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e1: 무엇을 바라보느냐
전에 공부하던 학교에는 널찍한 잔디 구장이 있어서 주말이면 동네의 아이들이 와서 야구 게임을 하고는 했습니다. 그때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동네의 야구팀에 속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꼭 와달라는 아들의 부탁이 있어 토요일 오후 말씀을 준비하다가 조금 늦게 나갔더니 벌써 경기가 시작되어 있었습니다.
20-30명 아이들이 함께 야구를 하는데 죽 둘러보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아이가 있지요? 제일 잘생긴 우리 아들입니다. 아들이 속한 팀이 방어를 하고 있었고, 아들은 1루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다가가 스코어를 물었더니, 0:9라고 했습니다. “누가 9인데?” 했더니 자기네가 0이라고 했습니다. “야, 그럼 콜드게임이잖아! 졌네.” 그런데 아들의 표정은 전혀 괜찮았습니다. “아빠는. 아직 우리는 공격도 한 번도 안했는데 지기는 왜 져요?” 이렇게 저렇게 놓치고 하다 보니 1회초인데 벌써 9점이나 내준 것입니다.
똑같은 자리에 서있는데 한 사람은 0이라는 숫자를 보고 있었고, 한 사람은 9라는 숫자를 보고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도 어떤 사람은 좌절하고, 어떤 사람은 굳건히 이겨나가기도 합니다. 같은 어려움에서 어떤 사람은 그 자리를 푸른 초장을 만들어 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자리를 사막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전격적인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어떤 사람들을 그 땅을 불평의 땅으로 만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승리의 땅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만나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비딤이라는 땅에 서있습니다.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 서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땅은 므리바로 바꾸고 있고, 어떤 사람은 여호와 닛시의 땅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출 17장 말씀은 르비딤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1-7절은 그곳을 므리바로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봉독한 8-16절의 말씀은 그곳을 여호와 닛시의 땅으로 바꾸고 있는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므리바’라는 말은 “다툼”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르비딤을 다툼의 땅, 불평과 원망의 땅, 불신의 땅, 한숨의 땅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곳에 기쁨이 있을 리가 없고, 그곳에 아름다운 성도들의 모습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여호와 닛시’라는 말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승리케 하신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전쟁에 출정할 때는 그 군대의 깃발을 앞세우고 나갔습니다. 중대가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러나 그 군대의 깃발이 펄럭이면 아직 괜찮습니다. 한참 밀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 군대의 깃발이 더 이상 펄럭이지 않으면 진 것입니다.
“여호와 닛시,” 하나님께서 나의 깃발이 되셔서 우리로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문제 많은 르비딤을 승리의 땅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듭니까?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Move2: 그대 그리고 나-하나님의 VIP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나안을 향해 나아갑니다. 굉장한 사건을 경험하면서 기쁨도 있었고, 감격도 있었지만 지금 그들의 삶의 자리는 광야였습니다. 찌는 듯한 무더위도 견디기 어려운데 마실 물까지 없습니다. 그곳에 자기들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전쟁까지 일어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자리였고, 신앙의 자리였습니다. 이렇게 힘든 삶의 자리를 묘사하면서 성경은 그러한 단어로부터 시작합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다...”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단어는 “회중”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관련된 단어’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의 단어인 히브리어(카할)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것은 신약에 와서 ‘에클레시아’라는 말로 소개되는데, 우리는 이 말을 “교회”라는 말로 번역해서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회중으로 “서있음”을 강조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명령대로”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애굽을 나왔고, 지금 나아가는 길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말씀은 계속하여 이것과 관련된 세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떠나다,” “행하다,” 그리고 “장막을 쳤다”라는 동사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들이 떠났습니다. 행하였습니다. 장막을 쳤습니다.
