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언제부터 불교가 시작되었을까?
제주는 우리나라에서 인구비례 불교신자가 가장 많은 곳이다.
근대역사에서 제주도는 천주교와 기독교는 어두운 흑역사로 민중들에게 외면받은 곳이다.
천주교의 종교권력에 대항하여 이재수의 민중봉기가 1900년초에 일어났다.
4.3때 제주양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주역이 북에서 내려온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이었다.
제주는 절오백.당오백으로 불렸다.도내에 절이 오백이고 신당과 본향당이 오백이란 뜻이다.제주불교는 제주무속과 어우러져 신불합일의 제주만의 불교전통을 이어 민중들의 애환과 함께하였다.
과거 탐라국으로 불린 제주에 불교는 언제 전래되었을까?
한라산 영실입구에 존자암이 있다.제주도 기념물 제43호이다.
다음은 존자암 관련 기록이다.
1.고려대장경 제30권 법주기法注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부처님의 16존자 가운데 6번째 발타라존자가 자기 권속 9백 아라한과 더불어 탐몰라주耽沒羅洲에 나누어 살았다."
2.동국여지승람(1481) 佛宇(불우)편
"尊者庵 在漢拏山西嶺其洞有石如僧行道狀諺傳修行洞"--존자암은 한라산 서쪽에 있는데 그 동에는 돌이 있어 스님이 행도하는 모양과 같으므로 전하기를 수행동이라 한다.
3.남명소승(南溟小乘)--1577년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제주목사로 재직중인 부친을 뵙기 위하여 왔다가 제주의 풍물을 적은 기행문이다. '암자에 머물면서 날씨가 개인 틈에 5,6리를 가서 영실을 구경하고 다시 존자암으로 돌아와서 날씨가 쾌청함을 기다려 정상에 올라 구경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존자암은 볼래오름의 중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4.조선불교통사(1918년 이능화 간행) 耽沒羅州尊者道場條(탐몰라주존자도량조) '법주기에 이르기를 16라한이 각각 주처(住處)가 있었는데 여섯째 발타라존자는 범어로는 발타라(跋陀羅), 중국말로는 호현(好賢)인데 이 존자가 9백 아라한과 더불어 탐몰라주에서 나누어 살았다고 하였다. 서로 전하기를 탐몰라주는 곧 탐라를 말한 것으로 지금의 제주이다. 제주 섬 중에 한 좌산(座山)이 있는데 이를 한라라 말하고 산 정상에는 백록담이 있는데 깊이는 밑이 없으니 곧 오랜 옛날의 분화구이다. 대개 장백산 정상에 천지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을 살피건대 제주 존자암은 한라산 서령에 있는데 그 洞에는 승이 행도하는 모양의 돌이 있으므로 속전하기를 수행동이라 운운하였는데 존자암은 발타라존자의 이름에서 온 것이라 함은 그럴 듯하다. 그 오백장군석 역시 5백라한석이 와칭된 것이라 함도 그럴 듯하다. 세상에 전하기를 탐라는 곧 삼성(三聖)이 입적한 땅이라 운운하였는데 옛날 보우대사 및 환성선사(喚醒禪師)가 모두 이 곳에 유배되었는데 역시 모두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미 이성(二聖)은 증험하였다고 하였다.
이와같은 기록으로보면 제주는 한국 불교의 시발지이다. 고려대장경 법주기의 탐몰라주는 탐라 즉 제주이다.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들고 16나한이 세계각처로 나가 불법을 전파했다.그중 6번째 발타라 존자가 인연국토를 찾아 불법을 전한 성지가 한라산 존자암이다.
존자암 뒤산은 부처님이 오셨다 하여 불래악(佛來岳)이라는 오름이 있다.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서기 48년 인도의 불교국가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온 공주 허황옥과 혼인했다는 설화가 있다. 그때 아유타국에서 함께 왔던 장유화상에 의해서 가야불교가 시작된 것이다. 가야 불교가 고구려보다 300여년 앞섰다면 제주 불교는 가야 불교보다 400여년 앞서 남방의 뱃길로 전래됐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은 속일본기(續日本記)의 기록이다.
천평3년(731) 가을 7월 을미에 아악료(雅樂寮) 잡학생원(雜學生員)들을 정하였는데 대당악(大唐樂) 39人, 백제악(百濟樂) 26人, 고구려악(高句麗樂) 8人, 신라악(新羅樂) 4人, 탁라악(度羅樂) 62人, 제현무(諸縣舞) 8人, 쓰구시무(筑舞) 28人이다.
여기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탁라악은 어디 음악일까? 이는 곧 탁라를 말하는 것이고 탁라는그당시 탐라를 지칭한다.황룡사 구층탑도 사층을 탁라국으로 표기하였다.
이 음악은 그당시 일본의국찰 동대사(東大寺)에서 불사(佛事)에 사용하는 음악이다.
일본 동경대학의 기시배 시게오 교수도 탁라(度羅)는 탐라를 말한 것으로 탐라음악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731년 당시에 탐라에 어떠한 불교음악이 있었을까? 이는 발타라존자의 권속들에 의한 불교음악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동국대 목정배교수는 반론을 제기한다. 탐몰라주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적 우주관에서 유래된 상상의 나라이고 실제적인 지명이 아니다. 존자암은 석가모니의 제자 오백라한 중 학덕이 높은 16라한을 모신 자그마한 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주도는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옛 문헌에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존자암지(尊者庵址)에 대한 정비사업을 1992년부터 추진해왔다. 이에 따라 정비사업의 핵심인 존자암지 대웅전과 국성재(國成齋) 등 주요 건물에 대한 복원공사를 2002년 마무리하였다.
이로써 탐라시대의 사찰로 전해지던 한라산 영실 인근의 존자암(尊者庵)이 350여 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것이다.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7호인 존자암 부도는 제주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제주도내 유일의 석종형 사리탑이다.고려후기에 건립되었으며 세존사리탑으로 불린다.
벌교에는 부용산이 있고 낙안읍성이 있다.부용은 연꽃봉우리이다.연꽃이 피어나면 극락에 태어난다.극락을 안락국으로 표현한다.안락을 거꾸로 해서 낙안이 되었다.
한라산을 거꾸로하면 라한산이다.영실은 영산회상 부처님계신 성소라는 뜻이다.영실의 기암괴석은 오백나한이 설법을 듣는 모습이다.
제주 불교는 신화와 역사가 섞여 있어 그속에 담긴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
신라 사람들도 처음에는 불법을 배척하였다.그러나 불법을 받아들인 뒤로는 신라불국토설을 주장하였다.
과거 칠불의 설법터가 모두 신라에 있고 불국토가 바로 이곳이라는 믿음으로 불국사를 건립한다.
옛적 탐라국 사람들도 불법을 받들면서 불경에 나오는 탐물라주를 탐라로 여겼을 것이다.
부처님 열반후에 발타라존자가 9백명의 제자를 데리고 뱃길을 타고 도착한 곳이 한라산이라는 믿음을 가진것이 아닐까?
한라산은 삼원(三院)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원(上院)에 존자암이 있고 중원(中院)에 법정사가 있고 하원(下院)에 법화사가 있다.
사진은 한라산 상원 존자암에 모셔진 부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