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제제기
박인환은 전후 모더니즘을 이끈 기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문학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박인환의 시세계에 대한 평가는,
전후 모더니즘의 대표라는 영광스러운 평가와 센티멘털리즘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양상으로 흘러왔지만, ‘신시론’이나 ‘후반기’ 같은
모더니즘 집단의 일원으로 평가될 때를 제외하면
그에 대한 평가는 후자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찍이 고은은 “‘후반기’ 동인은 1930년대의 ‘해외문학’파의 그것보다도 더 저질로 나타났고
그들이 추앙하는 이상 김기림에 대한 모더니즘의 견강부회적 근거야말로 그
들을 문학적 사이비 집단이 되게 했고 그것은 전혀 유행적이었다.
”1)라고 평가했고, 박인환과 동시대를 살았던 김수영 또한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다 갔다지? (……)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벌써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들이다.
”2)라고 그의 시를 비판했다.
하여, 박인환의 문학은 항상 ‘센티멘털리즘’과 ‘포즈에 불과한 코스츔’(김수영)이라는 부정적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러한 흐름은 비교적 최근까지 재생산되어 왔다.
3)
그러나 박인환의 시에 대한 평가는 2000년대에 접어들어 조금씩 바뀌고 있다. 그 변화의 방향은 대략 두 가지이다. 첫째, 박인환이 한국전쟁 직전까지 발표한 작품들을 대상으로 현실주의적 경향을 읽어내려는 흐름. 이것은 박인환의 문학을 모더니즘만이 아니라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도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이를 위해서 몇몇 논자들은 박인환이 194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도 하며,
그의 초기 시편들에 나타난 범아시아주의나 탈식민주의의 흔적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기도 하고, 나아가 박인환이 주장한 시민정신을 근대(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정신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둘째, 박인환의 전체 시세계를 근대에 대한 부정과 미적 모더니티의 관점에서 의미화하려는 흐름. 이것은 박인환의 문학을 ‘모더니즘’이라는 다소 평면화된 사조적인 이해를 넘어서 모더니티의 차원에서 해명하고, 나아가 그의 시가 근대 전체와 맺는 부정적 관계를 가시화하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를 위해서 몇몇 논자들은 박인환 시의 센티멘털리즘이 현실과 싸우기 위한 결과이며 미학적 전략(정영진)이었다고 주장하며, 벤야민의 비극적 역사관을 빌려와 박인환의 전후 시편들에서 비극적인 전망의 시화(詩化)(박현수)를 논증하기도 하며, 전후 폐허의 상황을 종말과 파국의 시간으로 인식하는 박인환의 문학을 근대라는 타자에 대한 동일화의 지향과 그 좌절의 드라마(이기성)로, 현대 문명과 대면하는 자의 마땅한 예술가적 우울이자 역사적 현실적 체험을 내면화한 실존적 개인의 환영/파국 체험(김용희)으로 읽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적 전유의 두 방향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상반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며, 각각이 초기 시와 후기 시를 핵심적인 대상으로 선취(選取)한다는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지만, ‘센티멘털리즘’이라는 제한적인 평가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이러한 해석적 확장 작업은 박인환 문학의 핵심이 무엇이었고, 그 ‘핵심’에 비추어 그의 문학 세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이러한 의혹은 특히 해석적 전유의 첫 번째 흐름, 즉 박인환의 문학을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박인환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적이 있다는 사실과 그
가 남로당이나 조선문학가동맹과 관계를 맺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추측’에
근거해서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박인환의 시가 현실주의적 경향을 띠었다고 말하는 것은 박인환의
시의 현실비판적인 경향이
20세기 초 영국의 모더니즘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과도기적 현상이나 한낱
‘포즈’에 불과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즉 박인환 문학의 본령은 ‘죽음’과 ‘부정’을 전면에 내세운 전후의
시편들에 있다는 평가를 뒤집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이러한 평가들을 재론함으로써 박인환의 초기 시에서 확인되는
현실주의적 경향을 공산주의(사회주의)와의 연관성이
아니라 모더니즘의 차원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답하려 한다.
