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역사
6월 10일
2003년 : ‘전설의 섬`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 완공
소설 속에 등장하던 ‘전설의 섬’ 이어도(離於島)가 해양환경•수산물 연구와 태풍 예방을 위한 해양 과학기지로 바뀌었다. 해양수산부 허성관 장관은 2003년 6월 10일 “남제주군 마라도에서 149km 남서쪽에 위치한 이어도에 지난 95년부터 212억원을 들여 종합 해양과학기지를 완공했다”고 발표했다.
『옛날 제주도의 한 마을에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남편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이 탄 배는 풍랑을 만나 낯선 무인도에 도착했던 것이었다.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는 어느 날 늙은 시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님, 배 한 척만 지어주시겠습니까?”
“뭘 하려고 그러니?”
“남편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었다. 어느 화창한 날, 아내와 시아버지는 배를 타고 남편이 살고 있는 이어도로 향했다.
아내는 제주 해녀의 민요 이어도 타령을 부르며 힘겹게 노를 저었다. 멀고도 험난한 바닷길을 헤쳐 이어도에 당도해보니, 남편은 거기서 얻은 새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아버지와 조강지처의 설득으로 남편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온가족이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하는데, 갑자기 풍파가 몰아 닥쳤다. 결국 배는 침몰되고, 일가족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후 고향 사람들은 그 가족을 불쌍하게 여겨 제사를 지내주었다.』
이것이 이어도에 관한 제주도에서 전해져 내려온 전설이다. 이어도는 제주도민의 전설에 나오는 환상의 섬, 피안의 섬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섬을 보면 돌아올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먼 옛날에 이곳에 와서 조업을 하다 파고가 10m 이상이 되면 이 섬이 보였고, 당시 어선으로는 그런 해상 상황에서 무사히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도는 1900년 영국 상선인 소코트라(Socotra)호가 처음 발견하여 그 선박의 이름을 따서 국제적으로는 ‘소코트라 암초(Socotra Rock)’라 불리었다. 그리고 1910년 영국 해군 측량선 워터위치(Water Witch)호에 의해 수심 5.4미터의 암초로 알려졌다.
1938년 일본이 해저전선 중계시설과 등대시설을 설치할 목적으로 직경 15미터, 수면 위로 35미터에 달하는 콘크리트 인공 구조물을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이어도의 실재론이 처음 대두된 것은 1951년으로, 국토규명사업을 벌이던 한국산악회와 해군이 공동으로 이어도 탐사에 나서 높은 파도 속에서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이어도 정봉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이어도’ 라고 새긴 동판 표지를 수면 아래 암초에 가라앉히고 돌아왔다. 그 후, 1984년 제주대학교-KBS 파랑도 학술탐사 팀이 암초의 소재를 다시 확인한 바 있으며, 1986년에는 수로국(현 국립해양조사원) 조사선에 의해 암초의 수심이 4.6미터로 측량되었다. 이어도 최초의 구조물은 1987년 해운항만청 에서 설치한 이어도 등부표(선박항해에 위험한 곳임을 알리는 무인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항로표지 부표)로써 그 당시 이 사실을 국제적으로 공표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친 태풍 중 약 40%가 이 해역(반경 약 200 km)을 통과하였고, 이 해역을 통과한 태풍은 대략 10시간 후에 남해안에 상륙한다. 그리고 이 주변 해역은 북상하는 쿠로시오 해류, 남하하는 황해 냉수 및 중국 대륙의 연안수가 접촉하는 해역이다. 이처럼 이곳은 계절에 따른 각 수괴에 의해 해양환경 변화가 심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황해의 해수순환, 남해의 해수유동에 관한 메커니즘을 파악하기 위해 해양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역이다.
이처럼 어장 예보와 해양 관측, 기상 예보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1995년부터 현장 해양조사에 들어갔고, 2003년 6월 이어도 정봉에서 남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이어도 종합 해양 과학 기지(동경 125도 10분 56.81초, 북위 32도 07분 22.63초)를 설치하였다.
