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부여, 그 은혜의 땅
이광복
사람은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작가도 그럴 수밖에 없다. 필자의 경우 항상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왔다. 특히 자라날 때의 환경은 평생을 좌우한다. 필자는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객지로 나온 이후 낮이나 밤이나 고향을 생각했고, 잠을 잘 때에도 고향으로 머리를 두었다. 그러다 보니 내 작품 속에는 고향 사람들, 고향의 지리, 고향의 역사, 고향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스며들곤 하였다. 그뿐 아니라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작품 속에 고향의 이야기를 삽입시키려고 노력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累代)에 걸쳐 충남 부여군 석성면 증산리에서 세거(世居)해 나왔다. 필자는 바로 증산리 원증산마을에서 태어났다. 본적지는 이웃 연화마을이지만, 선친 형제분께서 일찍이 연화마을을 떠나 솔가하신지라 필자는 원증산마을 어딘가에 탯줄을 묻었다. 그곳 증산리에는 선조의 묘소가 있고, 사랑하는 아우들과 일가친척과 선후배들과 정다운 이웃들이 살고 있다.
원증산마을 이웃에 십자가마을이 있다. 십자가마을은 문자 그대로 십자거리에 이루어진 마을이다. 부여와 논산, 공주와 강경을 잇는 국도가 열십자[十]로 교차한다. 따라서 십자가마을은 각종 차량이 가로세로로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이다. 그런 십자가마을은 제법 번화한 편이다. 면사무소는 본래 석성리에 있었는데 지난 70년대에 이곳 증산리 십자가마을로 이전해 왔다. 왕조시대에는 당연히 석성리가 석성면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대중교통, 특히 육상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증산리가 석성리보다 더 각광을 받게 되었다. 십자가마을에는 파출소와 우체국과 농협이 있다. 이런저런 소규모 회사에다 공장이며 편의점과 몇몇 음식점까지 있다. 말하자면 석성면의 중심이 종래의 석성리에서 지금의 증산리로 이동한 것이다.
이 십자가마을에 석양초등학교가 있다. 석성리에 아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석성초등학교가 있는데, 우리 모교인 석양초등학교는 50년대 중반 석성초등학교에서 분리 독립하여 개교했다. 지금은 큰집이라 할 석성초등학교가 학생 수 부족으로 폐교 위기에 몰린 반면 작은집에 해당하는 우리 학교는 그런대로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필자는 이 학교에 들어가 전교 수석으로 졸업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부여의 옛 이름은 사비(泗沘)였다. 백제는 성왕(聖王) 16년부터 의자왕(義慈王) 20년까지 123년간 이곳 사비(泗沘)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그때 우리 석성면은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고, 신라시대에는 석산현(石山縣)이었다가 고려시대부터 석성현(石城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백제의 역사와 맞물려 이처럼 석성의 역사도 깊다. 특히 우리 고장은 사비 도성으로 드나드는 관문이었다. 육로(六路)든 수로(水路)든 석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사비 도성을 출입할 수가 없었다. 육로를 이용하려면 십자거리를 거쳐야 했고, 뱃길을 이용하려면 반드시 파진산 물목을 지나야 했다.
석성은 이처럼 교통과 국방의 요충이었다. 현내리 일대에는 아직도 백제시대에 돌로 쌓은 성곽이 남아 있고, 능산리 왕릉원 근처에는 사비 도성을 에워싸고 도는 나성(羅城)이 있다. 수년 전에는 그 근처 절터에서 백제의 사상과 예술이 농밀하게 응축된 국보 중의 국보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되었다. 태조봉이 우뚝하고, 백마강이 파진산을 휘감아 도는 우리 석성면 일대야말로 백제의 최후 보루였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말이 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이다. 석성과 사비는 바로 순치(脣齒)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석성은 옛 사비의 입술에 해당하는 곳으로 왕도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여의 경관은 수려하다. 발길 닿는 곳마다 명승이요 절경이다. 문화도 찬란하다. 도처에 역사와 문화재와 전설이 있다. 부여의 산하에는 역사 속으로 스러져 간 백제의 통한이 서려 있다. 하지만 부여는 오늘도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나성 등을 통해 저 눈부셨던 백제의 역사를 증언하며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우뚝 섰다.
그토록 아름다운 부여는 필자를 낳고 길러준 몽매에도 잊지 못할 은혜의 땅이다. 필자는 바로 그곳의 공기를 호흡하며 자라났다. 따라서 필자의 작품 중에는 부여와 관련된 담론이 많다. 아니, 거개의 작품들이 부여를 발판으로 삼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 속의 인물, 무대, 사건, 언어 등등 모든 문학적 요소들이 바로 부여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부여야말로 내 문학의 출발점이라 하겠다.
예컨대 1979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목신(牧神)의 마을』은 충남의 어느 농촌을 무대로 펼쳐지는 작품이다. 지명(地名)을 가상으로 설정했다. 여기에 공주·논산 등 일부 실명도 가미했다. 필자는 이 작품을 쓸 때 양송이 공장 건설과 관련된 서사구조를 기본 축으로 구성했다. 이와 함께 세태의 변화를 접목시켰다. 즉, 조용하고 평화롭던 어느 농촌에 양송이 공장이 들어오면서 이상야릇한 풍조가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지난 세월 산업화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미풍양속이 사라졌고, 인심과 인정이 사나워졌다. 순박했던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변모했다. 이웃과 더불어, 이웃과 함께 울고 웃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리울 때마다 필자는 저절로 고향을 떠올렸다. 이제 그것은 일종의 버릇처럼 굳어졌고, 훈훈한 인정이 그리워지면 조건반사처럼 고개를 들어 고향 쪽을 바라보곤 하는 것이다.
『목신(牧神)의 마을』은 발표 당시 숱한 화제를 모았다. 이 작품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당시 언론에서 앞 다투어 과찬을 해주었고, KBS에서는 이 작품을 각색·연출하여 라디오 연속극으로 방송했다. 필자가 이 작품을 발표할 때만 해도 양송이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 농산물이 우리 몸에 유익한 식품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부여의 특산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우리나라 농산물 시장에 나오는 양송이의 거의 대부분이 부여군 석성면에서 생산되고 있다.
이래저래 『목신(牧神)의 마을』에 나오는 일련의 가상 지명과 그 공간이 바로 부여라는 사실을 모를 사람은 없다. 부여가 아니고서는 소설 속의 다양한 사건과 사연들이 엮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까지도 부여 사람들의 언어로 되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 부여에는 부여 사람들끼리 즐겨 쓰는 특유의 말투가 있다. KBS에서 라디오 연속극을 한 달 동안 방송할 때 성우들이 우리 고향 말씨를 어떻게나 잘 연기하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004년에는 장편소설 『불멸의 혼』을 간행했다. 이 작품은 저 유명한 계백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이 작품 속에는 부소산, 백마강, 낙화암, 조룡대, 정림사지, 궁남지, 능산리 등 부여의 명소들과 황산벌 등 역사의 현장이 모두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부소산과 백마강은 백제의 상징이다. 낙화암과 조룡대는 백제의 최후를 증언해 준다. 정림사지 5층석탑에 백제문화의 정수가 담겨 있다.
