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 도문리 이의무 묘역(혈의 등급과 비례하여 인물이 나는 것은 아니다.)
1 덕수이씨 연헌 이의무
* 덕수이씨의 시조는 고려 때 거란을 물리친 중랑장 이돈수이고 그가 덕수현(황해 개평군)에 세거한 연유로 본향을 덕수로 정하였고 인구는 5만8천명(2015년)이다. 조선조에서 문과급제105, 상신7, 대제학5명을 배출하였는데 대부분이 연헌공파이고(이이 파는 대제학1명) 충무공파는 무과급제만 267명이다.
* 덕수이씨는 4세손 때 이윤운(이명신, 이의무, 이이 선조)과 이윤번(이순신 선조)계로 나누어졌고 이윤운계에서 9세손 이추가 6子를 두었는데 그중 이의석(이이의 증조부), 이의번, 이의무계가 번성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연헌공(10세손)파, 충무공(12세손)파, 이이(13세손)파가 유명 하다.
* 덕수이씨 10세손 연헌(蓮軒) 이의무(李宜茂, 1449 세종31~1507 중종2)는 홍주 목사로 재직하면서 면천(당진)에 정착하였다. 이곳은 덕수이씨의 주도세력인 연헌공파묘역으로 이의무와 아들 손자등 13기가 있고 이 골짜기 전체로는 30여기가 있다.
* 연헌공 이의무의 가계를 보면, 7세손 이양-- 8세손 이명신—9세손 이추—10세손 이의무—11세손 이행 등 5남2녀로 이어진다. 이의무의 다섯 아들인 이권(병마절도사), 이기(영의정, 뒤에 15세손때 양자로 이합을 들여 번성), 이행(좌의정, 송산면 입향조, 뒤에 15세손 택당 이식 배출), 이영(평해군수), 이미(한성판윤)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오도문(五道門)이라 칭송받았다
* 덕수이씨는 세종에서 영조까지 전성기를 누렸는데 연헌공파의 전반기 음택발복지는 이곳이다. 즉, 6세손 선조까지는 실전 또는 이북에 묘소가 있다. 7세손부터 9세손까지는 파주 사목리에 있는 청송심씨종산(산14와 111)에 있는 듯하고 달리 뚜렷한 음택이 공개되지 않았다. 이의무의 3남 이행의 후손인 15세손 이식 때 양평군 쌍학리에 명당을 잡아 부모묘를 모시고 일파(一派)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후기의 발복지는 이식 묘역이라 할 수 있다.
* ①이 묘역은 어떤 물형이고 어느 묘가 진혈인가? ②8세손 이명신의 비문에 의하면, 이명신 후손의 발복은 이명신의 부인 청송심씨 묘의 발복으로 외손 발복이라고 적혀 있다는데 외손발복지 또는 양자발복지의 혈이 달리 있는가?
2. 답사(당진 송산면 도문리 산78-1)
* 묘역의 중국---당진 땅은 모두 가야산 옥양봉에서 출행한 용이 펼쳐 놓은 것이다. 묘등에 올라보면 앞쪽 좌우에 많은 꽃잎이 나열해 있고 멀리 송악산이 학체(鶴体)로 찾아오고 있다. 옛날에는 바닷물이 입구까지 올라 왔다고 한다. 필시 연화도수형이었을 것 같다.
* 연헌공 이의무 묘역 배치도---
* 이의무 묘역 전체---원래 이곳에 대하여 능자리라는 소문이 있어서 왕실 지관이 도문리 창택산 백주봉 동편을 답사하였는데 이의무와 친분이 있었으므로 능자리가 아니라고 보고하였다. 그래서 이의무가 묘를 보존할 수 있었고 지명도 능안리라 부른다는 설화가 있다.
* 이의무 묘---
* 이행 묘---
* 이의무의 5남2녀 중 이기와 이행이 현달하였는데 이기는 4대 후 15세손 때절손되어 이행의 후손을 양자로 들여 번성하였으므로 이행의 후손이 가장 번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장에서 천심십도 특히 청백을 보면서 관찰한 즉 하단으로부터 이주는 초등, 이기는 중등중급, 이의무는 중등상급, 이행은 초등이었다. 이행의 묘가 발복으로 보면 대명당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또한 이기 묘는 명당임에도 고손자 때 양자를 들이고 양자가 번성하였으므로 양자발복지라 할 수 있다. 동기감응론자는 양자발복을 인정하지 않지만 송시열 박문수 정인지 한명희도 양자발복이다. 꼭 명당의 등급에 비례하여 인물이 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 입수와 전순이 또렷하지 않고 조산인 송악산이 멀어서 대혈이 아니라는 설, 이원욱 묘가 진혈이라는 설이 있다. 지네형이라는 설도 있으나 산등에 발이 없으므로 지네모습이 아니다. 소국만 보면 힘이 미약한 것 같으나 중국을 보면 이곳을 향하여 산들이 집중하고 있는 것을 알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간산시에는 중국의 국세도 반드시 검토해야 된다. 본신(本身)과 조산(朝山)의 태조산이 빙둘러 싼 하나의 권역을 대국(大局)이라 하고 본신과 조산의 소조(小祖)산이 빙둘러 싼 권역을 중국(中局 또는 垣局)이라 하며 본신과 조산이 수각(手脚)을 내밀어 하나의 권역을 이루는 것을 소국(小局 또는 堂局, 또는 현무 주작 청룡 백호의 사신사로 둘러싸인 안쪽)이라 한다. 보국(保局)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데 소국을 뜻하는 것 같다.
* 이의무의 조부 이명신은 청송심씨 심종과 경선공주(태조의 차녀)사이에 출생한 외동딸과 혼인하여 이추를 낳았다. 심종에게 다른 자식이 없었던 연유로 이명신과 이추 父子가 심종부부의 재산을 물러 받았다. 이를 두고 심씨문중과 이씨문중은 이추가계는 외손 발복이라고 비문에 적어 두었다. 그러나 외손 발복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심종부부 묘가 명당인 것도 아니다. 심종부부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안타갑게 생각한 나머지 재산을 물러 받은 이명신 후손에게 외가 발복임을 알려서 제사봉행을 맡긴 것이라 추측한다. 경주최부자도 2대에 걸쳐 부자집 외동딸과 결혼하여 종잣돈을 축적하였으나 외손발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2024.1)
첫댓글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