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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문화학교소식 스크랩 非禮不動’(비례부동)
심 통 (심창현) 추천 0 조회 172 14.10.13 09:0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바위글씨  非禮不動(비례부동)

화양동은 우암이 떠나간 뒤에도 수많은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한 곳인 만큼, 그들의 정신과 사상이 스며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화양동 곳곳에 새겨져 있는 여러 바위글씨를 통해 알 수 있다.  바위글씨는 우암 생전에 새기거나 후대 제자들이 우암의 뜻을 이어 새긴 것들로, 모두 멋진 글씨, 의미 있는 내용들이다. 이들 바위글씨 역시 우암의 얼과 혼을 느낄 수 있는 유적들로써 화양동의 상징적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있다. 

 

① 非禮不動(비례부동)

 

화양동에 있는 여러 바위글씨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非禮不動’(비례부동) 네 글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양동을 찾는 많은 이들이 이 바위글씨를 보지 못한 채 되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너무나 소중하기에 은밀한 곳에 숨겨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바위글씨는 화양동 제5곡인 첨성대에서 계곡 쪽으로 20m 내려온 지점에 있는데, 제6곡인 능운대의 계곡 건너편에 위치한다. 암서재에서 계곡을 따라 위로 오르면 도명산 이정표가 나오고 이곳에서 10m 정도 산길을 오르다 왼쪽 계곡방향으로 내려간 뒤 계곡을 따라 오르면 된다. 또는 화양제3교를 지나 능운대식당 앞 계곡을 건너 하류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산 아래 큰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만날 수 있다.

 

바위글씨는 큰 바위 밑을 쪼아낸 뒤 붉은 바위 벽면에 새겨져 있다. 한 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글씨들이란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非禮不動’(비례부동) 네 글자와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 여덟 글자가 크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특히 ‘비례부동’ 네 글자는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멋진 글씨이며, ‘대명천지 숭정일월’은 우암의 글씨이다.

 

이들 글씨의 내력은 그 주변에 새겨져 있는 작은 글씨를 통해 알 수 있다. 먼저 ‘비례부동’ 우측에는 ‘崇禎皇帝御筆’(숭정황제어필) 여섯 글자가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숭정황제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가리키며 어필은 황제의 글씨란 뜻이다. ‘비례부동’ 네 글자는 바로 명나라 의종황제의 글씨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씨는 언제 누가 새긴 것일까?  이런 궁금증은 ‘비례부동’ 왼쪽 바위 벽면에 새겨져 있는 글씨가 풀어준다. 그곳에는 ‘陪臣閔鼎重奉至 與宋時烈等謹拜手 稽首摸勒時四十七年甲寅四月日也’(배신 민정중이 받들고 와서 송시열 등과 함께 삼가 공손히 절을 하고 본떠 새기니 때는 47년 갑인 4월 일이다)라는 29자가 새겨져 있다. 이 29자의 한문 뜻은 민정중이 가져온 것을 송시열이 갑인년 4월에 새겼다는 의미이다. 갑인년은 1674년(현종 15)이다. 따라서 ‘비례부동’은 1674년 4월에 송시열이 직접 바위에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 우암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였던 민정중은 1669년에 동지사 사신으로 청나라 북경에 갔다. 민정중은 북경에 머물면서 명나라 의종의 글씨를 널리 구하였다. 마침 어떤 사람이 의종의 글씨를 가지고 왔다. 민정중은 비용을 아끼지 않고 구입하려 하였는데, 민정중의 뜻을 안 그 사람은 돈을 사양하고 글씨를 건네주었다. 이렇게 글씨를 구한 민정중은 조선으로 돌아와 우암 송시열에게 1671년에 주었고, 우암은 그 글씨를 1674년 4월에 화양동에 새긴 것이다.

