그 나름대로 바쁘게 움직이며 달리고 있다. 연길시내는 소비도시로서 술장사가 제일 잘된다고 한다. 이곳에는 카페에서도 맥주와 술을 마실 수 있다니 과연 술 소비 도시인 것 같다.
안개비속 창밖으로 저 멀리 일송정이 아스라이 스쳐 지나간다.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도 이 넓은 만주벌판을 되찾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목숨을 버렸던가. 이곳은 95% 가 조선족이라고 하니 알만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장백산 휴게소에 도착 잠시 휴식을 취하며 상점을 둘러보니 맨 산삼, 약초, 사슴뿔, 곰쓸개, 버섯 등 이곳에서 생산되는 보신약초, 동물은 다 있었다. 정말 한국사람들이 보신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광버스들이 들어서고 미쳐 빠져나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10:00 출발하여 11:00 조그마한 삼도촌 마을을 지나고, 송화강을 지나고.이곳은 버스가 경유가 아닌 휘발유를 넣는다. 120 리터에 750원 (한화 약15 만원) 참 싸다. ㅎㅎㅎ 바로 옆 강원도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상추가 정말 싱싱하고 연하고 좋았다. 다시 출발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장백산 입구에 도착하여 기념 촬영을 하고 이곳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15분을 올라가 다시 산으로 올라가는 6인승 짚차로 갈아 타야 했다.
대후달린 짚차에 분승하여 오르는 비탈길 굽이 굽이 정말 여친들은 오줌 찌렸을지도 모르겠다. 운전사가 얼마나 난폭한지 끼~익 거리는 타이어와 브레이크 소리를 들으며 정신없이 오르다 보니 어느새 안개 속 정상에 도착 하였다. 사실 몇 년 전만 하여도 장백폭포쪽 등산로를 이용 백두산에 등반할 수 있었는데 중국정부가 돈에 눈이 멀어 그렇게 오르면 시간도 마니 걸리고 사람도 많이 못 오르니까 이제는 아예 등산로를 위험하다고 패쇠를 하여 놓고 모든 관광객을 짚차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예전에 9시간씩 걸리던 길을 45분만에 오르도록 하여 놓은 것이다. 아마 모르긴 하여도 사고도 많이 발생할 것으로 보였다. 완전히 카레이스 하는 기분이었으니까~.
이 얼마나 기다렸다, 오른 백두산인데 안개 속에 아무것도 보이질 아니하는데 우짜란 말이냐! 내가 89년 9월23일 처음 올랐을 때도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바람처럼 안개가 사라지더니 청명하게 드러난 백두의 천지를 한 20여분간 보고 넋이나가 있을때 갑자기 구름안개가 몰려 오더니 덮어 버렸고 그 이후 한 시간여를 기다려도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기에 하산길이 멀어 아쉬움을 안고 내려 왔는데 그 후에 93년에도 한번 올랐는데 그때도 오늘과 같은 현상이였다.
안개속에서 빗방울마져 떨어지는 백두에서 그래도 기다림으로 바람을 피하며 기념 촬영을하고 구름이 걷히기를 마음으로 빌어보면서 정상을 향하여 도보로 약 30 분 걸어 올랐다.
정상에 올라도 천지의 안개는 아니 걷히고 우리는 아쉬움으로 정상2700미터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영월최창배 회장이 가져온 정상주를 나누어 축배를 들었다 기념 촬영때 이곳이 중국 땅이기에 한글로 된 프랑카드를 걸지 못하게 하고 있어서 나이어린 관리인에게 친구들이 담배를 주고, 기념컵을 건내주며 아양을 떨고서야 잠시 프랑카드를 걸수 있었다.
이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영산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이지경까지 되었는지 가슴이 아파왔다.
그래도 우리 대 식구가 모두 정상에 서서 이렇게 우정을 함께할 수 있다는데 위안을 삼고 다음 일정을 위하여 하산 하여야만 했다. 얼마쯤 내려 왔을까 정상에서 카메라 맨들이 환호성을 지르기에 천지가 보이나 하고 다시 뛰어 올라 가 보았지만 조금 구름이 걷히다가 말고 다시 안개 속 미궁의 천지로 변해 버렸다. 천지에 물은 못 마셨어도 정상에서 약 30 미터 지점에 샘물이 솟아 흘러 내리고 있기에 빈 생수병에 한병 가득 담아서 주차장까지 내려와 짚차로 하산을 하였다.