어느 독자가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백제의 역사뿐만 아니라, 부여와 논산의 지형지세를 잘 알게 됐노라고 토로했다. 정말 부여와 논산에는 계백 장군의 삶과 죽음, 더 나아가 그의 모든 것이 응결돼 있다. 그러므로 부여와 논산을 모르고서는 황산벌 전투를 운위할 수가 없다. 계백은 백제가 낳은, 만고청사에 빛나는 최고의 영웅이다.
필자는 아주 어린 유년 시절부터 계백 장군을 흠모했다. 필자가 태어나고 자란 석성면 증산리는 곧 백제의 옛 도성 사비에서 황산벌로 나아가는 길목이다. 우리 마을 앞을 지나는 국도는 바로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진군하던 길이다. 필자는 논산대건중고등학교 재학 중 그 길을 따라 장장 6년 동안 도보로 통학했다. 흙과 모래와 자갈로 이어지는 울멍줄멍하고 구불구불한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저 구만 리 장천에 계백 장군의 원혼이 떠도는 것만 같아 남 몰래 눈시울을 적신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필자는 벼르고 별러 마침내 계백 장군을 소설로 부활시켰다. 이 작품은 독자들로부터 기대 이상의 큰 환영을 받았고, 필자는 그 여세를 몰아 2011년 『계백』으로 제목을 바꾸어 재출간하였다. 지금도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보여주고 있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한편, 필자는 1999년 12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장장 11년 동안 여러 지면에 무려 30편의 연작소설을 썼다. 그러고 나서 이들 작품을 한 자리로 모아 2018년 1월 『만물박사(전3권)』를 간행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승우는 부여 출신으로 남의 논문과 회고록과 자서전을 전문적으로 대필해 주는 사람이다. 정작 그 자신의 학력은 고졸(高卒)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학벌과는 관계없이 얼마나 학식이 높은지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만물박사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량한 대필료를 받아 핍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필자는 이 연작소설을 쓰면서 그 밑변과 행간에 내 고향 부여를 정밀하게 깔았다. 부여의 인물, 부여의 산천, 부여의 경관, 부여의 인심 등을 곳곳에 녹여 넣었다. 이와 함께 수시로 주인공 승우가 절절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대목을 통해 내 자신의 향수를 달랬다. 이 연작을 쓰는 동안 언젠가 한번은 고향이 하도 그리워 작품을 쓰다 말고 직접 고향으로 달려간 적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만물박사』 연작 중 하나인 「버드나무」를 쓸 때에는 과거 뼈저린 가난이 골수에 사무쳐 눈시울이 화끈했다. 물론 허구이지만, 주인공 승우가 어린 시절 부여 궁남지로 소풍 갔을 때의 대목을 써내려 가는 동안 울컥하는 감정을 다스리기가 무척 힘들었다. 소풍 날 다른 아이들이 하이얀 쌀밥 도시락은 물론이고 눈깔사탕에다 사이다하며 오징어까지 가지고 나왔지만, 승우는 겨우 낡은 보자기에 찐 고구마 몇 개를 싸 가지고 갔을 뿐이었다. 승우는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해 버드나무만 보면 저절로 부여 궁남지 소풍에서의 쓰라린 추억을 반추하게 된다. 이렇듯 필자의 작품 속에는 부여가 여러 형태로 투영돼 있다.
한편,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주 부여를 내왕하고 있다. 최근에도 혼자 몇 차례 다녀왔다. 물론 좋은 작품 소재도 찾았다. 그곳은 누가 뭐래도 내 작품의 영원한 공간이다. (문화일보 2019년 6월 8일자 31면 게재)
<수필>
부여의 꽃으로 다시 피어나라
표중식
아주 오래 전 낙화암을 다녀온 후, 이번에 부여를 다시 찾았다. 마치 고향과도 같이 백마강 물결은 정겨웠다. 어느 쪽이 상류인지 알 수 없는 백마강 물길은 천년의 애상을 실어 나른다.
부여는 백제의 옛 도읍이다. 곳곳에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어 시공을 초월한 듯 만감이 서린다. 유적지를 걷다보니 현세의 유명 문인을 배출한 고장답게 어딜 가나 화선지의 적필체처럼 거리가 탁 치고 오르듯 뭔가 날카로움이 번득이는 도시의 모습을 보인다.
부여에는 저항의 시인으로 알려진 <껍데기는 가라>의 신동엽이 있고, 연작시 <새벽>의 정한모가 있으며, <칠갑산>의 노래 시인 조운파가 있고, 장편소설 <계백>의 작가 이광복이 있다. 네 분 모두 부여가 낳은 소중한 인물들이다.
백제의 유적은 볼 때마다 정한과 감회가 다르다. 영욕이 교차하고 폐망의 왕국이라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하겠으나 세상 그 어느 왕국이 폐망의 역사가 없으랴. 역사의 상흔에서가 아니라 백제가 주는 충절의 정신적 유산이 지금도 우리의 몸에 생생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부여에 들어서면 왕성에 있는 듯한 느낌이다. 부여군 중심지가 문화유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고풍스럽고 분위기가 아늑하다.
예전에 봤던 부소산의 가을은 깊었다. 정상에 올라서면 낙엽이 무릎까지 빠질 정도였다. 고란초를 볼 수가 있었고, 약수가 나그네의 가슴을 적시었다. 낙화암 그 위에서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감회에 젖었던 그 무량함을 시어를 빌려 무제로 적어본다.
세월의 흔적은 부소산 낙엽 되고
영고성쇠는 백마강 물결 되니
고란사 범종 소리만 새 되어 나른다
누가 낙화암 삼천궁녀라 했는가
떨어지는 꽃 두손 모아 받을 길 없으니
떠가는 뱃전에 물결만 씻기운다
백마강 예 그대로 있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아지 못하니
낙화암 바라보는 눈길에 눈물만 비친다
아! 현세의 어지러움이 소용돌이 쳐
객수가 산산이 부서지니
고란초 천세의 영광 안고 다시 피리라
궁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 해서 궁남지라 불리는 명소가 있다. 연꽃이 철을 잃어 많이 사그라졌지만 나그네의 아쉬움을 알았는지 새로이 핀 꽃들이 반갑게 맞이해 보슬비를 맞으며 완상하는 즐거움이 매우 컸다. 가을에 핀 꽃이 어찌 국화뿐이랴.
정림사지는 빈 터로 남았으되, 풍상에 깎인 주춧돌이 세월의 무게를 묵묵히 안고 빗살에 맨 몸을 맡긴 채 젖고 있다. 어찌 세월이 인간에게만 있으랴. 역사는 세월이니 정림사지 또한 역사렷다.
부여에 가면 볼 것이 많지만 못 보면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이 백제금동대향로다. 부여국립박물관 기획전시관에 소장된 향로를 보니 백제인의 세공기술이 신의 경지인 것을 알게 한다. 은은하면서도 정교하고 웅장하면서도 곱디고우니 누가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 할 것인가.