 

우암은 ‘비례부동’이 다른 사람이 아닌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유필(遺筆)이라는 점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였다. 의종은 오랑캐 나라인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1644년(인조 22)에 의롭게 죽음으로써 ‘나라가 망하면 임금이 죽는 의리’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우암은 의로운 의종의 죽음이야말로 예를 실천한 것이자 ‘비례부동’의 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렇다면 ‘비례부동’의 정신은 무엇인가? 원래 이 말은 <<중용(中庸)>>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근원이자 핵심으로 이해되었다. 즉,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출발점이자 요체는 수신(修身)에서 시작되며, 수신의 핵심은 비례부동에 있다는 인식이다.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에 대해 ‘비례물시?비례물청?비례물언?비례물동(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이라고 했다. 우암 송시열은 이 말을 <<논어(論語)>>의 핵심으로 인식하였는데, 이때 예가 아닌 ‘비례(非禮)’는 사사로운 욕심을 의미하며 그 뒤에 나오는 네 조목은 각각 하늘의 이치인 천리(天理)를 보존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비례부동’이란 말 뜻은 ‘극기복례’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 사사로운 욕심을 버린다는 뜻의 ‘存天理 去人欲(존천리 거인욕)’과도 상통한다. 예는 곧 하늘의 이치로써, 사사로운 인간의 개인 욕심을 제거할 수 있는 근원이자 방편인 셈이다.

 

더 나아가 우암에게 있어서 이 말은 그의 정치관과도 부합되었다. 우암은 현실과 타협하여 청나라에 굴복하는 것을 극기복례와 비례부동에서 버리거나 극복해야만 할 ‘기(己)’?‘비례(非禮)’?‘인욕(人欲)’으로 보았다. 반면에 청나라에 복수하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은 ‘예(禮)’?‘부동(不動)’?‘천리(天理)’로 인식하였다. 그런 만큼 우암에게 있어서 청나라를 거부하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며 중화의 정통을 지켜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자 자연스러운 일이며 하늘의 이치였던 것이다.

 

이처럼 ‘비례부동’이란 말은 우암의 철학을 대변하는 말이자 그의 세계관과 정치관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우암은 민정중으로부터 의종의 글씨를 넘겨받은 뒤 화양동 계곡 바위에 새겨 영원히 후세에 전하고자 한 것이다.

 

안동에 영남학파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이 있다면 파주에 기호학파 율곡 이이의 자운서원이 있고, 괴산에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화양서원이 있다,고 할 정도의 사상적 본산으로 생각된다.

 

성리학(주자학, 유학) 사색당파가 한국인의 사상적 근간을 이뤄, 결과의 장단점이나 폐단을 떠나 당시대에 주류를 형성했음 사실이다. 그리고 근대화 이후 여느 서원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화양서원'의 흥망성쇠가 바로 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고비고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성리학을 짧게 고찰하고 잠시 들렀던 괴산이기에 화양서원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자료를 수집·편집·정리해 보았다.