하산 후 장백폭포를 가서 폭포 구경 및 단체 사진을 찍는데 공원입구에서 산삼장사를 만나 홍일이 친구가 흥정을 하기에 중국상인들 실정을 그래도 조금은 알기에 내가 나서서 흥정을 하였다.
처음에는 20~60만원 달라던 산삼이 마지막까지 가서 1뿌리당 2 만원에 낙찰을 보았다. 그래서 몇뿌리 사고 또다시 다른 친구들이 와서 장뢰삼은 10뿌리에 1만원씩 몇 친구가 사서 씻어 그 자리에서 먹었다. 덕분에 나도 다섯뿌리 얻어먹고 약효를 떠나 그냥 여행에 맛으로 기억하면서 또 유황탕에서 나오는 계란도 사서 나누어 먹었다. 여기 계란은 노른자위부터 익어서 흰자는 조금 덜 익은 반숙상태였다.
그런 사이 먼저 내려온 친구들은 장백산 온천탕에 들어가고, 급기가 요금과 시간 관계로 나머지 친구들은 온천도 못하고 버스에 올라야 했다. 사실 옛날에는 온천이 노천탕으로 1500원 하였는데 지금은 25000 원이라고 하니 비싸긴 하였다.
그렇게 백두산을 내려와 6시가 다되어서 숙소로 향하였다.
백두산은 2242종의 동물과 2196종의 식물이 살며 약 300 여종의 약초가 서식하는 명산으로 1980년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고 하며 천지는 최고수심이 373 미터라고 하니 세계적 명산임에는 틀림없다.
출발을 하며, 천지는 못 보았어도 저녁식사를 맛나게 하여 보자고 하여 소를 한마리 잡기로 가이드에게 이야기하여 식당에 도착하여 소고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영 우리가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연한소를 잡는다고 하여놓고 도저히 질겨서 못 먹을 지경이었다. 친구들도 모두 고기 한조각 뜯어 보더니 그냥놓고 밥만 배불리 먹었다 . 그렇다 중국 현지 가이드 말만 믿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기억을 되새기면서 한잔 술에 하루에 피로를 씻어내고 천지를 못 본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07:00 기상 하라는 후론트 안내 모닝콜 소리와 함께 식사를 끝내고 08:00 용정으로 출발 지나는 길에 벌을 키우는 농가가 하는 토종꿀과 피나무 꿀 로얄제리를 맛 보았는데 피나무꿀은 향도 진하고 정말 맛있어 이쪽 저쪽 오가며 몇번을 먹어 보았다. 우리 친구 벌박사인 평국이가 맛을 보고 토종꿀도 진짜라고 이야기하여 주었다. 지나는 길에 김좌진 장군의 고향 장군이 만주벌을 호령하고 다니던 장백산 스키장을 지나고, 이어서 일송정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11:00 경 용정시내에 있는 용정에 우리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대성 중학교를 방문 하였다.
입구 교정에 커다란 시비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라는 서시를 보며 시감에 젖어 보았다. 소영이 친구가 제안하여 가져온 시집 몇 권을 함께 관리자에게 전달을 하고 이내 2층에 우리 민족의 이곳에서의 역사와 삶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으로 향하였다. 우리 조선족이 1880년대에 이곳에 이주하여 이곳 만주벌판을 개척하며 살아온 역사를 보며, 1905년 일본과의 을사조약을 반대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이곳 만주로 망명을 하여, 이곳 조선족에게 항일운동을 가르치고 민족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민족학교를 개설하기 시작하는 데서 이곳의 항일투쟁 역사는 시작 되었다라는 역사관의 설명을 보면서 코끝이 찡해옴을 느꼈다.
리상설, 안중근, 윤동주, 김좌진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에서 이곳으로 도피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전개한 봉오동 청산리 전투 등 항일 운동사를 해설사의 설명과 사진을 보면서 선조들의 수많은 희생과 얼이 있었기에 이나라 이땅에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잘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잠겨 보았다.