이어도 정상에서 남쪽으로 700m 떨어진 수심 41m 지점의 암초 위에 설치된 해양기지의 높이는 해저 지반에 박은 60m의 기둥까지 포함해서 총 136m에 이른다. 수중 40m, 수상 36m, 총중량 3,400t의 구조물이 우뚝 선 것이다. 수상 규모로 따지면 바다 위에 떠 있는 12층짜리 아파트인 셈이다, 기지의 최상부에는 가로 21m, 세로 26m에 이르는 헬기 착륙장이 들어서 있다.
해양과학기지는 400평 규모의 2층 Jacket형 구조물로 관측실, 실험실, 회의실, 헬기 이•착륙장, 등대시설, 선박 계류시설, 통신 및 관측시설 등과 8인이 15일간 임시 거주할 수 있는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는 최첨단 해양, 기상, 환경 관측체계를 갖추고 해양 및 기상예보, 어장예보, 지구 환경 문제 및 해상 교통 안전, 연안 재해 방지와 기후 변화 예측에 필요한 자료를 실시간으로 수집, 제공할 수 있도록 순수 우리의 기술로 건설된 최첨단 종합 해양과학기지다.
무인으로 자동 운영되는 이어도 해양과학기지에서는 매초마다 풍향•풍속•기압 등 기상 자료와 파고, 수온 등 해상 상태를 관측하고 무궁화 위성을 이용하여 한국해양연구원의 컴퓨터로 관측 정보를 제공하며, 한국해양연구원에서는 데이터 검증을 거쳐 기상청을 비롯하여 관련기관에 실시간으로 자료를 제공한다.
1987년 : 6ㆍ10 민주화항쟁
1987년은 이 땅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힘을 확인시켜 준 것은 한 대학생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그 해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취조를 받던 서울대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것이다.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경찰은 발표하여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2월 7일 ‘국민추도위’가 추도일로 정한 날이다. 이틀 전부터 경찰은 전국적으로 검문검색을 했고 민주인사들의 연행과 가택연금을 실시했으며 당일에는 추도회 장소를 비롯한 인근 도로까지 통제하여 추도대회를 무산시키려고 했다. 원천봉쇄를 뚫고 전국에서 6만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2.7 추도대회에 참가하여 ‘고문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쳤다.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이 출범한 뒤 최대 규모의 반정권 투쟁이었고, ‘국민추도위’는 2월9일부터 3월3일까지 박종철 열사의 49재 동안 ‘고문 추방 및 민주화를 위한 국민 결의 기간’으로 선포하였다.
부산극장 앞에서 시작된 추도식은 달려온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자 추도객들이 시위대로 돌변했다. 경찰에 쫓기고 최루탄에 쫓기면서 농협공판장으로 국제시장으로 흩어졌다 모이기를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시위대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충무로에서 시청으로 이어진 간선도로는 만여 명의 시민으로 가득 메워졌다. 보도지침으로 정권의 앵무새 노릇을 일삼던 언론은 이 날 모인 군중이 고작 700명이라고 보도했다. 부산의 2.7시위는 전두환 폭력정권이 몰락하고 있음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1987년 12월 13대 대선을 앞두고 시작된 개헌논의의 핵심은 단연 대통령 직선제의 부활이었다. 1971년 이후 유신헌법으로 대통령 선거권을 빼앗긴 채 지내왔던 국민들과 야권은 한 목소리로 대통령 직접선거제를 주장했다. 3월3일의 평화대행진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은 자신감을 얻었는지 4월13일 돌연 호헌 조치를 발표하고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시켰다.
이후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끓는 물에 기름을 갖다 부은 꼴이 되어 전국적인 호헌철폐투쟁과 정권퇴진운동이 활활 타오르게 된다.
군사정권의 억압 속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는 분위기가 높아졌지만,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총재, 이철승 등은 당시 정부의 내각제 개헌에 대해 지지의사를 밝혔다. 이에 반발한 김영삼, 김대중 등은 70여명의 의원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 창당을 추진하였다.