결론부터 언급한다면 '역사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선택의 연속이다'. 불교 - 성리학(유학) - 실학 - 천주교 - 기독교의 한국내 흐름은 주체성이 결여된 비극의 역사에 가깝다. 청나라 탄생을 얕봤던 조선의 혹독한 시련, 개화기때 친청, 친일, 친러로 갈린 명성황후, 대원군, 고종의 비극, 중국공산당 탄생을 등안시했던 한반도의 분단이 그렇다. 대한민국에서 친러·친중, 친일·친미가 어떻다는 것은 명쾌한 정답도, 단죄의 명분도 없는 당시 위치에서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정당성이다. 다만, 지구 유일의 분단국가인 이 땅에서 내가 어느쪽에 서 있는냐가 좀 더 설득력이 있을 뿐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어느 임금보다도) 이름이 가장 많이 회자된 사람으로 무려 3000회가 넘는다고 기록돼 있다. 우암은 성리학의 대가로 조선 후기 지배사상을 확립한 최고의 학자이며 동시에 세도의치가로 그의 높은 학문을 공자, 주자에 빗대어 송자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말년에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낳은 왕자에게 세자책봉 하는 것을 반대로 귀향살이하다 국가적 문책을 받기위해 제주에서 한양으로 압송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을 정도로 성격이 곧고 강직하였다. 두 왕의 스승이었던 관계로 항상 권력의 중심을 오가며 파란이 많았지만 기호학파 노론의 수장으로 상당 기간 조선의 사상을 압도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가 잠시 지났던 '선유계곡'은 퇴계 이황이 9개월간 머물렀다는 곳으로 신선이 내려와 노닐었다하여 이름 붙여진 곳. 그리고 잠깐 들른 '화양계곡'은 송시열이 50대 때 낙향하여 상당기간 머문 곳으로, 화양구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사담(金沙潭)의 높은 바위 위에 자리잡은 암서재(岩棲齋)는 우암이 59세(1666) 때 지은 서재 겸 정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괴상한(?) 지명을 들라면 충청북도 괴산(槐山)일 것이다. 회사적 직원고향으로 지점 야유회 때 충주호, 이화령, 문경새재를 거쳐 그 직원집에 들러 시골닭 몇 마리를 잡아 먹었던 곳.  당시도 전후좌우가 산골인 마을과 앞에 개천이 흘렀던 지역으로 기억한다.

 

괴(槐)자는 홰나무 또는 회화나무, 느티나무(Japanese Zelkova, Sawleaf Zelkova / Elm-like Tree)라고 하며 느릅나뭇과의 낙엽 활엽으로 규목(槻木)이라고도 한다. 같은 느릅나무과의 팽나무와 비슷한 느티나무가 많다고하여 '괴산'이라고 이름붙여졌다.

 

우리가 들른 청천면 '삼송리'는 원래 경북 문경군 농암면 '삼송리'에서 63년 괴산으로 편입된 지역이고 2003년 괴산의 증평읍과 도안면이 증평군으로 분리되었다. 현재 증평군은 넓은 평야와 곡창지대로 여러 여건이 좋아 산악지대인 괴산군이 통합을 추진하고 있으나 지난한 상태.

 

선유동계곡(仙遊洞溪谷, 선유계곡仙遊溪谷, 선유구곡仙遊九谷, 선유동구곡仙遊洞九谷)은 속리산 국립공원지역 북쪽끝에 위치하며 경북 문경 가은읍에 있는 장성봉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삼송리, 송면리를 거쳐 화양리 화양동계곡(華陽洞溪谷, 화양계곡華陽溪谷, 화양구곡華陽九谷, 화양동구곡華陽洞九谷)을 통과하고 보은의 법주사에서 시작한 달천으로 흘러든다. 달천은 강원도에서 흘러온 충주호 하류에서 합류해 남한강으로 들어 한강을 이루고 서해로 빠진다.


성리학(性理學) = 주자학(朱子學)
중국 송(宋) ·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로 유교철학

도학(道學)·이학(理學)·성명학(性命學) 또는 이것을 대성시킨 이의 이름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유학(儒學)은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종교나 철학 등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도덕사상이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에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인(仁)과 예(禮)를 설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에 돌아와 육경(六經:詩·書·禮·樂·易·春秋)을 제자에게 가르치며 도리(道理)를 후세에 전하였다.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이르러 유학은 도덕 실천의 학으로서 크게 일어났으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큰 시련을 겪었고 후일 훈고학(訓學)으로 이어졌다. 송·명 시대에 이르러서야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老佛) 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철학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성리학은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姿勢)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내성적(內省的)·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太極說)·이기설(理氣說)·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할 수 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성리학 비교

우리 나라에 성리학은 고려 말, 원나라를 통하여 들어왔다. 이것은 조선 시대의 유학의 주류를 이뤄 '인륜과 도덕을 바탕으로 왕도 정치를 펴서, 이상 국가를 만드는 것'을 그 근본으로 삼았다.