이 모든 동작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떠나게 하셨습니다. 행하게 하셨습니다.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나아가는 여정,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그들이 행하고 있는 일들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떠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아가고 있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인해 그들의 생의 출발이 있었고, 하나님을 따라 나아가는 길목에서 잠시 머무는 땅에 마실 물이 없었고, 전쟁이 일어났다는 안타까운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떠났고, 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하고 있는데, 왜 어려움은 오는 것입니까? 불평하고, 투정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온 가슴으로 고백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백성이 되었다면 왕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자녀가 되었다면 하늘 아버지께서 먹이실 것입니다. 은혜로 해방되어 애급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새롭게 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수많은 재앙이 내렸을 때도 그들에게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입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자녀가 되었습니까? 유월절 어린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터뜨려져서 우리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적시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지나 하나님의 품안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찬양을 부르게 되면 울게 됩니다.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네...”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백성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친구 교수들은 딸이 어느 대학을 들어갔고, 전공이 어떻고... 하는데 저는 늦둥이 딸이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늦둥이 딸을 둔 아빠는 약간 푼수기가 생긴다고 하는데 저도 예외는 아닌 듯합니다. 퇴근길 아빠가 힘들어 보일 때면 딸은 여지없이 손을 모으고 그렇게 현관에서 노래합니다. “아빠 힘내세요. 세라가 있잖아요. 아빠 힘내세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 친구 교수들이 부러워서 그 딸을 하루만 빌려달라고 합니다.
대학생이 된 딸은 아빠가 쓰러지기 직전이어도 결코 그런 재롱은 부리지 않는다면서 간청합니다. 저는 절대 딸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기왕 딸 자랑하는 푼수가 되었으니 좀 더 합시다. 제 딸아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 아빠에게 와서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엄마,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인사합니다. 그리고 세수하고 자기 방에 들어가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경 한 장을 읽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아마도 큐티를 하는 모양입니다. 혼자서 머리 빗고, 그리고 가방 챙겨놓고 아침 식사하고 학교에 갑니다. “엄마 아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제일 먼저 달려와 문을 열어주면서 “아빠, 어서 오세요. 아빠 사랑해요.” 인사합니다. 딸 자랑할 만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희망사항’입니다. 아이가 자라가면서 더 성숙해 가겠지만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저는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 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광야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시겠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광야 길이지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과 역사들을 통해 가고 있는 걸음이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고개만 들면 저기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임재의 상징인 구름 기둥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들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을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갈라 주셔서 건너게 해주셨습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주시며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철저한 돌보심을 받은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그들의 문제는 단순히 그들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문제였습니다.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어려움은 그들의 어려움이 아니고,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을 뒤쫓아 오는 애굽의 군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루실 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걸어가면 되었습니다.
Move3: 희망이 되었던 사람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때에...”(8절)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마시게 하신 그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맛본 바로 그때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삶의 자리에서 다시 믿음으로 살 것을 요청하시는 때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아말렉이 공격해 온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만난 첫 번째 대적이었습니다. 광야에 사는 족속인 그들은 광야 환경에 아주 익숙하고, 광야 전투에는 탁월한 부족이었습니다. 광야 전투에서는 이스라엘이 이길 수 없는 대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모세가 하고 있는 말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9절). 젊은 장수에게는 사지로 나가라고 하면서, 자신은 안전한 후방에 가있겠다는 말입니다. 지도자로서 얼마나 무책임한 말입니까? 얼마나 비겁한 행동입니까? 그러나 10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여호수아가 그대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군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서로 신뢰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모세가 산에 올라간다는 말을 듣고 그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은 전쟁터로, 한 사람으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때 두 사람이 모세를 따라 올라갑니다. 아론과 훌이었습니다. 이 네 사람이 역사를 바꾼 것입니다. 공동체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린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가 말한 “창조적인 소수”(creative minority) 입니다. 오늘도 창조적인 소수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광야 교회는 문제가 많은 공동체였지만 창조적인 소수가 있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며, 싸우려고 달려드는 다수보다는 창조적인 소수가 있었기에 그 교회는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다시”라는 시에서 그렇게 노래합니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사람이다. 사람 속에 들어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희망입니다. 희망의 이유가 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모세와 여호수아는 희망의 이유였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희망의 이유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희망의 이유가 되어줄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내가 희망의 이유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희망의 이유, 내가 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정의 희망이 되고, 자녀들의 희망이 되고, 교회의 희망이 되고... 저는 살면 살수록 고백하게 되는 것 한 가지는 이만큼 누리고, 이만큼 섬길 수 있고, 이만큼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 평생을 기도로 사신 내 어머니 때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관절염으로 아픈 다리를 끌고 아들이 목산데 기도를 쉴 수 없다면서 교회당을 오르던 그 어머니가 희망의 이유였습니다. 희망의 이유가 있는 사람이 있는 그 공동체, 그 가정은 행복합니다.