2. 박인환 시의 현실주의와 모더니즘
일반적으로 박인환의 문학은 한국전쟁을 분기점으로 전쟁 이전의 모더니즘의 세계와 전쟁 이후 실존적인 ‘죽음’의 세계로 양분되어 이해된다. 앞서 살폈듯이 전후의 시세계에 대한 평가는 낡은 시대의 감수성과 언어에 불과했다는 부정적인 평가와 전후의 비극적 전망을 종말과 파국으로 시화했다는 평가로 나뉜다.
하지만, 어쨌거나 문학사적인 평가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박인환의 전후문학이 ‘죽음’의 문제를 실존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으로 대략적으로 합의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문제는 전쟁 이전의 박인환 문학이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전쟁 이전의 박인환 문학은 대체적으로 모더니즘 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평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신시론’과 ‘후반기’의 모더니즘이 반드시 동일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나아가 박인환의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이라는 사조 일반과 동일시하는 것도 타당성이 떨어진다. 말하자면 박인환은 세 개의 얼굴을 지닌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시세계는 ‘신시론’ 시기의 현실주의적 경향의 모더니즘에서 현실주의적 경향이 탈각된 ‘후반기’ 시기의 모더니즘적 경향으로, 그리고 전후의 실존적 ‘부정’과 ‘종말’ 의식으로 변모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기 구분이 편의적인 구분이 아니라 문학적인 변화의 문턱임에도 불구하고 선명하지 못한 이유는 ‘후반기’ 동인이 단 한 권의 동인지도 출간하지 못한 상황에서 박인환이 《선시집》(1955) 한 권만을 남기고 요절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박인환의 초기 시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문학적 출발점인 ‘신시론’에서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거쳐 ‘후반기’로 나아가는 과정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박인환은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이 무렵 박인환이 종로의 낙원동에 개업한 서점 ‘마리서사’를 매개로 다양한 문화·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의 문학적 행적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별로 없다. 전집에 실린 연보에
따르면 박인환은 1948년 입춘 무렵 ‘마리서사’를 폐업하고 4월에는 양병식, 김차영, 김규동, 김수영, 김경희, 김병욱과 함께 동인지 《신시론》 2집을 발간했다. 신시론 동인은 1947년 하반기에 결성되어 1948년에는 《신시론》 1집을 발간했고, 1949년 4월에는 동인지 2권에 해당하는 공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했다. 김경린의 회고4)에 따르면 박인환과 김경린의 첫 만남은 1947년 가을이었고, 이 첫 만남에서 박인환은 기다소노 가쓰에(北園克衛)가 이끌었던 일본 모더니즘 운동 단체인 ‘바우(VOU)’ 그룹에 속해 있던 김경린에게 “김형, 우리 멋있는 현대시의 운동을 하여 봅시다.
다시 말해서 모더니즘 운동 말입니다.”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박인환과 김경린의 만남, 그리고 ‘신시론’의 결성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은 논자들에 의해 소개된 바가 있어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박인환이 김경린에게 제안했던 ‘모더니즘’의 실체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가를 아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까닭은 ‘신시론’과 ‘후반기’를 연속선으로 파악해온 기존의 연구와 달리, 해방 이후의 모더니즘이 결코 단선적이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무렵 그의 발안으로 하나의 서클이 생겼다. 박인환, 김수영, 임호권, 김경린, 김병욱, 이한직, 영문학자 김경희, 그리고 나도 끼어서 전후 세계의 현대시의 동향과 새 시인 등 소개, 특히 쉬르레알리슴과 그 이후의 모더니즘 시인들을 중심으로 한 강연과 시 낭독과 소개를 위한 발표를 결의하기도 하였다. (……) 이렇게 되면서 이번에는 앤솔로지를 계획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다. (……) 이 합동시집에 들어가야 할 김병욱, 이한직, 김경희 등이 어떤 사소한 감정으로 들지 못했다.