 

정약용(丁若鏞)은 이기(理氣)의 성격에 대하여, "대개 퇴계가 논한 이기는 오로지 사람의 성정(性情)에 나아가 이론을 세운 것이요, 율곡이 논한 이기는 천지 만물을 총괄하여 입설(泣誠)한 것이다."고 하여 두 사람의 주장에 차이가 있음을 밝혀 주었다. 수양론에 있어서 이발(理發)을 인정하는 이황과 기발(氣發)만을 인정하는 이이의 설은 서로 방법상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이황은 선정(善情)의 근원을 이(理)에 둔다. 그리하여 도덕 수양, 다시 말해서 존양 성찰의 공부는 이를 완성하게 하여 언제 어디서라도 기(氣)를 지배하도록 함으로써,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선한 본성이 제대로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는 소이연(所以然)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이이의 경우, 이(理)는 무위(無爲), 무조작(無造作)한 것이요, 기(氣)의 존재를 규정해 주는 소당연(所當然)의 근거라 보는 만큼, 마음의 작용에 선악이 발생하는 것은 이(理)로 인한 것이 아니고, 기(氣)의 성질에 관계된 것이다. 즉 그에 있어서는 도덕 수양에 가장 중요한 대상이 기(氣)인 것이다. 따라서 기질을 변화 개선시켜 청명하고 순수한 본연의 기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성리학자로서 관리가 된 사람들을 정도전, 권근, 신숙주, 양성지 등이 있으며 이들 '관학파' 성리학자들은 학문연구를 정치에 응용하려고 하였다. 이와는 달리 시골이나 고향에 묻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한 성리학자들을 '사림파' 학자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은 고려 말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성리학은 명종과 선조 때 꽃피웠다. 이황, 이이, 서경덕, 기대승, 이언적, 성혼, 조식, 장현광, 김인후 등이 그들. 특히,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고 이들은 중국의 학문보다 독특하게 발전시켜 중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성리학의 두 태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이황은 연산군 7년인 1501년 경북 안동 도산면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며 자랐다. 글공부보다도, 몸가짐과 행실, 재주보다는 노력을 중시했다.

 

호는 퇴계. 34살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 길에 나갔다. 암행어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 예조판서 등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다. 부정을 참지 못해 일곱 번이나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김성일, 유성룡을 비롯한 인재들을 길러 낸 이황은 영남 학파의 스승. 선조 3년인 1570년에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영의정 벼슬에 추증하고, 문순이라는 시호까지 내려 그의 업적을 기렸다. 그의 학문은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유학의 근본이 되었다.

 

이이는 중종 31년인 1536년 어머니 신사임당의 친정인 강원도 강릉 북평촌에 있는 오죽헌에서 태어나 경기도 파주 파평면 율곡리에서 자랐다. 재주가 뛰어났으나 병약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은 신동같은 이이를 직접 가르쳤다.

 

오는 율곡. 13살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29살 때 대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에 올랐다. 1568년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동호문답>을 지어 정치 개혁을 주장했다. 40살 때인 1574년에 <성학집요>를 짓고 6년 뒤에 호조판서가 되고 대제학을 겸했다.

 

1583년 이이는 경연 자리에서 10만 양병책을 주장했으나 유성룡 등이 반대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로부터 9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84년 1월 15일 4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문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성리학의 계보, 흐름과 변천

 
조선의 개창을 둘러싸고 길재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왕조 교체가 유교적 윤리와 의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역성혁명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향촌에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 주력하였다. 그들은 김종직에 이르러 그 수가 크게 늘어 영남을 중심으로 이른바 사림파를 형성하였는데 사장(詞章) 중심의 훈구파와 달리 경학(經學)에 치중하고 인간의 심성을 연구하는 데 주력하였다. 사림파는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등으로서 훈구파의 일방적 비대를 막으려는 성종의 발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만, 훈구파와 정치적 갈등이 불가피하였고, 그러한 갈등 속에서 사림들은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이에 사림들은 초야에 은거하여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에만 힘쓰고자 하는 기풍이 일어나고, 그리하여 16세기 이후 심오한 철학적 논쟁이 피어나는 발판이 되었다.