이에 전두환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1987년 4월 20일부터 4월 24일까지, 통일민주당의 20여 개 지구당에 폭력배들이 난입하여 기물을 부수고 당원들을 폭행하는 등 난동을 부렸으며, 이로 인해서 창당대회는 인근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약식으로 치러졌다. 통일민주당 측은 처음부터 이것은 정부가 개입한 비열한 정치공작이라 규탄하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였으나, 수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5월 18일에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은폐, 축소,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폭로로 정권의 비도덕성과 폭력성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는 호헌 반대 열기와 상승작용을 일으켜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격류를 만들고 있었다. 지역의 열기를 모아 5월27일에 서울에서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었고 6월10일에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할 것을 알리면서 6월 항쟁을 준비했다.
1987년 6월 9일 이한열을 비롯한 연세대학교 학생 2천 여 명은 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6ㆍ10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연세대 궐기대회를 열었다. 오후 5시, 교내 궐기대회를 마치고 교문 밖으로 행진하려던 학생들의 행렬 맨 앞에는 이한열을 비롯한 학생들이 있었다. 무장 경찰들은 학생들의 행렬을 막고 최루탄을 마구 쏘아댔다.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최루탄 연기가 가득했다. 그때 한 학생이 쓰러졌다. 바로 이한열이었다.
쓰러진 이한열은 연세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이내 정신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정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6월 항쟁은 6.10대회부터 6.29선언까지 스무 날을 넘기는 대장정이었다. 전국적으로 5백만 명 이상이 참가하여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87년 6월 10일 오전 10시. 서울 잠실 체육관에서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날 간선제 선거를 통해 5공화국 정권을 승계할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 대표가 선출됐다. 같은 시각 대회장 밖. 전국 22개 도시에서 ‘박종철군 고문살인 및 호헌철폐 규탄대회’가 열렸다. 국민들은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시위 진압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난사하고 사복 체포조를 동원하여 10일 하루 동안 3831명이 검거되었다. 여기저기서 밀린 시위대는 6월 10일 저녁 명동성당에 집결했다. 국민운동본부는 6월 항쟁 종료를 선언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남아서 계속 투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국민운동본부 간부가 체포되었지만 시위의 열기는 전혀 식지 않았다.
명동성당 집회는 종료되었지만 전국적으로 시위는 계속되었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렸다. 경찰의 최루탄 난사로 인한 인명피해에 항의하고 나아가 정권의 폭력적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16개 도시 247개소에서 150만 명이 참여한 최루탄추방대회는 참여 시민이 더 늘었고 지방으로 시위가 크게 확산되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국민운동본부는 국민평화대행진을 26일 개최하기로 하였다.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는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00여 만 명이 참가하였다. 연일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경찰은 전 국민적 시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정당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는 전두환에게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할 것을 건의하여 승락을 받아냈다. 이후 노태우는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사면, 감형 등을 비롯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고 직선제 형태의 대통령 선거를 골자로 하는 내용의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6•29 선언)을 발표한다. 이것으로 제5공화국의 정치적 위기는 극복된다. 1987년 7월 전두환은 노태우의 6•29 선언을 전격 수용하였다.
1-3. 이어도
4. 1987년 1월23일, 서울 동부지구 8개 대학 학생 700여명이 고려대에서 박종철군 추모제를 마치고 교문을 나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5. 1987년 1월 23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현장 검증이 비공개로 실시된 서울 갈월동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주변에 바리케이드와 정사복 경찰관 1,000여명이 배치돼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6.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추도하기 위한 2.7집회에 경찰 저지로 참석 못한 박종철 열사의 어머니 정차순씨와 누나 은숙씨가 부산 괴정동 사리암에서 “종철아 이 소리를 듣고 깨어나거라”고 울부짖으며 타종하고 있다.
7. 1987년 5월 23일 행진에 나섰던 스님들께서 전투경찰에 저지 당하자 물러서지 않고 앉아 합장하고 계시다
8. 1987년 5월 26일 이화여대 시위
9. 6월10일. 시위대열을 향해 조준된 SY-44 최루탄발사
10. 6월 10일 명동성당에 집결한 시위대
11. 6월 13일 시위현장
12. 6월 13일 명동성당 수녀들이 시위대를 격려하고 있다.
13. 6월 18일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시위대에 쫓겨 분수대에 빠진 정경들을 시민들이 도와주고 있다.
14. 6월 26일 서울역 주변
15. 6월 항쟁 당시 독일 본에서도 교민들과 유학생들이 그 뜨거운 열기에 동참했다.
첫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