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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
몇 년 전 한국에서 영화 <왕의 남자>가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상영될 당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어떤 마니아는 이 영화를 혼자서 45번이나 보았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서 무명이나 다름이 없던 이준기라는 남자배우가 일약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또 <왕의 남자>를 패러디하여 이 영화에 나오는 대사를 여러 정치인들이 사용하기도 하고, <왕의 남자>를 패러디한 유머들이 사람들의 입술에 오르내리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를 소개하면, 한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학생들이 숙제를 해왔는데, 두 학생이 똑같은 답을 썼고 글씨도 비슷했습니다. 선생님이 두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둘 중에 누가 베낀 거냐?” 그러자 한 학생이 잡자기 옆 친구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놈이 나에게 언문을 배웠소. 내 글자를 보고 따라했으니, 글씨체가 똑같은 것은 물론이요, 하물며 그 내용도 같지 않겠소.” 이것은 영화 <왕의 남자>에서 나오는 대사입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에피소드가 생길 정도로 이 영화가 빅 히트를 쳤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영화가 관객 1,200만 명 이상을 돌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만, 저도 어느 분이 한국에서 빅 히트를 쳤다고 하며 빌려주어서 비디오로 만들어진 이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 영화가 다른 영화에 비해서 특별히 많은 돈을 들인 것도 아니고, 또 유명 스타급 배우가 출연한 것도 아닌데 전혀 예상치 않게 빅 히트를 쳤습니다. 그 이유를 어떤 비평가는 꽃미남 배우가 여자 광대로 분장한 ‘공길’이의 이미지가 젊은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비평가는 노골적이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성적인 풍자모습이 젊은 관객들을 뛰어넘어 중장년 관객들에게까지 어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전문가들은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과거 역사를 돌아보면 왕은 곧 법이요 하늘이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왕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 권력자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왕의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광대들, 특별히 공길이를 통해 왕의 마음이 움직인 것을 보고 관객들이 대리만족을 느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영화 <왕의 남자>에서처럼 왕의 마음을 움직인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영화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광대 공길이가 연산군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것처럼,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공길이와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꽃미남 배우 공길이는 광대놀이를 통해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어떻게 해서 느헤미야가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까요? 더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떻게 해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말썽부리는 자녀의 마음이나, 서로 갈등하고 있는 아내나 남편이나 부모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또 사업을 하다보면 거래처 사람의 마음이나, 직장에서는 서로 팀웍이 맞지 않는 동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또 전도하려고 하는 태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느헤미야처럼 우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크게 세 가지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라.
첫째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맡은 일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는 최선을 다하여 아닥사스다 왕을 섬겼습니다. 당시 아닥사스다 왕은 바사제국의 왕입니다. 이 바사제국은 바벨론에 이어 중동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으로 끌려온 이스라엘 포로민의 후손으로서, 바벨론 제국에 이어 등장한 바사제국의 술관원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보통 술관원은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는 왕의 절친한 친구나 충신 등이 임명됩니다. 술관원은 항상 옆에서 술을 따르며 왕을 보좌하였는데, 단순히 술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논하며 섬기는, 오늘날로 말하면 비서실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온 후손이자 이민자인 느헤미야가 술관원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술관원이 되어 궁중에 있던 어느 날, 그의 형제 하나니가 조국의 처참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고국이 위기에 처했고 고국에 있는 동포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근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얼굴로 표현된다고 그의 근심은 얼굴로 나타났습니다.
다같이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당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왕 앞에서는 자기의 감정을 노출시켜서는 안 됩니다. 왕 앞에서 신하들은 항상 밝은 표정을 지어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밝은 얼굴로 왕을 대하는 것 자체가 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높인다는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왕 앞에서는 언제나 밝은 얼굴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요즘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마 인상 쓰는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상을 팍팍 쓰는 얼굴보다, 웃는 얼굴을 좋아합니다. 만약 두 눈에 힘을 준 채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을 보면, ”도대체 저 사람은 나에게 무슨 섭섭한 마음이 있어서 저렇게 인상을 쓰는 거야.”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게 인상을 쓰는 사람을 만나서 기분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재수 없다‘고 인상 쓰는 사람을 아예 피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들은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 시간 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웃으며 삽시다.” 다시 한 번 인사하겠습니다. “웃으니까 좋아 보이십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누구든지 왕 앞에서는 슬픈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왕후가 참석한 기쁜 파티 장소에서 술관원이 슬픈 얼굴로 술시중을 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근심어린 얼굴을 하고 왕의 술시중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죽기를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느헤미야의 행동은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행동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닥사스다 왕이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라고 느헤미야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본문 2절 하반절을 보면,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느헤미야는 자신이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왕을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근심하고 있는 느헤미야를 당장 끌어내라고 신하들에게 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엇 때문에 근심하고 있느냐‘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느헤미야에 물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호의는 이것뿐이 아닙니다.