 

당시의 철학적 조류는 크게 원리적 문제를 중요시하는 주리파(主理派)와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하는 주기파(主氣派)의 두 계통으로 발전하였다.

 

주리파는 이언적(李彦迪)에게서 비롯되어 이황(李滉)에 의해 대성되었는데,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요시하여 신분질서를 유지하는 도덕규범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주리파는 이황·조식(曺植) 이후 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허목(許穆) 등 영남학파에 의해 계통이 이어졌다.

 

주기파는 서경덕(徐敬德)에서 비롯되어 이이(李珥)에 의해 대성되었는데, 경험적 현실세계를 존중하여 정치 ·경제·국방 등 현실문제에 대한 여러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주기파는 이이의 벗인 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과 그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 등 이른바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이와 같은 성리학은 17세기에 이르러 신분질서의 안정에 필요한 의례를 중요시하여 상장제례(喪葬祭禮)에 관한 예학(禮學)으로 발전하였는데, 영남학파에서는 정구 ·허목, 이기호학파에서는 김장생 ·송시열이 이를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시켰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은 기호학파가 정권을 주도하면서 주기설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는 인간의 심성문제를 둘러싸고 큰 논쟁을 펴기도 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 등이 당시 심성론(心性論)의 대가였다. 그러나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문화의 자극을 받는 과정에서 주리설이 대두되어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의 철학적 기반을 부여하였다.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 등은 19세기 중엽의 대표적 위정척사 운동가였다.

 

성리학의 발달과 아울러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비판운동도 일어났는데, 윤휴(尹?)·박세당(朴世堂)·정약용 등은 유교의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고, 정제두(鄭齊斗)를 중심으로 한 강화학파(江華學派)에서는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여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였으나 이단으로 몰려 조선사회에서 그 지위를 굳히지 못하였다.

 

영남학파(嶺南學派)


조선 전기에 영남지방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왕조교체에 불만을 품고 은거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단의 학자군이 형성되고, 조선 중기에 이황(李滉)이 배출되면서 영남학파가 성립되었다. 퇴계는 삼백여명의 문하생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학문적 계보를 형성한 학자는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이다. 퇴계의 학문과 사상은 이들과 그 제자들이 계승 발전시켜 퇴계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남인(南人)이라는 정파를 이루어 율곡학파(栗谷學派)의 서인(西人)과 상호견제하면서 붕당정국(朋黨政局)을 이끌어 나갔으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정계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영남(嶺南)으로 밀려난 영남퇴계학파, 근기지방(近畿地方)에서 세력을 결집한 기호(畿湖) 퇴계학파로 나누어진다.

 

이현일(李玄逸)과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결집된 영남퇴계학파는 사단과 칠정,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이와 기를 엄밀히 구분하는 이간법을 토대로 이의 주재성과 능동성을 부각시켜 퇴계의 기본 입장을 보다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에 윤휴(尹?)와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기호퇴계학파는 기존의 성리학적 범위를 벗어나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경전을 해석하고 이익에 이르러 이른바 실학적 학문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익의 문도들은 천주학을 부정적으로 보는 안정복(安鼎福) 계열과 천주학을 긍정적으로 보는 권철신(權哲身)·정약용(丁若鏞) 계열로 나뉘어 학통이 전승된다. 이 가운데 정약용은 기존의 학맥에 연암파(燕巖派)의 북학(北學)사상을 접목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따라서 다산학(茶山學)은 종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경학(經學)사상의 중추를 이루는 천(天)·상제관(上帝觀)에는 이를 지극히 존엄한 절대자로 외경하는 퇴계의 이존의식이 각인된 것으로 보인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으며 1574년(선조 7) 퇴계 이황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門人)과 유림(儒林)이 세웠다. 근처에 퇴계의 묘도 있다.