부여의 밤은 고즈넉하면서도 찬란하다. 때 맞춰 백제문화제가 열려 형형색색의 아경이 밤길을 황홀하게 만든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에 잠자기 아까운 부여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언제, 다시 오랴. 부여의 밤에 흠뻑 취해 보리라. 꿈에 낙화암을 그리고, 황산벌을 달리며, 계백장군의 용맹을 찬탄하리라. 백제의 융성을 부여의 땅에 세우리라. 다시 일어나라 백제여! 부여의 꽃으로 다시 피어나라.
<수필>
부여 문화유적지를 찾아서
함 영 관
지난 10월 1일 한국문인협회 제 39차 전국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부여에 도착했다.
마침 백제문화제 “한류의 원조 백제를 즐기다”(2019.9.28~10.6)라는 주제로 문화제가 열리는 기간이다. 부여는 백제의 왕도로서 123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백제 역사적 중심지이고, 세계문화유산 백제유적지의 도시이다. 지난 5월에 성동문인협회에서 부여에 문학기행을 다녀왔지만 문화유적지를 다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던 곳이라서 마음이 설렌다.
부여를 찾는 길은 서울에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찾아 백제문화를 즐겨볼 수 있는 곳이다.
문화유적지를 탐방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 떠나기 전에 유적지에 관한 서적을 읽고 전문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메모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하필 이때 태풍 제 18호 미탁이 불어와 우산을 쓰고 다니면서 외부 유적지는 제대로 보지 못해 수박 겉핥기식이 된 것 같다. 한낱 탐방객이 무엇부터 어떻게 관람할지도 몰라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부여의 한국 관광명소 100선에 선정된 궁남지, 부소산성과 낙화암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백마강 유람선에 승선하여 낙화암을 바라보며 이번 대회의 역사 특강시간에 삼천궁녀가 꽃처럼 떨어졌다는 것이 전설적 사실로 조작된 역사로 오점을 씻어내려고 역설하신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역사는 항상 강자인 승자 편에 서서 써내려왔다는 것은 사실로 많이 증명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궁남지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연못으로 백제의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으로 매년 7월에 연꽃축제가 열린다. 그 연목 가운데 섬을 만들어 포룡정이라는 정자까지 다리로 걸어갈 수 있다. 궁남지 주변에는 멋진 수양버들이 많이 있다. 연꽃은 이미 떨어졌지만 연잎이 무성한 풍경이 좋아 우리 일행은 우산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국보 제9호(높이 8.9m)로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고자 석재를 택했다.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석탑에 반하여 이 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주고 있다.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했다 하며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한다. 이 탑은 과거 한때는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려왔다. 백제 사비성을 침공한 당나라장수 소정방이 일층 탑신에 승전기공문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婢銘)을 새겨놓았던 부끄러운 역사를 가졌었다. 이 또한 패자의 서러움이라고 할까?
국립부여박물관을 관람하였다. 부여의 선사와 고대문화를 볼 수 있었다. 사비백제와 백제 금동 대항로가 한 눈에 들어왔다. 또한 기증으로 빛난 문화재 사랑을 느끼며 백제불교문화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이번 문화 유적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백제금동대향로다. 이 향로는 향을 피워 나쁜 기운을 깨끗이 하기 위한 도구이다. 백제인의 탁월한 감각과 뛰어난 공예기술로 나아가 백제왕실의 의식이나 제사용으로 사용된 신물(神物)로 규정하고 있다. 높이 61.8cm, 국보 287호로 1400여 년간 땅속에 묻혔다가 1993년 발굴된 유물로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받았을 때 위기극복을 위해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지켰다 함은 백제도 나당(羅唐)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금동향로를 만들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금동대향로는 백제의 숨결이 살아있는 듯한 종교와 사상까지 담은 백제문화의 정수이다. 한 마리 봉황이 향로꼭대기에 앉아 있는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뚜껑은 부드러운 능선이 겹겹이 싸인 산 모양이다.
또한 부여백제 왕흥사 사리기(舍利器)를 관람하였다. 이 사리기는 보물 제1767호에서 국보 제327호로 승격(2019.7.22)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 공예품이다. 이는 2007년 왕흥사 목탑 터를 발굴하던 중 발굴되었다. 이 사리기는 참 수행을 한 부처나 승려 몸속에 생긴다는 구슬 모양의 유골을 담는 용기로 대웅전 앞 목탑지 진흙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곁에서부터 청동제 사리합(10.6cm) 은제사리호(6.8cm) 금제사리병(4.6cm) 등 3겹으로 구성되었다. 성왕의 아들 백제 27대 위덕왕 24년 2월 15일 사리를 봉안했다는 명문(銘文)으로 새겨져 있다.
이번 제65회 백제문화제 기간에 부여군을 찾아 백제 문화유적지를 탐방함으로써 부여탐방에서 제일 큰 역사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 중국문화를 일찍 받아들여 이를 소화 흡수하고 일본에 전수함으로써 일본의 아스카(飛鳥)문화를 형성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백제인의 꿈과 땀이 서려 있는 백제문화가 불교와 밀접함을 알 수 있었고 정림사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도 놀랐다. 이제 우리는 백제의 문화를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겠다. 백제의 문화와 함께 문학의 향기에 젖어 한편의 멋진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수필>
고란초
최학용
부여는 서울에서 머지않은 곳에 있는 백제의 도읍지다. 몇 차례 다녀 온 곳이다. 올해 10월 한국문인협회가 주관하는 행사에 남편과 함께 갔다. 10월 태풍으로 많은 비가 왔으나 중요한 곳은 다 돌아보았다. 궁남지에서 서동요에 나오는 선화공주의 전설을 떠올렸다. 정림사지와 5층 석탑도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박물관에 들려 백제유물도 보았다. 백화정과 고란사도 들려 고란약수도 마셨다. 한 바가지의 약수를 천금같이 받아드니, 내장이 씻어질 것 같은 상쾌한 마음이 행복을 부른다.
풍경소리를 품은 듯한 고란사 앞 선착장에 내려 바로 백화정으로 올라갔다. 걷기 불편한 울퉁불퉁한 비탈길 산성 북쪽 백마강변 험준한 바위가 있고, 위에 지은 백화정이란 현판이 걸린 단칸 육각형 정자가 있는 곳을 갔다. 이곳이 백제가 멸망할 때 궁녀들이 절벽에서 몸을 던졌던 곳이다.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929년 지어진 정자다. 현판에 붙은 백화정(百花亭)은 당나라 시인 소동파의 시 구절에서 따 왔다고 전해진다. 정자의 바닥은 높게 만들고 남쪽에 나무계단을 가파르게 만들어 오르내리게 했다. 6각형 원두막 식 주변에는 위험 방지용 난간이 있다. 천정에는 여러 가지 꽃문양이 예쁘게 보였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정자 앞에 저자를 알 수 없는 낙화암이란 시가 있었는데 이번엔 눈에 뜨이지 않았다.