인환이가 시로서는 제일 좋아했던 김병욱의 시가 빠지게 된 것은 그 당시 그 모임 안에서 여러 가지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5)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중심으로 한 양병식의 회고에는 ‘신시론’에 관한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정리해서 말하면 《신시론》 1집이 발행될 당시의 동인은 김경린, 김경희, 김병욱, 박인환, 임호권의 5명이었고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간행되기 이전에 김수영, 김종욱, 양병식이 동인에 합류하였다.
그런데 《신시론》 1집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이 합창》 사이에 문학적 이념의 차이 때문에 동인에서 탈퇴한 시인들이 있었다. 그 이념적 차이란 현실주의를 지향한 김병욱과 모더니즘을 지향한 김경린의 대립이다.6) 김병욱은 김수영이 〈거대한 뿌리〉에서 “8·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라고 기록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출신이었고, 해방기 모더니스트 가운데 가장 정치성이 강한 시를 쓴 시인이었다. 그는 해방 후 ‘신시론’ 동인에 참여했다가 김경린과 논쟁 후 탈퇴하여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으며, 결국 월북했다.7) ‘신시론’ 동인들 가운데 김병욱, 임호권, 김종욱은 현실주의를 강조했고, 특히 김병욱은 김경희와 더불어 조선문학가동맹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인 반면, 김경린과 박인환은 모더니즘을 추구하려는 입장을 견지하는 쪽이었다.
이 대립의 결과 김경희, 김병욱, 김종욱이 탈퇴하고 《신시론》 2집에 해당하는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는 김경린, 김수영, 박인환, 양병식, 임호권 등 5명만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이후에 김경린이 주도권을 쥐자 이에 김수영, 양병식, 임호권 등이 불만을 제기했고, 급기야 김경린은 박인환과 함께 김규동, 김차영, 이봉래, 조향, 이한직, 이상로 등을 규합하여 새로운 동인인 ‘후반기’를 결성했다.
그럼에도 ‘후반기’는 단 한 권의 문학적 성과도 산출하지 못한 채 1953년 여름 무렵 해체를 결정하게 된다. 이 과정에 대한 조향의 회고8)에 따르면, ‘후반기’의 해체는 전적으로 임시수도 부산에서의 정치파동 때문이었다. 당시 이승만의 공보비서였던 시인 김광섭이 문총구국대의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로 대다수의 문인예술가들은 물론 ‘후반기’의 동인들 또한 여당 편에 관계하고 있었다.
회고에서 조향은 문인들이 현실정치에 개입하는 이러한 사태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후반기’의 해체에 찬성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의 사실 여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9)
하지만 김규동의 회고10)에 따르면 조향이 ‘후반기’ 동인이 기성문단과 타협하고 저널리즘에 영합하는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던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그리고 ‘후반기’ 동인들의 문학적 지향이 김병욱 등의 현실주의와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모더니즘’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정치와 거리를 두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저간의 사정이 이러했기에 ‘신시론’과 ‘후반기’를 ‘모더니즘’이라는 측면에서 연속적으로 이해하는 태도는 수정되어야 하며, 더욱이 박인환의 초기 시에서 드러나는 현실주의적 경향을 조선문학가동맹이나 남로당과 연결시켜 해석하려는 최근의 태도 또한 재고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신시론’ 해체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논쟁의 한 축이었던, 박인환이 지지했던 모더니즘이란 무엇이었을까? 박인환의 초기 시에서 드러나는 현실주의적 지향과 그가 지지했던 모더니즘은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을까? 박인환의 초기 시에서 목격되는 현실주의적 지향의 성격과 배경을 살피기 위해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박인환과 남로당, 조선문학가동맹의 관계가 아니라 그가 초기에 영향을 받았던 모더니즘의 실체이다.