Move4: 어떻게 바뀌는가?-손들고 살아라
그렇게 전투가 시작됩니다. 여호수아는 전쟁터에 나가고 모세는 산에 올라갑니다. 열심히 싸우면 이기게 되어있습니다. 전략이 좋고, 훈련이 잘된 병사들이 있는 부대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이겼습니까?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이유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전쟁터에서 계속 밀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웬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21세기에도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들의 정체성을 보여주시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손들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란다. 너희가 하나님 앞에 손들고 살아가면 승리의 땅에 설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메시지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손들고 사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하늘 향해 두손을 들고 하나님의 왕되심과 주인되심을 고백하며 사는 삶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손을 듭니까? 포로들입니다. 모세가 손을 드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 당한 포로입니다.” 오래 전 강릉에 무장공비가 출현해서 대간첩작전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뉴스위크지에 실린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북한 무장 간첩들 11명이 집단으로 자살한 사진, 60년이 지나도 계속되고 있는 이 민족의 비극을 진솔하게 드러낸 사진이었기 때문입니다. 동해안에 침투했다가 잠수함이 바위에 좌초되면서 오고 갈수도 없이 꼼짝 없이 갇히게 되었습니다. 손들고 나오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손들지 않고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고집부리지 말고 하나님 앞에 손들고 나오면 너희는 살게 된다. 너희는 여호와 닛시의 땅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모세야, 이제 광야길을 걸어갈 텐데 네 능력 의지하지 말고, 네 경험 의지하지 말고, 네 재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대장이었습니다. 대장은 아무 때나 손을 들면 안 됩니다. 그러나 모세는 두 손을 높이 들고 그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대장이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내 인생의 깊은 터널에서 저는 하나님만을 신뢰합니다.”
손들고 산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산다는 의미, 즉 기도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열어가는 삶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손들고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서 손들고 사는 것입니다. 바로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지는 사건이 마치 동화처럼 생각되는 분이 있다할지라도 이것을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명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만입니까? 우리에게도 오늘 말씀하십니다. “네가 손을 들고 살면 너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세상에 어려움이 있고, 네가 서있는 자리가 르비딤 한복판에 서있다 할지라도 네가 손들고 살아가면 그 땅은 여호와 닛시의 땅이 될 것이다.” 기도를 쉬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어떤 이유로든 기도의 손을 내려뜨리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스바냐 3:16 말씀은 그렇게 일러 주십니다.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절은 말씀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를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기도가 힘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양식입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대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의 승리는 기도의 승리였습니다. 여호수아의 승리는 기도의 승리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승리는 그가 진정으로 기도에 승리할 때 주어집니다.