백마강 기슭, 물새들이 날아들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부소산 서쪽 벼랑의 바위를 낙화암이라 부른다.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 때 나당(羅唐) 연합군이 합세해서 수륙 양면에서 백제를 공격해 패망하게 되자, 삼천궁녀와 여인들이 몸을 더럽히지 않고 절개를 지키려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에 몸을 던진 곳이라 전해오고 있다. 무심히 천년을 울음 울다 갔으련만 삼천 궁녀의 옷자락은 찾을 길 없다.
지금 보면 낙화암에서 뛰어 내려도 백마강은 고사하고 고란사까지도 못 가는 지형이다. 후에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낙화암 아래 큰 바위에는 조선 숙종 때 재상이며 명필인 송시열의 친필이라는 낙화암(落花巖)의 휘호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를 보면 낙화암은 조선시대에도 유명한 관광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화정을 끼고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가면 부소산 북쪽 백마강변에 제비집 같은 절벽에 고란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에는 백제의 패망과 관계가 있는 전설이 있다. 지금의 절은 고려시대 창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절개를 지킨 백제 여인들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고란초가 자라는 절벽에 지어지면서 고란사란 절 이름을 지었다 한다. 처음에는 절이 아닌 정자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한다. 지금의 절은 앞면 7칸 측면 4칸의 법당과 요사체로 된 작은 규모의 절이다. 불교의 전파 의미보다 법당 뒤편에 자라는 고란초와 약수가 유명하다. 물이 좋아서 백제의 왕들이 어용수로 이용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약수 주변에 있는 고란초는 다년생 응달 식물로 그늘진 산의 바위틈이나 낭떠러지 산비탈 벼랑에 붙어산다. 뿌리와 줄기는 옆으로 길게 뻗으면서 마디에서 고사리 잎 같은 것이 달리는데 조금 두껍고 광택이 나는 홑잎이다. 어떤 잎은 두세 갈래로 갈라지기도 한다. 색상은 진한 초록색이며 끝 쪽은 약간 회색으로 보였다. 지금의 고란초는 환경의 변화로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엔 절 뒤쪽 화장실근처 샘터에서 한참 찾던 중 마침 고란사 스님을 만났다. 샘물지붕 위쪽에 있는 고란초라는 글씨를 알려주었다. 글씨 왼쪽에 화살표가 위 중간 아래쪽으로 3개의 화살표가 보인다. 화살표 주변을 찾아보아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 줌으로 몇 장 찍었으나 선명하지는 않다. 그렇게 하여 고란초를 볼 수가 있었다. 고란사 뒤 응달 절벽 바위틈에서 자라는 소형의 식물로 고란사 뒤의 절벽에서 자라기 때문에 고란초라는 이름이 생겼단다.
내려오는 전설로는 백제왕이 항상 고란사 뒤쪽 바위틈에서 나오는 약수를 좋아해서 매일 약수를 떠오게 하였다. 이때 약수 근처에 자라는 특이한 풀이 있어 이름을 고란초라 불렀고, 임금에게 드릴 물동이에 고란초의 잎을 한 두 잎 띄워 드리면서 고란약수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란약수를 한잔 마시면 3년 젊어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한다. 노부부가 자손이 없어 할머니가 영감에게 아들을 낳고 싶으니, 약수를 먹고 젊어지면 자손을 볼 것이라며 약수를 권했다 한다. 약수터에 간 영감이 오지 않아 약수터를 찾아가니 젊어졌을 영감은 없고, 할아버지 옷을 입은 갓난아이를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젊음을 추구하는 욕심은 매 일반인 것 같다.
역사의 현장을 가보면 억지로 맞춘 것 같은 곳도 있고 사실로 보이는 것도 있음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여는 여러 곳에 많은 역사의 유적이 있어 볼거리도 공부할 것도 많아 몇 번 갔어도 또 가보고 싶은 유적지다.
<수필>
구로지부의 기쁜 날
조한순
충남부여 삼정부여유스타운 굿뜨래홀에서 전국 문인 대표자들이 모였다. 태풍 미탁이 부산까지 상륙하였다고 하여 날씨 걱정을 많이 하였으나 문인들이 모인 행사당일에는 날씨가 참아주었다. 이번 구로지부의 참석은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우리 『구로문학』제22호가 한국문인협회가 주최한 제8회 문학지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제3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한국문인협회는 국내외 지회·지부에서 발행하는 문학지 중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기 때문이다. 장동석 회장님과 구로회원 대표 14명은 주황색티를 차려입고 수상무대에 올라 세를 자랑하며 기념사진도 찍고 수상의 기쁨을 가졌다.
『구로문학』은 1996년부터 시작하여 지난해 제22호를 발행하였다. 2013년에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우수지부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장동석회장님과 전 회원들은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다”고 수상을 기뻐했다. 한편『부천문학』『아산문학』『울산문학』도 우수상에 선정되었다.
그날 행사장에 고선자 남편은 논산에서 ‘밤 막걸리와 치킨’을 바리바리 싣고 현장까지 찾아와 행사가 끝나기까지 한 시간여나 기다렸다고 한다. 덕분에 우리 팀은 저녁시간에 이광복 이사장님 외 임원들과 함께 화기애애한 자축파티를 하였다. 방바닥이 즉석 잔치상이 된 번개파티가 유난히 빛이 나는 밤이었다. “구로문학지 최우수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준비해왔다” 하니 고맙기 그지없다. 임도 보고 뽕도 따는 그 정성에 감탄하며 즐기는 “그 맛! 꿀맛이었다” 막걸리가 반 박스나 남았다고 한 병씩 선물로 안고 집으로 왔다.
회장님이 받은 축하 꽃다발 중 한 다발은 고선자 선생이 내게 주어 집안 거실에 꽃아 놓았다. 가을 국화꽃향이 화사하게 아침 햇살을 받으며 집안 가득하니 그대로 축복이었다. 이번 부여 나들이는 “문학지콘테스트” ‘백만 원의 수상금’ 외에도 한국문인협회 이광복 이사장님과 전국 임원진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큰 의미를 안고 왔다. 부여 이튿날은 많은 비가 내렸다. 부여의 백마강을 배로 이동하여 고란사와 백화정과 낙화암에 올라갔다. 비가 내리기 때문에 안전문제도 있어 낙화암을 오르는 데는 망설이는 이가 많았다. 백화정은 다소 낯설었다. 다녀온 지 10여년은 되었나 싶다. 당시 낙화암에서 내려다보이는 적은 양의 물을 보면서 “백마강 물 위로 떨어지면 정말 죽겠는가?”하고 의문을 제기하자 “사실이 아니다”라고 누군가 말하기도 하였었다.
