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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역대 포수 베스트 5. (사진 왼쪽부터) 박경완, 이만수, 진갑용, 김동수, 김무종 |
1982년 3월 27일 소련은 베트남 캄란만에 대규모의 군사기지를 짓겠다고 발표했고, 일본에선 자국 최초의 고농축우라늄 공장이 세워졌다. 현재의 비극과 미래의 재앙이 잉태되는 사이, 그해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선 프로야구 개막식이 열렸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영원할 것 같던 ‘동토의 왕국’ 소련은 해체했고, ‘원전 강국’을 꿈꿨던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파괴로 고통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 프로야구는 예외다. 시간이 갈수록 경기력은 향상하고, 관중은 넘친다. <스포츠춘추>에선 프로야구 30주년을 맞아 역대 포지션별 베스트 5를 선정했다. 참고사항은 공격력과 수비력, 리그에 미친 영향이다. 프로야구 전문가들과 누리꾼의 의견을 종합했다. 첫 번째 시간은 포수다.
![]() 박경완(사진=SK) |
1. 박경완
통산 2천027경기 출전 ㅣ 타율 2할5푼 ㅣ 홈런 313개 ㅣ 안타 1천476개 ㅣ 볼넷 973개 ㅣ 타점 994개 ㅣ 실책 106개 ㅣ 도루허용 1천152개, 도루저지 722개, 도루저지율 3할8푼5리
현역 최고 포수다. 아니 은퇴 선수를 통틀어서도 최고다. 그에겐 ‘공격형’, ‘수비형’이란 표현은 날아가는 새에게나 던질 일이다. 배트를 쥐든 포수 마스크를 쓰든 공·수 양면에서 뛰어났다.
올 시즌까지 박경완은 개인 통산 홈런 313개를 기록 중이다. 역대 5위에 해당한다. 포수로는 부동의 1위다. ‘홈런’하면 이승엽이지만, ‘홈런 진기록’만 따지면 박경완이다. 2000년 5월 19일 대전 한화전에서 국내 프로 타자로는 처음으로 한 경기 4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 박경완은 4연타석 홈런뿐만 아니라 ‘한 번도 하기 어렵다’는 3연타석 홈런을 3번이나 기록하며 몰아치기 홈런의 진수를 보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박경완의 진가는 포수 마스크를 썼을 때 더 빛났다. KIA 이순철 수석코치는 박경완을 “냉정한 포수”라고 평가한다. “어떤 위기에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이 원하는 공배합으로 타자를 제압하기 때문”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조종규 심판위원장은 국가대표 포수 출신이다. 조 위원장 역시 박경완을 역대 최고 포수로 꼽는다. 이유는 박경완 특유의 공배합에 있다.
“과거 포수들의 공배합은 뷔페였다. 초구를 바깥쪽으로 던지면 2구는 몸쪽, 초구가 속구면 2구는 변화구식이었다. 여러 구종을 골고루 섞고, 다양한 코스로 타자를 제압하는 공배합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박경완은 아니었다. 1구부터 4구까지 죄다 바깥쪽 슬라이더를 요구할 때도 있고, 반대로 공 4개를 연속해 몸쪽 속구로 던질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타자의 성향을 정확히 분석해 집요하리만치 단점을 파고드는 공배합이야말로 박경완의 트레이드 마크다.”
포수를 가장 가까이서 보는 가이 있다. 심판원이다. 최규순 심판원은 2천 경기 출장이 얼마 남지 않은 베테랑이다. 웬만한 일엔 꿈쩍도 하지 않는 그지만, 경기 중 박경완의 행동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박경완이 주전 포수로 출전한 날이었다. 어느 타자에겐 계속 속구, 또 어느 타자에겐 변화구로만 상대했다. 포수가 한쪽 구종이나 코스만 요구하니까 어느 순간 투수가 긴가민가했던 모양이다. 사인을 내고도 투수가 머뭇거리자 박경완이 경기 중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박경완이 투수를 향해 ‘야! 그냥 몸쪽으로 던져!’하지 뭔가. 타자는 물론이려니와 상대 더그아웃에서도 들었을 게 분명했다. 더 놀라운 건 뭔지 아나? 실제로 투수가 몸쪽 공을 던졌고, 결국 타자가 아웃됐다는 것이다. 박경완의 카리스마를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만약 골든글러브가 수비에만 국한해 주어졌다면 박경완은 모든 포지션을 합해 역대 최고 수상자가 됐을 게 분명하다. 어쩌면 박경완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가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를 5개나 거머쥐었다는 것일지 모른다.