삶의 어려운 문제가 부딪혀 올 때, 어떻게 그 문제를 풀어 갑니까? 기도였습니다. 목이 마를 때 어떻게 합니까? 기도합니다. 힘들고,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 어떻게 합니까? 기도합니다. 모두가 원망하고 있을 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기도로 그의 삶의 문제를 풀어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목마름의 현장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기도의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지략가로, 지휘관으로, 이스라엘을 진두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전쟁터에서도 기도의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통로이기에, 능력을 공급받는 보급로이기에 기도하는 사람이 이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바꾼 대통령”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톨스토이는 그를 가리켜 “진정한 거인,”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인으로 기억될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의 삶의 시련이 없어서 그렇게 존경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까? 그에게 고난이 없어서 그렇게 멋있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까? 그의 삶은 고난과 실패로 얼룩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이었습니다. 무릎 꿇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백악관은 미국의 연방 정부를 움직여가는 정치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기도실로 바꾸었습니다. 백악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남북전쟁에 북군의 총사령관으로 출정했을 때, 참모들은 긴급한 보고사항이 있어서 그의 텐트로 뛰어갑니다. 그러나 흰 손수건이 그곳에 걸려 있으면 그들은 아무리 긴급한 사안이어도 밖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손수건은 총사령관 링컨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하나님이 감동하시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손들고 살면 승리하리라.” 그것은 모세의 가슴에 심어준 하나님의 요청이었습니다. 그것을 라이프스타일로 삼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싸우는 일도 필요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는 것도 필요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갖는 것도 필요합니다. 적절한 곳에 잘 투자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일은 더욱 필요합니다. 내 인생을 내 힘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내 능력으로 싸울 수도 있습니다. 내 방법으로 내 인생을 세워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손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삶의 자리를 기도실로 바꾸십시오. 거룩한 손을 들고 하나님을 향해 고백하는 자리로 삼으십시오.
Move5: 다시 르비딤에서-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상적인 말씀 한 가지는 16절,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대대로 싸우리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도 우리 삶에는 아말렉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를 주춤거리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문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아말렉이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는 물도 없을 수 있고, 내 생명을 위협하고 들어오는 대적으로 둘러싸인 르비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서갈 수 있다면 하나님이 대신 싸우신다는 말씀이지요. 불평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한숨 쉬며 살아가면 우리가 서있는 그 땅은 므리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손들고 살아갈 때 르비딤은 하나님이 대신 싸우시는 여호와 닛시의 땅, 하나님의 주시는 승리를 경험하는 희열이 넘치는 생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고민은 손을 들고 서있는 모세의 손이 내려오더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같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의 손도, 영적인 신비를 알고 있던 사람의 손도 항상 들고만 있을 수는 없고, 그 손이 내려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론과 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서 모세는 손을 들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손을 계속해서 들고 있을 수가 없다는데 고민이 있습니다. 피곤에 지친 모세를 아론과 홀은 돌 위에 앉히고, 모세가 힘들어 손이 내려올 때, 양쪽에서 손을 붙잡아 줍니다. 혼자서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목사도 혼자 설 수는 없습니다. 붙들어 주는 아론이 필요합니다. 훌이 필요합니다. 서로 돕지 아니하면, 서로 돌보지 않으면 혼자서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영적 전투에서 가장 공격받기 쉬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을 무너뜨리면 일시에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경험하는 문제의 대부분은 어떤 연유로든지 간에 지도자들이 공격을 받아 무너짐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가장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격려하십시오. 두 손을 붙들어 주십시오. 우리 모두가 치열한 영적 전투에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격려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혼자 서는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동역자들이어야 하고, 동역자를 필요로 합니다. 바울과 같은 영적 거성도 아들과 같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너 보기를 원한다. 너는 속히 내게 오라.” 우리 모두 누군가가 필요하고, 그 누군가가 되어야 합니다.
Move6: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손들고 사는 사람들의 고백
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속해서 묵상이 되었던 말씀은 그것이었습니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여호수아에게 민족의 장래를 맡기고, 국운을 맡기고, 산에 올라갔을 때 모세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올라갔을까? 그의 심정을 어떠했을까? 모세가 저 산 아래에서 열심히 전투를 하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있을 때 진종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치열한 전투가 행해지고 있는 바로 그 시간, 민족이 서느냐, 그대로 망하느냐가 결정되는 그 심각한 순간, 마냥 손만 들고 있을 때 모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 시간 모세가 기도하고 있었다면 그는 과연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었을까?