 

기호학파(畿湖學派)

기호학파는 경기도·충청도 지역의 이이·성혼의 문인과 학자들의 집단을 지칭한다. 기호학파는 넓은 지역에 분포했기 때문에 학문적 결속력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 후기에 동서분당이 형성되고 영남학파의 다수가 동인이 되면서 이에 대항하는 서인세력이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당색(黨色)으로 볼 때 기호학파는 서인의 주축을 형성했지만, 서경덕(徐敬德)처럼 기호지방(개성)을 근거지로 하면서도 북인(北人)으로 나간 인물들이 있음을 고려할 때, 기호학파가 정치적으로 곧 서인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기호학파를 성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이이·성혼·송익필(宋翼弼)을 들 수 있으며,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기호학파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이이의 문인인 김장생(金長生)을 거쳐 송시열에 이르러서는 연산(連山)·회덕(懷德) 등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기호학파는 정계·학계의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기호학파가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데는 무엇보다도 서울에 지역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이점이 많이 작용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면 기호학파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회덕을 중심으로 한 송시열 계열은 노론이 되고, 이산(泥山)을 중심으로 한 윤증(尹拯) 계열은 소론으로 분립되었다. 기호학파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등의 성리설과 예학 등에서 많은 학문적 성과를 남겼는데, 특히 송익필·김장생·송시열 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예학은 현종대에 남인과 맞서 극렬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일으키게 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자운서원(紫雲書院)은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다. 1615년(광해군 7)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되어 1650년(효종 원년) 자운(紫雲)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숙종 때 박세체, 김장생도 배향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어 묘정비만 남아 있다가 고종말기 유림들이 설단으로 봉사해오다 1969년 재건되었다('花石亭'의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신사임당, 율곡의 묘가 여기에 있으며 특이한 역묘형태다.

 

사색당파(四色黨派)

조선시대 노소남북(老少南北)이라는 사색당파(四色黨派)는 붕당정치를 가져왔다. 처음에 영남학파와 관련이 있는 동인(東人)과 기호학파와 주로 관련이 있는 서인(西人)으로 분열한 데서 비롯하여, 뒤에는 동인이 남인(南人) ·북인(北人)으로 갈라지고, 서인은 다시 노론(老論) ·소론(少論)으로 분열되었다. 북인은 광해군이 쫓겨나면서 몰락하였고, 남인은 숙종 때의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세력을 잃었다. 소론은 영조 초기 이후부터 세력이 약해졌으며, 노론이 비교적 오래 정권을 유지하였으나, 영조와 정조의 당론탕평책(黨論蕩平策)에 의하여 이전처럼 크게 득세하지는 못하였다.

 

서원(書院), 묘(廟)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기관(私設機關)으로 문인과 유림의 활동 본거지. 묘는 조상·성인·신(神)·신주(神主)·위판(位版)·영정(影幀) 따위를 모신 사당. 종묘·문묘를 통틀어 이른다.

자의적인 기준이지만 한국의 5대 서원은 김굉필(金宏弼)을 배향한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의 '도산서원'(陶山書院), 주세붕이 안축(安軸)과 안보(安輔)을 배향하는 사묘(祠廟)로 쓰다가 중종때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된 것을 이황이 풍기군수 시절 주세붕(周世鵬)까지 추모하기 위한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의 '소수서원'(紹修書院), 유성룡(柳成龍)의 위패를 모신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한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이라고들 한다.


노론의 본산 화양서원(華陽書院)

당시는 청주목(牧)에 속했으며 현재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리에 있음. 노론(老論)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한 서원으로, 1696년(숙종 22) 9월 사액(賜額)을 받았다.