다같이 4절을 보겠습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여기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는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느헤미야의 고민을 다 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너 혼자 걱정하지 말고
자세하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질문하겠습니다.
화를 내며 ”당장 느헤미야를 끌고 나가라”고 명령을 내려야 할 아닥사스다왕이 이러한 호의를 베푼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느헤미야가 평상시 왕에게 신임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심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느헤미야를 본 왕이 오히려 느헤미야의 건강을 걱정하며 그에게 소원을 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왕의 사랑과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방인이 왕의 총애를 받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방인인 느헤미야가 왕의 사랑과 신임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는 평소에 성실하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왕의 신임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왕을 섬기되 최선을 다해 섬겼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그는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그의 성실함이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인도의 ‘마라티’라는 왕국에 한 젊은 왕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궁궐 안을 산책하고 있는데, 한 어린 하인이 왕자의 신발을 가슴에 꼬옥 껴안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습니다. 이 어린하인은 왕자님이 언제든지 따뜻한 신발을 신을 수 있도록 신발을 가슴에 꼬옥 껴안고 잠들었던 것입니다. 왕자는 어린 하인이 작은 일에도 성실하게 마음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중대한 일을 맡겨도 틀림없이 잘 해낼 것이라고 믿고 그 어린 하인을 친위대원으로 발탁했습니다. 마침내 왕자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는 일사천리로 출세가도를 달려, 훗날 군사령관이 되어 그의 명성은 인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22절과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계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눈가림만 하는 사람들과 달리, 성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최선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느헤미야처럼 주위 사람의 마음을 얻기 원한다면, 주님 섬기듯이 최선을 다하여 주위 사람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주님 대하듯이 성실하게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들의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 섬기듯이 성실하게 대할 때 직장 동료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주님 섬기듯이 성실하게 대할 때 학교에서 힘들게 하는 친구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주님 섬기듯이 성실하게 대할 때 가족간의 갈등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처럼 맡은 일에 성실하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처럼 주님 섬기듯이 최선을 다하여 주위 사람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2) 기도하며 기다리라.
둘째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니로부터 조국이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가 어떻게 한 줄 아십니까?
느헤미야 1장 4절에서,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 동안 기도하며 기다린 줄 아십니까?
느헤미야 1장 1절을 보면,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 월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기슬르월’은 11월에서 12월경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니산월’은 4월입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12월부터 4월까지 적어도 4개월 이상 기다렸습니다. 그는 기도하며 기다렸고,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4개월이 지나도록 기도하며 기다린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허락하지 않으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역사자료에 따르면 아닥사스다 왕은 아주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에스라 4장 7절부터 23절을 보면, 아닥사스다 왕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허위 고소에 속아 이미 예루살렘 성벽을 쌓지 못하게 금지조서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이 내린 조서를 뒤집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하면 그 백성이 강해져서 세금을 내지 않을 것이고, 나중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바사제국에 반항할 것이라는 사마리아인들의 말을 믿고 성벽재건 금지령까지 내린 왕을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4개월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완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4개월 동안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그가 4개월 동안 응답을 받지 못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느헤미야는 포기하지 않고 기도를 계속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왕은 느헤미야의 근심어린 얼굴을 보았음에도 화를 내기보다,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고 느헤미야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느헤미야처럼 인내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응답이 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면서 기도해야할 줄로 믿습니다.
한 꼬마가 닭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닭장 안에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까기 위해서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 시간이 갈수록 꼬마는 초조해졌습니다. 언제쯤이면 병아리가 나올까, 그것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꼬마는 암탉이 품고 있던 알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곤 알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알에서 병아리가 나올 줄 알았던 꼬마는 깜짝 놀랐습니다. 계란 안에서는 채 모습을 갖추지 못한 병아리가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 민족은 여유가 있고 매사에 인내할 줄 아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빨리 빨리‘를 외치는 소리가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조급병에 걸린 사람처럼, 식당에 가도 '아줌마, 빨리 주세요!'를 외치고, 차를 타서도 '기사양반, 빨리 갑시다.'를 외치고, 건축현장에서도 ’어이 뭘해. 빨리 하지 않고.‘를 외칩니다. 신호등이 바뀌었는데도 앞차가 움직이지 않으면 ’빵빵!‘ 크락숀을 누르며 ”야 XX야! 지금 뭐하는 거야. 빨리 가지 않고.“라고 소리칩니다.