3. 오든 그룹의 모더니즘과 박인환의 시
현대 시가 지금까지 봉착하지 못한 시대에서 누구를 막론하고 피 흘리며 싸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뛰어나온 시, 가장 주관이 명백하고 유행에서 초탈한 시, 공통된 감정을 솔직하게 전하여 주는 시, 이러한 시만이 거부할 수 없는 조선의 현대 시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날의 레토릭과 스타일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인들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암만 새로운 의욕과 정치성에 몸소 겪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현대의 시인으로서는 완전한 의미의 퇴보를 하고 있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11)
박인환을 둘러싸고 있던 동시대인들의 증언을 따르면 박인환의 문학적 출발점은 분명 모더니즘이다. 그러나 1948년 무렵에 그가 발표한 산문들을 살펴보면 이 시기 그의 문학은 ‘모더니즘’보다는 전후 유럽의 사상에 한층 매료되어 있었던 듯하다. 일제 말기의 지식인들, 특히 역사철학자들이 그러했듯이 박인환 또한 양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그리고 전체주의의 등장이라는 세계사적 맥락에서 자신의 시대를 이해했고, 이러한 시대적 소명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것이 ‘현대시’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편으로는 ‘자연발생적 시인’과 ‘필연적 시인’을 구분하고, 또 한편으로는 현대시가 “지난날의 레토릭과 스타일의 세계”에서 벗어난 현대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창조정신이란 곧 인민의 것이요 여러 가지의 우리의 소유임에 틀림없다.”라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이 ‘인민’이라는 단어는 해방기 좌파 문인들이 사용했던 의미에서의 그것이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적절하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1948~1949년, 그러니까 《신시론》 1집에서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이르는 시기에 박인환의 담론이 ‘인민’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거쳐 ‘시민정신’으로 나아갔다는 것.
둘째, 이 인용문이 작성된 당시 박인환은 《신시론》 1집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
이 두 가지 맥락을 고려할 때, 박인환이 사용한 ‘인민’이라는 단어는 해방기
모더니스트를 포함한 대다수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사용했던 넓은 의미의 개념이었거나, ‘시민’의 동의어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박인환은 현대시는 “새로운 의욕”과 “정치성”에 직접 몸을 담는 것으로는 획득될 수 없다고 말하고, 현대시의 창조정신이란 ‘인민’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지난날의 레토릭과 스타일의 세계”란 식민지 시기동안 주류적 위치를 점했던 전통 서정적 경향을 가리키며, “새로운 의욕”과 “정치성”이란 조선문학가동맹의 문학을 일컫는 것이다. 즉, 박인환은 조선의 현대시는 지난날 한국시를 양분해왔던 두 경향 모두를 비판하면서 “형상적 생명에 현실적 정신을 부합”시키는 데서 그 대안을 찾는다.
알려진 것처럼, ‘신시론’과 ‘후반기’ 시기에 박인환은 1930년대 영국 모더니즘 문학의 영향권에 있었다. 훗날 그는 “나는 오래전부터 S. 스펜더의 시 작품과 그 문예 비평 또한 그의 시인으로서의 사회적 참가에 크게 공명한 나머지 해외의 시인으로서는 그의 오랜 친우인 W.H. 오든과 아울러 가장 존경했고 건방진 표현이긴 하나 크게 영향을 받은 바 있다고 스스로 자부”12)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물론, 오든이나 스펜더를 국내에 소개한 것이 박인환이 처음은 아니었다. 1930년대에 김기림, 최재서, 정인섭, 박용철, 김두용, 이종수, 김인석, 임학수, 이호근, 김광섭 등이 오든 그룹의 모더니즘을 국내에 소개했는데, 오든 그룹의 모더니즘은 1920년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엘리엇이 1930년대에 접어들어 보수화되는 과정에서 그 대안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엘리엇의 모더니즘과 달리 1930년대 오든 그룹의 모더니즘은 전체주의의 출현이나 스페인
내전 같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등장했고, 그 과정에서 시의 자율성과 정치성을 소리 높여 주장했다.