 

1695년(숙종 21)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 등 노론이 주도해 설립했다. 이곳은 송시열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친 연고지이며, 권상하가 선조의 어필(御筆)을 딴 만절필동'(萬折必東)과, 숙종대 문인 민정중(閔鼎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懿宗)의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4자의 친필을 얻어온 것을 암벽에 새기고 암자를 세웠던 곳이다. 또한 1717년에는 만동묘(萬東廟)가 세워졌고 노론집권기에 국가로부터 많은 토지와 노비를 받는 등 송시열을 제향한 전국 44개 서원 가운데 위세가 가장 커 그 막강한 권세로 백성들의 폐해가 심했다.

 
서원철폐(書院撤廢)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훼철(毁撤)한 일

서원은 우리나라의 선현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던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교육기관으로,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이 설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그 효시다. 그 뒤 풍기군수로 있던 이황이 조정에 사액(賜額)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1550년(명종 5)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액(額)을 내린 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

 

초기의 서원은 인재 양성과 선현 배향, 유교적 향촌 질서 유지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차츰 혈연·지연 관계나 학벌·사제·당파 관계 등과 연결되어 병폐도 많았다. 그리하여 지방양반들이 서원을 거점으로 백성들을 토색질하고 지방관청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설립이 제한되고 훼철을 명령받기도 하였다.

 

1703년(숙종 29) 서원을 사사로이 설립하는 경우 그 지방의 관리를 벌하고 이를 주도한 유생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원금령이 내려졌고, 1713년에는 1714년 이후부터 서원의 설립을 금하고 사액을 내리지 않을 것을 결정했다. 그후 1741년(영조 17)에 1714년 이후 건립된 서원을 조사하여 훼철하게 했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서원 건립은 거의 중단되었으나, 기존의 서원은 그 폐단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1864년(고종 1) 집권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민폐를 줄이고 경복궁중건(景福宮重建)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병인양요로 궁핍한 국가재정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의도로 서원철폐 작업을 벌였다.

 

첫 단계로 1864년 첩설(疊設)·사설(私設) 서원을 조사하여 폐지하고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조사하여 불법적인 것은 국가에 환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듬해인 1865년에는 대표적인 만동묘와 화양서원에 철폐 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아이들이 부르던 승경가(昇卿歌)라는 동요에도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정승, 삼정승 위에 만동묘지기'라고 할 정도였으니, 모화(慕華)사상이 사회의 저류에 흐르던 세도정권 시절 만동묘 묘지기의 위세는 대원군도 얕볼 정도로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1868년에는 서원에 하사한 토지도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고, 지방 수령이 서원의 장을 맡도록 했으며, 1870년에는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서원은 사액서원이라도 훼철하도록 하였다. 이 조처로 전국 650개 서원 중 소수서원·도산서원·도동서원 등 사표가 될 만한 47개의 서원만 남겨지고 나머지는 모두 훼철되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 사단칠정이 모두 이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주요 저서에는 <송자대전> 등이 있다.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07년 오늘날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에서 태어났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김자점이 청나라에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다고 밀고함으로써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지목받아 청의 압력으로 다시 사직하고 재차 낙향하였다. 그뒤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남인인 윤선도(尹善道) 등의 공격을 받은 것도 그 직후였다. 이 후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1668년 우의정으로 취임하였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하였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으로 복직,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 - 효종(孝宗)의 정비(正妃)이자 현종(顯宗)의 어머니 - 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웅천(熊川)·장기(長?)·거제(巨濟)·청풍(淸風) 등지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숙종때 풀려 나왔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충청도 청주 화양동(지금의 괴산 화양동계곡)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죽은 후, 1689년 숙종(정비는 인경왕후, 계비는 인현왕후, 인원왕후)과 후궁 장희빈(장옥정張玉貞) 사이에서 낳은 왕자 윤(?, 나중 경종景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괴산)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송시열 평가


송시열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치적인 적을 많이 두었으나, 학식이 뛰어나 문하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선 국왕 효종, 현종 두 임금이 그의 제자였으며, 송상민, 송상기, 민정중, 김만기, 김만중, 이경화, 윤증, 민진원, 김익훈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많이 집필하였다.