주위에 보면 마치 병아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알을 깨뜨려버렸던 그 꼬마처럼,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애굽의 총리대신에 오르게 하기 위해 요셉으로 하여금 13년이란 세월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해 모세를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곧바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한 동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3년 동안의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무려 30년 동안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2: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응답이 올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며 기다리고, 기다리며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 30장 18절에서 ”그러나 야훼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야훼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러분, 누가 기다립니까?
야훼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줄로 믿습니다.
왜 야훼 하나님께서 기다리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까?
그를 기다리는 자, 즉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이 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한 후 기다리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한다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감람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 모여 있던 사람은 500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성령침례를 기다린 사람은 120명뿐이었습니다. 500명 중 380명은 중간에 포기해버리고 120명만 남아 간절하게 기도한 끝에 120명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380명처럼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120명처럼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장 거래처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당장 말썽을 일으키는 자녀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당장 아내와 남편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당장 친구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4개월을 기도하며 기다렸던 느헤미야처럼,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 끝에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였던 느헤미야처럼, 끝까지 기도하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것입니다.
3) 계획을 세우고 미리 준비하라.
셋째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우고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가 기도하며 기다리면서 행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자세하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소원을 말했습니다.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5절)
그러자 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유다까지는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유다에 가면 언제쯤 돌아올 수 있느냐“ 그런데 6절 하반절에서 ”왕이 나를 보내시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이미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데 소요될 시간을 산출해 놓고 있었습니다.
또한 7절과 8절을 보면 그가 4개월 동안 어떻게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에게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그는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왕에게 조서, 즉 통행증명서를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또한 무너진 성과 불타버린 성문을 재건하고 총독인 자기가 들어갈 집을 건축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재목들을 얻기 위하여 삼림감독인 아삽에게 조서를 내려달라고 구체적으로 요청합니다.
이것으로 볼 때, 느헤미야가 4개월 동안 기도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을 때를 대비하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의 이 모습을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되,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을 때를 대비하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기는 하는데, 계획을 세우지도 않고 미리 준비하지도 않습니다. 왜 준비하지 않느냐고 하면 “어떻게 되겠지요,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때 가서 계획을 세우면 될 거예요.”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꿈만 꾸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꿈을 꾸며 계획을 세우고 미리 준비하는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미리미리 준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창세기 22장에 보면, 모리아산에서 가서 아들을 번제로 받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아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대신해 제물로 바쳐질 어린 양을 손수 준비해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 아브라함은 그 장소를 ‘야훼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The Lord will provide“ 다시 말하면 ‘공급하시는 하나님‘ 혹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달리 미리 계획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미리미리 준비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지구촌교회의 이동원목사님의 글에서 재미있는 예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아들 모두 개를 기르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 모두 개꿈을 꿉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꿈만 꾸는데 반해, 다른 한 아들은 개꿈을 꾸며 개집을 설계하고 짓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버지로서 한 아들에게만 개를 사주어야 한다면, 어떤 아들에게 개를 사주시겠습니까? 개꿈만 꾸는 아들에게 개를 사주겠습니까? 아니면 개꿈을 품고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아들에게 사주겠습니까? 당연히 소원을 품고 개집을 준비하고 있는 아들에게 개를 사줄 것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하나님도 응답이 주어졌을 때를 대비하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응답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비전을 발견하지 못한 분들은 성령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비전을 발견했으면, 그 비전에 따른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과 소원이 생겼으면, 그 꿈과 소원에 따라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당장 말썽을 일으키는 자녀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당장 아내와 남편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당장 친구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그들의 마음이 바뀔 것을 기대하며 느헤미야처럼 미리 믿음으로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당장 거래처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바꿔주실 줄로 믿고 느헤미야처럼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또 전도하려고 하는 태신자들의 마음이 아무리 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바꿔주실 줄로 믿고 초청장을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아직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처럼 주님 대하듯이 최선을 다하여 그 사람을 대하고, 느헤미야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고 기다리되,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실 것을 믿고 미리 준비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