현재 박경완은 재활 중이다. 그의 복귀를 비관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지만, SK 박철영 스카우트는 “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박경완은 반드시 그라운드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 박경완은 어떤 부상에도 늘 제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닉네임 신지과 - 박경완이다. 말이 필요없는 최고의 포수, 가장 뛰어난 포수 리드와 300홈런의 폭발력을 가진 타자. 이만수(사진=삼성)
2. 이만수
통산 1천449경기 출전 ㅣ 타율 2할9푼6리 ㅣ 홈런 252개 ㅣ 안타 1천276개 ㅣ 볼넷 554개 ㅣ 타점 861개 ㅣ 실책 61개 ㅣ 도루허용 744개, 도루저지 456개, 도루저지율 3할8푼
이만수가 있고, 프로야구가 있었다. 프로야구 1호 안타와 1호 홈런을 기록하며 야구에 무심했던 일반인에게 야구의 참맛을 제공했다. 여기다 그는 평범한 플레이도 비범하게 연출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가 그라운드에 서면 야구는 스포츠이기보다 엔터테인먼트에 가까웠다. 그만큼 쇼맨십이 탁월했으며 팬 서비스에도 능했다.
무엇보다 그는 역대 프로야구 최고 타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84년 타율, 홈런, 타점왕에 오르며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타격 3관왕을 거머쥐었다. 1997년 은퇴할 때까지 한 시즌 3할 타율과 20홈런 이상을 6번이나 기록했다. 역대 포수 가운덴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이만수 이후 ‘최고 거포 포수’로 불리는 박경완도 한 시즌 20홈런 이상은 4번, 3할 타율은 한 번도 없었다.
이만수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공격일변도의 포수’란 지적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이만수는 현역 시절 ‘투수리드가 좋지 않다’는 평을 들었다. 실제로 이만수가 50경기 이상 포수 마스크를 썼던 1982년부터 1992년까지 11년 동안 삼성의 팀 평균자책이 리그 3위 이상이었던 적은 2번밖에 없었다.
하지만, 팀 에이스였던 김시진은 1983년부터 롯데로 이적하기 전인 1988년까지 6년 연속 10승 이상, 5년 연속 15승 이상을 거뒀으며 3번의 2점대 평균자책을 기록했다. 지금은 넥센 감독인 김시진은 삼성의 팀 평균자책이 높았던 이유를 “이만수가 무능했다기보다 이만수의 공 배합을 잘 이해하고 따라올 만한 투수가 삼성에 많지 않았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김시진은 “속구 사인에 변화구를 잘못 던지는 실수를 범해도 당황하지 않고 공을 받았던 포수가 이만수”라며 포구와 블로킹에서도 이만수에게 후한 점수를 줬다.
지금 같은 전력분석이 없던 건 이만수에겐 악재였을지 모른다. 현재 삼성은 최고의 전력분석팀을 가동하지만, 이만수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엔 포수가 일일이 수첩에 수기로 타자의 특징을 적는 게 전부였다. 이만수는 그러한 노력에도 능했던 포수였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어깨가 약했던 포수’라는 지적은 유효하지 않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데뷔 이후 4년 연속 도루저지율 4할 이상을 기록한 포수는 이만수가 유일하다. 통산 도루저지율도 3할8푼으로 700경기 이상 포수로만 출전한 선수 가운데 3할8푼8리의 LG 조인성과 3할8푼5리의 박경완 다음으로 높다. 이만수의 전성기였던 1980년대는 투수들의 투구습관이 훤히 노출되고, 주자 견제도 능하지 않던 때였다.
닉네임 kscho27445 - 이만수다. 프로야구 원년 멤버로 어마어마한 성적과 뛰어난 쇼맨십으로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 김동수 |
3. 김동수
통산 2천39경기 출전 ㅣ 타율 2할6푼3리 ㅣ 홈런 202개 ㅣ 안타 1천556개 ㅣ 볼넷 661개 ㅣ 타점 871개 ㅣ 실책 107개 ㅣ 도루허용 1천242개, 도루저지 608개, 도루저지율 3할2푼9리
1995년 11월 3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리는 한일 프로야구 슈퍼게임에 양국 야구팬의 관심이 집중됐다. 4년 전 열린 제1회 슈퍼게임에서 한국은 일본에 2승 4패로 열세였다. 마지막 경기까지 일본 올스타가 총출동했다면 1승도 거두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야구계의 중평이었다. 4년 만에 찾아온 2회 대회가 한국으로선 설욕의 기회였다. 하지만, 설욕이 성공하리라 예상하는 야구전문가는 드물었다. 양국 선수들의 능력 차가 컸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포수가 그랬다.