이번에는 때마침 비가 많이 내린 탓인지 물이 불어난 백마강은 강줄기가 세찬 것 같다.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는 둥글게 흙을 돋아 사람이 올라설 수도 있어 낯설다 “아마 소나무가 커서 그렇게 해놓은 것 아니겠는가” 라고 옆에 서 있던 문인이 내 낯선 기억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한편 행사장에서 홍문표 박사님 강의 중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중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들을 야사로 알고 있었지만 백제의 이야기에 적지 않은 내용이 잘못 기재되어 있다는데 놀랐다. 사관이 쓴 역사가 아니지만 심히 왜곡되게 썼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쓰는 이의 위치와 그의 정서와 가치관, 또한 적국이라면 적대감에서 썼다고 하는 말이 맞을 것이며, 그 둘은 문인이라는 사실에 더 주목할 일이라” 고 했다
내용이 왜곡된 백제의 역사이면서 특히 왕의 무능함을 기록하느라 “의자왕이 3천 궁녀를 거느렸다”와 “낙화암에서 3천 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등, 의자왕을 폄하하여 쓴 것이란다. 교수님은 역사 이야기에서도 문인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했다. 야사의 그 내용을 의심해보지도 않고, 문인들은 왜곡된 내용을 다시 작품화하여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했다.
한 나라 안에서도 역사 기록이 사관에 따라 인식의 차이에서 다른 내용으로 해석 될 수도 있듯, 승전국의 인물들이 썼다면, 패전국의 이야기를 승리한 입장에서 그 정서로 썼다면 당연히 패전국을 폄하했을 것이다. 우리가 역사 뒤안길에서 볼 때, “지금의 국제상황에서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쓴다면 우리를 둘러싼 어느 나라에서건 공정하게 쓸 수 있을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다.
이번 행사에서 부여의 음식을 네 끼니를 먹고 왔다. 첫날 점심은 밖에서 먹었고, 두 끼니는 숙소에서 뷔페식으로 먹었다. 네 끼 식사 중, 가장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마지막 식사인 ‘북엇국’이었다. 이구동성으로 국물이 시원했다는 대답이었다. 장소가 비좁을 정도로 꽉 채운 손님들의 식사 후 그 표정은 ‘맛이 있었다’는 흡족한 얼굴이었다. 마침 쏟아지는 소나기가 여유를 부릴 시간을 주지 않고 서둘러 곧 서울로 향하게 했다.
역시 돌아서면서 나도 백제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 부여에 들어서면서 낮은 건물들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서울에 밀집해 있는 높은 건물이나 아파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궁금해 알아보니 안내자는 이곳의 지역 특성상 4층 이상 건물을 짓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토목공사 중 만약에 파다가 유물이 나오면 더 깊이 파는 공사가 중지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실은 곳곳이 파기만 하면 유물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기에 땅을 마음대로 파낼 수가 없다는 것이고, 허가되었더라도 유물이 나오면 장소를 보호하고 모든 것이 확인될 때까지 건물을 지을 수 없으며, 건물을 높이 올릴 수없는 당연한 이유이기도 하였다.
나는 고향이 충남 서산이다. 아무리 도시에서 60여년을 살고 도시의 문화에 길들여졌다고 하더라도 태생의 근본인 초년시절의 생활습성과 정서는 시간이 지나도 뼈에 배어있고, 먹거리도 변하고 발달되기도 하지만 몸에 배인 맛과 향에는 어쩔 수 없나보다. 결국 백제의 뿌리가 있는 부여에서 북엇국을 먹고 나의 입맛을 알게 되었으며 나도 백제의 후예임을 새삼 일깨워주는 나들이였다.
<수필>
백제인의 숨결이 가득한 고장, 부여
임 옥 순
2019년 10월 1일, 아침 일찍 수도권 지역의 대표자 문인들이 서울 사당동 주차장에 집결하였다. 부여에서 열리는 제39차 전국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수원문인협회 부회장인 필자도 일행 몇 명과 같이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지정된 버스에 올랐다. 문단 등단 30년이 훨씬 지났지만 그동안 직장생활과 건강 문제로 문단 활동 교류에 소홀했던 것 같다.
창작동화집 12권과 수필집 2권, 개인 간증집 1권 등을 출판할 만큼 창작활동엔 그런대로 열중해 왔지만 회원들의 창작활동을 위한 일에 앞장서지 못한 것 같아 뒤늦게 임원활동을 하는 것이 좀 쑥스럽다.
그런 까닭일까? 같은 버스에 탄 작가들을 둘러봐도 낯익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나마 지난해 가을 30년 만에 수원에서 1박 2일 동안 제38차 전국대표자대회를 개최하면서 임원 자격으로 준비하고, 행사를 치루는 동안 한국문인협회 회원인 것을 큰 자부심으로 여기게 되었다. 또 글 쓰는 일 못지않게 문단활동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늦게나마 깨닫게 된 것 같았다. 수원문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어떻게 하면 전국 작가 대표들에게 잘 알릴 수 있을까, 행사를 준비하면서 수원을 사랑하는 수원문협 회원들과 고민하던 일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런 까닭일까?
최근에 가족, 친지와 몇 차례 구경삼아 부여의 곳곳을 돌아본 일이 있었지만 수원문협의 대표자 자격으로 다시 부여를 찾게 되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해설사가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니 이해도 빨랐고, 궁금증도 사라졌을 뿐 아니라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에 대한 인식도 바로 잡힌 계기가 되어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제일 먼저 찾아 간 곳은 부여에 있는 신동엽 시인의 문학관이었다. 식전 행사 전에 백제문화 이해를 돕는 데는 최근 부여를 빛낸 신 시인의 문학관을 찾아 살펴보는 것이 가장 뜻깊은 일이었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신동엽 시인은 1930년에 태어나 1969년 39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부여를 빛낸 예술가의 혼이 가득 담긴 문학 자료를 보면서 문명비평가적 기획자로서 한 시대의 문화적 준거 틀을 바꾸고 싶어 했던, 자신만의 사상을 가진 폭넓은 시인이라는 사실을 공감하게 되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에 이르렀지만 그가 떨쳐버리고자 했던 껍데기 같은 삶의 흔적이 아직도 가득한 세상이기에 이 시인의 시정신이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있다는 안내자의 설명은 웬일인지 가슴 저 밑바닥부터 아프게 하였다. 그가 바라던 세상은 아직도 이 땅에 정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작품을 통해 표현한 그의 시심을 이어받아 우리 문인들이 다음 세대에 이어지도록 독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 줄 수 있는 글쓰기에 더욱 정진해야 하지 않을까?
문학관 안에 전시된 수많은 시인의 흔적 속에서, 삶의 진솔한 모습이 담긴 창작활동, 특히 「껍데기는 가라」「풀잎 사랑」의 작품이 나온 배경을 상상하며 깊은 공감을 갖게 되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 이 문학관에서 다양한 가을축제 문학행사가 열렸다고 하니 부여 땅에서 얼마나 많이 사랑받는 시인인가를 잘 알게 되었다. 연중 이곳에서는 월별로 다양한 문학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신동엽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것은 물론 부여인의 문학적인 소양을 높여 가고 있으니 우리 수원문학인들도 이러한 지역문학 정신을 좀 더 배워 행동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최근 수원에서 태어난 여성문학의 대표자, 화가이며 선구자로 높이 알려진 ‘나혜석 연구’발표와 관련 문학행사가 해마다 그녀의 생가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문학관 건립도 못한 채 의견이 분분한 수원문학의 미래가 갑갑하기만 하다.
