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박람회장 바로 앞에 작은 초등학교 하나가 있습니다. 여수종고초등학교입니다. 바로 제가 다녔던 학교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는 참 조용했던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운동은 좋아했지만 공부는 그리 잘하지 못했고, 책은 좋아했지만 나가서 놀기를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4학년 때였습니다. 우리 반에 긴 머리의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늘 새침하고 조용한 아이였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 아이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것은 짝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다른 여자 친구들에게는 장난도 치고 말도 잘 건넸는데, 그 아이에게만은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미술시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미술 수업이 든 날에는, 여유가 있는 집의 아이는 스케치북을 가져왔고, 저처럼 어려운 집의 아이들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도화지 한 장씩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미술 수업이 있는 그날 아침, 나는 집을 나오면서, 어머니에게 도화지를 사야 한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을 못하고 그냥 등교를 했습니다.
드디어 미술 시간이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도화지를 꺼내고, 크레파스를 꺼내는데, 나는 꺼낼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그 아이가 자신의 스케치북을 찢은 도화지 한 장과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 분홍색 이렇게 4개의 크레파스를 내 책상 위에 놓고 갔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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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날 그 색을 아직도 기억하는 까닭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그날 그 미술시간에, 내 책상 위에, 도화지 한 장과 크레파스 4개를 가만히 놓고 간 그 아이의 모습이 정지된 화면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날 저처럼 도화지를 가져오지 않은 친구가 저 말고도 몇몇 더 있었는데, 유독 나에게만 스케치북을 찢어주고, 크레파스를 가져온 까닭은, 그 아이도 나를 좋아했기 때문이 아닐까. 혼자 생각합니다.ㅋ
살면서 절대 숨길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술에 취한 것과 사랑에 빠진 것.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을 그 때, 그 아이도 알았나 봅니다. ㅎ
그 이후로 나는 다른 여자 친구들에게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했지만, 유독 그 아이에게는 장난 한 번 걸어보질 못했습니다. 어쩌다 그 아이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마른 하늘에 번개 맞은 듯, 놀라기까지 하고. 그 아이는 그런 나를 보며 그냥 웃기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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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서로 반이 달라 접촉할 기회가 없던 우리는 꼭 한번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짧은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중앙동 로터리 길을 내려가면서, 나는 친구 집을 향해 걷고 있었고, 그 아이는 반대편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는데, 우리는 새삼 반가운 표정을 지으려다가도, “아참, 우리가 짝사랑하는 사이였지”하는 생각에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웃음만 교환했습니다.
그 아이가 멀리 갔을 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걷던 기억이 납니다. 그냥 그렇게 헤어질 것 같았으면 “난 네가 참 좋아!”라고 고백이라도 해볼 걸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그날, 그 아이의 미소로 인해 어린 내 가슴은 하루 종일 콩콩 뛰었던 기억이 납니다.
혼자 애가 터지고, 혼자 힘들기는 하지만, 그러다가 그 사람이 생각나면 미소를 짓는 사랑. 그러다가 어느 순간 혼자 이별을 준비하는 사랑. 그 사람은 내게 머문 적도, 떠난 적도 없는데...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에 그이가 먼저 알아줬음 좋겠고, 먼저 사랑한다 말해줬음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랑.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오랜만에 얼굴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그런 사랑. 짝사랑.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 하루하루를 그저 버릇처럼 살아가는 지금, 그 괴롭고 슬픈 짝사랑들이 가슴 저리는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감격해 하지 않고, 슬픈 것을 보고도 눈물 흘리지 않고, 불의를 보고도 노하지 않는...
아~ 나의 그 애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ㅋ 오늘 하루, 마음만은 풋풋한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짝사랑하기 좋은 가을입니다. 사랑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