“일본 포수들은 우리 타자들의 심리를 읽기라도 한듯 ‘속구가 오겠지’하면 변화구를 요구했다. 2루 송구는 레이저를 쏘듯 정확했다. 하지만, 우리 포수들은 달랐다. 이상하리 만치 일본 타자들이 노리는 구종과 코스로만 사인을 냈다. 당연히 얻어터질 수밖에. 무엇보다 2루 도루를 거의 막아내지 못했다. 일본 포수들을 따라 가려면 10년 이상이 걸릴 것 같았다.”
제1회 슈퍼게임에 참가했던 모 야구인의 회상이다.
4년이 지났지만, 포수가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1차전 일본 올스타팀의 포수는 야쿠르트 스왈로스 소속의 후루타 아쓰야였다. 완벽한 공배합과 송구 여기다 타력까지 뛰어난 후루타는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의 포수였다.
이에 반해 한국 대표팀 주전포수는 LG 김동수였다. 그해 성적만 본다면 김동수가 후루타보다는 조금 아래였다. 그해 김동수는 타율 2할6푼, 10홈런, 35타점으로 이름값에 비해 다소 평범한 타격성적을 냈다. 전해 4할3리를 자랑했던 도루저지율도 3할3리로 1할이나 떨어진 상태였다. 이윽고 뚜껑을 열자.
결과는 김동수의 완승이었다. 김동수는 1차전에서 한국이 기록한 5안타 가운데 2안타를 뽑아냈다. 8회에는 2루 도루를 시도하던 고쿠보 히로키를 정확한 송구로 잡았다. 9회까지 한국 마운드가 일본 타선을 0점으로 묶은 것도 김동수의 뛰어난 투수리드 덕분이었다. 반면 후루타는 2타수 무안타에 그치며 체면을 구겼다.
김동수는 이후 경기에서도 주전포수를 맡으며 한국 올스타팀 마운드를 이끌었다. 한국이 일본을 상대로 2승 2무 2패로 대등한 성적을 낸 이면엔 김동수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현역시절 김동수는 굵직한 장점보다는 단점이 적은 포수로 평가됐다. 공배합, 투수리드, 블로킹, 송구에서 평균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 타자로서도 힘과 정교함을 갖췄다. 투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능력은 굵직한 장점이었다.
LG 김정민 배터리 코치는 오랫동안 김동수와 함께 선수생활을 했다. 김 코치는 선배 김동수를 “어떤 위기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포수”로 기억했다.
“경기가 포수가 의도한 데로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투수가 당황하거나 실수를 범할 때다. 김동수 선배는 설령 투수가 흔들리고, 실수해도 절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더 차분하게 투수의 공을 받았고, 표정에도 변화를 주지 않았다. 그렇게 포수가 한결같으면 투수는 자신감을 갖게 마련이다. 자기보다 투수의 상태와 감정을 우선 생각했던 이가 김 선배다.”
‘투·포수의 신뢰’를 가장 중히 여기는 김 코치는 “신뢰는 야구장 안에서 형성되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포수가 투수와 야수들로부터 신뢰를 얻으려면 야구장 밖에서의 생활도 항상 조심하고, 모범이 돼야 한다. 그래야 신뢰가 생기고, 믿음이 강해진다. 김 선배는 오늘 경기가 끝나면 내일 경기를 준비했다. 주변에서 ‘야구선수도 사회생활이 필요하다’고 조언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야구준비에만 몰두했다. 그러한 철저한 자기관리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이었고, 선수들로부터 신뢰 받는 이유였다.”
골든글러브 7회 수상에 빛나는 김동수는 현재 넥센 배터리 코치다. 2009시즌 종료와 함께 친정팀 LG에서 러브콜이 있었지만, 자신이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준 김시진 감독과의 의리를 고려해 넥센에 잔류했다.
1990년대 포스트 시즌 진출은 일도 아니었던 LG는 2002년 이후 가을무대를 전혀 밟지 못한 평범한 팀으로 전락했다.
닉네임 센스민트 - 김동수다. LG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으며, 5개팀과 인연을 맺는 동안 뛰어난 투수들과 호흡을 맞췄다. 4번의 한국시리즈 우승과 골든글러브 7회 수상에 빛나는 선수다. 진갑용(사진=삼성)
4. 진갑용
통산 1천558경기 출전 ㅣ 타율 2할7푼3리 ㅣ 홈런 139개 ㅣ 안타 1천271개 ㅣ 볼넷 440개 ㅣ 타점 664개 ㅣ 실책 89개 ㅣ 도루허용 769개, 도루저지 468개, 도루저지율 3할7푼8리
현역 포수 가운데 박경완에 견줄 수 있는 유일한 포수다. 앞으로 수십 년이 흐르면 후대 야구팬들은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 가운데 무엇이 더 가치 있는가를 논쟁하듯 박경완과 진갑용을 두고 누가 더 뛰어난 포수였는지 논쟁을 벌일지 모른다. 그만큼 진갑용은 박경완과는 다른 스타일이었다.