마지막 교정을 나서기 전 방명록에 기록을 하면서 우리 친구들 모두가 이곳 대성중학교의 보존과 운영 발전을 위하여 가져온 경비에서 조금씩이라도 기부금을 내어주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래도 우리 동창들 모두가 아직 민족정신이 살아서 있구나 하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12:36분 용정시내 용정금수산 주점가에서 점심식사를 끝내고 시내에 있는 연변대학교 부설 반달곰 사육장을 방문 3천여 마리의 곰 사육 현장과 웅담제조, 판매 공정을 둘러 보고 시내 연변 물류상가를 둘러보며 쇼핑을 하였다. 친구들이 특히 여자 친구들은 참깨를 많이 사고 보이차 등을 구입 하였다.
15:30분 연변을 출발 16:30 도문에 도착하여 두만강 유람에 나서 유람선을 타고 두만강을 돌면서 바로 코앞에 보이는 북한군 병사의 모습도 보면서 한민족인데 말이 없는 그들의 총부리를 보고 왠지 섬찍하고, 소름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을씨년스러운 북한 땅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참, 어제 저녁때부터 말썽이던 남자 가이드를 보내고 새로이 온 여자가이드는 조선족이지만 상냥하고 또 가이드 생활을 얼마 하지 아니하여 때가 묻지 아니하여 보였는데 여자 가이드 두명이 도문 나루터에서 북한산 막걸리와 명태를 사가지고 우리에게 대접하여 시원한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19:15분 강포동 식당에 도착 하였는데 오늘 저녁은 룸 메이트였던 김영길이가 친구들을 위하여 저녁을 내겠다고 하여 소고기 주물럭, 삼겹살, 양념 돌솥밥, 맥주, 중국술 등으로 거기에 한국식 반찬등으로 푸짐하게 먹었다. 우리 테이블은 웅담을 사고 함께 얻어온 웅담주를 나누어 마시며 취하도록 마셨다. 사실 영길이 친구 이곳에서 밤마다 술이 취해 늦게 들어 왔고 아침까지 술이 안깨어 취중 여행을 하였는데 이곳 대성중학을 방문 영길이 할머니가 독립운동 하시던 사진을 보고 애국심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무언가 베풀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박회장에게 이야기하여 저녁을 내게 되었기에 친구들을 위하는 그 마음씨에 고마움을 전한다.
23:45 분 경상강 주점가 숙소에 짐을 풀고 우리 일행은 그리멀지 아니한 야시장으로 향하였다.
처음 도착하니 손님도 별로 없었기에 제일 넓은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꼬치 종류로 이것 저것 주문하여 중국소주와 맥주를 함께 한잔 두잔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취기가 다시 오르고 나니 급기야는 야시장 연극이 시작되었고 경숙이가 주연이되어서 신랑을 번갈아 가면서 예술을 했고 총각 가이드를 연하 애인삼아 즉석 결혼식에다가 정말 배꼽이 빠지도록 웃으며 술잔을 비우며 동창들의 단체여행 마지막 밤을 즐기었다.
학교 다닐때 그 곱상하던 송사금이 살아있는번데기를 생으로 먹지를 아니하나 경숙이가 하객들로 부터 즉석 축의금을 4만원 걷어서 자기돈 6 만원 보태서 연하의 하룻밤 신랑이 가이드 미스타조에게 팁을 주는 후덕함 이 광란의 쑈를 보기 위하여 주면 야시장 손님들이 모두 우리에게 시선이 집중 되었고 포장마차 주인 내외는 입이 바소쿠리 만큼 벌어져 이것 저것 안주 내놓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집의 한달 매상 금액을 우리가 거의 하루 저녁에 팔아 주었으니까. 그렇게 새벽 두시가 넘어서야 광란은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하루의 여정을 마감하고 꿈나라로 떠나갔다.
새벽 노크를 하여 잠에서 깨어보니 영길이가 06:00 인데 담배를 피우려고 찾아왔다. 잠에서 깬 나는 샤워를 하고 식사 시간을 기다리는데 역시 중국 사람들은 만만디였다 6시 반이 넘어서야 식당문을 열어서 죽과 스프등으로 아침 식사를 끝내고 주변 시내 구경을 나섰다. 약령시장, 전자상가, 옷가게 등을 둘러 보면서 아침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서 09:30 분 팔녀강 공원에서 구경을 하고 그래도 비행기 시간이 남아서 소련상가를 쇼핑 하였다. 그곳에서 선물 몇 가지를 구입하는데 역시 소련상점도 디스카운트를 많이 하고 있었고 원서 친구의 덕분에 많은 친구들이 저렴하게 선물을 구입 하였다.