 

송시열은 유교 예법을 고수하여 매우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여러 대안을 제시하였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양반의 노비증식을 억제하고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는 노비종모법을 옹호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인재를 등용하고 서얼에게 관직을 줄 것을 주장하고, 양반부녀자들의 개가를 허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정책은 양민의 생활안정을 위해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며, 양민들의 군비부담을 줄이는 호포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학문에의 치적은 뛰어났으나, 선진 문물의 도입을 통한 국부의 축적의 중요성은 거의 외면하였고, 넓은 시야를 갖추지 못해 결국 조선이 19세기 근대화의 대변혁에 적응하지 못한 점도 있다.

 

또한 효종과 더불어 북벌 추진에 뛰어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북벌을 주장했다는 기록이 없다.(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송시열이 효종과 북벌을 논의했다는 것은 그 본인만의 주장이다. 효종이 죽고 16년 후인 숙종 1년에 그는 유배중이었다.

 

그는 단지 북벌의 대의만 주장했을 뿐이다. 당시 그가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실제로 북벌에 대한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불러들인 전쟁인 병자호란(조청전쟁)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출처: 백지원의 "왕을 참하라" 하권 20쪽)

 

친명 반청주의자였던 송시열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오랑캐로 보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을 해 준 명나라에 대한 예는 끝까지 각별했다. 그래서 17세기 후반 명나라가 청에 망해가는데도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명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성을 보여주는 기록물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을 화양구곡에 남겼다. 송시열이 권력의 중심에 오간 기록들과 그의 죽음을 보면, 현재 대한민국사회가 겪고 있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계속된 마찰과 똑같다. 그의 묘도 화양계곡에 있다.


정리를 마치며


커다란 궤적에서 역사는 반복된다. 대륙과 섬나라사이에 낀 한반도는 섬나라의 침략과 대륙의 침략을 반복적으로 받아왔다.


언제 어느 한 편과 수평적인 관계가 없을 정도다. 문헌에 보면 2000년 한반도 역사는 1800년이 전쟁이나 갈등기였고 평온한 시기는 고작 200년에 불과했다고 한다. 지금도 평온한 시기가 아니다.

 

불교와 유교사상이 뿌리 박혀 온 시대에서 농민과 백성들을 수탈한 지방 호족세력이 과거였다면, 기독교가 자리잡고 있는 현대의 대기업은 국민과 서민을 볼모로 잡고 있다. 양 시대 공히 나라(官)라는 것이 있어 삼각축을 이루지만 국가가 제 역할을 못했을 때 나라는 망했다. (현대적 국가개념은 국제적 분열주의 원칙이라서 쉽게 없어지지 않겠지만.)

 

이는 현대사에서 한일합방, 전쟁, 분단에 이르기까지 누구 몇 명이 책임질 일도 아니다. 최근 친일명단 운운하며 쾌재를 부린 사람들도 비겁한 역사주의자에 불과하지 진정으로 국가를 위한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지도층도, 기록하는 학자도 커다랗게 열린 시각으로 접근해야할 것이다.

 

뒤죽박죽된 한중일(미)간의 역사. 대한민국은 앞으로 어떤 형태를 유지해야 하는가, 그저 고민스럽다.

 

 

 

정민(晶民) 박온섭(朴蘊燮) 선생(위사진속 가운데 분) 


괴산향교 전교(槐山鄕校 典校)
성균관 전인(成均館 典仁)
화양서원만동묘복원추진위원장(華陽書院萬東廟復元推進委員長)
화암서원장(花巖書院長)
괴산군서도회장(槐山郡書道會長)
향토사연구회 괴산군부회장(鄕土史硏究會 槐山郡副會長)
제5대 충청북도의회 의원(第五代 忠淸北道議會 議員)
라이온스클럽 355F지구 지역부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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