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는 서울역에서 도매상을 하고 계시는 형님입니다.
소매상 하던 시절 피플코리아에 기사가 나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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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이사람] (396) 30년 노하우로 빚어내는 구두수선 전문기술자 최영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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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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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이사람] (396) 30년 노하우로 빚어내는 구두수선 전문기술자 최영식
구두수선 전문기술자 최영식(47)씨를 보는 순간 온몸에서 장인(匠人)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손마디에 훈장처럼 박혀있는 굳은살과 상처자국은 힘들고 험하다는 이유로 기피직종이 되어버린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온갖 수모와 멸시를 극복하고 피나는 노력으로 오늘의 자리에 올랐음을 말해준다.
그는 직접 수선공장(서울 성수동)을 운영하고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에 독자 매장(이태리제화)을 확보하고 있는 구두맞춤 수선의 베테랑이다.
‘30년 전통을 자랑하는 수제화의 집’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매장에서 그를 만나 그의 직업관과 그가 살아온 인생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5살부터 시작하여 32년째 이 일을 하다 보니 어떠한 제품을 가져와도 고쳐줄 수 있죠.”
살면서 굶주림보다 더한 고통이 어디 있으랴.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북 고창이 고향으로 가난에 쪼들려 초등학교 겨울방학 때 동네사람 따라 무작정 상경하였다.
“어린 나이에 구두 수제화의 집에 들어와 기술 배우면서 무진장 얻어터졌죠. 너무 없이 살다보니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최종 목표가 공장으로 악착같이 참고 견뎠습니다.”
21살까지 그렇게 6년간 기술을 익히고 독립을 했다. 기술자가 되고 선생이 떨어져 나가고 그가 비로소 하늘처럼 높아 보이던 선생이 됐다.
밑바닥 견습공으로 출발하여 중→상급을 거쳐 7~8년을 열심히 해서 꿈에 그리던 공장을 차렸다.
상계동에서 5년간 공장을 운영하면서 집을 4채나 매입할 정도로 한 때 돈도 많이 벌었으나 부도가 나는 바람에 한방에 무너졌다.
“당시 영세업체다 보니까 문방구약속 어음이 많았어요. 어음을 처음 발행한 사람은 도망가고 제 이름으로 제2사인이 들어가니까 모든 책임이 저한테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시련 속에서도 꿈이 공장이었기 때문에 부도가 나고 1년 6개월을 버텼다. 그러다 결국은 벌어놓은 재산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아서 1991년 일본에 기술자로 갔다. 당장 처해있는 현실이 어렵다고 또 다른 현실을 찾아 현해탄을 건넜으나 거기서도 역시 그를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아니 쓰러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을 참아가며 일본인 기술자 밑에서 와신상담 2년 만에 현지 하청업체를 차렸다.
일본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9년 동안 한국 한 번 안 들어오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한국행을 결심 2000년 ‘금의환향’ 하여 성수동에 작은 공장을 차렸다. 그게 바로 지금의 공장이다.
그는 장애인 신발에 관심이 많다. 어린 시절을 자신이 힘들고 어렵게 지냈기 때문에 장애인들을 보면 외면을 할 수가 없다고 고백한다.
장애인들은 신발 때문에 애로사항이 많다. 발모양대로 해줘야 하는 특수 맞춤형 신발이다 보니 가격이 비싸 구입이 쉽지 않고 불이익을 많이 당한다.
“앞으로 장애인 전용 신발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고생을 많이 해봐서 그 사람들 심정을 잘 알죠.”
특수신발을 만들려면 수공도 많이 가고 재료도 낭비가 심하다. 일반 수제화 기능공들이 꺼려하는 단적인 이유다.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로 발이 265이상 큰 사이즈나 210이하 작은 사이즈는 수제화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가 나설 작정이다. 마진을 최소화해서 형편이 어려운 장애인이나 특수신발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그는 지금도 특수신발을 많이 취급한다. 일반수선방에서 못하는 어떠한 신발을 가지고 와서 아무리 뜯어고쳐 달라고 해도 불평한마디 없이 다 해준다.
아직은 초기 단계인데도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져 장애인들이 아름아름 찾아온다.
“일반수선방에서 수선료를 1만원 받으면 저는 5000원 받으니 일종의 봉사활동이지요.”
구두수선 전문 기술자 최영식. 이 분야에서는 그가 달인이다. 그가 취급하는 신발은 100% 맞춤 신발이다.
그는 오후 2시 신용산역 매장에 출근하여 찾아오는 손님들의 발의 형태를 일일이 측정하고 상담한 후 다음날 아침 성수동 공장으로 가서 오전 내내 주문 받은 신발을 맞춘다.
‘헌 신발’을 맡긴 며칠 후 매장에 다시 찾아온 손님들은 30년을 갈고 닦은 장인의 능숙한 손놀림으로 깜짝 변신한 ‘새 신발’을 찾아간다.
국내에 구두 수선방들은 수없이 많다. 시내 어딜 가나 수선방이 깔렸지만 그처럼 다양하게 신발을 맞추고 수선해 주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 분야도 3D업종으로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지요. 이러한 추세로 가면 10년 후에는 이 바닥도 동남아 사람들이 시장을 지배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월급은 고사하고 밥만 얻어먹어도 기술만 배우면 좋았는데 이제는 월급주면서 기술을 배울 수 있을 정도로 환경이 좋아졌는데도 3D업종이라고 기피하는 실정이다.
일자리가 없다고 난리를 피우는 와중에도 일이 힘들다는 이유로 외면을 받는 현실이 그는 안타깝다,
“일본 신발은 모양을 떠나서 기능성위주로 편하게 만들지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완전히 영세업체 수준이라 개발을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는 일본 경험을 바탕삼아 편안한 신발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모양도 살리고 기능성도 살리다 보니 그의 손을 거쳐 만든 신발을 신어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발이 참 편하다고 한다. 고객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과 장인 정신으로 다져진 그의 경쟁력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가 어려운 현실을 비웃듯 수십만 원을 웃도는 고가의 명품 신발이 유행하고 멀쩡한 신발도 조금만 닳거나 훼손되면 새신발로 사 신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본다.
조금만 손을 보면 오래 신을 수 있는데도 새 신발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다시 비싼 돈 들여 새 신발을 사 신는 경우도 낭비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그는 반문한다.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울수록 그의 수선방이 신발을 고치는 손님들로 들끓었으면 좋겠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그의 가게가 잘되면 그만큼 재활용이 활성화되고 쓸데없는 낭비도 줄어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유행과는 거리가 먼 3D직종을 천직으로 알고 평생 고단한 길을 걷고 있는 그의 눈에 일자리가 없어 비명을 지르는 요즘 세태가 어떻게 비쳐질까 궁금해서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슴을 때렸다.
“마음에 맞는 일자리가 없다며 실업자 생활을 할 바에는 차라리 이러한 직종이라도 피하지 말고 뛰어들어 몇 년 만 고생하면 기술자로 거듭나고 거의 자본 없이도 생계유지가 가능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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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코리아/ 김명수기자 http://www.peoplekorea.co.kr>
2008년 12월02일 09시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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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많이 하셨네요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장애인용 신발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