또한 조선 말기 수원 화성을 건축하면서 수원과 시민들을 아끼는 마음을 담아 시로 표현한 정조대왕의 높은 문학정신을 기리는 화홍문화제 정신은 수원문인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단결된 문인 정신으로 발전시켜 과거, 현재, 미래의 문학을 한눈에 만나볼 수 있는 수원문학관 건립이 시급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또한 식전 마지막 행사로 충남 부여 출생이신 홍문표 박사님의 역사 특강을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백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하여 평생 연구하고, 조사한 결과 최근 백제 역사에 잘못 기록된 글을 늦게나마 바로잡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천 년이 훨씬 지나서야 선의의 전설과 악의의 전설, 의자왕의 타락과 백제 패망설, 해괴한 괴담과 백제 침략설, 왜곡 날조된 낙화암의 전설 등을 바르게 밝혀 백제문화의 정통성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으니 정말 기쁜 일이 아닌가?
그리고 훗날 백제사를 기록한 고려 역사학자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고려말 문인 김일연의 ‘삼국유사’가 백제 역사를 지금까지 왜곡시킨 부분이 많았다니 문필가의 한 사람으로서 글 쓰는 일에 책임감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부여 출생이신 현재의 한국문인협회 이광복 이사장님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삼정부여유스타운 굿뜨래홀에서 개최한 제39차 전국대표자대회 본 행사는 전국 각지에서 달려 온 지부 대표들의 뜨거운 성원과 열정에 후끈 달아올라 각종 문학 시상식이 아주 다채롭게 펼쳐졌다. 또한 밤늦도록 행사장 주변에서 백제문화제 축제 행사로 이루어져 한층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튿날은 이른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그러나 백마강 왕복 승선과 고란사, 낙화암, 백화정, 궁남지, 정림사지 오층 석탑, 국립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해설을 듣는 동안 낯설게 느꼈던 부여에 대한 새로운 역사 인식이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였다. 그리고 얼마 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백제 역사 유적지구인 부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능산리 고분군 등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어 무엇보다도 보람 있었다.
특히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 뿐 아니라 지역사회 문학을 보다 깊이 있게 발전시키고, 문인들은 좀 더 책임 있게 글을 써서 독자들에게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바르게 조명시켜 나가야 한다는 본분을 늘 잊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갖게 되었다.
<수필>
치욕의 석탑
윤 백중
부여군 왕궁터 한복판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을 구경했다. 역사의 한을 품은 석탑을 보는 날 하늘도 서러운지 태풍 미탁은 하루 종일 비를 뿌렸다.
비 오는 날을 골라서 관광하기도 쉽지 않은데 운이 좋았는지 비가 많이 오는 날 탑의 여러 장치와 물 흐름을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안성맞춤이었다.
5층으로 된 석탑을 바로 앞에서 몇 바퀴 돌면서 여러 가지를 관찰했다. 바로 앞에서 보니 육중하게 보였다. 부여가 남긴 유일한 지상 석탑이란 기록이 있다.
탑 가까이서 보니 맨 아래 세 개로 된 지대석이 있고 그 위에는 조금 작은 저석이 있다. 위에는 중석이 5개 있는데 양 옆에 있는 돌을 우주 석 양 옆에 붙은 돌을 면석, 중앙에 있는 돌을 탱주라 부른다. 위쪽에 띠로 두른 것이 갑석이다. 위에서부터는 탑의 몸체로 사리를 봉안하는 탑신부(塔身部)다. 여기에는 한면에 4개의 석판이 있다. 양쪽에 우주를 만들고 사이에 면석이라는 석판을 끼웠다. 이곳이 사리를 봉안하는 곳으로 예배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탑신 2층부터 아래쪽은 옥개 밭침을 두층으로 했고 탑 위로 올라가면서 크기가 좁아진다. 몸돌 위쪽은 옥개받침을 두 줄로 넣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진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지붕받침 아래에는 사각형의 석재를 놓고 윗면을 비스듬하게 다듬어서 간략하게 만들었다. 넓은 옥개석은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탑의 가장 위에 놓이는 상륜부(相輪部)는 가장 좁으며 여러 개의 구성요소로 노반석등의 장식을 했다. 몸돌에 비해 지붕돌은 폭이 넓고 작은 자재를 사용하여 외견상은 목조탑과 유사하다. 비올 때 위에 물이 몸통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방지하는 장치도 되어있어 몸채의 손상도 막아준다. 안정감 있는 체감 률로 격이 높은 석탑이다.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 정도크기의 면석 4개가 한 면이다. 4각형의 탑이니 석판이 16개가 된다. 이 돌 판을 보았는데 고어 체 한자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다. 자세히 보아도 판독을 할 수 없다. 역사공부로 이미 알고 있는 대당평백(大唐平百) 제국비명(濟國碑銘)을 찾을 수가 없었다. 비오는 날이라 안보였으나 구름 없는 날 오후 2시경에 보면 보인다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었다. 최신형 핸드폰으로 여러 장 촬영하여 형태를 보니 글자는 알 수 없고 희미한 한자를 볼 수 있었다.
삼국사기의 번역을 보았다. 일층 사면에 이천 여 자에 달하는 비문의 내용을 보았다. 백제 유일의 지상 5층 석탑으로 유명하기는 하나, 글의 내용을 보면 백제 치욕의 글이다.
당나라 대장 소정방이 화려했던 백제의 수도 부여를 함락하고 그 전공(戰功)을 이 탑에 기록해 놓은 것으로 유명해진 것이다. 소정방은 신라군 5만 명과 당나라 군사 13만 명으로 나당 연합군울 만들어 백제의 수도 부여의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백제 의자왕을 생포하여 항복문서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항복문서에는 이천 자에 달하는 내용으로 백제 정벌의 당위성을 기록했다. 당 황제에게 축전과 장군들의 전승을 기록했다. 함락 후 새로 설치한 5개 도독부와 지방기구 편제 내용도 기록되었다. 기록에는 서기 1028년 건립된 것으로 되어 있다.
가까이에서 보니 나무 탑 같이 정교한데 돌탑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창의적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탑 전체가 대단히 아름답다. 화강암으로 만든 돌탑의 우아한 조형미 균형과 절제의 미(美), 겸손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고도의 균형미를 지니고 있다. 조형의 미와 비례의 미도 지니고 있다. 삼국시대 석탑 연구의 대단히 귀중한 자료로 생각된다. 몇 바퀴 돌며 보아도 천년 된 탑으로는 볼 수 없고 중간에 몇 차례 미적 감각을 살리기 위한 건축물로 개축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석탑은 사찰건축의 기본이 된다.