진갑용은 선이 굵은 포수다. 볼카운트 싸움에서 매우 공격적이다. 삼성 장재중 배터리 코치는 “빠른 볼카운트에서 승부를 보는 포수”라고 진갑용을 평가했다.
“유리한 볼카운트면 도망가지 않고 정면승부를 요구하는 이가 진갑용이다. 원체 빠른 승부를 하다 보니 타자들은 다음 공에 대한 예측이 어려워 쫓기는 기분을 느낀다. 재미난 건 타자들의 심리를 잘 파악해 서두르는 타자들을 상대론 유인구를 던지며 돌아갈 줄 안다는 것이다.”
KBS 이용철 해설위원은 현역 최고 포수로 진갑용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유는 뭘까.
“포수로서 갖춰야 할 기술은 말할 것도 없고 리더십과 인성, 야구를 대하는 자세 모두 최고다. 어린 투수와 호흡을 맞출 때도 자기 고집만을 부리지 않고, 눈높이에 맞춰 최대한 편안하게 리드한다. 투수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능력이 남다르다는 뜻이다.”
공교롭게도 진갑용이 삼성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2000년 이후 삼성은 투수왕국으로 불렸다. 그리고 삼성은 4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진갑용이 없었어도 삼성은 훌륭한 팀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삼성은 진갑용이 입단하기 전까지 최강의 타선과 훌륭한 투수진을 갖췄어도 한국시리즈에서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닉네임 polaris_uni - 진갑용이다. 2002, 2005, 2006, 2011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고, 2008년엔 한국 대표팀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로 인도했다. 진갑용이 없었다면 삼성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김무종
5. 김무종
통산 445경기 출전 ㅣ 타율 2할4푼 ㅣ 홈런 41개 ㅣ 안타 326개 ㅣ 볼넷 115개 ㅣ 타점 192개 ㅣ 실책 40개 ㅣ 도루허용 334개, 도루저지 173개, 도루저지율 3할4푼1리
1984년 2월. 그해 삼성에 입단한 재일교포 포수 송일수는 한국 투수들의 불펜투구를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프로야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불펜투구지만, 홈플레이트도 그리지 않은 상태에서 포수가 공을 받았다. 게다가 포수가 부족하다 보니 한 투수가 공을 던지면 나머지 투수는 자기 투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 내가 포수를 볼 때면 배트로 홈플레이트를 그리고, 투수 두 명이 번갈아 가며 투구하도록 했다.”
당시는 그랬다. 일본 프로야구 긴테쓰 버팔로스(현 오릭스)에서 15년간 선수생활을 했던 송일수의 눈에 한국 프로야구는 말이 ‘프로야구’지 영락없는 사회인 야구였다. 그런 송일수보다 1년 일찍 한국에 와서 고생한 이가 있었다. 해태 김무종이었다.
히로시마 도요카프에 드래프트 8위로 지명돼 입단한 바 있는 김무종은 주목받는 신인 포수였다. 하지만, 10년간 1군 무대에 거의 서지 못했다. 줄곧 2군에서만 뛰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김무종에게 1983년 모국으로부터 뜻밖의 입단 제안이 왔다. 김무종의 팀 동료였던 주동식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1983년 KBO는 전력 평준화를 내세워 하위권 팀들이 재일교포 선수들을 영입하도록 적극 권장했다. 그 바람에 삼미는 투수 장명부, 내야수 이영구를 영입했고, 해태는 나와 김무종을 선택했다. 다른 선수들보다 연봉이 많았기 때문에 ‘반드시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말도 못하게 심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첫해 해태는 38승42패로 4위에 머물렀다. 그해 팀 평균자책이 3.79로 4위였던 게 문제였다. 많은 야구전문가는 해태의 약점으로 선발투수와 포수를 꼽았다. 해태가 투수 주동식, 포수 김무종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무종의 한국행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가족회의 끝에 해태행을 결심했지만, 1982시즌 종료와 함께 다음 해 360만 엔을 받는 조건으로 히로시마와 계약을 맺은 게 문제였다. 히로시마는 해태에 이적료를 요구했다. 해태는 “이적료를 줄 수 없다”고 버텼고, 김무종이 부담하기로 약속하며 문제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히로시마가 이적료로 500만 엔을 요구한 게 다시 발목을 잡았다.