1930년대에 국내에서 당대 영국 시인들이 소개되던 일반적인 방식은 이들이 엘리엇과 조이스로 대표되는 1920년대의 모더니즘 이후 새로운 세계정세 특히 유럽의 전체주의의 출현 등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면서 1920년대의 모더니즘을 지양하고 ‘사회주의적’ 혹은 ‘공산주의적’ 문학을 제시하고 있던 경향에 주목하는 것이었다. 또는 다른
한편에서는 김기림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최재서가 리차즈에 기대어 ‘시’와 ‘신념’의 문제를 다루며 이들이
1920년대 모더니즘의 계승자임을 더욱 강조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전자의 방식으로 1930년대 당시의 영국시단에 대해 소개를 하며 이들의 시를 직접 언급한 이들은 정인섭, 박용철, 김인석, 그리고 임학수 등이다. 이들은 스펜더, 오든, 데이 루이스를 소개하는 데 있어서 각기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당대의 영국 시인들이 ‘사회적 관심’을 더 많이 표현하고 있으며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노력 혹은 희망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공통점을 보인다.
13)
일찍이 김기림은 “영국의 현대시에서는 엘리옷트의 작품에 일관해서 현실의 반영이 농후한 것은 오래전부터 〈뉴우·씨그내튜어〉 〈뉴우·컨튜리〉에서 출발한 젊은 시인들은 이러한 소극적인 관심에조차 불만을 품고 보다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대전 이후의 영시에 변혁을 가져오면서 잇지안는가?”14)라고 말하면서 엘리엇의 모더니즘과 오든 그룹(뉴컨트리)의 모더니즘을 분명하게 구분했고, 전자에 비해 후자가 ‘사회적 관심’을 더 많이 보였다고 지적했다. 김기림은 해방 이후에 출간한 세 권의 단행본에서도 오든, 데이 루이스, 스펜더를 빠뜨리지 않고 번역해서 실었다. 박인환은 김기림의 모더니즘이
“에즈라 파운드에서 출발”15)했다고 지적―이것은 사실이다―했지만, 정작 김기림이 1930년대 영국시인들의 시를 인용할 때에는 엘리엇과의 비교 우위라는 관점을 숨기지 않았다.
오든은 1930년대 초반 공산주의에 근거한 일련의 시들을 창작했다.
물론 오든이 선택한 공산주의는 소비에트의 그것이 아니라 파시즘과
전체주의가 도래하는 상황에서 유럽의 지식인들이 선택했던 대안적인 의미의 사상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예상 외로 그것의 생명력 또한 짧았다.
실제로 오든과 스펜더는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지만, 오든은 앰뷸런스 운전병으로 참전했다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뒤 두 달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의 귀국이 전쟁의 참상에서 비롯되었던 것인지, 파시즘의 대안이라고 믿었던
사회주의가 또 하나의 전체주의라는 인식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든 그룹의 공산주의/모더니즘은 1930년대의 역사적 시간을 관통하기에는 지나치게 허약했다.
오든은 1933년 마이클 로버츠가 편집한 《새로운 국가》에 공산주의의 색채가 짙은 〈한 공산주의자가 다른 사람들에게〉라는 시를 실었다. 이 책은 오든의 친구들인 세실 데이 루이스, 루이스 맥니스, 스티븐 스펜더 등이 쓴 공산주의 색채의 시와 산문으로 구성된 책인데 이를 출판함에 따라 이들은 ‘오든 그룹’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1
6) 이들은 공산주의를 당시 경제적 불황과 전체주의에 대한 대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그다지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그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공산주의에 등을 돌렸다. 스펜더의 회고에 따르면, 1930년대 오든 그룹(Auden Group, 스티븐 스펜더, 데이 루이스, 루이스 맥니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등)은 그때까지 문단을 주도해 왔던 버지니아 울프, E.M. 포스터, T.S. 엘리엇 등의 ‘블룸즈버리 그룹(Bloomsbury calss)’을 대신할 야당 예비내각을 구성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있었다.17)
박인환은 ‘신시론’ 시기, 더 정확하게는 《신시론》 1집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간행될 당시에 오든 그룹의 모더니즘을 조선의 현대시가 지향해야 할 대안이라고 믿었고, 오든 그룹의 1930년대 모더니즘의 영향권하에서 일련의 현실주의적 시편들을 창작했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의 서문에 등장하는 “나는 불모의 문명 자본과 사상의 불균정한 싸움 속에서 시민정신에 이반된 언어 작용만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었다. 자본의 군대가 진주한 시가지는 지금은 증오와 안개 낀 현실이 있을 뿐……”이라는 진술은 그가 현실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오든 그룹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박인환은, 오든 그룹이 그러했듯이, 자신을 비롯한 ‘신시론’ 동인들의 모더니즘이 조선의 현대시를 책임질 전위라고 믿었던 것이다. 현대시의 성격과 방향에 대한 박인환의 생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 서
두에 등장하는 “‘후반기’에 속하는 시인의 대부분은 1920년대에 이 불안의 세계에 태어났다.”라는 진술은 정확하게 말하면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서 대공황과 전체주의를 목격하면서 창작활동을 한 오든 그룹의 역사적 위치를 빌려서 ‘후반기’의 역사적 맥락을 규정하려는 시도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은 1920년대에 태어난 ‘후반기’ 동인들의 문학적 방향을 이야기하면서도 식민지라는 조건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는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청년기를 보낸 그들이었지만, 오히려 그들의 모더니즘은 다음처럼 세계사적인 보편성만을 강조할 뿐이다.