백제는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세워 국가 중흥의 염원이 담긴 정림사지 5층석탑을 세워 왕의 권력이 현실 사회를 초월한 신성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한 것 같다. 당시 불교는 국가 체재를 정비하는데 있어 종교 이상의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뒤쪽에 절터가 있고 남쪽에는 두 개의 작은 연못이 있다. 비를 흠뻑 맞으며 현장에서 관찰했다. 나무 탑 같이 정교한 석탑의 완숙하고 세련된 미를 볼 수 있다. 낙수면의 내림 마루 등 나무 탑의 기법을 볼 수 있지만 창의적 변화를 추구하여 완벽한 조형미를 완성하여 국보 반열에 올랐다.
예술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탑을 장식한 글의 내용이 소정방의 승전 기록 탑이 되었으니 역사의 한을 남긴 치욕의 탑이다. 조선왕조 16대 인조대왕의 병자호란 완패 후 삼전도 치욕의 비석과 함께, 현세의 국내외 정세를 역사 속의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되겠다.
<수필>
백제금동대향로를 트로피로 하면
박성용
지난 2019년 10월 1~2일 한국문인협회 200여 명의 회원들이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 개최된 제39차 한국문인협회 전국대표자대회에 참석했다.
산 옆에 집을 지으면 산이 바람막이가 되어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 되기에 예전에는 겨우살이를 위해 나무가리를 화목(火木)으로 만들고, 앞들에는 논과 밭이 있어서 농사 지어먹고 살아가는 데 좋아서 대개 사람들은 산모퉁이 옆에 집을 짓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예전에도 백제의 왕궁터로 선택해서 살아온 것을 볼 때 백마강과 드넓은 평야가 풍수지리학적으로 아주 좋은 자리라고 생각해서 백제고도(百濟古都)로 조성했다고 보겠다. 여기는 서해가 가깝고 해변에서 왕도(王都)에 필요한 물자수송이 원활하고 해서 도읍으로 정한 듯 보인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이 한강을 끼고 있고 서해가 가깝고 해서 전국에서 바다로나 육로로나 강을 이용해서 물동량을 운반해서 살아가기에 가장 좋은 입지조건을 갖춘 도시로 보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래서 부여는 백마강이 있고 좋은 산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어서 산 좋고 물 좋고 들[野]이 좋아서 왕도로는 안성맞춤의 도시로 살기 좋은 백제의 고도였으며, 그곳이 천혜의 지리조건이 좋게 갖추어져 있는 곳으로 부여라고 하겠다.
나는 처음 찾아온 부여이지만 백마강과 부소산의 낙화암을 보고 고란사(皐蘭寺) 뒤편에 있는 고란수(皐蘭水)를 먹고 배 타고 돌아왔지만 부소산이 조그마한 산이라도 백제 왕궁의 전설을 한 몸에 안고 살아온 것 같다.
기원전 600년대에 세워졌다는 정림사지오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은 형식미와 세련된 완숙미를 보여준다고 했다. 1400여 년이 된 이 석탑은 오랜 풍상의 세월을 보내고도 풍화작용으로 외부만 약간의 거친 손상이 있을 뿐 원형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옛날의 임진왜란과 6.25 남북한의 전쟁에서도 수많은 포탄과 폭격에도 이 5층 석탑은 손상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하늘이 보호하신 5층 석탑이라고 하겠다.
국보 제287호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는 몸통은 주전자 몸과 같고 뚜껑은 봉황의 형체로 손잡이와 같고 밑바탕의 안장은 용무늬 그림으로 희망(希望)의 뜻으로 택했으니 아주 보기 좋았다.
여기에 뚜껑의 손잡이에는 각종 산(山)이 첩첩이 그려져 있고 골짜기에는 물이 흐르고 폭포수도 있고 그 산속에는 사슴과 호랑이와 상상(想像)의 동물과 생활 속의 동물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봉황은 여의주을 물고 비상(飛上)하는 상으로서 하늘을 나르려는 모형이라고 한다. 몸통을 주전자로 보면 주위에는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연꽃잎마다 각종 악사(樂士)들이 악기로 연주하는 모형이 있다고 하며 기기묘묘하게 형성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제일 아래에 있는 안장의 좌대는 용은 그 무거운 짐을 싣고도 용트림하면서 비상(飛翔)하려고 하는 모습에서 만인들의 힘이 절로 치솟아 오르는 듯한 모형이라 힘이 절로 날아오르는 듯해서, 부여의 도읍이 힘차게 발전하며 날아오르는 듯한 힘을 준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 백제금동대향로의 모양대로 주전자를 만들어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면 좋고, 백제금동대향로와 더불어 부여의 이름도 널리 선전이 될 것이라 하여 건의해 본다. 여기에 술잔도 연꽃무늬로 만들어서 같이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들이 모든 생활체육과 활동에서 시합할 때는 선후(先後)를 가리고 우열을 가려서 상장(賞狀)이나 트로피를 준다. 이 때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의 모형으로 만든 트로피를 주면 화려한 시상식이 될 것으로 본다.
이런 일에 트로피로 사용하든, 주전자로 만들어 대중적으로 사용하든 안 하든 간에 하고 안하고는 부여 군민들의 생각과 행동에 달려있다고 하
<수필>
백제를 읽다
김 연 선
독서는 작가와 독자 간의 씨름이다. 무더운 여름 소설 한 판 뜨고 나서, 만난 주인공이 또 보고 싶거나 궁금해지면 슬며시 작가의 상이 그리워진다. 오래된 집을 청소하다가 먼지 뒤집어 쓴 고서를 만나면 얼마나 설렐까. 거기에서 그리운 가족의 마음이 배어나온다면 얼마나 흡족할까. 갇혀 있는 세월의 빗장을 여는 기대로 신호등 없는 로터리 길을 풀고 부여로 들어갔다.
부여라는 이름의 하늘 아래, 온순한 산세, 기름진 들녘 끝을 비구름이 쓸고 있다. 백제문화제 축제 기간이다. 숨 고운 백제의 옛 도읍이 험한 꿈에서 깨어 일천삼백여 년 시공을 뚫고 나온 유물이 축제의 꽃이 되었다. 화려한 밤, 역사책에 꽂혀있던 주인공들이 공연을 하듯 하나하나 살아 움직인다.
간밤 내내 다 캐어내지 못했는지 아침에 더 심해진 빗줄기는 땅 속을 두드려댄다. 잠자는 유물이라도 묶어 올릴 태세다. 이른 아침, 구드래 선착장에서 뱃머리를 돌리자 모로 누운 책을 열 듯 부소산 산자락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40여 미터 폭포를 연상케 하는 낙화암. 백제가 멸망하자 몸을 던진 궁녀의 죽음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한 이름이라고 말한다. 바위 위에 하늘에 닿아 있는 듯 보이는, 학이나 찾을 법한 육각지붕의 백화정이 소나무 사이로 방긋방긋 얼굴을 내민다. 눈 내린 겨울의 백화정 모습을 상상하니 진정 소나무에 앉으려는 학의 모습일 듯하다. 꽃은 지고 영혼은 땅과 하늘 사이를 오가는 학이 되었을 법도 하다.