"저 전투에서 이기게 해주십시오." "이번 입시에서 수석입학하게 해주십시오." "사업에 성공하게 해주십시오..." 그와 유사한 그런 기도를 드리고 있었을까? 본문은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사건을 우리는 출 14장 말씀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홍해 앞에 지팡이를 들고 서있을 때 그는 그때 무슨 기도를 했을까? 찬양을 했다면 무슨 찬양을 했을까? 르비딤 전투에서 그가 고백을 드렸다면 어떤 고백을 드렸을까?
개인적으로 저희 가정이 경험한 한 가지 사건을 통해서 모세의 심정을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목요일 아침이면 서울 강남의 한 CBMC에서 매주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벌써 4년째 계속해온 사역입니다. 그 주간도 저는 변함없이 아침 6시 30분에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러 가야 했습니다. 그날 아침 제 아내는 8시에 수술을 받기로 했고, 7시 40분에 수술실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수술하면 괜찮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지만 "암"이라는 소리에 가슴을 졸이고 있었습니다.
늦둥이 딸이 눈에 밟힌다면 씩씩하던 아내도 암 수술을 앞두고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존 웨슬리가 했던 "나는 설교 때문에 삽니다"라는 말을 너무 좋아하고, 좌우명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러 가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가는 아내를 혼자 버려두고 정말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가야하느냐?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리고 매주 금요일 아침이면 말씀을 전하도록 되어 있는데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그 일을 포기할 수 있느냐,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가야 한다. 당신이 가서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수술도 잘 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아내의 그 말에 힘을 얻어 저는 1시간 먼저 수술실에 들어가는 기도를 함께 하고 병실을 나섰습니다. 마치 수술 받는 병원이 모임 장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새벽길을 걸어가는데 그렇게 발걸음이 무거울 수 없었습니다. 그때 마음속에 기억나게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이었습니다. 모세의 심정도 그랬겠구나. 젊은 지도자에게 국운을 맡기고 후방에서 손을 들고 서있었을 때 모세의 심정도 이러했겠구나. 그때 모세는 무슨 고백을 했을까? 기도를 했다면 무슨 기도를 했을까?
암 진단을 받고 수술날짜를 잡고 돌아오던 날도 그랬고, 묵상하며 새벽길을 오르는 저에게 입술에 담아주신 고백은 시편 18편이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암 선고를 받고 수술 날짜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부부의 입술에도 그 찬양을 담아 주셨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울면서 그 찬양을 부르며 그 새벽길을 올라갔습니다. 아내가 수술실에 들어가 있는 5시간 동안 저는 돌아와 수술실 밖에 서서 미친 듯이 혼자 그 찬양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나중에 수술이 마친 후 아내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암 수술 받으러 들어가면서 보호자 한 사람 없이 들어가는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남편이 뭐하는 사람인지... 휴대폰 전화 주세요. 내가 당장 전화해서 달려오게 할께요.” 위로하듯이 하는 말에 아내는 미소만 보내며 그렇게 속으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보호자이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서 듣고 싶었던 고백은 그것이었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 현장에서, 삶의 굽이굽이마다에서 듣기를 원하시는 고백은 그것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군대의 숫자가 능력이 아니고, 내가 소유한 무기가 능력이 아니고, 내가 가진 경험이나 인맥이 능력이 아니고, 내가 이룬 업적이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십니다. 물 없는 땅, 생명의 위협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의 승리를 경험한 후에도 외쳤을 고백은 그것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르비딤은 우리의 삶의 현주소입니다. 물이 없어서 위협을 받고, 전쟁이 일어나서 죽음의 위협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르비딤, 그러나 반석에서 물을 내신 여호와, 우리의 대적과 대대로 싸우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키시는 곳입니다. 삶의 현장마다에서 거룩한 손을 들고 서서 그렇게 고백하며 한해를 사시길 바랍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