(1) ‘후반기’에 속하는 시인의 대부분은 1920년대에 이 불안의 세계에 태어났다. 이들의 어떠한 한 사람도 그들이 성장되고 사고하는 방법이 그 기반을 황폐한 정신적 풍토에 두었다는 것을 부인치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최초의 결합과 종말의 목표는 항시 동일한 지적 불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1922년 구라파의 공황을 초래한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현대 문명과 사회의 불안정, 거기에 붕괴되어 가는 낡은 서구 문화와 그 전통을 그려 낸 T.S. 엘리엇의 〈황무지〉는 발표되었다. (……) 그리하여 현대시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여기서 나는 우리의 지금까지의 옳은 역사와 이념이 영광보다도
불행에 더욱 친밀하였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18)
(2) 구라파의 나치즘과 파시즘의 격렬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시절 이러한 불길한 정세에 직면한 시인들의 당연한 관심은 사상에 또는 정치 경제상의 문제에 경주했다.
더욱이 영국의 젊은 지식적인 시인이 택한 것은 공산주의에 가까웠던 급진적 사회주의의 입장이며 더욱이 이들의 공동의 집결체는 뉴 컨트리파였으며 그중에서도 스티븐 스펜더는 어떠한 다른 시인보다 급진적이었다. (……) 오늘날 현대시의 지배적 요소를 가진 T.S.
엘리엇의 영향 아래 자라난 뉴 컨트리파의 대표적 시인 S. 스펜더는 193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국에서 가장 문제되는 시인일 뿐 아니라 그의 현대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적 시 작품은 전 세계에 공감을 주었다.
그리하여 이것이 일본에 있어서는 ‘신영토’ 이후의 현대시로 전개되었고 한국에 있어서는 김기림 이후의 새로운 시로써 그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19)
박인환 자신이 “엘리엇의 영향을 입은 두 사람의 현대시의 개척자 오든과 스펜더의 단편을 소개하는 데 조그마한 가치”를 두고 있다고 자평한 (1)은 1952년 6월 〈주간 국제〉의 ‘후반기 특집’에 실린 산문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단순히 오든 그룹의 두 시인을 소개하는 글이 아니라 후반기의 문학적 의미를 오든 그룹의 그것과 나란하게 높
임으로써 자신들의 문학이 위기와 폐허의 역사적 시간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으며,
나아가 엘리엇 이후의 모더니즘과 맞닿아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글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 박인환은 글의 첫머리에 C.D. 루이스의 산문을 인용하고, 다음으로
오든 그룹의 모더니즘과 ‘후반기’의 모더니즘이 동일한 역사적 지평 위에 놓여 있음을 밝히고 있다.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주장의 배면에는 세스토프의 ‘불안/비극’의 철학이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러한 논의는 “오든은 그의 사회적인 책임은 시를 쓰는 데 있고 인간에 성실하려면 이 세계 풍조를 그대로 묘사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오든뿐만이 아니라 현대시의 발전을 위하여 한국의 일각에서 손가락을 피로 적시며 시의 소재와 그 경험의 세계를 발굴하고 있는 ‘후반기’ 멤버의 당면된 최소의 의무일지도 모른다.”라는 주장을 향해 나아간다.