드디어 목단강 공항에 도착 입국 수속을 받던 중 2층에서 경숙이 친구가 그만 촬영을 하다가 실수로 후래시가 터지는 바람에 공안원이 화를 내고 무슨 조치라도 할 듯 눈이 휘둥그레 졌는데 경숙이와 가이드가 사과를 하고 사진을 삭제하고서 수속을 모두 마쳤다.
출국 수속후 기내에 올라 자리에 앉아 서서히 비행기가 미끄러져 가면서 중공군 미그기가 보이는 묵단강 군사공항을 kal 824 편이 이룩하면서 여정이 끝나고 있었다. 어느 사이 비행기는 고도 11300 미터를 비행하고 있었다.
13억의 거대 중국은 이제 긴 잠에서 깨어나 한마리의 용이 되어 꿈틀 거리고 있다. 사회주의 공산국가에서 자본주의 맛, 즉 쩐맛을 보더니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서슴없이 하는 나라이다. 그러기에 발 빠르게 돈이 굴러 들어오니 세계의 10대 명산 백두산(장백산)을 관광상품으로 홍보하고 예전에 20시간 넘게 걸리던 길을 하루 만에 갈 수 있도록 산 밑까지 고속도로를 내고, 또 군사 공항까지 개방하여 관광객을 실어 나르고 있다. 만만디 옛말이다 가이드가 이야기 하듯이 그들은 서서히 세계를 잠식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장백산을 예전에는 우리 민족이 성장으로 있던 길림성에서 관리하고 수입금을 성예산으로 사용하였으나 그마져도 중국 중앙정부에서 가로채어서 관광 수입금 모두를 가져간다고 한다. 소주민족이 사는 길림성이 부유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여 미리 뺏어간 것이다. 중국이 제일 겁내는 것은 56개나 되는 소수민족의 분열이다. 그래서 이제는 정책적으로 아예 우리 민족의 역사 까지도 바꾸고 있으며 민족의 역사 유물을 없애고 갈아 치우고 있다. 정말 역사를 왜곡하려는 그들의 속내 무엇을 의미 하는지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번 백두산 여행 사실 처음에는 나는 안 가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백두산을 몇 번 다녀왔었기에. 그러나 날짜가 지나면서 동창 친구들과의 단체 여행이라 지난번 망년회때 경주 수학여행 리바이벌처럼 남들하고 가는 것보다 추억이 있는 여행이라고 생각되어 가기로 결심하였는데 아뿔싸 내가 운영하는 카페의 운영자들께서 벙개를 하자고 하여 7월 3 일 영월에서 하기로 하여 놓아 또 겹치기다.
에라 모르겠다 벙개를 다시 10일로 연기 하자고 공지를 보내고서 무작정 짐을 챙겨 떠난 백두산 기행 정말 재미 있었고, 우리들의 머리는 흰머리가 띠엄 띠엄 섞여 있는 중년이 되었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청춘으로 돌아가 의미있고, 살면서 기억속에 영원히 추억으로 남을 이번 여행이었다고 생각 하면서 이 기행문을 맺고져 한다.
여행동안 함께하여준 친구들 고마웠고 이번기행을 기획 추진한 집행부의 노고에 감사한다. 또 친구들과 함께하지는 못하였지만 잘 다녀오라고 거금 300여만원의 찬조금을 보내준 친구들에게도 감사 하다는 인사를 전한다. 이런 친구들이 있기에 우리 친구들은 사는날까지 행복할것이다.
영원한 우리 214 친구들이여 화이 팅 !!!
2010. 7. 13.
(仙巖 라춘식 214 친구들과 백두산 여행을 마치고 쓰다)
첫댓글 좋은곳에 다녀오신 덕분에 구경잘 했읍니다 감사합니다
네에~~ 감사 저희 동창들이 36년만에 만나 함께 백두산 여행을 다녀 왔답니다~~~~~^^*
닉네임이 틀려서.....백두산까지 다녀 오시고 즐겁게 지내십니다...안녕하시지요..
네에 잘 지냅니다 횡성도 덥지예
아 영산 백두여 영원하리라
네에 그래야 겠는데 대 폭발이 다가 왔다고 하네요 그래서 한번더 보랴고 다녀 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