이때 장훈(일본명 : 하리모토 이사오)이 중재에 나서 300만 엔으로 낮췄다. 그러나 이번엔 해태가 문제였다. 애초 해태는 김무종에게 “엔화로 계약금과 연봉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말을 바꿔 원화로 지급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결국 해태는 환율이 가장 싼 날에 김무종의 몸값을 계산했다.
우여곡절 끝에 타이거스 유니폼을 입었으나, 해태가 김무종을 선택한 건 행운 그 이상이었다. 해태 마운드가 몰라보게 달라진 것이다.
일본 프로야구 경험을 최대한 살린 김무종의 노력이 빛난 결과였다. 김무종은 경기 전 훈련을 마치고도 쉬지 않았다. 더그아웃에 앉아 상대팀 훈련을 지켜봤다. 그날 상대 타자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공배합도 기존 한국 포수들과는 달랐다. 김무종은 한국 타자들이 2스트라이크 노볼에선 타격을 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걸 간파했다. 투수들이 하나같이 유인구를 던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볼카운트가 확연히 유리할 때면 정면승부를 요구했고, 덕분에 3구 삼진을 많이 잡았다. 몸쪽 승부에 능했던 것도 김무종만의 특징이었다.
과거 해태 투수왕국을 이끈 장채근 홍익대 감독은 김무종을 “몸쪽 승부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포수”로 기억했다.
“대타자라도 몸쪽 꽉 찬 공을 때리긴 쉽지 않다. 어쩌면 가장 위력적인 변화구는 몸쪽 속구일지 모른다. 하지만, 프로야구 출범 때만 해도 기존 포수들은 주로 바깥쪽 승부에 치중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김무종은 몸쪽 공의 위력을 잘 알았고, 실제로 투수에게 많은 몸쪽 공을 요구해 큰 효과를 봤다.”
김무종이 타자의 타격 스탠스와 발 모양, 표정을 고려해 그에 맞는 공배합을 시도한 것도 당시 한국야구계에선 파격이었다. 김무종이 주전포수를 꿰차며 1982년 7, 9승에 그쳤던 이상윤-김용남 ‘원투펀치’는 다음 해 각각 20승, 13승 투수로 우뚝 섰다.
무엇보다 김무종이 투수들로부터 신뢰를 받은 건 태도였다. 그는 주자들의 거친 슬라이딩에도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고, 투수들이 투덜거려도 인내심을 발휘했다. 특히나 몸을 날리는 블로킹이 일품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어깨였다. KIA 이순철 수석코치는 김무종을 “어깨가 약했던 포수”로 회상했다. 실제로 김무종은 1983년 도루저지율 3할1푼9리를 기록했다. 당시 리그 평균 도루저지율보다 낮았다. 하지만, 이 수석코치는 역설적이게도 김무종을 “도루를 잘 잡았던 포수”라고 평가했다. 사실이다. 김무종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도루를 좌절시킨데다, 1986년엔 도루저지율 4할1푼5리를 기록했다.
김무종의 배턴을 이어받아 해태 안방마님으로 군림한 장채근은 “김 선배는 어깨는 약했어도 송구동작이 무척 빨랐다”며 “송구 정확성까지 뛰어나 주자들이 쉽게 도루를 시도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김무종의 타격성적은 화려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6시즌을 뛰며 통산 타율 2할4푼을 기록했다. 10홈런 이상을 친 것도 1983년이 전부였다. 그러나 올드 해태팬이라면 결정적 기회 때면 적시타를 치던 그를 잘 기억할 것이다.
김무종의 등장으로 한국 프로야구에서 포수가 경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높아졌다. 기술도 상당히 발전했다. 김무종은 1988년을 마지막으로 해태 유니폼을 벗었다. 하지만, 해태는 장채근-정회열-최해식으로 이어지는 막강 포수 라인을 계속 유지했다.
은퇴 뒤 일본으로 돌아간 김무종은 1991년 1월 삼성 배터리 코치로 다시 한번 모국땅을 밟았다. 하지만, 자신을 영입한 김성근 감독이 1992년 10월 중도하차하며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현재 김무종은 일본 히로시마에서 운수업을 하고 있다.
닉네임 하늘이 - 한국 프로야구 포수는 김무종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포수가 단순히 투수의 공을 받아주는 보조자에서 경기 전체를 지배하는 안방마님으로 발전한 건 김무종 등장 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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