(2)에서 박인환은 스펜더의 급진적 사회주의가 구라파에 등장한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한 유럽 지식인들의 대응이라는 맥락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는 한편, 엘리엇 이후의 모더니즘을 “김기림 이후의 새로운 시”와 연결시킨다. 당시 박인환은 오든 그룹의 등장이 지닌 역사적 맥락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고, 같은 맥락에서 김기림 이후의 모더니즘이 자신을 비롯한 ‘신시론’ ‘후반기’ 동인들에게 주어진 역할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박인환은 김기림이 “에즈라 파운드에서 출발”했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역사적 한계를 지적했고, 김기림과 이상의 모더니즘을 “유물적 가치밖에 없다”20)고 폄하했다. “현대의 정치와 사회의 심연에서 허덕이는 인간의 정신과 행위를 노래한” 오든 그룹의 모더니즘을 계승한다고 자부했던 박인환에게 1930년대의 모더니즘이란 이미 낡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상 씨에게는 한국적인 오리지널리티는 있었으나 기림 씨는 외국 문학의 소개와 그들의 시의 스타일을 이식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 무렵과 같이 고집과 보수가 횡행하던 시대에 있어서 그들은 작은 혁명가이며 저항자라고 훌륭히 여기나 시의 가치는 오늘에서 보면 높은 것이 못 됩니다. 기림 씨는 더욱이 시를 과학에 접근시키려고 애를 썼는데 시를 과학과 혼합시키고 과학이 시를 지배하는 듯 말한 것은 유치천만이며 큰 착각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박인환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한국전쟁 이전의 그의 모더니즘 또한 오든 그룹의 스타일의 이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김수영이 박인환의 시를 “‘포즈에 불과한 코스츔”이라고 비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김수영 또한 오든 그룹의 모더니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21)
4. 모더니즘의 현실주의와 그 한계
나는 불모의 문명 자본과 사상의 불균정한 싸움 속에서 시민정신에 이반된 언어 작용만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자본의 군대가 진주한 시가지는 지금은 증오와 안개 낀 현실이 있을 뿐…… 더욱 멀리 지난날 노래하였던 식민지의 애가(哀歌)이며 토속의 노래는 이러한 지구(地區)에 갈앉아 간다.22)
박인환은 1949년 4월 《신시론》 2집에 해당하는 앤솔로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다섯 편의 시를 발표했는데, 이 시편들은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시인의 시로서는 상당한 현실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추측건대 이러한 시적 경향은 박인환이 해방기라는 역사적 시간과 사회성이 짙은 오든 그룹의 모더니즘 양자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스티븐 스펜더의 시를 인용한 〈열차〉는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관습과/ 봉건의 터널 특권의 장막을 뚫고/ 피 비린 언덕 너머 곧/ 광선의 진로를 따른다”처럼 중세의 터널을 통과하여 현대를 향해 달려가는 진보의 시간을 현대의 바로미터인 ‘열차’로 형상화하고 있으며
〈인천항〉은 “성조기가 퍼덕이는 숙사와/ 주둔소의 네온사인은 붉고/ 정크의 불빛은 푸르며/ 마치 유니언 잭이 날리던/ 식민지 향항의 야경을 닮아간다”처럼 해방기의 정치적 현실을 신식민주의적 시각에서 그리고 있다. 그리고 〈남풍〉에서는 “아시아 모든 위도/ 잠든 사람들이여”라고 ‘월남 인민군’을 호명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에서는 “사랑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고대 문화의 대유적
보로두루드의 밤/ 평화를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가물란에 맞추어 스림피로/ 새로운 나라를 맞이하여라”처럼 네덜란드의 식민화 정책에 저항하는 인도네시아 인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에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들은 일견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주의를 연상시킬 정도로 급진적인 것이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확인되듯이 ‘시민정신’을 그 척도로 삼고 있다.