배에서 내려 잠깐 들른 고란사는, 절벽에 자리하고 있어 규모가 작지만 고려시대에 건립된 오래된 절이다. 산길에 놓인 계단과 돌을 살몃살몃 딛노라니 작은 틈, 천년의 숨구멍 속에서 정제된 역사가 실타래처럼 풀어져 나올 듯도 하다. 이끼 낀 아름드리나무를 눈으로 밟고 올라보니 오래된 시간의 냄새도 느껴진다. 절 마당이다. 나무가 우거져 시야는 좁지만 백마강의 운치를 느낄 수 있고 멀리 바라보이는 풍경이 시원하고 아름답다. 비도 그치지 않고 시간이 촉박해 오래 머물 수 없어 아쉽다. 마시면 젊어진다는 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청소년 교육기금 마련을 위한 헌금 줄에 천 원짜리 지폐를 접어서 걸었다. 지폐를 묶는 동안 앞에 다녀간 사람들과 한마음이 된 듯한 느낌이 가슴에 잔잔히 출렁이는 듯 뭉클한 경험이 기분 좋았다. 문이 열려 있는 작은 종각에 부부용 베개만 한 타종봉이 눈에 들어왔다. 자유롭게 타종을 할 수 있어 친근감이 일었다. 불전함에 천원을 넣고 타종봉 당겼던 손을 놓았다. 웅~~~~~~ 산신각 지붕 너머 한 뼘 보이는 백화정으로 종소리만 보낸다. 좁고 가파른 하늘길로 오르는 종소리는 천년의 경계를 넘어 닿는다. 떨어진 꽃들의 풀지 못한 향기가 그윽한 이내처럼 흩어지는 듯하다.
다시 배에 올랐다. 궂은 날의 이내처럼 고개가 숙여졌다. 구드래 나루로 되짚어가는 붉은 갈색이 도는 물길. 낙화암 아래를 지난다. 강이 붉다. 왜 붉을까, 왜?
일천 삼백여 년, 흐르는 죽음과 간밤에 본 노들다리에 우뚝 살아난 백제금동대향로, 비는 주르륵 흘러내리고, 흘러내리고, 버스는 정림사지로 향했다.
소실되고 초석만 징검다리처럼 남아 허허로운 정림사지 한가운데, 우산도 쓰지 않은 석탑이 아주 오랜 세월 견딤의 미학을 정갈하게 품고, 뭔가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오층석탑은 중국 목조탑을 모방했지만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보다 아름다운 구조미를 확립하여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 자리매김한 자랑할 만한 탑이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1층 탑신에 사비성을 침공한 당나라 소정방이 승전기공문인 ‘대당백제국비명’ 글자가 새겨져 있다. 털어버릴 수 없는, 털어버리고 싶은 기억을 안고 버텨 견딘 세월, 버티게 한 자, 버티는 자, 누구인가.
영험한 기운이 남아 있다는 석불좌상 또한 기구한 역사를 한 몸에 담고 있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남아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고, 머리와 보관은 후대에 맷돌을 다듬어 대충 만들어 얹었다고 한다. 깨어져 소실되고 남은 것으로 끼워 맞춘 팔각대좌 연꽃 문양의 부드러운 곡선이 피어나는 듯 살아있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새로 지은 박물관에는 시간이 모자라 포기하고 궁남지로 향했다.
추수한 들녘같이 썰렁한 궁남지가 흠뻑 젖고 있다. 축제 속에 흥겹던 꽃은 연못을 버리고 어디로 갔을까. 향기 잃은 옛길로 활짝 피어나오는 백련 한 송이 철모르는 반김이 어여쁘다. 비에 찌그러진 부용꽃을 털고 사진을 같이 찍으니 웃음이 난다. 서동과 선화공주 사랑이야기를 신나게 피워내는 문화해설사. 연꽃향 그윽한 계절이 오면 백제도 살아난 옛사랑으로 잔치를 열겠지. 백련, 홍련, 빅토리아수련, 파피루스, 물칸나 외국에서 온 꽃들에게 쾌히 자리를 내준 궁남지, 신라와 백제의 화합으로 인한 평화와 사람이 가야할 길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태풍으로 인한 비가 더 거세어져 백제왕능원에 가지 못하고 박물관에 갔다. 출발시간이 지체되어 두루 감상하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걸 오래 보기로 마음먹었다.
정식명칭이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 받침대는 한 마리 용으로 이루어져있다. 역동적인 용의 입에서 토해진 기는 연꽃을 탄생시키고, 극락세계의 연꽃에서는 만물이 신비롭게 탄생된다는 불교의 생성관인 연화화생사상이 반영됐다. 74개의 봉래산이 중첩되어 양각된 뚜껑에는 지상의 선계를 표현했는데 산과 다양한 동물, 음악을 연주하는 신선, 명상하는 신선, 낚시하는 신선, 말 타고 수렵하는 신선, 머리감는 신선 등 다섯 신선도가 정교하다. 5개의 향연구멍, 6군데 나무, 12군데 바위, 산 중턱을 가르는 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잔잔한 호수, 봉황과 봉황을 바라보는 5마리 원앙의 움직임이 각 방향에서 한곳으로 모아져 재미있다. 양각된 문양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여 신성한 향이 하늘로 올라 멀리 퍼지기를 바라본다. 향로는 백제의 예술혼이 담긴 최고의 보물임이 분명하다.
신선사상도 좋고 연화화생사상도 훌륭하다. 낙화암, 정림사지, 궁남지 사랑, 백제의 역사와 만난 하룻밤 낯, 짧은 만남이지만 온몸에 스며들어 백제가 되어본 감동은 크다.
마음속에 담은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아름다운 외침을 다시 읽는다. 천 삼백여 년 잠에서 달려와 조화의 아름다움을 몸소 보여주는 까닭은 내 나라 너의 나라, 이 꽃 저 꽃, 내 땅 네 땅이 다르지 않고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함이 아닐까.
<시>
시간은 죽지 않는다
ㅡ부소산 기슭에서 ㅡ
여월정 조영희
지나간 역사 속의 시간은
사람들의 숨소리에
겁을 먹고 숨죽였던 길 위에서
스치는 바람에 베어지고
지나가는 발자국에 허물을 벗는다
귀 기울이면 전생과 이생의 비밀이
멈칫멈칫 들려오는
바람의 조각들은 모여서
썩지않는 끈으로 구드래 담을 치고
가던 길을 묶는다
허공을 뚫고 혼불을 나르는
백아강 물안개는
궁남지 연꽃잎에 앉았다 일어나고
부여를 휘어 감고 울다만 바람도
부소산 나뭇가지에 걸렸다
끝나는 길은 없고, 죽는 시간은 없듯
전세와 현세의
시간과 길이 얽히고 휘어져
목숨 줄 잇는 역사는
땅 속에 발을 뻗고 눈 감고 하늘 보는
시간의 심장을 밟고 오늘도 길을 건너 간다.
첫댓글 부여전국 대표자 대회참석 체험 글 입니다. 부여 지부에서 옮겨 왔습니다. 조한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