박인환이 이 서문을 쓸 당시는 이미 ‘신시론’ 내부에서 문학적 방향을 두고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던 듯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앤솔로지는 《신시론》 2집으로 발간되었을 것이다. 인용문에서 박인환은 현대,
즉 해방기의 모더니즘이 서 있는 역사적 위치를 “불모의 문명 자본과 사상의
불균정한 싸움 속”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정신에 이반된 언어 작용”만의 문학은 어리석다고 말한다.
이것은 전체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공황 앞에서 20세기의 모더니스트, 즉 오든 그룹의 모더니즘이 겨냥하고 있었던 현대성의 방향과 일치한다. 모더니즘이란 문명(도시)의 자식이지만, 정확하게 자본과 문명에 대한 비판적 정신 속에서 싹튼 것이다. 따라서 ‘자본’ 운운하는 대목을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읽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음으로 “자본의 군대가 진주한 시가지는 지금 증오와 안개 낀 현실이 있을 뿐”이라는 대목은 김병욱이 《신시론》 1집에 실었던 〈바람〉의 일절(“밤이 등불을 헤쳐 내리듯이/ 모든 자본이여 이윤이여/ 내일 아침에는 전파(電波)가 나를 잡을 것을 알고 있다”)처럼 혼탁한 시대상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박인환은 자신을 비롯한 동시대 모더니스트의 문학이 이러한 비극적 현실을 배경으로 등장했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그 비극적 현실 속에서 “지난날 노래하였던 식민지의 애가(哀歌)이며 토속의 노래는 이러한 지구(地區)에 갈앉아 간다”라는 사실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의 오든 그룹의 등장이 그러했듯이 문학사의 필연이었다. 즉 해방기 모더니즘의 등장은 ‘청록파’로 상징되는 자연친화적 서정시나 에즈라 파운드류의 이미지즘에 근거하고 있는 김기림의 모더니즘이 더 이상 시대의 조류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 박인환의 모더니즘은 그의 사후인 1957년에 발간된 다이알 동인의 합동시집 《현대의 온도》로 이어진다. 박인환이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자신의 시를 발표할 때 붙인 제목이 ‘장미의 온도’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김경린, 김차영 등에 의해 주도된 이 책의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인환의 이러한 모더니즘적 비전은 해방기의 혼란은 버틸 수 있었지만 ‘전쟁’이라는 절망의 시간을 견디지는 못했다. 김규동의 회고(“한국전쟁이 일어나 우리와 같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나가 죽어 가는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래서 되겠는가, 현실이 이러한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공포가 드는 거예요.”)가 증명하듯이 모더니즘은 ‘전쟁’이라는 비극적 시간 앞에서 무력했다.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해방기의 좌익 문인들에게는 ‘월북’이라는 선택지가 존재했지만, 남쪽에 남은 모더니스트들에게 ‘전쟁’은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다가왔다. 모더니즘적 ‘시민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던 박인환 초기 시의 현실주의적 경향은, 그리하여 전쟁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변모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그는 종군작가단과 종군기자로 참여함으로써 점차 반공주의자로 모습을 바꾸어 나갔고, 전후에는 ‘죽음’의 세계 속에서 “풍토와 개성과 사고의 자유를 즐겼던 시의 원시림”을 발견하려 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점령군의 깃발인 성조기가 나부끼는 인천항의 야경을 노래하던 청년은 어느덧 〈이 거리는 환영한다―반공 청년에게 주는 노래〉의 시인이 되어 있었고,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새로운 나라를 맞이하여라”라고 외쳐대던 그의 목소리는 “적을 쏘라/ 침략자 공산군을 사격해라”(〈신호탄〉)라는 반공주의자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다. 1951년 3월의 일이었다.
고봉준 | 문학평론가.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 《다른 목소리들》 《유령들》이 있음. 고석규비평문학상 수상. 현재 웹진 《문장》 계간 《딩아돌하》 계간 《문학 선》 편집위원.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